불교교리(佛敎敎理)의 핵심(核心)

2014. 8. 12. 14:57佛敎

불교교리(佛敎敎理)의 핵심(核心)

1. 釋迦牟尼 당시의 思想界

(1) 正統 婆羅門 思想 - 우파니샤드 哲學(轉變說, 因中有果論, 梵我一如, 一元論的 汎神論)태초에 범(梵)이라는 신이 있어 이것이 열을 일으켜 三界(天, 空, 地)·三神·三吠陀·三光明을 차례로 낳고 일체를 성립시킨 다음, 그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즉 하나(有)가 轉變하여 많은 것이 되고, 또 그 하나가 또 그 많은 것 속에 들어가 本質이 되었다는 입장이다.

태초에 유일한 有가 있어서 그것이 욕심을 일으켜 地·水·火·風의 사대요소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화합하여 복합물을 만들고 이 속에 그 有가 命我(jiva, 非命我(ajῑva), 즉 살아 있지 않은 실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살아 있는 실체 또는 영혼)의 상태로 들어가 名色(五蘊)이 되고, 一切가 형성되었다. 梵은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임과 동시에 우주의 본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의 자아와 梵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梵我一如의 智에 의해 禪定을 닦음으로써 인간은 괴로운 生死의 輪廻로부터 解脫할 수 있다고 說하였다.

(2) 革新的인 沙門들의 思想

바라문의 轉變說에 대해 積聚說을 주장하여 수행방법도 積聚說에 어울리는 苦行을 주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한 대표적인 6인의 사상가들을 六師外道라 부른다.

1) 六師外道

① 푸라나 캇사파 - 道德否定論

② 파쿠다 캇챠야나 - 七要素說(靈魂 - 地·水·火·風·苦·樂·生命)

③ 막칼리 고살라 - 宿命論(邪命派, 靈魂은 物質的 요소라고 본 唯物論的 입장)

④ 아지타 케사캄발린 - 唯物論者(快樂論의 입장)

⑤ 산자야 벨라티풋타 - 懷疑論(不可知論)

⑥ 니간타 나타풋타 - 자이나교

2. 거룩한 誕生

(1) 佛陀 -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진리를 올바르게 깨달아 證得한 사람

(2) 카필라국 숫도다나왕(淨飯王)과 마야 王妃의 太子로 誕生(釋迦誕辰日)

(3) 마야부인의 친정인 콜리성을 향하는 도중, 새벽녘에 룸비니동산 무우수(無憂樹, aśoka 나무) 아래에서 탄생

(4) 誕生偈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此生爲佛生 則爲後邊生 我唯此一生 當度於一切

(5) 아시타 선인 - 장차 轉輪聖王이 되어 천하를 正法으로 다스리게 될 것, 출가하여 수행의 길에 나선다면 도를 이루어 세상에 둘도 없는 진리를 證得한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예언

(6) 西紀 1956년을 세계불교도대회에서 불멸 후 2,500년으로 정하였다.

(7) 7일 만에 마야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이모 마하파자파티고타미에 의해 成長

(8) 閻浮樹 아래의 靜觀 - 세상의 덧없음과 근본적인 人間苦에 대한 것

(9) 四門遊觀 - 東門(老), 南門(病), 西門(死), 北門(출가수행자, 최상의 행복이라는 泥洹, 涅槃이라는 소리를 듣다.)

(10) 석가족의 콜리 성주의 공주인 야소다라와 結婚하여 라훌라를 낳다.

(11) 踰城出家 - 29세, 2월 8일(出家齋日), 마부(차익, 찬타카), 애마(칸타카) 帶同

3. 修行

(1) 발가바 - 苦行主義者(天上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苦行)

(2) 拜化主義者

(3) 알라라칼라마 - 禪定法에 의하여 수행하는 수정주의자(無所有處가 목적)

4) 웃다카 라마풋다 - 禪定法에 의하여 수행하는 수정주의자(非想非非想處가 목적)

(5) 가야 네란자라 근처 苦行林 - 天上이 목적이 아니라, 精神的 自由를 얻기 위한 육체적 고행

부처님께서 맨 처음에 고행외도(苦行外道)인 발가바(Bhargava) 선인에게 가서 가지가지의 심각한 고행을 했는데, '고행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부처님께서 물었을 때, '범천(梵天)에 나는 것'이라고 함으로 '그러면 하늘에 나는 것은 영생(永生)을 하고 人生苦를 다 벗어나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되물으니까, '梵天에 난다 하더라도 역시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 복이 다하면 다시 墮落한다고 대답하니까,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生老病死를 永遠히 떠나는 것이요, 그런 하늘에 태어나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하고, 발가바 선인을 버리고서 다시 스승을 찾아간 것이 아라라카르마이다.

아라라카르마(Alarakalma)는 이른바 수정주의(修定主義)자로서 禪定에 드는 공부를 하는 外道의 스승이었다. 부처님은 그에게 '대체 어떤 공부를 하느냐?'고 묻자 '無色界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닦는 것'이라고 하였다.

無所有處는 無色界의 세 번째 하늘이니 매우 높은 경계로서, 부처님께서는 벌써 욕심을 떠난 단계이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자기 스승과 같은 정도로 無所有處까지 들어가는 삼매(三昧)를 발득(發得)했다. 無所有處에 들어가 보니 재미가 있고, 쾌락도 있으며 分別妄想은 거의 가셨으나, 아직은 삼계내(三界內)이기 때문에 解脫의 법락(法樂)은 못되어 만족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이 아라라카르마한테 '無所有處까지 들어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니까, '無所有處定을 닦는 것은 모든 괴로움을 떠나 안락하고, 五神通을 얻으며, 死後에는 無所有處 天上에 태어나기 위함이라', '그러면 生老病死를 解脫하고 永生을 합니까?', '永生은 하지 못하고 다만 오백대겁(五百大劫)까지는 살고, 그 뒤에는 다시 떨어지게 된다.'고 대답함으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永生解脫이 목적이라.'하시며, 떠나려 하자 자기 아들로서 자기보다 공부가 한 차원 높은 웃다카라마풋타(Uddaka Ramaputta)에게 찾아가라 하여 그에게 갔다.

웃다카라마풋타에게 가서 '스승님은 대체로 어떤 공부를 하십니까?'하니, '나는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지나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증득(證得)하는 공부를 한다.'고 하였다. 다시 물었다.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를 닦는 목적이 무엇입니까?'하니,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태어나서 오랜 세월 동안 천상묘락(天上妙樂)을 누리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다시 세존께서 '그러면 그곳에서는 永生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永生을 할 수는 없고 팔만대겁(八萬大劫)을 살다가 禪定의 福이 다하면 떨어진다.'라고 하였다. 세존께서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生老病死를 解脫함인데, 여기도 머물 데가 아니구나. 이제는 스스로 혼자 닦아 나가야겠구나.'라고 생각하고 그곳을 떠나셨다. 세 선인(仙人)들은 그 당시 인도의 위대한 스승이지만, 그들의 법은 三界를 벗어나는 生死解脫의 法은 못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身命을 걸고 坐定을 하신 것이다.

4. 苦行과의 訣別

(1) 無苦安穩의 涅槃을 얻기 위해서 苦行과 訣別, 네란자라 강물에서 몸을 씻고, 근처 마을의 우루벨라 촌장의 딸인 난다발라(수자타)에게서 乳糜粥을 공양 받다.

(2) 中道를 깨달음 - 도를 닦는 데는 향락도 피해야 하지만 고행도 피해야 한다.

5. 成道

(1) 핍팔라(菩提樹, pippala) 나무 아래에서 吉祥草(연부초)를 깔고 명상에 잠기다.

(2) 樹下降魔 - 魔王波旬(데바푸트라, 악마의 왕)의 항복을 받고, 더없이 높고 바르고 참된 平等圓滿의 깨달음인 無上正等正覺(阿耨多羅三藐三菩提)을 이루다.

6. 傳道

(1) 梵天의 勸請으로 衆生敎化에 나서다.

(2) 初轉法輪(鹿苑轉法相) - 바라나시의 鹿野苑에서 콘타냐(阿若憍陳如)등 다섯 比丘(콘타냐, 바파, 바디야, 앗사지, 마하나마)에게 四聖諦와 中道를 설하다.

(3) 佛敎의 出現(敎團의 成立) - 佛·法·僧 三寶의 성립

① 比丘 形成 - 콘타냐(阿若憍陳如) 등 다섯 사람의 귀의

② 婆羅門 집안의 아들인 청년 야사와 그의 친구 50인의 귀의

③ 最初의 優婆塞(淸信士) - 야사의 아버지 구리가 장자의 귀의

④ 최초의 優婆夷(淸信女) - 야사의 어머니의 귀의

⑤ 迦葉 등 三兄弟(우루빈가 迦葉과 그의 제자 500인, 나제 迦葉과 그의 제자 250인, 가야 迦葉과 그의 弟子 250인) 등 1,000 사람의 귀의

⑥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의 귀의

⑦ 앗사지(阿說示, 馬勝)의 말을 듣고 智慧第一의 舍利佛이 神通第一의 친구 目犍連과 스승 산자야의 제자 250명과 함께 귀의

⑧ 아난다, 아난다의 형 데바닷타, 아루눗다의 귀의

⑨ 정반왕, 야소다라, 親戚 등 많은 사람을 교화

⑩ 비구니 형성 - 아난다의 간청으로 養母인 이모 마하파자파티고타미와 500 종녀의 귀의

⑪ 아우 난다, 아들 라후라의 출가, 난다의 아내 순다리의 귀의

(4) 敎化 場所

① 라자가하 竹林精舍 - 마가다국 빔비사라왕 기진

② 라자가하 지바카 동산 - 의사 지바카 기진

③ 베살리 암바팔리 동산 - 암바팔리 기진

④ 코삼비국 고시타 동산

⑤ 舍衛城 祇園精舍 - 제타태자의 숲과 코살라국의 부호 給孤獨長子(수닷타)가 기진,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과 그의 비말리부인의 교화

⑥ 카필라밧투의 니그로다 동산, 바라나시, 베살리, 코삼비 등

⑦ 敎化 地域 - 王舍城, 舍衛城이 가장 中心地이며, 북쪽은 카필라, 남쪽은 바라나시, 동쪽은 참파, 서쪽은 코삼비

⑧ 說法 場所 - 바라나시의 鹿野苑, 마가다국 王舍城의 竹林精舍, 耆闍崛山(靈鷲山), 舍衛城의 祇園精舍와 鹿子母講堂 등

(5) 弟子의 敎化

① 가장 많이 머문 敎化地域 - 舍衛城(사왓티), 王舍城(라자가하), 비사리(베살리) 가비라성(가필라왓투)

② 敎化 活動의 中心地 - 마가다국의 首都 王舍城(라자가하)

③ 王舍城(라자가하)에서 歸依한 重要 人物 - 우루벨라, 나디, 가야의 세 迦葉, 舍利佛, 目犍連 마가다국왕 빔비사라

7. 涅槃

(1) 世壽 80세에 사라쌍수(沙羅雙樹, śāla) 아래에서 열반에 듦

(2) 부처님 최후의 弟子 - 外道 수밧다(여래에게 오는 자를 막지 말라.)

(3) 最後의 遺訓 - 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以戒爲師 不放逸

※ 佛敎 - 七佛通戒偈(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 十力 - 부처님이 지니고 있는 열 가지 지혜의 힘으로 處非處智力, 業異熟智力, 禪定解脫智力(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根上下智力, 種種界智力, 種種勝解智力, 遍趣行智力, 宿住隨念智力, 死生智力, 漏盡智力이다.

8. 過去七佛

釋迦世尊 이전에 이 세상에 나타나셨던 7분의 부처님이다. 過去七佛은 그 부처님이 세상에 나시어 敎化하는 데에 時期的인 차례가 각각 다르다. 일곱 부처님 가운데 비바시불(毘婆尸佛), 시기불(尸棄佛), 비사부불 (毘舍浮佛)의 세 부처님은 과거 장엄겁(莊嚴劫)의 부처님이고,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네 부처님은 현재 현겁(賢劫)의 부처님이다.

8. 三身佛

三身佛은 大乘經論의 대표적인 佛身觀으로 法身佛, 報身佛, 應身佛로 구분한다.

法身佛 - 淸淨法身毘盧那佛

報身佛 - 圓滿報身盧舍那佛

應身佛 - 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

때로는 三身佛을 부처님의 세 가지 몸, 즉 法身·報身·化身을 말하기도 한다.

9. 三念住

(1) 제1念住(衆生이 부처님을 믿으나 기뻐하지 않으며, 항상 바른 마음(正念)과 바른 智慧에 편안히 머무심)

(2) 제2念住(衆生이 부처님을 믿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고, 항상 바른 마음(正念)과 바른 智慧에 편안히 머무심)

(3) 제3念住(衆生이 부처님을 믿거나, 믿지 않아도 기뻐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항상 바른 마음(正念)과 바른 智慧에 편안히 머무심)

10. 如來十號(如-應-正-明-善-世-無-調-天-世)

(1) 여래(如來, Tath gata)란 쉽게 말해서 진리의 체험자라는 말이다. 즉 그렇게 오시고, 그렇게 가신 분이란 뜻이 있으므로 여래(如來)·여거(如去)라는 말로써 설명하고 있다.

(2) 응공(應供)은 아라한(阿羅漢, Arhat)과 같은 뜻이다. 살적이라 하여 번뇌의 적을 죽였다는 뜻이 있으며, 이 외에도 불생(不生)·진인(眞人)·응진(應眞)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3) 정변지(Samyak­Sambuddha)는 불(佛)과 같은 뜻이다. 즉 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변각(正邊覺)·등정각(等正覺) 또는 정각자(正覺者)라고도 불려진다. 즉 一切法을 다 깨달아서 解了通達하여 주변(周邊)치 않음이 없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4) 명행족(明行足)이란 지(知)와 행(行)이 완전한 분이란 뜻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의하면 삼명(三明)과 삼업(三業)을 원만하게 구족했다는 뜻에서 명행족이라 한다.

(5) 선서(善逝, Sugata)는 훌륭하게 완성된 분이라는 뜻인데 호거(好去), 묘왕(竗往) 또는 호설(好說)이라고 번역되하도 한다. 즉 부처님은 여실히 저 언덕에 가서 다시 생사의 바다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6) 세간해(世間解, Lokavit)는 세간을 완전히 아는 분이라는 뜻에서 지세간(知世間)이라고도 번역한다. 세간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세간의 원인과 더불어 그것의 도리를 잘 안다는 말이다.

(7) 무상사(無上士, Anuttara)는 최상의 인간이란 뜻이다. 즉 중생 가운데서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다는 의미이다. 세간이나 출세간을 막론하고 가장 높은 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一切法을 다 통달했기에 이렇게 無上士, 즉 최상의 인간이란 稱號를 듣게 되는 것이다.

(8) 조어장부(調御丈夫, Purusa-damya-sarathi)는 사람을 調御하는 데 있어 훌륭한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大慈와 大悲, 大智로써 중생에게 부드러운 말, 간절한 말 또는 가지가지 말을 써서 조복제어(調伏制御)하여 정도를 잃지 않게 하는 분이라는 뜻이다.

(9) 천인사(天人師)는 인천(人天)의 대도사, 또는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란 말이다. 즉 선과 악을 잘 가르쳐서 도법에 의지하여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게 하는 분이란 뜻이다.

(10) 세존(世尊, Bhagavat)은 복덕을 갖춘 분, 또는 높으신 스승님의 뜻이 있다. 이를 유공덕 (有功德)·파정지(破淨地) 등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여러 가지 덕을 구족하고 있으므로 인천과 세상의 공경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상 十號에 불(佛, Buddha), 즉 부처님을 넣으면 11호가 되지만 이들을 통상 十號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름 외에도 부처님은 불타(佛陀)·대사(大師)·도사(導師)·모니(牟尼)·대선(大仙)·일체지(一切知)·복전(福田)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11. 四無所畏

부처님과 보살은 중생들을 교화할 때 네 가지 두려움 없는 자신감으로 說法을 하는데, 여기에 부처님의 四無所畏와 보살의 四無所畏가 있다.

부처님의 사무소외(四無所畏)는 ① 正等覺無畏(一切智無所畏, 나는 一切法을 깨달았다.)는 두려움 없는 자신 ② 漏永盡無畏(漏盡無所畏, 나는 일체의 번뇌를 모두 끊었다.)는 두려움 없는 자신 ③ 說障法無畏(說障道無所畏, 나는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것을 모두 말했다.)는 두려움 없는 자신 ④ 說出道無畏(說盡苦道無所畏, 나는 괴로움의 세계에서 벗어나 解脫에 이르는 길을 모두 말했다.)는 두려움 없는 자신 등이다.

보살의 사무소외에는 ① 能持無所畏(敎法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하여 설법함에 두려움 없는 자신) ② 知根無所畏(모든 중생의 根機를 잘 알아 그에 대한 적절한 설법을 하는 데 두려움 없는 자신) ③ 決疑無所畏(중생의 의문을 해결해주는 데 두려움 없는 자신) ④ 答報無所畏(모든 물음에 대해 자유자재로 대답할 수 있는 두려움 없는 자신) 등이다.

12. 부처님의 十大弟子

(1) 지혜제일(智慧) 사리불 尊者

(2) 신통제일(神通) 목건련 尊者(지옥에서 어머니를 遷度, 칠월 보름의 백중날, 우란분절)

(3) 다문제일(多聞) 아난 尊者(如是我聞의 ‘我’)

(4) 두타제일(頭陀) 가섭 尊者(付法藏 1조, 부처님 幀畫를 보면 왼쪽으로 머리가 하얗고 못생겨 보이는 스님이 迦葉尊者이고, 阿難尊者는 오른쪽에서 예쁘장하게 보이는 스님이다.)

(5) 설법제일(說法) 부루나 尊者

(6) 천안제일(天眼) 아나율 尊者(肉身의 눈을 잃고, 정작 天眼을 얻었다.)

(7) 지계제일(持戒) 우파리 尊者

(8) 해공제일(解空) 수보리 尊者

(9) 밀행제일(密行) 라후라 尊者

(10) 논의제일(論議) 가전연 尊者

13. 三處傳心

第一處傳心 - 多子塔前分半座

第二處傳心 - 靈山會上拈華微笑(靈山會上擧拈花)

第三處傳心 - 沙羅雙樹槨示雙趺(泥漣河畔槨示雙趺)

14. 四智 - 부처님이 갖춘 4가지 원만한 깨달음의 智慧

(1) 成所作智 - 五官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는 지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모두 성취함(前五識)

(2) 妙觀察智 - 모든 현상을 잘 관찰하여 자유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는 지혜(六識)

(3) 平等性智 -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떠나 자타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을 일으키는 지혜(七識)

(4) 大圓鏡智 -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第八識이 무명을 모두 제거하게 될 때 나타나는 지혜로 이것은 한 점의 티끌도 없는 거울에 森羅萬象이 그대로 비쳐 모자람 없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圓滿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八識, 阿賴耶識)

15. 三明六通(天-宿-漏-天-神-他)

(1) 三明(三達) - 天眼明(天眼通의 智慧), 宿命明(宿命通의 智慧), 漏盡明(漏盡通의 智慧)

天眼通(멀고 가까움에 상관없이 중생들을 살펴보는 智慧). 宿命通(자신과 중생의 과거 生을 아는 智慧), 漏盡通(解脫, 涅槃. 번뇌를 제거하는 能力으로 부처님만이 갖추셨다.)

(2) 六通 - 부처님과 阿羅漢이 가진 6가지 智慧光明의 신통이며, 이로써 어둠과 어리석음을 깨뜨린다. 위의 三明에 天耳通(거리나 소리의 크기에 상관없이 모든 소리를 듣는 能力), 神足通(멀고 가까움에 상관없이 원하는 곳에 刹那 간에 나타나는 能力), 他心通(남의 마음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고 아는 能力)을 합쳐서 六神通이라고 한다.

16. 四大聖地 - 룸비니(誕生), 부다가야(成道), 사르나트(鹿野苑, 初轉法輪), 쿠시나가라(涅槃)

17. 八相聖圖 - 부처님의 생애를 8가지로 분류하여 그린 그림

兜率來儀相·毘藍降生相·四門遊觀相·踰城出家相·雪山修道相·樹下降魔相·鹿苑轉法相·雙林涅槃相

18. 십계도(十界圖) - 육도(六道)의 第一 지옥계(地獄界)에서 第六의 색계(色界)까지의 구분은 <天台四敎儀>에 따르고, 第六의 無色界(四天)는 <俱舍論>의 구분에 따른다.

第一 지옥계(地獄界)

第二 축생계(畜生界)

第三 아귀계(餓鬼界)

第四 아수라계(阿修羅界)

第五 인간계(人間界)

第六 천계(天界) - 二十八天

1) 欲界 - 天上府(慾, 物, 心 六欲天, 輪廻界)의 六天

①-1. 사천왕천(四天王天 - 四天 = 東- 地國天王, 西- 廣木天王, 南- 增長天王, 北- 多聞天王)

①-2. 도리천(忉利天, 帝釋桓因이 天主로 四方으로 八天의 三十二天과 모두 三十三天)

①-3. 야마천(夜摩天)

①-4. 도솔천(兜率天, 彌勒淨土)

①-5. 화락천(化樂天)

①-6.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2) 色界 - 凡天府(物, 心, 四禪天, 다섯 가지 障碍消滅)의 十八天

②-1. 初禪天(二生喜樂地) 梵衆天, 梵輔天, 大梵天의 三天

②-2. 第二禪天(定生喜樂地) 少光天, 無量光天, 光音天의 三天

②-3. 第三禪天(離喜妙樂地) 少淨天, 無量淨天, 遍淨天의 三天

②-4. 第四禪天(捨念淸淨地) 無雲天, 福生天, 廣果天의 三天과 無想天, 五淨居天(淨梵地)인 無煩天, 無熱天, 善見天, 善現天, 色究竟天 등의 六天과 모두 九天

3) 無色界 - 凡天府(化生, 心 - 形相消滅, 四空天)의 四天

③-1. 初禪天(空無邊處天)

③-2. 第二禪天(識無邊處天)

③-3. 第三禪天(無所有處天)

③-4. 第四禪天(非想非非想天)

第七 성문계(聲聞界)

第八 연각계(緣覺界)

第九 보살계(菩薩界)

第十 불계(佛界)

19. 삼계(三千大天世界, 三界, 業報界, trayo dhātavaḥ, tisso dhatuyo)

衆生들이 거주하는 衆生界는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로 이 세계는 중생들이 生死輪廻하면서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삼유(三有)라고도 하고, 괴로운 곳이기 때문에 고계(苦界)라고도 하며, 괴로움이 바다처럼 끝이 없기 때문에 고해(苦海)라고도 한다. 三界는 예토(穢土), 예국(穢國)일 뿐이지 불국(佛國)이나 정토(淨土)라고는 할 수 없는 곳이다.

(1) 욕계(欲界) - 욕계삼욕(慾界三慾)으로 불리는 食慾·性慾·睡眠慾 등의 욕망을 가진 중생들이 사는 세계로 淫欲과 食欲을 主로하고, 諸欲을 從으로 하는 有情의 세계인데 天神의 일부 및 人間을 포함한다.

六道는 중생이 깨달음을 證得하지 못하고 윤회할 때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라 태어나는 세계를 여섯 가지로 나눈 것으로, 지옥도(地獄道)·아귀도(餓鬼道)·축생도(畜生道)·아수라도(阿修羅道)·인간도(人間道)·천상도(天上道)를 말한다. '나아가는 세계 또는 장소'라는 뜻의 취(趣)를 써서, 육취(六趣)라고도 한다. 이들 중 앞의 세 가지인 地獄道·餓鬼道·畜生道를 五惡·十惡·波羅夷罪·五逆罪 등의 不善(惡)한 業으로 인해 태어나는 고통스러운 나쁜 세계 또는 악한 세계 또는 박복한 세계라는 뜻에서 三惡道·三惡處·三惡趣라고 하며, 간단히 惡道·惡處·惡趣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 阿修羅道·人間道·天上道를 十善과 보시(布施) 등의 善한 業으로 인해 태어나는 곳이기에, 三惡道·三惡處·三惡趣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세계 또는 착한 세계 또는 다복한 세계라는 뜻에서 三善道·三善趣라고 하며, 간단히 善道·善處·善趣라고도 한다. 그리고 비록 三惡道·三惡處·三惡趣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곳인 三善道·三善趣가 있지만 六道 또는 六趣 전체는 미계(迷界), 즉 迷惑된 상태의 세계, 즉 染汚(煩惱)에 물들어 있어 사(事)와 이(理)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不善(惡)을 비롯한 잘못을 범하는 상태의 세계로서, 모든 染汚(煩惱, 根本無明)를 멀리 떠나(遠離) 완전한 깨달음(涅槃)을 證得한 상태가 아닌 한, 완전한 깨달음(涅槃)을 證得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여 誕生과 再誕生을 反復하면서 輪廻하여 생사의 고통을 받는다는 뜻에서 六道輪迴라고 한다.

육도(六道) 또는 육취(六趣)는 대체로 삼계(三界)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六道가 三界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三界 가운데 欲界에는 六道가 모두 들어 있지만 欲界가 곧 六道인 것은 아니다. 三界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六道 가운데 天上道를 제외한 나머지 五道는 欲界에 속하며, 天上道의 일부가 欲界에 속하고 天上道의 나머지 부분은 色界와 無色界에 속한다. 달리 말하면, 天上道는 三界에 걸쳐서 존재한다. 天上은 육욕천(六欲天)인데 천(天)은 신(神)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며, 욕계에 있는 여섯 천(天)을 말한다. 사왕천(四王天)·도리천(忉利天)·야마천(夜摩天)·도솔천(兜率天)·화락천(化樂天)·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등이 여기에 속한다. 四天王天(동쪽에 持國天, 남쪽에 增長天, 서쪽에 廣目天, 북쪽에 多聞天이 있고, 인간이 존재하는 곳은 欲界의 四王天 가운데 남쪽 增長天에 딸린 南贍浮洲 곧 閻浮提에 살고 있음), 忉利天(33天이 있음), 空居天(業障이 좀 가벼워서 地居天을 떠나 있는 虛空 가운데 사는 衆生인데, 이런 천인들은 몸뚱이가 우리 몸뚱이 같지가 않기 때문에 虛空에서 마음대로 空間을 집으로 알고 살고 있음), 夜摩天, 兜率天(모든 부처님이 성도하기 전에 머무는 곳), 化樂天, 他化自在天이 있다.

色界나 無色界가 定心(禪定三昧에 들어가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의 경지인 데 반하여 欲界는 산심(散心)의 경지이기 때문에 욕계산지(慾界散地)라고 한다. 三界를 구지(九地)로 나눌 경우 초지(初地)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欲界에 定心의 경지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다. 欲界에 포함되는 범위와 종류에 대해서도 여러 見解가 있으며, 〈아함경(阿含經)〉·〈구사론(俱舍論)〉·〈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등의 여러 經典과 論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欲界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지옥(地獄)은 중생이 고통스럽게 사는 세계를 말하며, 8대 지옥, 10대지옥 등으로 나눈다.

2) 아귀(餓鬼)란 '배고픈 귀신' 이란 뜻인데, 배는 태산처럼 큰데 목구멍은 바늘구멍처럼 작아 비록 음식이 있다 하더라도, 먹지를 못해 항상 배고픔을 면치 못하고 굶주리는 세계를 말한다.

3) 축생(畜生)은 벌레나 날짐승, 물고기 따위를 말하는 것인데, 무려 34억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이들은 공중, 물, 육지의 세 곳에 각기 나누어 살고 있다고 한다.

4) 아수라(阿修羅)는 줄여서 수라라고도 하는데,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으로 인식되며 항상 증오와 질투심을 가지고 있어서 33천과 싸우는 것을 本業으로 한다고 한다.

야단스러운 곳이나 처참하게 된 곳을 비유하여 阿修羅場 같다고 하는데, 이는 곧 阿修羅로부터 나온 말이다. 阿修羅場은 阿修羅들이 帝釋天王과 싸우는 장소를 말한다.

5) 인간(人間)이란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을 뜻한다. 최초의 인간에 관하여는 장아함경(長阿含經) 중 소연경(所緣經), 세기경 세본연품(世紀經 世本緣品), 중아함경 범지품(中阿含經 梵志品) 등에서 보이며 내용도 같다. 그 대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최초의 인간은 色界 二禪天 중 광음천(光音天, 極光淨天)에서 복이 다하고, 수명이 다한 天人이 내려 왔는데, 인간은 天人이 이 세상에 化生한 것이다. 이 天人은 몸이 스스로 光明을 발하고, 말할 때 입으로부터 맑은 빛을 내어 그 빛이 말이 되어서 의사를 소통하며, 神通力이 있어서 자유로 날아 다녔다. 또한 음식은 생각만으로 飽滿감을 느꼈으며, 서로들 衆生이라고 하였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땅에서 샘이 솟아났는데 이를 감천(甘泉)이라 했다. 天人들은 好奇心에서 먹어보고, 달고 맛이 있자 甘泉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몸이 거칠어지고 살이 찌게 되어, 자연 天人의 아름답고 미묘한 形色을 잃었으며, 몸에서 나는 光明도 줄어들고 날아다니는 힘도 잃어서, 땅을 걸어 다니게 되었다. 여기에서 甘泉을 많이 먹은 사람은 적게 먹은 사람보다 몸이 더 거칠어지고 추해지기 시작하자, 서로 猜忌하고 미워하여 鬪爭心을 일으키는 사이에 甘泉은 사라지고, 지미(地味)가 자연 생기게 되었고, 천인들은 이 地味를 먹고 살다가, 많이 먹은 사람은 또 몸이 거칠어지고, 추해지기 시작했으며, 덜한 천인들과 서로 猜忌, 嫉妬, 鬪爭하게 되자 地味는 자연 사라지고, 지비(地肥)가 생겨났다. 그리고 地肥를 주식으로 하다가 또 많이 먹은 사람은 적게 먹은 사람보다 더 추해지고, 서로 간에 反目, 鬪爭하게 되자, 地肥는 사라지고 파라(婆羅)가 나오게 되었으며, 婆羅도 같은 과정을 거쳐 없어지게 되자, 자연경미(自然粳米)가 생겨났다. 이것은 쌀 종류의 모양으로 아침에 베면 저녁에 나고, 저녁에 베면 아침에 돋아났으며, 간이 맞고 거친 겨도 없어서 먹을 만했다.

중생들은 自然粳米를 먹으면서부터 차차 形色이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어떤 중생은 남자의 형상이 되고, 어떤 중생은 여자의 형상이 되어, 서로가 好奇心으로 쳐다보고 살피는 동안에 愛着心을 갖게 되어, 性慾이 생겨 더욱 親近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夫婦가 생기고, 福과 壽命이 다한 衆生이 이 世間에 올 때, 어머니의 胎中에 드니, 이것이 여러 經典에서 보이는 이 세상 最初의 人間에 관한 記錄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經典에서 인간은 色界 二禪天 중 광음천(光音天, 極光淨天)의 천인(天人)이 화생(化生)했다는 점인데, 이는 衆生의 本城은 원래 淸淨하고, 動搖가 없지만, 迷惑하여 煩惱를 일으키고, 마음이 動搖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衆生들의 差別境界가 생기게 되는 것이고, 또한 光音天 중생이 번뇌를 일으키자, 더 이상 光音天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 땅에 化生하게 되었으며, 이들도 煩惱를 일으키고 음식을 貪하게 되자, 점점 거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自然粳米를 먹게 되면서부터는 남녀상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衆生들이 境界에 빠져들어 感覺의 慾望을 만족시키고, 또 對立을 일삼을 때 중생들의 생활상은 점차 墮落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곳은 사주(四洲)의 구별이 있는데 그 중심은 수미산(Sumeru, 須彌山)이다.

※ 수미산(Sumeru, 須彌山)

불교의 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을 이루는 거대한 산으로 세계는 거대한 圓筒 모양의 풍륜(風輪)·수륜(水輪)·금륜(金輪)으로 떠받쳐져 있고, 金輪 위의 大洋에는 다시 구산(九山)과 팔해(八海)가 있다. 大洋의 중심부에 16만 由旬(1由旬은 약 7㎞)의 높이로 솟아 그중 8만 由旬은 물속에 잠겨 있다. 頂上에는 帝釋天의 궁전이 있고 중턱에는 四天王의 거처가 있다. 須彌山을 일곱 개의 香海와 金山이 둘러싸고 있으며, 이 七金山 바깥에 함해(鹹海)가 있고, 鹹海의 외곽(外圍)을 둘러싼 것이 대철위산(大鐵圍山)이다. 鹹海의 사방에 인간이 사는 섬부주(贍部洲)·승신주(勝身洲)·우화주(牛貨洲)·구로주(瞿盧洲) 등의 四大洲가 있다. 須彌山 절반 아래(下半)의 곁(傍係)에 八寒地獄과 八熱地獄이 橫으로 순서(次第)대로 서있고 八熱地獄에 각각 十六의 遊增地獄이 있다. 須彌山을 頂點으로 하여 그 둘레를 맴도는 달과 태양을 포함하여 四大洲·須彌山·달·太陽·六欲天·梵天이 세계의 기본 단위인 하나의 小世界이다.

① 남염부주(南閻浮州)

閻浮州라 한 것은 수풀과 과일이 풍부한 閻浮나무가 번성한 나라라는 뜻이다. 閻浮나무는 인도에 널리 분포된 나무이며, 불교의 발생지가 인도이기 때문에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염閻浮나무를 들어, 그 이름을 만들은 것 같다. 우리가 사는 곳은 南閻浮州이다.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한다.

② 동승신주(東勝身洲)

須彌山의 동쪽에 있는 대주(大洲)로써 이곳의 사람들은 몸(身)의 형상이 매우 훌륭(勝)하므로 勝身洲라고 한다.

③ 서우화주(西牛貨洲)

수미산(Sumeru, 須彌山)의 서쪽에 있는 대주(大洲)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소(牛)가 많으므로, 시장에서 금전(貨)과 같이 쓰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

④ 북구로주(北俱盧洲)

俱盧洲는 승처(勝處)라고도 하여 제일 殊勝한 곳인데, 그 이유는 衆生, 處所, 財物 등이 四洲 중에서 제일 殊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6) 육욕천(六欲天)

삼계(三界)의 욕계(欲界)에 속하는 여섯 단계의 세계이다. 욕계(欲界) 최하로부터 최상의 순서로 첫째는 사왕천(四王天), 도리천(忉利天),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화락천(化樂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으로 사천왕천은 須彌山 중턱의 4면에 있고, 忉利天은 須彌山의 정상에 있으므로, 이 둘을 지거천(地居天)이라고 한다. 나머지 넷은 須彌山 위의 공중에 있으므로 공거천(空居天)으로 부른다.

① 사천왕천(四天王天)

六欲天의 첫째 세계이며 四大天王이 있어 四洲를 수호하며 그 眷屬들과 살고 있다. 해와 달과 별들도 포함한다. 사천왕중(四天王衆), 사천왕중천, 사천왕, 사왕천이라고도 한다, 사대천왕이란 삼계(三界)의 욕계에 속하는 六欲天 중 최하인 제1천의 동주를 주로 수호하는 須彌山 중턱의 동쪽에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南洲를 주로 수호하는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西洲를 주로 수호하는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北洲를 주로 수호하는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의 넷을 말한다.

이곳에도 남녀의 구별은 있어 婚姻하는 일이 있는데, 몸과 몸을 가까이 하여 기운으로써 陰陽을 이루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1-2세와 같고 키는 半由旬이다.

큰 절에 가면 입구에 천왕문(天王門)이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四大天王을 모신 곳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밖에서 오는 삿된 魔鬼를 防禦하는 뜻에서 세워져 있는 것이다.

② 도리천(忉利天)

六欲天의 둘째 세계이며 須彌山의 정상에 있고 삼십삼천(三十三天)이라고도 한다. 도리(忉利)는 33이라는 뜻으로 33神들이 사는 곳이다. 이 忉利天을 33天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須彌山의 중앙에 忉利天의 왕인 帝釋天王이 있는 帝釋天(善見城, 喜見城이라고도 함)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의 봉우리에 각각 8神이 있어 도합 33神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2-3세와 같으며, 자연이 화현하여 천(天)에 앉는다. 그리고 이곳의 왕인 제석천왕은 사천왕과 32天을 통솔하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위해 석 달 동안 올라가 설법하고 내려오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하는 하늘이다. 六欲天 중에서 四王天과 忉利天의 둘은 須彌山을 의지해 있기 때문에 지거천(地居天)이라고 하는데 四王天은 중턱에, 忉利天은 정상에 있다.

※ 제석천(帝釋天, Sakra devanam indra)

십이천(十二天)의 하나로 須彌山의 꼭대기 忉利天의 임금이다. 동방을 지키고 희견성(喜見城)에 살며 사천왕(四天王)을 통솔한다. 佛法과 佛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며, 阿修羅의 군대를 征伐한다는 하늘의 임금이다. 산스크리트 어 이름은 샤크라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이다.

※ 십이천(十二天)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 하늘이란 의미로 그곳을 지키는 열두 신(神)으로 사방(四方), 사유(四維)의 八天에 上, 下의 二天 및 日, 月의 二天을 더한 것이다. 곧 동(東)에 제석천(帝釋天), 동남(東南)에 화천(火天), 남(南)에 염마천(閻魔天), 서남(西南)에 나찰천(羅刹天), 서(西)에 수천(水天), 서북(西北)에 풍천(風天), 북(北)에 비사문천(毘沙門天), 동북(東北)에 대자재천(大自在天), 상(上)에 범천(梵天), 하(下)에 지천(地天), 그리고 일천(日天), 월천(月天)을 이른다.

③ 야마천(夜摩天)

六欲天의 셋째 세계이며 선시천(善時天), 시분천(時分天), 수야마(須夜摩), 소야마(蘇夜摩). 염마왕(閻魔王). 염천(焰天)이라고도 한다. 야마(夜摩)는 시분(時分)이라는 뜻으로 시간의 구분을 잘 알고 五慾의 즐거움을 향수하는 곳이며, 이곳에 있는 신(神)들은 때때로 즐거움을 누리고 입으로 쾌재를 부르짖는 곳이다. 여기서의 하루는 인간계의 200년에 상당하며, 수명은 2,000세, 신장은 2由旬이다. 四王天과 忉利天이 지거천(地居天)임에 반하여 야마천부터는 공중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공거천(空居天)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때에 따라 五慾樂을 받는다. 忉利天 보다 殊勝한 하늘로 남녀가 陰陽을 이룰 때에는 서로 가까이만 해도 되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3-4세와 같다.

④ 도솔천(兜率天)

六欲天의 넷째 세계이며 희족천(喜足天), 지족천(知足天), 묘족촌(妙足天), 도사다천(覩史多天), 도솔타천(兜率陀天), 도솔(兜率)이라고도 한다. 도솔은 묘족(妙足)·지족(知足)이라는 뜻으로 현재 미륵보살이 설법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자기가 받는 五慾樂에 스스로 만족한 마음을 내어 안정되어 있다. 이곳에선 남녀가 서로 손을 잡는 것으로도 陰陽을 이루는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4-5세와 같다.

그리고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는데, 外院은 천인(神)들이 흡족해 하면서 살고 있는 欲樂處가 되고, 그 보살은 먼 미래에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나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여 彌勒佛이 된다. 內院은 미래에 부처가 될 彌勒菩薩의 정토로서 미륵보살은 이곳에 있으면서, 南閻浮州에 하강하여 成佛할 때를 기다리면서 수행중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兜率天 內院宮에서 護明菩薩로서 수행하고 天人들을 교화하셨다. 여기서의 하루는 人間界의 400년에 상당하고, 수명은 4,000세이다.

⑤ 화락천(化樂天)

六欲天천의 다섯째 세계이며 낙변화천(樂變化天), 화자락천(化自樂天), 화자재천(化自在天)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있는 신(神)들은 바라는 대상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교묘한 즐거움의 境地를 누리며, 五慾의 境界를 스스로 변화하여 즐기기 때문에 化樂天이라고 한다. 남녀가 바라다보고 있으면 陰陽을 이루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5-6세와 같다. 여기서의 하루는 人間界의 800년에 상당하고, 수명은 8,000세이다.

⑦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六欲天의 최상인 여섯째 세계이며 欲界의 최고 위치로 第六天 他化天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있는 신(神)들은 바라는 대상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즐길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만들어 낸 慾望의 대상을 자유자재로 受用하여 즐거움을 누리는 세계로 남의 즐거운 일들을 자유롭게 자기의 낙(樂)으로 삼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선 잠시 바라만 보아도 陰陽을 이루며,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인간의 6-7세와 같다. 欲界는 이 他化自在天에서 끝나게 된다. 그리고 經에 의하면 남녀의 구별이 있는 것도, 婚姻하는 일이 있는 것도 여기까지이다. 이 이상의 하늘엔 남녀의 구별도 없으니, 婚姻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Maha-maay, 摩耶) 부인은 세연(世緣)을 마치고 忉利天에 태어났다. 부처님께서는 어머님을 위해서 3개월 동안 忉利天에 올라 가셔서, 어머님과 忉利天의 天上人들을 위해서 說法을 하셨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실 때의 偈頌에 '은혜와 사랑을 끊기가 어렵지만, 은혜와 사랑을 버리고 상(相)을 여읜 무위법에 들어가면, 진정으로 은혜를 갚는 것이로다(恩愛不能斷 棄恩入無爲 眞實報恩者).라는 것이 있다.

忉利天에만 가도 음식을 먹고 싶으면 저절로 음식이 나온다. 천상들은 분단식(分段食)을 먹는 것이 아니고 香氣만 맡는다. 따라서 夜摩天은 더욱 말할 것도 없고, 兜率天, 化樂天, 他化自在天 이렇게 올라갈수록 받는 安樂이나 能力이 더욱더 殊勝하다. 화락천(化樂天)은 괴로운 경계도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시켜서, 기쁘고 즐거운 경계로 만든다. 他化自在天은 欲界天의 가장 위층인데, 마왕(魔王) 파순(波旬)은 여기에 산다. 魔王은 하여튼 우리가 欲界를 벗어날세라, 친구 모습으로 오기도 하고, 이성의 모양으로 오기도 해서 가지가지로 毁謗을 놓는다.

(2) 색계(色界)

色界(色은 質碍의 뜻으로서 유형의 물질을 의미)는 諸欲(淫欲 등)을 여읜 有情의 세계로서, 男女의 구별이 없고 옷이 저절로 생겨나며, 빛을 먹고, 빛으로 言語를 삼고 身體나 依處나 일체 물질은 모두 殊妙精好하니, 이 색계를 禪定의 깊이(淺深麤妙)에 따라 四禪天(四定慮處)으로 나누며 欲界위에 있고 淫慾과 食慾을 여읜 생물(天人)이 사는 장소이다. 여기는 더럽고 거친 色法에는 집착하지 않으나 淸淨하고 微細한 色法에 묶여 있고, 絶妙한 물질(色)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欲界 및 無色界와 구별하여 色界라 한다. 아직 完全히 精神的인 것은 되지 못한 中間의 세계로, 欲界보다 殊勝한 物質로 구성되어 있다. 慾心을 떠난 깨끗한 세계로 사선천(四禪天)으로 이루어지고 이것을 나누면 十八天이 된다. 〈天台四敎儀〉에 따르면 이생희락지(二生喜樂地)로 총칭되는 초선천(初禪天)에는 범중천(梵衆天)·범보천(梵輔天)·대범천(大梵天)의 三天이 있고,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로 총칭되는 제이선천(第二禪天)에는 소광천(少光天)·무량광천(無量光天)·광음천(光音天, 極光淨天)의 三天이 있고,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로 총칭되는 제삼선천(第三禪天)에는 소정천(少淨天)·무량정천(無量淨天)·변정천(遍淨天)의 三天이 있고,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로 총칭되는 제사선천(第四禪天)에는 무운천(無雲天)·복생천(福生天)·광과천(廣果天)·무상천(無想天)·무번천(無煩天)·무열천(無熱天)·선견천(善見天)·선현천(善現天)·색구경천(色究竟天)의 九天 등 모두 十八天이 있다.

이 色界는 일정한 地形이 없고 다만 衆生이 그 世界에 태어나고 죽고 하는데, 그 居住하는 天宮이 顯滅하므로 어떤 固定的인 有形色을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色界의 四禪天은 결국 四禪定을 닦아서 나는 하늘로, 禪定의 차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色界의 四天은 모두 이 四禪定을 닦아서 나는 곳이다.

1) 초선천(初禪天)은 깨닫고 觀察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思慮分別이 있고, 언어가 있으며, 欲界의 貪慾이나 抑壓으로부터 떠난 곳으로, 初禪天의 大梵王이 통솔하는 天人들이 모여 사는 범중천(梵衆天), 初禪天의 大梵王을 돕는 신하들이 모여 사는 범보천(梵輔天), 初禪天의 主宰者인 梵天王이 있는 대범천(大梵天)이 있다. 이것은 역시 점차로 煩惱가 稀薄해져 가는 정도에 따라서 층별(層別)의 차이가 있다.

初禪天은 三昧를 닦아서 欲界煩惱를 떠나야 비로소 초선천에 들어간다. 입정(入定) 즉 禪定에 든다는 것은 欲界煩惱를 떠나야 되는 것이다. 欲界煩惱의 가장 중요한 것은 식욕(食慾), 수면욕(睡眼欲), 음욕(游欲)이다. 欲界서도 食慾과 睡眼欲과 淫慾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淫慾에 있어서도 四大王天과 忉利天까지는 남녀 이성의 結合이 있는 셈이지만, 夜摩天에 올라가면 異性結合이 없이 단순히 서로 抱擁할 정도이고, 그 다음 兜率天은 악수만 하는 정도고, 化樂天은 서로 피차 바라보고 미소만 띄우는 정도이며, 그리고 마지막 他化自在天에 오르면 그 淫慾이 눈으로만 눈웃음 짓는 정도이다.

衆生들이 精進하여 공부가 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點檢해서 慾心이 남아 있다면 아직 욕계정(欲界定)이라, 欲界에서의 精神統一에 불과한 것이다. 이른바 冥想法을 닦아서 조금 더 맑아진 것이지, 선정(禪定)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2) 제이선천(第二禪天)은 思慮分別의 작용이 없고, 기쁨과 즐거움만이 있으며, 광명이 훤히 빛나고, 智慧와 福德이 充滿한 세계로, 약간의 光明을 發하는 天神의 무리가 모여 사는 소광천(少光天), 무한한 光明을 발하는 천신의 무리가 모여 사는 무량광천(無量光天), 光明과 소리를 발산하는 天神의 무리가 모여 사는 광음천(光音天, 極光淨天)이 있다. 처음 소광천(少光天)에서는 조금 덜 빛나고, 무량광천(無量光天)은 훤히 한량없이 빛난다. 광음천(光音天)에는 광명으로 해서 조금도 막힘이 없이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도, 마음만 먹으면 광명으로 서로 상통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영통이 된다고 한다. 본래가 광명인데 삼독(三毒) 오욕심(五欲心)에 가려 있다가, 선정이 깊어짐에 따라 차근차근 빛나는 것이다.

좁게 보면 初禪天만 梵天이고, 넓게는 初禪天, 第二禪天, 第三禪天, 第四禪天을 모두 梵天이라고 말한다. 브라만(Brahman)이 梵天에 소속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梵天, 곧 四禪天에 있는 衆生들은 아직도 衆生인지라 서로 그릇된 짓도 하는데, 그 가운데 말을 안 들으면 그 罰則이 상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涅槃에 드시려 하자, 아란존자가 '車匿 比丘와 같이 고집 센 강강(剛剛)한 比丘는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하고 여쭈니까 '범단지법(梵壇之法)으로 對處하라.' 하셨다. 忠告를 하여 들으면 좋은데, 안 들으면 出家沙門이 서로 싸울 수는 없는 것이고, 말하지 않고 상대하지 않는 묵빈대치(默壙對治)의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3) 제삼선천(第三禪天)은 思慮分別과 기쁨은 없고, 즐거움만 있으며, 마음의 평정을 이룬 세계로, 약간 깨끗하지 못한 천신의 무리가 모여 사는 소정천(少淨天), 무한히 깨끗한 천신의 무리가 모여 사는 무량정천(無量淨天), 흐린 곳이 없이 깨끗한 천신의 무리가 모여 사는 변정천(遍淨天)이 있다. 소정천(少淨天)은 청청하기는 하나, 아직은 번뇌의 때가 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훨씬 더 맑아져서 한량없이 맑은 경계를 얻음은 무량정천(無量淨天)이고, 그 다음이 변정천(遍淨天)이고, 끝도 가도 없이 三千大天世界 구석구석까지 맑은 境界이다. 부처님 나라는 한 三千大天世界가 전부가 아니다. 三千大天世界가 無量으로 있는 것이다.

4) 제사선천(第四禪天)은 사려분별의 작용이 없고, 즐거움의 마음조차도 사라져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불고불락(不苦不樂)의 경지에 머물러서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는 세계로, 번뇌의 그림자가 없고, 구름이 없는 공중에 사는 천신의 무리가 모여 사는 무운천(無雲天), 번뇌의 구름이 없기 때문에 복이 저절로 와서 좋은 복을 가진 천신의 무리가 모여 사는 복생천(福生天), 三千大天世界와 같이 廣大無邊하고, 커다란 果報를 가진 천신의 무리가 모여 사는 광과천(廣果天)이 있고, 다음 정범지(淨梵地, 淨居天)는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잠간 동안 마음이 있고, 그 가운데 五百大劫 동안은 마음의 작용이 없어 번뇌가 없는 天上境界이며, 천신의 무리가 모여 사는 무상천(無想天), 번뇌가 없으니 항시 청량미를 맛보는 무번천(無煩天), 곤궁함이 없는 천신의 무리가 모여 사는 무열천(無熱天), 모두가 좋게만 보이니, 견해도 응당히 선량하게 되는 境界이며, 좋은 눈을 가진 천신의 무리가 모여 사는 선견천(善見天), 모두가 다 좋게만 광명으로 보여 애증(愛憎)을 떠난 境界로서 아름다운 모습의 천신의 무리가 모여 사는 선현천(善現天), 모든 존재의 끝, 즉 모든 光明(寂光, 淨光)의 本質로서 가장 淸淸한 光明을 吟味하고 생활하는 하늘의 境界로서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다. 보통 第四禪天의 廣果天까지는 일반 外道들도 갈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인 정범지(淨梵地, 淨居天)는 청정한 곳이므로 聖者만 가는 곳이다.

(3) 무색계(無色界)

物質的인 色이 전혀 없으므로, 身體나 意處가 없고, 오직 心識으로써 心妙한 禪定에 머무를 따름이니, 다만 果報가 色界보다 勝하다. 四空處는 최상의 영역으로 물질을 초월한 세계로 정신만이 존재하는 고도의 정신적인 세계. 물질을 싫어하며 벗어나고자 사무색정(四無色定)을 닦은 사람이 죽은 뒤에 태어나는 장소이다. 九地 가운데 마지막 四地에 해당하며, 사무색천(四無色天) 또는 사무색처(四無色處)라고 한다. 초선정(空無邊處定), 이선정(識無邊處定), 삼선정(無所有處定), 사선정(非想非非想處定)이 있다. 이 가운데 非想非非想處는 三界에서 가장 높은 자리이기 때문에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한다.

무색계(無色界)는 최상의 영역으로 정신만이 존재하는 물질을 초월한 세계로 완전히 精神的인 세계로 삼계 중 가장 수승한 곳이다. 물질을 싫어해 여의어서 사무색정(四無色定)을 닦은 사람이 태어나는 천계(天界)를 말한다. 이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모두 男性이지만 男根이 없다. 이 세계에는 物質的 존재나 處所가 없기 때문에 空間的인 높고 낮음도 없다.

無色界는 色을 떠나버린 하나의 심식(心識) 곧, 마음만 있는 중생이 사는 세계이다. 果報의 優劣에 따라 공무변처(空無邊處)·식무변처(識無邊處)·무소유처(無所有處)·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4가지로 나뉘는데, 공무변처(空無邊處)는 空이 끝도 가도 없는 無量無邊의 세계를 다 수용할 수 있는 경계이고, 또 식무변처(識無邊處)는 일체가 유심조(唯心造)요,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모든 것이 마음으로 通察해 보이는 경계이다. 처음에는 텅텅 비어 보였지만, 業障이 더 녹아지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 곧 의식인 생명이 充滿해 있음을 깨닫는 경계요,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식(識)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무엇이라 이름 지을 수도 없는, 이름과 상(相)을 여읜 경계이다. 또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번뇌가 거의 다 스러져서 번뇌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 번뇌가 있는 것을 지각(知覺)하지 못할 정도로 청청한 경계이며, 三界 가운데 최상의 천상이다. 그러나 중생들의 세계를 총칭하는 三界는 이처럼 여러 세계로 분류되고 각각의 세계에 따라 수명이나 고통의 정도가 다르지만 모두 輪廻의 과정에 있는 苦海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깨달음을 얻어 解脫하는 것은 輪廻를 벗어나는 것으로서 三界를 모두 超越하여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1)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欲界와 色界의 모든 色法을 싫어하고, 무색정(無色定)을 닦되 色의 想을 버리고 허공관(虛空觀)을 닦는 이가 태어나는 하늘이다.

2)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空無邊處가 오히려 바깥 虛空이라는 對象이 있으므로, 이를 싫어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관인 識이 無邊하다는 理致를 알고 修行하여 태어나는 하늘이다.

3)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識無邊處가 오히려 識이라는 所有感이 있으므로 이마저도 싫어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空도 識도 모두 所有가 없다는 無色定을 닦아 그 힘으로 태어나는 곳이다.

4)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

三界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하늘이라는 뜻에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을 非想非非想이라 하는 이유는 識無邊處天은 무한한 識의 존재를 관상(觀想)하므로 유상(有想)이요, 無所有處天은 空도 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觀想하므로 비상(非想)인데, 이것은 有想을 버리므로 非想이요, 非想도 버리므로 非非想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定을 닦아 그 힘으로 태어나는 하늘이기 때문이다.

20. 五大齋日 - 誕辰節(4.08), 出家節(2.08), 成道節(12.08), 涅槃節(2.15), 伯仲節(7.15)

21. 十齋日 - 齋는 三業을 깨끗이 하여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하며, 한 달가운데 열흘을 특정 불보살의 날로 하여 예배·염불·기도로 三業을 깨끗이 하는 날을 말한다.

定光佛齋日(1일), 藥師如來齋日(8일), 普賢菩薩齋日(14일), 阿彌陀佛齋日(15일), 地藏菩薩齋日(18일), 大勢至菩薩齋日(23일), 觀世音菩薩齋日(24일), 毘盧遮那佛齋日(28일), 藥王菩薩齋日(29일), 釋迦如來齋日(30일)

22. 緣起法 - 此故彼故彼故彼故彼

23. 中道

중도(中道)란 양극단을 피한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를 말한다.

석가모니께서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어 불타로 될 때까지의 6년간 그 대부분을 가혹한 고행의 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 고행도 석가모니에게 있어서는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일 뿐 문제의 참된 해결은 되지 않았다. 석가모니께서는 그러한 물질적인 풍족함으로 구원받지 못함을 알고 출가 전의 쾌락(樂行)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며 이것을 버리고 고락 양면을 떠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체험에 의해서 자각하였다. 성도(成道) 후 그때까지 함께 고행을 하고 있던 5인의 비구(比丘)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한 것도 中道의 理致였다.

24. 涅槃四德 - 常·樂·我·淨

25. 삼과(三科) - 五蘊·十二處·十八界

삼과(三科)는 초기불교 이래 불교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는 기본적인 존재 분류체계 또는 분석방식, 즉 기본적인 법체계가 되었다. 그리고 초기불교의 이 세 가지 법체계들은 釋迦牟尼가 般涅槃에 든 후의 후대에서 더욱 심화·발전되어 部派佛敎의 說一切有部의 5위 75법의 법체계와 大乘佛敎의 唯識瑜伽行派와 法相宗의 5위 100법의 법체계 등으로 나타났다.

26. 오온(五蘊)

공(空)에는 색(色)이 없으며, 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이 없으며,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도 없으며,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도 없도다. 눈(眼)의 경계도 없으며, 내지 의식(意識)의 경계까지 육식(六識)도 없느니라.

오취온(五取蘊)·5음(五陰)·5중(五衆)·5취(五聚), pañca-skandha, 무릇 생멸하고 변화하는 것을 종류대로 모아서 5종으로 구별한다.

(1) 색온(色蘊) - 스스로 변화하고 또 다른 것을 장애하는 물체

(2) 수온(受蘊) - 고(苦)·락(樂)·불고불락(不苦不樂)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이다.

(3) 상온(想蘊) - 외계(外界)의 사물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상상하여 보는 마음의 작용한다.

(4) 행온(行蘊) - 인연으로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천한다.

(5) 식온(識蘊) - 의식(意識)하고 분별한다.

27. 육근(六根)

육식(六識)의 소의(所衣)가 되어 六識을 일으켜, 대경(對境)을 인식케 하는 근원으로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이며, 곧 6관(官)이다. 근(根)은 잰다는 뜻이며, 안근(眼根)은 안식(眼識)을 내어 색경(色境)을 인식하고, 의근(意根, 心王, 心法)은 의식을 내어 법경(法境)을 인식한다.

28. 육경(六境)

육식(六識)으로 인식하는 대경(對境)이다. 색경(色境, 물질적 성질)·성경(聲境, 소리)·향경(香境, 냄새)·미경(味境, 맛)·촉경(觸境, 감촉)·법경(法境, 마음작용의 대상)을 말한다.

마음작용으로는 탐욕·성냄·어리석음·탐욕 없음·성내지 않음 등이 있으며, 마음작용의 대상에는 특히 無爲法(涅槃·眞如·法性 등)이 포함된다. 무위법을 제외하면 마음작용의 대상은 대체로 개념(비물질적 사물)이라 할 수 있다.

29. 육식(六識)

객관적 만유의 대상을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으로 하고, 이 육경(六境)에 대하여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닿고, 알고 하는 인식작용이다. 곧 안식(眼識, 시각, 색깔과 형태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이식(耳識, 청각, 소리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비식(鼻識, 후각, 냄새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설식(舌識, 미각, 맛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신식(身識, 촉각, 감촉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의식(意識, 제6식, 法界 즉 전5식의 대상을 제외한 기타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을 말한다.

30. 십이처(十二處)

육근(六根)과 그 대상인 육경(六境)을 말한다. 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 접촉하여 온갖 精神作用이 일어난다.

31. 십팔계(十八界)

십팔계(十八界)는 불교의 여러 일체법 분류체계 또는 분석방식 중 하나로, 존재 전체를 안계(眼界)·이계(耳界)·비계(鼻界)·설계(舌界)·신계(身界)·의계(意界)의 육근(六根) 또는 육소의(六所依)와 색계(色界)·성계(聲界)·향계(香界)·미계(味界)·촉계(觸界)·법계(法界)의 육경(六境) 또는 육경계(六境界)와 안식계(眼識界)·이식계(耳識界)·비식계(鼻識界)·설식계(舌識界)·신식계(身識界)·의식계(意識界)의 육식(六識) 또는 육능의(六能依)의 총 18가지 계(界)로 분류 또는 분석하는 法體系이다.

십팔계(十八界)는 십이처(十二處)의 법체계에 육식(六識), 즉 마음(心王 또는 心法)을 더한 것으로, 이것은 달리 말하면, 십이처(十二處) 중 의처(意處)라는 한 가지 처(處)를 더욱 세분하여 전개시킨 것이다. 즉, 의처(意處)라는 한 가지 처(處)를 의근(意根)과 육식(六識)으로 나누어, 意根을 의계(意界)라 하고, 육식(六識)을 眼識界·耳識界·鼻識界·舌識界·身識界·意識界라 한 것이다. 즉, 원래 마음(心王 또는 心法)은 한가지로 단일한 것이지만, 감각을 감각기관에 따라 시각과 청각으로 구분하듯이, 마음(心王 또는 心法)이 나타나게 되는 근거(所依)인 육근(六根)에 따라 眼識界 등의 六面으로 나눈 것이다.

마음(心王 또는 心法)을 이와 같이 六面으로 나누는 것은 우주가 欲界·色界·無色界의 三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관련되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즉 三界의 각 계에서 한 가지 마음(心王 또는 心法)의 어떤 면은 작용하며 어떤 면은 작용하지 않는가를 밝히는 것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六面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적합했던 것이다. 즉,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欲界에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六境이 모두 존재하고, 色界에는 향(香)·미(味)의 2가지 경(境)이 존재하지 않으며, 無色界에서는 법(法)의 한 가지 경(境)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세계 구조 하에서, 색계나 무색계의 여러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의 마음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음(心王 또는 心法)을 六面으로 나누어 마음(心王 또는 心法)의 어떤 면은 작용하며 어떤 면은 작용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즉, 欲界에서는 六境이 모두 존재하므로 六識이 모두 존재하고, 色界에서는 향(香) · 미(味)의 두 가지 경(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鼻識과 舌識이 존재하지 않고, 無色界에서는 법(法)의 한 가지 경(境)만이 존재하므로 第六識인 의식(意識)만이 존재한다고 설명함으로써 마음(心王 또는 心法)과 그 작용에 대해 쉽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32. 三法印·(四法印)- 諸行無常·諸法無我·涅槃寂靜·(一切皆苦)

불교의 근본교리를 이루는 세 가지 진리로 법인(法印)은 ‘법의 표지’ 또는 ‘불법의 특징’을 뜻한다. 이 法印思想은 釋迦牟尼의 正覺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어느 불경이든 법인사상에 합치되면 이를 부처님의 진설(眞說)이라 인정하고, 만약 법인사상에 어긋나면 이를 바른 불설(佛說)이 아니라고 판정하였다. 法印으로 들 수 있는 것은 3종 또는 4종이 있는데, 이를 三法印 또는 四法印이라 한다.

三法印은 ① 제행무상(諸行無常), ② 제법무아(諸法無我), ③ 열반적정(涅槃寂靜)이며, 이 세 가지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더하면 四法印이 된다. 대부분의 경전에서 四法印을 無常·苦·無我·涅槃의 순으로 열거하고 있다.

원시경전에는 일반적으로 三法印 또는 四法印을 체계화시킨 說은 없지만, 無常·苦·無我에 관해서는 많은 경전에서 說하고 있다. 이를 유위(有爲)의 삼상(三相)이라고 하였다. 이 유위를 벗어남으로써 涅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상 네 가지로 四法印의 敎說이 성립되게 된 것이다.

원시불교 이래 대승불교에 걸쳐 가장 중요한 게(偈)로서 무상게(無常偈)가 있다. 이를 범어(梵語) 원본대로 번역하면 “諸行은 無常하여 生과 滅의 法이 있으며, 生하여 끝나서는 滅한다. 이들 諸行의 寂滅은 낙이다(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己 寂滅爲樂).”이며, 이것은 諸行無常과 涅槃寂靜의 法印을 說한 것으로, 불교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되어 있다.

중국 天台宗 등의 일부 종파에서는 三法印이 소승불교의 說이므로 ‘諸法實相’이라는 일실상인(一實相印)으로써 法印을 삼는다고 주장하였으며, 諸法實相을 십여시(十如是)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三法印과 十如是에 의한 諸法實相은 실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여 三法印說이 보편적으로 유통되었다. 三法印의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

諸行이란 생멸 변화하는 일체의 형상법(形相法)을 가리키며, 유위(有爲)와 같은 뜻이다. 모든 현상은 잠시도 정지하지 않고 생멸 변화하므로 諸行無常이라 한다. 諸行이 無常하다는 것은 눈앞의 사실로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며, 특별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法印 중에는 諸行無常을 가장 앞에 두게 된 것이다.

‘無常을 설하는 의의는 이론적으로는 무상하기 때문에 고이다.’라든가 ‘無常하기 때문에 無我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苦와 無我의 이유로서 無常이 說해졌다. 전통적으로 無常이라는 말에는 노(老)·병(病)·사(死) 등과 같이, 사태가 나쁘게 변화한다는 비극적인 뜻으로 연상되는 경우가 많지만, 無常이란 사태가 나쁘게 변화하는 것뿐 아니라, 좋게 전개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無常하기 때문에 슬픈 일도 생기지만, 無常하기 때문에 불행을 행복으로 돌릴 수도 있다. 苦惱를 해소하고 불완전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이끄는 종교의 가르침이 설해지는 것도 諸行無常이라는 기본적인 진리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 무상의 체득을 위한 實踐行法을 불교에서는 무상관(無常觀)이라고 한다.

無常觀이 설해지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모 형제나 이웃의 죽음에 의해 세상의 無常함을 느끼고 종교심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부족함이 있을 때 自己反省을 하게 되고, 그 반성에 의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바른 눈이 트이며, 자기와 세상과의 결합관계를 알게 됨으로써 종교심이 움트는 것이다. 둘째, 無常을 생각함으로써 執着이나 憍慢心을 버리게 된다. 셋째, 無常觀에 의해 시간을 아끼고 精進 努力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제법무아(諸法無我)

諸法의 法은 무아성(無我性)을 뜻하며, 이 諸法은 諸行과 마찬가지로 현상으로서의 一切法을 뜻한다. 無我는 ‘我가 없다.’, ‘我가 아니다.’는 뜻이며, 아(我)란 生滅變化를 벗어난 永遠不滅의 존재인 實體 또는 本體를 뜻한다. 이와 같은 실체와 본체는 경험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는지 아닌지가 분명하지 않은 무기(無記)라 하여, 불교에서는 이를 문제 삼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뜻에서 諸法無我는 모든 것이 ‘我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諸行無常이란 누구에게나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지만, 諸法無我는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불교 특유의 敎說이다.

釋迦牟尼 당시의 인도 종교들은 모두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영원한 존재로서의 본체를 인정하였다. 우주적인 실체를 범(梵, brahman)이라 하고, 개인적인 실체를 아(我, atman)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이를 인식할 수도 없고, 그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고 하여 無記라 說하고, 또 그러한 본체와 실체는 現象界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修行이나 解脫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3) 열반적정(涅槃寂靜)

涅槃은 ‘불어 끄는 것’ 또는 ‘불어서 꺼져 있는 상태’라는 뜻으로, 煩惱의 불을 불어서 끄는 것이다. 불교의 이상(理想)은 곧 涅槃寂靜이다. 釋迦牟尼가 인생의 고(苦)를 불가피한 것으로, 우선 단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종교적 안심(安心)의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三法印과 합하여져서 四法印을 이루는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일체고행(一切苦行) 또는 제행개고(諸行皆苦)라고도 한다. 이 법인은 일체의 현상법이 고(苦)임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즉, 모든 현상법이 無常하기 때문에 고(苦)라고 한 것이다. 諸行無常과 諸法無我의 命題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여졌지만, 一切皆苦의 명제는 무조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상계는 고뿐만 아니라 낙(樂)도 있고 불고불락(不苦不樂)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고(苦苦)·괴고(壞苦)·행고(行苦)의 삼고(三苦) 가운데 一切皆苦에 해당하는 것은 行苦뿐이라고 보았다. 行苦란 현상(現象)의 법(法)을 고(苦)라고 한 것으로, 現象의 法을 반드시 고(苦)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불교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윤회(輪廻)와 미혹(迷惑)의 생활 자체가 고(苦)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一切皆苦는 迷惑한 凡夫에게만 해당되며, 迷惑이 殘存하는 이상은 일체의 現象이 고(苦)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一切皆苦를 法印으로 설정한 까닭은 현실의 고(苦)와 무상(無常)과 부정(不定) 등을 관찰하여 현실의 고뇌(苦惱)를 벗어나서 안락(安樂)한 理想의 境地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참고

『불교학개론』(김동화, 백영사, 1965)

『불교개론』(무진장, 홍법원, 198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3170&cid=1620&categoryId=1620

33. 四聖諦(Catvāri-ārya-satyāni, Cattbri-ariya-saccani) - 苦諦·集諦·滅諦·道諦

불교 교리의 핵심으로 釋迦牟尼가 깨달은 4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사성제(四聖諦) 또는 사제(四諦)는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원시 불교 가르침으로 불교 기본 교의 가운데 하나이다. "제(諦, Satya)"는 진리 또는 깨우침을 뜻한다. 四聖諦는 "네 가지 높은 깨우침(Ārya Satya)" 또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라는 뜻인데,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의미한다. 흔히 이 네 가지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부른다.

釋迦牟尼의 성도(成道) 후 자기 자신의 자내증(自內證)을 고찰하여 설한 것이 십이인연(十二因緣)이라면, 四諦說은 이 因緣說을 알기 쉽게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 체계를 세운 法門이다. 十二緣起說이 이론적인 것임에 대해 四諦說은 이론적인 동시에 實踐的인 것이며, 오히려 實踐을 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釋迦牟尼는 成道 후 좌선사유(坐禪思惟)에 의해 스스로의 깨침을 즐겼으나, 인연의 이치가 매우 어려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설법 방법을 연구하여 四諦說을 고안하였다. 인도 베나레스(바라나시) 근처의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比丘)를 상대로 행한 최초로 설법한 것이 四諦의 가르침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는 集과 苦라는 연기(緣起)하는 항목과 道와 滅이라는 緣起하는 항목을 합하여 나란히 늘어놨다. 여기에서 集은 苦의 原因 또는 因緣이 되며, 道는 滅의 原因 또는 因緣이 된다. 苦集滅道는 苦痛의 원인이 執着 또는 渴愛이며 苦痛을 消滅시키는 原因 또는 手段이 道라는 緣起關係를 밝힌 것이다.

첫째는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괴로움(dukkha)이라는 고성제(苦聖諦)이다.

둘째는 그 괴로움에는 원인(samudaya)이 있다는 것으로, 무지(無明), 잠재적 형성력(行), 식별작용(識), 명칭과 형태(名色), 눈·귀·코·혀·몸·마음 등의 6가지 감각기관(六處), 접촉(觸), 느끼어 받아들이는 작용(受), 갈애(愛), 집착(取), 생존(有), 태어나는 것(生), 늙고 죽는 것(老死) 등의 그 12가지 요소는 무한하게 반복 순환한다. 이 순환과정 등이 바로 그 원인이라고 하는 집성제(集聖諦)이다.

셋째는 괴로움은 완전히 멸할 수 있으며 괴로움을 없앤 상태가 해탈이라고 하는 멸성제(滅聖諦)이다.

넷째는 괴로움을 멸하기 위한 8가지의 바른 수행방법, 즉 8정도가 있다는 멸도성제(滅道聖諦)이다. 이 중 苦諦와 集諦는 緣起法에서 유전연기(順觀, 流轉緣起)에 속한다. 流轉緣起란 無明으로부터 生·老·病·死가 일어나는 과정이다. 滅諦와 道諦는 환멸연기(逆觀, 還滅緣起)에 속한다. 還滅緣起란 허깨비 같은 이러한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지는 과정을 말한다. 고(苦)와 집(集)은 중생들의 상태이고 멸(滅)은 부처의 상태, 도(道)는 수행자(修行者)가 부처가 되기 위해 가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1) 고성제(苦聖諦) - 苦苦(生苦, 老苦, 病苦, 死苦), 壞苦(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 行苦(五取蘊苦)

고성제(苦聖諦, Duhakaha Satya)는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의 삶은 고(苦)라고 하는 진리이다. 즉, 인간은 色·受·想·行·識의 五蘊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깨치지 못한 사람, 즉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삶은 苦痛이라는 通察이다.

고(苦)란 미망에 싸여 사는 삶이란 괴로움이다. 生·老·病·死가 괴로움이요, 싫은 사람을 만남,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 몸과 느낌과 표상과 의지나 감정과 생각에 취착함도 괴로움이다.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번뇌, 두려움, 불안 등뿐만 아니라 不滿足, 倦怠 등을 포함하는 모든 불만족스런 상태를 말한다. 三法印에서는 一切皆苦(모든 것이 괴로움)라고 하고 있으니, 미망에 싸여 있으면 일체가 괴로움이 원인이 된다. 여기에는 육체적 苦와 정신적 苦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苦諦는 이처럼 불완전하고 더러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 고(苦)는 구체적으로 8고(八苦)로 세분하기도 한다. 苦痛은 크게 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生·老·病·死의 고고(苦苦), 변화하고 무너지는 괴고(壞苦), 五蘊으로 이루어진 존재에 實體가 있다고 執着함에 의해 비롯되는 행고(行苦)등의 3고(三苦)로 분류한다.

먼저 고고(苦苦)는 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인 生·老·病·死의 고통을 말한다. 生·老·病·死 중 특히 生과 死는 아직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輪回를 벗어나지 못하며, 깨달음을 成就할 때까지는 배움을 위해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생고(生苦, 태어나는 고통), 노고(老苦, 늙는 고통), 병고(病苦, 병드는 고통), 사고(死苦, 죽는 고통)이다.

다음으로 괴고(壞苦)는 "무너지는 苦痛"인데, 모든 것이 인과 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緣起의 法則 즉 因果의 法則과 모든 존재가 固定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無常의 법칙에 기초하여 일어나는 "變化하고 무너지는 苦痛"이다. 즉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구부득고(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고통)이다.

愛別離苦와 怨憎會苦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거나 사별하는 것, 그리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산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고뇌의 원인이 된다. 특히 자기중심적인 애증(愛憎)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뇌는 더욱 甚해지는 것이다. 求不得苦는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앞의 것과 같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생기는 고통들이다.

끝으로 행고(行苦)는 오온(五蘊) 또는 오취온(五取蘊)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인간 자신에 대하여 "나"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에 의해 비롯되는 고통으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도 한다.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앞의 일곱 가지를 개괄한 것으로, 五蘊(一切法)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집착을 가진다면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

(2) 집성제(集聖諦)

집성제(集聖諦, Samudaya Satya)는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로,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이 겪는 苦苦·壞苦·行苦 등 모든 고통의 원인은 업(業)과 번뇌(煩惱)에서 비롯됐다는 통찰이다. 南方上座部 佛敎에서는 煩惱 중에서 인간의 갈애(渴愛, 갈망함) 또는 망집(妄執)을 핵심적인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반면 大乘佛敎에서는 "나" 또는 "나의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무지(無知) ·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을 고통의 주원인으로 본다.

집(集)이란 집기(集起), 즉 사물이 모여 일어나기 위한 원인이므로 고(苦)의 원인이나 이유라는 뜻이 된다. 集諦는 위의 고(苦)가 일어나는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고(苦)의 원인은 渴愛이다. 渴愛가 일어나는 원인은 無明이다. 無明으로 인해 渴愛할 바가 없는데도 渴愛를 하게 되므로 고(苦)가 일어난다. 渴愛에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愛着과 貪慾을 일으키고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排斥과 憎惡의 마음을 일으킨다. ‘도처에서 열락(悅樂)을 추구하여 그치지 않는 갈애(渴愛)’를 뜻하는데, 십이연기론(十二緣起論)에서는 無明과 渴愛를 苦惱의 원인으로 함께 보고 있다.

그러나 渴愛는 無明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그 속에 無明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渴愛는 모든 煩惱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갈애는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의 삼애(三愛)가 있다. 欲愛는 감각적 욕구인 오욕(五欲)에 대한 갈애로서, 현실에 있어서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愛慾을 말한다. 有愛는 존재를 뜻하는 유(有)에 대한 渴愛로서, 사후에 天國 등의 훌륭한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欲求이다. 이것도 자기중심적인 욕구이며, 天國 등도 윤회계(輪廻界)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無有愛의 無有는 非存在, 즉 虛無를 말한다. 어떠한 存在도 절대 확실한 안온세계(安穩世界)가 아니기 때문에 꿈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계(虛無界)를 안주(安住)의 땅으로 삼는 것을 無有愛라 하는데, 無有愛 또한 자기중심적인 것이므로 理想으로 삼는 것을 禁하고 있다.

무아(無我)나 현세적 입장에서 볼 때 이 渴愛는 煩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고통의 원인을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의 근본 번뇌가 포함되어 있다. 자기에게 맞으므로 貪慾을 일으키고, 맞지 않기 때문에 憤怒하며, 그것이 다시 갖가지 어리석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1) 十二緣起(dvādaśāuga-pratītyasamutpāda)

십이연기(十二緣起)는 십이인연(十二因緣)·십이유지(十二有支)·십이지(十二支)·십이인생(十二因生)·십이연문(十二緣門)·십이견련(十二牽連)·십이극원(十二棘園)·십이중성(十二重城)·십이형극림(十二荊棘林)으로 불리며, 三界(미혹한 세계)에 대한 미(迷)의 인과관계를 12로 나눈 것이다.

無明⇨行⇨識⇨名色⇨六入(六處)⇨觸⇨受⇨愛⇨取⇨有(業)⇨生⇨老死

2) 順觀(流轉緣起) - 無明(緣起·四聖諦에 無知함)⇨行(業을 형성함)⇨識(최초 識·認識作用)⇨名色(認識의 構造)⇨六入(六處, 認識하는 器官)⇨觸(接觸作用)⇨受(感受作用)⇨愛(欲望을 일으킴)⇨取(執着을 일으킴)⇨有(業, 業의 形成, 輪回)⇨生(태어남)⇨老死(늙고 죽음)

3) 逆觀(還滅緣起) - 老死(늙고 죽음)⇨生(태어남)⇨有(業, 業의 形成, 輪回)⇨取(執着을 일으킴)⇨愛(欲望을 일으킴)⇨受(感受作用)⇨觸(接觸作用)⇨六入(六處, 認識하는 器官)⇨名色(認識의 構造)⇨識(최초 識·認識作用)⇨行(業을 형성함)⇨無明(緣起·四聖諦에 無知함)

① 무명(無明) - 미(迷)의 근본인 무지(無知)

② 행(行) - 무지(無知)로부터 다음의 의식작용(意識 作用)을 일으키는 동작

③ 식(識) - 의식작용(意識 作用)

④ 명색(名色) - 이름만 있고 형상(形相)이 없는 마음과 형체(形體)가 있는 물질

⑤ 육입(六入, 六處)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 5관(官)과 의근(意根)

⑥ 촉(觸) - 사물에 접촉(接觸)

⑦ 수(受) - 외계(外界)로부터 받아들이는 고(苦)·낙(樂)의 감각

⑧ 애(愛) -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구(求)함

⑨ 취(取) - 자기가 욕구 하는 물건을 취(取)함

⑩ 유(有) - 업(業)의 다른 이름, 다음 세상의 결과를 불러올 업(業)

⑪ 생(生) - 이 몸을 받아 남

⑫ 노사(老死) - 늙어서 죽음

4) 緣起의 解釋

연기를 해석할 적에 1찰나(刹那)에 12연기를 갖춘다는 학설과, 시간적으로 三世에 걸쳐 설명하는 두 종류가 있다.

流轉緣起의 일반적인 형식은 “무명(無明)에 연(緣)하여 행(行)이 있으며…”이다. 이것은 곧 “無明이 滅하기 때문에 行이 滅하며…”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 같은 형식이 환멸문(還滅門)의 연기, 역관(逆觀)의 十二緣起이다. 部派佛敎 시대가 되면 十二緣起는 過去世에서 現在世, 다시 未來世에 이르는 삼세(三世)에 걸친 인과관계로 설명되어 시간적인 설명에 따르는 이른바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서의 緣起說이 十二緣起의 유일한 해석으로 간주(看做)되었다. 이것에 의하면 十二緣起 중 ‘無明’과 ‘行’은 過去世에 속하는 것이며, 이 둘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서 現在世에 ‘識·名色·六處·觸·受’의 五支가 나타난다.

곧 식(識)으로부터 수(受)까지의 다섯 가지를 현재의 五果라 하고, 無明·行을 현재의 果報를 받게 한 과거의 二因이라 한다(過現一重因果). 다음에 愛·取는 과거의 無明과 같은 혹(惑)이요, 有는 과거의 行과 같은 업(業)이니, 이 현재는 三因에 의하여 미래의 生·老死의 과(果)를 받는다 한다(現末一重因果). 12 연기의 열두 요소는 시간적으로는 ① 과거의 원인 ② 현재의 결과 ③ 현재의 원인 ④ 미래의 결과에 해당하는 열두 요소가 있다.

① 과거의 원인(集聖諦, 過去의 二因) : 無明, 行(渴愛, 取着, 有(業)을 생성)

⑴ ‘無明’은 迷惑의 근본으로서의 無智로, 사제(四諦)와 緣起 등의 올바른 世界觀·人生觀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고뇌와 불행이 일어나는 근본원인은 올바른 世界觀·人生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⑵ ‘行’은 형성력으로서의 行爲, 행위의 집적(集積)이다. 사고행위(意行), 언어행위(語行), 신체적 행위(身行) 등의 모든 행위는 그 행위 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축적 ·보존되어 인격의 내용이 된다. 행은 무지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윤회(輪廻)의 원인으로서의 업(業)을 가리킨다.

② 현재의 결과(苦聖諦, 現在의 五果) : 識, 名色, 六入(六處), 觸, 受

⑶ ‘識’은 認識判斷의 意識作用임과 동시에 認識判斷의 主體이다. 感覺作用으로서의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 五識과 의식(意識)을 가리키는데, 意識은 六識을 主體的으로 보는 것으로, 식체(識體)라고도 한다.

⑷ ‘名色’과 ⑸ ‘六入’은 앞의 ‘識’과 밀접한 相互依存 관계에 있다. ‘識’은 識體 즉, 認識判斷의 주체이며, ‘名色’은 이 ‘識’의 대상으로서 인식된 물질(色)과 정신(名)이다. 名色은 六識의 대상으로서의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이다. 이 六境을 인식판단하기 위한 능력이 있는 기관이 ‘六入(六處)’인데, 이것은 眼根(시각기관 또는 그 능력)·耳根(청각기관)·鼻根(후각기관)·舌根(미각기관)·身根(촉각기관)·意根(사유기관)을 말한다.

⑹ 일반적으로 ‘觸’은 根·境·識의 셋이 接觸하는 것이다. 즉 三者의 化合이 ‘觸’이다.

⑺ ‘受’는 根·境·識의 三者가 化合하여 생긴 고락(苦樂) 등의 감수작용(感受作用)이다. ‘受’에는 고수(苦受)·낙수(樂受)·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三受가 있는데, 이것을 다시 육체적 ·정신적인 두 방면으로 나누어 우(憂)·희(喜)·고(苦)·락(樂)·사(捨)의 五受로 나누기도 한다.

③ 현재의 원인(集聖諦) : 渴愛, 取着, 有(業)의 생성(無明, 行으로 因함)

⑻ ‘愛’는 갈애(渴愛), 즉 맹목적인 사랑을 말한다.

⑼ ‘取’는 취착(取着)의 뜻이다. 즉 싫어하는 것을 버리고, 좋아하는 것을 取하는 取捨選澤의 행동이다.

⑽ ‘有(業)’는 取着的 행위가 계속되고 선악업(善惡業)이 축적되어 잠재력으로 자리 잡은 것을 말한다. 우리의 現存在는 과거의 行爲經驗이 蓄積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現存在가 ‘有(業)’이므로 現存在로서의 人格이 기본이 되어 우리의 未來를 規定하게 된다.

④ 미래의 결과(苦聖諦) : 生, 老死(識, 名色, 六入(六處), 觸, 受로 因함)

⑾ ‘生’은 내세의 生이라 할 수도 있으며,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여 새롭게 나타나는 모습을 生이라 할 수도 있다.

⑿ ‘老死’란, 인간은 태어나면 반드시 늙고 죽게 마련인데, 이러한 자연적인 사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老死와 관련된 苦痛을 가리킨다. 즉 이 老死는 모든 人間苦의 總稱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迷惑의 현실세계가 무엇에 기초하여 成立되어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 유전문(流轉門)의 연기, 순관(順觀)의 十二緣起이다.

(3) 멸성제(滅聖諦)

멸성제(滅聖諦, Nirodha Satya)는 苦痛의 消滅에 관한 진리, 혹은 고통의 원인의 완전한 소멸에 관한 진리로 고통의 원인인 갈애(渴愛)·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음을 通察하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가 열반(涅槃) 또는 해탈(解脫)이며, 모든 煩惱를 대표하는 渴愛를 남김없이 滅함으로써 청정무구(淸淨無垢)한 解脫을 얻었음을 말한다. 이를 열반(涅槃)이라고도 한다. 즉 갈애(渴愛)가 사라지고 따라서 온갖 번뇌도 사라져 장애(障礙)가 없어 깨달음의 목표, 곧 이상향인 열반(涅槃)의 세계를 가리킨다. 이는 깨달음으로써 가능하다. 깨달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치적(理致的)으로 이해하여 깨닫는 것과 수행(修行)을 통하여 몸에 붙어 있는 습관(習慣)마저 끊어 실제로 열반(涅槃)에 드는 것 이렇게 두 가지이다.

(4) 도성제(道聖諦)

도성제(道聖諦, Mārga Satya)는 고통(苦痛)을 소멸(消滅)시키는 행(行)을 하는 진리(眞理)를 말한다. 즉, 도제(道諦)를 行함으로써 실제로 滅諦("苦痛의 원인을 除去할 수 있다는 것")를 成就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면에서 도제(道諦)는 멸제(滅諦)의 原因이 되는 實踐 또는 수행(修行)을 의미한다.

도(道)는 理想鄕인 열반에 도달하는 원인으로서의 수행방법이며,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라는 여덟 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팔정도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지며(正念),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正定) 수행법이다. 이는 또 유(有)에도 무(無)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수행법으로서 원시불교의 根本敎義를 이루고 있다. 사성제(四聖諦) 중의 고(苦)는 생사과(生死果)이고, 집은 생사인(生死因)이며, 멸은 열반과(涅槃果)이다. 이는 다시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열기(還滅緣起)의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두 가지는 생사유전(生死流轉)의 고통과 그 원인을 말하고 멸(滅)과 도(道)의 두 가지는 유전(流轉)을 벗어나 무고안온(無故安穩)의 涅槃果에 도달할 수 있는 환멸(還滅)의 수행법을 말한다. 불교의 모든 교의는 사실상 도성제(道聖諦)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 불교에서는 도제(道諦)를 팔정도(八正道)를 포함하는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의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인 것으로 설명한다.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도제를 三十七助道品 외에 菩薩의 願行(菩薩의 誓願과 修行, 간단히 菩薩行 또는 菩薩道)을 담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般若(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 또는 육바라밀에 방편(方便)·원(願)·역(力)·지(智)의 네 가지를 추가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후기의 학자들은 성문(聲聞)이 고집하는 사제(四諦)의 견해를 파(破)하기 위하여 일체의 제법(諸法)이 공적(空寂)하다는 입장에서 볼 때는 고(苦)·집(集)·멸(滅)·도(道)가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執着을 깨뜨려서 四諦의 眞義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선가(禪家)에서는 四諦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苦諦는 한 생각 물든 마음이 생기는 것을 뜻하고, 集諦는 그 생각이 거듭 이어지는 것을 뜻하며,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滅諦라 하고, 멸이 멸하지 않음을 철저히 아는 것을 道諦라고 하였다. 즉 四諦를 모두 한 생각에 둔 것이다.

滅諦에서 말한 涅槃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방법을 道諦에는 여덟 가지가 있고 이를 팔정도(八正道)라고 한다. 팔정도(八正道)는 다음과 같다.

1) 八正道 - 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見·思·語·業·命·精進·念·定)

① 正見(바른 견해)

慧學에 속하며, 나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 결국 괴로움을 불러오지만,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이 바른 방향으로 가게 되어 마침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가 만든 모든 업(業)은 결국 내가 받게 되며 남이 대신 받을 수 없다. 業에는 善業과 惡業이 있으며, 각자가 지은 業에 따라 앞으로 전개될 나의 모습이 달라진다. 善業에는 반드시 선과(善果)가 주어지고 惡業에는 반드시 악보(惡報)가 주어진다. 삶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現象이 모두가 아니며, 따라서 이러한 과보(果報)가 현생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를 바로 보고 이해하는 것을 正見(바른 견해)이라고 한다.

근본적인 바른 견해는 내생에 좀 더 나은 모습으로 태어나려는 觀點에 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輪廻를 벗어버리는 길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즉,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진리(四聖諦)를 바로 알고 涅槃에 이르는 길을 바로 보는 것이다.

② 正思(바른 생각)

戒學에 속하며, 생각은 단순한 사색(思索)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意圖)를 가진 생각을 말한다. 바른 생각(正思)은 모든 존재로 확산되어 갈 수 있는 욕심을 떠남(出離思)과 성내지 않음(無恚思)와 해치지 않음(無害思)의 생각을 뜻한다. 올바른 생각(正思)은 智慧로운 생각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생각(正思)이 欲望을 떠나고 사랑을 行하고 暴力을 버리는 것이라면 욕망과 성냄과 폭력은 지혜롭지 못한 생각에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은 報償을 念頭에 둔 생각이 아니다. 모든 生命體 가운데 자신을 두고 함께 느끼는 생각이다.

③ 正語(바른 언어)

戒學에 속하며 올바른 言語活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⑴ 거짓말을 하지 말 것(不妄語) - 眞實한 말을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⑵ 離間하는 말을 하지 말 것(不兩口) - 남을 離間시키지 말며, 和合시키는 말을 해야 하며, 말을 이리 저리 옮겨서 다투게 만드는 것은 거짓말은 아니더라도 아주 나쁜 意圖가 있다. 따라서 事實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올바른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⑶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말 것(不惡語) - 거칠고 상스러운 말로 듣는 사람에게 不快感을 주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욕설, 비꼬는 말, 侮辱을 주는 말 등이 이러한 것이다. 말을 친절하고 부드럽게 하며, 그 말에 사랑이 담겨 있도록 해야 한다.

⑷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 것(不綺語) - 雜談, 橫說竪說하는 말, 弄談 등을 하지 말고, 意味 있고 條理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하는 유머는 쓸데없는 말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외에도 淫亂한 말, 남을 恐怖心에 몰아넣는 말, 勇氣를 잃게 만드는 말, 根據도 없이 상상해서 하는 말 등을 하지 말아야 한다.

④ 正業(올바른 행위)

戒學에 속하며, 잘못된 行動을 하지 않는 것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行爲라고 한다. 올바른 행위를 위해선 올바른 견해(正見)와 올바른 사유(正思)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되며, 넓은 의미에서는 言語活動도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탐(貪)·진(瞋)·치(癡)는 잘못된 행동을 하는 중요한 원인(原因)이 되므로 불교에서는 이를 三毒(삼독)이라고 부른다.

⑴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이지 말 것(不殺生) - 죽이지 않을 뿐 아니라 괴롭히거나 다치게 해서도 안 된다. 적극적인 의미로는 생명들이 생명답게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⑵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말 것(不偸盜) -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나에게 주지 않았는데도 가지는 것은 잘못된 행위이다. 남이 나에게 주었다고 해도 過度한 물건은 받지 말아야 하며, 나쁜 의도를 가지고 주는 물건도 받지 말아야 한다. 또 상대방이 正常的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나에게 준 물건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적극적인 의미는 他人의 財産을 존중하고 그들이 사용할 權利를 인정하는 것이며, 자신의 分數에 만족하는 滿足感이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자신의 富와 財産을 남을 위해 베푸는 布施의 정신을 키우는 것이다. 때로는 宗敎的 狂信 상태에 빠져들어 宗敎에 자기 財産을 마구 바쳐 온 주위가 어려워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過度한 것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았다면 이는 도둑질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⑶ 正當하지 않은 性生活을 하지 말 것(不邪淫) - 夫婦間 性生活 외의 境遇는 모두 삿된 것이다. 强要에 의한 경우나 속임수를 사용하는 경우 등도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한다.

이외에 술을 마시지 말 것(不飮酒)과 불망어(不妄語)를 합쳐 오계(五戒)로 정해 경계하고 있다.

⑤ 正命(바른 생활)

戒學에 속하며, 現代的 意味로 본다면 職業을 말한다. 올바른 생활(正命)이란 우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는 않는 생활을 말한다. 脫稅, 脫法, 不良製品製造, 不動産投機 등은 우리 사회에 비추어 볼 때 남에게 被害를 주며 社會的 害惡이 된다. 生命의 販賣, 비록 世俗的인 法에는 어긋나지 않더라도 武器의 販賣나 毒劇物의 販賣, 술의 販賣, 고기의 販賣는 피해야 할 직업이다. 또 欺瞞, 妖說, 占術, 高利貸付도 잘못된 생활이다. 몸에 害로운 담배나 痲藥을 製造하거나 販賣하는 행위 역시 바르지 못한 생활이다. 그 외에도 바가지요금을 받는 것, 不當한 利潤을 챙기는 것, 정신적으로 해로운 출판물을 만드는 것 등도 잘못된 생활이다. 또 앞에서 말한 올바르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하는 직업 생활도 모두 잘못된 생활이다.

어떤 일을 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勤務時間에 시간만 보낸다든지, 勤務와 無關한 일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자리를 함부로 비우는 것, 職位나 職責을 이용해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⑥ 正精進(바른 노력)

慧學에 속하며, 精進은 努力을 말한다. 이것은 물론 올바른 견해(正見)와 올바른 생각(正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이러한 올바른 정진에는 네 가지의 노력(四精勤)이 있다.

⑴ 제어에 의한 노력(律儀勤, samvarappadhana) - 아직 생겨나지 않은 나쁜 상태의 발생을 방지하는 것

⑵ 극복하려는 노력(斷勤, pahanappadhana) - 이미 일어난 나쁜 상태를 극복하는 것

⑶ 수행에 의한 노력(修勤, bhavanappadhana) - 수행을 통하여 좋은 상태를 생겨나도록 하는 것

⑷ 지킴에 의한 노력(守護勤, anurakkhanappadhana) - 좋은 상태를 지키는 것인데 그 방법으로는 삶이 괴로움으로 차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유지하여 解脫로 향해 간다.

⑦ 正念(바른 새김)

慧學에 속하며, 올바른 새김(正念)은 마음을 올바른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며, 정정진(正精進)의 힘을 통해 가능하다. 마음이 分別心에 사로잡히지 않고, 淸靜하게 維持하는 것이다. 事物을 認知하자마자 곧 認識作用을 일으켜 그것을 槪念化하는 과정에서 主觀的 생각들이 영향을 주어 觀念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本來의 對象 그 자체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때 있는 그대로를 그냥 보게 하는 것을 바른 새김(正念)이라고 한다. 이는 무엇인가를 한다기보다는 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⑧ 正定(바른 집중)

定學에 속하며, 八正道 가운데 마지막이 올바른 집중(正定) 乃至 삼매(三昧)이다. 冥想의 過程에서의 올바른 집중(正定)은 善하고 건전한 마음의 상태에서의 集中過程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쁜 의도를 가진 集中을 三昧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事物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 새김을 隨伴하며 解脫의 契機로서 작용한다. 이는 分別心을 떠나며, 慾心과 삿된 마음을 떠난 集中이다.

잘 集中된 마음은 冥想의 주제인 대상에 焦點을 맞추어 그 속에 浸透하고 거기에 吸收되어 그것과 하나가 된다. 그래서 精神的 障礙의 除去와 마음새김의 확립이라는 삼매(三昧)의 과정에 수반되는 올바른 집중은 마음의 멈춤(止, samatha)과 대상의 관찰(觀, vipassana)이라는 두 가지 계기를 갖고 있다. 이러한 멈춤과 관찰(觀察)의 實踐的 作業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명상의 장(業處, kammatthana)이다.

2)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三十七助道法, 三十七菩提分法, 三十七菩提分, 三十七道品, 三十七品, 三十七道分, 三十七覺支, bodhipakkhiyā dhammā, bodhipakṣa dharma)

사념처(四念處, 四念住)⇨사정단(四正斷, 四正勤)⇨사신족(四神足, 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 七覺分)⇨팔정도(八正道)⇨四聖諦의 깨달음⇨견성해탈(Aria-sacca)의 37가지 도품(道品) 또는 선법(善法) 또는 수행법(修行法)

① 사념처(四念處) - 염근(念根), 네 가지를 대상으로 대상범부 중생의 주관을 바꾸어 출세간(出世間)의 불법(佛法)을 배우도록 하는 修行 방법

⑴ 身念處 - 몸을 부정(不淨)한 것으로 깨닫는 14대상 관찰(身)

⑵ 受念處 - 느끼는(感受)하는 모든 것이 고통인 것을 깨닫는 감정의 9대상 관찰(受)

⑶ 心念處 - 모든 마음의 참뜻을 깨닫는 아는 16대상 관찰(心)

⑷ 法念處 - 법(法)은 無我인 것을 깨닫는 5대상 관찰(法)

② 4정단(四正斷, 4가지 노력) - 팔정도의 올바른 노력(正精進)과 같은 내용으로 모든 악(惡)을 끊고 선(善)을 키우기 위해 부단히 바르게 精進(노력) 한다는 뜻이다.

⑴ 단단(斷斷) - 악하고 착하지 않은 것을 예방하는 노력

⑵ 율의단(律儀斷) - 일어나거나, 일어난 악하고 착하지 못한 것을 극복하는 노력

⑶ 수호단(隨護斷) - 이미 생긴 선(善)하고 착한 것을 계발(啓發)하거나 사라지지 않게 하는 노력

⑷ 수단(修斷) - 일어나거나, 일어난 善하고 착한 것을 유지시키는 노력

③ 수호단(隨護斷)의 노력이 일어나면 ① 단단(斷斷)과 ② 율의단(律儀斷)의 노력은 저절로 따라오고 四正斷으로 戒·定·慧가 일어난다.

③ 사여의족(四如意足, 四神足) - 깨달음을 향한 참구(懺咎), 精進과 努力, 마음을 통일하는 禪定, 바른 思惟로 네 가지의 가르침으로 神通스러운 自由自在로움을 얻는 修行

⑴ 욕신족(欲神足) - 강렬한 구도심으로 苦를 종식시키고 뛰어난 선정을 얻기 위하여 수행하려는 懇切心(欲如意足, 意欲定)

⑵ 근신족(勤神足, 精進神足) - 精進의 힘으로 禪定을 얻기를 노력하여, 고(苦)를 終熄시키려는 노력(精進如意足, 精進定)

⑶ 심신족(心神足, 意定神足) - 마음의 힘으로 禪定에 들기를 노력하여, 고(苦)를 終熄시키기 위한 禪定三昧를 이루려는 마음(心如意足, 心定)

⑷ 관신족(觀神足, 思惟神足) - 智慧로 깊이 觀察하여 禪定 얻는 것으로 고(苦)를 終熄시키는 지혜(思惟如意足, 思惟定)

④ 오근(五根) - 煩惱에 벗어나 깨달음으로 가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하는 修行法

⑴ 신근(信根) : 확고부동한 신심으로, 바르고 굳은 믿음으로 수행의 뿌리를 내린다. 이 상태에서 마음은 강하게 되어 결코 지루하거나 피로함을 느끼지 않는다. 믿음은 여래에 대한 발보리심과 사념처가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⑵ 근근(勤根, 精進根) : 올바른 精進으로 수행에 물러섬이 없는 것이다. 수행에서 마음을 제어하는 勇猛스런 노력이다. 修行에서 게으름과 懈怠함을 물리친다. 信根이 강하면 精進根도 강하다.

⑶ 염근(念根) : 바른 가르침을 항상 깊이 생각하여 바르게 기억한다. 마음집중(마음챙김, 알아차림)이다. 사념처(四念處)가 염근(念根)이다.

⑷ 정근(定根) : 바른 禪定으로 마음을 고요히 하여 올바른 마음을 가진다. 사념처 수행에서 念覺(마음챙김)과 精進覺이 均衡이 되어 현재에 일어나는 現像에 密着되어 지속되는 상태이다. 여기에서 사선정(四禪定)이 있다.

⑸ 혜근(慧根) : 혜근은 어리석음을 쳐부수며, 정근(定根)과 항상 같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깊은 정근(定根)에서 깊은 지혜(智慧)가 나온다. 불법(佛法)의 진리를 여실히 통찰(通察)하여 올바른 지혜(智慧)로 뿌리를 내리면 정견(正見)이 확립되어 사성제(四聖諦)를 실현하고 견성해탈(見性解脫)을 실현한다.

⑤ 오력(五力) - 오력(五力)은 오근(五根)과 같은 역할을 하지만 힘이 강하다. 불교에 대한 실천적 기초 덕목(德目)이 되는 것이 곧 오력(五力)이며, 열반(涅槃)을 증득(證得)하기 위한 오근(五根)이 뿌리가 되어 실제로 활동하는 구체적인 힘이다.

⑴ 신력(信力) -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진리 아닌 것은 따르지 않는 힘으로 수행에 대한 믿음과 이 수행으로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⑵ 염력(念力) - 마음챙김(집중)의 힘, 바르게 생각하여 그릇된 생각을 버리며 오로지 修行에만 專念하는 힘으로 마음집중이 過去·未來가 아닌 일어나고 있는 現 當處에 密着되어 있어서 妄想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⑶ 근력(勤力, 精進力) - 선(善)을 짓고 악(惡)을 버리기에 부지런히 힘써 수행에 전념하는 힘으로 정진의 힘을 얻은 마음은 더욱 더 예리하게 되어 번뇌를 물리친다. 마음은 방황하지 않고 오장애(五障礙)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

⑷ 정력(定力) - 선정의 힘으로 마음챙김(집중)의 힘이 강하여 마음을 한곳에 모아 바로잡아 흐트러지지 어지러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몸과 마음의 현 당처를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보게 된다.

⑸ 혜력(慧力) - 지혜의 힘으로 지혜가 날카롭게 되어 자아(自我)에 대한 사견(邪見)에서 벗어난 올바른 견해(正見)를 갖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꿰뚫어 보아 지혜를 닦아 불교의 진리(四聖諦)를 깨닫는 힘이다.

⑥ 7각지(七覺支) -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며,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일곱 가지의 修行方法

⑴ 염각지(念覺支) : 깨어 있는 마음(sati)으로 바른 견해를 생각하여 지키는 것으로, 마음이 항상 깨어 있어 자기 자신이 지금 현재 무엇을 하고 있나 정확히 파악하여 실제의 모습을 깨달아 알아차리는 상태로 정혜(定慧)를 잊지 않는 것이다.

⑵ 택법각지(擇法覺支) - 법의 선택지(擇法支)로 진실한 것을 선택하고, 거짓된 것을 버려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三法印을 실현한다.

⑶ 정진각지(精進覺支) - 영웅적인 不退轉의 용맹스런 精進力을 발휘하여 진실한 가르침을 사유하면서 일심(一心)으로 精進修行하여 기필코 영원한 자유인 見性解脫을 成就하게 된다.

⑷ 희각지(喜覺支) - 修行이 점차적으로 진보됨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기쁨이 생겨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비교될 수 없는 法悅이 일어난다. 여기에 집착하면 환희마(歡喜魔)가 된다.

⑸ 경안각지(輕安覺支, 除覺支) - 몸과 마음을 평정하여 긴장·불안·초조가 사라지고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은 더욱더 맑아지고 쾌적하고 고요해진다.

⑹ 정각지(定覺支) - 마음을 집중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 현 당처에 밀착되어 지속됨으로써 일어나는 청정한 일념(一念)의 상태이다. 이때는 일체의 妄念 없이 순수한 일념이 된 평온한 상태의 마음으로 통일된 정신으로 삼매에 드는 수행 경지. 禪定力이 더욱 깊어져 마음이 한곳으로 모이는 集中力(samadhi)을 가리킨다.

⑺ 평등각지(平等覺支, 捨覺支) - 順境界(칭찬하는 것 등), 逆境界(욕하는 것 등), 五欲樂, 팔풍(八風)에 휘말리지 않고 초연하게 세상의 슬픔과 괴로움에 휘말리지 않은 평정한 상태이다. 오로지 법에 의지하여 온갖 집착을 버리고 통일된 마음으로 절대평등으로 잘 관찰하는 수행 경지로 世俗雜事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一切의 생각을 모두 버려 順逆과 苦樂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平靜狀態를 말한다.

⑦ 팔정도(八正道) - 佛陀가 괴로움의 현실을 終熄시킬 실천적 가르침으로써 베푼 것으로 여덟 가지 올바른 길(八正道)로 멸성제를 성취하는 수행방법

⑴ 정견(正見)

⑵ 정사(正思)

⑶ 정어(正語)

⑷ 정업(正業)

⑸ 정명(正命)

⑹ 정근(正勤, 正精進)

⑺ 정념(正念)

⑻ 정정(正定)

참고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uctgod&logNo=10175611649

http://cyhome.cyworld.com/?home_id=a1305092&postSeq=7643174&mf=&referrer=http%3A%2F%2Fsearch%2Edaum%2Enet%2Fsearch%3Fnil%5Fsuggest%3Dbtn%26w%3Dtot%26DA%3DSBCO%26q%3D37%25EC%25A1%25B0%25EB%258F%2584%25ED%2592%2588&init_linkcode

34. 六法供養 - 香(解脫香), 登(般若燈), 花(萬行花), 果(菩提果), 茶(甘露茶), 米(禪悅米)

35. 四弘誓願 - 衆生無邊誓願度·煩惱無量誓願斷·法門無盡誓願學·佛道無上誓願成

36. 四攝法 - 布施攝·愛語攝·利行攝·同事攝

37. 四無量心 - 菩薩道를 행할 때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 慈悲心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대시킨 것(慈無量心·悲無量心·喜無量心·捨無量心)

38. 六波羅蜜, 十波羅蜜 - 보살이 涅槃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할 여섯 가지의 修行, 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방편(方便)·원(願)·역(力)·지(智)

39. 菩薩道

40. 三學 - 불교의 세 가지 학문(戒學, 定學, 慧學)

41. 械學 : 正語·正業·正命·正思, 定學 : 正定, 慧學 : 正精進·正念·正見

42. 三慧 -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아 얻는 세 가지의 지혜(智慧). 경전(經典)을 들어서 아는 聞慧, 진리(眞理)를 생각하여 아는 思慧, 선정(禪定)을 닦아서 아는 修慧를 이른다.

43. 釋迦牟尼께서 道를 이룬 뒤 入滅할 때까지의 기간을 그 說法한 내용에 따라 다섯 시기로 나눈 것인데, 劉宋(中國 南朝 宋) 道場寺 慧觀은 삼승별교(三乘別敎), 삼승통교(三乘通敎), 억양교(抑揚敎), 동귀교(同歸敎), 상주교(常住敎)로 나누었으며, 천태종(天台宗)의 지의는 화엄시(華嚴時), 아함시(阿含時), 방등시(方等時), 반야시(般若時),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로 나누었다.

44. 선정(禪定)을 이루기 위한 다섯 가지 요소

(1) 위타카 - 겨냥하는 마음(尋)

(2) 위짜라 - 고찰하고 지속시키는 마음(伺)

(3) 피티 - 幻戲心

(4) 수카 - 幸福感

(5) 사마디 - 一念(三昧)

45. 불교의 수행도과(修行道果)

(1) 수다원(須陀洹)

① 잘못된 견해(五蘊을 영원한 自我와 관련 지어 보는 見解)

② 회의(懷疑, 三寶와 修行法에 대한 疑心)

③ 儀式·形式의 執着(戒律이나 禁止條項에의 執着)

(2) 사다함(斯陀含)

④ 感覺的인 慾望

⑤ 성냄의 煩惱(많이 약화)

(이상 다섯 가지 煩惱는 欲界에 存在를 붙들어 매는 煩惱라고 해서 五下分結이라고 한다.)

(3) 아나함(阿那含)

④, ⑤의 除去, 物質的 世界에 대한 執着이 완전히 破하여 破戒는 있을 수 없고, 慈悲心이 充滿

(4) 아라한(阿羅漢)

⑥ 色界에 대한 慾望

⑦ 無色界에 대한 慾望

⑧ 不安定함(掉擧, 들뜸)

⑨ 自慢心(名譽慾, 慢)

⑩ 根本無明 타파

이상을 미세한 물질의 세계(色界)와 정신의 세계(無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煩惱라고 해서 五上分結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탐(貪)·진(瞋)·치(癡)가 사라져 輪廻에서 벗어나서 完全한 自由와 涅槃을 成就한다.

46. 사마타(奢摩他, samatha, 止)의 禪定 - 八禪定

사마타(奢摩他, samatha)는 고요함을 啓發하는 冥想法(meditation)으로 고요함, 寂滅, 사마디(三昧)를 목표로 한다.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의 정(定)에 해당하며, 지관(止觀)에서 지(止)를 의미한다. 정(定)이나 지(止)는 인도어 사마타(samatha)를 한역한 것이다. 위빠사나(Vipassana)는 觀照, 觀察을 하는 冥想法(meditation)이다.

(1) 色界의 四禪定

1) 初禪定

다섯 가지 요소 중 ① 겨냥하는 마음과 ② 考察하고 持續시키는 마음이 顯著하게 나타나며 ③ 歡喜와 ④ 幸福感이 일어난다. ③ 歡喜는 바라는 것을 成就함에 다른 만족감이라면 ④ 幸福感은 成就했을 때 오는 實質的인 體驗이다.

初禪定이 熟達되면 自由自在로 원하는 시간만큼 禪定에 들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과도 같다. 처음에는 자주 넘어지지만 계속 鍊習으로 熟達된다. 通達해야 할 것이 다섯 가지 있다. ① 入定 ② 成就 ③ 禪定의 시간 ④ 出定 ⑤ 다시 살펴보는 것. 이것은 모든 禪定修鍊(1-8)에 해당한다.

2) 二禪定

初禪定에서 顯著했던 ①과 ②가 고요하게 되면서 二禪定으로 들어간다. ③, ④, ⑤와 함께 一念이 되어 內的인 確信을 갖게 된다.

二禪定이 熟達되면 執着하지 말고 三禪定으로 나아가야 한다. 二禪定에서 顯著했던 ③ 歡喜心을 整齊하고 ④ 幸福感과 ⑤ 一念으로 이루어진 平穩의 狀態로 나아가도록 다시 한 번 마음을 집중(定力)을 해야 한다.

3) 三禪定

여기서는 ③ 歡喜心이 고요해지고 몸으로 ④ 幸福感을 느끼면서 ⑤ 一念의 狀態로 들어간다. ③ 歡喜心은 즐겁기는 하지만 마음의 快感과 不安定의 要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整齊되고 ④ 幸福感과 ⑤ 一念만 남는다. 그러나 여기서 ④ 幸福感 역시 四禪定의 平等心(無心)에 비하면 아직도 相對的이고 거친 면이 있으므로 이것 역시 執着하지 말고 다음의 四禪定으로 나아간다.

4) 四禪定

④ 幸福感이 整齊된 四禪定에서는 평등심(無心)과 사마디(一念)만 남게 된다. 平等心은 相對的인 善·惡·美·醜·喜·悲…… 등으로부터 超然해 진다. 肉體的 感覺이 떨어져 나가고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비고(非苦)·비락(非樂)의 純粹한 一念의 상태에 든다. 물론 이러한 平等心은 이전의 初禪定·二禪定·三禪定에서도 존재했다. 이것은 마치 낮에도 달이 있지만 강한 햇빛 때문에 볼 수 없듯이 平等心은 보다 纖細하지 못한 ①, ②, ③, ④ 때문에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四禪定도 高度의 집중력(定力)과 平穩한 상태지만 無色界의 네 가지 禪定에 비하면 아직도 禪定의 完全한 狀態가 아니다.

(2) 無色界의 禪定

色界의 四禪定도 感覺的인 認識과 마음의 刺戟을 淨化했지만 아직도 어느 정도의 物質的 要素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物質的인 主題를 集中의 對象으로 했기 때문이다. 반면 無色界 四禪定은 인간의 環境을 둘러싸고 있는 肉體的, 精神的, 內·外的 要素를 뛰어넘어 지극히 微妙한 意識의 狀態로 들어간다. 이것이 形相이 없는 非物質的인 禪定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1) 五禪定(無色界 初禪定, 空無邊處定)

色界의 四禪定을 成就했지만 아직도 物質的인 要素들을 모두 克服하지 못했기 때문에 無色界의 禪定으로 나아가야 한다.

色界의 禪定은 無色界의 禪定보다 纖細하지 못하고 거친 면이 있기 때문에 四禪定에 대한 執着을 抛棄하고 空無邊處로 集中을 돌려야 한다. 처음 對象에 集中한 후에 그 對象을 최대한으로 멀리 擴張시켜 空無邊處로 集中을 轉換함으로써 物質的인 對象을 除去한다. 이때 物質的 對象을 除去할 때는 이 對象에 主意를 기울이지도 않고 다시 살펴보지도 않고 오로지 集中을 空無邊處 쪽으로 향한다. 例를 들면, 마치 독사에 쫓겨서 겁에 질려 정신없이 도망간 사람이 있을 때 그가 나뭇가지나 땅위에서 독사와 비슷한 형체를 보면 겁이 나서 얼은 고개를 돌리듯이 色界의 對象에서 空無邊處로 향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이렇게 하여 無色界의 첫 번째인 空無邊處로 성취한다.

2) 六禪定(無色界 二禪定, 識無邊處定)

五禪定에서 나온 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五禪定의 상태를 다시 살펴본 후 아직도 보다 높은 段階의 수준만큼 평화롭지 못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空無邊處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났던 識無邊處에 집중한다. 즉 空無邊處定에 머물며 顯著하게 나타났던 意識에 集中한다. 이렇게 하여 識無邊處의 近接三昧와 高度의 三昧를 成就하게 된다. 空無邊處를 완전히 뛰어넘게 됨에 따라 識無邊處에 머물게 된다.

3) 七禪定(無色界 三禪定, 無所有處定)

七禪定은 六禪定에서 나온 후, 아직도 다음 段階의 禪定 水準만큼 平和롭지 못하다는 것을 살펴보고 無所有處로 集中을 轉換한다. 이것을 실제로 體驗하기는 어렵다. 數學이나 哲學의 ‘零(zero)'이나 무(無)를 말한다. 이것 역시 직접 經驗하지 않고서는 認識하기 어렵다.

4) 八禪定(無色界 四禪定, 非想非非想處定)

七禪定도 認知하기 어려운데, 論理的으로 理解할 수 없는 八禪定을 말로써 說明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想도 아니고 非想도 아닌 狀態이니 오직 體驗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八禪定은 요가·수피(Sufi)·도가(道家) 등의 修行法과 本質的으로 다르다고는 할 수 없다. 부처님도 깨치기 전에는 이 修行法을 通達하고 滿足할 수 없어 두 분의 스승을 버리고 菩提樹 나무 밑으로 갔던 것이다.

(3) 滅盡定(寤寐一如 理想의 境地)

滅盡定은 사마타(奢摩他, samatha) 修行에서는 最高의 段階인 八禪定, 위빠사나 修行에서는 阿那含 이상의 境地를 成就한(阿那含, 阿羅漢) 이가 누릴 수 있는 境地이다. 이것은 至高로 莊嚴한 禪定이다.

?淸淨道論(Visuddhimagga, 위숫디막가)?에서 滅盡定에 드는 方法을 우선 修行者는 사마타(奢摩他)의 정(定)과 위빠싸나의 지혜(慧)로 第一禪定에서 七禪定까지 차례로 올라간다. 매번 段階의 禪定에 들어서 妙하고 고요한 狀態에서 三法印을 觀察한다. 이렇게 하여 七禪定까지 들었다가 七禪定에서 나온 후, 얼마동안 滅盡定에 머물 것인가를 미리 마음으로 시간을 決定한다. 그러고 나서 八禪定에 든 후, 바로 滅盡定으로 나아간다. 이 狀態에서 七日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때 意識과 身體의 機能이 停止되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보인다고 했다.

47. 위빠싸나(Vipassana, 觀)의 禪定 - 四禪定

위빠싸나(Vipassana)란 관(觀), 즉 마음이 밝게 비추어 본다는 뜻으로 正念의 념(念, Sati)과 通하는 말이다. 現狀을 洞察하는 修行法으로 행동하기 전의 思惟를 가리키는 정사(正思)와는 전혀 다르다.

사마타(奢摩他, samatha, 止) 修行과 위빠싸나(Vipassana, 觀) 修行은 相互補完的이다. 사마타(奢摩他, samatha)의 禪定은 마흔 가지 명상 주제 가운데 하나를 擇하여 여기에만 완전히 집중하는 형태의 三昧이다. 마음은 彷徨하거나 다른 곳으로 移動하지 않고 이 대상에만 固定된다. 그리하여 終局엔 마음이 대단히 平和스럽게 되고 고요한 集中狀態에 이른다.

이에 반해 위빠싸나(Vipassana)의 禪定은 삿티(sati, mindfulness, 마음집중·마음챙김·알아차림·관찰)로서 한 對象에만 固定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한 對象에서 다른 對象으로 자유롭게 移動하면서 모든 대상의 공통성인 삼법인(三法印) 즉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哲見하게 된다.

위빠싸나 수행법은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하다.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現狀의 當處에 즉각 마음챙김(알아차림)하여 빈틈없이 持續할 때 禪定三昧는 일어난다. 그런데 여기에서 三昧를 이루는데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① 過去(分別心, 判斷力 包含)에 머물지 말라. 未來에도 머물지 말고 現在 現狀의 當處에 集中하라.

② 게으름, 放逸에 빠지지 말라.

③ 均衡을 잃은 過度한 努力도 妨害가 된다.

④ 誘惑, 感覺的 執着에 빠지지 말라.

⑤ 나쁜 마음은 갖지 말고 大願力을 세우라.

(1) 初禪定

알아차림(sati)이 銳利하게 되어 현상의 사라짐이 分明해질 때 修行者는 直觀的으로 現狀에 內在해 있는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看破한다. 三法印에 대한 直觀的인 理解는 ‘現狀의 바른 理解에 대한 智慧’를 包含한다.

첫 번째 禪定이 일어날 때 ① 겨냥하는 마음 ② 考察을 계속하려는 마음이 顯著하게 되고 修行者의 洞察力은 急速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現狀 속으로 파고든다. 이러한 洞察智慧를 經驗하면서 修行者는 成長해 간다.

(2) 二禪定

초보단계의 返照的인 생각을 고요하고 純一無雜한 集中 속으로 들어간다. 수행자의 마음은 대단히 맑고 예리해 진다. 순간순간 급속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捕捉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銳利한 마음챙김(집중)으로 인하여 散漫한 생각은 조금도 없다. 몸과 마음의 無常에 대한 疑心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는 노력 없이도 수행은 저절로 되어간다. 겨냥하는 노력(위타카)과 觀察해보는 마음(위짜라)이 고요해진 가운데 기쁨과 행복감이 충만하게 느껴진다.

첫 번째 선정에서는 위타카(겨냥)와 위짜라(고찰, 관찰)가 충만하지만 두 번째 선정에서는 현상의 生, 滅을 꿰뚫어 보기 시작할 때 明瞭함·歡喜·信心·安穩함 등이 顯著하게 나타난다. 마음은 더욱더 銳利해 지고 집중력(알아차림)은 깊어간다. 깊어진 집중력으로 체험에서 오는 分明함과 確信을 얻게 된다. 계속 修行한다면 부처님이 約束한 結實을 얻게 되리라는 確信을 가진다. 歡喜와 精神的, 肉體的 平溫함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때 지금까지 經驗해 보지 못한 즐거움에 執着할 危險이 있다. 지금까지 삶 중에서 가장 깊은 幸福感을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은 깨달았다고 錯覺하는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進步는 할 수 없다. 이때의 歡喜나 즐거움을 분명하게 관찰해서 但只 現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利害해야 한다. 執着이 일어나면 卽刻 除去하고 배의 움직임(혹은 四念處 중 다른 주제) 觀察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면 계속 進步할 수 있다. 단지 알아차리기만 한다.

(3) 三禪定

歡喜가 점차 줄어들고 알아차림과 集中力이 계속 깊어진다. 現狀의 本性을 꿰뚫어 보는 洞察力이 점점 깊어진다. 七覺支 중 平等覺이 나타난다. 마음은 順境界(즐거움), 逆境界(불쾌함)에 흔들리지 않고 몸과 마음에서 깊은 平穩함이 일어난다. 修行者는 苦痛을 느끼지도 않고 몇 시간이고 앉아서 坐禪할 수 있다. 몸은 淸淨해지고 가벼우면서도 健康해진다. 이것이 三禪定의 特性이며 幸福感과 一念의 要素가 現前한다. 現狀의 生, 滅을 꿰뚫어 보는 通察力은 더욱더 깊어간다.

두 번째 禪定에서 세 번째 禪定으로 나아감은 修行上의 大轉換點이다. 보통의 경우, 修行者는 마음이 설레는 興奮이나 戰慄에 自然的으로 執着하게 된다. 歡喜心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즐거움의 要素 중 하나이다. 이것은 마음에 물결을 일으킨다. 이것은 修行의 思春期다. 이것을 體驗할 때 틀림없이 精進力을 向上시킨다. 가능한 한 注意 깊게 觀察해야 한다. 修行者가 이러한 現狀에 執着하는 한, 더 이상의 進步는 없다.

세 번째 禪定에서 幸福感의 絶頂에 이르게 된다. 가장 달콤하다. 그렇지만 修行者는 執着하지 않고 無心하게 계속 惺惺寂寂하게 觀察해 나가야 한다. 그러면 通察은 더욱더 銳利해 지고 明瞭하게 될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現狀의 智慧’를 지나 ‘사라짐의 智慧’의 단계로 접어듦에 따라 對象의 처음과 중간 부분이 分明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마음은 現狀의 계속해서 사라져가는 부분만을 感知한다. 알아차리는 瞬間 즉각 사라진다. 종종 몸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오직 사라져가는 現狀만이 계속하는 것 같다.

修行者가 混亂하거나 당황해 하는 수가 있다. 왜냐하면, 너무나 빨리 사라지는 現狀에 당황해 하기 때문이다. 對象을 알아차리기 전이 이미 사라져 버린다. 빈 虛空만 남긴 채 그 다음 現狀道 馬讚歌指路 斯羅져 버隣多. 現狀이 어디에 위치한지 모르는 채 계속 사라짐만 보게 된다.

‘무엇이 일어났는가?’ 지금까지 잘해 왔는데 이제는 調節할 수도 없고 하나도 제대로 觀察할 수가 없다. 이때는 冷情하게 繼續的인 現狀의 흐름을 注視해야 한다. 이것을 ‘사라짐의 智慧’ 段階라 부른다. 여기에는 더 이상 肉體的·精神的 幸福感이나 平穩함이 없고 肉體의 苦痛이나 不便함이 없다. 마음은 多少 中立的人 無心한 狀態에 있다.

(4) 四禪定

‘일어나고 사라지는 現狀의 智慧’가 成熟되고 있는 동안에 두 번째 禪定의 歡喜는 세 번째 禪定의 要素인 幸福感에 讓步한다. 보다 부드럽고 微妙한 平穩함이다. 세 번째 禪定이 네 번째 禪定으로 進步했을 때는 平等心과 一念만이 現前한다.

마음은 즐겁지도 不快하지도 않으며, 便安하지도 不便하지도 않은 無心한 平等心이 일어난다. 平等心은 마음을 均衡 잡아주는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다. 마음은 完全히 淸淨하고, 銳利하고 날카롭다. 現狀의 微妙한 性質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明瞭함과 함께 感知된다. 이러한 것은 初禪定·二禪定·三禪定에서도 있어 왔지만 더욱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性質에 의해 감추어져 왔던 것이다. 마치 太陽이 있으면 달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禪定의 각 段階는 幸福感으로 特徵지을 수 있다. 初禪定에서는 다섯 障碍를 떨쳐버리고 保護되어 있는 즐거움이다. 두 번째 禪定에서는 集中의 幸福感이다. 좋은 集中은 歡喜義 形態로 일어난다. 세 번째 禪定은 平穩한 幸福感으로 알려져 있다. 네 번째 禪定에서는 智慧의 幸福感을 經驗한다.

사마타 禪定은 分別·觀念과 執着이 따라다니는 有爲法인 반면 위빠싸나 禪定은 分別·觀念科 着乙 除去下面西 智慧를 啓發한다. 그러나 이러한 禪定은 모두 條件化된 相對的인 現狀의 領域이다. 이러한 領域을 超越하면 窮極의 幸福, 實在的인 幸福을 맛본다. 그것이 위빠싸나 修行의 窮極的인 大涅槃이다.

 

敎理核心.hwp
0.95MB
반야심경강의.hwp
0.27MB
보현행원품.hwp
0.03MB
核心.zip
1.35MB
화엄경에 나타난 삼매사상.hwp
0.23MB

'佛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5년도 포교사고시 예상문제  (0) 2014.09.20
松潭 스님  (0) 2014.09.19
조선 불화(朝鮮佛畵)  (0) 2014.05.31
불교의 법맥(法脈)  (0) 2014.05.30
삼처전심(三處傳心)  (0) 2014.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