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故事成語) 풀이

2015. 12. 25. 15:46名句

1. 가인박명(佳人薄命) // 아름다운 여인은 운명이 기박함. ≪出典≫‘蘇軾’의 詩

 

고사

 

 

아래 시의 작자 소식(蘇軾:1036-1101)이 항주, 양주 등의 지방장관으로 있을 때 우연히 절에서 나이 삼십이 이미 넘었다는 예쁜 여승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웠을 소녀시절을 생각하며 미인은 역사적으로 운명이 기박하였음을 시로 쓴 데서 전하여졌음.

두 볼은 엉긴 우유와 같고 머리는 옻칠을 한 것처럼 새까맣고,

눈빛이 발에 들어오니 주옥과 같이 빛난다.

본디 흰 비단으로써 선녀의 옷을 지으니,

입술연지는 천연의 바탕을 더럽힌다 하여 바르지 않았네.

오나라 사투리의 애교 있는 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애띠고,

무한한 사이의 근심 다 알 수 없네.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 운명 기박함이 많으니,

문을 닫고 봄이 다하니 버들꽃 떨어지네.

雙頰凝酥髮抹漆眼光入廉珠的白樂

故將白練作仙衣不許紅膏汗天質

吳音嬌軟帶兒癡無限間愁總未知

自古佳人多命薄閉門春盡楊花落

이 시는 1086년부터 8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은 어린 승려를 노래한 七言律詩로 되어 있다.

2. 각주구검(刻舟求劍) //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생각만 고집하며 이를 고 치지 않는 어리석고 미련함을 비유하는 말. ≪出典≫‘呂氏春秋’

 

고사

 

 

戰國時代, 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揚子江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사! 이를 어쩐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 이윽고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그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楚人 有涉江者 其劍 自舟中 墜於水 遽刻其舟 曰『是 吾劍之所從墜』舟止 從其所刻者 入水求之 舟己行矣 而劍不行 求劍若此 不亦惑乎.

以古法 爲其國 與此同 時己徙矣 以法不徙 以此爲治 豈不難哉.

【유사어】수주대토(守株待免)

3. 거안제미(擧案齊眉) // 밥상을 눈썹과 가지런하도록 공손히 들어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뜻으로, ‘남편을 깎듯이 공경함’을 이름. ≪出典≫‘後漢書’의 逸民傳

 

고사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양홍(梁鴻)이란 학자가 있었다. 뜻이 있어 장가를 늦추고 있는데 같은 縣에 몸이 뚱뚱하고 얼굴이 못생긴 맹광(孟光)이라는 처녀가 서른이 넘은 처지에서 “양홍같은 훌륭한 분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는 소문을 들은 양홍은 이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색시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자 색시가 궁금하여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는 이유를 물었다. 양홍이 대답하기를,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라도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하자,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화장도 하지 않고 산골 농부의 차림으로 생활을 하자 양홍도 그녀와 둘이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활했다. 양홍은 농사짓는 틈틈이 시를 지어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그 시 속에 왕실을 비방하는 내용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잡으려 하자 吳나라로 건너가 고백통(皐白通)이라는 명문가의 방앗간 지기가 되어 지냈다. 그러나 양홍

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아내는 밥상을 차리고 기다렸다가 눈을 아래로 깔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올려[擧案齊眉] 남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고백통(皐白通)이 양홍 내외를 보통으로 보지 않고 도와서 양홍은 그 후 수십 편의 책을 저술할 수가 있었다.

梁鴻字伯鷰 扶風平陵人也 家貧而尙節介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力擧石臼 擇對不嫁 日

欲得賢如梁伯鷰者鴻聞而聘之 字之日德曜 名孟光 至吳爲人賃春 每歸 妻爲具食不敢於鴻

前仰視 擧案齊眉.

4. 건곤일척(乾坤一擲) //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 걸이로 승부나 성패를 겨룸.

≪出典韓愈의 詩 ‘過鴻溝’

 

고사

 

 

이 말은, 당나라의 大文章家인 한유가 河南省 內의 鴻溝를 지나다가 그 옛날(B.C 203),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乾坤一擲’을 촉구한 張良 · 陳平을 기리며 읊은 회고시 <과홍구(過鴻溝)>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에 있다.

용은 지치고, 호랑이는 피곤하여 이 강을 가르니,

억만 창생들은 성명(性命)이 있다.

누가 군왕을 권하여 말머리를 돌릴 수 있을까?

진정 한 번 던짐을 이루어 건곤(乾坤)을 건다. <과홍구(過鴻溝)> 中에서

龍疲虎困割川原, 億萬蒼生性命存.誰勸君王回馬首, 眞成一擲賭乾坤.

항우가 齊·趙·梁 땅을 전전하면서 전영(田榮)·진여(陳餘)·팽월(彭越) 등의 반군을 치는 사이에 유방은 관중(關中)을 합병하고 이듬해 의제 弑害에 대한 징벌을 구실로 56만 대군을 휘몰아 팽성(彭城)을 공략했다. 그러나 급보를 받고 달려온 항우가 반격하자 유방은 아버지와 아내까지 적(敵)의 수중에 남겨둔 채 겨우 목숨만 살아 하남성 內의 형양(滎陽)으로 패주했다.

그후 병력을 보충한 유방은 항우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싸움을 멈췄다.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를 돌려보내고 팽성을 향해 철군 길에 올랐다. 이어 유방도 철군하려 하자 참모인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유방에게 진언했다.

“漢나라는 천하의 태반을 차지하고 제후들도 따르고 있사오나, 楚나라는 군사들이 몹시 지쳐 있는 데다가 군량마저 바닥이 났사옵니다. 이야말로 하늘이 楚나라를 멸하려는 천의(天意)이오니 당장 쳐부숴야 하옵니다. 지금 치지 않으면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기는 꼴’[養虎遺患]이 될 것이옵니다.”

여기서 마음을 굳힌 유방은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하였다. 이듬해 유방은 한신(韓信)·팽월 등의 군사와 더불어 安徽城 내의 垓下에서 楚나라 군사를 포위하고, ‘四面楚歌’ 작전을 폈다. 참패한 항우는 안휘성 내의 烏江으로 패주하여 자결하고, 유방은 천하 통일의 길로 들어섰다.

5. 결초보은(結草報恩) // 죽어 혼령이 되어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 ≪出典≫‘春秋左氏傳’

 

고사

 

 

춘추시대 晉나라의 위무자(魏武子)에게 젊은 첩이 있었는데 위무자가 병이 들자 본처의 아들 과(顆)를 불러 “네 서모를 내가 죽거들랑 改嫁시키도록 하여라.”하였으나, 위무자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들 과(顆)에게 다시 분부하기를 “내가 죽거들랑 네 서모는 반드시 순사(殉死)케 해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위무자가 죽자 아들 과(顆)는 “사람이 병이 위중하면 정신이 혼란해지기 마련이니 아버지께서 맑은 정신일 때 하신 말씀대로 따르리라.”하고는 아버지의 처음 유언을 따라 서모를 改嫁시켜 드렸다.

그 후 진환공(秦桓公)이 晉나라를 침략하여 군대를 보씨(輔氏)에 주둔시켰다.

보씨의 싸움에서 위과(魏顆)는 晉의 장수로 있었기 때문에 秦의 大力士 두회(杜回)라는 장수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위과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한 노인이 두회의 발 앞의 풀을 엮어(結草) 그가 넘어지게 하여 위과(魏顆)가 두회를 사로잡을 수 있게 하였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 서모의 애비되는 사람으로 그대가 아버지의 유언을 옳은 방향으로 따랐기 때문에 내 딸이 목숨을 유지하고 改嫁하여 잘 살고 있소. 나는 당신의 그 은혜에 보답(報恩)하고자 한 것이오.”

秋七月 秦桓公伐晉 次于輔氏 壬午 晉候治兵于稷 以略秋士 立黎侯而還 及洛魏顆敗 秦師于輔氏 獲杜回 秦之力人也 初魏武子有擘妾無子 武子疾 命顆曰 必嫁是 疾病則曰 必以爲殉及卒 顆嫁之曰 疾病則亂 吾從其治也 及輔氏之役 顆見老人結草 以亢杜回 杜回足質而顚 故獲之 夜夢之曰 余而所嫁婦人之父也 爾用先人之治命 余是以報.

6. 경국지색(傾國之色) // 나라 안에 으뜸가는 미인. 임금이 혹하여 나라가 뒤집 혀도 모를 만한 미인. 出典≫‘漢書’ 李夫人傳

 

고사

 

 

‘傾國’이 ‘傾城’과 아울러 美人을 일컫는 말로 쓰여지게 된 것은 이연년(李延年)의 다음과 같은 詩에서 유래한다.

북방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세상을 끊고 홀로 서 있네.

한 번 돌아보면 성을 기울이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를 기울게 하네.

어찌 성을 기울이고 나라를 기울임을 알지 못하랴.

아름다운 사람은 두 번 얻기 어렵네.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무제는 곧 그녀를 불러들여 보니 더없이 예뻤고 춤도 능숙해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여인이 이부인(李夫人)이다. 傾國이란 말은 李白의 「名花傾國兩相歡」 구절과 백거이의 ‘장한가’의 「한왕은 색(色)을 중히 여겨 傾國을 생각한다.」라는 구절과 항우에게서 자기 妻子를 변설로써 찾아준 후공(侯公)을 漢高祖가 「이는 천하의 변사이다. 그가 있는 곳에 나라를 기울이게 할 수 있다.」고 칭찬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7. 계명구도(鷄鳴狗盜) // 행세하는 사람이 배워서는 아니 될, 천한 기능을 가진 사람. 出典≫‘史記’ 孟嘗君列傳

 

고사

 

 

전국시대 중엽, 齊나라 孟嘗君은 왕족으로 재상을 지낸 정곽군(靖郭君)의 40여 자녀 중 서자로 태어났으나 靖郭君은 자질이 뛰어난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윽고 설(薛) 땅의 영

주가 된 맹상군은 선정을 베푸는 한편 널리 인재를 모음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떨렸다.

이 무렵(B.C 298), 맹상군은 대국(大國)인 秦나라 소양왕(昭襄王)으로부터 재상 취임 요청을 받았다. 내키지 않았으나 나라를 위해 수락했다. 그는 곧 3,000명의 식객(食客) 중에서 엄선한 몇 사람만 데리고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도착하여 소양왕을 알현하고 값비싼 호백구(狐白裘)를 예물로 진상했다. 그러나 소양왕이 정작 맹상군을 재상으로 기용하려 하자 중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제나라의 왕족을 재상으로 중용하심은 진나라를 위한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그래서 약속은 깨졌다. 소양왕은 맹상군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원한을 품고 복수를 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은밀히 죽여 버리기로 했다. 이를 눈치 챈 맹상군은 궁리 끝에 소양왕의 총희(寵姬)에게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엉뚱한 요구를 했다.

“내게도 진상한 것과 똑같은 호백구를 주시면 힘써 보지요.”

당장 어디서 그 귀한 호백구를 구한단 말인가. 맹상군은 맥이 빠졌다. 맹상군을 수행한 식객 중 도둑질에 능한 특기를 가진 ‘구도’란 자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날 밤 궁중으로 잠입해서 전날 진상한 그 호백구를 감쪽같이 훔쳐 내어 그녀에게 주었다. 소양왕은 총희의 간청에 못 이겨 맹상군의 귀국을 허락했다.

맹상군은 일행을 거느리고 서둘러 국경인 함곡관(涵谷關)으로 향했다. 한편 소양왕은 맹상군을 놓아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추격병을 급파했다. 한밤중에 함곡관에 닿은 맹상군 일행은 거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첫닭이 울 때까지 관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일행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동행한 식객 중에 소리 흉내내기에 특기가 있는 ‘계명’이 인가(人家) 쪽으로 사라지자 이내 첫닭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동네 닭들이 일제히 따라 울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병졸들이 눈을 비비며 관문을 열자 맹상군 일행은 함곡관 문을 나와 말[馬]에 채찍을 가하여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추격병이 관문에 닿은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고 한다.

8. 고성낙일(孤城落日) // 남의 도움이 없는 몹시 외로운 정상의 비유.

≪出典≫唐나라 王維의 詩

 

고사

 

 

이 詩는 왕유(王維:699-759)의 칠언절구(七言絶句)인 <送韋評事-위평사를 보냄>에서 읊은 것이다.

장군을 따라서 우현(右賢)을 취하고자 하니,

모래밭으로 말을 달려 거연(居延)으로 향하네.

멀리 한나라 사자가 소관(蕭關) 밖에 옴을 아니,

근심스러워 보이는구나, 고성낙일(孤城落日)의 가여.

欲逐將軍取右賢沙場走馬向居延

遙知漢使蕭關外愁見孤城落日邊

이 詩에서는 직접 세력이 쇠퇴하여 도움도 기대도 할 수 없는, 마음이 안 놓이는 상태에 있음을 비유하여, 「孤城落日」이 불려진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요새(要塞) 밖의 쓸쓸한 풍경을 노래한 것이며, 그곳에 간 친구가 그곳에서 겪을 안타까운 처지를 상상하여, 그 처지를 위로하는 기분으로 읊은 것이다.

요새(要塞) 밖에서의 안타까움을 ‘孤城’과 ‘落日’이라는 사물에 집약시킨 왕유(王維)의 필치도 멋지지만, 이것을 홀로 쓸쓸하게 완전히 썩어버릴 일에 마음이 안 놓이는 것에다 연관지어 사용하는 후세 사람들의 말[言] 부리는 법도 또한 묘미가 있다.

9. 고침안면(高枕安眠) // 근심없이 안심하고 잘 잠. ≪出典≫戰國策 魏策 / ‘史記’ 張儀列傳

 

고사

 

 

전국시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종횡가(縱橫家)로서 유명한데 소진은 합종(合縱), 장의는 연횡(連橫)을 주장했다.

소진보다 악랄했던 장의는 진나라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웃 나라를 압박했다. 진나라 혜 문왕(惠文王) 10년(B.C 328)에는 장의 자신이 진나라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침략했다. 그 후 위나라의 재상이 된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 애왕(哀王)에게 합종을 탈퇴하고 연횡에 가담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는 본보기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8만에 이르는 군사를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애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애왕에게 말했다.

“전하, 만약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초나라나 한나라가 쳐들어 오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초나라와 한나라로부터의 禍만 없다면 전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주무실 수 있사옵고[高枕安眠]’ 나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옵니다.”

애왕(哀王)은 결국 진나라와 화목하고 합종을 탈퇴했다. 장의는 이 일을 시작으로 하여 나머지 다섯 나라를 차례로 방문, 설득하여 마침내 주(周)나라 난왕(赧王) 4년(B.C 311)에 연횡을 성립시켰다.

10. 곡학아세(曲學阿世) // 정도(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함.

≪出典≫‘史記’ 儒林傳

 

고사

 

 

한(漢)나라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山東)에 사는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으나 직언을 잘하는 대쪽 같은 선비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사이비(似而非)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中傷誹謗)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경제는 끝내 듣지 않았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少壯)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私設)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 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曲學]’ 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둘 바를 몰랐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태산북두(泰山北斗)를 알아 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固之徵也 薛人公孫弘亦徵 側目而視固 固曰 公孫子 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유사어】어용학자(御用學者)

11. 공중누각(空中樓閣) // 공중에 누각을 짓는 것처럼 근거나 토대가 없는 사물 을 이르는 말. ≪出典≫‘夢溪筆談’

 

고사

 

 

송나라의 학자 심괄(沈括:號-夢溪翁)이 저술한 일종의 박물지(博物誌)인≪夢溪筆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등주(登州)는 사면이 바다에 임하여 봄과 여름철에는 저 멀리 하늘가에 성시누

대(城市樓臺)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을 해시(海市)라고 이른다.

登州四面臨海 春夏時遙見空際有城市樓臺之狀 土人謂之海市.

훗날 청(淸)나라의 학자 적호(翟灝)는 그의 저서≪통속편(通俗篇)에서 심괄의 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언행이 허구에 찬 사람을 일컬어 ‘공중누각(空中樓閣)’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일을 인용한 것이다.

今稱言行虛構者 曰空中樓閣 用此事.

이처럼 ‘空中樓閣’이란 말은 이미 청나라 때부터 쓰여 왔으며, 심괄의 글 가운데 ‘海市’라는 것은 ‘신기루(蜃氣樓)’를 가리키는 말이다.

「史記」의 ‘천관서(天官書)’에도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기(蜃氣)는 누대(樓臺)를 본뜬다. 넓은 들판의 기운이 궁궐을 이룬다.

蜃氣象樓臺 廣野氣成宮闕.

【유사어】과대망상(誇大妄想)

12. 관포지교(管鮑之交) // 중국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같은 친교라는 뜻 으로, 친구 사이의 다정한 교제를 일컬음. ≪出典≫‘史記’ 列子

 

고사

 

 

춘추시대 초엽, 제(齊)나라에 관중(管仲 : ?~B.C 645)과 포숙아(鮑叔牙)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 : 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齊)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 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옵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 夫)로 중용(重用)하고 정사를 맡겼다 한다.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老母)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

【유사어】문경지교(刎頸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단금지교(斷金之交), 수어지교(水魚 之交), 교칠지교(膠漆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반의어】시도지교(市道之交)

13. 괄목상대(刮目相對) // 괄목하고 대면함. 남의 학식이 부쩍 는 것을 일컬음.

≪出典≫‘三國志’ 吳志 呂蒙傳注

 

고사

 

 

삼국시대(三國時代) 초엽, 오왕(吳王) 손권(孫權 : 182-252)의 신하 장수 중에 여몽(呂蒙)이 있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전공(戰功)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어느 날 여몽은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지(戰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券]’ 학문에 정진했다. 그 후 중신(重臣) 가운데 가장 유식한 재사 노숙(魯肅)이 전시 시찰길에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다.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진 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오나라에 있을 때의 여몽이 아닐세(非復吳下阿夢)’ 그려.”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때 ‘눈을 비비고 대면할[刮目相對]’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

至於今者 學識莫博 非復吳下阿夢曰 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

14. 교언영색(巧言令色) //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 ≪出典≫‘論語’ 學而篇

 

고사

 

 

공자(孔子 : 이름은 ‘丘’, B.C 551-479)는 아첨꾼에 대해≪論語≫‘학이편(學而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라 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에는 ‘인(仁)’이 적다.(巧言令色 鮮矣仁)

말재주가 교묘하고 표정을 보기 좋게 꾸미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뒤집어서 또 공자는 ‘자로편(子路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직 의연하고 질박 어눌한 사람은 ‘인(仁)’에 가깝다.(剛毅木訥 近仁)

의지가 굳고 용기가 있으며 꾸밈이 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은 ‘인(덕을 갖춘 군자)’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라도 ‘인(덕을 갖춘 군자)’ 그 자체는 아니라고 공자는 ‘옹야편(擁也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질 빈빈한 연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文質彬彬 然後君子)

즉, 문(文:형식)과 질(質:실질)이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군자라는 뜻이다.

【반의어】강의목눌(剛毅木訥), 성심성의(誠心誠意)

【참 조】눌언민행(訥言敏行)

15. 교주교슬(膠柱鼓瑟) // 고지식하여 조금도 변통성이 없음의 비유.

≪出典≫‘史記’ 廉頗 藺相如列傳

 

고사

 

 

조나라에 조사(趙奢)라는 훌륭한 장군이 있었다. 그에게 괄(括)이라는 아들이 있어 병서를 가르쳤는데 매우 영리하여 뛰어나게 병법을 잘 알았다. 그러나 조사(趙奢)는,

“전쟁이란 생사가 달린 결전이므로 이론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병법을 이론적으로만 논하는 것은 장수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앞으로 괄(括)이 장수가 된다면 조나라가 큰 변을 당할 위험이 있다.”

하며 부인에게 나라에서 조괄을 대장으로 삼지 않도록 말려 달라는 유언까지 했다.

뒷날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면서 첩자를 보내 流言蜚語를 퍼뜨렸다.

“조나라 염파 장군은 늙어서 싸움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진나라는 조괄이 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 流言蜚語에 빠진 조나라 왕은 염파 대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상여(藺相如)가 극력 반대하면서,

“임금께서는 그 이름만 믿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는 것은 마치 기둥[膠柱]을 아교로 붙여 두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괄은 한갓 그의 아버지가 준 병법을 읽었을 뿐, 때에 맞추어 변통할 줄을 모릅니다.”[膠柱鼓瑟]

그러나 임금은 그토록 신임하던 인상여의 말도 듣지 않고 조괄을 대장에 임명하였다.

조괄은 대장이 되는 그날로 병서에 있는 대로 하여 전부터 내려오는 군영들을 뜯어고치고 참모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자기 주장대로만 작전을 전개했다.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조괄은 이론만으로 작전을 감행한 끝에 40만이라는 대군(大軍)을 몽땅 죽이는 중국 역사상 최대 최악의 참패를 가져왔다.

거문고의 기둥을 풀로 붙여 고정해 두고 거문고를 타니 조율을 할 수 없게 되어 소리[音]가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16. 구밀복검(口蜜腹劍) // 말로는 친한 체하나 속으로 해칠 생각을 가짐. ≪出典≫新唐書

 

고사

 

 

장량과 제갈량, 강태공 등이 좋은 방면의 모사(謀士)였다면, 당 현종(唐玄宗)때 재상을 19년 지낸 이임보(李林甫)는 나쁜 방면으로 그들과 맞먹는 모사였다. 간사하기로는 조조와 필적할 인물이나 조조는 대인(大人)에 속하지만 임보는 소인(小人) 가운데 소인(小人)이었다.

당나라를 뒤엎을 만한 반란을 일으켰던 안록산도 이임보가 두려워 그가 죽은 지 3년 후에 반란을 일으킬 만큼 그를 두려워했다.≪십팔사략(十八史略)에 기록된 이임보의 평(評)을 보자.

이임보는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배척하고 억누르는, 성격이 음험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口蜜腹劍]’라고 말했다. 서재에 앉아 깊이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다음은 반드시 주살(誅殺)이 있었으며 가끔 큰 옥사를 일으켰다. 태자로부터 이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했다. 재상 지위에 있던 19년 동안에 천하의 난리를 길러내었으나, 현종(玄宗)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안록산도 이임보의 술수를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李林甫 妬賢嫉能 排抑勝己 性陰險 人以爲 ‘口有蜜腹有劍’ 每夜獨坐偃月堂 有所深思 明日必有誅殺 屢起大獄 自太子以下皆畏之 在相位十九年 養成天下之亂 而上不悟 然綠山畏林甫術數 故終其世末 敢反.

【유사어】소리장도(笑裏藏刀), 소중유검(笑中有劍)

17. 구우일모(九牛一毛) // 많은 가운데서 가장 적은 것의 비유. ≪出典≫‘漢書’ 報任安書

 

고사

 

 

한(漢)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 : B.C 141-87)때 5,000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匈奴)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李陵 : B.C ?-72)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初戰)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난전(亂戰) 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李陵)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대(厚待)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일족(一族)을 참형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司馬遷 : B.C 135?-93?)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辛苦)를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

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옵소서.”

무제는 진노하여 사마천을 투옥(投獄)한 후 궁형(宮刑)에 처했다. 세인(世人)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 일컫고 있다. 사마천은 이를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 적고, 이어 착찹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 녕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유사어】창해일속(滄海一粟), 창해일적(滄海一滴), 대해일적(大海一滴)

18. 군계일학(群鷄一鶴) // 평범한 사람 가운데의 뛰어난 사람을 이름. ≪出典≫‘晉書’ 嵆紹傳

 

고사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위(魏)의 혜강(嵆康)의 아들로 혜소(嵆紹)가 있었는데 10살 때 아 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당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이부(吏部)에서 벼슬하던 산도(山濤)가 무제(武帝)에게 상주(常住)하였다.

≪서경(書經)에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으며 아들의 죄는 그 아비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혜강은 도륙당했음) 비록 혜소는 혜강의 아들이나 그 슬기나 지혜는 뛰어납니다. 그에게 비서랑(秘書郞) 벼슬을 시켜 주십시오.”

“그대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라면 승(丞)을 시켜도 좋을 듯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무제는 비서랑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인 비서승(秘書丞)으로 혜소를 등용했다.

혜소(嵆紹)가 처음으로 낙양(洛陽)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저께 많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의 드높은 혈기와 기개는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群鷄一鶴]’과 같더군요.”

이 말을 듣고 왕융은 대답했다.

“그것은 자네가 그의 부친을 애초부터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네.”

【동의어】계군일학(鷄群一鶴)

19. 권토중래(捲土重來) // 한 번 패했다가 세력을 회복해서 다시 쳐들어옴.

≪出典≫杜牧의 詩 ‘題烏江亭’

 

고사

 

 

이 말은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杜牧 : 803-852)의 詩 <제오강정(題烏江亭)>에 나오 는 마지막 구절이다.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으니

수치를 싸고 부끄럼을 참음이 남아로다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권토중래’는 아직 알 수 없네

勝敗兵家不可期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豪傑捲土重來未可知

오강(烏江 : 安徽省 內 所在)은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 : B.C 232-202)가 스스로 목을 쳐서 자결한 곳이다. 한왕(漢王) 유방(劉邦)과 해하(垓下 : 안휘성 내 소재)에서 펼친 ‘운명과 흥망을 건 한판 승부[乾坤一擲]’에서 패한 항우는 오강으로 도망가 정장(亭長)으로부터 “강동(江東)으로 돌아가 재기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항우는 “8년 전(B.C 209) 강동의 8,000餘 子弟와 함께 떠난 내가 지금 혼자 ‘무슨 면목으로 강을 건너 강동으로 돌아가[無面渡江東]’ 부형들을 대할 것인가?”라며 파란만장(波瀾萬丈)한 31년의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항우가 죽은 지 1,00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두목(杜牧)은 오강의 객사(客舍)에서 일세의 풍운아(風雲兒)―단순하고 격한 성격의 항우,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는 장사 항우,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애인 우미인(虞美人)과 헤어질 때 보여준 인간적인 매력도 있는 항우―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강동의 부형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으면 강동은 준재가 많은 곳이므로 권토중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한 항우를 애석히 여기며 이 시를 읊었다. 이 시는 항우를 읊은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참 조】선즉제인(先則制人), 건곤일척(乾坤一擲), 사면초가(四面楚歌)

20. 금상첨화(錦上添花) // 좋은 일에 또 좋은 일을 더함. 出典≫王安石의 詩 ‘卽事’

 

고사

 

 

왕안석(王安石)은 북송(北宋) 중엽, 군사비 팽창에 의한 경제적 파탄을 구하려고 획기적인 신법(新法)을 실시한 정치적 귀재(鬼才)일 뿐 아니라 송(宋)나라 시대의 시풍(詩風)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다음 시 <卽事>는 그가 만년(晩年)에 정계를 떠나 남경(南京)의 한적한 곳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은 남원을 흘러 언덕 서쪽으로 기우는데

바람엔 맑은 빛이 있고 이슬에는 꽃의 화려함이 있네.

문앞의 버들은 옛 도령의 집이요

우물가의 오동은 전날 총지의 집이라.

좋은 모임에서 술잔을 거듭 비우려 하는데

아름다운 노래는 비단 위에 꽃을 더한 듯

문득 무릉의 술과 안주를 즐기는 손이 되어

내 근원에 응당 붉은 노을이 적지 않으리라.

河流南苑岸西斜風有晶光露有華

門柳故人陶令宅井桐前日總持家

嘉招欲履盃中淥麗唱仍添錦上花

便作武陵樽俎客川源應未少紅霞

21. 금의야행(錦衣夜行) // 비단옷을 입고 밤에 간다는 뜻으로, 아무 보람없는 행 동을 가리킴. ≪出典≫‘漢書’ 項籍傳 / ‘史記’ 項羽本紀

 

고사

 

 

유방(劉邦)에 이어 진(秦)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입성한 항우(項羽)는 유방과 대조적인 행동을 취했다. 우선 유방이 살려둔 3세 황제 자영(子嬰)을 죽여 버렸다.(B.C 206) 또

아방궁(阿房宮)에 불을 지르고 석 달 동안 불타는 것을 안주 삼아 미인들을 끼고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시황제의 무덤도 파헤쳤다. 유방이 창고에 봉인해 놓은 엄청난 금은 보화(金銀寶貨)도 몽땅 차지했다.

모처럼 제왕(帝王)의 길로 들어선 항우가 이렇듯 무모하게 스스로 그 발판을 무너뜨리려 하자 모신(謀臣) 범증(范增)이 극구 간했다. 그러나 항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랫동안 누벼온 싸움터를 벗어나 많은 재보와 미녀를 거두어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자 한생(韓生)이라는 사람이 또 간했다.

“관중(關中)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요충지인데다 땅도 비옥합니다. 하오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시고 천하를 호령하십시오.”

그러나 항우의 눈에 비친 함양은 황량한 폐허일 뿐이었다. 그보다 하루바삐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공한 자신을 과시(誇示)하고 싶었다. 항우는 동쪽의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錦衣夜行]’과 같아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항우에게 함양에 정착할 뜻이 없음을 알게된 한생은 항우 앞을 물러나가 이렇게 말했다.

“초(楚)나라 사람은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고 갓을 씌워 놓은 것[沐猴而冠]처럼 지혜 가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군.”

이 말을 전해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당장 한생을 잡아 삶아 죽였다고 한다.

【동의어】의금야행(衣錦夜行), 수의야행(繡衣夜行)

【반의어】금의주행(錦衣晝行)

22. 기호지세(騎虎之勢) // 범을 타고 달리는 기세. 곧 중도에서 그만 둘 수 없는 형세. ≪出典≫‘隋書’ 獨孤皇后傳

 

고사

 

 

남북조(南北朝) 시대 말엽인 581년,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北周)의 선제(宣帝)가 죽자, 재상 양견(楊堅)은 즉시 입궐하여 국사를 총괄했다. 외척이지만 한족(漢族)이었던 그는 일찍이 오랑캐인 선비족(鮮卑族)에게 빼앗긴 이 땅에 한족의 천하를 회복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선제가 죽은 것이다.

양견이 궁중에서 모반을 꾀하고 있을 때 이미 남편의 뜻을 알고 있던 아내 독고부인(獨孤夫人)으로부터 전간(傳簡)이 왔다.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이므로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騎虎之勢 不得下) 만약 도중에서 내리면 잡혀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호랑이와 함께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디 목적을 달성하옵소서.”

이에 용기를 얻은 양견은 선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나이 어린 정제(靜帝)를 페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문제(文帝)라 일컫고 국호를 수(隋)라고 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589년, 문제는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인 진(陳)나라마저 멸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다.

周나라의 宣帝가 돌아가심을 당하여, 高祖인 文帝가 조정에 들어가서 백가지 일을 총괄하고 있었다. 독고황후는 사람을 시켜 高祖에 일러 말하기를, “대사는 이미 그러한 것이니, 호랑이를 탄 형세로 내려 올 수가 없으니, 이것에 힘쓰라.”

當周宣帝崩 高祖入居禁中 總百揆 后使人謂高祖曰 大事已然 騎虎之勢 不得不勉之.

【원 말】기수지세(騎獸之勢)

【유사어】기호난하(騎虎難下)

23. 난형난제(難兄難弟) //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두 사물의 낫고 못함을 분간하기 어려움의 비유. ≪出典≫‘世說新語’ 德行篇

 

고사

 

 

“양상군자(梁上君子)”로 유명한 후한(後漢)의 진태구(陳太丘)가 낭능후(郎陵候)를 지낸 순숙(筍淑)의 집을 아들 진기(陳紀 : 元方)와 진심(陳諶 : 季方), 진군(陳群 : 長方)을 데리고 찾아갔다. 순숙은 빈약하고 검소하여 노복도 없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순숙은 어린 막 내만 방에 두고 나머지 일곱 명은 전부 심부름을 시켰다. 이 때 태사(太史)가 임금께 아뢰기를, “덕성(德星)이 동쪽 순숙의 집에 다 모여 있다.”라고 했다.

한번은, 진식(陳太丘)이 친구와 어디를 가기로 약속하고 기다렸으나 워낙 늦어 먼저 출발했는데 늦게 온 친구가 진식을 욕하자 그 때 진기(陳紀 : 元方)는 이렇게 말했다.

“손님께서 아버지와 정오에 만나기로 약속하시고는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 이제 오셨으니 손님과 제 아버지 중 누가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까? 그리고 자식 앞에서 그 아버지를 욕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진식(陳太丘)을 찾아왔던 사람은 친구의 어린 아들에게 책망을 당하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내 사과하려 했으나 어린 진기(陳紀 : 元方)는 이미 대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또 한번은 사촌간인 진기(陳紀 : 元方)의 아들과 진심(陳諶 : 季方)의 아들 사이에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결말이 나지 않자 할아버지인 진식(陳太丘)에게 와서 판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진식(陳太丘)은, “원방(元方)도 형 되기가 어렵고 계방(季方)도 동생 되기가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고 말했다 한다.

24. 남귤북지(南橘北枳) //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는 뜻으로, 사람은 환경에 따라 악하게도 되고 착하게도 된다는말. ≪出典≫‘晏子春秋’

 

고사

 

 

춘추시대 말기, 제(齊)나라에 안영(晏嬰)이란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초(楚)나라 영왕(靈王)이 그를 초청했다. 안영이 너무 유명하니까 만나보고 싶은 욕망과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심술이 작용한 것이다. 수인사가 끝난 후 영왕이 입을 열었다.

“제(齊)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사람이야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경과 같은 사람밖에 사신으로 보낼 수 없소?”

안영의 키가 너무 작은 것을 비웃는 영왕의 말이었다.

그러나 안영은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예, 저의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상대방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 보내는 관례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신(臣)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뽑혀서 초나라로 왔습니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격의 대답이었다.

그때 마침 포리가 죄인을 끌고 지나갔다.

“여봐라! 그 죄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예, 제(齊)나라 사람이온데, 절도 죄인입니다.”

초왕(楚王)은 안영에게 다시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하오?”하고 안영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안영은 초연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강남에 귤(橘)이 있는데 그것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枳]가 되고 마는 것은 토질 때문입니다. 제(齊)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있을 때는 원래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그가 초(楚)나라에 와서 도둑질한 것을 보면, 역시 초나라의 풍토 때문인 줄 압니다.”

그 기지(機智)와 태연함에 초왕은 안영에게 사과를 했다.

“애당초 선생을 욕보일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과인이 욕을 당하게 되었구려.”하고는 크게 잔치를 벌여 안영을 환대하는 한편 다시는 제나라를 넘볼 생각을 못했다.

【동의어】귤화위지(橘化爲枳)

25. 낭중지추(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 곧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 도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뜻. ≪出典≫‘史記’ 平原君列傳

 

고사

 

 

전국시대 말엽,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이자 재상인 평원군(平原君 : 趙勝)을 초(楚)나라에 보내어 구원군(救援軍)을 청하기로 했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食客) 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뽑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자천(自薦)하고 나섰다.

“대감,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평원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이제 3년이 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적이 없지 않소?”

“그것은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

죠.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기만 한다면 끝뿐 아니라 자루[柄]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이 재치있는 답변에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毛遂)를 20번째 수행원으로 뽑았다.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國賓)으로 환대 받으면서 구원군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의어】추처낭중(錐處囊中)

26. 다기망양(多岐亡羊) // ① 학문의 길이 여러 갈래로 갈려 진리를 얻기 어려움. 방침이 많아 도리어 갈 바를 모름. ≪出典≫‘列子’ 說符篇

 

고사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했던 양자(楊子)와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집 사람들은 물론 양자네 집 하인들까지 청해서 양을 찾아 나섰다. 하도 소란스러워서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 찾는데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섰느냐?”

양자의 하인이 대답했다.

“예, 양이 달아난 그 쪽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다.

“그래, 양은 찾았느냐?”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양을 못 찾았단 말이냐?”

“예,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양자(楊子)는 우울한 얼굴로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했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한 현명한 제자가 선배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스승인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큰길에는 갈림길이 하도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고, 학자는 다방면(多方面)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에 와서 이 같이 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시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네.”

【동의어】망양지탄(亡羊之歎)

【유사어】독서망양(讀書亡羊)

27. 다다익선(多多益善) // 많을수록 더욱 좋음.≪出典≫‘史記’ 淮陰候列傳

 

고사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명장으로서 천하 통일의 일등 공신인 초왕(楚王) 한신(韓信)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계략을 써 그를 포박한 후 회음후(淮陰候)로 좌천시키고 도읍 장안(長安)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날, 漢 高祖는 한신과 여러 장군들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한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인은 몇 만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감이라고 생각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으실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예, 신(臣)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옵니다.”

高帝嘗與韓信言諸將能否 各有差 上問曰 如我能將幾何 臣曰 陛下不過能將十萬 上曰 於君何如 曰 臣多多而益善耳.

“다다익선? 핫핫핫…….”

고조는 한바탕 웃고 나서 물었다.

“다다익선이란 그대가 어찌하여 10만의 장수감에 불과한 과인의 포로가 되었는고?”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병사의 장수가 아니오라 장수(將帥)의 장수(將帥)이시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의 전부이옵니다.”

【동의어】다다익판(多多益辦)

28. 당랑거철(蟷螂拒轍) // 제 분수도 모르고 강적에게 반항함. ≪출전≫韓詩外傳 / 文選

 

고사

 

 

⑴≪韓詩外傳(券八)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시대 제나라 장공(莊公 : BC 794-731) 때의 일이다.

어느날,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터로 가던 도중 웬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휘두르며[蟷螂之斧]’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드는 것을 보았다.

“허, 맹랑한 놈이로군. 저건 무슨 벌레인고?”

장공이 묻자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가 대답했다.

“사마귀[蟷螂]라는 벌레이옵니다.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을 모르는 놈이온데, 제 힘도 생각지 않고 강적에게 마구 덤벼드는 버릇이 있사옵니다.”

장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렇게 말했다.

“저 벌레가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천하 무적의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니, 수레를 돌려 피해 가도록 하라.”

⑵≪文選에 보면,

‘蟷螂拒轍’은 삼국시대로 접어들기 직전, 진림(陳琳)이란 사람이 유비(劉備) 등 군웅(群雄)에게 띄운 격문(檄文)에도 나온다.

“조조(曹操)는 이미 덕을 잃은 만큼 의지할 인물이 못 된다. 그러니 모두 원소(袁紹)와 더불어 천하의 대의를 도모함이 마땅할 것이다. …… 지금 열악한 조조의 군사는 마치 ‘사마귀가 제 분수도 모르고 앞발을 휘두르며 거대한 수레바퀴를 막으려 하는 것[蟷螂拒轍]’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

【동의어】당랑지부(螳螂之斧), 당랑당거철(蟷螂當拒轍), 당랑지력(螳螂之力)

【유사어】당랑규선(螳螂窺蟬)

29. 대기만성(大器晩成) // 크게 될 사람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

≪出典≫‘三國志’ 魏志 / ‘後漢書’ / 老子

 

고사

 

 

⑴≪三國志≫‘魏志’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하고 일가 친척들로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鐘)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大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大器晩成’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⑵≪後漢書에 보면,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 25-57)때 마원(馬援)이란 명장이 있었다. 그는 변방의 관리로 출발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까지 된 인물이다. 마원이 생전 처음 지방관리가 되어 부임을 앞두고 형인 최황(崔況)을 찾아가자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너는 이른바 ‘大器晩成’형이야. 솜씨 좋은 대목이 산에서 막 베어 낸 거친 원목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좋은 제목으로 다듬어 내듯이 너도 네 재능을 살려 꾸준히 노력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부디 자중(自重)하라.”

⑶≪老子에도,

‘큰 네모(四角)는 모서리가 없으며 큰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大方無隔 大器晩成)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동의어】대기난성(大器難成)

【유사어】대재만성(大才晩成)

30. 동병상련(同病相憐) // ① 같은 병의 환자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

② 어려운 사람끼리 동정하고 도움. ≪出典≫吳越春秋 闔閭內篇

 

고사

 

 

전국시대인 기원전 515년, 오(吳)나라의 공자(公子) 광(光)은 사촌동생인 오왕(吳王) 요(僚)를 시해한 뒤, 오왕 합려(闔閭)라 일컫고 자객을 천거하는 등 반란에 적극 협조한 오자서(伍子胥)를 중용했다.

오자서는 7년 전, 초나라의 태자소부(太子小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있던 아버지와 역시 관리였던 맏형이 처형당하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오나라로 피신해 온 망명객이었다.

그가 반란에 적극 협조한 것도 실은 유능한 光[闔閭]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초나라 공략의 길이 열릴 것이며 초나라를 공략해야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을 수 있으리라는 원려(遠廬) 때문이었다.

그 해 또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은 백비가 오나라로 피신해 오자 오자서는 그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하여 대부(大夫) 벼슬에 오르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자서는 대부 피리(被離)에게 힐난을 받았다.

“백비의 눈길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니[鷹視虎步], 이는 필시 살인할 악상(惡相)이오. 그런데 귀공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인물을 천거하였소?”

피리의 말이 끝나자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별다른 까닭은 없소이다. 하상가(河上歌)에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있듯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비를 돕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요.”

그로부터 9년 후 합려가 초나라를 공략, 대승함으로써 오자서와 백비는 마침내 부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자서는 불행히도 피리의 예언대로 월(越)나라에 매수된 백비의 모함에 빠져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유사어】동우상구(同憂相救), 동주상구(同舟相救), 동기상구(同氣相救), 동악상조(同惡 相助), 동류상구(同類相救), 오월동주(吳越同舟), 유유상종(類類相從)

31. 마이동풍(馬耳東風) // 남의 말을 조금도 듣지 않고 지나쳐 흘려 버림을 이름.

≪出典≫‘李太白集’ 券十八

 

고사

 

 

이것은 李白의 <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라는 장편의 詩 가운데 있는 말이다.

“푸른 산을 둘러싸고 뜬구름이 하염없이 이어져 있고,

그 하늘 가운데 외로운 달이 흐르고 있다.

외로운 달은 추위에 못 이겨 빛나고,

은하수는 맑고 북두칠성은 흩어져 깔려 있는데,

밤의 많은 별들이 밝게 빛난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밤 그늘 서리의 하얀 것을 생각하고,

자네의 집 우물의 구슬 난간에 얼음이 얼어붙은 모양을 생각하고,

얼어붙은 자네의 마음을 생각했다.

인생은 아차 하는 사이에 백년도 채우지 못한다.

자, 술이나 마셔 한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햇볕이 쪼이지 않는 북쪽 창문 속에서,

시를 읊거나 부(賦)를 짓는 정도의 일일세.

일 만 마디를 지어도 고작 술 한 잔의 가치도 없네.“

그리고 나서 李白은 이렇게 읊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다 머리를 흔들 걸세.

동풍(東風)이 말의 귀를 쏘는 것 같음이 있네.

世人聞此皆掉頭 有如東風射馬耳

32. 막역지우(莫逆之友) // 아주 허물없는 사이. 出典≫‘莊子’ 大宗師篇

 

고사

 

 

<莊子>에 똑같은 형식으로 이야기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자사(子祀)와 자여(子輿)와 자리(子犁)와 자래(子來) 이렇게 네 사람은 서로 함께 말하기

를, “누가 능히 無로써 머리를 삼으며, 삶으로써 등을 삼고, 죽음으로써 엉덩이를 삼을까? 누가 사생존망(死生存亡)이 한 몸인 것을 알랴! 우리는 더불어 벗이 되자.” 네 사람은 서로 보고 웃었다.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벗이 되었다.

子祀 子輿 子犁 子來 四人相與語曰 孰能以無爲者 以生爲背 以死爲尻 孰知死生存亡之一體者 吾與之友矣 四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爲友.

자상호(子桑戶)와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 이렇게 세 사람은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누가 능히 서로 더불어 함이 없는데 서로 더불어 하며, 서로 도움이 없는데 서로 도우랴. 능히 하늘에 올라가 안개와 놀며, 끝이 없음에 날아 올라가며, 서로 잊음을 삶으로써 하고, 마침내 다하는 바가 없으랴”하고 말했다. 세 사람은 서로 보고 웃으며, 서로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더불어 벗이 되었다.

子桑戶 孟子反 子琴張 三人相與語曰 孰能相與於無相與 相爲於無相爲. 孰能登天遊霧 撓撓無極 相忘以生 無所終窮 三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友.

33. 맥수지탄(麥秀之歎) // 고국의 멸망을 한탄함. ≪出典≫‘史記’ / ‘詩經’

 

고사

 

 

중국 고대 3왕조의 하나인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이 음락(淫樂)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이를 지성으로 간(諫)한 신하 중 삼인(三人)으로 불리던 세 왕족이 있었다.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이 그들이다.

미자는 주왕의 형으로서 누차 간(諫)했으나 듣지 않자 국외로 망명했다. 기자(箕子)도 망명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짓 미치광이가 되고 또 노예로까지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 비간은 끝까지 간하다가 결국 가슴을 찢기는 극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주왕은 삼공(三公)의 한 사람이었던 서백(西伯)의 아들 발(發)에게 주살(誅殺) 당하고 천하는 주왕조(周王朝)로 바뀌었다. 주나라의 시조가 된 무왕(武王) 발(發)은 은왕조(殷王朝)의 봉제사(奉祭祀)를 위해 미자를 송왕(宋王)으로 봉(封)했다.

그리고 기자도 무왕을 보좌하다가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기자가 망명지에서 무왕의 부름을 받고 주나라의 도읍으로 가던 도중 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지나게 되었다. 번화하던 옛 모습은 간데없고 궁궐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했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치 못한 기자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벼와 기장도 윤기가 흐르는구나.

교활한 저 철부지[紂王]가

내 말을 듣지 않았음이 슬프구나.

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

【동의어】맥수서유(麥秀黍油), 맥수지시(麥秀之詩)

34. 맹모단기(孟母斷機) //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왔을 때, 짜던 베를 칼로 잘라서 훈계한 고사로 ‘어머니의 엄격한 자녀 교육’을 이름. ≪出典≫列女傳 蒙求

 

고사

 

 

孟子는 孔子의 손자인 子思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거니와, 이보다 앞서 소년시절에 유학에 나가 있던 孟子가 어느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어머니는 베를 짜고 있다가 孟子에게 물었다.

“네 공부는 어느 정도 나아갔느냐?”

“아직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를 옆에 있던 칼로 끊어버렸다. 孟子가 섬찟하여 물었다.

“어머니, 그 베는 왜 끊어버리시나이까?”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학문을 그만둔다는 것은, 내가 짜던 베를 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君子란 모름지기 학문을 배워 이름을 날리고, 모르는 것은 물어서 앎을 넓혀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평소에 마음과 몸을 편안히 하고, 세상에 나가서도 위험을 저지르지 않는다. 지금 너는 학문을 그만두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심부름꾼으로 뛰어다녀야 하고, 재앙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생계를 위하여 베를 짜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차라리 그 夫子에게 옷은 해 입힐지라도, 오래도록 양식이 부족하지 않겠느냐? 여자 가 그 생계의 방편인 베짜기를 그만두고, 남자가 덕을 닦는 것에 멀어지면, 도둑이 되지 않는다면 심부름꾼이 될 뿐이다.”

孟子가 두려워하여 아침 저녁으로 쉬지 않고서 배움에 힘써, 子思를 스승으로 섬겨, 드디어 천하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이것을 소위 ‘斷機之敎’라고 일컫는다.

【동의어】단기지계(斷機之戒), 단기계(斷機戒)

【유사어】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35. 모순(矛盾) //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 出典≫‘韓非子’ 難勢篇

 

고사

 

 

어느날 초나라 장사꾼이 저잣거리에 방패[盾]와 창[矛]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자, 여기 이 방패를 보십시오. 이 방패는 어찌나 견고한지 제아무리 날카로운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랑한 다음 이번에는 창을 집어들고 외쳐댔다.

“자, 이 창을 보십시오. 이 창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 때, 구경꾼들 속에서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러자, 장사꾼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楚人有鬻楯與矛者 譽之曰 吾楯之堅 莫能陷也 又譽其矛曰 吾矛之利 於物無不陷也 或曰 以子之矛 陷子之楯何如 其人不能應也.

【유사어】자가당착(自家撞着)

36. 문경지교(刎頸之交) // 생사를 같이하는 친한 사귐. 또 그런 벗.

≪出典≫‘史記’ 廉頗 藺相如列傳

 

고사

 

 

전국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하 유현(劉賢)의 식객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원상(原狀)대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廉頗)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城)을 쳐서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테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론 소양왕이지요.”

“나는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소양왕을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 장군 따위를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

오지 않는 것은 염파 장군과 내가 버티어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고 염파 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웃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荊杖)을 짊어지고[肉袒負荊]’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꿇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하고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刎頸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동의어】문경지계(刎頸之契)

【유사어】관포지교(管鮑之交), 금란지계(金蘭之契), 단금지계(斷金之契)

37. 문일지십(聞一知十) // 한가지를 들으면 열을 미루어 앎. ≪出典≫‘論語’ 公冶長篇

 

고사

 

 

공자의 제자는 삼천 명이나 되었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제자가 72명이나 되었으며 철인(哲人)으로 꼽힌 사람도 10명이나 되었다.

제자 중에 자공(子貢)은 재산을 모으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어 공자가 주유천하(周遊天下)할 때의 경비 대부분을 대었고 학문의 재주와 재치도 뛰어났다.

그러나 말없이 묵묵히 스승의 뒤를 따르는 안회(顔回)는 매우 가난했으나 삼 개월 동안 어질었다고 인(仁)을 허여(許與)받은 유일한 제자였다.

안회와 자공의 길고 짧음에 대하여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자공은 “사(賜)가 어찌 감히 회(回)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회(回)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사(賜)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는 자공의 대답에 만족했다. 역시 자공은 스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자신을 알고 있었다. “네가 안회만 못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이는 스승인 공자의 가슴에서 기뻐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子謂子貢曰 女與回也 孰愈對曰 賜也 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 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 弗如也.

38. 문전성시(門前成市) // 권세가나 부자가 되어 집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 루다시피 함. ≪出典≫‘漢書’ 孫寶傳 鄭崇傳

 

고사

 

 

전한(前漢) 말, 11대 황제인 애제(哀帝 : B.C 6-7) 때의 일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조저의 실권은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을 포함한 왕씨 일족으로부터 역시 외척인 부씨(傅氏), 정씨(丁氏) 두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인 애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동(美童)과 동성연애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중신들이 간(諫)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그 중 상서 복야(尙書僕射) 정숭(鄭崇)은 거듭 간하다가 애제에게 미움만 사고 말았다.

그 무렵, 조창(趙昌)이라는 상서령(尙書令)이 있었는데 그는 전형적인 아첨배로 왕실과 인척간인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어느날 조창은 애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숭(鄭崇)의 집 문 앞이 저자를 이루고 있습니다.[門前成市]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오니 엄중히 문초하시옵소서.”

애제는 그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문전은 저자와 같다[君門如市]’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예, 폐하. ‘신의 문전은 저자와 같사오나[臣門如市]’ 신의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옵니다. 황공하오나 한 번 더 조사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애제는 정숭(鄭崇)의 소청을 묵살한 채 옥에 가뒀다. 그러자 사예(司隸)인 손보(孫寶)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讒言)을 공박하고 서인(庶人)으로 내쳤다. 그리고 정숭(鄭崇)은 그 후 옥에서 죽고 말았다.

尙書令趙昌佞諂 素害崇 知其見疏 因奏崇 與宗族通 疑有姦 請治 上責崇曰 君門如市人 何以欲禁切主上 崇對曰 臣門如市 而臣心如水 願得考覆 上怒下崇獄窮治 死獄中.

【유사어】문전여시(門前如市), 문정여시(門庭如市)

【반의어】문전작라(門前雀羅),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39. 미생지신(尾生之信) // ① 신의가 굳음.≪出典≫史記 蘇秦列傳

② 우직하여 융통성이 없음. ≪出典≫莊子 盜跖篇

 

고사

 

 

춘추시대, 노(魯)나라에 미생(尾生 : 尾生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사나이였다.

어느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定時)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이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교각(橋脚)을 끌어안은 채 익사(溺死)하고 말았다.

“尾生은 믿음으로써 여자와 더불어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기약하고, 여자가 오지 않자, 물이 밀려와도 떠나지 않아, 기둥을 끌어안고서 죽었다.”

信如尾生 與女子期於梁下 女子不來 水至不去 抱柱而死.

① 전국시대, 종횡가로 유명한 소진(蘇秦)은 연(燕)나라 소왕(昭王)을 설파(說破)할 때, <신의있는 사람의 본보기>로 앞에 소개한 미생의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② 그러나 같은 전국시대를 살다간 莊子의 견해는 그와 반대로 부정적이었다. 莊子는 그의 우언(寓言)이 실려 있는≪莊子≫‘盜跖篇’에서 근엄 그 자체인 孔子와 대화를 나누는 유명한 도둑 도척(盜跖)의 입을 통해서 미생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인간은 책형(磔刑)당한 개나 물에 떠내려간 돼지 아니면 쪽박을 들고 빌어먹는 거지와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명목(名目)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

【동의어】포주지신(抱柱之信)

40. 발본색원(拔本塞源) // 폐단의 근원을 아주 없애 버림. ≪出典≫‘春秋左氏傳’ 昭公 九年條

 

고사

 

 

발본색원(拔本塞源)은 ‘春秋左氏傳’ 昭公 九年條 중, 주왕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유래된 故事이다.

“나에게 백부(伯父)가 계신 것은 마치 옷에 갓이 있는 것과 같다. 나무와 물에 근원이 있어야 하듯 백셩들에게 지혜로운 임금이 있어야 한다. 백부께서 만약 갓을 찢어버리고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으며[拔本塞源], 오로지 지혜로움을 버린다면 비록 오랑캐들이라도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春秋左氏傳’ 昭公 九年條에 실린, 윗글의 원문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나에게 큰아버지가 계신 것은, 마치 의복에 갓과 면류관이 있고, 나무와 물에 근원이 있고, 백성들에게 지혜로운 임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큰아버지께서 만일 갓을 짜개고 면류관을 부수고, 근본을 뽑아 근원을 틀어막고[拔本塞源], 오로지 지혜로운 임금을 버리신다면, 비록 오랑캐라 할지라도 그 남음이 어찌 한 사람에 있으리오.

我在伯父 猶衣服之有冠冕 木水之有本源 民人之有謀主 伯父若裂冠毁冕 拔本塞源 專棄謀主 雖戎狄其何有餘一人..

이와는 다른 出典으로, 명나라 때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의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이 있다.

왕양명의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을 여기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가 평소 제창하던 “하늘의 이치를 지니고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라.”는 말과 취지가 같다. 즉, 사사로운 탐욕은 근본부터 뽑아버리고 그 근원을 틀어막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신적인 고사가 지금 세상에서는 범죄나 범죄 조직의 뿌리를 뽑아버린다는 데에만 사용되고 있으니 이는 통탄할 일인가, 아니면 언어의 사회성에 대한 금석지감이라 할 일인가?

41. 배수지진(背水之陣) // ① (물러설 수 없도록)물을 등지고 적을 치는 전법의 하나.

②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의 비유.

≪出典≫‘史記’ 淮陰侯列傳 / ‘十八史略’

 

고사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이 제위(帝位)에 오르기 2년 전(BC 204)의 일이다.

명장 한신(韓信)은 유방의 명에 따라 위(魏)나라를 쳐부순 다음 조(趙)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조나라에서는 2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나라로 들어오는 길목인 정형(井陘)의 협도(狹道) 출구 쪽에 성채(城砦)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폈다.

이에 앞서 군략가인 아좌거(李左車)가 재상 진여(陳餘)에게 ‘한나라 군사가 협도를 통과할 때 들이치자’고 건의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는데, 첩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한신은 서둘러 협도를 통과하다가 출구를 10리쯤 앞둔 곳에서 일단 행군을 멈췄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한신은 2,000여 기병을 조나라의 성채 바로 뒷산에 매복시키기로 하고 매복 임무를 맡은 장수에게 이렇게 명했다.

“본대(本隊)는 내일 싸움에서 거짓 패주(敗走)할 것이다. 그 때 제군들은 적이 비운 성채를 점령한 뒤 한나라 깃발을 세우도록 하라.”

그리고 한신은 1만여 군사를 협도 출구 쪽으로 보내어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背水之陣]’ 한 다음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성채를 향해 나아갔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한나라 군사가 북을 울리며 진격하자 조나라 군사는 성채를 나와 응전했다. 2-3차 접전 끝에 한나라 군사는 퇴각하여 강가에 진을 친 부대에 합류했고, 승세(勝勢)를 탄 조나라 군사는 맹렬히 추격해 왔다. 한편 이러한 틈에 매복하고 있던 2,000여 한나라 기병대는 성채를 점령하고 한나라 깃발을 세웠다. 강을 등지고 진을 친 한나라 군사는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황인지라 필사적으로 대항하여 싸웠다. 이에 견디지 못한 조나라 군사가 성채로 돌아와 보니, 한나라 깃발이 나부끼고 있지 않는가. 당연히 전쟁은 한신의 대승리로 끝났다. 전승 축하연 때 부하 장수들이 배수진(背水陣)을 친 이유를 묻자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군사는 이번에 급히 편성한 오합지졸(烏合之卒)이 아닌가? 이런 군사는 사지(死地)에 두어야만 필사적으로 싸우는 법이다. 그래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것[背水之陣]’이다.”

【동의어】배수진(背水陣)

42. 백구과극(白駒過隙) // ‘흰 망아지가 빨리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본다’는 뜻으로, ‘인생과 세월의 덧없고 짧음’을 이르는 말. ≪出典≫‘莊子’ 知北遊篇 / ‘史記’

 

고사

 

 

인생이 지나가는 것의 빠르기가, 문틈으로 흰 말이 지나가는 것을 봄과 같다는 말이다.

≪莊子≫‘知北遊篇’에 다음과 같은 것이 실려 있다.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는 것은, ‘흰 말이 달려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白駒之過隙]’처럼 순간일 뿐이다. 모든 사물들은 물이 솟아나듯이 문득 생겨났다가 물이 흐르듯 아득하게 사라져가는 것이다. 변화로써 태어났다가 또한 변화로써 죽을 뿐이다. 생물들은 이를 슬퍼하고, 사람들도 이를 슬퍼한다. 죽음이란 화살이 살통을 빠져나가고, 칼이 칼집을 빠져나감과 같이 혼백이 육신에서 빠져나가고 이에 몸이 따라 무(無)로 돌아가는 것을 말함이니, 이야말로 위대한 복귀(復歸)가 아닌가!

사람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이처럼 허무한 일이다.

≪史記≫‘유후세가(留侯世家)’에는 여태후(呂太后)가 유후(留侯)에 대하여 한 말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인생의 한 세상 사이는 ‘흰 말이 틈을 지나가는 것[白駒過隙]’과 같다. 어찌 스스로 괴로워하기가 이와 같음에 이르겠는가?

人生一世間 如白駒過隙 何至自若如此乎.

43. 백년하청(百年河淸) // 중국의 황하(黃河)가 항상 흐리어 맑을 때가 없다는 말, 아무리 오래 되어도 사물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뜻. ≪出典≫‘春秋左氏傳’

 

고사

 

 

정(鄭)나라가 초(楚)나라의 속국 격인 채(蔡)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도 정나라를 공격할

채비를 하게 되었다. 이에 정나라에서는 대책을 숙의하는 회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는 진(晉)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자는 측과 초나라와 강화(講和)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때 자사(子駟)가 말하기를, “주(周)나라의 시(詩)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황하의 물이 맑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사람 수명으로는 맞지 않다. 여러 가지를 놓고 점을 치면 그물에 얽힌 듯 갈피를 못 잡는다.(周詩有之曰 待河之淸 人壽幾何非云詢多 職競作羅)』그러니 우선 초나라와 강화를 해서 백성들을 위험에서 구하고 그 다음에 진나라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진나라의 구원병을 기다리는 것은 황하의 맑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즉, “황하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晉나라의 구원병이 올 것이 어긋난다는 비유로 쓴 말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대처하는 괴로운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이야기라 하겠다. 그 후 정나라는 자사(子駟)의 말대로 해서 위기를 면했다.

44. 백미(白眉) // 여럿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 出典≫‘三國志’ 馬良

 

고사

 

 

유비(劉備)는 적벽대전 후 형주(荊州), 양양(襄襄), 남군(南郡)을 얻고 군신(群臣)을 모아서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다. 이때 유비를 두 번이나 구하여 준 이적(伊籍)이, “새로 얻은 땅들을 오래 지키려면, 먼저 어진 선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유비가 이적(伊籍)에게 물었다.

“어진 선비가 누구요?”

“형양(荊襄) 땅 마량(馬良)의 다섯 형제가 모두들 재명(才名)이 있는데, 가장 어진 이는 양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양(良)’으로 자(字)는 계상(季常)이라고 합니다. 또 향리(鄕里)에서도 ‘마씨집 오상(五常)이 모두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가 있는 마량(馬良)이 제일 뛰어나다.(馬氏五常 白眉最良)’고 합니다. 공(公)께서는 어찌 청하여 오지 않으십니까?”

유비는 즉시 마량(馬良)을 청하여 오게 했다.

45. 백아절현(伯牙絶鉉) // ‘백아(伯牙)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여 거문고 줄을 끊 었다’는 고사에서 ‘참다운 벗의 죽음’을 이르는 말.

≪出典≫‘列子’ 湯問篇 / ‘荀子’ 勸學篇

 

고사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 높은 백아(伯牙)에게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잘 감상해 주는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며 높은 산과 큰 강의 분위기를 그려 내려고 시도하면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종자기의 잎에서는 탄성이 연발한다.

“아, 멋지다. 하늘 높이 우뚝 솓는 그 느낌은 마치 태산(泰山)같군”

“응, 훌륭해, 넘칠 듯이 흘러 가는 그 느낌은 마치 황하(黃河)같군”

두 사람은 그토록 마음이 통하는 연주자였고 청취자였으나 불행히도 종자기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백아는 절망한 나머지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기(知己)를 가리커 지음(知音)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순자(荀子)≫‘勸學篇’에,

『옛날에 호파가 비파를 타면 물 속에 있던 물고기가 나와 들었고,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면 여섯 필의 말이 풀을 뜯다가 고개를 들어 쳐다 보았다. 그러므로 소리는 작더라도 들리지 않는 것이 없고 행동은 숨기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옥이 산에 있으면 풀과 나무가 윤택하고, 연못에 진주가 생기면 언덕이 마르지 않는다. 善을 행하고 惡을 쌓지 않는다면 어찌 명성이 들리지 않겠는가?』

그 후부터 친한 벗이 죽었을 때 <백아절현(伯牙絶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동의어】백아파금(伯牙破琴)

【유사어】지음(知音), 고산유수(高山流水)

46. 분서갱유(焚書坑儒) // 중국 진시황이 민간의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을 구덩이 에 묻어 죽인 일. ≪出典≫‘史記’ 秦始皇紀 / ‘十八史略’ 秦篇

 

고사

 

 

기원전 221년, 제(齊)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秦)나라 시황

제(始皇帝) 때의 일이다.

시황제(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周)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 집권(中央執權)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咸陽宮)의 잔치에서 박사(博士)인 순우월(淳于越)이 ‘현행 군현제도 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改體)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可否)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立案者)인 승상 이사(李斯)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發令)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 · 복서(卜筮) · 종수(種樹)에 관한 책과 진(秦)나라 역사책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李斯)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焚書)’라고 한다.

이듬해(BC 212)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神仙術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方士)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분노했다. 그런데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市中)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페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두어 놓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자기를 비방한 460명의 유생(幼生)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坑儒)’라고 한다.

47. 불구대천(不俱戴天) // ‘하늘을 같이 이지 못함’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에서 같이 살 수 없을 만큼 큰 원한’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出典≫‘禮記’

 

고사

 

 

≪禮記≫‘곡레편(曲禮篇)’에는 ’不俱戴天之讎’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며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父之讎不與共戴天

兄弟之讎不反兵

交遊之讎不同國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원수를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

또 이 말은≪맹자(孟子)≫‘盡心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孟子의 말과 비교가 되어 다시 생각게 한다.

“내 이제야 남의 아비를 죽이는 것이 중한 줄을 알겠노라. 남의 아비를 죽이면 남이 또한 그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그 형을 죽일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제 아비나 형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니라.”

오늘날 이 말은 아버지의 원수에 한하지 않고 ‘더불어 살 수 없을 정도로 미운 놈’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동의어】대천지수(戴天之讎), 불공대천(不共戴天)

【원 말】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讎),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

48. 불혹(不惑) // 불혹의 나이. 곧 마흔 살. ≪出典≫‘論語’ 爲政篇

 

고사

 

 

孔子는 일생을 회고하며 자신의 학문 수양의 발전 과정에 대해≪論語≫‘爲政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 다섯 살 때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志學>

서른 살 때 입신했다.三十而立<而立>

마흔 살 때는 미혹하지 않았고四十而不惑<不惑>

쉰 살 때 하늘의 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知命>

예순 살 때는 귀에 따랐고六十而耳順<耳順>

일흔 살이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從心>

<註> 20세 : 약관(弱冠)60세 : 환갑(還甲)70세 : 고희(古稀)

77세 : 희수(喜壽)88세 : 미수(米壽)99세 : 백수(白壽)

【동의어】불혹지년(不惑之年)

49. 붕정만리(鵬程萬里) // 앞길이 매우 멀고도 큼. ≪出典≫‘莊子’ 逍遙遊篇

 

고사

 

 

이 말은≪莊子≫‘逍遙遊篇’ 첫머리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나온 것이다.

『북쪽 바다에 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한다. 곤의 큰 것은 그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화(化)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새의 등은 그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지 못한다. 성내어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의 기운으로 장차 남쪽 바다로 옮기는데, 남쪽 바다는 하늘의 연못이다. 제해(齊諧)라는 사람이 있어 다음과 같은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있다.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김에, 물을 치기를 3천 리나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선풍(旋風)을 타고 위로 올라가기를 9만 리나 하며, 6개월이나 걸려서 남쪽 바다에 가서 쉰다.>

아지랑이와 티끌과 먼지를 생물들이 뿜어내건만, 하늘은 푸르고 푸르르니, 그 올바른 색깔인가? 그 멀어서 끝간 데가 없는 까닭인가?

그 내려다봄에 또한 이와같을 뿐이다. 또한 대저 물의 쌓임이 두텁지 않으면, 큰 배를 띄움에 힘이 없고, 술잔의 물을 뜰의 파인 곳에 부으면, 지푸라기는 배가 되어 뜨지만, 잔을 놓으면 엎어진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의 쌓임이 두텁지 못하면, 그 큰 날개를 띄움에 힘이 없다. 그러므로 9만 리면 바람이 그 아래에 있다. 그리하여 뒤에 곧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지고서, 아무 것도 걸리는 것이 없다. 이리하여 지금 비로소 붕새는 남쪽으로 날아가려는 것이다.』

<붕정만리(鵬程萬里)>는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

50. 비육지탄(脾肉之嘆) // 성공하지 못하고 한갓 세월만 보냄에 대한 탄식.

≪出典≫‘三國志’ 蜀志

 

고사

 

 

유비(劉備)는 198년에 조조(曹操)와 협력하여, 한 마리 이리와 같은 용장(勇壯) 여포(呂布)를 하비(下邳)에서 격파한 다음, 한(漢)의 임시 수도 허창(許昌)으로 올라가 조조의 주선(周旋)으로 헌제(獻帝)에게 배알(拜謁)하고 좌장군에 임명되었지만, 그대로 조조의 휘하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허창을 탈출하여 각지로 전전한 끝에 황족(皇族)의 일족인 형주 (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여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유표에게 초대되어 형주성(荊州城)에 갔을 때, 변소에서 볼일을 보고 일 어서던 유비는 문득 자신의 넓적다리에 살이 많이 붙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눈물을 흘렸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유표가 유비의 눈물 흔적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묻자, 유비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말을 타고 전장을 돌아다녀서, 넓적다리에 살이 붙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말을 타지 않고 너무 빈둥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살이 들러붙었습니다. 세월이 가는 것은 빨라 늙음이 이르는데도, 아직 공업(功業)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슬플 뿐입니다.”

備住荊州數年 嘗於表坐起至厠 見髀肉生 慨然流悌 還坐 表怪問備 備曰 吾常身不離鞍 髀肉皆消 今不復騎 髀裏肉生 日月若馳 老將至矣 而功業不建 是以悲耳.

51. 사면초가(四面楚歌) // 사면이 모두 적에게 포위된 경우와 고립된 경우를 이 르는 말. ≪出典≫‘史記’ 項羽本紀

 

고사

 

 

항우는 곧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 : 서주(徐州)]을 향해 철군(撤軍) 길에 올랐으나 서쪽의 한중[漢中 : 섬서성(陝西省)]으로 철수하려던 유방은 참모 장량(張良) · 진평(陣平)의 진언에 따라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윽고 해하[垓下 : 안휘성(安徽省)]에서 한신(韓信)이 지휘하는 한나라 대군에게 겹겹이 포위된 초나라 진영(陣營)은 군가사 격감한 데다가 군량마저 떨어져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밤중에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 소리[四面楚歌]’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초나라 군사들은 전의를 잃고 그리운 고향의 노랫소리 에 눈물을 흘리며 다투어 도망을 쳤다. 항복한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한 장량의 작전이 주효(主效)했던 것이다.

항우는 깜짝 놀라서 외치듯 말했다.

“아니, 한나라는 벌써 초나라를 다 차지했단 말인가? 어찌 저토록 초나라 사람들이 많은가?”

이미 끝장이라고 생각한 항우는 결별의 주연(酒宴))을 베풀고는 사랑하는 虞美人이 ‘四面楚歌’의 애절한 노래를 부르자, 비분강개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건만

때는 불리하고 추(騅)도 나아가지 않누나.

추가 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우(虞)야 우야 그대를 어찌할 거나.

力拔山兮氣蓋世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虞兮虞兮奈若何

【동의어】사면초가성(四面楚歌聲)

52. 삼고초려(三顧草廬) //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草廬)를 세 번이나 찾아서 마침내 그를 군사(軍師)로 삼은 일. ≪出典≫‘三國志’ 蜀志 諸葛亮傳

 

고사

 

 

후한(후한) 말엽, 유비(劉備)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의형제를 맺고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全軍)을 통솔할 군사(軍師)가 없어 늘 조조군(曹操軍)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날 유비가 은사(隱士)인 사마휘(司馬徽)에게 군사(軍師)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자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량(諸葛亮 : 字는 孔明, 181-234)이 복룡인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襄陽)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은 새파란 애숭이라던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다.”

마침내 수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 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魏)나라의 조조,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三分)하고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蜀漢)을 세워 皇帝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어 후주(後主) 유선 때까지 2조(二朝)를 섬겨 후세 충신의 표상이 되었다.

【동의어】초려삼고(草廬三顧), 삼고지례(三顧之禮)

【유사어】삼고지우(三顧知遇)

53. 삼천지교(三遷之敎) //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가르치기 위해 집을 세 번이 나 옮긴 일. ≪出典≫‘列女傳’ / ‘母儀傳’

 

고사

 

 

전국시대, 유학자(儒學者)의 중심 인물로서 성인(聖人)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 맹자는 공자처럼 생이지지(生而知之)했다고 추앙되지도 않았고, 태어나자마자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이라고 했다는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승이 유명한 분도 아니어서 증자(曾子)의 문인(門人)에게서 사숙(私淑)했다는 것을 보면, 기초는 스승에게서 배웠으나 그의 독특한 이론인 성선설(性善說), 사단설(四端說), 호연지기설(浩然之氣說)은 다 그의 독학에서 얻은 독창적인 것이다. 맹자는 독학자였기에 노력과 의지 못지 않게 교육 환경이 중요했고, 이 교육 환경 조성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한 것이다.

孟子의 어머니는 처음 묘지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흉내만 내며 놀았다. 그래서 교육상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맹자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이곳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맹자 어머니는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맹자는 제구(제구)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고 놀았다. 서당에서는 유교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예절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 어머니는 ‘이런 곳이야말로 자식을 기르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하며 비로소 만족했다.

【원 말】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유사어】현모지교(賢母之敎),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

54. 상가지구(喪家之狗) // ‘상갓집 개’(속담)

① 초상집 개, 주인 없는 개.

② 여위고 기운 없이 초라한 사람을 빈정거리는 말.

≪出典≫‘孔子家語’ / ‘史記’ 孔子世家

 

고사

 

 

춘추시대 말엽의 대철학자요 사상가로서 유교의 비조(鼻祖)인 孔子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魯)나라 정공(定公)때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던 孔子는 왕족인 삼환(三桓)씨에게 배척을 당하여 노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그후 공자는 십 수 년간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도덕 정치’를 펼 수 있는 나라를 찾아서 6-7개국을 순방했으나 받아 주는 군주(君主)가 없었다.

한 번은 정(鄭)나라를 찾아갔던 공자(56세)가 제자들을 놓쳐 버리고 홀로 동문(東門) 옆에 서서 그들이 찾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스승을 찾아나선 자공(子貢)이 한 행인에게 孔子의 인상 착의(人相着衣)를 대면서 혹시 보지 못했느냐고 묻자, 그 행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동문(東門) 옆에 웬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는 요(堯)임금과 같았고, 목은 순(舜) · 우(禹)임금과 같았으며, 어깨는 명재상(名宰相) 자산(子産)과 같았소. 그러나 허리 아래로는 우(禹)임금에게 세 치쯤 미치지 못했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상갓집 개[喪家之狗]’같습디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동문으로 달려간 자공은 공자를 만나자 방금 행인에게서 들은 이야 기를 고했다. 이야기를 듣고난 공자는 웃으며 말했다.

“용모에 대한 형용은 들어맞는다고 하기 어려우나 상갓집 개와 같다는 표현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 후 정(鄭)나라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공자는 그야말로 상갓집 개와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기운 없이 노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孔子適鄭 與弟子相失 孔子獨立郭東門 鄭人或謂子貢曰 東門有人 其類似堯 其項類皐陶 其肩類子産 自然腰以下 下及禹三寸 纍纍若喪家之狗 子貢以實告孔子 孔子欣然笑曰 形狀末也 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

55. 새옹지마(塞翁之馬) // 인생의 길흉화복은 늘 바뀌어 변화가 많음을 이르는 말.

≪出典≫‘淮南子’ 人間訓篇

 

고사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要塞) 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老翁)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 노옹의 말[馬]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福)이 될는지?”

몇 달이 지난 어느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치하(致賀)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화(禍)가 될는지?”

그런데 어느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전사(戰死)했다.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그러므로 인간세상에서 福이 禍가 되고 禍가 福이 되는 것은 그 변화가 너무 깊어 측량할 수가 없다.

近塞上之人 有善術者 馬無故亡而入胡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數月 其馬將胡駿馬而歸 人皆賀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禍乎 家富良馬 其子好騎 墮而折其髀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一年 胡人大入塞 丁壯者引弦而戰 近塞之人 死者十九 此獨以跛之故 父子相保 故福之爲禍 禍之爲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원 말】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

【동의어】새옹마(塞翁馬), 북옹마(北翁馬)

【유사어】새옹득실(塞翁得失), 새옹화복(塞翁禍福), 화복규승(禍福糾繩)

56. 성하지맹(城下之盟) // 적국에게 항복하고 맺는 치욕적인 강화(講和)의 맹약(盟約).

≪出典≫‘春秋左氏傳’ 桓公 十二年

 

고사

 

 

환공(桓公) 12년(BC 700), 초나라가 교(絞)로 쳐들어가 성의 남문에 진을 쳤을 때, 막오 (莫敖)라는 벼슬에 있는 굴하(屈瑕)가 환공(桓公)에게 말했다.

“교(絞)의 사람들은 편협하고 경솔합니다. 경솔하면 도모함이 적은 법이니, 청컨대 땔나무를 취하는 인부를 호위를 붙여 내놓아, 이로써 그들을 유인하면 어떨까요?”

이리하여 그 계교대로 하자, 교(絞)의 군사들은 첫날 초(楚)의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 다음날 교(絞)의 군사들은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속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에 매복하였으므로, 크게 패하여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

楚伐絞 軍其南門 莫敖屈瑕曰 絞小而輕 輕則寡謀 請無扜采樵者以誘之 從之 絞人獲三十人 明日絞人爭出 驅楚役徒於山中 楚人坐其北門而覆諸出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57. 송양지인(宋襄之仁) // 지나치게 착하기만 하여 권도(權道)가 없음을 이르는 말.

≪出典≫‘十八史略’ 卷一

 

고사

 

 

춘추시대인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 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자부(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자보가 위(位)에 올라 양공(襄公)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7년 후(BC 643), 춘추(春秋)의 첫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죽고, 송나라에는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覇者)가 될 징조라며 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公子) 간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소(昭:孝公)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宋), 제(齊), 초(楚) 세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목이(目夷)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禍根)’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通交)한 정(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河南省)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전군(全軍)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목이가 참다못해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君子不困於阨)

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숫적으로 열세(劣勢)였던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되어 이듬해 죽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송나라 양공의 인(仁)’이라며 비웃었다.(世笑以爲宋襄之仁)

58. 수구초심(首丘初心) //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는 말로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 出典≫‘禮記’ 檀弓上篇

 

고사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일으킨 여상(呂尙) 태공망(太公望)은 제(齊)나라에 있는 영구(營丘)에 봉해졌는데, 계속해서 다섯 대(代)에 이르기까지 주(周)의 호경(鎬京)에 반장(反葬)했다.

군자께서 이르시기를 음악은 그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바를 즐기며 예(禮)란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이르되,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향하는 것은 인(仁)이라고 하였다.

太公封於營丘 此及五世 皆反葬於周 君子曰 樂樂其所自生 禮不忘其本 古之人有言曰 狐死正 丘首仁也.

59. 수서양단(首鼠兩端) // 진퇴,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 ≪出典≫‘史記’ 魏其武安侯列傳

 

고사

 

 

전한 7代 황제인 무제(武帝 : BC 141-87)때의 일이다. 5代 문제(文帝)의 황후의 조카인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과 6代 경제(景帝)의 황후의 동생인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蚠)은 같은 외척이었지만 당시 연장자인 두영은 서산 낙일(西山落日)하는 고참 장군이었고, 전분은 욱일 승천(旭日昇天)하는 신진 재상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두영의 친구인 관부(灌夫) 장군이 고관 대작(高官大爵)들이 모인 주연(酒宴)에서 전분에게 대드는 실수를 범했다. 사건의 발단은 관부가 두영을 무시한 한 고관을 힐책(詰責)하는데 전분이 그 고관을 두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관부가 한사코 사죄를 거부하자 이 일은 결국 조의(朝議)에 오르게 되었다. 양쪽 주장을 다 들은 무제는 중신들에게 물었다.

“경들이 판단컨대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 것 같소?”

처음에는 의견이 둘로 나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영의 추종자로 알려진 내사(內史) 정당시(鄭當時)조차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도 명확한 대답을 피했다.

“폐하, 양쪽 다 일리가 있사와 흑백을 가리기가 심히 어렵나이다.”

중신들의 불분명한 태도에 실망한 무제가 자리를 뜨자 조의는 거기서 끝났다. 전분은 화가 나서 한안국을 책망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首鼠兩端]’처럼 망설였소? 이 사건은 시비곡직(是非曲直)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인데…. 그대와 더불어 대머리가 벗겨진 늙은이를 해치우려 했는데, 어찌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했는가?”

與長孺共一禿翁 何爲首鼠兩端.

【동의어】수시양단(首施兩端)

【유사어】좌고우면(左顧右眄)

60. 수어지교(水魚之交) //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 ≪出典≫‘三國志’ 蜀志 諸葛傳

 

고사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와 같은 용장이 있었지만, 천하의 계교를 세울 만한 지략이 뛰어난 모사(謀士)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은 사람을 얻었으므로, 유비의 기쁨은 몹시 컸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금후에 취해야 할 방침으로,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눌러서 그 곳을 근거지로 할 것과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어루만져 뒤의 근심을 끊을 것과 내정을 다 스려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실리를 올릴 것과 손권과 결탁하여 조조를 고립시킨 후 시기를 보아 조조를 토벌할 것 등의 천하 평정의 계책을 말하자 유비는 그 계책에 전적으로 찬성하여 그 실현에 힘을 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제갈공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어 두 사람의 교분은 날이 갈수록 친밀해졌다. 그러자 관우나 장비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제갈공명(이 때 공명의 나이는 28세)만 중하게 여기고 자기들은 가볍게 취급받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이 이리 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 등을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즉 나와 제갈공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자, 관우와 장비 등은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 않게 되었다.

於是與亮情好日密 關羽張飛等不悅 先生解之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諸君勿復言 羽飛乃止.

61. 수주대토(守株待兎) // 변통할 줄 모르고 어리석게 지키기만 함. 出典≫‘韓非子’

 

고사

 

 

송(宋)나라에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다.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오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았다.

덕분에 토끼 한 마리를 공짜로 얻은 농부는 농사일보다 토끼를 잡으면 더 수지가 맞겠다고 생각하고는 농사일은 집어치우고 매일 밭두둑에 앉아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오기만 기다렸다.[守株待兎]

그러나 토끼는 그곳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농부 자신은 송(宋)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밭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농사를 망친 것은 물론이다.

宋人 有耕田者 田中 有株 免走觸株 折頸而死 因釋其耒 而守株 冀復得免 免不可不得 而身爲宋國笑.

한비자(韓非子)는 요순(堯舜)을 이상으로 하는 왕도(王道) 정치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수주대토(守株待兎)의 비유를 들었다.

그는 시대의 변천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라고 보고 복고주의(復古主義)는 진화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착각이라고 주장하면서 낡은 관습을 지키며 새로운 시대에 순응할 줄 모르는 사상 또는 사람에게 이 수주대토(守株待兎)의 비유를 적용한 것이다.

62. 순망치한(脣亡齒寒) //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① 가까운 사이의 이웃 나라 중 한 쪽이 망하면 다른 한 쪽도 온 전하기 어려움의 비유.

② 서로 도우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 또는 서로 도움으로 써 성립되는 관계의 비유. ≪出典≫‘春秋左氏傳’ 僖公五年條

 

고사

 

 

춘추시대 말엽(BC 655), 오패(五覇)의 한 사람인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아버지 헌공(獻公)이 괵(虢) · 우(虞) 두 나라를 공략할 때의 일이다.

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헌공은 진나라와 괵나라의 중간에 위치한 우(虞)나라의 우공(虞公)에게 길을 빌려 주면 많은 재보(財寶)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우공이 이 제의를 수락하려 하자 중신 궁지기(宮之奇)가 극구 간했다.

“전하,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입니다.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덧방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란 말이 있사온데, 이는 곧 괵나라와 우나라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되옵니다. 그런 가까운 사이인 괵나라를 치려는 진나라에 길을 빌려 준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옵니다.”

“경은 진나라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진나라와 우리 우나라는 모두 주황실(周皇室)에서 갈라져 나온 동종(同宗)의 나라가 아니오? 그러니 해(害)를 줄 리가 있겠소?”

“괵나라 역시 동종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진나라는 동종의 정리(情理)를 잃은 지 오래이옵니다. 예컨대 지난날 진나라는 종친(宗親)인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초(楚)나라 장공(莊公)의 겨레붙이까지 죽인 일도 있지 않사옵니까? 전하, 그런 무도한 진나라를 믿어선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재보에 눈이 먼 우공은 결국 진나라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자 궁지기는 화(禍)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일가권속(一家眷屬)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났다.

그 해 12월, 괵나라를 멸하고 돌아가던 진나라 군사는 궁지기의 예언대로 단숨에 우나라를 공략하고 우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虢虞之表也 虢亡 虞必從之 晉不可啓 寇不可翫 一之爲甚 其可再乎 諺所謂輔車相依 脣亡齒寒者 其虞虢之謂也.

【동의어】순치지국(脣齒之國), 순치보거(脣齒輔車)

【유사어】조지양익(鳥之兩翼), 거지양륜(車之兩輪)

63. 십년한창(十年寒窓)

‘十年寒窓’은 ‘10년동안 사람이 오지 않아 쓸쓸한 창문(寒窓)’이나, ‘오랫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채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한 세월’을 비유한다.

 

고사

 

 

金나라때 유기(劉祁)의 <귀잠지(歸潛志)>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古人謂 十年窓下無人問 一擧成名天下知’(옛 사람이 이르길 10년동안 창문 아래 묻는 이가 없더니 한번에 이름이 나니 천하 사람이 다 알게 되었다). ‘이름이 나다’(成名)는 科擧에 及第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과거에 급제해야만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기에 젊은이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책과 씨름했다. 그런 고생스런 과정을 거쳐 일단 급제만 하면 ‘天下知名’(세상에 이름이 알려짐)이었으니, 요즘 山寺에서 공부해 考試에 합격, 揚名하는 것과 비슷하다. ‘十年寒窓’은 ‘十年窓下’라고도 한다.

64. 양두구육(羊頭狗肉) // 겉으로 훌륭하게 내세우나 속은 변변찮음.

≪出典≫‘晏子春秋’ 無門關 揚子法言

 

고사

 

 

춘추시대, 제나라 영공(靈公) 때의 일이다.

영공은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男裝)을 시켜놓고 완상(玩賞)하는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취미는 곧 백성들 사이에도 유행되어 남장한 여인이 날로 늘어났다. 그러자 영공은 재상인 안영(晏嬰:晏子)에게 ‘궁 밖에서 남장하는 여인들을 처벌하라.’는 금령(禁令)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그 유행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공이 안영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시며서 궁 밖의 여인들에게는 금령(禁令)을 내렸습니다. 하오면 이는 ‘밖에는 소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羊頭狗肉]’과 같습니다. 이제라도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금하십시오. 그러면 궁 밖의 여인들도 감히 남장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공은 안영의 진언(眞言)에 따라 즉시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이튿날부터 제나라에서는 남장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임금께서는 궁중에서는 미인에게 남장하는 것을 용서하면서도, 궁중 밖에서는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소의 머리를 문에 걸어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궁주에서는 미인에게 남장시키는 것을 금하지 않는 것입니까? 궁중에서 금한다면 궁중 밖에서도 감히 남장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君使服之於內 而禁之於外 猶懸牛首于門 而賣馬肉於內也 公何以不使內勿服 則外莫敢爲也.

【동의어】현양수매마육(懸羊首賣馬肉), 현우수(매)마육(懸牛首(賣)馬肉)

【유사어】양질호피(羊質虎皮), 현옥고석(衒玉賈石)

65. 양상군자(梁上君子) // 대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① 집 안에 들어온 도둑의 비유.

② 천정 위의 쥐를 달리 일컫는 말. ≪出典≫‘後漢書’ 陳寔傳

 

고사

 

 

후한 말엽, 진식(陳寔)이란 사람이 태구현(太丘縣 : 河南省 所在)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 그는 늘 겸손한 자세로 현민(縣民)의 고충을 헤아리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현민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어느해 흉년이 들어 현민의 생계가 몹시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날 밤, 진식이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웬 사내가 몰래 드러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도둑이 분명했다. 진식은 모르는 척하고 독서를 계속하다가 아들과 손자들을 대청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악인(惡人)이라 해도 모두 본성이 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습관이 어느덧 성품이 되어 악행도 하게 되느니라. 이를테면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그렇다.”

그러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 진식의 말에 감동한 도둑이 대들보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는 마루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했다. 진식이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얼굴을 보아하니 악인은 아닌 것 같다.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그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보냈다. 이로부터 이 고을에 다시는 도둑이 나타나지 않았다.

時勢荒民儉 有盜夜入其室 止於梁上 寔陰見乃起自整拂 呼命子孫 正色訓之曰 夫人不可不自勉 不善之人未必本惡 習以性成 遂至於此 梁上君子者是矣 盜大驚自投於地 稽顙歸罪 寔徐 譬之曰 視君狀貌不似惡人 宜深剋己反善 然此當由貧困 令遺絹二匹 自是一縣無復盜竊.

66. 양약고구(良藥苦口) // ‘효험이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충언(忠言)은 에는 거슬리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말. 出典≫‘史記’ 留侯世家 / ‘孔子家語’ 六本篇

 

고사

 

 

이것은 孔子의 말씀으로≪孔子家語≫‘六本篇’,≪설원(說苑)≫‘정간편(正諫篇)’에 실려 있다. 효과가 있는 좋은 약은 입에 넣을 때 쓰고, 사람들에게 듣는 충고는 좋은 말일수록 귀에 들어올 때 거슬린다는 뜻이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고하는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 殷나라 탕왕(湯王)은 곧은 말을 하는 충신이 있었기 때문에 번창했고, 夏나라의 걸왕(桀王)과 殷나라의 주왕(紂王)은 무조건 따르는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임금에게 다투는 신하가 없고, 아버지에게 다투는 아들이 없고, 형에게 다투는 동생이 없고, 선비에게 다투는 친구가 없다면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신하가 諫해야 하고,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르면 아들이 諫해야 하고, 형이 잘못을 저지르면 동생이 諫해야 하고,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면 친구가 諫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에 위태하고 망하는 징조가 없고, 집안에 패란(悖亂)의 악행도 없고, 부자와 형제에 잘못이 없고, 친구와의 사귐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孔子曰 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 湯武以諤諤而昌 桀紂以唯唯而亡 君無爭臣 父無爭子 兄無爭弟 士無爭友 無己過者 未之有也 故曰 君失之 臣得之 父失之 子得之 兄失之 弟得之 己失之 友得之 是以國無危亡之兆 家無悖亂之惡 父子兄弟無失 而交遊無絶也.

【원 말】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동의어】충언역어이(忠言逆於耳), 간언역어이(諫言逆於耳), 금언역어이(金言逆於耳)

67. 어부지리(漁父之利) // ‘두 사람이 이해 관계로 다투는 사이에 엉뚱한 딴 사람 이 이득을 봄’을 일컬음. ≪出典≫戰國策 燕策

 

고사

 

 

전국시대, 제(齊)나라에 많은 군사를 파병한 연(燕)나라에 기근(饑饉)이 들자 이웃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기다렸다는 듯이 침략 준비를 서둘렀다. 그래서 연나라 소왕(昭王)은 종횡가(縱橫家)로서 그간 연나라를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온 소대(蘇代)에게 혜문왕을 설득하도록 부탁했다.

조(趙)나라에 도착한 소대(蘇代)는 소진(蘇秦)의 동생답게 거침없이 혜문왕을 설득하여 혜문왕의 연나라 침공 계획을 철회시켰다고 한다.

“오늘 귀국에 들어오는 길에 역수(易水)를 지나다가 문득 강변을 바라보니 조개[蚌蛤(방합)]가 조가비를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도요새[鷸(휼)]가 날아와 뾰족한 부리로 조갯살을 쪼았습니다. 깜짝 놀란 조개는 화가 나서 조가비를 굳게 닫고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도요새가 ‘이대로 오늘도 내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너는 말라 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자, 조개도 지지 않고 ‘내가 오늘도 내일도 놓아 주지 않으면 너야말로 굶어 죽고 말 것이다.’하고 맞받았습니다. 이렇게 쌍방(雙方)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운수사납게도 그곳을 지나가던 어부(漁夫)에게 그만 둘다 잡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연나라를 치려고 하십니다만,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나라는 도요새입니다. 연(燕) · 조(趙) 두 나라가 공연히 싸워 백성들을 피폐(疲弊)케 한다면, 귀국과 인접해 있는 저 강대한 진(秦)나라가 어부가 되어 맛있는 국물을 다 마셔 버리고 말 것입니다.”

“과연 옳은 말이오.”하며 혜문왕은 침공을 중지했다.

趙且伐燕 蘇代爲燕謂惠王曰 今者臣來過易水 蚌方出曝 而鷸啄其肉 蚌合而拑其喙 鷸曰 今日不雨 明日不雨 卽有死蚌 蚌亦爲鷸曰 今日不出 明日不出 卽有死鷸 兩者不肯相舍 漁者得而幷禽之 今趙且伐燕 燕趙久相支 以弊大衆 臣恐强秦之爲漁夫也 故願王之熟計之也 惠王曰 善乃止.

【동의어】어부지리(漁父之利), 방휼지쟁(蚌鷸之爭)

견토지쟁(犬兎之爭), 전부지공(田父之功),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68. 오리무중(五里霧中) // 짙은 안개 속에 잇어 방향을 알 수 없음과 같이, 무슨 일에 대해 알 길이 없음의 비유. ≪出典≫‘後漢書’ 張楷傳

 

고사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학문이 뛰어난 장해(張楷)라는 선비가 있었다. 순제가 여러 번 등용하려 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대고 끝내 출사(出仕)치 않았다.

장해(張楷)는≪春秋≫‘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서 평소 거느리고 있는 문하생만 해도 100명을 웃돌았다. 게다가 전국 각처의 숙유(夙儒)들을 비롯하여 귀족, 고관대작, 환관(宦官)들까지 다투어 그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는 이를 싫어하여 화음산(華陰山) 기슭에 자리한 고향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해(張楷)를 좇아온 문하생과 학자들로 인해 그의 집은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볐다. 나중에는 화음산 남쪽 기슭에 장해(張楷)의 자(字)를 딴 공초(公超)라는 저잣거리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해(張楷)는 학문뿐만 아니라 도술(道術)에도 능하여 쉽사리 ‘오리무(五里霧)’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방술(方術)로써 사방 5리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장해(張楷)는 성격이 도술을 좋아하여, 능히 5里 안의 안개를 지을 수가 있었 다. 그때에 관서(關西) 사람인 배우(裵優)가 또한 능히 3里의 안개를 일으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장해(張楷)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제자로 들어가 배우기를 바랬지만 장해(張楷)는 모습을 숨겨서 그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張楷 性好道術 能作五里霧 時關書人裵優亦能爲三里霧 自以不如楷從學之 楷避不肯見.

69. 오월동주(吳越同舟) // 사이가 나쁜 사람끼리 같은 장소와 처지에 함께 놓임.

≪出典≫‘孫子兵法’ 九地篇

 

고사

 

 

≪孫子라는 책은 중국의 유명한 병서(兵書)로서 춘추시대 오나라의 손무(孫武)가 쓴 것이다. 손무(孫武)는 오왕(吳王) 합려(闔閭) 때, 서쪽으로는 초(楚)나라의 도읍을 공략하고 북방의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격파한 명장이기도 했다.

≪孫子‘九地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병(兵)을 쓰는 법에는 아홉 가지의 지(地)가 있다. 그 구지(九地) 중 최후의 것을 사지(死地)라 한다. 주저 없이 일어서 싸우면 살길이 있고, 기가 꺾이어 망설이면 패망하고 마는 필사(必死)의 지(地)이다.

그러므로 사지에 있을 때는 싸워야 활로(活路)가 열린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필사(必死)의 장(場)에서는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유능한 장수의 용병술(用兵術)은 예컨대 상산(常山)에 서식하는 솔연(率然)이란

큰 뱀의 몸놀림과 같아야 한다. 머리를 치면 꼬리가 날아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벼든다. 또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덤벼든다. 이처럼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옛부터 서로 적대시해 온 ‘오(吳)나라 사람과 월(越)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吳越同舟]’ 강을 건넌다고 하자.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큰 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 한다면 오나라 사람이나 월나라 사람이나 다 같이 평소의 적개심(敵愾心)을 잊고 서로 왼손, 오른손이 되어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전차(戰車)의 말[馬]들을 서로 단단히 붙들어 매고 바퀴를 땅에 묻고서 적에게 그 방비를 파괴 당하지 않으려 해봤자 최후에 의지(依支)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의지(依支)가 되는 것은 오로지 필사적으로 하나로 뭉친 병사들의 마음이다.“

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遇風 其相救也 如左右手.

【동의어】오월지쟁(吳越之爭), 오월지사(吳越之思)

【유사어】동주상구(同舟相救), 동주제강(同舟濟江), 호월동주(胡越同舟), 오월지부(吳越之富)

70. 오합지졸(烏合之卒) // ① 갑자기 모인 훈련 없는 군사.

② 규율도 통일성도 없는 군중. ≪出典≫‘後漢書’ 耿龕傳

 

고사

 

 

전한(前漢) 말, 대사마(大司馬)인 왕망(王莽)은 평제(平帝)를 시해(弑害)하고 나이 어린 영(嬰)을 세워 새 황제로 삼았으나 3년 후 영(嬰)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잦은 정변과 실정(失政)으로 말미암아 각지에 도둑떼가 들끓었다.

이처럼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유수(劉秀)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왕망(王莽) 일당을 주 벌(誅伐)하고 경제(景帝)의 후손인 유현(劉玄)을 황제로 옹립(擁立)했다. 이에 천하는 다시 한나라로 돌아갔다.

대사마가 된 유수가 이듬해 성제(成帝)의 아들 유자여(劉子輿)를 자처하며 황제를 참칭(僣稱)하는 왕랑(王郞)을 토벌하러 나서자, 상곡(上谷) 태수 경황(耿況)은 즉시 아들인 경감(耿龕)에게 군사를 주어 평소부터 흠모하던 유수의 토벌군에 들어 갔다. 그때 손창(孫倉)과 위포(衛包)가 갑자기 행군을 거부하는 바람에 잠시 동요가 있었다.

“유자여는 한왕조(漢王朝)의 정통인 성제의 아들이라고 하오. 그런 사람을 두고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오?”

격노한 경감(耿龕)은 두 사람을 끌어낸 뒤 칼을 빼들고 말했다.

“왕랑은 도둑일 뿐이다. 그런 놈이 황자(皇子)를 사칭하며 난을 일으키고 있지만, 내가 장안(長安:陝西省 西安)의 정예군과 합세해서 들이치면 그까짓 ‘오합지졸(烏合之卒)’은 마른 나뭇가지보다 쉽게 꺾일 것이다. 지금 너희가 사리(事理)를 모르고 도둑과 한패가 됐다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하리라.”

그날 밤, 그들은 왕랑에게로 도망치고 말았지만 경감(耿龕)은 뒤쫓지 않았다. 서둘러 유수의 토벌군에 합류한 경감(耿龕)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마침내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이 되었다.

우리가 돌격 기병대를 일으켜 써 오합지중(烏合之衆)을 치는 것은 썩은 고목을 꺾고 썩은 것을 깎음과 같을 뿐이다.

發突騎以轔烏合之衆 如摧枯腐耳.

【동의어】오합지중(烏合之衆)

【유사어】와합지중(瓦含之衆)

71. 옥석구분(玉石俱焚) // 선악의 구분 없이 함께 멸망함. 出典≫‘書經’ 夏書 胤征篇

 

고사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망하는 것을 <옥석구분(玉石俱焚)>이라고 한다.

≪書經≫夏書 胤征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불이 곤강(崑岡)에 타면 옥(玉)과 돌이 함께 탄다. 임금이 덕을 놓치면 사나운 불길보다도 격렬하다. 그 우두머리 괴수는 죽이고 협박에 못이겨 복종한 사람들은 벌하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물들어 더러워진 풍속은 모두 더불어 오직 새롭게 하리라.

火炎崑岡 玉石俱焚 天使逸德 烈于猛火 殲厥渠魁 脅從罔治 舊梁汙俗 咸與惟新.

‘胤征’은 윤후(胤侯)가 夏나라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희화(羲和)를 치러 나갈 때 한 선언으로, 희화를 치는 까닭을 말한 것이다.

‘崑岡’은 玉을 생산하는 산의 이름이다. 만일 곤강이 불에 탄다면 玉과 돌이 함께 타버릴 것이다. 화재는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거니와, 임금이 덕을 잃는다면 그 피해는 사나운 불길보다도 더 심하다. 따라서 지금 그 수령인 자를 쳐서 멸망시키는 것이거니와, 억지로 가담했던 사람까지 모두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니, 함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착함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동의어】옥석혼효(玉石混淆)

72. 와각지쟁(蝸角之爭) // 매우 하찮은 일로 다투는 것, 또는 좁은 범위 안에서 싸우는 일. ≪出典≫‘莊子’ 則陽篇

 

고사

 

 

전국시대, 양(梁:魏)나라 혜왕(惠王)은 중신들과 맹약을 깬 제(齊)나라 위왕(威王)에 대한 응징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서 혜왕은 재상 혜자(惠子)가 데려온 대진인(戴晉人)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대진인(戴晉人)은 도가자류(道家者流)의 현인(賢人)답게 이렇게 되물었다.

“전하, 달팽이라는 미물(微物)이 있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소.”

“그 달팽이의 왼쪽 촉각 위에는 촉씨(觸氏)라는 자가, 오른쪽 촉각 위에는 만씨(蠻氏)라는 자가 각각 나라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들은 서로 영토를 다투어 전쟁을 시작했는데 죽은 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한 지 15일 만에야 전쟁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소?”

“하오면, 이 이야기를 사실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전하, 이 우주의 사방상하(四方上下)에 제한(際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오면, 마음을 그 무궁한 세계에 노닐게 하는 자에게는 사람이 왕래하는 지상(地上)의

나라 따위는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하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으음, 과연.”

“그 나라들 가운데 위(魏:梁)라는 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대량(大梁:開封)이라는 도읍이 있으며, 그 도읍의 궁궐 안에 전하가 계십니다. 이렇듯 우주의 무궁에 비한다면 지금 제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려는 전하와 달팽이 촉각 위의 촉씨, 만씨가 싸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과연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소.”

대진인(戴晉人)이 물러가자, 제나라와 싸울 마음이 싹 가신 혜왕(惠王)은 혜자(惠子)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 사람은 성인(聖人)도 미치지 못할 대단한 인물이오.”

【원 말】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

【동의어】와우각상(蝸牛角上), 와각지쟁(蝸角相爭), 와우지쟁(蝸牛之爭)

【유사어】만촉지쟁(萬觸之爭)

73. 와신상담(臥薪嘗膽) //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괴롭고 어려움을 참고 견딤의 비유. ≪出典≫‘史記’ 越世家

 

고사

 

 

춘추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과 취리에서 싸워 크게 패한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BC 496)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명(遺命)했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父王)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섶 위에서 잠을 자고[臥薪], 자기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앞에서 부왕의 유명을 외치게 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때마다 부차는 임종 때 부왕에게 한 그대로 대답했다.

“예, 결코 잊지 않고 3년 안에 꼭 원수를 갚겠나이다.”

이처럼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안 월왕 구천은 참모인 범려(范蠡)가 간(諫)하는 것도 듣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월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오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헌책(獻策)에 따라 우선 오나라의 재상 백비(伯嚭)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했다.

구천은 오나라의 속령(屬領)이 된 고국으로 돌아오자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 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嘗膽], 회계의 치욕[會稽之恥]을 상기(想起)했다. 그리고 구천 부부는 함께 밭갈고 길쌈하는 농군이 되어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회계의 치욕으로부터 12년이 지난 후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로부터 역전(曆戰) 7년만에 오나라의 도읍 고소(姑蘇 : 蘇州)에 육박한 구천은 오왕 부차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회계의 치욕을 씻었다. 부차는 용동(甬東 : 折江省 定河)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결했다.

【유사어】회계지치(會稽之恥), 절치액완(切齒扼腕)

74. 위편삼절(韋編三絶) // ① ‘독서에 열심함’의 뜻.

② 한 책을 되풀이하여 숙독함의 비유.≪出典≫‘史記’ 孔子世家

 

고사

 

 

현대식으로 말하면, 한 권의 책을 몇십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어서 책을 철(綴)한 곳이 닳아 흩어진 것을 다시 고쳐 매어서 애독(愛讀)을 계속하는 것을 ‘韋編三絶’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책이 소위 몇십 장의 죽간(竹簡)을 끈으로 철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그 끈이 몇 번이나 끊어지도록 책을 계속하여 읽는 것을 ‘韋編三絶’이라고 한다. ‘三絶’이

란 딱 세 번에 한정된 수가 아니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끊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알려진 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 쓴≪史記≫가운데 孔子傳, 즉 孔子世家에 실려 있는 말로, 공자가 만년에 역경(易經)을 애독하여 韋編三絶에 이른 데서 나왔다고 한다.

孔子가 晩年에 易經을 좋아하여, 단(彖) · 계(繫) · 상(象) · 설괘(說卦) · 문언(文言)을 서(序)하고, 易經을 읽어 韋編三絶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몇 해를 빌어 이와같이 하면, 나는 易經에 있어서 곧 빛나게 될 것이다.’

孔子晩而喜易 徐彖繫象說卦文言 獨易韋編三絶 曰 假我數年 若是 我於易則彬彬矣.

75. 읍참마속(泣斬馬謖) //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으로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림’을 비유. ≪出典≫‘三國志’ 蜀志 諸葛亮篇

 

고사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山野)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陣)’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 만큼 군량 수송로(軍糧輸送路)의 요충지인 ‘가정(街亭 :韓中의 東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街亭)을 잃으면 촉나라의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책(重責)을 맡길 만한 장수가 마땅치 않아서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 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街亭)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 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치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 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협로(峽路)를 사수만 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욕심을 내어 적을 유인하여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다 진을 쳤다. 그러나 마속의 생각과 달리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만 한 채로 산 위를 공격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자 산 위에

서는 식수가 끊겼다. 다급해진 마속은 전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위나라 용장 장합(張郃)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마속의 실패로 전군(全軍)을 한중(韓中)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5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成都)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張垸)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76. 일거양득(一擧兩得) // 한 가지 일을 하여 두 가지 이익을 거둠. ≪出典≫‘春秋後語’ 戰國策

 

고사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때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史馬金昔)는 어전에서 ‘중원으로의 진출이야말로 조명시리(朝名市利)에 부합하는 패업(覇業)’이라며 중원으로의 출병을 주장하는 재상 장의(張儀)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신이 듣기로는 부국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국토를 넓히는 데 힘써야 하고, 강병(强兵)

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백성의 부(富)에 힘써야 하며, 패자(覇者)가 되기를 원하는 군주는 먼저 덕을 쌓는 데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지면 패업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하오나, 지금 진나라는 국토도 협소하고 백성들은 빈곤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먼저 막강한 진나라의 군사로 촉(蜀)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는 길밖에 달리 좋은 방법이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면 국토는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은 쌓일 것입니다. 이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周)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는 한(韓)나라를 침범하면, 한나라는 제(齊)나라에 구원을 청할 게 분명하며, 더우기 주나라의 구정(九鼎)은 초나라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땐 진나라가 공연히 천자를 위협한다는 악명(惡名)만 얻을 뿐입니다.”

이에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먼저 국토를 넓혔다.

【동의어】일거양획(一擧兩獲), 일전쌍조(一箭雙鳥), 일석이조(一石二鳥)

【반의어】일거양실(一擧兩失)

77. 일망타진(一網打盡) // 한꺼번에 모조리 잡음. ≪出典≫‘宋史’ 仁宗紀 東軒筆錄

 

고사

 

 

북송(北宋) 4대 황제인 인종(仁宗) 때의 일이다.

당시 북방에는 거란[契丹:遼]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중국의 일부였던 안남(安南 : 베트남)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인종은 연약한 외교로 일관했다. 그러나 내치(內治)에는 괄목할 만한 치적(治績)이 적지 않았다.

전한(前漢) 5대 황제인 문제(文帝)와 더불어 어진 임금으로 이름난 인종은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 그리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문치(文治)를 폄으로써 이른바 ‘경력(慶曆)의 치(治)’로 불리는 군주 정치의 모범적 성세(聖世)를 이룩했다.

이 무렵, 청렴 강직하기로 이름난 두연(杜衍)이 재상이 되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황제가 상신(相臣)들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조서를 내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내강(內降)이라 했다. 그러나 두연은 이 같은 관행은 올바른 정도(正道)를 어지럽히는 것이라 하여 내강이 있어도 이를 묵살, 보류했다가 10여 통쯤 쌓이면 그대로 황제에게 되돌려보내곤 했다. 이러한 두연의 소행은 성지(聖旨)를 함부로 굽히는 짓이라 하여 조야(조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때 공교롭게도 관직에 있는 두연의 사위 소순흠(蘇舜欽)이 공금을 유용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그러자 평소 두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어사(御史) 왕공진(王拱辰)은 쾌재를 부르고 소순흠을 엄히 문초했다. 그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공범으로 몰아 잡아 가둔 뒤 재상 두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범인들은 ‘일망타진(一網打盡)’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두연도 재임 70일만에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78. 일이관지(一以貫之) //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음. ≪出典≫‘論語’ 里仁篇

 

고사

 

 

孔子께서 曾子에게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參乎吾道一以貫之)” 曾子는 알아듣고 “네”하고 대답했다.

孔子께서 나가시자 문인(門人)들이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자, 曾子는 “선생임의 말씀은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論語≫‘衛靈公篇’에도 孔子께서 子貢에게 “나는 한 가지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었느니라.(子一以貫之)”라고 말씀하신 것이 나온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賜)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다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子貢이 대답해 말했다.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나는 하나를 가지고 관철하고 있는 것이다.”

子曰 賜也 女以予爲多學而識之者與 對曰 然 非與 曰 非也 予一以貫之.

79. 일자사(一字師)

 

고사

 

 

鄭谷은 唐나라때 시인이다.

어느날 ‘제기(齊己)’라는 스님이 여러 편의 詩稿를 가져 왔다. 그 중 <조매(早梅)>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前村深雪裏 昨夜數枝開……’(앞마을이 깊은 눈 속에 파묻혀 있는데, 어제 밤에 몇 가지에 매화가 피었네).

이를 본 鄭谷이 말했다. “數枝(몇 가지)는 早梅(일찍 핀 매화)라는 詩題에 맞지 않으니 一枝(한 가지)가 좋은 것 같소.” 그렇게 바꾸어 놓고 보니 과연 詩 전체의 느낌이 달라졌다. 이에 스님은 鄭谷에게 큰 절로 감사를 表했고, 사람들은 鄭谷을 가리켜 ‘一字師’(한 글자를 가르쳐 준 선생님)라고 했다.

自古로 공부하는 사람은 한 글자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또 훌륭한 스승은 간단해 보이지만 핵심을 짚어 준다고 했다.

80. 일자천금(一字千金) ≪出典≫≪史記≫〈呂不韋列傳〉

 

고사

 

 

戰國時代 末期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과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은 각 수천 명,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과 위(魏)나라 신릉군(信陵君)은 각 3000여 명의 식객(食客)을 거느리며 저마다 유능한 식객이 많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 이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일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상국(相國:宰相)이 되어, 어린(13세) 왕 정(政:훗날의 시황제)으로부터 중부(仲父)라 불리며 위세를 떨친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B.C.235, 정의 친아버지라는 설도 있음)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가 태자가 되기 전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기화 가거(奇貨可居)’라며 천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오늘날의 영화를 거둔 여불위였다. 그는 막대한 사제(私財)를 풀어 3000여 명의 식객을 모아들였다.

당시 列國들 사이에는 著述사업이 유행이었다. 呂不韋는 食客들을 동원해 古今의 정치, 경제, 사상, 문화, 역사 등을 모두 網羅한 백과사전格인 책을 완성해 마치 자기가 편찬한 양 ‘呂氏春秋’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수도인 咸陽 성문에 걸어놓고 “누구든지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뺀다면 천금을 주겠다.(有能增省一字者予千金)”고 豪言했다.≪史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呂不韋는 자기 誇示겸 우수인사 誘致 목적으로 이 말을 했지만, 지금 ‘一字千金’은 ‘심금을 울리는 아주 빼어난 글’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과 脈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유사어】일자백금(一字百金).

81. 전전반측(輾轉反側) //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룸. ≪出典≫‘詩經’ 周南

 

고사

 

 

고민으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 혹은 잠자지 못하고 뒤척임을 되풀이 하는 것을 형용하여 ‘輾轉反側’이라고 하거니와, 이 말은 본래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형용해서 하는 말이다.

≪詩經≫‘周南’의 관저(關雎)에 이렇게 실려 있다.

구룩구룩 물수리는 강가 섬에 있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들쭉날쭉한 마름풀을 좌우로 헤치며 따는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를 자나깨나 구하는도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자나깨나 생각하는도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지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도다.

關關雎鳩 在河之州

窈窕淑女 君子好逑

參差荇菜 左右流之

窈窕淑女 寤寐求之

求之不得 寤寐思服

悠哉悠哉 輾轉反側

이 제2절의 결구가 ‘輾轉反側’이다. 이 노래는 물쑥을 따면서 부르는 연가(戀歌)이다. 즉 노동가(勞動歌)임과 동시에 연애가(戀愛歌)이기도 하다.

82. 절차탁마(切磋琢磨) // 옥, 돌, 상아 따위를 자르고 쪼고 갈고 닦아서 빛낸다

는 뜻으로, ‘학문, 덕행을 갈고 닦음’의 비유.

≪出典≫‘論語’ 學而篇 / ‘詩經’ 衛風篇

 

고사

 

 

≪論語≫‘學而篇’에는≪詩經≫에 실려 있는 시가 인용되고 있다.

자공(子貢)이 孔子께 여쭈었다.

“가난해도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면서 교만함이 없는 것은 어떠합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그러나 가난해도 도(道)를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절을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느니라.” 자공(子貢)이 다시 여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끊는 듯이 하고, 닦는 듯이 하며, 쪼는 듯이 하고, 가는 듯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것을 이릅입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賜)야, 비로소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하구나. 지난 일들을 일러 주었더니 닥쳐올 일까지 아는구나.”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 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원 말】여절여차 여탁여마(如切如磋 如琢如磨)

【준 말】절마(切磨)

83. 조삼모사(朝三暮四) // 간사한 꾀로 남을 속여 희롱함을 이르는 말.

≪出典≫‘列子’ 黃帝篇 / ‘莊子’ 齊物篇

 

고사

 

 

송(宋)나라에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저(狙)’란 원숭이를 뜻한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저공은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의 양식까지 퍼다 먹일 정도로 원숭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저공을 따랐고 마음까지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를 대는 일이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저공은 원숭이에게 나누어 줄 먹이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 같아 그는 우선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는 도토리를 앞으로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朝三暮四)’씩 줄 생각인데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한결같이 화를 내었다. ‘아침에 도토리 세 개로는 배가 고프다’는 불만임을 안 저공은 ‘됐다’ 싶어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朝四暮三)‘씩 주마.”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宋有狙公者 愛狙養之成群 能解狙之意 狙亦得心之心 損其家口 充狙之欲 俄而匱焉 將限其食 恐重狙之不訓於己也 先誑之曰 與若芧朝三而暮四 足乎 衆狙皆起而怒 俄而曰 與若芧 朝四而暮三 足乎 衆狙皆伏而喜.

【준 말】조삼(朝三)

【동의어】조사모삼(朝四暮三)

84. 주지육림(酒池肉林) // 술로 못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술잔치’를 이르는 말. ≪出典≫‘史記’ 帝王世紀 十八史略

 

고사

 

 

고대 중국의 夏나라 걸왕(桀王)과 殷나라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들은 각기 말희(妺姬)와 달기(妲己)라는 희대(稀代)의 두 요녀 독부(妖女毒婦)에게 빠져서 사치(奢侈)와 주색(酒色)에 탐닉(眈溺)하다가 결국 폭군 음주(暴君淫主)라는 낙인(烙印)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夏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말희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을 베풀기로 했다.

또 무악(舞樂)에 싫증이 난 말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고기[肉]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그러

니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나라에 복속(服屬)했던 殷나라 탕왕에게 주벌(誅伐) 당하고 말았다.

또한 탕왕으로부터 28대째로 殷나라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보내온 희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다. 그래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收奪)한 전백(錢帛)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酒池肉林’을 만들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暴君淫主)로 악명을 떨치던 주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周나라 시조(始祖)인 무왕(武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동의어】육산주지(肉山酒池)

【유사어】육산포림(肉山脯林)

85. 죽마고우(竹馬故友) // ① 어렸을 때의 벗.(소꼽동무)

② 어렸을 때 친하게 사귄 사이.

③ 어렸을 때부터 오랜 친구. ≪出典≫‘世說新語’ / ‘晉書’

 

고사

 

 

진(晉 : 東晉)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簡文帝 : 371-372) 때의 일이다.

촉(蜀)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桓溫)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殷浩)라는 은사(隱士)를 건무장군(建武將軍) 양주자사(楊州刺史)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政敵)이 되어 반목(反目)했다. 왕희지(王羲之)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하나인 후조(後趙)의 왕 석계룡(石季龍)이 죽고 호족(胡族)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동의어】죽마지우(竹馬之友), 죽마구우(竹馬舊友)

【유사어】기죽지우(騎竹之友), 죽마지호(竹馬之好)

86. 지록위마(指鹿爲馬) //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가리킴.

≪出典≫‘史記’ 秦始皇本紀

 

고사

 

 

秦나라 시황제가 죽자 측근 환관인 조고(趙高)는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태자 부소(扶

蘇)를 죽이고 어린 호해(胡亥)를 세워 2세 황제로 삼았다. 현명한 부소보다 용렬한 호해가 다구기 쉬웠기 때문이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어쨌든 조고는 이 어리석은 호해를 교묘히 조종하여 경쟁자인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 그밖에 많은 구신(舊臣)들을 죽이고 스스로 승상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 말[馬]을 바치오니 거두어 주시옵소서.”

“승상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말로 보이오?”

말을 마치자 호해는 웃으며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한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趙高欲慰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 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問左右 左右或黙 或言馬 以阿順趙高 或言鹿者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 後群臣皆畏高.

그러나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打倒)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중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해 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세워 3세 황제로 삼았다.(BC 207) 그러나 이번에는 조고 자신이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말았다.

87. 천의무봉(天衣無縫) // 하늘의 직녀가 짜 입은 옷은 솔기가 없다는 뜻으로,

① 詩文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가 없음을 이름.

② 완전 무결함. ≪出典≫‘太平廣記’ 鬼怪神寄

 

고사

 

 

곽한(郭翰)이 뜰에 누웠는데 절세미인이 나타나서,

“저는 천상(天上)의 직녀(織女)이온데, 남편과 오래 떨어져 있어 울화병이 생겨서, 상제(上帝)의 허락을 받고 요양차 내려왔습니다.”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를 요구하더니 매일 밤 찾아왔다. 칠월 칠석이 되자 며칠 안오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래서, “남편[牽牛]과의 재미는 좋았소?” 하자, “천상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과 다릅니다.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니 질투는 마십시오.” 했다.

곽한이 조용히 그녀의 옷을 살펴보니, 바느질한 곳이 전혀 없었다. 이상해서 물으니, “하늘의 옷은 원래 바늘이나 실로 꿰매는 것이 아닙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벗은 옷은 그녀가 돌아갈 때면 저절로 가서 그녀의 몸에 입히는 것이었다.

徐視其衣竝無縫 翰問之 謂翰曰 天衣本非針線爲也 每去 輒以衣服自隨.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직녀(織女)의 시녀가 소식을 한 번 전한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곽한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미인을 보더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집안의 혈통을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 싫어도 아내를 맞이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고 부부의 사이도 좋지 않아 아들도 얻지 못한 채로 끝나고 말았다.

88. 청출어람(靑出於藍) // 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일컫는 말. ≪出典≫‘荀子’ 勸學篇

 

고사

 

 

이 말은 전국시대의 유학자(儒學者)로서 성악설(性惡說)을 창시한 순자(荀子)의 글에서 나오는 한 구절이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물보다 더 차다.

學不可以己 靑取之於藍 而靑於藍 氷水爲之 而寒於水.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끊임없이 발전과 향상을 목표로 하여 노력해야 하고 중도에서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학문은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한 걸음씩 완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 여기서 ‘푸름과 얼음’의 비유가 등장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학문과 마차가지로 그 과정을 거듭 쌓음으로써 그 성질이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가는 것이다. 스승에게 배우기는 하지만 그것을 열심히 익히고 행함으로써 스승보다 더 깊고 높은 학문과 덕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이 너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준 말】출람(出藍)

【동의어】출람지예(出藍之譽), 출람지재(出藍之才), 후생각고(後生角高), 출람지영예(出 藍之榮譽)

89. 촌철살인(寸鐵殺人) // 간단한 경구(警句)로 어떤 일의 급소를 찔러 사람을 감동시킴의 비유. ≪出典≫‘學林玉露’

 

고사

 

 

‘학림옥로(學林玉露)’라는 책은 남송(南宋) 때의 나대경(羅大徑)이, 찾아오는 손님들과 주고받은 청담(淸談)을 시동(侍童)에게 기록하게 한 것으로 ‘天 · 地 · 人’의 세 부분 18권으로 구성된 책이다.

그 중 ‘지부(地部)’ 제7권 <살인수단(殺人手段)>에는 종고선사(宗杲禪師)가 다음과 같이 선(禪)을 논하여 말했다.

비유하면 한 수레의 병기를 싣고서 하나를 희롱하여 마치면 또 다른 하나를 꺼내 가지고 와서 희롱함과 같지만, 이것이 곧 사람을 죽이는 수단은 아니다. 나는 곧 단지 촌철(寸鐵)이 있으므로, 문득 사람을 죽일 수 있다.

宗杲論禪曰 譬如人載一車兵器 弄了一件 又取出一件來弄 便不是殺人手段 我則只有寸鐵 便可殺人.

이것은 그가 선(禪)의 요체(要諦)를 갈파한 말이므로, 살인이라고 하지만 물론 칼날로 상처를 입히는 것을 뜻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속의 속된 생각을 없애는 것’을 뜻한다.

아직 크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그 속된 생각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성급하게 이것 저것 대답을 해 오겠지만, 정신의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두 날것들뿐이다. 그와 같은 칼로는 몇 천 몇 만 개나 되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모든 일에 온 몸과 온 정성을 다 기울일 때, 충격적으로 번득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큰 깨달음인 것이다.

90. 타산지석(他山之石) //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덕(知德)을 연마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 ≪出典≫‘詩經’ 小雅篇

 

고사

 

 

이 말은≪詩經≫‘小雅’의 <학의 움음(鶴鳴)>에 실려 있다.

학이 높은 언덕에서 울거늘, 그 소리는 온 들에 들리는도다.

물고기가 잠겨 연못에 있다가, 혹은 물가로 나와 노는도다.

저 동산에는 즐겁게도, 이에 심어놓은 박달나무가 있으며,

그 아래에 오직 개암나무가 있도다.

남의 산의 돌도, 가히 써 숫돌로 삼을 수 있도다.

학이 높은 언덕에서 울거늘, 그 소리 하늘에 들리는도다.

물고기가 물가에 있다가, 혹은 잠기어 연못에 있도다.

저 동산에는 즐겁게도, 이에 심어놓은 박달나무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오직 닥나무가 있도다.

남의 산의 돌에, 가히 써 구슬을 갈 수 있도다.

鶴嗚于九皐 聲聞于野

魚潛在淵 或在于渚

樂彼之園 愛有樹檀

其下維蘀

他山之石 可以爲錯

鶴嗚于九皐 聲聞于天

魚在于渚 或潛在淵

樂彼之園 爰有樹檀

其下維穀

他山之石 可以攻玉

【유사어】절차탁마(切磋琢磨), 공옥이석(攻玉以石)

91. 토사구팽(兎死狗烹) //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곧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말. ≪出典≫‘史記’ 淮陰侯列傳 十八史略

 

고사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소하(蕭何) · 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의 창업 삼걸(創業三傑) 중 한 사람인 한신(韓信)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 200)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고조(高祖)는 지난날 종리매에게 고전했던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을 어 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高祖)에게 ‘한신은 반심(反心)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진평(陳平)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모든 제후(諸侯)들은 초(楚) 땅의 진(陳:河南省 內)에서 대기하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이 나오면 진(陳)에서 포박하고, 만약 나오지 않으면 진(陳)에 집결한 다른 제후들의 군사로 한신을 주살(誅殺)할 계획이었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反旗)를 들까’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서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신은 자결한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拜謁)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 당하자 한신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한(漢)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내가,

이번에는 고조의 손에 죽게 되는구나.

果若人言 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원 말】교토사 양구팽(狡兎死 良狗烹)

【도의어】야수진 엽구팽(野獸盡 獵狗烹)

92. 파죽지세(破竹之勢) // 대적(大敵)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 가는 당당한 기세. ≪出典≫‘晉書’ 杜預傳

 

고사

 

 

위(魏)나라의 권신(權臣) 사마염(司馬炎)은 원제(元帝)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무제(武帝:265-290)라 일컫고, 국호(國號)를 진(晉)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晉)나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제는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에게 출병을 명했다. 이듬해(280년) 2월,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요, 대나무란 처음 두 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버린단 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건읍(建業 : 南京]으로 쇄도(殺到)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어 오왕(吳王) 손호(孫晧)가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진(晉)나라는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했다.

옛날에 악의(惡毅)는 제서(齊西)의 한 번 싸음에서 승리하여, 강한 齊나라를 합쳤다. 지금 아군은 위세를 이미 떨치고 있다. 비유하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 다. 몇 마디를 쪼갠 다음에는 다 칼날을 맞아 쪼개어질 것이니, 다시 손을 댈 곳이 없다.

昔樂毅藉齊西一戰 以幷彊齊 今兵威己振 譬如破竹 數節之後 皆迎刃而解 無復著手處也

【동의어】영인이해(迎刃而解), 세여파죽(勢如破竹)

93. 표사유피(豹死留皮) //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뜻. 사람은 사후(死 後)에 이름을 남겨야 함의 비유. ≪出典≫‘新五代史’ 死節篇

 

고사

 

 

왕언장(王彦章)은 한갓 병졸에서 시작하여 후량(後梁) 태조(太祖) 주전충(朱全忠)의 장군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용기와 힘으로 쇠창을 옆에 끼고 촉한(蜀漢)의 조자룡처럼 적진을 누벼 군사들은 그를 왕철창(王鐵槍)이라 불렀다.

그는 후량(後梁)이 멸망할 때 겨우 500의 기병을 거느리고 수도를 지키다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되었다. 후당(後唐)의 장종(藏宗) 이존욱은 그의 무용을 아껴 부하가 되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왕언장은,

“신은 폐하와 10여 년이나 싸워 이제 패군지장(敗軍之將)이 되었습니다. 죽음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또 아침에 양(梁)나라, 저녁에 진(晉:後唐)나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습니까?”하고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해 무식했으나, “표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언제나 말하고 지키겠다.”고 하였다.

彦章武人不知書 常爲俚語謂人曰 豹死留皮 人死留名.

【동의어】호사유피(虎死留皮)

94. 필부지용(匹夫之勇) // 소인의 깊은 생각 없이 혈기만 믿고 냅다치는 용기.

≪出典≫‘孟子’ 梁惠王下

 

고사

 

 

齊나라 宣王이 물어 보았다.

“이웃나라와 사귀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孟子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오직 仁者라야 능히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殷나라 湯王이 갈(葛)나라를 섬기고, 周文王이 곤이(昆夷)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지혜있는 왕이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越王 구천(勾踐)이 吳나라를 섬겼습니다.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를 즐기는 것이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하늘의 道를 즐기는 사람은 천하를 편안케 하고, 하늘의 道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케 합니다.≪詩經≫에도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길이 나라를 편안케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크기도 하여라, 선생의 말씀이여! 그런데 과인에게는 한 가지 병이 있으니, 과인은 용기를 좋아합니다.”

“왕께서는 제발 작은 용기를 좋아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칼자루를 어루만지고 노려보면서, ‘제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해낼 것이냐?’하신다면, 이는 필부(匹夫)의 용기입니다. 이는 곧 한 사람을 대적함이니, 왕께서는 제발 용기를 크게 부리소서.”

齊宣王 問曰 交隣國有道乎 孟子對曰 有 惟仁者 爲能以大事小 是故湯事葛 文王事昆夷 惟智者 爲能以小事大 故 勾踐事吳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詩云 畏天之威 干時保之 王曰 大哉言矣 寡人有疾 寡人好勇 對曰 王請無好小勇 夫撫劒疾視曰 彼惡敢當我哉 此匹夫之勇 敵一人者也 王請大之.

95. 한단지보(邯鄲之步) // 자기가 지켜야 할 본분을 모르고 마구 남의 흉내를 내면 두 가지를 다 잃는다는 말. ≪出典≫‘莊子’ 秋水篇

 

고사

 

 

莊子의 선배인 위모(魏牟)와 명가(名家)인 공손룡(公孫龍)과의 문답 형식으로 된 이야기가 있다.

위모가 공손룡에게 말했다.

“또한 그대는 걷는 법을 배우러 수릉(壽陵)의 젊은이가 한단(邯鄲)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가? 아직 그 나라의 걸음걸이에 능하지 못하였는데 제 나라의 걸음걸이마저 잃어, 곧 엎드려 기어서 제 나라로 돌아갔을 뿐일세. 당장 그대가 가지 않는다면 장차 그대의 방법을 잃고 그대의 본분을 잃어버릴 것일세.”

공손룡은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고, 혀가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아, 곧 달려서 도망쳐 갔다.

且子獨不聞 夫壽陵餘子之學行于邯鄲與 未得國能 又失其故行矣 直匍匍而歸耳 今子不法 將忘子之故 失子之業 公孫龍口呿而不合 舌擧而不下 乃逸而走.

96. 한우충동(汗牛充棟) //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 안에 쌓 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란 뜻으로, 장서(藏書)가 매우 많음의 비유. ≪出典≫柳宗元 ‘陸文通先生墓表’

 

고사

 

 

唐나라 중엽의 문장가 유종원(유종원)의 ‘육문통선생묘표(陸文通先生墓表)’라는 글이 있는데, 그 첫머리 부분에 이렇게 실려 있다.

孔子께서≪春秋≫를 짓고서 1500년이 지났다.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이 다섯 있는데, 지금 그 셋을 쓴다. 죽간(竹簡)을 잡고 생각을 초조하게 하여 써 읽고 주석(註釋)을 지은 자가 백천(百千)이나 되는 학자가 있다. 그들은 성품이 뒤틀리고 굽은 사람들로, 말로써 서로 공격하고 숨은 일을 들추어 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지은 책들은 집에 두면 ‘창고에 가득 차고’, 옆으로 옮기려면 ‘소와 말이 땀을 흘릴’ 정도였다. 孔子의 뜻에 맞는 책이 숨겨지고, 혹은 어긋나는 책이 세상에 드러나기도 했다. 후세의 학자들은 늙은을 다하고 기운을 다하여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돌아보아도 그 근본을 얻지 못한다. 그 배우는 것에 전념하여, 서로 다른 바를 비방하고, 마른 대나무의 무리가 되며, 썩은 뼈를 지키어 부자(父子)가 서로 상대를 상처내고, 임금과 신하가 배반하기에 이르는 자가 전 세상에는 많이 있었다. 심하도다. 성인(聖人) 孔子의 뜻을 알기가 어렵도다.

孔子作春秋 千五百年 以名爲傳者五家 今用其三焉 乘觚牘 焦思慮以爲讀注疏說者 百千人矣 攻訐狠怒 以辭氣相擊排冒沒者 其爲書 處則充棟宇 出則汗牛馬 或合而隱 或乖而顯 後之學者 窮老盡氣 左視右顧 莫得其本 則專其所學 以訾其所異 黨枯竹 護朽骨 以至於父子傷夷 君臣詆悖者 前世多有之 甚矣 聖人之難知也.

97. 형설지공(螢雪之功) // 갖은 고생을 하며 부지런히 학문을 닦은 공. ≪出典≫‘晉書’

 

고사

 

 

晉의 차윤(車胤)은 자(字)가 무자(武子)이다. 어려서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널리 책을 읽었다. 집이 가난하여 항상 기름을 얻지는 못하였다. 여름철에 비단 주머니로써 수 십 마리의 반딧불을 담고 책을 비춰서 읽으며 밤으로써 낮을 잇더니, 후에 벼슬이 상서랑(尙書郞)에 이르렀다. 지금 사람이 서창(書窓)을 형창(螢窓)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晉車胤武子 幼 恭勤搏覽 家貧不常得油 夏月以練囊 盛數十螢火 照書讀之 以夜繼日 後官至尙書郞 今人以書窓 爲螢窓由此也.

晉의 손강(孫康)은 어려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사귀고 놂이 잡스럽지 않았으나 집이 가난하여 기름이 없어서 일찍이 눈에 비춰 책을 읽더니, 후에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다. 지금 사람이 서안(書案)을 설안(雪案)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晉孫康 少 淸介 文遊不雜 嘗映雪讀書 後官至御史大夫 今人 以書案爲雪案 由此也.

98. 호가호위(狐假虎威) //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림의 비유. ≪出典≫戰國策 楚策

 

고사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초엽, 초(楚)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어느날 선왕은 위(魏:梁)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다가 그의 신하가 된 강을(江乙)에게 물었다.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 제국(諸國)이 우리 재상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북방 제국이 어찌 일개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 따위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전하, 혹 ‘狐假虎威’란 말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오.”

“그러면 들어 보십시오.『어느날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게 된 여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너는 나를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로 정하신 천제(天帝)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천벌을 받게 된다. 만약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당장 내 뒤를 따라아 보라구.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단 한 마리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를 따라가 보았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만나는 짐승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짐승들을 달아나게 한 것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었는데도 호랑이 자신은 그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북방 제국이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은 소해휼이 아니라 그 배후(背後)에 있는 초(楚)나라의 군세(軍勢), 즉 전하의 강병(强兵)입니다.”

이처럼 강을이 소해휼을 폄(貶)하는 이유는 아부(阿附)로써 영신(佞臣)이 된 강을에게 있어 왕족이자 명재상인 소해휼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이었다.

虎求百獸而食之 得狐 狐曰 子無敢食我也 天帝使我長百獸 今子食我 是逆天帝命也 子以我爲不信 吾爲子先行 子隨我後觀 百獸之見我而敢不走乎 虎以爲然 故遂與之行 獸見之皆走 虎不知獸畏己而走也 以爲畏狐也 今王之地方五千里 帶甲百萬 而專屬之昭奚恤 故北方之畏奚恤也 其實畏王之甲兵也 猶百獸之畏虎也.

【동의어】가호위호(假虎威狐)

【준 말】가호위(假虎威)

99. 호접지몽(胡蝶之夢) // 나비가 된 꿈이란 뜻.

① 물아(物我)의 구별을 잊음의 비유.

② 만물 일체(萬物一體)의 심정

③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出典≫‘莊子’ 齊物論篇

 

고사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물(物)의 시비(是非)·선악(善惡)·진위(眞僞)·미추(美醜)·빈부(貧富)·귀천(貴賤)을 초월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한 사람이다.

장자가 어느날 꿈을 꾸었다. 자신은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莊周)가 아닌가.

이는 대체 장주(莊周)인 자기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나비이고 나비인 자기가 꿈 속에서 장주(莊周)가 된 것일까.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莊子의 이런 우화(寓話)는 독자를 유현(幽玄)의 세계로 끌어들여 생각게 한다.

옛날에 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나비가 된 것을 기뻐하였다. 스스로 즐겨서 뜻하는 대로 가고 있어, 자신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깨달으니 곧 莊周가 되어 있었다. 알지 못하겠다. 莊周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莊周가 된 것인지를. 莊周와 나비와는 곧 반드시 구별이 있다. 이것을 자연(自然)이 된다고 말한다.

昔者莊周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 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유사어】장주지몽(莊周之夢)

100. 화룡점정(畵龍點睛) // 가장 긴요한 부분을 끝내어 완성시킴. ≪出典≫‘水衡記’

 

고사

 

 

남북조(南北朝)시대,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군장군(右軍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고 하니 벼슬길에서도 입신(立身)한 편이지만, 그는 붓 하나로 모든 사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화가로도 유명했다.

어느날, 장승요는 금릉(金陵:南京)에 있는 안락사(安樂寺)의 주지로부터 용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절의 벽에다 검은 구름을 헤치고 이제라도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네 마리의 용을 그렸다. 물결처럼 꿈틀대는 몸통, 갑옷의 비늘처럼 단단해 보이는 비늘, 날카롭게 뻗은 발톱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용을 보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은 점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장승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성화독촉(星火督促)에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한 마리의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기로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용의 눈에 ‘획’하니 점을 찍었다. 그러자 돌연 벽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펴지더니 한 마리의 용이 튀어나와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張僧繇於金陵安樂寺 畵四龍於壁 不點睛 每曰 點之則飛去 人以爲誕因點其一 須臾雷電破壁 一龍乘雲上天 不點睛者見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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