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墨香)

2010. 2. 1. 17:17人文

[조용헌 살롱] 묵향(墨香)

나는 전생에도 '먹물업'에 종사했었나 보다. 전생사가 어땠는지 알고 싶으면 금생 사는 모습을 보라고 했는데, 현생에 이렇게 칼럼을 쓰며 사는 인생도 결국 먹물업 아닌가! 그래서 그런 건지 요즘에는 이상하게도 묵향(墨香)이 좋아진다.

붓글씨는 못 쓰지만 심심하면 벼루에다 먹을 갈아 놓고 묵향을 맡아보곤 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샤넬 5' 향기보다 더 깊이가 있다. 30대 시절에는 여행하다가 비행기 안에서 풍기는 서양인들의 향수가 세련되게 느껴졌지만,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우리의 먹(墨)향이 그리워진다. 먹물에다가 코를 갖다 대면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머릿속에 콩알처럼 박혀 있는 생존의 번뇌를 녹여주는 향기가 맡아진다. 먹향을 맡다 보면 마치 천 년 전 조상님들의 서실(書室)에 들어가 그 조상님들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먹을 좋아하다 보니까 서예가를 만날 때마다 어떤 먹을 쓰고 있는지 물어본다. 작년에 광주 운암동에서 서실을 운영하고 있는 일속(一粟) 오명섭(58) 선생에게 놀러갔다가 우연히 고매원(古梅園)이라는 일본 먹을 알게 되었다. 일속은 옥동 이서,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로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서맥(書脈)을 계승한 서예가이다.

일속에 의하면 고매원은 추사 선생도 그 먹의 색을 좋아했다는 명품 먹이었다. 42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 '고매원'은 지금도 14대 후손이 만들고 있다. 그 먹빛이 검고 투명하면서도 향기도 은은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고매원을 제조할 때 사향(麝香)을 넣었다고 한다. 고매원 상품 먹 한 개는 우리 돈 30만원이 넘는다. 고급 먹은 사향뿐만 아니라 용뇌향(龍腦香)도 사용하였다. 두 향 모두 정신을 맑게 해주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작용을 하는 향이다.

한국에는 어떤 먹이 있었는가. '연운(淵雲)'과 '만수무강(萬壽無疆)'이 있었다. 80년대 작고한 묵장(墨匠) 유석근 옹이 만들었던 먹이다. 당대의 서예가였던 여초 김응현도 '연운'을 즐겨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맑고 은은한 먹이었기 때문이다. '한 일도 없이 세월만 보내버렸다'는 상념이 들 때마다, 벼루에다 물을 붓고 천천히 먹을 갈아 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31/2010013100838.html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입력 : 2010.01.31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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