防禦山

2009. 12. 11. 11:10旅行

경남 진주시 지수면과 함안군 군북면 경계인 해발 530.4m의 방어산은 산세는 크지 않지만 역사의 향기가 서려있고 자못 높이에 비해 웅장하고 산 전체를 감싸않은 소나무 숲은 사람의 손길이 미쳐 닿지 않아 기암절벽과 암봉이 어우러져 있고 우리나라 대부분 산들이 불교나 그 모양새와 관련된 이름을 갖고 있는데 비해 왜구 등 외적을 막아 승리를 얻은 것에 연유해 이름 붙여진 것이어서 호국의 산이라 할 수 있다. 

방어산은 이름 그대로 병란(兵亂)과 왜구를 무찌르고 방어했다는 산이다. 해발 530m의 방어산은 함안군과 경계를 이루고 산의 형태는 기암괴석으로 병풍처럼 둘러 싸여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철쭉 ,진달래, 자생란, 참나무, 단풍나무 등의 식물군과 노루, 멧돼지 ,다람쥐, 산토끼 등 야생동물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방어산 정상에는 옛 성의 자취가 있으며 서쪽에는 장군당, 그 아래는 마제현(馬蹄峴 말발굽 고개),북쪽에는 장군철상(將軍鐵像), 동쪽에는 옛 절터가 있었다. 절의 이름은 망일암(望日庵)이라고 했으며, 장군의 이름은 묵신우(默神佑)로서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절학(絶壑))를 날아다니면서 3백근짜리 활을 잡아 벌리는 힘을 지녔었다고 한다. 때마침 변성(邊城)에 큰 병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중 혜성(慧聖)의 도움을 얻어 산봉우리에 성을 쌓고 적을 방어했다. 적은 방어산 맞은 봉우리에 진을 치고 도전해왔으나 장군은 성문을 굳게 닫은 채 한 달을 버티다가 비로소 영을 내려 화전(火箭)을 빗발처럼 퍼부으니 화전에 꿰인 채 타죽은 적은 부지기수였다. 적은 장군의 지략을 보고 이것을 필경 신병(神兵)의 병술(兵術)이라 하여 버텨보다가 도주했다 . 사람들은 그러한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장군과 중 혜성의 철상과 철마를 세웠다고 전하며 정군의 군마 (軍馬)가 전쟁 때 흘린 핏자국이 아직도 바위에 선연하다고 한다.

지형상으로도 진주 함안 의령의 삼각점에 위치해 이 세 곳을 한눈에 볼수 있는 전략요충지이다. 고려 우왕 5년(1379년) 왜구가 반성을 거쳐 이 산을 침입, 점령해 있던 것을 관군이 포위 공격하여 적 34명의 수급을 베며 산을 탈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산세는 끝없이 이어지는 소나무 숲에 정상 8부 능선에는 보물 159호인 마애약사삼존불이 그윽한 미소로 맞으며 이어 암봉으로 이뤄진 정상인 장군대 이다.

방어산 정상은 장군대라 불리는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정상 아래로 흔들바위(끄덕바위 라고도 함)와 상여바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산 정상아래 200m쯤 위치한 흔들바위는 바위가 기우러진 쪽에 부자가 난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어 서쪽 진양마을 사람들과 동쪽 함안마을 사람들이 서로 자기 쪽으로 바위를 기울게 한다고 합니다. 바위를 군북면 방향과 지수면 방향으로 돌려놓으려 이 지역 사람들이 신경전을 벌이는데 바위의 방향에 따라 그 지역에서 큰 부자가 난다는 속설이 있다.

이 속설을 입증이라도 하듯 방어산 바로 밑에는 전통의 진주시 지수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학교의 출신 중에는 삼성그룹을 창업한 고 이병철회장과 역시 엘지그룹을 창업한 구인회 회장이 이곳 출신이다.

부산서 진주 가는 고속국도의 함안인터체인지를 지나면 왼편 차창을 통해 남서쪽에 그렇게 높지 않은 산줄기가 길게 드리워 있다. 몇 개의 봉우리가 옹기종기 솟았고 그 중 우두머리 봉우리는 고속도로변 위에 자리 잡았다. 함안의 여항산에서 건너뛴 오봉산의 서북쪽 산줄기가 다시 솟구쳐 괘방산을 이루고 이 줄기가 북으로 달려가 방어산(防禦山)을 빚은 뒤 거친 숨결을 낮추며 남강에 기슭을 묻었다. 부산~순천고속국도의 남강휴게소가 이산 자락에 마주해 있다. 방어산은 부산서 기차를 탈 경우 원북면에 내리면 하림은 바로 이웃. 부산 마산에선 승용차를 가지고 갈 때는 군북 IC서 군북으로 간다.

방어산 등산은 3개 코스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중 방어산 일대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종주성격을 겸한 등산로는 하림 ~ 마당바위 ~ 방어산고개 ~ 방어산 정상이다. 하림은 군북면 하림리로 경전선 철도의 원북 옆 이웃마을이다. 하림의 정자나무에서 오솔길로 오른편 마을에 들어선 뒤 산 밑의 제일 끝집 앞까지 가 오른편으로 굽은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길에서 왼편으로 뻗은 밭길이 등산로. 곧 산자락의 비탈길로 변하지만 낙엽이 수북이 쌓여 마치 깊은 산속을 연상시킨다. 등산안내 리본 두어 개가 길을 가리키고 오른편엔 밤나무단지가 간간이 눈에 뛴다. 무덤을 지나 정면 산비탈을 15분쯤 오르면 또 다시 무덤과 만나는데 가장자리의 1.5m크기 감나무에는 감 20여개가 그대로 익어가고 있어 사람의 발길이 뜸함을 알려준다(마을서 35분 거리).

감나무 옆이 등산로. 숲 속의 능선길은 낙엽이 깔려 걷는 게 오히려 재미있을 정도이다. 가랑잎과 솔가리(솔잎)가 교대로 길을 덮은 것도 피로를 잊게 한다. 능선을 휩쓰는 바람소리가 멀리서 다가오는 기차소리를 닮았다. 눈앞을 가리는 거대한 바위 가슴팍의 희미한 길을 붙잡고 왼편으로 오르면 마당바위다. 넓적한 바위에서 바라다 본 함안군 쪽 전망은 시쳇말로 `끝내준다.'

여기서 주능선은 10분 정도이고 C자(字)의 위 끝부분 봉우리 한두 개 뒤편에 방어산이 우뚝하다. 능선은 굽이치면서 정수리에 억새가 숲을 이뤘지만 겨울나목처럼 누렇게 뜬 잎이 서걱댄다. 잘록이에 내려섰다가 소나무가 원시림처럼 숲을 이룬 길 따라 헬기장인 봉우리를 거쳐 다시 헬기장과 봉우리에 올라서면 정상 맞은편 봉우리이다. 가시덩굴과 잎 떨어진 잡목 숲의 잘록이에 내려 다시 한 번 헬기장과 만난 뒤편의 봉우리가 방어산 정상. 시루떡 모양의 넓은 바위 위에 `방어산'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여항산 서북산 광로산 무학산과 자굴산 월아산 그 앞뒤로 우아한 봉우리와 끊어질 듯 이어진 산줄기, 의령과 함안의 넓은 들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읍내와 동네와 어우러진 남강, 그 옆에 자리한 남강휴게소 등 모두가 정답다. 하산은 휴게소로 내려가는 게 가까우나 산등성이를 타야하고 계곡을 빠지면 길이 없다. 또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가다 잘록이에서 왼편 길은 용화사를 거쳐 함안 군북의 지실마을로(40분 정도 걸림), 오른편은 관음암을 경유해 1시간 안팎에 진양군 지수면의 토실부락에 내려선다. 잘록이서 정면으로 갈 경우 등산의 역순으로 하산한다. 토실이나 지실에서도 등산이 가능하다.

방어산의 유물로는 보물 159호인 마애불상이 있다. 하림에서 낙동부락 앞의 계곡을 거슬러 방어산 기슭을 3㎞ 정도 오르면 500평 정도의 절터가 있고 그 후면 절벽에 삼존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허리 하단부는 암면(岩面)탈락으로 크게 손상을 입었다. 본존 높이 2.85m 좌보살 2.45m 우보살 2.64m 이다. 좌보살 옆에는 명문(銘文)이 있는데 신라 애장왕 2년(801년)의 작품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절터에서 불상이 나왔다고는 하나 알 수가 없다.

방어산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방어산 정상에는 옛성의 자취가 있으며 서쪽에는 장군당 그 아래는 마제현(馬帝峴-말발굽고개), 북쪽에는 장군철상(將軍鐵像), 동쪽에는 옛 절터가 있었다. 절의 이름은 망일암(望日庵)이라 했으며 장군의 이름은 묵신우(墨神祐)로서 사람으로서는 그 용맹을 따를 수 없었다 한다. 장군은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절학(絶壑, 깎아지른 골짜기)을 날아 건너다니면서 300근짜리 활을 잡아당기는 힘을 지녔었다. 때마침 변성(邊城)에 큰 병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중 혜성(慧聖)의 도움을 얻어 산봉우리에 성을 쌓고 적을 방어했다. 적은 방어산 맞은편 봉우리에 진을 치고 도전해 왔으나 장군은 성문을 굳게 닫은 채 한달을 버티다가 비로소 영을 내려 화전(火箭)을 빗발처럼 퍼부으니 화전에 꿰인 채 타죽은 적은 부지기수였다. 적은 장군의 지략을 보고 이것은 신병의 병술이라 하여 도주했다. 사람들은 그러한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장군과 스님 혜성의 철상과 철마를 세웠다고 전하며 장군의 군마가 전쟁 때 흘린 말굽의 핏자국이 아직도 바위에 선연하다고 한다. 산이름을 방어, 봉우리를 산성, 마을이름을 승어(勝禦) 지금의 승내(勝內)라 일컬음은 모두 방어산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진주시에서 시립공원으로 추진 중이다.

산꼭대기 300평 넓은 바위 보실래요.

▲ 방어산 정상에 있는 마당바위. 바위 표면이 굴곡이 나지 않고 평지처럼 평탄하다. ⓒ2005 오마이뉴스 윤성효

▲ 300평 규모의 마당바위 바로 옆에는 또다른 갈라진 바위들이 있다. ⓒ2005 오마이뉴스 윤성효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방어산(530m) 정상. 이곳에는 300평이나 되는 넓은 바위가 있다. 옆에 있는 바위까지 합치면 넓이는 더하다. 산 정상에 그것도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깎아놓은 바위가 있다. 일명 너럭바위 내지 마당바위라 부른다.

마당바위 맞은편에는 방어산마애불(防禦山磨崖佛. 보물 159호)이 보이고, 마애사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등산로에서 마당바위로 가려면 큰 두 개의 바위 사이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일명 해탈문(解脫門)이라고 하는데, 체격이 큰 사람은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작은 구멍이다. 사람이 바짝 엎드려 기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해탈문을 지나면 바로 마당바위가 나타난다. 이 마당바위는 방어산 미륵불(彌勒佛) 바로 위에 있다. 미륵불은 사람이 일부터 깎아 만든 게 아니라 바위의 형상이 부처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어산은 그렇게 높은 산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등산객들이 찾지는 않지만, 가벼운 등산을 즐기기에는 제격이다. 산 정상에 서면 함안읍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맑은 날이면 지리산도 보인다고 한다. 진주와 함안 등 구석구석에 보금자리처럼 들어선 농촌마을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 해탈문. 마당바위로 가려면 이 바위 틈 사이를 기어서 지나가야만 한다. ⓒ2005 오마이뉴스 윤성효

▲ 방어산 정상에 있는 줄딸기 군락지. ⓒ2005 오마이뉴스 윤성효

▲ 바위손. ⓒ2005 오마이뉴스 윤성효

防禦山磨崖藥師三尊佛像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하림리(下林里) 산 131번지의 방어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암벽에 통일신라 애장왕 2년(801)에 선각된 마애약사삼존불입상(磨崖藥師三尊佛立像)은 보물 제159호이다.

너비 7m, 높이 5m. 본존상 285㎝, 좌협시 245㎝, 우협시 264㎝. 방어산 정상에 남쪽을 향하여 있고, 마멸되어 판독하기 힘든 조성기(造成記) 가운데 <정원17년 신사 3월(貞元十七年辛巳三月)>만은 분명하여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2년(801)에 만들어진 신라(新羅) 하대(下代)의 가장 저명한 마애불이다. 통일신라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8세기의 이상적(理想的) 사실주의(寫實主義) 경향의 불상들과는 다소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거구(巨軀)의 불상(佛像)이지만 위장부적(偉丈夫的)인 당당한 체구가 아닌 현실적인 장대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특징은 정적(靜的)이며 침울하기까지 한 얼굴, 탄력감이 줄어진 신체(身體) 각부(各部), 그저 둥글기만 한 어깨, 밋밋한 가슴과 배 등에서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광보살(日光菩薩)의 강렬한 인상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의 온화하고 우아한 얼굴 등에서 이상적인 양식이 다소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에서 한층 해이되고 한층 활력이 줄어진 현실적 사실주의 양식으로 이행되어 가던 변모과정을 잘 보여주는 801년의 절대연대를 가진 중요한 마애불상이라 하겠다.

본존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여래상임을 알 수 있으며 얼굴이 타원형으로 길게 표현되었다. 어깨는 거대한 몸에 비해 좁게 표현되었고, 힘없이 표현된 신체에서는 긴장감을 느낄 수 없다. 이는 불상 양식이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에서 현실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양쪽의 협시보살은 모두 본존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서 있다. 왼쪽은 일광보살로 남성적인 강렬한 인상이고, 오른쪽은 월광보살로 눈썹사이에 달무늬가 새겨져 있다.

삼존상(三尊像)은 암면(岩面)을 깎아 새긴 마애약사불상(磨崖藥師佛像)과 협시보살상(侍菩薩像)인데,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2년(801)에 만들어진 신라하대(新羅下代)의 가장 저명한 마애불이다. 이 불상은 8세기의 이상적(理想的) 사실주의(寫實主義) 경향의 불상들과는 다소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거구(巨軀)의 불상(佛像) 이지만 위장부적(偉丈夫的)인 당당한 체구가 아닌 현실적인 장대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특징은 정적(靜的)이며 침울하기까지 한 얼굴, 탄력감이 줄어진 신체(身體) 각부(各部), 그저 둥글기만 한 어깨, 밋밋한 가슴과 배 등에서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광보살(日光菩薩)의 강렬한 인상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의 온화하고 우아한 얼굴 등에서 이상적인 양식이 다소 보이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에서 한층 해이되고 한층 활력이 줄어진 현실적 사실주의 양식으로 이행되어 가던 변모과정을 잘 보여주는 801년의 절대 년대를 가진 중요한 마애불상 이라 하겠다. 바위 면이 깨지고 금이 간 곳이 많아 불상도 부분적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곳이 많다. 본존상의 발목 밑이 땅속에 묻혀 있고, 불상 앞의 대지에는 기왓장이 흩어져 있으며 주춧돌 같은 것도 보여 이 불상을 덮는 불당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본존불입상은 몸체가 긴 편으로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왼손은 약합을 받치고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얼굴은 갸름하고 삼도(三道)는 가슴 위에 늘어진 목걸이처럼 선각되어 있다. 좁고 둥근 어깨에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치고 가슴으로부터 흘러내린 U자형 주름이 넓은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하체는 중간에서 주름이 끊기고 있다. 양쪽 협시보살상은 본존의 어깨 밑으로 낮게 서 있어 상체만 지상에 드러나며 모두 본존을 향해 몸을 틀고 서 있다. 보관은 없고 머리를 틀어 올린 것으로 짐작된다. 우협시는 갸름한 얼굴에 양손을 합장했으며 가슴에 걸친 간단한 목걸이와 팔에 걸쳐 배 앞으로 늘어진 천의 자락이 거칠게 선각되어 있다. 좌협시는 우협시에 비해 얼굴이 둥글고 크며 이목구비 표현도 거친 편이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보이며 가슴 앞에 들고 있고, 왼손은 검지를 세우고 손등을 보인 채 들고 있다. 두 보살상은 이마 중앙에 둥근 무늬가 있으므로 해와 달이 표현된 일광(좌협시)·월광(우협시) 보살로 생각된다. 우협시의 팔꿈치 옆에 새겨진 명문(成人彌刀秦貞元十七年辛巳三月)에 의해 801년(애장왕 2)에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형식화된 옷 주름 표현과 장대해지고 긴장감이 줄어든 신체 표현에서 시대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삼존상은 연대가 확실한 9세기 초 약사삼존불의 조상(彫像)의 예로 중요하며 신라 하대 불상양식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중앙의 약사불입상 및 좌우의 일광보살(日光菩薩)·월광보살(月光菩薩)을 선각(線刻)하였으며, 마애불로서는 드물게 1/4 정도의 자연스런 측면관을 하고 있다. 또 좌우의 보살이 본존의 어깨 정도에 미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가슴 부근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합장한 보살은 자세와 표정이 중앙아시아지방의 벽화와 비슷하다. 한편 전체적으로는 이상주의양식(理想主義樣式)이 남아 있지만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크게 감퇴하여 양식이 변모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약사불이라는 점에서 신라 하대의 혼란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보이며, 조성연대가 확실하여 연구 자료로 중요하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 「朝鮮古蹟調査報告」 1920

文化財管理局 「文化遺蹟總覽」慶尙南道編 1977

咸安郡 「阿羅의 얼과향기」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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