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8. 18:31ㆍ文化
아는가, 만년필 쓰는 기쁨성공·존경 담은 액세서리, 만년필
“먼 길을 떠나는 말에게 물을 먹이듯 일을 시작하려고 만년필에 잉크를 가득 넣을 때. 그 원기둥의 혈관에 차오르는 해갈의 신선함. 그것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최명희 ‘만년필을 쓰는 기쁨’) 1998년 타계한 작가 최명희는 만년필로 소설을 썼습니다. 10권의 대하소설 『혼불』도 ‘삭 삭 삭’ 소리를 내며 만년필로 써내려 갔습니다. 잉크를 채우며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고, 금촉의 광채를 종이에 새기면서 의지를 벼려 17년간 쉼 없이 원고지를 채웠을 겁니다. 아직은 굳게 먹은 마음이 무르지 않은 때, 새 다이어리에 만년필로 한 자 한 자 새기면서 한 해의 설렘을 맞는 건 어떨까요. 샘처럼 잉크가 마르지 않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fountain pen) 그대로, 새해에 샘솟은 의지가 오래도록 바닥을 드러내지 않도록 말입니다.
현대사는 만년필이 써내려갔다. 1927년 세계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는 워터맨으로 비행 기록을 남겼다. 45년 제2차 세계대전 휴전 협정은 파카51로, 90년 동·서독 통일조약은 몽블랑 마이스터튁 149로 서명됐다. 2000년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권력을 넘기면서 자신의 몬테그라파 만년필을 물려줬다. 모두 지나간 만년필의 전성기 얘기인가 싶지만, 역사의 중요 대목에 등장한 만년필의 가치는 오늘날 더 귀하게 여겨진다. 품격, 약속, 진정성과 존경을 표현하는데 키보드를 두드릴 순 없는 노릇이니까.
여기에 ‘성공한 남자의 액세서리’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져 만년필을 찾는 사람은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좋은 의미는 다 가진 덕에 새해엔 선물용으로도 인기다. 20여 개 만년필 브랜드가 입점한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전완식 점장은 “부드러운 필기감 때문에 사용하는 분, 명예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분, 애장품으로 소장하는 분 등 사용층이 다양해졌다”고 말했다. “저가가 많이 출시돼 구매 부담을 줄인 것도 인기 요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성공·명예·신뢰·진정성의 상징
만년필을 선택할 땐 어떤 용도로 쓸 건지 고려하는 게 우선이다. 가끔 사용하는 서명용인지, 늘 두고 쓸 필기용인지다. 대부분의 브랜드가 중저가 제품과 고급 라인을 고루 갖추고 있는데, 필기용으로 평소 사용한다면 몇 만 원대 제품도 충분하다. ‘만년필=검은색’이란 공식을 깨고 컬러풀한 만년필을 선보인 라미, 독일 학생들이 많이 쓴다는 펠리컨, 연필로 대표되는 필기구 회사 파버카스텔 등이 있다. 모두 독일 브랜드다. 가격 차이는 소재에 따라 좌우된다. 가장 중요한 건 펜촉이다. 스테인리스 스틸부터 금도금, 14K, 18K, 백금 등 다양하다. 당연히 소재가 좋을수록 고급이지만, 100만원짜리 만년필의 필기감이 20만 원짜리보다 5배 만큼 좋지는 않다. 오히려 실속형으로는 필압이 강하고 빠른 필기에도 적합한 스테인리스 스틸을 많이 쓴다. 고급 소재 펜촉은 필압이 약해 섬세한 필기에 적합하다.‘남자의 럭셔리’라는 컨셉트나 소장용으로 구매하는 경우도 적잖은데, 이 경우 한정판을 고려해 볼 만하다.
한정판은 만년필 업계가 생존의 돌파구로 찾은 방편이었다. 기능보다는 예술성, 필기구보다는 소장품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한정판 시대는 몽블랑이 열었다. 65년 파카가 최초의 한정판을 만들긴 했다. 1715년 침몰한 보물선의 은화를 녹여 만든 4821자루의 만년필을 75달러에 판 ‘스페인 보물선’ 제품이다. 이후에도 드문드문 한정판은 출시됐지만 선풍을 일으킨 건 몽블랑이다. 몽블랑은 일련번호를 새긴 ‘작가 에디션(writers edition)’ ‘문화예술 후원자 에디션(patron of art edition)’ 등을 제작한다.
▲ 1. S.T.듀퐁 리베르떼 컬렉션. 만년필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출시한 여성용 라인. 검은색과 흰색 두 가지 모델이 있다. 2. 몬테그라파소피아 골드 한정판. 캡에는 로제타석 이미지와 이집트 문명의 상징이 새겨져 있다. 몸체에는 라파엘의 프레스코화 39아테네 학당’의 세부가 그려져 있다. 3 워터맨 엑스퍼트 뉴제너레이션. 1992년 첫 선을 보인 엑스퍼트 컬렉션의 2011년 새 모델. 총 9개 컬러로 출시됐고 사진은 회갈색 제품이다. 4 파카 듀오폴드 인터내셔널 플래티넘. 1912년 탄생한 듀오폴드는 파카의 대표모델이다. 펜촉이 플래티넘과 18K금, 투톤으로 이뤄졌다. 5 워터맨 에드슨 다이아몬드 블랙. 브랜드를 설립한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을 기리기 위해 만든 에드슨 시리즈의 네 번째 모델. 캡은 플래티넘 도금, 18K 화이트골드 닙과 보디. <사진 포토그래퍼 김태선(어반북스), 촬영 협조 몽블랑>
작가 에디션 1호는 헤밍웨이였다. 2만 개가 제작됐는데, 헤밍웨이의 서명이 각인돼 있다. 시리즈의 첫 제품이라는 점 때문에 인기가 많다. 현재 500만 원대에 거래된다. 2호는 애거사 크리스티였다. 은장 제품이 2만 3000개, 버메일(순은에 금도금) 제품이 4810개 발매됐다. 뚜껑의 클립이 뱀이 똬리를 튼 모양인데 독특한 디자인 덕에 많이 만들어졌는데도 비싸게 거래된다.
반대로 2001년 나온 찰스 디킨스는 3~4년간 시세가 제자리였다. 순은으로 만들어진 뚜껑이 몸체에 비해 너무 무거워 사용하기 불편했기 때문이다.
1996년 출시된 알렉산더 뒤마는 ‘사고’ 덕에 귀해졌다. 『삼총사』를 쓴 아버지 뒤마를 기리기 위한 만년필에 『춘희』를 쓴 아들 뒤마의 서명이 새겨진 것이다. 몽블랑은 당장 리콜하고 서명을 바로잡은 새 제품을 출시했다. 수집가들은 ‘right signature’와 ‘wrong signature’로 둘을 구분하는데, 틀린 쪽의 시세가 높다. 둘 다 소장할 때 가치는 최고가 된다. 이외에도 오스카 와일드,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세르반테스, 버지니아 울프 등이 등장했고 작가와 펜이라는 조합은 작가 시리즈의 인기를 높였다.
S.T. 듀퐁도 매년 1~2회 한정판을 내놓는다. 세계적인 건축물을 테마로 한 ‘투르네르 컬렉션’을 지난해에도 출시했다. 파리의 오페라 극장, 워싱턴 국회의사당 등을 형상화한 펜은 각각 30자루 제작됐다. 몬테그라파도 1992년 설립 80주년을 기념하는 첫 한정판을 출시한 이래 해마다 다양한 인물과 이벤트를 기념하는 한정판을 선보인다. 스털링실버, 18k 골드 소재에 다이아몬드, 루비 등 보석을 박은 화려함이 몬테그라파 한정판의 특징이다. 2010년엔 파울로 코엘료에게 바치는 한정판을 내놨다.
관리하고 길들여야 만년을 쓰는 펜
만년필은 관리하고 길들이기에 따라 이름처럼 만년을 쓸 수도, 금방 못 쓰게 될 수도 있다. 기본은 세척이다. 한 달에 1~2회 정도 미지근한 물로 세척한다. 컨버터나 카트리지를 분리하고 촉과 몸통을 5분 정도 물에 담그고,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잉크공급장치에 물을 채웠다 빼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수건으로 닦는다. 펜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을 땐 잉크나 카트리지를 제거하는 게 좋다. 또 잉크가 증발하지 않도록 뚜껑을 닫는다. 펜촉이 위로 가게 보관해야 하는데, 펜을 눕히거나 펜촉이 아래로 가면 잉크가 새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슈트 재킷 윗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서명하는 모습이 멋져보일지 모르지만, 바람직한 방식은 아니다. 주머니에 꽂았을 때 뚜껑이 잘못 열리면 옷을 망칠 뿐만 아니라 만년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따로 펜 케이스를 장만해 넣어 다니는 것이 좋다. 비행기에 들고 탄다면 잉크를 가득 채우거나 완전히 비워야 한다. 기압 차 탓에 잉크가 샐 수 있다.
만년필에 관한 사소한 궁금증
어떤 브랜드의 얼마짜리 제품인지,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이런 궁금증은 카탈로그가 해결해 준다. 하지만 만년필에 관한 사소하고도 애매한 질문은 어디다 물어야 할까. 여기 속 시원한 답이 있다.
Q : 만년필을 제대로 쥐는 법이 있나.
A : 사실 어떻게 쥐어도, 어느 각도로 써도 편하고 글씨가 잘 써진다면 상관은 없다. 다만 어깨부터 손, 손가락까지 힘을 빼고 가볍게 쥐는 것이 기본이다. 힘이 들어가면 촉에 무리가 가고 쉽게 마모된다. 필기 각도를 55도 정도로 유지하고 촉의 양면이 균등하게 종이에 닿는 것이 좋다.
Q : 돌려 빼는 뚜껑과 잡아 뽑는 뚜껑이 있다. 차이는 뭔가.
A : 각각 트위스트 캡과 푸시 캡이라고 부른다. 뚜껑을 여닫는 방식은 본체의 재질에 따라 달라진다. 충격에 강한 재질이라면 푸시 캡으로, 충격에 약해서 잘 깨지거나 잉크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재질이라면 트위스트 캡을 사용한다.
Q : 만년필을 사용할 때 뚜껑은 뒤에 꽂나.
A : 일본의 만년필 회사 플래티넘이 만든 지침서에 따르면 서양에선 뚜껑을 한 손에 들거나 책상 위에 세워놓고 글씨를 쓴다. 뒤에 뚜껑을 꽂으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뚜껑이 무거울 경우 무게가 쏠려 필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또 배럴에 스크래치가 생길 수도 있다. 일부 미니 만년필은 뚜껑을 꽂아야 균형이 맞지만, 대부분은 펜 자체로 균형이 맞도록 설계됐기 때문에 뚜껑을 꽂지 않는 것이 만년필 보호에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답은 없다. 오히려 뚜껑을 몸체에 끼워야 균형이 좋아진다고도 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등 저명인사들이 서명하는 사진을 봐도 뚜껑을 뒤에 꽂아 쓰는 경우가 많다.
Q : ‘만년필 매너’가 따로 있나.
A : 다른 사람의 펜을 함부로 쓰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귀한 제품일 수도 있고, 길들여진 펜의 흐름이 나 때문에 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사용할 땐 항상 공손하게 받고, 뚜껑을 열어봐도 되는지,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물은 다음에 쓰도록 한다.
Q : 모조리 외국산이다. 국산 만년필은 없나.
A : 국산 만년필 브랜드로 자바·아피스 등이 있다. 1956년 만년필 조립생산을 시작한 아피스는 순수 국내 기술로 제품을 만든다. 1997년 설립된 자바는 펜촉을 독일의 슈미트사에서 수입한다. 둘 다 2만 원대부터 제품이 나온다. 국산은 저가 제품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가격 대비 성능은 좋다는 평도 있다. 아피스에서는 칠기 수공예로 만든 45만 원짜리 만년필도 나온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4390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제252호| 입력 : 201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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