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2. 21:14ㆍ一般
한 기자의 지하철 가방 도둑 잡은 사연
저에게는 12년이나 들고 다녀온 밤색 손가방이 있습니다.
‘일수 가방이냐’, ‘여자 핸드백 같다’는 농담과 핀잔에 시달리면서도 제가 결코 떠나보내지 못해온, 예쁘고 튼튼하고 정든 친구입니다.
지난 3월23일, 이 작은 가방을 두고 ‘작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광나루역 인근의 저녁 모임을 향해, 저는 5호선 지하철을 탄 채 서서 가고 있었습니다. 평소 습관대로 눈 앞 선반에 가방을 올려놓았습니다. 피곤이 몰려와 ‘어디 자리 좀 안 날까?’ 좌우를 살피던 중 10시 방향의 승객이 일어났습니다. 일단 앉아야죠.
DMB를 켜느라 1분쯤 흘렀을까요? 손가방을 챙기려고 왼쪽 위 선반을 보는 순간 저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가방이 없었습니다.
가방 안 비상금 10만원, 출장길에 쓰려고 그날 바꿔 놓은 200달러, 제수씨 생일에 주려던 호텔 뷔페권 2장, 신용카드 1장, 카메라 1대…. 아니 무엇보다도 12년 친구인 그 가방 자체와, 카메라에 담긴 우리 애의 1년치 사진·동영상이 뇌리를 찢는 듯 스쳐갔습니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좌절의 극단을 일단 딛고 일어나 승객들에게 탐문을 시작했습니다.
40대로 추정되는 여성 승객 두 분은 “남색 옷의 여학생 2명이 방금 ‘이거 우리 가방’이라면서 신금호역에서 들고 내리더라.”는 구체적 목격담을 들려줬습니다. 바로 다음역인 행당역에서 내렸습니다. ‘화재, 재난 시에 이용하라’고 쓰여 있는 역 비상전화가 보였습니다. 이 전화를 들고 저에게 일어난 ‘재난’을 행당역 역무원에게 설명했습니다.
역무원이 “플랫폼 어디쯤의 전동차였냐?”고 물어와 저는 “바닥에 ‘4-3’이라고 쓰여 있고 바로 위에 CCTV가 있으며, 남색 옷의 여학생들도 신금호역에서 바로 이 문으로 내렸다”고 답했습니다. 이 통화를 하면서 동시에 휴대전화로 112에 도난 신고도 했습니다.
지하철을 되돌아 타고 신금호역으로 향하는 중 제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신금호역 부역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CCTV를 순차적으로 확인하고 개찰구 쪽으로 나와 보니 그런 인상착의의 여학생 2명이 그런 크기의 가방을 들고 여자화장실로 들어가는 장면을 포착했다”며 “빨리 신금호역 화장실로 오라”고 알려왔습니다. 신금호역에 도착해 전동차에서 내린 직후에는 “도난 신고를 이첩 받은 경찰관”이란 전화가 걸려왔고, 저는 “신금호역 화장실로 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건 발생 후 약 8분 만에 신금호역 부역장 등 역무원 2명, 성동경찰서 금호지구대 경찰관 2명과 피해자 장원준이, 용의자 여학생들이 피신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금호역 여자 화장실을 장악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맨 좌측 칸에서 나오지 않고 저항하던 2명의 여고생은 결국 경찰관의 설득에 못이겨 제 ‘밤색 가방’을 두 손에 치켜들고 머리를 숙인 채 투항했습니다. 불과 10여분 전에 ‘지옥’으로 떨어졌던 저는 온전히 되찾은 가방과 함께 ‘천국’으로 날아오르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다시 지하철 5호선을 타고 광나루역 인근 모임으로 향했습니다. 그날 모임에서는 손길승 전 SK 회장이 “대한민국은 ‘well designed advanced country’로 커가고 있다”는 요지로 강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50분 지각’의 변명을 위해 저에게 방금 일어났던 ‘가방 스토리’를 말하자, 손 전 회장은 크게 박수를 친 후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바로 이게 대한민국이 얼마나 well design된 국가인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라고 말했습니다.
진짜 그랬습니다. 침착하고 친절하고 영리하게 제보해주는 시민, 놀라울 만큼 효율적인 지하철 플랫폼의 비상전화와 CC-TV, 기민하게 소통하고 움직이는 월드베스트 지하철 역무원과 경찰관, 지하의 플랫폼과 전동차 안을 넘나들며 터지는 휴대전화…. 이런 요소들 중 하나만 작동하지 않았어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 우리나라에서만 가능할 듯합니다. 이 이야기의 대전제가 제가 칠칠치 못하다는 고백이어서 무척 낯 뜨거움에도 불구하고 ‘노조 집행부의 강박’을 핑계 삼아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우리나라, 그래도 참 괜찮죠?”라는 공감대를 기분 좋게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 사족 2제
1. 그 학생들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피해자 희망대로 훈방됐습니다. 다행히 그 학생들은 전과가 없었습니다.
2. 기출 질문. “혹시 기자라고 말한 덕분에 협조가 빨랐던 것 아니냐?” 대답. “그런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 했다가 ‘그래서 어쩌라구?’ 하는 반감을 혹시라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 ‘애절하고 똘똘한 시민’으로 간주되는 편이 기민한 협조를 얻는 데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판단은 맞았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02/2010040201278.html?Dep1=news&Dep2=headline3&Dep3=h3_01 방송기획진출단 장원준 기자 wjjang@chosun.com 입력 : 2010.04.02 15:52 / 수정 : 2010.04.02 17:29
※이 글은 조선일보 노보에 실린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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