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3. 22:02ㆍ佛敎
봉성사(奉聖寺)
2015년 2월경에 고속국도 제14호선 건설공사 밀양-울산 고속도로 구간의 2공구(경남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산외3터널의 입구)에서 ‘삼국유사’에 기록만 나오고 그 터를 알 수 없었던 봉성사(奉聖寺)의 옛터(추정범위도)를 발견했다.
추정범위도
고려 태조 왕건에게 조언한 봉성사 스님이었던 보양스님은 지금도 청도 운문사의 새벽예불 시간에 팔정례 중 일곱 번째 “지심귀명례 차사창건 대공덕주 원광국사 보양국사 원흥국사 삼대화상 제대조사”로 예경되시는 스님이다.
노인들의 말씀에 의하면 이 일대를 ‘탑골’이라고 하며, 기단석, 자기, 기와조각, 그릇조각, 석조파편들이 부지기수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2017년에 내가 사람이 잘 다니지 않고 차만 다니는 대신한천(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960 2. 원경도의 하의 우측 표시) 옆 국도 24호선 죽남램프를 거쳐 본촌 쪽으로 가기 위해 대신한천을 옆을 지나다 우연히 산자락의 바위 절벽(1. 전체도 하측 표시, 2. 원경도 하의 우측 표시, 3. 근경도 좌측 표시, 4. 상세도)에 알려지지 않은 문양이 새겨진 마애비와 함께 희미하게 南無阿彌陀佛이란 명문을 발견하였다.
1. 전체도
2. 원경도
3. 근경도
4. 상세도
미루어 보건대 그 옛날 봉성사가 존재했던 시절에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못하는 봉성사를 가는 길(3. 근경도 우측 표시)로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안내자 역할을 했던 당간(幢竿)의 소임을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내가 잘 알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봉성사 발견 이후 이렇다 할 대책이나 연구도 없고, 더구나 이 마애비와 봉성사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참고로 당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봉성사(奉聖寺)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확한 위치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절이다. 신라 말의 고승 보양(寶壤)은 당나라에서 불교를 배우고 귀국한 뒤 이 절에 머물렀다. 그 때 고려의 태조가 청도 견성(犬城)에 있는 산적을 물리치려고 하였으나 쉽게 항복하지 않으므로 보양을 찾아가서 적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방책을 물었다.
이에 보양은 “대개 개(犬)라는 것은 밤에 지키되 낮에는 지키지 않고, 앞은 지키되 뒤를 잊어버리는 것이니 마땅히 낮에 성의 북쪽을 쳐들어가야 할 것”이라 하였다. 태조가 그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적이 패하여 항복하여 왔다.
이에 태조는 보양의 신통한 지혜를 높이 사서 해마다 가까운 고을의 조세 50석을 이 절에 주어 향화(香華)를 받들게 하였다. 이 절에는 보양과 태조의 진용(眞容)을 봉안하였으므로 그 뒤부터 절 이름을 봉성사라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또 봉성사 터 발견을 보도는 2015년 8월 3일 국민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연합뉴스 등 도하 각 언론사에서 보도 하였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715298&code=61171111&cp=du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031747241&code=960201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810500259
https://www.yna.co.kr/view/AKR20150803104700052?input=1179m
그중에서 서울신문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한국도로공사는 최근 고속국도 제14호선 건설공사 구간에서 ‘삼국유사’에 기록이 나오는 봉성사(奉聖寺)의 옛터를 발견했다. 지난해 3월 착공한 전장 45.17㎞ 밀양-울산 고속도로의 경남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산외3터널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렇지 않아도 도로공사는 당초 한 대학 박물관팀이 지난 1999년 이 일대를 시굴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절터로 추정되는 유물산포지를 피해서 고속도로를 설계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터널 공사에 들어가 유물이 발견되는 상황을 보니 절터는 시굴조사 당시 절터 추정 지역보다 훨씬 넓었다. 설계대로라면 터널은 봉성사터의 한복판을 관통할 수밖에 없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현장에서는 건물터와 기와 등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주변에서는 분청사기 가마터와 지석묘로 추정되는 유구도 확인됐다. 결국 울산문화재연구원이 지난 5월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들어갔고, 이 과정에서 ‘봉성사’(奉聖寺)라고 새겨진 기와를 찾아낸 것이다.
봉성사는 그동안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으니 확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발굴조사에서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석재 등이 출토됐다. 이후 15세기 조선시대까지도 중창과 보수가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봉성사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운문사를 중창한 신라 말의 고승 보양(寶壤)은 당나라에서 불교를 배우고 돌아온 뒤 봉성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 고려 태조가 청도 견성(犬城)에 출몰하는 산적을 쫒아내려 했지만 쉽게 항복하지 않자 봉성사로 보양을 찾아갔다.
태조가 도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방책을 묻자 보양은 “대개 개(犬)는 밤에 지키되 낮에는 지키지 않고, 앞은 지키되 뒤를 잊어버리는 것이니 마땅히 낮에 성의 북쪽을 쳐들어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고. 태조가 그대로 했더니 도적의 무리가 항복했다는 것이다.
태조는 보양의 지혜에 탄복하며 해마다 이웃 고을의 조세 50석을 이 절에 주도록 했다. 이후 절에 보양과 태조의 초상을 봉안하였으므로 봉성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봉성사와 운문사는 흔히 영남알프스라고 하는 가지산을 사이에 두고 밀양 땅과 청도 땅에 각각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 중요한 절이니 터널에 휩쓸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화재위원회는 지난달 터널의 위치를 봉성사의 한복판에서 절터 아랫쪽으로 옮기는 도로공사의 수정안을 승인했다. 터널 위에 절터가 자리잡는 형국이니 공법도 폭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무진동공법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지역의 숙원사업인 고속도로 공사가 한동안 중단된 것은 물론 고속도로 건설비용도 수십억 원이 늘어나게 됐다고 한다. 애초 시굴조사가 정확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일이다. 밀양-울산 고속도로는 오는 2020년 준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2021.07.30.
<산외면 금곡리, 밀양부사 조재선 마애 선정비 답사(https://cafe.daum.net/historymiryang/UeFm/9)>와
<조재선 마애선정비 "府使 趙侯載選 愛民善政碑 辛巳 5月 日" 즉 부사 조재선의 애민선정비로서 1761년 5월에 새겨진 것이다.(2020.10.15. 15:11 https://cafe.daum.net/historymiryang/UeFm/6)>를 잘 읽었습니다.
위의 기사를 볼 때 물론 "府使 趙侯載選 愛民善政碑 辛巳 5月 日"이란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사 조재선의 애민선정비’로 보는 데는 수긍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필자는 2017년에 이 마애비를 발견하고, 여러 곳으로 수소문해도 여기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일실될까 걱정이 되어 2019년 3월 3일 블로그에 “봉성사(奉聖寺)”란 제목으로 이와 관련한 글(https://blog.daum.net/auddks/2060)을 쓴 바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그 옛날 봉성사가 존재했던 시절에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못하는 봉성사 가는 길(3. 근경도 우측 표시)로 봉성사를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안내자 역할을 했던 당간(幢竿)의 소임을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말하자면 원래 있는 ‘당간(幢竿)의 소임’을 하고 있는 ‘南無阿彌陀佛’이란 명문이 있는 마애비 옆에 후대 즉 辛巳(1761년) 5月에 "府使 趙侯載選 愛民善政碑“를 덧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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