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27. 09:34ㆍ文化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영구결번' 국보 보물, 그 파란만장 사연들
1992년 해군의 이충무공 해전유물발굴단은 거북선에 장착한 대포를 인양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급에 눈이 먼 발굴단장이 조작한 가짜였다.|경향신문 자료
영구결번이라는 게 있다. 스포츠나 항공기, 철도 등에서 특정 번호를 다시 사용하지 않도록 한 것을 의미한다. 스포츠의 경우엔 명예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항공기나 철도의 사고에 따른 영구결번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국보와 보물에도 ‘영구결번’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국보는 274호와 278호, 두 건이지만 보물은 5호·163호·341호·458호·476호·479호·864호·1173호 등이 모두 ‘영구결번’이다. 그렇다면 문화재의 ‘영구결번’은 명예의 의미일까 불명예의 뜻일까.
■“한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一射敵船 必水葬)”
1992년 8월10일 경남 통영시 한산면 문어포 앞바다까지 고무보트를 타고 온 해군 소속 대령과 하사 1명이 무언가를 바닷속에 빠뜨렸다. 400년 전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승전지인 한산대첩 현장에서 무엇을 던져 넣은 것일까. 두 사람이 “무덤에 갈 때까지 입을 다물자.”고 굳게 약속했다.
8일 후인 18일 해군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의 황○○ 단장(대령)과 해사박물관의 조○○관장이 깜짝 놀랄만한 발굴성과를 발표한다. 바로 그 문어포 앞바다에서 ‘만력 병신년(1596년·선조 29년) 6월 제작해서 올린 별황자총통’(萬曆丙申六月日造上 別黃字銃筒)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총통을 인양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명문내용은 세상을 더욱 놀라게 했다.
‘귀함의 황자총통은 적선을 놀라게 하고, 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귀함’이라면 거북선이 아닌가. 그것은 결국 거북선에 장착한 화포가 발견되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임진왜란사가 전공인 조 관장이 인정했다면 확실한 것이 아닌가.
난리가 났다. 당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 전신)은 이△△ 문화재전문위원(당시 육사박물관장)을 현장으로 급파해서 진품 여부를 감정하도록 했다. 틀림없다고 했다. ‘출토지점이 확실하고 대포의 형태와 명문으로 보아 16세기말 화포임이 분명하다.’고 했다.
가짜총통에 새겨 넣은 가짜명문, 거북선을 가리키는 귀함과 ‘한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는 내용의 글귀가 선명하다. 그러나 그 명문은 가짜였다.
3일 뒤인 21일 문화재관리국은 막 발굴된 거북선 총통의 국보지정을 심의하는 긴급문화재위원회를 열었다. 회의는 실물조사나 토론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단 30분 만에 끝났다. 결과는 ‘만장일치 국보지정’이었다. 참석한 문화재위원들의 면면은 화려했지만 전쟁사와 과학사 전문가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서지학이나 불교미술, 미술사 전공자들만 있었다. 게다가 인양 총통의 성분분석도 끝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훗날 심의에 참석한 황×× 문화재위원은 “인양한 총통을 청와대에 보냈다가 다시 해사박물관으로 내려 보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어서 충분한 심의과정을 거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문화재위원들의 ‘국보지정’ 이유는 분명해보였다.
해군의 공식기구인 유물발굴단의 정식 인양품이라는 점. 임진왜란 전문가인 조○○ 해사박물관장과 현장에서 유물을 본 이△△ 전문위원의 평가 등을 종합할 때 진품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거북선 총통은 ‘귀함별황재총통’이라는 이름으로 국보 274호의 번호를 얻었다. 이 공로로 발굴단장인 황대령은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 ‘한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一射敵船 必水葬)’는 시구는 해군 전체의 슬로건이 되었다. 해군은 이 총통을 바탕으로 실물복원과 포격실험까지 실시하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4년 만에 잡힌 꼬리
그런데 3년 8개월이 지난 1996년 4월 말이었다. 광주지검 순천지청의 지익상 검사는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된 수산업자 홍모씨를 수사하던 중 충격적인 진술을 얻게 된다. ‘1992년 인양한 거북선 총통이 가짜였다’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지검사는 문제의 총통을 발굴한 해군유물단장인 황대령을 은밀하게 소환해 조사했다.
황대령의 진술은 처음부터 수상했다. “나도 그런 소문은 듣기는 했는데, 해군의 명예를 생각해서 덮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완강한 부인이 아니라 덮어달라는 것이 어째 좀 이상했다. 검찰은 “해군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진실을 밝히라.”고 설득했다. 황대령은 결국 가짜총통을 인양한 사실을 실토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을까. 군수사당국에 따르면 황대령은 해군유물발굴단이 해체된다는 소문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별다른 발굴성과가 없으면 발굴단이 해체되고 3개월 남은 준장 진급의 마지막 기회를 잃을 것이 아닌가. 뭐 이런 압박감 때문에 희대의 사기극을 벌였다는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진급 욕심에 눈이 멀었던 황대령은 골동품업자이자 철물전문가인 신모씨를 만나 가짜 총통을 받는다. 신씨는 그 대가로 500만원을 받았다.
이 가짜총통은 1987년 신씨가 제작했으며, ‘한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一射敵船 必水葬)’는 등의 명문을 새겨 넣고 1년간 화공약품을 부어 강제 부식시킨 것이다. 수사결과 신씨의 집에서는 금방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총통 13점과 글씨를 음각하는 도구가 발견되었다. 가짜 총통사건에는 해사박물관 조○○ 관장도 연루됐다. 임진왜란사가 전공인 조 관장은 가짜총통의 선택·인양위치 선정·명문 판독을 담당했다.
정리하면 해군 발굴단장인 황대령은 골동품업자이자 철물업자인 신씨가 만든 가짜 명문총통을 받아 해사박물관장(조○○)이 지정한 한산대첩 해역에 던져놓고 며칠 뒤 인양했다는 것이다. 그랬으니 함께 고무보트를 타고 가짜유물을 던지러 나간 하사와 ‘죽을 때까지 발설하지 말자.’고 약속한 것이다. 이렇게 생생하게 인양된 가짜유물을 진짜인양 보증한 이가 다름 아닌 임진왜란 전문가인 조○○ 해사박물관장이었으니 모두가 깜빡 속았던 것이다.
국보 278호였던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 1411년 태종이 ‘공신대우’인 원종공신 이형에게 내린 증명서다. 그러나 이 유물은 보물로 격하되었다.|문화재청 제공
■“생각해보니 너무 깨끗했다.”
가짜총통임이 들통 난 뒤에야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는 복기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400년간 해저에 묻혀있던 유물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했다. 녹 때문에 알아보기 힘들어야 할 글씨가 너무도 선명했다. 또 조선시대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글귀도 더러 발견됐다. 단적인 예로 ‘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라는 명문은 돌이켜보니 너무 현대적인 표현이었다. 즉 임진왜란 당시에는 적선(敵船)이니 수장(水葬)이니 하는 표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일사(一射)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사(射)는 발사한다는 뜻이지만 조선시대에는 화살을 쏠 때만 사용했다. 포나 총통의 화학무기 때는 방(放)이라 표기했다. 게다가 졸속 국보지정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성분분석결과 아연이 8%나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도 그냥 넘어갔다. ‘같은 국가기관(해사)의 발굴품’이라는 이유로 묵살해버린 것이다. 열에 약한 아연의 함유량이 높으면 대포가 망가질 수밖에 없다.
1996년 8월31일 문화재위원회가 다시 모였다. 4년 전 가짜총통을 국보로 졸속 지정한 문화재위원회가 이번에는 국보 해제를 위한 심의에 들어간 것이다. 자기들이 지정해놓고 자기들이 해제한 것이다. 한국문화재사상 가장 부끄러운 일로 기록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후예를 자처하는 해군에게도 씻을 수 없는 오욕의 역사다.
국보 제274호가 ‘영구결번’ 된 슬픈 사연이다.
■대접이 다른 ‘진짜공신과 공신대우’
또 하나의 국보 ‘영구결번’은 국보 278호이다.
문화재관리국은 1993년 조선 태종 때 발급한 공신녹권으로는 처음 발견됐다는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을 국보 278호로 지정했다.
공신녹권이 무엇인가. 개국 때나 전쟁 때, 혹은 반란 때 특별한 업적을 세운 공신에게 내리는 증서다. ‘당신이 바로 공신일세.’하는 증명서인 것이다.
그런데 정식공신(正功臣)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공적을 인정받은 이들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인정하고 증서를 내릴 때가 있다. 그것을 원종공신록이라 한다. 그러니까 원종공신은 시쳇말로 ‘공신 대우’라 표현할 수 있겠다. 정공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 공로를 세웠으니 ‘공신대우’는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이형 원종공신녹권’을 보물로 밀어낸 ‘마천목 좌명공신녹권’. 이형 원종공신녹권보다 11년 앞섰으며, 무엇보다 공신대우가 아닌 진짜 공신, 즉 좌명공신에게 내린 증서라는 점이 부각된다. 진짜공신인 마천목의 공신녹권이 보물인데, 공신대우격인 원종공신록이 국보일 수 없다는 이유로 이형 원종곤신녹권은 보물로 떨어졌다.|문화재청 제공
1993년 당시 국보가 된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은 이형이라는 인물이 공신대우(원종공신)를 받았다는 증서와 그 증서를 넣은 상자(함)을 일컫는다. 증서와 함을 묶어 국보로 지정했다. 그런데 27년이 지난 2010년 6월 10일 이 국보 278호가 보물(1657호)로 격하된다. 따라서 ‘국보 278호’도 영구결번 되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조선조 태종은 즉위 직후인 1401년(태종 1년) 대대적인 공신책록에 나선다. 이른바 제2차 왕자의 난(1400년·정종 2년)을 평정하는데 공훈을 세운 47명을 4등으로 나눠 ‘공신’의 작위를 준 것이다. 이를 좌명공신(佐命功臣·임금의 명을 받아 임금될 사람을 잘 보좌했다는 뜻)이라 했다.
47명은 이른바 정공신, 즉 진짜공신이었다. 좌명공신 1등은 하륜·이숙번 등 9명, 2등은 이화·이천우 등 3명, 3등은 성석린·이지란·마천목 등 12명, 4등은 조박·권근 등 23명이다. 태종은 교서(임금의 명령서)·녹권(공신증명서)·사패(공신에게 내리는 토지와 노비문서) 등을 직접 하사했다.
■결국 ‘공신대우’는 영구결번 국보가 되었다.
그러나 정공신 47명 정도의 공훈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 섭섭한 신하들도 있었을 것이다.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박포 역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진짜공신, 즉 정공신이야 엄선해야 하지만 원종공신, 즉 공신대우는 그렇게 철저하게 따질 필요는 없었다.
태종은 1411년(태종 11년) 10년 전 정공신에 들지 못한 자 가운데 특별히 83명을 골라 원종공신에 봉한다. 이때 통훈대부판사재감사의 직책에 있던 이형에게도 바로 이 ‘좌명원종공신녹권’을 하사했다. 이형은 이중에서도 49명에게 내린 3등 원종공신에 속했다. 이것이 1993년 국보로 지정된 것이다.
그런데 13년이 지난 2006년 4월 새로운 공신녹권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른바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이 보물 1469호로 새롭게 지정된 것이다.
마천목(1358~1431)이 누구인가. 여말선초의 장군이며 바로 제2차 왕자의 난 직후인 1401년(태종 1년) 좌명공신의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앞서 인용한 좌명공신 명단 중에 당당히 3등에 올라있는 진짜공신(정공신)이다. 그런데 이 마천목 공신녹권은 1401년 태종이 47명에게 발급한 공신녹권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본이다. 반면 이형의 좌명원종공신녹권은 그로부터 10년 후 받은 것이다.
그럼 어떠한가. 정공신이 받은 녹권은 보물이고, 공신대우, 즉 원종공신이 그것도 10년이나 뒤에 받은 녹권이 국보라면 어쩐지 좀 어색하지 않은가.
결국 문화재위원회는 2010년 6월10일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를 열어 17년간 국보의 지위에 있던 ‘이형 좌명원종공신녹함’을 보물(제1657호)로 격하시켰다. 이로써 국보 278호 또한 영구결번으로 남게 됐다.
■화마에 녹아버린 보물, 보물들
화재로 불타고 있는 낙산사 동종. 나무로 만든 땔감이 되었다. 보물이던 동종은 결국 완전 소실됐다.|경향신문 자료
이번엔 ‘영구결번’ 보물 이야기다. 2005년 4월4일 밤 11시50분쯤부터 강원 양양군 강현면 사교리 야산에서 큰 산불이 일어났다.
불은 삽시간에 번지기 시작했다. 양양과 간성 지방에서 불었던 이른바 ‘양간지풍(襄杆之風)’이라는 국지풍의 영향이었다. 해마다 4월 쯤이면 만주지방에 발달한 저기압이 자리 잡고 있고, 한반도 남부지방엔 이동성 고기압이 배치된다. 이때 남부지방에 있는 이동성 고기압으로부터 불어오는 남서풍이 태백산맥을 넘을 때 산악효과로 인해 강풍으로 돌변한다. 이때 양양의 야산에서 난 불 역시 초속 10~20m, 순간 최대 풍속 32m의 강풍을 타고 번졌다.
다음날(5일) 오후 3시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사와 부속 건물로 불이 번졌고, 결국 보물 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이 완전히 녹아버렸다.
어떻게 해서 높이 158㎝, 입지름 98㎝에 무게만 해도 1t이 넘는 거대한 동종이 순식간에 녹아내렸을까.
이 동종의 종각은 낙산사에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외진 곳에 있었다. 목재로 만든 전각은 아주 좋은 땔감이 되었다. 여기에 불에 취약한 동종의 재질도 문제였다. 전통 종은 기본재료인 구리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재질이 약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구리에다 강도를 높이기 위해 주석을 소량 섞는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소실된 낙산사 동종의 잔해를 성분 분석한 결과 구리 81.8%. 주석 15.8% 등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원래 구리의 녹는점은 약 1083도이지만 주석은 232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주석의 함유량이 16%에 달하는 낙산사 동종의 녹는점은 상당히 낮아진다. 전문가들은 낙산사 동종은 화재당시 섭씨 798도 부근에서 녹기 시작했으며, 최소한 950도 이상의 고열에 노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안타깝게 소실된 낙산사 동종은 유서 깊은 문화재다.
효심이 깊었던 예종(재위 1468~1469)이 1469년(예종 원년)에 불교를 믿었던 부왕(세조)의 승하를 추념하고 극락왕생을 빌려고 만든 동종이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녹아내린 낙산사 동종
예부터 낙산팔경 중 하나인 낙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동종의 소리는 은은하고 청아하기로 유명했다. 합장한 손과 이목구비에 은은한 미소가 배어있는 보살 입상과, 발가락이 5개인 용뉴(종 꼭대기 부분의 장식) 또한 빼어나다. 한국전쟁의 아픔을 이겨낸 동종이라는 사연도 품고 있다. 종의 몸체에 한국전쟁 당시 입은 탄환구멍 2개가 뚫려 있고, 그 때문에 구멍 주위가 약간 평평하게 눌려 있다. 하지만 주조와 보존상태가 워낙 좋아서 소실 전까지도 매일 아침저녁의 예불 때 타종되고 있었다.
그렇게 한국 종을 대표하고, 지금도 타종되는 550년 된 걸작이 하루아침에 소실되고 만 것이다.
어디 낙산사 동종뿐인가. 경남 하동 쌍계사 적묵당은 1968년 2월19일 일어난 화재로 ‘보물 제458호’를 영구결번으로 남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잘 복원해서 15년 뒤인 1983년 경남 문화재자료(제46호)로 재지정 됐다. 그러나 보물 대신 ‘도문화재자료’라는 낮은 지위만을 획득했을 뿐이다.
그뿐인가. 1984년 4월3일 전남 화순의 쌍봉사 대웅전(보물 163호)이 전소됐다. 삼짇날을 맞아 70~80명의 신도들이 불공을 드리다가 켜놓은 촛불이 그만 넘어졌다. 통일신라 고승인 철감선사(798~868)가 창건했고, 1724년(경종 4년) 중건한 쌍봉사 대웅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연히 보물 163호도 영구결번으로 남았다.
1986년 12월6일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적광전(보물 제476호)이 불에 타 한 달도 되지 않은 1987년 1월1일 보물의 지위를 잃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금산사를 대표하는 미륵전(국보 제62호)은 건물 옆에 비치된 소화기 덕분에 겨우 살아남았다. 소화기 한 대가 국보를 살린 것이다. 금산사는 1990년 대적광전을 다시 지었지만 이미 잃은 문화재의 가치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보물 5호는 왜 결번이 되었을까
보물 중에서도 당당 5호의 지위를 누리던 경기 안양 중초사지 삼층석탑 역시 1997년 경기도유형문화재(제164호)로 신분이 낮아졌다.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1934년 8월27일 조선총독부가 맨 처음으로 조선의 보물 153건과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을 지정할 때 ‘보물 제7호’의 지위를 얻은 바 있다.
이때 일제는 중초사지 삼층석탑뿐이 아니라 중초사지 당간지주(보물 제6호) 역시 문화재로 지정했다.
1963년 문화재 등급 제도를 정비하면서 보물 제4호(당간지주)와 5호(삼층석탑)로 재조정됐다.
그러나 1997년 문화재관리국은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 503건을 대상으로 명칭·등급·종별 등을 재검토했는데, 이때 중초사지 삼층석탑이 검토대상에 올랐다.
보물 제4호인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라는 명문이 있으니 보물의 가치가 충분했다.
그러나 삼층석탑은 연대가 훨씬 떨어지는 고려 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됐다. 게다가 조형적인 측면에서도 우수한 작품으로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보물급’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결국 당간지주는 그대로 보물 제4호로 남은 반면 삼층석탑은 도문화재로 격하되고 말았다.
■원본이 아니라 슬픈 문화재여!
보물 제1173호였던 ‘남은유서분재기와 남재왕지’ 역시 보물의 지위를 잃었다.
이 유물은 두 가지로 구성돼있다. 즉 조선의 개국공신이지만 제1차 왕자의 난 때(1398년) 살해당한 남은(1354~1398)이 남겼다는 유서(남은유서분재기)가 한가지이다. 또 하나는 남은의 형인 남재(1351~1419)가 1415년(태종 15년) 임금(태종)으로부터 받았다는 임명장(사령장)이다,
첫 번째 남은이 자손들에게 남겼다는 유서는 재산상속과 관련되어 있다. 조선초기의 재산상속을 다루고 있으니 매우 중요한 사료가치를 지니고 있다. 내용을 요약해보자.
“(남은이) 생사를 기약하기 어렵다. 노비와 전답은 자손이 소유하고 나누어 가져라… 제사를 받들어 끊어지지 않도록 하며… 하사받은 금은 허리띠(金銀帶)와 은병(銀甁·병모양의 은화), 채옥장종(彩玉長種)은 모두 적장자의 집에서 전수하라….”
또 남은의 형인 남재가 받은 ‘남재왕지’는 1415년(태종 15년) 태종이 남재에게 ‘… 의령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세자부)’ 등 긴 이름의 관작을 내리는 사령왕지이다. 원본이라면 보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국보의 가치를 자랑할 만한 유물이 틀림없다.
여말선초의 문인정치가인 남은이 자식들에게 내렸다는 유서, 그러나 후대에 옮겨 베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보물에서 해제됐다.
그러나 이 두 유물이 원본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남은 유서’의 경우 원본이 훼손되어 후대의 누군가가 모사했다는 것이었다. 유서의 전문을 판독하면 상당부분 문맥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전래과정에서 마멸된 부분이 생겼는데, 누군가가 문서를 옮겨 적을 때 마멸부분을 빠뜨렸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위조는 아니지만…
또 유서에 등장하는 ‘수서(手書)’라는 단어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수서’는 ‘손수 썼다.’는 뜻이다, 그런데 조선 전기의 분재기(재산상속기)에는 보통 ‘자필(自筆)’이라는 용어를 쓰지 ‘수서’라는 단어는 잘 쓰지 않는다. ‘수서’라는 단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중종 12년인 1517년 무렵이다. 따라서 ‘남은 유서’는 후대의 누군가가 원문을 보고 그대로 베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악의적인 베낌’은 아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후대의 전사자(傳寫者)가 오기(誤記)는 했을지언정 위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내용상 위조는 없었지만 원본이 아니기 때문에 보물로서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남재의 왕지(王旨)’의 경우도 원본이 아닌 ‘전사본(傳寫本)’으로 판단되었다. 무엇보다 임금이 내리는 사령장인데, 임금의 도장, 즉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다.
1962년 12월 국보 116호로 지정됐는데, 딱 한 달 만인 1963년 1월21일 보물로 중복 지정됐다가 그날자로 해제된 청자상감 모란문 표주박 모양 주전자.
문화재청은 2010년 6월10일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남은유서분재기와 남재왕지’를 보물(제1173호)의 지위에서 내렸다. 그러나 특히 ‘남은 유서’의 경우 비록 원본이 아닐지라도 조선초의 재산분배와 관련된 여러가지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재다. 보물은 아닐지라도 시도지정 문화재로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선조 때 만든 쇠북이라고?
거북선 총통 외에 가짜로 판명된 ‘영구결번’ 문화재가 또 있다.
바로 보물 제864호 ‘였던’ 금고(金鼓)다. 금고는 군대에서 명령이나 신호를 내기위해 사용한 쇠북이나 쇠징을 가리킨다. 이 금고는 1986년 3월14일 보물로 지정됐다. 1586년(선조 19년)에 제작되었음을 알리는 ‘삼도대중군~만력14년병술삼월일조(三道大中軍~萬曆十四年丙戌三月日造)’라는 명문이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이 육군박물관 소장 유물이 가짜임이 뒤늦게 드러났다.
지난 2008년 한 공예전문가가 “금고는 후대에 제작된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금고의 명문에 만력 14년, 즉 1586년 제작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삼도수군제도’는 1593년에 비로소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문화재청이 긴급히 조사해보니 가짜임이 분명했다. 쇠북에 고리를 달기 위해 뚫은 구멍을 보니 전통 기법이 아니라 기계로 투공한 것처럼 깨끗하게 처리되어 있었다. 당연히 보물의 지위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군이 발굴하거나(거북선총통) 보유한(금고) 유물이 두 건이나 가짜였음이 드러난 낯 뜨거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똑같은 문화재가 국보와 보물로 중복 지정된 사연
10대 영구결번 문화재 목록
‘영구결번’된 문화재를 검색하던 필자의 ‘매의 눈’에 심상치 않은 대목이 포착되었다.
1963년 1월21일 보물 제341호로 지정된 ‘청자상감모란문표형병’ 이야기다. 한자로 표현되어 어렵지만 ‘모란무늬가 있는 표주박형 상감청자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문화재는 보물이 된 바로 그날(1월21일) 곧바로 ‘지정 해제’ 되었다. 지정한 그날 해제했다? 대체 무슨 사연일까.
문화재청 홈페이지가 밝힌 해제사유는 ‘국보 제116호와의 중복지정’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국보 제116호’를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국보 제116호의 이름은 ‘청자 상감 모란문 표주박모양 주전자(靑磁象嵌牡丹文瓢形注子)’였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이 유물을 ‘국보 제116호’로 지정한 날짜가 1962년 12월 20일이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무슨 얘기일까. 즉 문화재관리국이 ‘청자상감표주박주전자(注子)’를 국보(제116호)로 지정해놓고, 불과 한 달 만인 1963년 1월21일 똑같은 유물을 보물(제341호)로 중복 지정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지정하자마자 곧 착오를 깨닫고 바로 그 날짜로 지정 해제하는 해프닝을 벌였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국보 지정 때는 ‘표형주자(주전자)’였던 유물이름을 보물지정 때 ‘표형병’으로 바꾼 탓에 헷갈린 것일까. 한 유물이 한 달 사이에 국보와 보물로 중복 지정되고, 단 하루만에 ‘보물지정’이 취소되었다.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국보·보물을 지정했을 텐데 왜 이런 실수가 빚어졌을까. 게다가 이 유물은 다른 곳도 아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이 부분에 관한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쉬쉬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같은 유물인데, ‘국보 제116호’는 남고, ‘보물 제 341호’는 영구 결번된 기막힌 사연이다.
문화유산의 ‘영구결번’은 대부분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한순간의 잘못과 실수로 수백 년 수천 년 된 국보와 보물이 ‘공란’으로 남는다. 영원히 기리고 잊지 말자는 ‘영구결번’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최근 보물에 머물렀던 <삼국사기> 완질본 2건이 국보로 승격 예고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삼국유사>는 이미 국보인데 왜 <삼국사기>는 여태껏 보물로 만족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피어난다. 그러나 국보이면 어떻고, 보물이면 어떠리. 하나하나 소중하게 다뤄야할 문화유산이다.
<참고자료>
황진주·한민수, ‘낙산사 동종의 성분분석 및 금속학적 고찰’, <보존과학연구> 제26권,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
안승준, ‘남은 유서의 고문서학적 검토’, <고문서연구> 10권, 한국고문서학회, 1996
이재혁, ‘한국범종의 시대별 특성과 조형예술성 연구’ 경희대석사논문, 2014
이광표, <국보이야기>, 랜덤하우스, 2005
도재기, <국보-역사로 읽고 보다>, 이야기가 있는 집, 2017
문화재청, ‘2010년 문화재위원회 제3차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등
경향신문,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등
이기환 논설위원 http://leekihwan.khan.kr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1251022001&code=960100 입력 : 2018.01.25 10:22:00 수정 : 2018.01.25 10: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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