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 민주공화국

2016. 10. 6. 10:39政治

[정치와 민주공화국]'불통' 대한민국, '반쪽' 민주공화국

제20대 총선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3월 31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에서 한 시민이 자전거를 끌고가다 후보자들의 선거벽보를 살펴보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카드회사에서 일하는 임다영씨(28·가명)는 정치 얘기만 나오면 입을 굳게 닫는다. 이씨는 “하루 살기도 바쁜데 굳이 정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본인 스스로 “요즘 뇌가 없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명시된 헌법 제1조 1항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 없다. “영화 <변호인>에서 들어봤어요. 근데 민주공화국이 중요한 거예요?”

■살기도 팍팍한데 정치는 무슨…

노무사인 구성재씨(28·가명)도 정치에 관심이 없다. 신문을 읽을 때도 정치면은 읽지 않는다. “정치면을 읽는다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게 없어요. 현실에 도움도 되지 않는 정치를 굳이 알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요.” 고씨는 정치 효능감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정치 효능감이란 유권자가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만족감을 의미한다.

“효능감? 투표를 하긴 해요. 그런데 투표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씨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총선 때 좀 느끼긴 느꼈어요. 내가 뽑은 사람이 일을 잘하겠다 이런 느낌은 아니고요. 이번에 전남이었나? 호남에서 국민의 당이 많이 됐잖아요. 국민의 당이 표를 확보 못할 거라는 예상이 많았는데 그 쪽에서 국민의당이 지지 얻어서 기사회생을 했잖아요. 그걸 보면 사람들의 표가 힘이 있구나 하는 걸 느꼈죠. 물론 전 그 지역구랑 상관없지만. 사람들도 느끼는 게 좀 있는 것 같더라고요. 기존 정치판에 염증 느껴서 다른 걸 돌파구로 찾은 거구나. 투표 함부로 해선 안 되겠다 생각하게 된 건데 이걸 정치 효능감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고씨는 민주공화국에 대해 묻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몰라. 전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전 그런 것보단 ‘오늘 금리가 떨어졌네’ 이런 거에 민감해요. 정치는 도움이 안 되잖아요. 진짜로. 도움이 안 되잖아. 전 신문도 경제지 위주로 봐요. 정치·사회면을 봐도 내가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나한테 도움이 되는 것도 없으니까. 경제지엔 금리 이런 건 나오잖아요. 내 돈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와 닿아서 잘 보게 되는데, 정치면 이런 건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아서 안 봐요.”

총선 사전투표가 시작된 지난 4월 8일 인천공항 3층 출국장에 마련된 사전투표장에서 시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당선되면 사라지는 공약

정치적 무관심이 한국사회 문제로 지적되는 건 오늘 내일이 아니다. 노원구에서 자영업을 하는 최진배씨(29)는 그 원인이 공약을 지키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있다고 했다.

“내가 뽑은 사람이 당선돼도 내 의견이 정책에 반영 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 같아요. 얼마 전 총선은 여소야대로 바뀌어서 큰 이슈가 됐잖아요. 제 지역구는 노원갑인데 바로 옆 노원병은 이준석, 안철수 대결로 핫하긴 했죠. 근데 언론은 물론 사람들도 저희 지역은 관심 없었어요. 그냥 나이 많은 사람들은 새누리당 찍고, 어린 사람들은 더불어민주당 찍고. 저희 지역 상권이 과거보다 너무 많이 무너져서 오래 상주하는 상인들의 불만이 높거든요. 7~8년 전부터 이의제기가 나왔던 곳이에요. 그래서 항상 정치인들이 자기가 해결하겠다 말했단 말이에요. 근데 말 뿐이고 다들 당선되면 사라졌어요. 디테일한 공약은 뿌리고 가는데, 진척도도 낮고. 과연 시간이 지나면 이행될 수 있을까 싶은 의구심이 드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단순히 지역적인 부분에서도 공약들이 잘 이행되지 않는데, 구·시·국가 차원에서 나온 그 많은 공약들이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점점 정치인이 하는 얘기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는 거죠. 저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니까. 정치적 무관심, 방관, 포기로 이어지고 그런게 만연한 사회가 되는 것 같아요. 정치의 위기 같아요. 차라리 어떤 액션이라도 취하는 것처럼 보이면 속기라도 하는데 진보·보수할 것 없이 이행조차 안 되잖아요.”

경주에 사는 이영훈씨(50·가명)도 정치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한국 정치를 보면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어요. 과연 국민을 위한 정치인가, 공약은 하나도 안 지키면서 다들 이데올로기 싸움만 하는 것 같아요. 국회는 입법 기관이잖아요. 입법이란 건 새로운 법을 만드는 건데 그건 하나도 안 하고, 자기 당론에 빠져 싸우기만 하고 볼수록 안타깝습니다.”

지난 2014년 2월 11일 청년학생들이 서울 정동 민주노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정부의 대선 공약파기에 항의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김정근기자

■정치혐오 부추기는 제도

정치적 무관심의 배경에는 정치 제도의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부 김영숙씨(49·가명)는 한국 정치가 87년 체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87년 6·29 선언 있은 직후엔 국민이 무언가 할 수 있는 나라가 됐구나 하는 기대가 컸어요. 하지만 이후엔 만족감이 크게 늘지 않았어요. 민주주의 투쟁으로 직선제를 얻었지만, 과연 이 제도가 국민들에게 큰 만족감을 줬을까. 한 표라도 더 많이 얻으면 이기는 구도에서는 제가 49% 안에 들면 무조건 패배자가 되는 것 같아요. 대표를 직접 뽑는 일도 의미 있지만 내 표의 의미가 대표를 통해 실현돼야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직선제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이후의 단계를 생각했어야 한다고 봐요. 내 표가 의미 없다 생각하게 되니 점점 정치가 재미없어요.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낫죠.”

제20대 총선 새누리당 공천면접 이틀째인 지난 3월 21일 오전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 도로에서 한 예비후보가 공천을 위해 백팔배를 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대학생 김남영씨(25)와 이상목씨(24)는 교육 제도도 문제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청년층의 정치 무관심과 혐오는 잘못된 교육 환경에 원인이 있다고 했다.

“수능 위주의 교육 제도는 국·영·수 외엔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듯해요. 그러면서 학생들을 너무 어리게만 생각하죠. 정치 과목 같은 건 이과는 아예 안 배우잖아요.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 가지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말해요, 공부나 하라고. 그렇게 정치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알아선 안 되는 것처럼 하다가 성인이 되면 갑자기 너희의 의무와 책임이라면서 관심 가지라 강요하는 게 너무 이상해요. 제가 고3때 촛불시위가 크게 일어났어요. 그때 정치에 처음 관심을 가졌는데,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제 정신이냐고. 수능 코앞에 두고 쓸데없는 일에 정신 판다고 혼내시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죠. 아, 정치는 알아서도 관심 가져서도 안 되는 일인가보다. 정치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배웠다면 과연 청년들이 투표를 안 할 수 있을까요?”

이씨는 말을 마치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듣고 있던 김씨가 말했다. “맞아요. 미국은 청소년기부터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게 교육 시킨다고 들은 적 있어요. 투표권이 생길 때를 대비해 모의선거나 교육을 통해 정치 훈련을 시키는 거죠. 근데 우리는 아무 준비도 없이 성인이 되면 무조건 투표하라고 강요해요. 그러면서 또 정치는 무조건 나쁘다 말하죠. 혐오와 투표를 동시에 강요하는 교육 방식이 오히려 무관심을 키우는 것 같아요.”

■국민 말에 귀 기울이고 공동선 지키는 나라가 진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한참을 고민하던 이씨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말했다. “민주공화국. 법적으로는 분명히 맞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민주공화국은 이게 아니에요. 국민 말을 들어주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민주공화국이죠? 전자투표제도 도입해서 굵직굵직한 정책들은 국민투표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 4대강 사업, 노동시장 개편, 사드까지. 소통이 너무 부족해요. 소통이 민주공화국 기본인데. 여론조사 한다고 하지만 요즘 낮에 집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그걸 신뢰하는지. 좀 더 국민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 좋겠어요.”

김씨 역시 ‘반쪽 민주공화국’이란 답을 내놨다. “헌법상으로는 분명 맞아요. 하지만 과연 국민주권이 제대로 실현되는지는 모르겠어요. 정치와 시민이 가까워지기 힘든 구조에서 민주공화국의 가치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요? 투표 때 말고 정치인과 만날 기회가 얼마나 있어요, 제 의견이 정치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없어요. 국민들 의견이 정치권에 닿을 수 있는 구조여야 하는데, 대통령은 물론이고 정치인까지 그 연결고리가 없어요. 지금은 반쪽짜리 민주공화국인 거죠. 국민 말에 귀 기울이고 그 뜻을 받드는 정치가 이뤄져야 진짜 민주공화국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드 배치 반대 청년학생 긴급행동 회원들이 지난 7월 17일 서울 국방부 앞에서 한반도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어쩌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명시한 헌법 1조 1항보다 2항이 더 중요할지도 몰라요.” 25년째 학원 강사로 일하는 허역씨(52)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의미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그는 이어 말했다. “국민 주권이요. 국민의 권력이 대리인들을 통해 정책을 통해 제대로 표출되는 것이 민주공화국의 가장 핵심이라고 봐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지금 우리의 민주공화국은 허울만 남았어요. 100점 만점에 60점 밑 낙제점, 수우미양가 중에서 ‘가’. 진정한 민주공화국이라면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무조건 자기 입에서 뱉은 약속 지켜야 하는 거예요. 그게 지켜지지 않는 한 민주공화국은 안 됩니다. 절대로.”

출처(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40100&artid=201610051604001#csidxf24d7cecf54a546be4b502fe3f2f6ae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입력 : 2016.10.05 16:04:0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40100&artid=201610051604001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입력 : 2016.10.05 16: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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