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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28. 17:03生活

[2010 농촌현장] 전문직 귀농ㆍ귀촌 행렬

`사는 게 이거 아닌데`‥ `하고 싶고 잘 하는 일`하며 살기

일․건강․가족관계․자녀교육 새로 보기‥ 실패․부적응도

"돈도 명성도 버리고 떠나오니 다 좋네요."

전문직들의 귀농․귀촌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사업실패 등 각종 이유로 도시를 피해 들어왔던 '낙오자'들 행태쯤으로 인식됐던 귀농의 패턴은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전북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면덕봉 중턱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새울 터. '새 울타리'란 의미가 있는 이곳에는 귀농한 31가구, 어린이와 어른 10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귀농한 전문직 출신들로만 이뤄진 작은 마을인 셈이다.

귀농 바람이 불면서 진안군이 여러 가지 혜택을 내세우면서 적극 유치를 했고 도시에서 귀농에 대비해 스터디그룹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줄을 이어 들어왔다. 이 마을은 통째로 '학선리 845번지'. 집주인들의 개성만큼이나 독특하게 꾸며진 정원을 제외하면 집들이 복도나 통로로 죽 연결돼 한 집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자산운용책임자(펀드매니저), 방송인, 만화가, 편집 디자이너, 영화감독, 교사, 한식 요리사, 동시 통역가, 화가, 컴퓨터 프로그래머…. 그들이 도시에서 가졌던 다양하고 화려한, 부러워할 만한 직업들. 연봉이 1억 원을 넘는 이들도 다수였다.

하지만 이들은 "사는 게 이게 아니다"며 도시 탈출을 선언, 기존의 생활에서 빠져나오는 '드롭아웃(drop out)'을 결행했다. 인터넷의 발달로 편집 디자이너 등 일부는 산골에서도 예전 일을 어렵지 않게 농사와 병행하고 있고 대부분은 농사를 짓거나 '자기가 잘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

"죽어라 공부해서 시험 봐 취직하고, 기계처럼 돈 벌고… 세상사는 게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이 이들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이다.

새울 터 사람들은 대개 생필품을 공동 구매하고 영화 관람이나 식사도 가끔 같이 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교육비와 보험료 등도 줄이며 지출 규모를 최소화해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고 있다.

작년에 이곳에 터를 잡은 최영(38)씨는 만화가, 아내(33)는 출판 편집 디자이너다.

산골에도 봄이 찾아오자 최씨는 옆 마을 이장이 빌려 준 논밭 700평과 작년에 경작했던 300평을 합해 1천 평에 벼와 고구마, 고추 등을 심을 계획이다.

"조금 모자라긴 했지만 작년에 직접 지은 것들로 거의 자급자족했다"는 그는 "어르신들의 농사 비법을 배운다면 3∼4년 후에는 도시 친구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 만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녹록하지 않은 사교육비나 육아비 부담 때문에 결혼하고도 일부러 수년째 아이를 갖지 않았지만 올해는 마음이 달라졌다고 한다.

"어릴 적 고향인 시골에서 뛰놀던 추억을 아이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고, 방과 후 학교나 무료 학습이 가능한 여기에서는 사교육비 등의 걱정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곳의 아이들은 동네에만 있으면 걱정이 없다.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놀고 공부한다. 마을 어른 모두가 부모 역할을 하는데다 외지인이나 자동차도 거의 다니지 않아 '사고' 위험도 없다.

최씨가 귀농을 결심한 것은 부농이 되거나 농촌을 살리거나 하는 거창한 것들이 아니었다.

"누군가 '휴일 아침에 주차 걱정 없이 편하게 잠 한 번 자봤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하더군요. 농촌은 그런 편안함과 안도감을 주는 곳"라며 나름대로 귀농 이유를 풀어냈다.

"욕심을 내고 경쟁할 수밖에 없었죠. 불합리한 조직 행태에도 참아야 했지요. 하루하루가 불안했는데 여기 오니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이 편해서…. 다 좋다"고 그는 말을 이었다.

서울에서 3년간 귀농에 대한 지식을 쌓았지만 한편으론 불안하고 불편한 것도 없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것이 걱정됐는데, 농사 외에도 아내나 저나 예전 일을 조금씩하고 지자체에서 사회적 일자리(귀농 교육)를 줘 적지만 고정 수입도 생겼다"라고도 말했다.

'낮에는 일하니 괜찮은데, 밤에는 무엇 하며 지낼까'라는 생각에 트럼펫을 배워볼 요량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모든 일을 아내와 함께 합니다. 서울에서는 피곤하고 일이 바빠 얼굴도 제대로 못 봐 미안했는데…. 밤낮으로 아내와 이야기하고 드라마도 보고 교회 가서 성가대 활동도 하고 이웃들과 밴드 조직해서 순회 연주도 하고… 그래서인지 아내와 사이가 좋아졌다"며 웃었다.

결국, 1년이 됐지만 '외로움' 때문에 트럼펫을 찾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20여㎞ 떨어진 읍내로 생필품을 사러 가는 것이 불편할 따름이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문동리의 ㈜지엘은 전문직들이 직장을 박차고 나와 차린 농업회사법인.

조선대 박길장 교수와 나산고 문태현, 광주 송원고 변재철 교사, 사업가 이시현씨 등 5명은 2000년 귀농해 친환경 자원순환 유기농업으로 억대 매출을 올리고 있다. 또 삼성캐피탈 법무담당 팀장으로 일했던 이규철(39.전남 강진)씨는 2007년 가족과 함께 귀농해 인삼을 재배, 연간 1억 원의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광주은행 동부지역 본부장 출신인 이기태(57.전남 구례)씨도 2002년 귀농해 산수유 등을 재배해 연간 5천여만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전문직 종사자들이 농촌을 선택하기까지는 자녀들 교육문제를 비롯해 개인적인 문제까지 해결해야할 문제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새울 터의 권오룡(40)씨는 대전에서 '잘 나가던' 컴퓨터 프로그래머였지만 지금은 진안에서 '(사)농촌으로 가는 길'의 사무국장을 맡아 귀농·귀촌의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귀농은 가족 전체의 합의가 있어야 실패하지 않는데, 다행히 아내나 두 아이 모두 같은 생각이었고 지금은 모두 만족하고 있다"면서 "처음에는 이곳에서 거주만 하고 대전까지 출ㆍ퇴근하려 했으나 여기에서도 할 일이 많아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눌러앉았다"고 전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온 일상을 뿌리치고 귀농한 데는 아이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교육철학도 한몫했다.

권씨는 "아파트에 살 때는 아이들에게 '뛰지 마라'라는 말만 했던 것 같아요. 또 머리만 키우는 교육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이곳에서는 아이들의 인성을 키우고 마음을 넓혀 위험이 닥쳐도 스스로 헤쳐 나가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아이들이 원하면 중·고교도 인근 대안학교로 보낼 생각"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전문직이라고는 하지만 직장과 사회, 조직들이 요구하는 대로 살다 보니 뭔가 빼앗기며 사는 것 같았는데 귀농하니 새 삶을 사는 것 같다"면서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배우며 하고 싶거나 해야 할 일을 하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귀농ㆍ귀촌했다가 농사에 실패하거나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도시로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전국적으로 전문직출신들의 이 같은 행렬은 귀농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연합뉴스 http://news.joins.com/article/873/4082873.html?ctg=1100&cloc=home|list|list1 2010.03.28 06:38 입력 / 2010.03.28 13: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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