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련(一連)의 칼럼(column)들

2009. 11. 20. 10:12政治

[강천석칼럼] 국회의원 숫자 줄이기 서명 운동 벌여야

"한국은 미국 인구 16%에 국회의원 숫자는 70% 넘어, 국회의원 숫자 줄여야 국회 효율 높아지고 세금 가벼워져"

대한민국 국민의 새해맞이는 우스운 사람들의 우스운 짓거리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과 이슬람 무장 정파(政派) 하마스가 대포와 로켓 포탄을 주고받는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난민(難民)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처량한 신세가 됐다. 이쪽은 '정치 난민' 저쪽은 '전쟁 난민'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도 저쪽은 이스라엘이 식량과 연료 등 생필품이 가자 지구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루 3시간씩 '인도주의적 통로'를 열어주고 하마스 역시 이 시간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는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해머·전기톱·소화전을 들고 설치는 여의도 조폭(組暴)보다는 대포·고사포·로켓포로 무장한 중동 전쟁 꾼이 정치력도 한 수 위란 이야기다.

여의도 난동 사건을 지켜보며 우선 드는 생각은 국회의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많은 국회의원들이 폭력배로 변신하는 순간 국회는 진압 경찰이 폭력시위대한테 몰매 맞는 꼴이 되고 말았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대의(代議)민주주의 강의를 읊조릴 게 아니라 국회의원 숫자 줄일 궁리부터 해야 한다. 헌법 21조는 '국회의원 수는 법률로 정하되 200인 이상으로 한다.'고 돼 있다. 국회의원 수는 2004년 전까지 273명이었던 게 지금은 299명이 됐다. 여야(與野), 도농(都農)을 떠나 끼리끼리 담합(談合)해 공직선거법을 고쳐 26명을 더 늘렸다. 그랬다고 예산 심의가 정밀해져 국민 세금 부담이 줄지도 않았고 법안 심의가 빨라져 국민 불편이 덜어지지도 않았다. 말 좀 하고 힘 좀 쓰는 인간들에게 국회의원 감투가 돌아갈 기회를 늘리고 그들에게 보좌관 비서 운전기사를 붙여주느라 국민 세금 수백억 원을 까먹은 것밖에 없다.

2008년 미국 인구는 3억 명을 약간 넘는다. 그 인구에 하원의원 정원이 435명이다. 1911년 이후 그 숫자 그대로다. 인구는 3배 가까이 늘었는데도 그렇다. 한국은 인구 4800만 명에 국회의원 숫자가 299명이다. 인구는 미국의 16%인데 국회의원은 미국의 70%나 된다. 만약 통일이 돼 북한 인구 2300만 명이 더해져 그만큼 국회의원 숫자를 늘리면 인구 7000만 명의 대한민국이 인구 3억 명의 미국보다 국회의원이 많아진다.

국회의원이 많아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아까운 국민 세금이 줄줄 샌다는 돈 문제만이 아니다. 의사당에 가보면 본회의장이 올림픽 실내체육관만 하다. 그 거대한 홀에 299명의 국회의원이 올망졸망 모여 있으니 토론다운 토론이 될 리가 없다. 정부와 국회, 여(與)와 야(野) 사이의 치밀한 질의응답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국회의 중심(中心)인 본회의장이 시골 웅변 대회장과 한가지다. 자기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곧잘 하면서도 들으나 마나 한 남의 연설을 참고 들어주는 국회의원은 없다. 그래서 대정부 질문 이틀째나 사흘째쯤 되면 본회의장은 탈모증(脫毛症) 환자처럼 여기저기 의석이 뭉텅뭉텅 빠져 흉한 몰골을 드러낸다. 정부와 국회, 여와 야가 얼굴 맞대고 토론이 가능한 수준으로 의원 숫자를 줄여야 한다. 그래야 정부도 함부로 거짓말을 못한다.

우리 국회의원은 말이 국회의원이지 사실은 지방의원이다. 자기 선거구에 다리를 놓고 도로 포장 예산을 끌어들이는 데는 열심이지만 국가 차원에서 국민의 세금 부담이 얼마나 무거워졌는지 그 세금이 제대로 써지는지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200조원이 넘는 예산·결산의 실질 심의를 하루 이틀, 길어야 1주일 만에 뚝딱하고 만다. 지역 주민을 위한 서비스가 좋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미국 사람들은 여권발급이든 아이들 학교 앞 횡단보도 안전성이든 뭔가 문제가 생겼다 하면 국회의원 사무실에 연락하는 것이 상례(常例)다.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이런 덕을 본 국민은 거의 없다. 이럴 바에야 선거구는 크게 넓히고 국회의원 숫자는 대폭 줄여 국회의원다운 국회의원을 뽑는 게 백 번 낫다.

국회의원 숫자는 적을수록 좋다.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려고 헌법을 손질할 필요도 없다. 공직자선거법만 바꾸면 된다. 여의도 난동을 계기로 국회의원들이 멋대로 늘린 국회의원 숫자 줄이기 1천만 명 서명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 50명을 줄이면 국회가 상당히 나아질 것이고, 1백 명을 줄이면 크게 좋아질 것이다. 국민이 국회의원에게 늘 뺨을 맞아야 된다는 법은 없다. 국민도 국회의원의 따귀를 올려붙여야 할 때는 올려붙여야 한다. 그래야 국민을 만만하게 대하지 못한다. 강천석·주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08/2009010801605.html 입력 : 2009.01.08 18:09 / 수정 : 2009.01.12 09:48

[양상훈 칼럼] '난민촌 대한민국'

"세계 유일 광우병 소동에 이제 경제 '도사'까지 출현, 뿌리 없이 흔들리는 사회 내일은 또 무슨 바람 불까"

혼자 무엇에 빠져 일가견을 이루었다면서 자극적이고 과장된 주장을 펴는 사람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나 있다. 미국에도 인터넷에 단정적인 예언, 그럴듯한 음모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그런 예언이나 음모론이 적중해서 화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해도 어느 날의 재미있는 얘기, 반짝 화제로 지나간다. 한 사람의 예언이나 음모론이 주가와 환율까지 움직인 나라는 아마도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인구와 경제 규모가 우리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나라들에도 없는 현상이다.

앞일을 예상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작년 초에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는 미국 주가가 15000을 넘을 것이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오바마가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초반 탈락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틀린 예상들을 모아서 발표한 세계적 경제 전문지(誌) 자신도 작년 유가를 배럴당 200달러로 예상했었다. 2008년 말 유가는 40달러 근처였다. 그래도 예측이 필요한 것은 그 근거가 풍부하고 합리적이면 판단에 참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근거가 없거나 비약과 과장이 심하면 예측이 아니라 예언이다. 예언을 하는 사람은 전문가라고 하지 않고 도사(道士)라고 부른다.

'미네르바'라는 사람이 4년제 대학을 안 나왔고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경제를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가 쓴 글은 예측이 아니라 예언에 가까웠다. 그 예언이 몇 개 맞았다고 그를 '도사'로 떠받드는 사회 현상과, 그 도사의 한마디에 사람들이 주식을 팔고 달러를 사러 우르르 몰려다니는 이상(異常) 집단 심리가 진짜 문제다.

세상이 어지러운데 정부가 신뢰를 주지 못한 탓이 제일 크다. 지역과 이념으로 갈라져서 무조건 반대하거나 열광하는 패거리 심리가 횡행하는 것도 이런 현상의 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너무나 가볍고 깊이가 없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

한국이 헤비급은 못 돼도 미들급 정도는 됐다고 생각해왔다. 엊그제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가 미·일·유럽 차들의 독무대이던 북미 '올해의 차'에 뽑힌 것이나, LG화학이 GM의 전기자동차에 탑재될 배터리 공급자로 단독 선정된 것은 이제 우리 체급이 미들급은 됐다는 또 한 장의 증명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렇게 기계, 전자, 화학 공업에서 정상 근처에까지 오른 나라에서 '경제 족집게 도사'가 출현해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 추종자 무리엔 한 TV 방송과 전직 청와대 경제수석까지 끼어 있었다. 미들급 아니라 플라이급 나라에서도 없는 일이다.

미네르바 소동은 광우병 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다. 미국에 온 이후 미국 사람들도 광우병 걱정을 조금이라도 하는지 그 흔적을 찾아보려 애를 써보았다. 매년 700만 마리가 넘는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먹는 미국 사회에선 '광우병' 걱정은커녕 '광우병'이란 이슈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캐나다에선 작년에 광우병 걸린 소가 발견됐는데도 광우병 소동 비슷한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 사회에서도 비합리적인 일은 일어나지만 그것이 결코 사회의 주도적 흐름은 되지 못한다. 한국에서만 중학생들이 광우병 걸려 죽게 됐다며 울고불고 국민의 3분의 2가 광우병 걱정을 했다. 아무리 TV가 거짓 선동을 했다고 해도 세계 최고의 자동차와 배터리를 만드는 나라에서 어떻게 미신이 과학을 이기고, 도사가 군중을 몰고 다니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또 몇 달도 안 돼 미국 쇠고기의 시장 점유율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한국 사회는 '난민촌'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쓴 책을 보았다. 난민촌은 뿌리 없이 흔들리는 사회다. 이리저리 우르르 몰려다니는 쏠림 현상, 확 달아올랐다가 금방 잊어버리는 냄비 현상, 지역과 같은 원시적인 기준으로 편을 갈라 싸우는 패거리 현상도 난민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난민촌에선 괴질(怪疾)에 대한 자극적 소문이 비정상적으로 증폭되거나 누구를 도사로 떠받드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난민촌에서 중요한 것은 내일은 또 어디서 무슨 바람이 불어와 바람개비를 돌릴 것이냐이다. 그 통에 제네시스와 같은 불씨가 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양상훈 워싱턴 지국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13/2009011301578.html 입력 : 2009.01.13 19:46 / 수정 : 2009.01.13 22:36

[김대중 칼럼] '지도자 복(福)' 없는 국민

"대통령, 내각, 여·야 지도부까지 모조리 무기력·무능·무책임, 이들을 나라의 航路에서 지우고 새 지도자그룹을 만들어내야"

지도자는 위기(危機)에 빛난다고 했던가. 지금 대한민국은 위기다. 세계가 무한경쟁에 나서서 기존의 체제가 흔들리고 있고 국민의 살림살이가 크게 쪼들려서 위기다. 그런데 국민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빛이 보이지 않는다.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내각, 여당과 야당의 지도부, 국회의장, 그리고 심지어 전직 대통령까지 국민의 믿음을 저버리고 있다. 국민을 실망시키며 분열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각기 정치놀음에만 몰두하고 있다.

대통령은 무기력하고 정권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은 매일 교과서 같은 말을 쏟아내지만 알맹이가 없고 매가리가 없다. 쇠고기파동 이후 그는 과단성과 결단력을 잃었고 국민은 그에 대한 신뢰를 잃었으며 야당과 좌파는 그를 깔보기 시작했다. 국회 폭력사태도 거기에 연유한다.

여당의 지도부는 한마디로 지리멸렬 그 자체다. 원외(院外)인 당대표도 무기력해 보인다. 누구도 그에게 무게를 두지 않아 그야말로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처지다. 원내에서 당을 이끈다는 원내대표는 172석의 다수당을 이끌어가는 것이 힘에 겨운 모습이다. 앞으로 나가지도(강행) 못하고 뒤로 물러서지도(협상) 못하는 무능력의 표본이다.

여당 내 최고의 실력자는 자신의 '당내 야당' 역할을 너무 의식했던지 때로 야당에 못지않은 '반대자'로 변신해 그가 여당인지 야당인지 헷갈린 적이 많다. 당이 진통할 때는 딴전 보고 있다가 막판에 나타나 스스로 정치권의 대모(代母)인 양 '재판'을 한다. 야당이 'MB악법'이라며 폭력으로 저지하고 있는 여당의 법안들을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는 법"이라며 단칼에 매도했다.

야당에도 국민에게 희망과 믿음을 주는 지도자는 안 보인다. 야당의 굴레를 뛰어넘어 무엇이 국민과 나라에 이로운 것인지의 차원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정치인은 찾아볼 수 없다. 국회가 속절없이 파행으로 가고 야당의원들의 폭력으로 민생정치가 볼모 잡혀 있을 때 야당의 지도부는 오로지 'MB 죽이기'에만 몰두했고 승부에만 집착했다. 파국이 끝났을 때 국회에서 '승리'를 자축하며 기념촬영을 하는 대목에서 국민은 야당의 존재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도자 없는 '도토리 야당'으로 4년 후를 기약할 수는 없다.

온 나라가 자기들로 인해 화가 나고 고통을 당했는데 여야의 원내대표들은 어제 한 TV프로에 나와 웃고 떠들고 노래하며 서로 치켜세우는 추태를 부렸다. 온 나라가 국회의 무능과 국회의원들의 폭력행위로 울고 싶은 심경인데 빨간 셔츠에 넥타이를 풀고 어깨동무하는 저들은 국민에게 마치 "너희들은 짖어라. 그래도 우리는 간다."는 욕설을 퍼부은 꼴이다. 저들의 뻔뻔함에 기가 막히다가도, 모자라서 그랬겠지 하는 측은함마저 생긴다.

우리는 이처럼 지도자 복(福) 없는 국민인가? 세상이 어렵고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믿고 의지할 지도자가 절실한 법이다. 그런데 믿고 의지하기는커녕 국민을 실망시키고 고통을 안겨주는 정치인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세계는 더욱 치열한 생존의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고 적과 동지의 벽은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지도자가 더더욱 절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 기회일 수가 있다. 기존의 정치지도자들을 우리 미래의 항로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새로운 지도자 또는 지도자그룹을 떠올려야 한다. 미국이 오바마를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어느 면에서 지도자는 국민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위기가 그 기회일 수가 있다. '피플스 파워(people's power)'는 단지 4, 5년에 한 번씩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돼먹지 않은 언필칭 '지도자'들에게 관념적으로, 맹목적으로 이끌려 다니지 말고 새로운 지도자를 키워내는 일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야 기득권자도 정신 차릴는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인들의 전용 놀이터인 국회부터 손보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국회를 개선하는 일을 국회를 개판 친 의원들 손에 맡겨서는 될 일이 하나도 없다. 시민단체들이 서명하거나 청원하는 과정을 통해 국회를 압박해서 타율적으로 정치를 고쳐나가지 않는 한, 국회의 개혁과 정치인의 자질개선은 백년하청이다.

대통령과 현 정권도 여기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어차피 4년 남았다. 지방 선거를 감안하면 일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 없다. 언제까지 무기력한 정부에 머물 것인가. 정치를 개선하는 파격적 과제를 던져야 한다. 발상을 전환해서 '경제' 뒤에만 숨지 말고 일을 만들어내는 '정치'에 나서야 한다. 김대중·고문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11/2009011100795.html 입력 : 2009.01.11 22:21 / 수정 : 2009.01.14 08:39

[기고] 김대중 고문께 전합니다.

안녕하신지요? 항상 고심과 노고가 많으시겠습니다. 김고문의 고심(苦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고심일 것입니다.

2009년 초를 전후하여 대한민국 국회가 연출한 야만적 행태가 국민들로 하여금 실망과 분노를 넘어 깊은 좌절감을 갖게 함으로써 연일 언론의 비판 강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가고 있는 와중에 1월 12일자 ‘지도자 복 없는 국민’이라는 제목의 김고문 칼럼을 읽고, 생각나는 몇 가지 견해를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1월 9일자 강천석 칼럼 ‘국회의원 숫자 줄이기 서명운동을 벌여야’에서는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고 선거구를 확대하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1월 12일자 중앙일보 사설에서는 ‘제도와 의식을 함께 바꿔야’ 한다는 전제 하에 국회의장 임기 4년, 상임위별 수시국정감사, 예산결산위원회의 상임위화, 국회폭력방지특별법 제정과 같은 제도적 개선과 의식개혁운동의 필요성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김고문께서는 바람직한 새로운 지도자, 지도자 그룹을 국민이 만들어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회를 손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면서, 시민청원운동으로 국회를 압박하여 국회를 손봐야 한다는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소환제’ 논의가 다양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 입장에서 이들 논의와 관련하여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유감스럽게도 본질적 문제 지적이나 해결방안을 접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헌법, 현재의 정당정치제도와 선거제도, 지금과 같은 국회운영제도를 유지하거나 방치하는 한 국민이 바라는 바람직한 정치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일 것이며, 여의도는 그때그때 양상만 달리할 뿐 해마다 매번 똑같은 정치적 격투기 경쟁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국가는 결코 현재 수준의 문턱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입니다.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고 선거구를 확대한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여의도 정치가 개선될 수 있을까요? 국회의장 임기를 4년으로 연장하고 예결특위를 예결상임위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세입세출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방대한 세입세출 관계 작업을 해낼 수 있는 다수의 전문 인력과, 이들의 활동을 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기구를 조치해주지 않는 한 실효를 거둘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김고문의 주문처럼 시민청원운동으로 국회를 압박해서 국회를 손봐야 한다는 제안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만(정당이 아닌 국민이 개혁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국회개혁의 본질적 문제 지적이 있을 때 비로소 실질적인 설득력을 지닐 수 있지 않을는지요?

제 자신의 국회의원 활동 경험과 한국 정당정치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한국 국회는 다음과 같은 곳이라고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지만, 다시 보면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곳.” 이러한 현실에 대한 책임소재는 정치인들이나 역대 정권에 있다기보다 관계되는 ‘제도’에 있다고 보입니다. 헌법, 정당정치제도, 선거제도, 국회운영제도상 국회는 공전하거나 충돌하거나 일방주의로 흐르기 쉽게 되어 있고 가장 기본적인 기능과 책무를 다 할 수 없게 되어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대통령제 하에서 삼권분립 원칙상 입법권, 세입세출권, 감사권은 입법부의 고유권한이자 배타적 권한임에도 우리 헌법에는 행정부(대통령) 우위 및 주도로 못 박혀 있습니다. 입법의 거의 80%가 행정부 제안 법안들입니다. 대통령은 법제처를 통하여 입법을 위한 전문적 보좌를 받고 있고 중앙부처의 모든 공무원들이 입법전문요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입법부는 국회의원을 직접 보좌하는 몇 사람, 국회사무처의 제한된 전문요원이 있으나 전문성에 있어서 행정부에 비하면 제로(0)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제 하에서 입법권 행사는 원리원칙상 잘못된 것으로 이는 필연적으로 입법부를 약화시키거나 행정부 영향 하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헌정사 60년을 통한 상징적 모순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입세출권 행사 역시 마찬가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정부가 예산을 편성해서 입법부에 제출하면 1년 한시적 기구인 국회 예결위가 국회사무처의 제한된 전문요원들의 보좌를 받아 회기 내 처리하도록 되어 있으나, 매번 뜨거운 정치적 쟁점이 발생하게 되면 예결위장은 예산심의가 아니라 정치적 게임장으로 변해서 헌법에 규정된 법정기일을 상습적으로 넘기고 있습니다. 국회는 정부안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거나 변경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민감하다는 어떤 항목에서는 세목을 확인할 수도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DJ가 김정일에게 국민 몰래 5억불에 가까운 거금을 거래해도 알 길이 없었고, YS가 안기부 금고를 이용하여 1000억 원에 가까운 선거자금을 거래해도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민주공화국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현상들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국회의원 숫자나 자질, 또는 국회의장임기 때문일까요? 입법부의 고유권한이 헌법상 침해받고 있고, 기구와 기능이 제대로 갖추어지거나 작동할 수 없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산집행결과에 대한 감사는 대통령 통제를 받고 있는 감사원의 주된 권한으로 되어있습니다. 일반기업도 사외감사를 두고 있습니다. 하물며 자본주의 국가에서 국가 예산집행감사를 행정부가 주관한다는 것은 민주공화국 체제의 기본철학과 원칙을 전적으로 무시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일반국민들과 다수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국회의원들이 자질을 갖추고 잘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예결위에서 심사하고 상임위에서 감사하고 또 국정감사까지 포함하면 제도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예결위나 상위 감사는 시간과 전문성과 인력 면에서 형식적일 수밖에 없는 정치게임의 장이며, 국정감사는 그야말로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정치적 낭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국정감사는 그야말로 국회의원들이 허장성세로 위력을 과시할 뿐 국익 면에서는 구체적 결실을 가져오지 못하는 연중행사입니다. 매년 9월 정기국회가 개시되면 여야 합의 하에 결정한 수백 개에 달하는 국가기관을 감사하게 되어있으나, 정치이슈로 인해 여야 격돌이 발생하면 감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가 일정에 쫓겨 감사기간과 대상을 축소해서 형식적으로 해치웁니다. 당연히 감사결과는 빈약하고 중앙부처를 비롯한 피감기관들은 국정감사 때만 되면 시간적, 물적, 인적 낭비를 감수하면서 고문을 당하듯 시달려야 합니다.

헌정사 60년을 뒤돌아보면 9번에 걸친 개헌이 있었고, 정당관계법, 선거관계법, 국회관계법들이 무수히 개정되거나 손질되어왔지만, 정치 특히, 여의도 정치는 개선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한 감이 적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선거 때마다 40%~50%에 가깝게 물갈이 되고, 학계와 언론에서 연일 비판을 가하고, 시민단체들이 비명에 가까운 매도를 하고, 각계 원로들이 애걸하듯 충고하고, 국민들이 절규하듯 호소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곳이 여의도 정치 현장입니다.

모든 현상에 원인이 작용하고 있듯이 정치현상에도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상황과 정치인들의 행태는 기본이 도외시되고 기초가 취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양상훈 워싱턴 지국장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난민촌’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어느 책자의 내용을 소개하는 가운데 “난민촌은 뿌리 없이 흔들리는 사회이다”라고 표현하면서 쏠림현상, 냄비현상, 패거리 현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정치적 지각변동이 빈번한 사회에서 그 여진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기본과 기초가 소홀히 다뤄지고 취약한 사회에서는 가치와 원칙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연고주의와 한때의 개인적 이해관계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가 하면, 심지어 미신이 끼어들기도 하는 현상을 목도하게 됩니다. 기본을 갖추고 기초를 다지는 일만큼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달리 있겠습니까. 헌법을 손질하고 정당정치제도와 선거제도, 의회운영제도를 고치는 일이 바로 그러한 일일 것입니다. 이 노력이 우선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시지푸스의 노력을 끝없이 반복하는 우를 범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민주공화국체제와 대통령제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친미나 반미에 관계없이 미국정치제도를 참고로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제는 미국인들이 창안해낸 제도로서 건국 이래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권력독점과 남용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하여 삼권분립 원칙을 제도화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입법권, 세입세출권, 감사권은 입법부의 고유권한이자 배타적 권한입니다. 이에 비하여 대한민국은 행정부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민주공화국 체제는 자유주의 혁명(영국의 명예혁명, 불란서 대혁명, 미국혁명)의 산물이며, 이들 혁명의 근본원인은 세금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한다면 자유주의 혁명들은 예외 없이 국가의 세입세출권 행사 주도권을 둘러싸고 전개된 정치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정부에서 제출된 예산안을 국회가 심의 통과시키지만, 미국은 의회가 주도적으로 예산법안을 마련하여 법으로 통과시킵니다. 예산안의 집행에서 과오가 저질러지면 행정적 조치로서 넘어갈 수도 있지만, 예산법을 어기게 되면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할 만큼 ‘안(案)’과 ‘법(法)’의 차이는 큽니다. 이것이 정치선진국 미국정치와 정치후진국 한국정치 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정치 현실은 골수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깊이 병들어있는 환자 그 자체와도 같아서 어떠한 표피 수술로서도 치유 불가능한 상태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집도(執刀)를 정치인들에게 맡긴다는 것은 환자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고 한다면, 지나친 기우일까요? 남아있는 오직 하나의 길, 최선의 길은 국민이 개헌과 정당정치 및 선거제도 개혁과 의회운영제도를 주도적으로 개혁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좋은 제도는 나쁜 사람도 좋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쁜 제도는 좋은 사람도 나쁘게 만듭니다. 좋은 제도가 오늘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실효를 거두기에는 수세대, 수세기가 소요됩니다. 그 긴 세월의 손을 거치면서 개인의 습관이 되고 사회의 관습이 되고 국민의 문화가 될 때 비로소 제도적 개혁은 성공을 거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쁜 제도를 방치하게 되면 그 사회는 악습과 폐습과 부정의가 횡행하여 파국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제도를 갖추는 일을 미뤄서는 안 됩니다. 현재의 제도가 나쁘다면 지체 없이 고치거나 바꿔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지금 우리는 나쁜 제도들과 불완전한 헌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문제해결을 위한 해답은 자명합니다. 다만 언제, 누구의 손으로 해결할 것인가 입니다. 지금 즉시 국민의 손으로 해결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정당과 정치인들에게는 이미 너무나 오랜 시간과 수많은 기회가 주어졌으나 국민이 위임한 책무를 방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결하려는 의지와 열정마저 메말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14/2009011401470.html 허화평(현대사회연구소 소장, 전 국회의원) 입력 : 2009.01.1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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