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윤리

2009. 12. 9. 13:40職業

[weekly chosun] 38년 공직기(公職記) 펴낸 안응모 전 내무장관

“떡값도 안 받고 융통성 없다고? 그게 순경에서 장관까지 오른 힘”

청와대·조달청·안기부 등 차관급 이상만 7번, 38년 공직생활 첫째 수칙 “사심을 버려야”

등산 취사금지·안전띠 매기·범죄와의 전쟁 이끌어

▶ 안응모

1930년 12월 24일 황해도 벽성 출생

1953년 순경, 철도순찰대(전남 장성군 신흥역)

1968년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주재관

1972년 서울 마포경찰서장

1972년 서울 중부경찰서장

1980년 치안감, 해양경찰대장

1982년 치안총감, 치안본부장

1983년 청와대 정무 제2수석 비서관

1984년 충청남도지사

1987년 조달청장

1988년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

1988년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1990년 내무부 장관 취임

1991년 내무부 장관 퇴임

현 단국대 동창회장

경찰의 말단인 순경에서 시작해 치안본부장, 청와대 정무 수석 비서관, 조달청장, 내무부 장관까지 지낸 안응모(78)씨. 그의 파란만장한 공직기를 담은 ‘순경에서 장관까지’가 출간됐다.

공직자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강조해온 안씨는 현재 단국대 동창회, 황해도민회, 순응안씨 종친회, 자유 시민연대, 안중근 의사 숭모회,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국가정체성 회복 국민회의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지내고 있다.

지난 4월 14일 서울 광화문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현재 공직에 있거나 공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공직자의 참된 경쟁력은 무엇이며 올바른 공직자의 자세는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안씨는 4·19, 5·16, 10·26, 5·18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겪으면서도 특유의 공직관과 소신으로 장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특히 정권 교체기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오직 시험을 통해 총경에까지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7개의 차관급 이상 국가 또는 지방기관의 보직을 맡아 공정하고 깨끗한 공직사회 구현을 위해 헌신했죠. 때로는 한직으로 밀려 고생도 하고 모함을 받아 고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특정 정권에 편향되지 않은 공직관을 지켜왔어요. 제 공직관의 핵심은 사심을 버린 가운데 공정성과 투명성을 겸비한 공직자가 되자는 것이었죠. 이 같은 공직관을 어떤 땐 제 상표처럼, 때론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자 했던 이유는 공직자가 작은 정부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힘없는 사람이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스스로의 굳은 다짐이 담겨 있었던 때문이죠.”

그는 공정한 인사를 위해 시대를 앞서 순환보직 제도를 시행했고 ‘촌지’나 ‘떡값’을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한다. 40년 가까운 공직생활 중 정확히 30년을 경찰로 보낸 안씨는 경찰의 오랜 숙원 사업 중 경찰 조직의 독립, 경찰 독립청사 건립을 해결하기도 했다.

▶ 벌목꾼 생활하다 1953년 경찰에 입문

1930년 12월 24일 황해도 벽성에서 태어난 안씨가 처음부터 경찰과 공직자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남한으로 내려와서는 교사 생활을 잠시 했고, 6·25 이후 병역을 마치고 생계를 잇기 위해 속리산에서 벌목꾼 생활도 했다. 하지만 벌목상한테 나무를 강탈당했고 결국 산에서 나오게 됐다. “당시는 너무 속상했지만 그런 사건이 없었다면 산속에서 조용히 살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이고요.”

그는 1953년 철도경찰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단국대 법학과를 졸업한 안씨는 1966년에 총경이 됐고 2년 뒤에는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에 한국인 교민 치안을 담당하는 주재관으로 파견됐다. “베트남이 주권을 양보하면서 저에게 한국 범법자들에 대해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대사관에 있는 유일한 경찰이었던 제가 주베트남 한국인 범법자 처리 규정을 만들었죠.”

한국에 돌아와서는 마포경찰서장, 중부경찰서장 등을 지냈고 1980년 치안감, 1982년 치안본부장이 됐다. 그는 치안본부장 재임 시절 인성·적성 검사를 도입하기도 했다. 경남 의령에서 한 순경이 20여명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내무장관이 이에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사람은 명예를 좋아하는 부류와 실리를 추구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공직에는 실리를 추구하는 부류가 안 맞아요. 인성 검사 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많이 해서 선별해냅니다.”

이후 안씨는 청와대 정무 수석비서관과 충남도지사를 지냈고, 1987년 조달청장이 됐다.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왜 굳이 나를 이곳에 보냈을까’에 대해 한참 생각해봤죠. 조달청이라는 곳이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주요 물자를 미리 구입하여 비축하거나 정부가 발주하는 토목 건설 공사 등의 입찰을 담당하는 곳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담당 공직자의 올바른 자세가 더한층 요구되겠죠. 그래서 저를 뽑았나 싶었습니다.”

그가 조달청장에 취임하자 건설업계 사장들은 예외 없이 봉투를 내밀었다. 그러나 안씨는 “마음만 받은 것으로 하겠다. 받건 안 받건 공정하게 일 처리를 하겠으니 안심하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이후 조달청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는 정부 발주 건설공사에 대한 입찰 처리가 이틀 이상 걸리던 것을 두세 시간 만에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 범죄근절 최선은 예방…, ‘순찰 강화’가 중요

여러 영역을 넘나들다 안씨는 1988년 안기부(현 국정원) 차장이 됐다. “부임해서 3개월 동안은 브리핑 중에 코멘트를 하나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잘 모르는 일에 토를 달기 싫었죠. 대신 매주 주말에 출근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업무를 완전히 파악하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어요. 정확한 질문과 지시가 이어지자 직원들이 제 말을 잘 듣더라고요. 또 인사 부문에서는 제 원칙대로 공정하게 했죠. 인사 청탁을 받아도 ‘공정성과 투명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초 한국의 치안 상황이 매우 나빴다. 불법 시위가 기승을 부렸고 봉고차로 부녀자를 인신매매했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던 때였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내무부의 수장이 누구일지 고민했고 안씨가 거론됐다. 서동권 안기부장도 그를 추천했다. 청와대·충남도지사·조달청·안기부 등 다양한 곳을 거쳤고 도덕성, 업무추진력 등을 봤을 때 적임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 소명이라 생각하고 ‘범죄와의 전쟁’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경찰을 우습게보던 범죄조직과도 정면으로 대결해서 많은 조직범죄를 없앴어요.”

이밖에도 안씨가 이룬 업적은 많다. 산에서의 취사금지, 등산로 안식년제, 안전띠 매기 운동, 도로교통 표지판의 간소화 등이 있고,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가 강조하는 지역단위 범죄예방 책임제의 강화다. 그가 범죄 근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예방’이기 때문이다. 체포나 발각의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좀처럼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요즘 이어지는 여아 성추행 납치사건도 철저한 순찰로 대부분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몇 군데 거점에 순찰차만 서 있었어도 사건이 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라는 게 안씨의 견해다.

“제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가장 중요시한 것이 순찰을 강화하고 빠른 현장 출동이 이뤄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을 비롯한 6대 도시에 처음으로 파출소당 순찰차 한 대씩을 배정했습니다.”

사고가 난 다음에 수습하는 것은 너무 힘들기에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범죄가 생기지 못하도록 CCTV를 설치한 사람은 빛을 못 보지만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가는 피의자를 잡은 사람한테는 훈장을 줍니다. 범죄를 예방한 사람의 공을 살려줄 수 있어야 하죠.”

▶ 퇴임 후 봉사활동…, “능력은 사회 위해 써야”

그는 범죄 예방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1년에 범죄 발생률이 얼마나 줄었는지를 보고 상을 준다면 당연히 미리 신경 쓸 수 있겠죠. 조금만 신경 쓰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건이 많은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원리원칙을 가장 중시하는 안씨도 남에게 전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제가 술은 잘 못해도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엄청 좋아해요. 운동도 좋아하고 포커도 잘 치죠. 사석에서는 노는 분위기도 잘 맞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석에서도 역시 공과 사의 구분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 임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공정성과 투명성을 갖는 데 반해 사석에서는 이해하고 양보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제가 친구가 많아요. 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라도 공적인 청탁이 들어오면 다시 엄격해지죠.”

1991년 4월 29일 내무부 장관을 퇴임한 이후 안씨는 여러 단체에서 봉사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사회 환원 차원에서 제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제의가 온 곳은 동창회(단국대)였고 자유총연맹에서도 사무총장에서 시작해 총장까지 했죠. 조직도 있고 예산도 집행해야 하기에 한 가지를 맡는 것도 사실 버거운데 혼자 5개의 회장직을 동시에 맡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5개 조직을 다 완벽하게 잘했다고는 못하지만 그 조직에서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등 나름대로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자부합니다. 봉사도 공직에 있을 때처럼 했습니다.”

7000만 원 정도의 빚이 있던 동창회를 일으켜 세웠고 장학기금도 확대 조성했다. 그리고 그가 거쳐 간 자리는 ‘공정성과 투명성’ ‘목적을 위해 꼭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 등이 뿌리 박혔다. “다수는 이런 저의 정책을 좋아하지만 분명히 저를 미워하는 기득권층도 있었죠. 그래도 다수가 저를 좋아하니까 그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서 지금도 이렇게 활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7년간 제 개인 돈도 많이 썼지만, 지인들에게 사회봉사를 위해 쓸 돈을 희사해달라는 부탁도 참 많이 했습니다.”

뇌물은 한 번도 안 받았다기에 얼마 안 되는 공무원 월급만 가지고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궁금해졌다. “연금 받는 것이 있고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저축도 했습니다. 오래전 싼값에 산 땅이 비싸져서 재산이 조금 불기도 했고요.”

▶ 집에서도 원칙주의자

밖에서는 엄격한 공직생활을 했던 그가 과연 집에서는 어떤 가장일까. “집에서도 엄격하게 원칙을 지킵니다. 아들이 둘에 딸이 하나 있어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두 아들은 각각 자영업자와 대학교수로 잘 일하고 있습니다. 사위는 공직자고요.”

안씨는 건강관리를 위해 골프와 국선도가 좋다고 했다. “1967년부터 골프를 시작했고 1977년부터 국선도를 시작했습니다. 특히 골프는 베트남에 있을 때 연습을 많이 해서 싱글이 됐어요.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 건강입니다. 바르게 살면 걱정이 없어지고 머리도 맑아져요.”

그는 앞으로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면 자신의 38년 공직 경험을 토대로 각종 행정 자문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정치는 안 해봤지만, 요즘 정치권에 일고 있는 잡음들을 접하면 안타깝다는 생각만 들어요. 정치도 선진국처럼 공정한 룰을 만들고, 이것을 국민들에게 사전에 공표한 후 거기에 맞춰 투명하게 일처리를 진행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만큼은 이처럼 쉬운 일도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저를 순진하게 봅니다. 살아오면서 제가 순진하다는 생각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 때문에 장관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단순한 것 같지만 진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어령 전 장관은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자화자찬의 전기물도 아니며 값싼 입지전을 기록한 성공담도 아니다. 안 장관은 한마디로 살아있는 공직자의 교과서였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02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27/2008042700151.html 서일호 기자 ihseo@chosun.com, 손유정 인턴기자·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3년, 입력 : 2008.04.23 15:07 / 수정 : 2008.04.2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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