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자씨산 영원사지(慈氏山 瑩原寺址)

2024. 4. 14. 11:21佛敎

2024년 4월 11일 금요일 구름

밀양 자씨산 영원사지(慈氏山 瑩原寺址) 영원사지보감국사부도(瑩源寺址寶鑑國師浮屠) 및 영원사지보감국사묘응탑비(瑩源寺址寶鑑國師妙應塔碑, 경남 유형문화재 제13호, 경남 밀양시 활성동 112번지)

자씨산의 뿌리는 저 멀리 울주군 가지산(1,240m)에서 내려 왔다.

백두산이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내려 내려 태백에서 우뚝 솟았다가, 지맥을 두었는데 바로 낙동정맥이다. 낙동정맥은 태백을 시발로 소천, 영양, 청송, 기계, 경주를 거쳐 울주 가지산(實惠山)에서 잠시 멈추었다. 다시 가지산의 왼발은 남으로 곧게 뻗어 내려 부산 금정산을 지나 다대포 몰운대 앞바다로, 오른발은 한쪽은 재약산(1,108m)을, 한쪽은 백암산, 중산(649m)으로, 중산은 다시 꾀꼬리봉(538m)과 낙화산(625m), 보두산(562m)으로 이른다.

재약산 세 갈래 중 동쪽으로 간 지맥이 백마산(760m), 고사산(727m), 금오산(720m), 천태산(632m)이다.

금오산에서 이어져온 만어산(670m)에 산줄기를 댄 자씨산(387m) 줄기는 한 발은 가곡동으로 한 발은 삼랑진읍 임천리 밀양강(일명 응천강 또는 남천강) 광탄(廣灘)나루로 이어진다.

자씨산(慈氏山, 자씨는 미륵보살의 성씨로 미륵보살을 의미한다.)은 현재 산성산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그 산에 자씨산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일자봉이라고도 한다.

위치와 들머리
마을 입구

영원사는 고려시대에 한강이남 최대 사찰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말의 큰스님이셨던 나옹 혜근, 태고 보우, 고려 중기의 보조 지눌도 이 영원사에 머물렀었는데, 이는 익재난고와 조선불교통사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 절터에 1576년(명종 22) 영원사지에 김종직을 향사하기 위한 덕성서원(德城書院)을 당시 부사 이경우(李慶祐)가 창건하였으나, 1669년(현종 10) 예림서원으로 개칭하여 현재의 자리인 제대리로 이건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을 배향한 덕성서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추밭으로 변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구서원(舊書院)이다. 처음에는 무슨 구휼기관이 있었던 자리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런 뜻이었다. 마치 부산의 도시철도 1호선 동대신동역 옆에 있는 서대신동 골목시장 입구의 버스정류장 명칭이 ‘구부여고’인 것처럼 말이다. 건너편이 ‘부여고’ 다시 말해 부산여자고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서원마을, 곧 고려시대 영원사지(瑩原寺址) 인근에 흩어져 있던 이 유물들은 1972년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4년 11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는데 고려시대 석불좌상 4구, 보감국사묘응탑비 귀부와 이수, 보감국사부도, 광배가 모여 있다. 모두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영원사는 선종과 천태종이 서로 소유하며 교권을 둘러싼 갈등을 빚던 곳이기도 하다. 영원사를 선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바꾼 이는 한국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의 생모 인예태후(仁睿太后)로 추정된다. 인예태후는 자신의 아들인 대각국사를 위해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해 천태종 종찰로 삼고, 영원사는 교권을 지배하는 교두보 역할로 묶어 두었다고 한다.

영원사와 관련된 역사 자료나 문헌은 많지 않다.‘고려국천태불은사중흥기(高麗國天台佛恩寺重興記)’,‘국청사금당주불석가여래사리영이기(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 산청 단속사 대감국사 탑비문(大鑑國師塔碑文), 밀양읍지 정도다.

‘고려국 천태 불은사 중흥기’에 따르면 현오대선사(玄悟大禪師) 의선(義旋) 스님 <현오(玄悟) 의선(義旋)>은 1323년부터 영원사 주지를 하고 있는 동안 원나라에 들어가 1336년 귀국할 때까지 법호에 영원사 주지라는 말이 따라 다녔다. 또 영원사를‘연이기사위전대국통하산소(然以其寺爲前代國統下山所)’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고려시대 때 교권을 장악하는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원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선종에 몸담고 있었던 탄연 스님이 광명사로 옮긴 뒤 영원사의 주지는 천태종 스님인 원각국사 덕소(圓覺國師 德素, 1108~ 1174)가 맡게 된다. 이 때 선종사찰인 영원사는 천태종 사찰로 바뀌었다.

원각국사는 대각국사가 천태종을 개창한 이후 천태종 계열의 스님으로서는 최초로 왕사가 된 인물이다. 원각국사는“영원사에 있을 때 일찍이 이르기를 영원사는 선가의 고찰”이라고 했다. 이는 영동 영국사에 있는 원각국사비에 적혀 있다. 이 비는 1180년 고려 문신 한문준(韓文俊, ?~1190)이 썼다고 전한다.

‘국청사금당주불석가여래사리영이기(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에는 천태종 만덕산 백련사 출신인 무외 정오(無畏丁午, ?~1318) 스님이 충선왕의 명에 따라 1310년 영원사에 주석하면서 금당과 낭무를 중수했다고 한다.

정오 스님은 1313년 11월 충숙왕으로부터 국통(國統)의 직위를 받아 당시의 교계를 통솔하다 1314년 영원사를 떠났다. 이후 일연 스님의 제자인 보감국사 혼구(寶鑑國師 混丘, 1250~1322)대사가 영원사에 주석하면서 선종사찰로 복구되었다.

영원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밀주지에 “비석은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다. 절을 폐한 그 터에다 덕성서원을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7년(조선 명종 22)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 덕성천이다.

현재로선 영원사지의 규모 또한 알 수 없다. 다만 남아있는 유물과 역사사료를 참고할 때 사세가 컸음을 짐작할 뿐이다. 남아있는 유물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영원사지보감국사부도와 13호 보감국사묘응탑비, 불상 4구, 광배, 주춧돌, 기와 파편 등이 전부다.

석불은 현재 4구가 있는데, 3구는 부도골로 오르기 전에 있었던 미륵전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 연꽃무늬가 선명한 팔각대좌도 있었다고 한다.

보감국사는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스님의 제자이다.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 1251~1322)는 고려 말 충숙왕(忠肅王) 때 왕사와 국사를 지냈다. 1315년경부터 영원사에서 몇 해 머물다가 1322년에 칠곡 송림사(松林寺)에서 입적하였다.

보감국사 혼구스님의 열반송

"가시나무 숲에 태어나 험한 시대를 살아왔네.
오늘 가는 길 과연 어디인가?
흰 구름 끊긴 곳이 청산인데
떠나는 사람 다시 그 청산밖에 있네."

안내판
광배한 모습의 석불과 광배 광활한 사지에서 수습한 듯 4기의 석불 중 2기는 불두佛頭가 없어졌고 그나마 광배를 한 석불은 완형으로 있는 것이 다행이다. 그러나 석불 전체 마멸이 심하여 양식을 알아볼 수가 없다.
보감국사 혼구 스님의 부도 비좌 측면에 구름을 양각했고 위에는 복련문과 이수에는 운룡문이 조각되었다. 보감국사 부도는 8각 원당의 형식과 기와 옥개석을 얹어 기본 고려양식을 따랐다. 그러나 중대간석 등의 멸실로 인해 완형을 잃어버린 부도로서 보존되어 있다.
보감국사 혼구 스님의 묘응탑비 비신이 손실된 채 이수와 귀부만 남아 있다. 귀부龜趺는 머리를 번쩍 들고 있어 전체적으로 입체감이 살아 있는 작품이다. 4족足의 족도 사실적이고 등에 큼직한 귀갑문龜甲紋이 있다.

보감국사부도는 1972년 문화재로 지정됐고, 1974년 11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 부도는 8각의 8각 원당형으로 평면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으며, 탑신(塔身)의 몸돌이 없어지고, 기단(基壇)과 지붕돌만이 남아 있다. 기단은 안상(眼象),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 연꽃무늬를 새겨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지붕돌은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기와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해 놓았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을 하고 있으며,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부도는 부도골에 있었다고 한다. 부도골은 지금 자리를 지나 골짜기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간 곳(지금의 골프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도골 맞은편을 탑골이라 불렀는데, 그곳에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탑이 있었다고 한다. 탑은 그 후에 무너져 있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영원사지보감국사묘응탑비(瑩源寺址寶鑑國師妙應塔碑)

보감국사묘응탑비도 부도와 함께 1972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현재 탑신부는 없으며, 귀부(龜趺)와 이수만 남아 있다. 《밀양읍지》에는 고려의 문신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비문을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귀부의 높이는 1m, 이수의 높이는 70㎝다.보감국사의 탑비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재를 수습해 놓은 것이다. 보감국사(1251∼1322)는 고려 일연스님의 제자로, 충렬왕 때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충숙왕 때 왕사(王師)가 되었다. 몇 년 후 은퇴하여 영원사에 머무르다가 말년에 송림사로 옮겨 입적하였다. 국사로 추증되었고 ‘보감’은 그의 시호이며, 탑이름은 ‘묘응’이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돌이 비몸을 잃어버린 채 머릿돌을 받치고 있다. 거북의 머리는 힘찬 형태로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이 가득 새겨 두었고, 중앙에 마련된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변에는 연꽃을 새겨 장식하였다. 凸자 모양의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원형의 공간을 두어 비이름을 새겨두었다. 『밀양읍지』에 남은 기록에 따르면 이제현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문화재청 자료)

동아일보 1963년 6월 11일자 7면과 6월 20일자 5면을 보면 당시 영원사지에서 고려청자흑백상감죽조문매병 1점, 학국치연화문매병 1점, 고려청자흑백상감목단학죽연화문대접 1점, 고려청자란죽운문대접 1점, 고려청자국화문팔각설 3점, 고려청자국운문원형잔 2점, 청동제운문유합 1점 등이 발견됐다. 이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유함(鍮盒)에는 화장한 뼈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보감국사 묘응탑비(寶鑑國師 妙應塔碑)로 알려져 있는 이 비는 <밀양읍지>에 '영원사 옛터에 고려 시대 이제현(李齊賢)이 쓴 보감국사(寶鑑國師)의 비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에 근거해 보감국사 부도비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보감국사의 부도비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문의 근거는 제액에 새겨진 글자 때문이다.

이수의 제액(題額)에 '불전지기'(佛殿之記)란 4글자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보감국사의 부도비라면 제액에 보감국사에 대한 글자가 새겨져 있어야 하는데, 엉뚱하게 이렇게 새겨져 있다. '불전지기'(佛殿之記)의 '불전'(佛殿)을 보감국사의 법호로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 그냥 불전 즉 법당의 뜻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비가 원래 있었던 곳은 부도가 있었다는 부도골과는 꽤 떨어진 금당 자리 바로 뒤쪽이라고 한다. 그러니 불전 곧 법당이나 가람을 중창한 내력을 기록한 사적비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한다.

인각사에 일연 스님 부도가 있습니다. 일연 스님 부도는 고려 말 부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 영원사지 부도는 어떤가? 일연 스님 부도보다 크고, 더 화려하다. 영원사지 부도는 일연 스님 부도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보감국사의 부도로 보기 어렵지 않나 싶다.』라고 한다.

보감국사(1251∼1322)는 고려 일연 스님의 제자로, 충렬왕 때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충숙왕 때 왕사(王師)가 되었다. 몇년 후 은퇴하여 영원사에 머무르다가 말년에 송림사로 옮겨 입적하였다. 국사로 추증되었고, '보감'은 그의 시호이며, 탑이름은 '묘응'이다.

고려 공민왕(1371년) 왕사로 책봉된 혜근 나옹선사, 승보종찰 송광사를 이끈 16국사로, 살아서는 ‘생불’로 추앙받았다.

태고보우국사(1301-1382)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종조이자, 임제종의 선맥을 계승한 대선사로, 수선사(현 송광사) 제2세인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의 뒤를 이어, 고려 말에 간화선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선사에 있어서도 당대 문인들에게 시풍을 인정받은 시승(詩僧)이었다.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은 고려 중ㆍ후기의 고승으로,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극심해 교ㆍ선(敎禪) 갈등이 심각했을 때에, 9산선문의 교리를 종합해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한 조계 선종의 중흥을 이루어 한국불교 정통인 조계종을 확립해 중흥조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우리나라 불교 특징이라 할 회통불교(會通佛敎)의 맥을 계승하고 있다. 선이란 참 마음의 바탕 자체이고, 교는 그 마음의 표현에 불과하므로 그의 돈오점수(頓悟漸修) ‧ 정혜쌍수(定慧雙修) 사상은 바로 그 깨침과 닦음에 관한 체계화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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