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30. 11:48ㆍ歷史
김부식과 일연은 왜 / 정출헌… 저자의 시각에 덧칠된 삼국여성들의 모습에 초점
삼국을 들여다보는 창…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책에 그려진 역사 딴판
박제상과 처에 대한 기록, 김부식, 남성의 충절 강조, 일연, 종교적 신념 활용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는 아득한 삼국 시대를 바라보게 하는 창이다. 하지만 두 책에 그려진 삼국의 역사는 딴판이다. 이들이 편찬된 시대적 상황이 달랐다. '삼국사기'는 서경 중심 세력들이 도참사상, 풍수지리사상 등 신비적인 세계관을 중심으로 기존 정치 질서에 반기를 들던 고려 중기에 편찬된 역사서다. '삼국유사'는 몽골의 침입과 삼별초의 난처럼 안팎으로 혼란스러웠던 고려 후기에 편찬됐다. 편찬자 시각과 시대적 요구에 따라 삼국의 역사는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다.
정출헌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김부식과 일연은 왜'에서 "삼국을 들여다보는 상이한 두 개의 창을 비교하며 엮어 읽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특히 근엄한 유학자 김부식과 탈속의 승려 일연에 의해 굴절된 삼국 여성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김부식과 일연의 시각차가 가장 극명한 부분은 박제상의 처에 대한 기록이다. 박제상은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눌지왕의 두 아우를 구출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끝내 일본에서 죽임을 당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은 결말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왜국에 미사흔을 구하러 박제상이 떠날 때의 장면을 자세히 묘사했다. 그의 아내가 포구에 이르러 배를 바라다보며 대성통곡하면서 "잘 다녀오세요."라고 하자 제상은 뒤돌아보며 "내가 왕의 명을 받아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다시 볼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마라!"고 했다. 애절하게 울부짖는 아내를 뒤로한 채,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박제상의 결연한 뒷모습에서 그의 충절은 정점을 이룬다. 이때 박제상의 처는 남성의 충절을 돋보이게 하고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조연이 되어 버렸다.
일연은 어떠했을까? '삼국유사'를 보면 제상이 배에 오르자 아내가 그를 간절히 부른다. 제상은 다만 손만 흔들어 보일 뿐 멈추지 않았다. 김부식과 달리 일연은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이별의 정경을 그렸다. 제상의 충절을 인위적이거나 과장되게 꾸며내지 않았다. 일연은 제상이 혹독한 고문을 겪으며 흘린 피에 관한 이야기, 지아비를 기다리던 부인이 신모(神母)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장식했다. 저자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려는 발상을 높이 사지만, 치술령 신모가 되기까지 겪어야 했던 아낙의 절절한 슬픔을 종교적 신이의 사례로 활용하는 데 그쳐 불만스럽다"고 말한다.
김부식과 일연 모두 자신의 신념에 맞게 서술하다 보니 사실을 누락, 왜곡하기도 했다. 평강공주와 선화공주 이야기를 보자. 두 이야기는 미천한 사내를 당당한 장부로 만든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김부식은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온달의 충성과 그 과정에서 겪는 사랑하는 남녀의 애절한 삶과 죽음을 다뤘다. 문제는 '고구려 본기'를 비롯한 그 어느 곳에서도 온달이란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 후주의 무제가 요동을 침공했을 때 이를 물리쳤다는 온달의 혁혁한 전공과 후주의 침공 사실조차 기록에 없다. 기초적인 사실도 엉망이다. 평강왕 뒤를 이어 양강왕이 왕위에 오르고 온달은 양강왕 때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평강왕은 양강왕의 아들이다. 김부식은 죽은 아비가 아들을 계승해 왕위에 올랐다는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평강공주에게 농담처럼 '바보 온달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과 온달이 왕에게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아오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부식이 온달과 평강공주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말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금은 실없는 농담을 해서는 안 되고, 신하는 죽어서라도 자신의 말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 말이다. 김부식은 말에 대한 신의를 강조하기 위해 허구적 서사를 역사적 사실로 둔갑시켰다.
일연도 '삼국유사'에서 선화공주와 서동 이야기를 다루며 비슷한 오류를 범했다. 일연이 봤던 기록인 원래 고본(古本)에는 서동이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아니라 무강왕의 어릴 때 이름으로 돼 있었다. 하지만 일연은 백제에 무강왕이라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무강을 무왕의 오기(誤記)로 파악했다. 하지만 세종실록지리지와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보면 무강왕이 나온다. 무강왕은 백제 시조 온조왕에게 병합되어 사라진 전라도 익산 지역에 존재했던 마한 국의 건국주. 이런 정황으로 미뤄볼 때 일연이 보았던 고본의 서동 이야기는 백제 30대 임금인 무왕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아니라 마한 국을 세운 무강왕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일연은 무강왕의 어린 시절을 무왕의 어린 시절로 뒤바꾸어 놓음으로써 무왕의 전력과 관련한 모든 이야기를 삭제해야 했다. 미륵사를 창건한 설화, 무왕과 연대기를 맞춘 선화공주 부친 진평왕의 일화, 선화공주 존재가 모두 맞지 않는다. 일연은 그저 용과 사통하여 낳은 백제의 미천한 사내 서동이 신라의 고귀한 선화공주를 배필로 맞이해 왕위에 오른 신이한 행적을 부각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했다.
이밖에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유화, 소서노, 허황옥, 지존의 자리에 오른 신라의 여왕들, 효녀 지은 등 김부식과 일연이 덧칠한 삼국 여성이 나온다. 이 여성들도 남성적 시각에서 덧칠되고 왜곡된 이미지로 나온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읽을 때 팽팽한 균형감각과 세심한 독법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유다.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newsId=20120728000019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16면| 입력시간: 2012-07-28 [07:57:37] | 수정시간: 2012-07-30 [08:13:44]
정출헌 지음 / 한겨레출판 / 296쪽 / 1만 3천 원
같은 사건도 달리 본 삼국사기·삼국유사
김부식에게 선덕여왕이란? "여자가 무슨 정치를 한다고…", "역사란 역사가와 그가 살던 시대가 공모하여 만들어낸 '거대한 허구'에 다름 아니다."
도발적 주장의 근거는 우리의 고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두 책이 그려낸 삼국의 역사는 딴판이다. 기술 방식은 물론, 같은 사건조차 찾기 어렵다. 12세기 유학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가 사대적·귀족적·유교적이라면, 13세기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자주적·서민적·불교적이다.
저자는 두 책을 나란히 세워놓고 같은 사건을 다루는 두 남자의 시각차를 뜯어봤다.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 때의 충신 박제상에 대한 기록을 보자. 고구려와 왜(일본)에 볼모로 잡혀있던 왕의 두 동생을 구출해내고 끝내 자신은 왜국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골격은 같다. 하지만 결말은 사뭇 다르다. '삼국사기'는 두 아우를 찾은 왕의 흥겨운 잔치가 피날레. 박제상의 비통한 죽음이나 지아비를 잃은 아내의 절절한 슬픔 같은 건 없다.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김부식은 박제상의 죽음을 '충절의 끝'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 '삼국유사'의 결말은 지아비를 기다리던 부인이 신모(神母)가 되었다는 이야기.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통곡하다 죽었다. 그래서 부인을 치술신모(鵄述神母)라 하는데…." 극한의 고통을 겪은 인간이 급기야 신적 존재로 승화한다는 일연의 믿음.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급급한 중생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드러난 대목이다.
우리가 접하는 삼국시대 여성의 모습은 결국 두 남성의 프리즘에 굴절돼 그려진 상이라는 게 책의 골격이다. 특히 근엄한 유학자 김부식은 여성을 일부러 다루지 않거나 혹평한다. 선덕여왕에 대해선 불편한 심경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데,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념에 따라 서술하다 보니 왜곡된 사실도 생겼다. 온달과 평강공주(삼국사기), 서동과 선화공주(삼국유사)의 로맨스가 대표적. 저자는 온달의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며 "평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양강왕 때 전사했다는데, 죽은 아비(양강왕)가 아들(평강왕)을 계승해 왕위에 올랐다는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범한 것"이라 썼다.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온달의 '충절담'을 싣기 위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김부식 스스로의 원칙까지 위반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일연도 마찬가지. "마한(馬韓)을 세운 무강왕의 어린 시절을 백제 무왕의 어린 시절로 바꾸는 오류를 범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김부식과 일연이 덧칠한 삼국의 모습을 낱낱이 비교·해부한 시도가 돋보인다. 사례들이 흥미진진한 데다 짜임새 있는 기획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저자의 해석에 대해선 견해가 엇갈리겠지만.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28/2012072800259.html?newsplus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입력 : 2012.07.28 03:06
'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북악산 숙정문 (0) | 2012.08.26 |
---|---|
장충체육관 (0) | 2012.08.12 |
야사(野史)와 정사(正史) (0) | 2012.07.27 |
외계충격설… 한국사 해석 (0) | 2012.05.24 |
개와 인간이 함께 쓴 문화사 (0) | 2011.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