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28. 13:12ㆍ徒步
차 례
1. 한민족 천년의 옛길, 1000리 새 길로 부활
2.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 프롤로그: 한민족의 옛길
3.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1> 부산 옛길 탐사: 동래부사 왜관 행찻길(상)
4. 동래부사 왜관 행찻길 찾았다
5.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2> 부산 옛길 탐사: 동래부사 왜관 행찻길(하)
6.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3> 부산 옛길 탐사: 좌수영 길(상)
7.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4> 부산 옛길 탐사: 좌수영 길(하)
8.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5> 부산 옛길 탐사: 기장 옛길
9.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6> 부산 옛길 탐사: 다대진 가는 길
10.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1> 한양천리: 황산도를 찾아서
11.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2> 한양천리: 황산도의 주변 샛길들
12.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3> 한양천리: 양산길과 황산잔도
13.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4> 한양천리: 토교에서 작원관까지
14. 영남대로 작원잔도 찾았다
15.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5> 한양천리: 삼랑진~밀양읍성 길
16.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6> 한양천리: 밀양 상동~청도역
17.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7> 한양천리: 청도~대구 우록리
18.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8> 한양천리: 대구 옛길
19.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9> 한양천리: 칠곡~구미길
20.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10> 한양천리: 상주 옛길
22.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11> 한양천리: 문경길
22.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12> 한양천리: 충주~용인~서울길
23.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3> 에필로그
1. 한민족 천년의 옛길, 1000리 새 길로 부활
일제가 망가뜨린 간선도로, 역사에 문화 버무려 재조명
영남대로, 한민족 천년의 길이 부활한다. 서울에서 부산(동래)까지 천 리(약 380㎞), 한민족사의 영욕이 스민 궤적을 따라 지방자치단체들이 앞 다퉈 영남대로 옛길 복원에 나서고 있다. 시대적 걷기 트렌드에 맞춰 영남대로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다. 우리 옛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된 지 근 100년 만의 일이다.
부산 동래구는 동래읍성 복원을 통한 영남대로(황산도) 찾기에 나섰고, 양산시는 물금면의 황산진지(黃山津祉) 역사공원 조성과 함께 물금~원동 간 낙동강변의 경부선 철길 옆에 '황산강 베랑길'을 조성한다. 밀양시는 지난해 4월 밀양관아(구 내일동 사무소)를 복원한 데 이어 삼랑진 검세리에서 발굴된 처자교 유적을 영남대로와 연계, 관광자원화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다.
경북 청도군은 2006년부터 청도읍성을 비롯, 영남대로 유적 복원에 나섰으며, 대구시 중구는 대구읍성 성밖 길의 골목투어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구미시는 해평면 일대에 '테마가 있는 서울나들이길'을 조성, 교육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영남대로의 옛길 원형이 잘 남아있는 문경새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념물유적회협의회(ICOMOS)는 영남대로 중 문화재 가치가 있는 문경새재 구간에 대한 조사작업을 진행 중이다. 문경시는 문경새재와 옛길박물관 등의 길 콘텐츠를 앞세워 연간 100만 명을 불러 모으고 있다.
하지만 영남대로 전체에 대한 노선 복원이나 문화적 이해 없이 지자체들이 단편적이고 즉흥적으로 옛길을 복원하려 한다는 비판도 따른다. 문화사학자인 신정일(57) 우리땅걷기 대표는 "영남대로 관련 지자체들이 연대해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고 전체 노선을 워킹코스로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남대로는 동래부(부산포)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영남대로' 연구의 권위자인 최영준(69) 고려대 명예교수는 "영남대로의 기·종점을 흔히 동래읍성으로 보지만, 부산포(부산진성)까지 확장해야 일본과의 관계 등 영남대로의 온전한 역할이 규명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확장 개념을 적용하면, 조선 후기 동래부사의 왜관 행차길이나 좌수영길 등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이 옛길들은 그대로 부산의 지난 역사다.
국제신문은 2012년 신년기획으로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시리즈를 시작한다. KTX가 3시간 만에 주파하는 서울~부산을 약 보름간 타박타박 걸어서 간 선조들의 봇짐 속 꿈을 헤아리면서 광속의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느림의 가치, 역사 속 길의 참 의미를 찾아볼 참이다.
출처: 국제신문 1면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20104.22001213810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2012-01-03 21:42:50
한민족 천년의 옛길, 1000리 새길로 부활
- 부산 좌수영길·왜관길 포함, 워킹코스 등 통합개발 절실 영남대로, 한민족 천년의 길이 부활한다. 서울에서 부산(동래)까지 천 리(약 380㎞), 한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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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 프롤로그: 한민족의 옛길
부산~서울 오가던 가장 빠른 길… 걷기 열풍 타고 재조명
- 남대문에서 동래까지 총 380㎞에 이르는 길
- 경부고속道·철도보다 거리 70~80㎞ 더 짧아
- 과것길·조공품 운반로, 조선통신사 이동로 등 우리 정치·생활사 축도
- 일제, 철도와 신작로로 역사적 의미 덮어버려
- 지자체들 설익은 복원, 큰 그림 제대로 못 그려
- 옛길에 스민 의미 살려 국가차원 계획 세워야
백두대간의 큰 고개인 문경새재. 이곳의 옛길박물관 뜰에는 '기리고차'라는 특이한 수레가 전시돼 있다. 뭐하는 수레일까? '세종실록'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세종 23년(1441년) 3월 17일, 왕과 왕비가 온수현(온양)으로 수레를 타고 가니, 왕세자와 종친, 문무 군신 50여 명이 호위하였다. 임금이 사냥을 구경했다. 이 행차에 처음 기리고(記里鼓)를 사용하니, 수레가 1리를 가게 되면 목인(木人)이 스스로 북을 쳤다.'
기리고차(記里鼓車)는 조선시대의 반자동 거리측정장치였다. 일정한 거리를 가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준다. 세종 때 처음 사용했다고 하니 이후에 등장하는 지역 간의 이수(里數) 표시는 물론 이정, 노폭, 노표 등이 꽤 과학적으로 산출됐음을 알 수 있다.
■ 한양~동래 간 960리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때 한양(서울)~동래(부산)를 오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한양의 남대문에서 출발해 문경새재를 넘는 중로(中路)를 택하면, 용인~안성~충주~문경~상주~칠곡~대구~청도~밀양~양산~동래까지 걸어서 15~16일이 걸렸다. 총연장은 960리(약 380㎞). 지금의 경부 국도나 경부선 철도보다 거리상으로 70~80㎞가 짧았다는 점에서, 조상들의 지리적 혜안을 엿본다.
도로의 폭은 넓은 곳이 10m, 좁은 곳이 3m 정도였다. 대부분 수레와 사인교가 지나갈 수 있었으나, 문경의 관갑천잔도, 삼랑진의 작천잔도, 물금의 황산잔도 같은 벼랑길은 디딤판을 밟고 가까스로 지날 수 있었다.
30리마다 역(驛)을 두었다. 장국밥 한 그릇 먹고 짚신 신은 길손이 한 번 쉴 때쯤을 표시하는 '일식(一息)' 또는 '참(站)'의 거리가 30리였다. '한참 간다'는 거리 개념도 여기서 나왔다. 지역별로 10여 개의 역을 한데 묶어 종육품 관직의 찰방(察訪)이 관리했으며, 역의 기능을 보조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관(館)과 원(院)이 설치됐고, 서민들의 주막도 들어섰다.
■ 한민족사의 축도
영남대로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길이 아니었다. 이 길은 구석기 신석기 때부터 한반도에서 살다간 선인들의 자취와 궤적의 총합이었다. 고려시대의 우역제도를 바탕으로 조선 초기에 확립된 역제 속에 '영남대로'라는 공로가 자리한다. 이 길을 오간 사람이 숫제 얼마일 텐가. 과것길의 선비부터 등짐 봇짐을 맨 장꾼들, 나들이 길의 민초들, 왕명을 수행하는 파발들과 공문서의 수발, 세금으로 거두는 세미, 조공품 운반, 관리들의 여행도 모두 이 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1592년 임진년엔 수십만의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 영남대로를 따라 진공해왔고, 선린우호를 내세운 통신사들은 이 길을 따라 부산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영남대로가 잘 관리, 운영된 시기는 사람과 화물의 이동이 활발하여 사회가 발전했고, 영남대로가 황폐화되었던 시기는 우리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때와 대체로 일치한다. 영남대로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정치·생활사의 축도(縮圖)였다.
이 길의 의미와 가치를 읽고 정리하기도 전에, 이 땅을 강점한 일제는 철도와 신작로를 앞세워 영남대로를 철저하게 유린했다. 침략을 노린 문화말살이었다. 그후 한국전쟁과 경제개발 연대를 거치면서 영남대로는 기억 저편으로 멀어졌다.
길 걷기 열풍이 옛길을 다시 불러낸 것은 시대적 역설이다. 옛길이 관광자원으로 둔갑하면서 지자체들은 길 스토리텔링에 매달리고 있다. 영남대로 도보 답사기가 책으로 묶이는가 하면, 지자체 또는 걷기단체의 종주 탐사 프로그램도 생겼다. 한국청소년탐험연맹은 오는 6~19일 13박 14일동안 전국의 초중고교생 70명을 모아 '걸어서 가는 한양옛길- 영남대로 종주 탐사'에 나선다. 지난 2001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32차 탐사다.
2007년 말 '영남대로-부산에서 서울까지 옛길을 걷다'라는 책을 펴낸 신정일 (사)우리땅걷기 대표는 올 상반기에 도반들과 함께 2차 영남대로 종주 답사를 할 계획이다.
■ 옛 노선 복원 가능할까
지난달 28일 오후 문경새재 옛길박물관. 이곳에서 일하는 안태현(43) 학예연구사는 일제 강점기 때 작성된 지적도 꾸러미를 보여주며 "옛길의 원형이 이 속에 있다."며 "이것을 활용하면 영남대로 전체 노선 복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준 지적도는 1920년 전후 제작된 축적 1200대 1 지도로, '도(道)' '구(溝)' 식으로 옛길 표시가 뚜렷했다. 옛길 옆으로는 막 신작로가 뚫리고 있었다.
안 학예사는 "4~5년 전부터 문경지역 25㎞ 구간에 해당하는 지적도(200여 장)를 모두 떼 오늘날의 지번과 지도를 비교하고 문헌과 사진, 구술을 더해 하나하나 옛길을 찾았다."면서 그간 연구 성과가 조만간 책으로 묶인다고 전했다.
옛길 찾기는 이처럼 상당한 공력이 요구된다. 현재 대체적인 흐름만 잡히고 있는 영남대로의 전체 노선을 규명하려면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영남대로 핵심 루트인 '새재 넘어 소조령길'(총 36㎞)을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을 뿐, 영남대로의 전체 복원사업은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신정일 대표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한 길들을 지금이라도 되찾고 보존하지 않으면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라며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같은 역사적 길들은 최소한 걸어다닐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자체들이 정확한 옛길 노선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노선을 만들고 덱을 깔거나 토목 공사하듯 복원하는 것은 문제"라면서 "옛길에 스민 문화적, 정신적 의미가 중요하며, 국가가 나서 중장기적 복원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옛 찰방역 있던 물금, 스토리텔링 소재 풍성"
김정호 하면 '대동여지도'가 생각나듯, '영남대로' 하면 최영준(69·사진, '영남대로' 저자) 고려대 명예교수가 떠오른다. 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1970년대에 우리 옛길에 빠져 1990년 초 '한국의 옛길- 영남대로'(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란 책을 펴냈다. 개념이 모호하던 '영남대로'란 명칭이 학계에서 통용되고 일반화된 것도 이때부터다. 이 책은 2004년 증보판이 나올 만큼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강원도 춘천 인근에 거주하며 20여 년째 농사를 짓고 사는 최 교수는 요즘도 '옛길' 이야기가 나오면 천릿길도 마다않고 달려간다. 지난해 5월 밀양시 삼랑진 검세리의 4대 강 공사장에서 '처자교(處子橋)' 유적이 발굴되자, 누구보다 먼저 현장으로 가 '영남대로 상의 희귀한 홍예교'임을 증언했다.
최 교수는 "처자교 유적은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인근의 작원관과 작천잔도(낙동강변의 벼랑길)를 함께 조명해야 역사가 온전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넌지시 정보 한 가지를 알려줬다.
"작천잔도가 경부선 철도에 깔려 모두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유적 일부가 남아 있어요. 옛 작원관 자리와 경부선 상·하행선의 터널이 뚫려 있는 벼락바위 윗부분에 폭 2m 가량의 작천잔도가 있죠. 작원나루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볼 수 있지만…."
양산시가 추진 중인 '황산강 베랑길'(황산잔도·물금~원동 사이 1.9㎞)에 대해선 우려의 시각을 나타냈다. "그곳도 경부선 철도가 깔고 앉았는데 어떻게 복원하지? 덱으로 난간을 달아내면 옛 정취가 살아날까요? 고증은 제대로 됐는지 모르겠네요."
최 교수는 물금취수장 바로 위에 있는 경파대(鏡波臺)를 주목해 보라고 했다.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이 유상했고, 배를 묶던 자리도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물금은 찰방역이 있던 곳이어서 역리의 후손이나 주막의 옛 주모 등을 찾아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생한 스토리텔링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최 교수는 영남대로 연구 과정에서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과 문경의 관갑천잔도를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하는 등 옛길 연구에 남다른 성과를 쌓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인 그는 지난해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한길사)을 펴냈고, 요즘은 '개화기 경남의 가옥과 취락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 신영남대로 자문단
▷최영준(고려대 명예교수, '영남대로' 저자) ▷신정일(문화사학자, 우리땅걷기 대표) ▷주경업(부산민학회 회장) ▷한정훈(부경역사연구소 사무국장·한국교통사 전공) ▷양흥숙(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좌상훈(사람사는세상연구소 대표·부산연구가)▷안태현(문경새재 옛길박물관 학예연구사)
출처: 국제신문 7면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20104.22007202503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2012-01-03 20:33:15
협찬 : 화승그룹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 프롤로그 : 한민족의 옛길
- 남대문에서 동래까지 총 380㎞에 이르는 길 - 경부고속道·철도보다 거리 70~80㎞ 더 짧아 - 과거길·조공품 운반로, 조선통신사 이동로 등 우리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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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1> 부산 옛길 탐사: 동래부사 왜관 행찻길(상)
일본 사신 맞으러 나선 동래부사의 뒤를 쫓아 걷다
- '동래부사접왜사도' 상세한 장면 묘사… 왜관 관련 사료 가치, 웬만한 문헌 능가
- 동래읍성에서 출발, 옛 왜관영역 초입인 초량 상해거리까지 11.2㎞ 걸어서 이동
- 남문구·하마정 등 옛길 흔적 곳곳에
- 자성대·정공단·고관… 역사 품은 유적 산재
이른 아침부터 동래읍성이 떠들썩하다. 역리(驛吏)들이 말을 끌고 나와 동헌 앞에 대기 중이고, 접대와 통교 사무를 맡은 접위관, 차비관, 훈도, 별차, 소통사 그리고 군관, 향리, 아전, 사령, 포졸, 행수, 상인, 잡색꾼, 예단지기, 기녀들까지 형형색색 옷차림으로 나왔다. 의관정제한 부사가 짐짓 의젓한 걸음으로 행렬을 둘러본다. 깃발이 앞서고 부사가 가마에 오르자 행렬이 읍성 남문을 향해 움직인다. "동래부사 납시오!" 아전이 소리를 질러 길을 연다.
동래읍성 남문은 이중문이다. 바깥쪽 누각에는 세병문(洗兵門), 안쪽 누각에는 '무우루(無憂樓)'라는 현판이 걸렸다. 임진년 왜란을 겪은 터라 근심을 없애고 싶었을 테다. 길가에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가 서 있다. 왜란으로 거의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세운 비석이다.
남문 남쪽으로 3리쯤 가자 광제교(세병교)가 나온다. 온천천에 백로들이 노닐고 햇살에 물비늘이 튄다. 부사가 초량으로 일본 사신을 맞으러 행차하는 아침이다.
■ 사료 가치 높은 풍속화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는 보면 볼수록 흥미롭다. 동래부사가 어떻게 일본 사신을 맞고 응대하는지 10폭 병풍에 드라마틱하게 펼쳐져 있다. 작자는 정선 또는 변박이란 주장이 있으나 논란이 따른다.
그림은 파노라마 형태다. 왼편 첫째 폭부터 일곱째 폭까지는 동래부(東萊府)에서 부산진(釜山鎭)을 지나 행사가 열리는 초량왜관으로 들어서는 행렬을 표현했다. 넷째 폭에 가마를 탄 동래부사가 보이며, 일곱째 폭의 문은 왜관의 경계를 표시한 설문(設門)이다. 여덟째 폭은 초량객사에서 일본 사신이 조선 임금의 전패(殿牌)에 예를 올리는 숙배(肅拜) 장면이고, 마지막 폭은 왜관의 연향대청(宴饗大廳)에서 일본 사신을 위해 베풀어지는 향연이다.
왜관을 이해하는데 이 한 장의 그림은 어떤 문헌보다 값지고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림과 같은 대규모 행차는 동래부에서 연간 7~10회 이뤄졌으며, 변방을 지키며 대일 외교를 수행하는 동래부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왜관은 조선시대 대일 교역창구로서, 외교·통상·사회 다방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산포(현 범일동 일대)→절영도(영도)→두모포(동구 수정시장 부근)→초량왜관(용두산 일대)을 거치며 430여 년간 존속했으며, 1872년 일제의 전관거류지로 전환됐다.
■ 동래부사 따라 걷기
이제 그림을 따라 걸어볼 차례. 본지 취재팀과 영남대로 자문 전문가들은 지난 연말 행장을 차려 동래읍성 동헌에 모였다. 먼저 동래구 이정형(46) 문화재전문위원의 안내로 남문터(현 동래경찰서 뒤편 충렬로 일대)를 찾았다. 동래시장 일방통행길과 충렬로가 만나는 지점에 표지석 하나가 서 있다. "남문 자리라고 하는데, 보다시피 완전히 시가화돼 버렸어요. 복원이 필요한데 예산이 문젭니다."(이정형 위원)
동래경찰서 앞을 지나 세병교에 닿았다. 고지도에는 광제교(廣濟橋)로 나오는 다리다. 부산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사처석교비(四處石橋碑)에 따르면, 원래 나무다리였던 광제교는 1781년(정조 5년)에 돌다리로 교체됐다. 동래구 문화공보과 이상길 주무는 "사처석교비는 남문 밖에 있던 4곳의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바꾼 것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라 연대가 정확하다."고 설명했다.
교대앞역으로 걸어가 동해남부선 철도를 끼고 남문구로 향한다. 법조타운 입구에 해당하는 남문구는 말 그대로 '읍성 남문의 들머리(口)'다.
거제현대아파트 앞을 지날 무렵,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양흥숙 전임연구원이 '횃바지' 이야기를 한다. "옛날 부산진시장은 4, 9일장으로 큰 시장이었는데, 동래쪽 사람들이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 나온 고갯마루라 하여 횃바지(횃불맞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부산교육청 입구 4거리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어 하마정(下馬亭)이라 불리는 곳. 화지산 자락에 동래 정씨 2대인 정문도 공의 묘지가 있으니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아무튼 하마비가 옛길임을 일러준다.
이어 송공삼거리다.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송상현 공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긴 어렵다(戰死易假道難)'는 말이 귓전을 파고든다. 일제 때는 동래부 쪽으로 쉽게 못 넘어오는 고개란 뜻으로 '모너머 고개'(일명 신좌수영 고개)란 이름도 얻었다.
■ 부산진성 비껴 고관으로
서면 로터리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고지도에는 서면 부근에서 부산진성(자성대)을 비껴 개운포~두모포~왜관 쪽으로 걸어간 것으로 돼 있다. 고지도 전문 연구자인 부산대 김기혁(지리교육과) 교수는 "어떤 코스를 택하든 부산진성(자성대)을 놓칠 수 없다는 점에서 서면에서 부산진시장 앞에서 자성대를 비껴 갔을 것 같다. 1872년 동래부 군현지도에도 그렇게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보면, 행차 루트는 서면~광무교~부산진시장 앞→진시장로→철길(지하도)→좌천동 정공단 방향으로 갔을 개연성이 가장 높다.
증산 자락에 위치한 정공단은 조선 전기 부산진성의 남문 자리다. 임란 때 이곳에서 순절한 부산첨사 정발(鄭撥)을 비롯, 공의 막료 이정헌, 첩 애향, 충노 용월 및 무명 순절자들이 함께 배향되어 있다.
이제 왜관 권역이다. 도시철도 좌천역 2번 출구 쪽에 '영가대·부산포왜관 표지판'이 있다. 양 연구원은 "부산진성 해안 선착장에 자리했던 영가대는 조선통신사가 배를 탄 곳이었고, 부산포왜관은 1407년(태종7) 부산진시장 부근에 설치됐던 최초의 왜관이었다."며 "지형이 바뀌어 원형은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고관 입구는 두모포왜관이 있었던 곳으로, 삼거리공원에 표지판이 있다. 1607년(선조 40)에 설치된 두모포왜관은 1678년(숙종4) 초량왜관으로 임무를 넘기면서 고관(古館) 혹은 구관(舊館)이 되었다. 고관이란 지명은 여기서 유래한다.
여기서부터 초량 상해거리까지는 옛길과 근대길이 겹친다. 고관 입구에서 세일병원 뒷길을 따라 경남여중을 끼고 초량중로를 따라가면 상해거리다. 상해거리의 중심부인 중국음식점 홍성방 신관 앞이 왜관의 설문(設門) 자리다. 동행한 한정훈 부경역사연구소 사무국장은 "설문은 일본인 구역과 조선인 구역의 경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동래부사는 여기서 한숨을 고르면서 작전숙의를 했을 것이다. 사신 접대와 협상은 이제부터다. 여기까지의 행로를 인터넷 다음 지도를 이용해 거리 측정을 해보니, 거리가 11.2㎞, 도보시간은 2시간40분이었다.
영남대로 종주 탐사 대장정 돌입
- 한민족 천년의 옛길을 직접 체험한다
- 초등 4학년~고교생까지 66명 참가, 동래읍성부터 서울까지 도보 이동
- 영남대로의 역사적인 의미 되새겨
지난 7일 오전 10시 부산 동래구 동래읍성 북문 앞. 앳돼 보이는 청소년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모두가 파커에 모자와 장갑, 배낭을 짊어진 완전 무장 차림이었다. 한국청소년탐험연맹 송경호(33) 팀장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영남대로의 출발지 동래읍성 북문입니다. 지금부터 걸어서 한양까지 갈 겁니다. 한양이 어딥니까? 서울이죠. 여기서 약 400㎞쯤 됩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가는 겁니다. 오늘은 양산까지 가고, 이어서 삼랑진~밀양~청도~대구~칠곡~구미~상주~문경~충주~안성~용인~성남을 거쳐 서울에 입성할 겁니다. 모두 할 수 있죠? 하는 겁니다!"
"예! 예!" 우렁찬 대답 소리가 북문 성벽을 울렸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2열 종대의 행렬이 북문을 넘어 동래문화회관 앞 도로를 향해 나아갔다.
이날 행사는 한국청소년탐험연맹이 매년 실시하는 '걸어서 가는 한양 옛길-영남대로 종주 탐사'.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교생까지 전국에서 66명이 참가했다. 부산에서 합류했다는 김지훈(15·동래중2) 군은 "아버지가 보내서 왔으며 모험심을 키울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옛 선비들이 과거 보러 간 길을 답사한다 생각하니 가슴이 약간 떨린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이들은 지난 2일 인천 연안부두에 집결, 배편으로 제주도로 간 뒤, 국토 최남단 마라도를 탐사하고 한라산 백록담을 등반한 후 지난 7일 새벽 다시 배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송경호 팀장은 "영남대로는 우리 민족의 대동맥으로 다른 옛길이 비해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면서 "10여 차례 종주를 한 바 있어 코스를 잡고 역사현장 학습을 하는 데 별로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하루 20~30㎞씩 걷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지만, 스텝 18명이 따라 붙어 도보 지원을 하므로 낙오자가 거의 생기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날 출발한 탐사단은 오는 19일 서울 남대문에 도착해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출처: 국제신문 11면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110.22011210542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2012-01-09 21:18:52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1> 부산 옛길 탐사: 동래부사 왜관 행찻길(상)
- `동래부사접왜사도` 상세한 장면 묘사…왜관 관련 사료 가치, 웬만한 문헌 능가 - 동래읍성에서 출발, 옛 왜관영역 초입인 초량 상해거리까지 11.2㎞ 걸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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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래부사 왜관 행찻길 찾았다
'동래부사접왜사도' 10폭 병풍… 日사신 접대행차 사실적 묘사
- 본지, 30리 옛길 답사 통해 밝혀
조선시대 왜관을 두었던 부산에는 다른 지역에 없는 보물 같은 조선 후기 풍속화가 있다.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라는 10폭 병풍 그림이다. 동래부의 연례 행사인 일본(倭) 사신 접대 행차를 가로 세로 81.5×460cm 크기로 표현했는데, 내용이 드라마처럼 흥미롭다.
그림 속에서 100여 명의 행렬을 거느린 동래부사는 동래읍성 남문을 나와 광제교(세병교)에서 부산진성(자성대)을 비켜 개운포, 두모포를 거쳐 초량왜관(현 용두산 부근)까지 간다. 그림 속에는 어렴풋하게 길 표시도 돼 있다.
이 그림 속 옛길의 실제 루트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본지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취재팀과 자문단은 지난 연말 연구자료와 답사를 통해 베일에 가려져 있던 루트를 찾아냈다.
루트는, 동래읍성 남문~세병교~교대역 앞~남문구 앞~하마정~송공삼거리~서면~광무교~부산진시장 앞~정공단 앞(좌천동)~고관 입구~상해거리 홍성방 신관 앞(설문)~봉래초등학교(객사)~광일초등학교(연향대청)까지 약 30리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양흥숙(41) 전임연구원은 "이 길은 조선 후기 통신사가 오간 길이며, 동래부의 간선도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2008년 부산시와 함께 '부산 고지도'를 펴낸 부산대 김기혁(지리교육과) 교수는 "1872년 동래부 군현지도에 나타난 길을 참고하면 부산진성(지금의 자성대)을 비켜서 행차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하지만 고지도나 그림에 나타난 길이 추상적인 데다 도시 변화가 극심해 정확한 옛길을 짚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동래부사가 일본 사신을 부르지 않고 왜 직접 행차했을까. 부경역사연구소 한정훈 사무국장(한국교통사 전공)은 "왜관 거주자는 물론 사신조차 왜관 울타리 밖으로 나올 수 없어 동래부사가 직접 갔던 것"이라며 "이 행찻길을 스토리텔링으로 엮으면 좋은 교육·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출처: 국제신문 1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110.22001213829&kid=k4946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1-09 21:40:24
동래부사 왜관 행찻길 찾았다
- 본지, 30리 옛길 답사통해 밝혀 조선시대 왜관을 두었던 부산에는 다른 지역에 없는 보물 같은 조선 후기 풍속화가 있다.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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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2> 부산 옛길 탐사: 동래부사 왜관 행찻길(하)
140년 전 금기의 땅, 그 경계를 넘어 들어가다
- 왜관 통제 위해 만든 초량객사, 개항후 기능 상실 1910년 사라져
- 객사터로 알려진 봉래초등학교, 1896년 개교… 위치 논란 제기
- 용두산 일대 자리했던 초량왜관, 변박이 그린 '왜관도' 상세 묘사
- 중구 일원에 관련 건축물 산재, 정확한 입지와 유적조사 시급
설문(設門)에서 한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본다. 설문은 초량왜관과 동래부를 구분하는 지리적 경계. 1710년 동래부사 권이진이 왜관 통제를 위해 설치했다. 근대 자료를 보면 설문은 초량정 571번지, 오늘날 부산역 맞은 편 상해거리의 홍성방 신관 앞자리다. 초대 부산해관장을 지낸 영국인 넬슨 로벗이 1885년 찍은 사진에는 '초량 해안의 큰 나무가 일본인 통과가 허락되지 않았던 옛날 경계를 표시한다.'는 메모가 돼 있다. 옛 지도와 사진, 메모가 거의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현장엔 설문에 대한 안내판 하나 없다.
■ 초량객사 위치 논란
설문을 지나 영주고가로 앞 육교를 건너면 영주동 봉래초등학교다. 교정에 부산시가 세운 초량 객사터 표지석이 있다. 객사는 조선의 역대 국왕 전패를 모신 곳으로 지방관이 숙배를 올리던 곳. 그런데 초량객사에서는 부산에 온 일본 사신들이 들러 반드시 숙배식을 갖도록 했다. 왜관 통제를 위한 외교적 조치였다.
지난 13일 취재팀과 함께 현장을 탐사한 부산불교문화연구소 김한근(53·향토사료연구가) 소장은 "초량 객사터가 현 봉래초등학교가 아니라 새 영주시장 일대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했다. 김 소장은 "초량객사는 1876년 개항 후 기능을 상실하고 동래감리서와 재판소로 사용되다 1910년께 사라졌다."면서 "이 자리라면 1896년 개교한 개성학교(봉래초등학교)의 내력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초량객사를 비롯하여, 조선측 역관 등이 거주한 성신당, 빈일헌 같은 왜관 관련 건물의 입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학계의 추가 연구와 논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초량객사 위치 규명을 위한 연구 보고서를 준비 중이다.
■ 초량왜관 그림 읽기
두모포왜관에 이어 용두산 일대 10만여 평을 차지하고 앉은 초량왜관은 1678부터 1876년까지 약 200년간 존속한 대규모 왜인촌이었다. 다행히 한국과 일본에 옛 지도와 그림 10여 종이 전하고 있어 전모 파악이 가능하다. 이중 압권은 1783년에 동래부의 화원 변박(卞璞)이 그린 '왜관도'다. 전체 규모와 건물 구조, 명칭, 도로까지 세세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림 상단에 설문과 돌담이 있고, 얼마 안 가 초량객사가 보인다. 객사 아래쪽에는 성신당, 빈일헌 등이 자리 잡았고, 연회가 베풀어진 연향대청은 영선산의 고갯길(영선고개)을 한참 넘어야 닿는다. 연향대청 앞쪽으로 왜관 담장이 보이고, 북문이 설치돼 있다. 왜 사신 등이 드나드는 문이다.
왜관의 정문격인 수문(守門)은 해변가에 위치한다. 수문을 들어서면 왜관 우두머리가 근무하는 관수가(館守家) 등 동관 건물이 줄지어 나타나고, 용두산 건너편으로 서관 건물이 질서정연하게 들어서 있다. 관수가 앞쪽의 개시대청(開市大廳)에서는 매달 3, 8일 조일 간 무역거래가 이뤄졌다. 여기서 한몫을 잡은 역관과 동래상인이 적지 않았다.
■ 금녀 구역의 한일상열지사
초량왜관에는 400~700명의 왜인이 거주했으나 철저한 금녀구역이었다. 거주자는 주로 대마도인으로 가족이나 여성 동반은 물론 유녀(遊女) 등의 출입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왜관의 일본인들은 야채, 생선 같은 신선 식품 조달이 어렵다고 끊임없이 불만을 제기했다. 동래부는 왜관 수문 앞에 조시(朝市·아침 시장)를 허가했다. 조선 남녀들이 와서 물건을 팔았다.
'홀아비 왜인 남성'들 앞에 조선 여인들이 어른거리면서 염문이 일어났고, 은밀한 성매매가 이뤄졌다. '왜인작라등록(倭人作拏謄錄)'이란 사료에는 실로 충격적인 성매매 사례가 소개돼 있다.
"공모자들의 자백에 의하면, 1687년 4월 대간(일본 상인) 3인이 우리 여인을 간절히 구하면서 은 58냥을 주어 이명원에게 전했고, 이명원이 그의 처와 딸 분이를 왜관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이진수 역시 왜인이 여자를 구하면서 은 2냥5전을 주자 이명원이 자신의 여동생 천월을 왜관에 데려다 주었다…. 이들은 밤이 깊은 시각에 변복을 하고 담장을 넘어 왜관으로 들어가 통간하다 붙잡혔다."
이른바 '교간(交奸)사건'이다. 조선은 사건의 연루자들을 모두 처형해 효시했으나, 일본 측은 본국 소환 등으로 사태를 유야무야시키기 일쑤였다. 조일 간 신경전 속에서도 교간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 설문~연향대청 간 1.5㎞
이제 '왜관도'에 나타난 옛길을 따라가 본다. 봉래초등학교 옆 영주시장 윗길을 걸어 나와 주성약국 앞에서 영선고개로 접어든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적 여관으로 알려져 있던 영주동 장춘여관은 최근 뜯겨 주차장으로 변했다.
가파른 영선고개에서 골목길로 들어간다. 도요코인 호텔 뒤쪽으로 난 중구로 172번 골목길을 따라 힐사이드 호텔을 끼고 미로 같은 계단을 오르면 코모도 호텔 앞이다. 코모도 호텔 일대는 1940년 초 일본군 요새사령부가 있던 곳. 메리놀병원을 지나 중구청 앞의 복병산 자락 중구로를 따라서 대청떡방앗간 샛길(대청로 99번길)을 내려오면 연향대청이 자리한 광일초등학교에 닿는다. 설문~연향대청 간 거리는 약 1.5㎞. 멀지 않은 거리지만 켜켜이 스민 역사는 멀다. 오늘날 대청동이란 이름은 연향대청에서 유래한다.
김한근 소장은 "연향대청의 문은 아마 대청동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 앞쪽에 있었을 것 같고, 대청로 건너편에는 약 2m 높이의 왜관 담장이 둘러쳐졌을 것이다."며 왜관 관련 건축물들의 정확한 입지 및 유적 조사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연향대청에 도착한 동래부사는 왜 사신단을 위해 한판 연회를 베푼다. '동래부사접왜사도' 제6폭(말 타고 가는 기녀들)과 제10폭(연회 장면)에 나타난 그대로다. 악사 여섯이 대청밖 월대에서 연주를 하는 가운데 기녀 셋이 노래를 부르고 넷이 춤을 춘다.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은 "이들은 동래 교방청에서 데려온 관기들이며, 왜관의 공식 연회에서 일본인들이 조선 여성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바로 이 때"라고 했다.
옛길의 역사학
- 초량왜관 복원의 단초, 옛 그림서 찾을 수 있어
옛길은 생명력이 있다. 도시계획이 옛길을 깔아뭉개고 콘크리트가 옛길을 덮어도 옛길은 정체성을 잃기는커녕 질경이 같은 생명력으로 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명의 공존을 얘기하며 골목을 지키고 있다.
옛길에는 일정한 코드가 존재한다. 주변에 관공서가 있거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을 끼고 있거나, 비석껄이나 우물, 다리 등의 표지를 갖는다. 동래부의 옛 간선도로(동래부사 왜관 행찻길)는 부산진시장(부산진성, 자성대, 영가대), 수정시장(두모포왜관), 영주시장(초량왜관 초입)을 끼고 있다.
마을 우물이 옛길의 중요 표지가 되기도 한다. 부산 동구 수정2동 다인식당 앞의 고관로 101번 길에 있는 조선시대 우물이 그렇다. 가로×세로 약 250㎝ 크기로 형태가 정확히 '우물 정(井)'자다. 지역촌로들은 조선시대 우물이라고 말한다. 부산불교문화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두모포왜관(1607~1678년) 자리가 현재의 동구청 아래쪽 수정시장 일대 1만여 평이라고 하니, 동구청 옹벽 아래의 고관로 101번 길이 곧 옛길이 된다."면서 "조선시대 우물이 결정적 증언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문화재가 될 수도 있는 이 우물은 아쉽게도 폐쇄된 상태다.
옛길은 이처럼 감춰진 역사까지 들춰낸다. 지도와 그림 자료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초량왜관의 경우, 그림 속 옛길을 추적하면 전체 규모 및 복원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부산초량왜관연구회 최차호 회장은 "지난해부터 옛 지도 등을 토대로 초량왜관 건축물의 위치 규명 작업을 벌이고 있다."면서 "중구 대청동, 동광동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초량왜관 시절의 선착장 또는 담장, 건축지의 석축 비슷한 유물이 더러 보인다."고 말했다.
왜관 복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부산문화재단이 오는 5월 조선통신사 축제때 재일 한국인 3세인 부학주(夫學柱·38) 박사를 초청해 부산에서 '초량왜관 건축물 복원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또 부산MBC는 230억 원을 투입해 부산의 왜관을 무대로 펼쳐지는 조선 도공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32부작 대하드라마 '신의 그릇'을 제작, 연말께 방영한다.
잠자던 옛길들이 깨어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출처: 국제신문 6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117.22006200052&kid=k4946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1-16 20:05:21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2> 부산 옛길 탐사: 동래부사 왜관 행찻길(하)
- 왜관 통제 위해 만든 초량객사, 개항후 기능 상실 1910년 사라져 - 객사터로 알려진 봉래초등학교, 1896년 개교 … 위치 논란 제기 - 용두산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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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3> 부산 옛길 탐사: 좌수영 길(상)
잃어버린 지역사와 전설같은 의용담을 옛길에서 만나다
- 중마 2필 짐말 5필 역리 166인, 동해남부 담당 큰 역참 휴산역
- 동래패총이나 낙민초 부근 추정
- 아치형 홍예교 이어 숙종 때 건설… 튼튼하고 아름다웠던 이섭교, 낙민치안센터 앞 비석이 전해
- 임란 때 도망간 좌수영 장군 대신 의병으로 게릴라전 전개 민초들
- 왜군 쳐 죽인 송씨할매 기록 남아
동래읍성에서 좌수영 가는 길은 나그네의 발길을 먹먹하게 한다. 길은 있으나 옛길은 없고, 선혈을 머금은 역사는 성에 갇혀 있거나 짓눌린 채 잠자고 있다. 옛 지도에 희미하게 그어진 실선 한가닥이 옛길과 새길의 유일한 교신이다. 길 위에서 만난 잃어버린 지역사와 전설같은 의용담(義勇談)이 마음을 흔든다. 동래읍성~좌수영 10리 길. 지역사는 여태껏 이 짧은 길 하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토현(兎峴·현 토곡) 너머 좌수영성 문루에서 북소리가 둥둥 울린다.
■휴산역이 어드메뇨
출발지는 다시 동래읍성 남문(동래경찰서 뒤 충렬로 주변). 번잡한 충렬로 변의 단출한 표지석 앞에 사람사는세상 연구소 좌상훈(46) 대표가 나와 있다. 오늘의 동행자다. 그는 '부산의 옛길'을 우직하게 답사해 책으로 엮은 주역이다.
"출발해 보실까요. 동해남부선 동래역 쪽으로 가야 휴산역(休山驛)을 만나겠지요."(좌상훈)
휴산역은 어디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래현(읍성)의 남쪽 1리(약 400m)에 있다고 돼 있다. '여지도서'에는 중마 2필, 짐말 5필, 역리 166인, 남자종 30구가 배속되어 있다고 기록돼 규모가 컸음을 짐작케 한다. 위치는 논란이 따른다. 좌 대표는 동해남부선 철길 건너 동래구 낙민동의 동래패총 일대로 보는 반면, 동래구 이정형(46) 문화재 전문위원은 현 낙민초등학교 부근으로 추정한다. 한국교통사를 전공한 한정훈(40·부산대 강사) 박사는 "휴산역은 동해남부 일대를 커버하는 마지막 역참이며, 조선 초기 '동래신역'이 휴산역으로 바뀌고 '휴산동'이란 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 '낙민초교 근처'가 아닐까 싶다."고 했다.
휴산역의 파발을 상상하며 충렬대로→낙민로→동해남부선 동래역으로 간다. 철로가 좌수영 길을 막고 있다. 할 수 없이 철길을 거슬러 올라 동해남부선 수민건널목을 건넌다. 온천천로 319번길을 따라 들어가자 동래패총터가 나온다. 초기 철기시대 유적이다. 철생산 유구를 비롯, 골각기류, 토기류, 동물유체, 패류 등이 조사돼 2000여년 전 온천천 일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이섭교, 이로움을 주는 다리
동래패총에서 수안로 8번길을 따라 나오면 온천천이다. 잘 정비된 산책로가 옛길을 좇는 발걸음을 머쓱하게 한다. 눈앞에 장산과 배산이 펼쳐져야 하는데, 고층 아파트들이 시야를 방해한다. 연안교를 지나자, 낙민치안센터 앞에 콘크리트 인도교가 기다린다. 다리 입구에 작달막한 비석이 서 있다. 이섭교비 모형이다. 원형은 사라졌으나, 다행히 이섭교비(부산시 기념물 제33호)가 남아 건립 경위를 알 수 있다.
'… 옷을 걷어 올리고 건너다니던 냇물에 나무다리를 놓았지만 나무가 쉬 썩어 해마다 다리를 고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몇 사람이 뜻을 모아 돌다리를 놓기로 하고 돈을 모아 조선 숙종 21년(1695)에 다리를 놓았다…'.
이섭교는 글자 그대로 '건너기 편리하도록(利涉) 가설한 다리(橋)'로, 동래읍성에서 좌수영으로 가는 행정·군사상의 중요 교통로였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이섭교는 형태가 걸작이다. 아치형 홍예교 4개를 연결해 튼튼하고 조형미가 빼어나다. 민가에선 독특한 형태를 빗대 안경다리, 동래 한다리라 불렀다. 그러나 이 멋진 다리는,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말에 영문도 모르게 유실되고 말았다.
동래구는 올봄에 금강공원에 있는 이섭교비를 원위치 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이참에 다시 '뜻을 모아' 원형까지 복원하면 관광자원이 될 것 같다.
■좌수영, 민초들의 전쟁
가짜 이섭교를 건너 연제구 쪽으로 접어든다. 눈앞에 둥두렷한 배산이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고지도에 나타난 한 가닥 선을 토대로 현대도시의 미로를 파고들어야 한다. 좌 대표가 몇 차례 답사를 통해 찾아낸 추정 루트는, 안연로→과정로 225번길→토곡 4거리→토곡고개(토현)→망미주공 입구→과정로 55~56번 샛길(부산은행 망미지점 앞)→수영사적공원(좌수영 북문터)이다.
포인트는 고지도에 표시된 이섭교와 토현(兎峴·토곡고개), 배산의 겸효대(謙孝臺), 수영강변의 '과정'(瓜亭·고려시대 정서의 유배지) 정도다. 하지만 겸효대는 문헌에만 존재할 뿐 자취가 모호하고, 과정은 경유지에서 벗어난다.
토곡고개를 넘으면 수영사적공원 안내판이 나타난다. 좌수영 성지는 도시화로 원형을 거의 잃었다. 동·서·남·북문을 갖추고 성곽 길이만 1480m에 달했다고 하나, 지금은 옛 서문터 좌우로 620여 m 가 남았다.
좌수영(左水營)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약칭. 원래 감만이포(남구 감만동)에 있었으나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겨갔다가 임진왜란 직전 지금의 수영동으로 옮겨졌다. 우두머리는 좌수사(일명 水使, 정3품 무관)로서 낙동강 이동에서 경주까지의 해상 방위를 책임졌다.
참혹한 임진왜란은 놀랍게도, 경상좌수사가 도망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왜병이 부산포를 함락시키자 경상좌수사 박홍은 적의 세력이 너무 큰 것을 보고 감히 출병하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유성룡의 '징비록' 중)
당시 좌수영에는 100여 척의 전함과 3000여 명의 수군이 있었다고 하나 그건 종이호랑이였다. 그 후 좌수영은 약 7년 간 왜군들의 점령지로 전락, 갖은 만행이 저절러진다. 수군의 패주에도 민초들은 자체 의병을 모아 게릴라 전법으로 끈질기게 왜적에 맞서 싸웠다. 뒤늦게 붉은 이름을 드러낸 '25 의용(義勇)'이 그들이다. 못된 왜병을 쳐 죽였다는 '송씨할매'는 좌수영의 화신으로 남았다. 이들이 있기에 좌수영의 쓰라린 패배는 패배로만 기록되지 않는다.
방광성(73)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장은 "임란 후 좌수영성은 방어와 공격을 겸하게끔 고쳐졌다고 한다."면서 "복원된 남문 홍예교 옆의 박견(拍犬·도둑을 지키는 개)과 군신목인 곰솔(천연기념물), 송씨할매당, 무민사, 좌수영 어방놀이 등은 새롭게 음미해봐야 할 역사 문화 자산"이라고 말했다. 방 이사장은 요즘 수영 지신밟기를 시 무형문화재로 등록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남문 홍예교 앞에서 답사를 끝내려 하자 좌 대표는 "민락동의 선소(船所·선창)와 백산의 수군 망루(점이대)까지 짚어야 좌수영 길이 보인다."면서 "진짜 답사는 이제부터"라고 했다.
○ 수영 농청놀이 속의 좌수영길
- "좌수영 옛길 통해 배산 자락 도착, 산나물 캐는 민초들의 얘기 담겨"
"곤달비야 곤달비야 잘뫼산 곤달비야~ 토곡산을 넘지 마라 / 가마구야 가마구야 잘뫼산 갈가마구야~ 언제 놋제 단제 수제 단단히 가리물고…"
지난 26일 오후 부산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사무실. 수영 농청놀이 전수조교 이경자(52) 씨가 농청놀이 한 소절을 뚝 분질러 읊조린다. 가락이 구슬프다. 곁에 있던 김성율(67) 수영야류보존회장이 툭툭 장단을 놓으며 얘기한다.
"잘뫼산이 바로 배산(盃山·254m)이야. 수영 농청놀이 가사에 좌수영 옛길이 녹아 있는 거예요. 수영사람들이 배산 자락까지 가서 곤달비(곰취)를 캐고 나무를 했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수영 토박이로 23대째 그곳에 살고 있는 김 회장은 동래중학교를 다닐 때 잘뫼산(배산) 자락의 토곡고개를 줄곧 이용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배산의 거울바우 이야기도 끄집어낸다.
"반질반질 네모 난 바우가 있었지. 그 쪽이 지름길이니까 주말에는 그 길을 오갔지요. 바위 면을 닦고 얼굴을 갖다 대면 훤히 비쳤어요. 그런데 어떤 나병환자가 자기 얼굴을 비춰보곤 놀란 나머지 훼손해 버렸대요."
배산 중턱에는 옛 거칠산국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배산성지(부산시기념물 제4호)가 있다. 선인(仙人)으로 불린 김겸효(金謙孝)가 유상했다는 '겸효대'도 있었다고 하지만 문헌에만 전할 뿐 자취가 오리무중이다.
김 회장은 좌수영성의 문루와 성문 자리, 옛길의 방향 등을 잘 알고 있었다. "수영동 일대에는 성터 또는 성돌을 밟고 앉은 건물이 많아요. 좌수영 남문은 원래 수영주민센터 인근 청아탕 옆(표지석이 있음)에 있었어요. 지금 남아 있는 남문 홍예문의 아치는 옛 수영초교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고요."
김 회장은 "동래읍성에서 좌수영으로 오면 북문으로 출입했을 것"이라며 "전체적으로 문헌 기록이 빈약한데다 연구자조차 없어 전모 파악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출처 : 국제신문 6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131.22006201628&kid=131303 박창희 선임 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1-30 20:22:18
협찬: 화승그룹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3> 부산 옛길 탐사: 좌수영 길 (상)
- 중마 2필 짐말 5필 역리 166인, 동해남부 담당 큰 역참 휴산역 - 동래패총이나 낙민초 부근 추정 - 아치형 홍예교 이어 숙종때 건설…튼튼하고 아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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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4> 부산 옛길 탐사: 좌수영 길(하)
호국의 숨결 이어온 자리에서 전쟁문학의 백미 읊다
- 최영 장군 영신 모신 무민사, 좌수영성 동문지 바깥에 위치
- 임란 때 '25의용단' 비밀리 활동…선서바위·가림나무에 자취 남아
- 민락동 한 아파트엔 선소 유허비, 노계 박인로 '선상탄' 새겨져
- 무궁화동산엔 '태평사' 적혀
- 백산 정상 오르면 '첨이대' 표석, 적정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
부산 수영구 좌수영성지에 무민사(武愍祠)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곳에 '가림나무'와 '선서바위'가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더욱 없다. 이런 이야기들을 전설 나부랭이 정도로 치부해온 우리였기에 모르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무민사는 고려 말 왜구를 크게 무찌른 최영(1316~1388) 장군의 영신을 모신 사당으로, 좌수영성 동문지 바깥 왼편의 큰 바위 앞에 있다. 최영 장군은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역성 혁명을 반대하다 참형당한 고려의 충신. 이성계는 개국 6년 만에 '무민'(장군을 위로한다는 뜻)이란 시호를 내려 넋을 달랜다.
원래 이곳의 강신 무녀가 최영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살던 오두막집을 1963년 주민들이 사당으로 만들어 매년 제를 지내고 있다. 사당은 1.3평 정도로 볼품없지만 그 정신은 호국의 숨결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스물다섯 명의 '붉은 의용단'이 끝까지 저항한 정신적 힘도 이런 데서 비롯된다.
■선서바위와 가림나무
수영의 잔존 주민과 수병들로 구성된 25의용단은 좌수사 박홍이 달아난 후 혼란에 빠진 좌수영성에서 약 7년간 게릴라전을 펼쳤다. 밤에 나다니는 왜군을 쇠스랑과 도끼로 공격하고, 지나가는 왜선을 습격했으며, 정박한 왜선에 구멍을 뚫고 닻줄을 끊었다.
'25의용'이 왜적과 맞서 싸울 작전계획을 수립한 곳이 무민사 뒤편의 큰 바위(일명 선서바위)였다. 이곳을 선서바위라 부르는 것은 25의용이 이 바위 앞에서 죽음을 선서로 맹세했기 때문. 언제부터인가 그 자리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다. 수영주민들은 이를 '가림나무'라 불렀다. 25의용이 왜적에 맞서 비밀리에 작전계획을 짠 장소를 '가려준' 나무라는 뜻이다. 왜구를 무찔러 남해안을 지킨 최영 장군과 그를 받드는 사당, 그 뒤편의 바위 앞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을 맹세한 25의용의 선서, 그 장소를 지켜준 가림나무…. 이런 스토리텔링이 어디에 또 있던가.
하지만, 이야기의 현장인 무민사 일대는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삭아 내린 느티나무(가림나무) 고목에 가지가 돋아나서 얼마 전까지 선서바위를 칭칭 휘감았으나, 지금은 관리소홀로 그마저 고사되고 말았다. 최영 장군이 아신다면 크게 꾸짖을 것 같다.
■노계를 찾는 행로
남문 아치문을 벗어나 수영 팔도시장을 따라 민락동 수영현대아파트 관리사무소 옆의 '선소(船所)'를 찾아간다. 선소는 좌수영의 선창이자 조선소였던 곳. 수영강에서 30여m 떨어진 이곳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 선소 유허비'가 있다. 1988년 4월 현대산업개발이 아파트를 지으면서 지역학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세운 기념비다.
유허비에는 '좌수영은 경북 영해에서 낙동강까지의 해상을 방수한 본영(本營)으로, 이 선소에는 전선 3척, 병선 5척, 귀선(거북선) 1척과 사후선 12척이 주둔하였다.'고 적혀 있다. 현장은 이미 상전벽해. 강은 졸아들었고 옛 자취는 깡그리 매립됐다. 강 건너편에 '영화의 전당'이 빤히 보인다.
이곳에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인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1561~1642)를 만난 것은 다소 의외다. 노계는 문장가이자 무인으로, 임진왜란 때 수군에 종군했다. 을사년(선조 38년, 1605년) 여름, 그는 국경 요새인 동래 좌수영의 통주사로 임명된 후 전쟁가사인 '선상탄'을 쓴다. 유허비 상단에 '선상탄'이 새겨진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다.
'… 전선 타던 우리들도 어주(漁舟)에서 늦도록 노래 부르고, 가을달 봄바람에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태평성대를 다시 보려 하노라.' 비문 말미의 한 구절이 평화의 상념을 안겨준다.
박인로의 가사비는 민락동 진조말산 무궁화동산에도 있다. 2002년 4월 토향회에서 세웠으며, 1598(선조 31년)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침입과 병사들의 활약, 승전, 개선을 읊은 '태평사'가 새겨져 있다.
하고 보면, 노계 박인로는 부산과 인연이 각별한 셈이다. 전쟁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선상탄' '태평사'의 창작현장이 부산이라는 것은 놓칠 수 없는 문화자원이다. 게다가 좌수영 권역인 수영구 망미동 산 6-2번지에는 정서의 '정과정' 유적까지 있다. 과정-노계를 연계한 수영강 문학기행 코스를 만들어도 좋겠다.
■수군 망루에서 굽어보다
이제, 수영강을 넘겨보며 민락동의 백산(白山)을 오른다. 부산MBC 사옥 뒷산이다. 해발 130m 로 높진 않지만 기세가 만만찮다. 정상에 오르자 입이 쩍 벌어졌다. 해안의 가파름이 만든 전망이 일품이다. 동으로 장산, 북으로 배산, 서로 금련산이 보이고, 센텀시티와 수영강, 좌수영성지, 선소,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에 왜적이 쳐들어오면 한 눈에 적정을 살필 수 있는 자리다.
평평한 정상에 '백산 첨이대(覘夷臺)'란 표석이 서 있다. '좌수영 수군들이 나라와 바다를 지킨 전초기지(망루)'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부산을 가꾸는 모임'이 1998년에 세웠다.
풍수적으로 볼 때, 백산의 형상이 마치 수영을 버리고 도망가는 사자의 모습이라는 견해도 있다. 김성율(67) 수영야류보존회 회장은 "수영야류 제4과장 사자무에 호랑이를 사자의 먹이로 제공하는 장면은 이러한 속설이 투영된 것"이라고 했다.
갑자기 몇 가지 궁금증이 발동한다. 임진왜란 개전 시 이곳의 초병은 누구였고, 좌수사 박홍에게 어떤 보고를 했기에 그를 도망치게 했을까. 민초들은 왜 목숨을 걸고 싸웠던가. 노계가 소망한 태평성대는 왔는가. 그리고 오늘 지금,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지역에서 이룬 그날의 삶은, 그 지역이 가진 최상의 삶의 방식이었다."고 설파한 작가 최해군 선생의 언명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온 좌수영 길이다.
○ 왜적 노려보는 박견
- 日 신사 입구에도 존재… 한반도 문화 흘러간 흔적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 즉 좌수영 성지에 남아 있는 남문은 이전, 복원된 것이지만 앉음새가 당당하고 조형미가 빼어나다. 그런대로 원형을 간직하고 있을 뿐더러, 돌을 사다리꼴로 짜 맞추어 무지개 형태를 연출한 돌문은 조상들의 뛰어난 건축 솜씨를 보여준다.
아치문 양쪽의 우주석(모퉁이에 서 있는 기둥 돌) 위에는 흥미로운 동물 조형물이 있다. 흔히 '고구려개'로 불리는 박견(狛犬)이다. 마주보고 눈을 퉁방울처럼 부라리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인데, 어찌 보니 씩 웃는 듯한 귀여움이 있다. 박견 뒤의 석축에 '辛亥二月(신해이월)'이란 새김이 있어 아마 1692년 좌수영성 증축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은 "이러한 박견은 낙안읍성 등에도 발견돼 전통양식이 틀림없다"면서 "특히 좌수영성의 박견은 왜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상징 조형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좌수영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왜적 감시이기 때문이다.
지역사 비밀 캐기에 매달려 온 부산KBS 이양훈 PD는 문화 전파적 관점에서 박견을 주목한다. 그는 "일본의 신사 입구 도리이(鳥居) 부근이나, 신에게 예를 올리는 배전(拜殿) 앞에는 돌로 조각된 개 형태의 사자가 있는데, 이는 한반도의 박견이 전파돼 흘러간 것"이라고 말했다. 좌수영성의 박견이 갖는 문화적 함의가 각별하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박견을 떠받친 우주석 전면에는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었을 법한데 시멘트칠이 돼 있다. 재질이나 색감으로 봐서 후대에 덧칠된 흔적 같다. 수영동의 한 주민은 "남문의 홍예문을 옛 수영초교 정문으로 사용할 때 학교 간판을 걸었었다."고 귀띔했고, 다른 주민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이상한 축원 같은 글을 새겨놓아 덮어버린 것"이라고 풀이했다.
아치문 뒤에는 수령 400년의 우람한 곰솔(천연기념물 제270호)이 서 있다. 높이 27m, 둘레 4.5m. 바라보자니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예부터 좌수영 수군들이 군신목(軍神木)으로 섬겨온 나무다. 군선을 제조할 때면 이 나무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공간적 배치를 보니 아치문과 곰솔이 절묘하게 조응한다. 좌수영의 역사가 새로 쓰이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 국제신문 6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207.22006203110&kid=k4946 박창희 선임 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2-06 20: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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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4> 부산 옛길 탐사: 좌수영 길 (하)
- 최영 장군 영신 모신 무민사, 좌수영성 동문지 바깥에 위치 - 임란 때 `25의용단` 비밀리 활동…선서바위·가림나무에 자취 남아 - 민락동 한 아파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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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5> 부산 옛길 탐사: 기장 옛길
2000년 넘는 장대한 역사 품고 있는 사통팔달의 길
- 삼국시대부터 기장읍성 중심으로 동래·울산 방면 통하는 길들 열려
- 고촌리 도로 유구, 철마면 송정 지명 등 옛길 역사 짐작케 해
- 기장 관문 역할하던 용소고갯길 따라 줄지어 선 공덕비들, 충실한 사료 역할
기장 옛길은 부산의 여타 옛길들이 동래읍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식을 깨고 기장읍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삼국시대 때부터 기장읍성에서 동래와 양산, 울산·경주 방면으로 통하는 길들이 열렸다. 자체 중심을 갖는다는 건 기장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이 실하다는 의미다. 신라의 한낱 변방인 갑화양곡(甲火良谷)이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기장(機張)이란 이름을 얻어 오늘날 '새벽을 여는 도시'로 발전한 배경에는 사통팔달의 유구한 길이 있었다.
■바위 면에 새겨진 공덕비
'1892년 동학혁명 시기, 기장 고을에서도 청년들의 봉기가 있었다. 기장 청년들은 포악무도한 '손 현감'을 붙잡아 상여 틀에 묶은 뒤 가시나무로 덮어 용소고갯길을 넘어갔다. "살려 달라!"는 현감의 애원을 뒷전으로 흘리면서 청년들은 주거니 받거니 상여소리를 내질렀다. 용소고갯길을 지난 청년들은 손 현감을 읍성 바깥인 안평리 벌판에 갖다버렸다고 한다. 그후 사건 주동자들이 잡혀갔으나, 손 현감이 원인 제공자로 드러나 그가 파직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공태도 저 '기장 향토지-남기고 싶은 글' 중)
이 글에 등장하는 용소고갯길은 기장읍 서부리에 있는 유서 깊은 옛길로 기장의 관문이다. 기장을 드나든 관리와 상인, 장꾼들이 모두 이 길을 이용했다. 지난 8일 기장향토문화원 공태도(81) 소장과 부산대 강사인 한정훈(40·한국교통사 전공) 박사와 함께 용소고갯길을 찾아갔다. 공 소장이 앞장섰다.
"기장이 갑화양곡이라 불리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니 2000년 이상 된 옛길이지. 기장현으로 부임·이임하는 현감과 군수, 관찰사, 어사들이 모두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해. 계곡 바위 면에 새겨진 공덕비, 선정비가 7개야. 바위가 거짓말 할 리는 없을 거라. 이 길은 소장수나 등짐·봇짐장수들이 이고 지고 동래, 양산 장터로 가던 눈물고개였고, 일제 때는 애국지사들이 일경의 추격을 피해 넘던 한서린 길이었어."(공태도 소장)
취재팀은 기장읍 차성로 299번길의 옛 기장읍성 남문에서 출발해 용소천을 거슬러 옥곡~윗등부~참샘앞~이내터로 올라갔다. 용소골 웰빙공원을 지나자 '기장 옛길' 표지석과 함께 원두막 쉼터가 나왔다. 표지석은 1996년 공태도 소장 등이 세운 것으로 돼 있다. 공 소장은 "옛길의 개념조차 희미한 때 딴에는 '멀리 보고' 옛길을 살렸는데, 개발에 지장이 된다 하여 원성도 들었다."고 술회했다.
원두막 쉼터를 지나자 계곡 바위에 글을 새긴 선정비가 하나 둘씩 나타났다. 스스로 공덕을 칭송하는 모습이 달갑지는 않지만 옛길의 이정표임엔 틀림없다. 험한 경사지엔 잔도(棧道·험로에 사닥다리를 달아 낸 길)를 놓은 흔적도 있다.
"저길 봐, 여근석(女根石)이야. 여자의 그것을 닮았다고 하지. 나그네들이 바위 아래에 돌을 던지면서 소원을 빌었다고 해."(공태도 소장)
자세히 보니 여근석 바윗면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다. '縣監孫庚鉉永世不忘(현감손경현영세불망)'. 여근석에 불망비를 음각한 건 무슨 뜻이었을까. 어쨌든 묘한 얘깃거리를 가져다준다.
온전히 남은 옛길은 200m 정도지만, 앞뒤를 다듬으면 2~3㎞는 연장될 수 있을 것 같다. 기장군은 지난 2007년 문화재청에 국가문화재 지정을 신청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문화재 지정 여부와 별개로 스토리텔링을 가미해 테마 옛길로 다듬을 경우 훌륭한 문화자원이 될 것"이라고 조언한다.
■동래 가는 옛길
용소고갯길을 넘어서면 기장읍 만화리 이내터마을에 이른다. 고지도에 등장하는 이천현(伊川峴)이다. 마을을 지나면 독립운동가인 이명순 의사 추모비가 있고,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쌍교(雙轎)가 있었다는 철마면 안평저수지 삼거리다. 이 쌍교에서 동래와 양산가는 길이 나누어진다.
동래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철마면 안평리, 고촌리를 지나 반송~명장동~시시골~동래읍성으로 이어진다. 안평리는 조선시대 신명역(新明驛·고려시대엔 기장역)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부산도시철도 4호선 안평역과 차량기지가 들어서 역촌의 맥을 잇고 있다. 조금 아래쪽의 고촌리는 1400여 년 전의 도로 유구가 발굴됐던 곳. 지난 2007년 고촌리 택지개발과정에서 확인된 도로 유구는 길이 300여m, 노폭 2.2~6m이며, 폭 2~2.5m의 잔자갈을 평평하게 깔아 노면을 조성했다. 도로 중앙부엔 폭 1.7m의 차륜흔(수레바퀴 자국)이 뚜렷했다.
한정훈 박사는 "이 도로 유구는 국내에서 희귀한 유적으로 삼국시대 갑화양곡현(기장)과 거칠산군(동래)을 오고 가는 길이었고, 이후에도 기장과 동래를 잇는 중요 교통로로 기능했을 것 같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양산·울산 가는 옛길
쌍교에서 방향을 갈치재(蘆峴·노현)로 잡으면 날음재(飛音峴·비음현)를 넘어 철마면 송정리에 닿는다. 송정(送亭)은 송별정자(送別亭子)의 약칭. 옛날 이곳을 지나던 관원과 장사꾼, 나그네들이 석별의 정을 나누던 정자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철마산 서남 기슭(대우정밀 일대)에 위치하며 양산, 동래로 통하는 큰 길목으로 아직도 5일장이 선다.
송정에서 남쪽으로 가면 동래, 서쪽으로 가면 양산, 북쪽으로 가면 울산이다. 이러한 입지 때문에 '해동지도'에는 네 갈래 길을 의미하는 '구로(衢路)'로 표현하고 있다. 한 박사는 "양산을 경유해 송정~쌍교~기장으로 가는 길은 최단 코스였기 때문에 지방관들이 많이 이용하는 관로(官路)의 성격이 짙고, 영남대로와도 연계가 된다."고 말했다.
철마면 송정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산 쪽으로 가면 월평이다. 월평 역시 예로부터 교통 요충지였다. 학계 일각에선 '삼국사기-거도(居道)열전'에 나오는 장토지야(張吐之野)를 월평으로 비정한다. 신라 초기 거도 장군이 장토지야에 군사를 모아놓고 말놀이(馬技)를 하고, 병마를 출동시켜 거칠산국(동래)과 장산국 등을 정복할 때 월평을 군사거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월평은 조선시대 때 아월역(阿月驛)이 자리했다.
한 박사는 "사료뿐만 아니라 월평리에는 반월성(半月城)이란 토성 흔적과 장군대 설화, 진치재(陳峙峴)같은 지명이 남아 있다."면서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정관~좌광천~좌천~문중리 바닷가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기장읍성에서 씨줄 날줄로 뻗어나간 기장 옛길들은 무심코 지나쳐온 지역사의 풋풋한 뿌리와 줄기를 새롭게 들여다보게 한다.
○ 기장의 고갯길과 사찰길
- 개발 광풍도 버텨낸 스토리텔링 보고들
기장 옛길을 읽는 또 한 가지 포인트는 고갯길과 사찰길이다. 옛날 도로는 산업화·도시화에 떠밀려 대부분 사라졌으나, 고갯길은 이야기를 품고 굽이굽이 돌아가고 있다. 기장은 대운산 달음산 철마산 등 산지가 동서로 뻗어 있어 남북을 잇는 교통로에는 고갯길이 발달했다.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기장현' 편에는 옛 간선로와 함께 고갯길이 표시돼 있어 길눈을 틔워준다.
그 중 유명한 고갯길 중 하나가 일광면 문동리와 장안읍 좌천장을 오가던 '장(場)고개'였다. 조선시대 문동리 해안에는 해창(海倉)이 있었다. 여기서 거두어들인 세곡은 해로를 통해 부산포 왜관 등으로 운송됐다. 옛날 좌촌장으로 불린 좌천장은 요즘도 5일장(4, 9일)이 선다. 장고개는 각종 개발 사업으로 원형이 대부분 사라졌다. 좌천에서 500여m 떨어진 산자락에 옛길 한자락이 남은 게 거의 전부다. 장고개를 넘을 때 장꾼들이 불렀다는 '장타령'도 이제 전설이 되고 있다.
기장은 울산과 동래라는 두 도호부 사이에 위치해 상업이 활발했다. 특히 동래와 기장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상인들의 왕래가 잦았고, 그러다보니 장꾼들 간 영업권 쟁탈전도 벌어졌다.
기장에는 장고개 외에도, 철마면 장전리 대곡마을에서 금정구 회동동을 넘어가는 개좌고개, 철마면 웅천리에서 정관면 매학리 당곡을 잇는 웅천령(곰내재), 철마면 이곡리에서 일광면 용천리를 연결하는 구실재 등이 있다. 하지만 기장댁이 양산으로 시집가며 눈물짓던 고갯마루와 나그네가 시린 무릎을 달래기 위해 막걸리를 마시던 주막들은 사라지고, 큰 고개 밑에는 터널이 뻥뻥 뚫렸다.
기장 옛길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또 사찰길이다. 동래~울산 옛길에서 선여사(船餘寺)로 오르는 산길, 기장읍 내리 앵림산 언저리의 안적사(安寂寺) 옛길, 장안읍 불광산 자락의 장안사(長安寺) 산길 등은 고찰의 역사만큼 유구한 옛길들을 거느리고 있다. 꼼꼼히 들여다보면 하나 하나가 문화자원이다.
출처: 국제신문 6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214.22006194212&kid=k4946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2-13 19:44:36
협찬: 화승그룹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5> 부산 옛길 탐사: 기장 옛길
- 삼국시대부터 기장읍성 중심으로 동래·울산 방면 통하는 길들 열려 - 고촌리 도로 유구, 철마면 송정 지명 등 옛길 역사 짐작케 해 - 기장 관문 역할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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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6> 부산 옛길 탐사: 다대진 가는 길
동래서 100리 길… 왜군 격파 전과도 묻혀버린 변방 중 변방
- 다대첨사 윤흥신 고군분투에도 한동안 위패 안 갖춰져
- 부산진~초량~구평거쳐 가는 길만 3~4가지
- 1600명 주둔할 만큼 다대진 번성했지만, 1895년 이후 허물어져 지금은 흔적만 남아
1757년(영조 33년) 7월. 동래부사로 부임한 조엄은 충렬사를 참배하면서 한 가지 의문을 품는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진 첨사 정발의 위패만 있고, 다대진 첨사 윤흥신의 위패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배를 마친 부사 조엄이 곁에 있던 명륜당 교수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원래부터 없었다 하오이다. 다대진은 땅 끝이라 아는 사람이 적고 관리들의 내왕도 드물어 임진년 난리 때의 사정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하여…."
조엄이 예방에게 '동래읍지' 속의 임진왜란과 윤흥신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도록 하였으나, 그곳에도 특이한 기록이 없다. 조엄이 심란한 표정으로 말한다.
"예방, 여기서 다대진까지 얼마나 되는가?“
"예, 약 100리 길입니다.“
"내 친히 다대포에 가서 알아 봐야겠으니 채비를 하라 일러라."
■다대진 100리 길
이튿날, 다대진 방문길에 오른 부사 일행은 동래읍성에서 광제교(세병교)를 지나 범천(범냇골) 일대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동평면(현 부산진구)을 거쳐 사천면(沙川面) 상단리(현 사상구)·하단리(현 사하구)를 지난다. 장림과 다대포의 경계인 장승배기 고갯마루(현 갈보리교회 맞은 편 언덕)에 이른 조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미산 응봉(鷹峰) 봉수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윤흥신 첨사, 이렇게 먼 땅 끝에서 무도한 왜적을 맞아 외롭게 싸우다 행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가셨구려….'
이날 오후 늦게 서평진(현 구평동)을 지나 다대진에 도착한 조엄은 윤흥신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하고 주민들로부터 증언을 수집한다. 그후 경상감사로 승진한 조엄은 1761년(영조 37)에 윤흥신의 사적을 정리, 조정에 포상을 청했고, 4년 뒤 다대첨사 이해문은 다대포에 윤공단을 세운다. 조엄은 1763년 조선통신사로 대마도에 갔다가 고구마를 처음으로 영도에 전파하는 등 부산과 인연이 각별한 인물이다.
다대문화연구회 한건(71) 회장은 "동래부사 조엄의 다대진 행차로를 추적하면 100리 길의 여정이 어느 정도 잡힌다."면서 "지형과 지명이 크게 달라졌지만 아마 부산진구를 거쳐 사상·사하구를 통해 다대포에 이르는 관로를 이용했을 것 같다."고 했다.
한 회장은 지난해 '다대포 역사 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윤흥신 첨사의 기구한 삶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복원해냈다. 윤흥신의 아버지는 조선 중기 최고 권력자로 사극에 종종 등장하는 윤임이다. 1545년 권력 암투로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윤씨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여섯 살의 윤흥신은 관노로 전락한다. 그후 32년간의 종살이에서 풀려 무과별시에 급제한 윤흥신은 우여곡절 끝에 나이 52세에 다대첨사로 부임해 이듬해 임진왜란을 맞는다.
■3~4가지 추정 루트
동래에서 다대진 가는 길은 육로·수로 등 3~4가지 루트 추정이 가능하다. 고지도상에는 관로(官路)로 추정되는 2가지 길이 나타난다. 옛길 표시가 비교적 자세한 1872년 군현지도 중 '동래부지도'에는 동래에서 부산진을 거쳐 신초량(현 동구 초량동)에서 대티(大峴)고개를 넘어 괴정을 지나 서평진(구평)을 통해 다대진으로 가는 길이 그려져 있다. 1740년 발간된 '동래부지'에는 동래부에서 36리 떨어진 사천면에 대치리(大峙里)가 있다고 하고, 괴정은 군마나 역마를 사육하던 목장리(牧場里)로 나와 옛 교통로의 존재를 알려준다.
이를 오늘날 노선으로 복원하면, 초량동→중구로(코모도호텔 부근)→보수동→도시철도 서대신역→위생병원→대티고개→대티역→괴정동→구평고개 사거리→장림동→다대포 코스가 그려진다. 한편 주영택(74)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은 "민초들은 서구 아미동에서 까치고개를 넘어 감천·구평으로 가는 샛길을 이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18세기 중엽의 '해동지도' 동래부편에는 부산진 일대에서 낙동강이 있는 구포 쪽으로 들어가 사상→사하→신평→장림을 거쳐 다대진으로 가는 길이 뚜렷하게 표시돼 있다. 군마, 수레 등을 이용할 경우 멀기는 해도 이 루트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부산 옛길'을 연구해 온 사람사는세상 연구소 좌상훈(46) 대표는 "동래~다대진은 길이 멀어 다양한 교통로가 이용됐을 것 같다."면서 "좌수영에서 배를 타거나 부산진에서 수운 거점인 구포나루로 가서 다대포로 가는 뱃길도 예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라지는 다대진성
다대포는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과 약탈이 잦은 변방 중 변방이었다. 이곳에 성이 축조된 것은 1490년(성종 21).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쑥대밭이 됐다. 임란 후 군제변혁에 따라 경상좌도 7진 중 하나로 다대진이 설치되고 성도 보수된다. 당시 배치된 병선이 2척, 거북선 1척, 사후선 4척, 방군(防軍)이 1600여명에 달했다고 하니,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케 한다.
다대진성은 1895년 수군영 폐지와 함께 대부분 허물어졌고 그후 도시 개발로 원형을 잃었다. 그나마 남은 성벽과 성돌은 건물이나 주택가의 담장이나 밑돌로 깔려 그 무거운 세월을 견디고 있다. 현 부산유아교육진흥원(옛 다대초교 자리)을 둘러싼 담장 모서리를 돌아가자, 크고 작은 돌덩이로 투박하게 쌓아올린 성벽 일부가 드러났다. 구멍이 숭숭 뚫린 퇴적용암은 필시 바닷가에서 운반해 왔을 테고, 사람 키만 한 큼직한 받침돌은 기단석 위에 올리는 대석이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인근에는 다진진성의 야문(밤에 드나드는 문)터와 군기소 자리, 수군들이 퍼 마셨을 큰샘(우물)이 있었다.
함께 현장을 답사한 한건 회장은 "성터를 둘러싼 이 골목길이 진짜 옛길"이라며 "중요한 역사를 감춘 곳인 만큼 지금이라도 발굴, 복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들이 매년 '윤공단 향사'를 지내고, 윤흥신을 챙긴 일들이 헛되지 않아, 최근에는 해군에서 윤흥신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부산을 가꾸는 모임 서세욱 회장은 "윤공단 향사 때 별을 단 해군 제독들이 줄줄이 참석, 군민 간 소통을 강화하자 다대포 젊은이들의 해군 지원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며 "우리가 지역의 역사인물을 왜 챙겨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 왜군 침공로와 야망대 길
- 임진왜란 첫날 왜군 공격 맞서 하룻동안 수성
- 아미산~다대진성~야망대 일직선 지형 이용해 격파
다대진성 답사는 다대문화연구회 한건 회장과 정승옥(여·51) 사무국장이 줄곧 동행했다. 부산 사하구 다대동로 72번길(일명 야망대 길)을 오르며 한 회장이 말했다.
"이 길이 왜적 침공 루트예요. 지형을 잘 봐요. 다대포의 주산인 아미산 응봉봉수대와 그 밑의 윤공단, 다대진성(터), 야망대가 일직선상에 놓이잖아요. 야망대(夜望臺)는 다대포의 안산(案山)이거든. 윤흥신 첨사는 이 같은 지형을 이용해 임진왜란 첫날 왜군을 무찔렀던 거예요."
한 회장의 연구에 따르면,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왜병 1만8000명이 다대진을 침범했으나, 첫날은 윤흥신 첨사의 지략으로 우리가 승전했다. 왜군은 먼저 경계가 허술한 서평포진(사하구 구평동 해안)을 무너뜨린 뒤 두송반도 산길을 따라 다대포로 진격했다. 윤 첨사는 응봉봉수대와 야망대에서 날아든 '왜군 출현' 급보를 접하고는 성 밖 골짝의 포구나무 숲 속에 매복해 있다 협공을 가해 왜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다음날 부산진성을 접수하고 기세가 오른 왜군의 증원군에 의해 끝내 다대진성을 내주고 윤흥신도 전사한다.
한 회장은 "다대진 전투는 왜군의 공격을 받고도 하루를 넘겨 수성 했으므르 사실상의 첫 승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공단 비문'과 유성룡의 '징비록', 구사맹의 '조망록' 등을 보면, 4월 13일 윤흥신 첨사가 왜적을 물리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계에선 '선조실록'에 의거해 임란 개전일을 4월 14일로, 최초의 승장을 이순신으로 못박고 있다.
야망대는 다대만 동쪽의 나지막한 언덕으로, 옛날 망대가 있던 자리라 해서 불린 이름이다. 밤에 멸치 떼를 살피던 곳이라서 야망대라 했다는 설도 있다.
야망대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학교가 있었고, 1960년대 이후 동아대 설립자인 정재환 총장의 별장이 자리했으나 팔려 현재 유흥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음식점 입구 차고에는 1950년대 산(産) 미제 시보레 자동차가 장작더미에 파묻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과거 한때를 증언하고 있다.
출처: 국제신문 9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221.22009202819&kid=k4946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2-20 20:33:45
협찬: 화승그룹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6> 부산 옛길 탐사: 다대진 가는 길
- 다대첨사 윤흥신 고군분투에도 한동안 위패 안갖춰져 - 부산진~초량~구평거쳐 가는 길만 3~4가지 - 1600명 주둔할만큼 다대진 번성했지만, 1895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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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1> 한양천리: 황산도를 찾아서
동래~밀양 옛길… "소산고개, 임란 의병의 발상지"
- 향토사학자 주영택 탐사에 동행, 황산도 기·종착점 휴산驛 위치 논란
-'대낫들이 길' 동래부사 이·취임 행렬, 길로 번성한 하정마을 새 길로 고립
"어데 가능기요?“
"걸어서 한양 갈라 캅미더.“
"아이고, 그 먼데를 우째 갈랑교?"
동래읍성 동헌 앞에서 한양천리 떠날 채비를 하자, 동래시장(부산 동래구 수안동)에서 행상 하는 할머니가 걱정스레 말을 건다. 먼길 떠나는 자식 걱정 같다. 배낭을 고쳐 매고 워킹화 끈을 동여맨다. 20세기 초반까지도 조상들은 괴나리봇짐에 짚신 대여섯 짝을 달아매고 수시로 바꿔 신으며 저린 발로 눈물고개를 넘었다.
한양은 왜 가는가. 잊혀진 우리 옛길, 황산도, 작천잔도(삼랑진), 팔조령(청도), 유곡도(문경), 멱조고개(용인), 말죽거리(서울)를 찾으러 간다. 한양 가는 길이 지방과 통하므로, 한양으로 가야 막힌 게 뚫리므로.
■이름뿐인 휴산역
황산도(黃山道) 탐사의 첫 동행자는 주영택(74)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 주 원장은 부산 동래에서 양산~삼랑진~밀양을 잇는 황산도 옛길을 찾아낸 향토사학자다.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을 흔히 '영남대로'라고 부르지만, 동래~밀양 구간은 황산도가 원래 명칭이다.
"휴산역(休山驛)을 찾아봐야 해. 그곳이 황산도의 기·종착점이거든. 부산 길의 원형이 되는 역참인데 그 존재를 모르고들 있으니…."(주영택 원장)
휴산역은 문헌에만 존재하는 역이다. '동래부읍지' 역원조에는 '휴산역은 동래부의 남쪽 1리에 있으며, 북쪽의 소산역과 20리 떨어져 있다. 중마 2필, 짐말 5필, 역리 58명이 있다'고 기술돼 있다. 위치는 논란이 따르는데, 주 원장은 현 동래경찰서(옛 농주산 자리) 일대로 본다. 좌수영에서 오면 이섭교(현 연안교 아래)를, 부산진에서 오면 광제교(현 세병교)를 지나온다. 따라서 휴산역에서 해안 포구를 거쳐 해외로 나갈 수 있고, 동남 해안의 역로로 울산-경주 쪽으로 갈 수 있다.
조선 후기 황산도에는 동래부 관할의 휴산역과 소산역(蘇山驛)을 포함해 16개소의 속역이 있었다. 당시의 역(驛)은, 오늘날 터미널 이상의 기능과 역할이 부여됐다. 역에는 역마(驛馬)를 배치하여 관청의 공문서 전달, 진상 공납물의 수송, 공무 여행자를 지원했다. 주 원장은 "휴산역 자리를 찾아 표지석이라도 세워 놓아야 한다."고 했다. 사라진 휴산역에서 '휴~' 한숨을 쉬는 노학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비친다.
■대낫들이 길을 지나며
휴산역에서 동래향교·명륜초등교 앞을 지나 마안산을 바라보며 온천 입구 사거리로 향한다. 동래읍성 암문에서 온천 입구 사거리까지는 '대낫들이 길'로 불리는 곳. 동래부사가 이·취임할 때 기치창검을 세운 늠름한 행렬이 자못 장엄하여 큰(대) 나들이라 했다는 것이다. 명륜초교 뒤편 파리바케트 빵집 앞에 작달막한 표지석이 서 있다. 대낫들이 길에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
"1836년 대흉년 때 민영훈 동래부사가 천 포대의 곡식을 풀어 만민구명(萬民救命)을 했어. 굶어 죽게 된 백성을 살린거야. 이에 탄복한 두구·작장·남산마을 주민들은 이듬해 민 부사 이임때 대낫들이 길에 적삼을 벗어 밟고 걸어가게 했다는 거야.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장면 아닌가."(주영택 원장)
대낫들이 길을 벗어나면서 1592년 임진왜란 때의 그 사내들을 떠올린다. 부산진과 다대진의 첨사 정발과 윤흥신을 차례로 죽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선봉대는 동래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적에게 한양 가는 길을 내줄 수 없다."며 목숨을 버렸고, 경상좌도 군사책임자인 이각(경상좌부사)은 겁을 먹고 북문지기를 죽인 후 도망쳤다. 송상현(당시 나이 42세)은 짧게 살고 불멸의 충신으로 부활했지만, 이각은 목숨을 부지했지만 영원한 비겁자로 전락했다. 길에서 빚어진 순간적인 판단의 결과가 섬뜩하도록 무섭다.
■소산역 가는 길
온천 입구 사거리에서 명륜로로 직진하면 공수물 소공원(금정구 부곡2동)에 다다른다. 공원에 '부사민영훈거사단'이 옮겨져 있다. 만민구명의 덕을 잊지 않은 두구·작장·남산마을 주민들이 세운 공덕비다. 원래 황산도 길목인 지경고개(금정구 노포동 녹동마을)에 있던 것을 1993년 이곳으로 옮겼다.
공수물마을에서 조금 더 가면 부곡3동 기찰(譏察)마을이다. 고지도에 나오는 십휴정기찰(十休亭譏察)은 지금의 금정농협 기찰지점이다. 기찰은 요즘으로 치면 검문소다. 기찰포교(捕校)를 주재시켜 통행자나 신분, 물품 등을 검문 검색했다. 동래여고 앞 체육공원로를 따라가면 왼쪽 편에 태광산업이 있다. 옛날 '역들'이라 불린 자리다. 과거 소산역의 경비 조달을 위해 지급된 역전이 있었다고 한다.
브니엘중고교를 지나자 소산고개가 나온다. 고개 너머에 소산역이 있다. 지금의 금정구 하정마을이다. 소산고개는 임진왜란 때 아군이 방어선을 치고 전투를 벌인 곳으로, 동래성서 빠져나온 경상좌부사 이각이 도주한 길이다. 관군의 방어선이 무너진 곳에 지역의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싸웠다. 이른바 소산전투다. 주 원장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장수들이 숨고 도망가서 전열이 흐트러진 곳에 상현마을 출신의 김정서 의병장이 나타났어. 그는 기장의 김일덕 오흥 의병장 등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소산역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쳐 큰 전과를 올렸지. 그러니까 김정서는 임란 최초의 의병이었고, 소산고개는 조선 의병의 발상지야."
고개를 넘어 상현마을 입구 사거리에서 좌회전, 경부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하정마을이다. 마을 입구 신일농원 가는 길이 황산도 옛길이다. 옛길을 따라 노포동 고분길→팔송 경찰초소→작장마을→대룡마을→지경고개까지 이르는 길가엔 영세불망비, 신도비 등이 즐비하다. 옛길을 증언하는 비석들이다.
하정마을의 노인정이 역터, 개울가가 마방터라고 하고, 지금의 당산나무 옆에서 거릿대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현장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한가하기만 하다. 오히려 경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40여호의 변두리 마을이 더욱 고립된 형국이다. 길로 번성한 역촌이 길로 인해 고립돼 버렸으니 길의 무정이다.
○ 동래읍성 6개 중 골샘 하나만 남아
- 사라지는 옛 우물
- "우물 살려야 지역문화에 생기"
부산 동래구 복천동(福泉洞)은 복이 넘치는 우물을 가진 동네였다. 이름이 그렇다. 조선시대에는 이 일대가 동래부 읍내면 옥미정동(玉未井洞)·대정동(大井洞)·야정동(野井洞) 등으로 일컬어졌다. 어김없이 우물이 들어 있다. 우물은 가담항설이 모이는 자리로,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또 옛길이 우물 옆을 지나는 경우가 많아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동래부지'에는 동래읍성 내에 6개의 우물이 있다고 돼 있다(문헌에 따라선 최대 10개까지 나온다). 그만큼 우물이 성했다. 동래구청사 뒤의 큰샘, 옛 동래여고 자리의 옥샘(옥처럼 맑은 우물), 내성초등학교 앞의 들샘(들판에 있는 우물), 복천동 우성베스토피아 앞의 골샘 등이 이름값 하는 우물로 꼽힌다. '옥샘'은 동래여고 교지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우물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다. 동래구 이정형(46) 문화재 전문위원은 "많은 우물들이 도시개발 과정에서 다 파묻혔고, 이제 골샘 하나 정도가 겨우 남아 있다."고 전했다.
골샘은 안내자 없이는 찾기가 어렵다. 복천동 우성 베스토피아 앞 유성탕 골목 안쪽에 자리잡은 골샘은 정확한 '井'자 석곽 형태다. 가로×세로 약 2m, 높이가 약 30㎝ 정도인데, 겉보기에도 연륜이 느껴진다. 이 전문위원은 "1731년 동래읍성 확장 때 석곽이 만들어졌다고 보면, 최소 300년 역사를 갖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우물도 뚜껑이 닫혀 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 원장은 "사람이 살려면 우선 우물을 파서 물을 먹어야 하므로, 마을의 역사가 우물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면서 "금샘으로 유명한 금정산의 수맥이 이곳까지 닿아 있을 것이므로 우물을 살리는 것은 지역문화를 살리는 것이다."고 말했다.
출처: 국제신문 6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228.22006194902&kid=k4946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2-27 19: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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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1> 한양천리: 황산도를 찾아서
- 향토사학자 주영택 탐사에 동행, 황산도 기·종착점 휴산驛 위치 논란 -`대낫들이 길` 동래부사 이·취임 행렬, 길로 번성한 하정마을 새 길로 고립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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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2> 한양천리: 황산도의 주변 샛길들
신라 때 이름난 온정(溫井:온천장), 범어사 물레방아터 등 발길마다 역사
- 고려의 손꼽히는 문장가 이규보
- 온천수 솟는 샘·계란 익는 수온 등 동래 온천장의 모습 詩에서 그려
- 일제강점기 대지주였던 범어사, 도정위해 물레방앗간 12채 건설
- 돌확과 다듬돌 등 흔적 남기도
'온정(溫井, 온천장), 십휴정(什休亭, 기찰), 소산역(하정마을), 범어사, 계명봉, 금정진(금정산성), 동문, 만덕현(만덕고개)…'.
19세기 후반 동래부지도와 군현지도에 등장하는 지명들이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래읍성을 중심으로 황산도(黃山道·영남대로의 마지막 구간)의 갈림길이 거미줄처럼 엮인 것이 이채롭다. 이게 단순한 길이 아니다. 한양과 동래(부산), 동래의 각 성과 진, 동래와 일본(왜) 간의 숨 가쁜 역사가 그 속에 흐르는 탓이다.
■신라왕이 다녀간 온정 길
황산도, 특히 동래길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한 데엔 온천이 한몫 한 것임에 틀림없다. 동래 온천의 명성은 삼국시대부터 자자했던 것 같다. '신라 31대 신문왕(683년) 때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동래 일원)의 온정에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삼국유사)
고려시대 최고 문장가 중 한 명인 이규보(1168~1241)는 '동박공장향동래욕장지구점이수(同朴公將向東萊浴場池口占二首)'라는 시에 동래 온천장의 모습을 그려냈다. 시 속에는 목욕탕이 아니라 온천수가 콸콸 솟는 샘 아래에 못이 있어 그곳에서 목욕을 했고, 물이 뜨거워 계란을 익히고 차까지 달여 먹었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유명해져 온정을 관리하는 관속인 온정직을 두었고, 욕객들을 위해 온정원을 설치하고 역마까지 두었다. 1766년(영조 42년) 동래부사 강필리는 아홉 칸짜리 집을 지어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고 이를 지키는 대문을 설치했다. 그때 세운 온정개건비(부산시기념물 제14호)가 온천동 농심호텔 후문 쪽의 용각 뜰에 있으며, 동래온천번영회가 관리하고 있다.
동래를 찾은 관리와 사신, 여행자 등이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여독을 푸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온정 가는 옛길은 동래읍성 암문 또는 북문에서 온천교를 지나면 곧바로 닿는다. 거리는 고작 5리. 신라왕이 경주에서 행차할 때는 수레를 타고 언양과 양산을 거쳤거나, 울산 쪽에서 소산역을 따라 오는 코스를 택했을 것 같다.
■금정산성 가는 길
금정산성 오르는 옛길은 온정을 지나 동문으로 이어진다. 1872년 군현지도에는 산성 고갯마루의 동문에서 남문~서문을 따라 낙동강 쪽으로 길이 나타나 있다. 옛날 금정산성 가는 길을 일러주는 결정적인 이정표가 금정산성 부설비(부산시 기념물 제15호)다. 순조 8년(1808) 동래부사 오한원이 성문과 성곽을 수축하고 세웠다.
비석의 석재는 화강석으로 높이 185cm 너비 72cm 두께 35cm다. 비석에는 금정산성의 초축에서 부설 때까지 경위와 공사 내용, 작업 참여자들의 명단이 적혀 있어 사료가치가 높다.
부설비가 위치한 곳은 금정구 장전동 금정초등학교에서 산 쪽으로 200m쯤 떨어진 벽산 블루밍 아파트 공사장. 아파트 공사 관계자는 "비석이 거대한 자연암반에 박혀 있어 옮기기가 어렵고, 입주민들이 좋아해 소공원을 조성해 존치키로 했다."고 말했다. 아파트 측으로선 뜻하지 않은 '보물' 하나를 안은 셈이지만, 산성 진입로에서 비켜난 점이 못내 아쉽다.
■범어사 옛길
범어사(서기 678년 창건) 옛길도 온정 가는 길 못지않게 오래 됐다. 황산도(영남대로)에서 가려면 십휴정 기찰(검문소, 현 금정구 부곡3동)을 지나 구서마을~두실~남산교~서거덤마을~남중마을~팔송정을 거치게 된다.
소나무 8그루와 정자가 있었다는 팔송정은 도시철도 범어사역 7번 출구 바로 위쪽(현 현대자동차운전학원 자리)이다. 답사에 동행한 주영택(74)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은 "바로 위쪽이 팔송진이고, 큰길 건너편이 포구산이다."면서 수영강의 뱃길 역사를 끌어다 붙인다. "임진왜란 때 좌수영을 무너뜨린 왜적이 수영강을 따라 팔송진에서 범어사를 공격해 왔어. 3·1 독립만세 운동 때 범어사 스님들은 범어사 옛길~팔송~포구산의 길을 따라 동래장터로 가서 만세를 불렀고…. 팔송진, 포구산은 수영강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야."
범어사 옛길은 범어정수장(1932년 준공)을 지나 경동아파트를 거쳐 계명봉 오솔길로 이어진다. 계명봉과 양산 사송리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범어사 방향으로 300여m 오르면 '금어동천(金魚洞天·신선이 사는 절경)'이라 새겨진 큼직한 바위를 만난다. 바위 면에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 윤필은(尹弼殷)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조금 더 가면 '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1872년) 등 5기의 비석이 자리한 비석걸에 이른다. 동래부와 범어사의 내밀한 교류를 말해주는 역사 현장이다.
■범어사 물레방아의 추억
범어사 조계문(曹溪門·일주문의 다른 이름)을 지나 계곡 길을 오르면서 주 원장이 묻는다. "범어사 물레방아 이야기 들어봤소?" "그런 게 있었습니까…."
범어사 성보박물관 뒤편 주차장 옆의 범어천 계곡. 흩어진 자연석 속에서 돌확과 원주(圓柱) 형태의 다듬돌을 찾아낸 주 원장이 또박또박 얘기했다. "이게 물레방아 흔적이야. 쌀을 도정하는 데 쓰는 절구나 방아를 걸었던 돌이거든. 이곳에 물레방앗간이 12채나 있었다잖아."
주 원장의 자료 조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범어사는 사유답(寺有沓)이 5000마지기에 이를 정도로 대지주였다. 동래, 금정, 양산 등에서 걷는 소작료만 1만석이 넘었다.
1924년 소작인은 1456명. 이들은 가을 추수가 끝나면 소질메와 지게에 나락(소작료)을 싣고 범어사 옛길을 따라서 운반했다. 이것을 도정하려다 보니 물레방앗간이 필요했고, 수량이 풍부한 범어천이 적지였다. 이 물레방앗간은 해방 전후까지 돌아갔다고 한다.
부산불교문화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물레방앗간은 범어사의 자립경제를 말해주는 풍물로, 스토리텔링을 가미해 재현하면 훌륭한 문화관광자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레방앗간 유물 일부는 성보박물관 옆 야외전시장에도 흩어져 있었다. 범어사 정종학 기획처장은 "몇몇 스님들이 희미하게 물레방앗간을 기억하고 있더라."면서 "문화재 가치를 따져 복원 여부를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범어사 물레방아는 '흘러간 물'이 아니라 되돌려야 할 추억 같았다.
○ 황산도의 공덕비들
- 한국 최초 관세제도 이끈 이만직, 역원 복지 애쓴 내용의 비석 남겨
1887년(고종 15년), 암행어사 이만직은 영남대로의 황산역(양산시 물금)과 소산역(부산 금정구 하정마을)을 거쳐 부산포를 시찰한다. 부산포의 실정을 파악한 그는 조정에 해관 설치를 건의한다. "부산포 개항(1876년) 이후 교역이 늘어남에 따라 일본 수입품에 대해 15~30%의 관세를 물려 국고를 확충해야 합니다." 이에 고종은 '마땅한 조치'라며 윤허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관세제도는 이렇게 시행된다.
이만직의 이 같은 업적은 황산도에 남아 있는 비석에서 확인된다. 부산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마을 비석걸에 있는 '수의상국이공만직영세불망비(繡衣相國李公萬稙永世不忘碑)'에는 이만직이 소산역의 세금 삭감과 역원 복지를 위해 애쓰고 조정에 해관 설치를 건의한 내용이 실려 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 원장은 "이만직은 이를테면 '통상 무역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며 "사료가치 때문에 한때 부산세관박물관에서 옮겨가려고 한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하정마을에 있는 '황산이방최연수애휼역졸비(黃山吏房崔延壽愛恤驛卒碑)'는 상관이 부하를 위해 세운 이색 송덕비. 내용인즉, 이방 최연수가 역졸을 아끼고 보살피는 인격과 덕망이 높아 이방으로 있기에 아깝다는 뜻에서, 소산역과 휴산역의 도장·수리 상관이 1697년(숙종 23년)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 두 기의 비석은 원래 하정마을 비석걸에 쓰러져 나뒹굴고 있던 것을 주 원장이 발견했고, 2007년 12월 금정구가 하정마을 들머리에 복원해 놓았다.
하정2길을 따라가면 황산도는 경부고속도로에 막힌다. 다시 체육공원로로 나와 영락공원 가는 굴다리를 지나면 금정도서관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이 황산도다. 부산톨게이트 옆 갈록산 기슭 길섶에 이상한 형태의 불망비 2기가 서 있다. 18세기 중엽 동래부사를 지낸 정이검과 조재민을 각각 기리는 불망비다. 원래 한 개의 자연석 바위에 나란히 새겨진 마애비였으나, 도로개설 과정에서 분리돼 600m 가량 위쪽으로 옮겨져 따로 복원됐다. 정이검 비석(사진)은 머리 부분에 금이 가 있다. 주 원장은 "2010년 11월 트럭으로 옮기다가 부주의로 땅바닥에 떨어뜨려 석두가 깨진 것"이라며 이나마 살아남은 게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애처로운 황산도의 이정표들이었다.
출처: 국제신문 6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306.22006194451&kid=k4946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3-05 19:50:46
협찬: 화승그룹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2> 한양천리: 황산도의 주변 샛길들
- 고려의 손꼽히는 문장가 이규보 - 온천수 솟는 샘·계란 익는 수온 등 동래 온천장의 모습 詩에서 그려 - 일제강점기 대지주였던 범어사, 도정위해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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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3> 한양천리: 양산길과 황산잔도
상습 침수로 버려진 땅 '메기들' 신도시 변모… 상전벽해 실감
- 600년 넘게 지켜오던 양산읍성, 근대화·도시화 밀려 종적 감춰
- 용화사로 가는 길에 황산잔도
- 험한 벼랑 선반처럼 달아 낸 길, 장사꾼들 자주 떨어져 죽기도
- 황산역터 있던 일아정 복원 등 옛 길 다시 열어가는 사업 진행
- 토목위주 아닌 문화 관점 접근을
사뱃재(사배고개)를 넘는다. 부산과 경남 양산의 경계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씽씽 가볍게 넘지만, 옛날에는 험준해 괴나리봇짐을 싸든 양반·상놈 할 것 없이 몇 번씩 쉬지 않고는 넘지 못했다는 고개다.
고갯마루에 향토사학자 두 분이 나왔다. 정진화(79) 양산향토사연구회장(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과 주영택(74)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이다. 연만한데도 늘 발로 뛰면서 향토사의 빈틈을 메우고 있는 분들이다.
정 회장이 복사해 온 지도 뭉치를 꺼낸다. "이게 있어야 옛길을 찾아요. 1917년 일제시대 5만분의 1 지적도야. 여기에 영남대로(황산도)가 그려져 있어요."
■내송천 따라 가는 옛길
고갯마루에서 보니 길이 가지가지다. 경부고속도로 위쪽에 부산~양산을 잇는 1077번 지방도가 나 있고, 그 옆에 폐도화 된 구 도로와 옛 영남대로(황산도)가 웅크리고 있다. "쯧쯧, 역사가 스민 길을 이렇게 천대해요. 모르니까, 뭘 몰라서 그래." 주 원장이 혼잣말처럼 얘기한다.
지방도를 따라 양산시 동면 사송리, 외송리를 넘겨보며 동면사무소 쪽으로 내려간다. 사송리 일대는 머잖아 신도시가 들어선단다. 길옆으로 내송천이 흐른다. 영남대로는 내송천을 따라간다.
동면사무소에서 약 700m 내려간 곡각지. 정 회장이 일행을 세운다. "이곳이 바로 전진뱅이(바위)야.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이 바위 뒷길에 숨어 왜군들을 창으로 찔러 내송천으로 떨어뜨렸다고 하지. '전진(前陣)'은 전방진지란 뜻이야." 무심하게도, 현장에는 어떤 흔적이나 자취도 없다.
양산 다방삼거리에서 양산시청 앞을 지나 중앙로를 통해 남부사거리와 남부시장을 지나자 양산성당 앞에 다다른다. 양산성당 부근이 옛 양산읍성 서문터라 하고, 동헌(東軒)이 현 중앙동 주민센터(옛 군청), 객사가 현 양산기장축협 자리라고 하는데,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600년 넘은 읍성이 속절없이 시가지에 깔려버린 탓이다.
■양산천의 월천꾼 이야기
물금길 표지를 따라 강서동 영대교(옛 읍포교)를 지난다. 다리 아래 양산천이 흐른다. 영대교는 국계(國界)다리로도 불린다. 신라와 가야가 국경을 맞댄 자리라는 뜻이다. 다리를 지나며 정 회장이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준다.
"옛날엔 이곳에 월천꾼이 있었어요. 사람을 업어 내를 건네주는 일을 업으로 삼던 사람이지. 큰물이 지면 나타나 일을 하곤 했어요. 그것도 무슨 벼슬이라고 수령이나 군수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지."
영대교 건너편 양산향교 앞에서 옛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좌측으로 가면 물금길, 우측으로 가면 언양·밀양·경주길이다. 낙동강의 범람으로 황산도가 물에 잠기면 언양길이 한양으로 가는 대체로가 됐다. 대동여지도 상에 등장하는 윤산역(輪山驛)은 언양길을 지원하던 역참으로 보이며, 현 유산동 양산공단 내 화승화학 근처로 추정된다.
고지도를 보면, 양산에는 동래~양산~밀양을 잇는 영남대로 본도 외에 언양~자인~대구길, 울산~경주길, 기장길, 김해길(뱃길), 감동포(구포)길 등 7개의 길이 뻗어 있다. 이 길 위에 16개 역을 관리하던 황산찰방역이 물금에 자리한다. 양산은 그만큼 교통 요충지였다.
■메기들의 공덕
물금으로 향하자 전면에 물금신도시가 위용을 자랑한다. 양산부산대병원과 양산경찰서, 고층 아파트단지 등이 줄줄이 들어서 목하 양산의 신중심지를 형성 중이다. 범어리를 지나 가촌리로 들어서자 마을 동쪽에 작은 산봉우리 하나가 보인다. 청룡등(靑龍嶝)이다.
"청룡등 앞쪽의 너른 들판을 '메기들'이라 했어요. 양산앞들·석산앞들·물금들을 모두 합쳐 그렇게 불러요. 양산천과 낙동강이 맞닿은 삼각주지역이라 큰물이 지면 범람을 해 메기들의 놀이터가 되곤 했다지요."(주영택 원장)
이런 사정에도, 조선 후기 간악한 관리들은 과세를 하여 민초들의 허리를 꺾었다. 이전 관리들과 달리 1866년께 호위영대장을 지낸 정원용(鄭元容)과 경상도 관찰사 서헌순(徐憲淳), 양산군수 심락정(沈樂正)은 민초들의 고통을 헤아려 메기들에 대해 면세조치를 해 주었다. 청룡등 5부 능선 자락에 세워진 3기의 공덕비는 이러한 사정을 전해준다. 영남대로는 공덕비가 있는 청룡등 동쪽 기슭을 돌아 물금 쪽으로 향한다.
이 메기들이 옥토로 바뀐 건 100년이 채 안 된다. 상습 침수지로 수천 년 동안 거의 버려진 땅을 1925년 양산천 개수공사 후 경작이 가능해졌다. 이곳에 신도시가 들어서고 있으니 또 한 번 상전벽해다.
■벼랑 끝의 황산잔도
영남대로는 물금읍 서부리 물금초교 앞에서 1022번 지방도를 버리고 강변을 파고든다. 물금취수장을 지나 용화사로 가는 길이 그 유명한 '황산베리끝', 바로 황산잔도(黃山棧道)다. 잔도는 험한 벼랑에 선반처럼 달아서 낸 길. 서부리 촌로들은 "워낙 험해 장꾼들이 한 잔 걸치고 지나다가 자주 빠져죽기도 한 곳"이라고 말한다.
황산잔도 주변에는 이런 저런 유적이 많다. 동래부사 정현덕의 불망비가 있고, 시인 묵객들이 노닌 경파대(鏡波臺)라는 강 바위가 자리한다. 잔도 위쪽 오봉산 자락에는 신라 말 최치원이 유상한 임경대(臨鏡臺)가 있다.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는 황산베리끝을 무대로 삼았다. 양산 화제리가 처가인 요산은 "그 당시의 '황산베리끝' 하면 좁기로 이름난 벼룻길로서…", "제사장을 보아서 머리에 이고 그놈의 베리끝을 돌아오자니, 언덕 위에 쌓였던 눈까지 휘몰아쳐…" 식으로 험한 황산잔도의 사정을 묘사했다.
경부선 철로에 깔린 이 옛길이 '거짓말처럼' 복원되고 있다. 국토해양부와 양산시는 현재 물금취수장에서 원동취수장까지 황산잔도 1.9㎞ 구간을 자전거 도로 겸 탐방로로 조성 중이며, 계속해서 삼랑진까지 이어지는 강변길을 열어가고 있다. 양산시는 황산역터에 일아정을 재현하고 임경대 유적지도 정비할 채비다. 애환이 흐르는 영남대로 일부가 '깨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영남대로 복원 사업이 토목 위주가 아니라, 문화 중심, 길의 원형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되길 바라고 있다.
○ 황산 찰방역은
- 중앙직속 관리 배치… 동래 언양 밀양 등 16개 역 관할
- 역리·노비 8800여명, 말 46마리 배치
- 최고책임자인 찰방, 군수 치정 견제
- 지금은 텃밭으로 바뀌어 황량함만… "역사관 만들어 교육·관광에 활용을"
양산향토사연구회 정진화(79) 회장은 꼭 봐야 할 게 있다며 취재팀을 양산시 물금읍 서부리로 안내했다. 물금초교→물금우체국→물금농협을 지나 화산4길로 접어들자 물금제일교회 뒤편에 너른 집터와 대밭이 나왔다.
"이곳이 황산도 16개 역을 관리하던 황산찰방역 자리야. 양산시에서 복원하겠다는 일아정(日哦亭)은 저쪽 산기슭이지."(정진화 회장)
황량한 황산역터다. 육안으로 보이는 건 집터의 잔해와 텃밭뿐이다. 수천 명이 활동했다던 황산역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황산 찰방역은 조선 세조 때 만든 40개 찰방역 가운데 하나로, 윤산·소산·덕천·간곡·아월역 등 동래·언양·밀양 등지의 16개 역을 관할했다고 '영남역지'에 나와 있다. 이곳엔 역리 7638명과 남녀 노비 1176명, 큰 말 7마리, 중간 크기 말 29마리, 짐 싣는 말 10마리 등 모두 46마리의 말이 배치됐다.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이곳의 최고 책임자인 찰방은 종6품으로 중앙 직속이었다. 어사가 순찰을 돌 때 보필하고, 군수(종3품)의 치정을 견제하기도 했다. 황산 찰방역은 철종 8년(1857) 낙동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기자,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로 옮겨졌고, 1895년 역원제 폐지 때 사라졌다. 상삼리의 역터도 이제 전설로만 남았다.
정 회장을 따라 대밭 뒤편으로 올라가자 아담한 무덤 하나가 나왔다. '정헌대부(正憲大夫) 경주 김씨'라 적힌 것으로 보아 벼슬깨나 한 인물 같다. 정 회장은 "황산역의 역리 후손으로 보이는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조선시대 역리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교통 업무에 종사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다. '영남대로'의 저자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는 역민 사회를 '신양역천'(身良役賤·양인 신분으로 천한 일을 맡음)의 등질집단으로 본다. 최 명예교수는 "황산역의 김씨 문중에서는 대원군 시대에 무과에 급제해 경상감영의 중군에 오르거나, 그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도 있었다."면서 "19세기 후반 들어서는 역민의 신분이 향상된 것 같다."고 했다.
양산시가 복원하겠다고 나선 일아정은 황산역의 10여 개 건물에 딸린 정자 가운데 하나다. 정진화 회장은 "황산역이 갖는 역사 문화적 무게를 감안하면, 일아정을 복원할 게 아니라 황산역 역사관(기념관)을 만들어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게 맞다."고 조언했다.
출처: 국제신문 6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313.22006202123&kid=k4946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3-12 20:23:43
협찬: 화승그룹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3> 한양천리: 양산길과 황산잔도
- 600년 넘게 지켜오던 양산읍성, 근대화·도시화 밀려 종적 감춰 - 용화사로 가는 길에 황산잔도 - 험한 벼랑 선반처럼 달아 낸 길, 장사꾼들 자주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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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4> 한양천리: 토교에서 작원관까지
천태산 절벽위 아찔하게 놓인 채 수백년 버텨온 작원잔도
- 영남대로 상에 조성된 벼룻길… 일제 철도공사 피해 원형 보존, 4대강 자전거도로 코앞까지
- 양산 화제~삼랑진 30여개 주막, 모두 논밭이나 갈대숲으로 변해
대동여지도 상의 황산역(양산시 물금리 부근)에서 다음 역인 무흘역(밀양시 삼랑진읍 미전리 부근), 나아가 밀양, 청도까지의 영남대로는 일제 때 놓인 경부선 철도와 거의 일치한다. 한양으로 가는 최단 코스였기 때문이다. 영남대로는 관로(官路)인 탓에 양인이나 하층민들이 함부로 다닐 수 없는 두려운 길이었다. 양산 화제리의 한 촌로는 자신의 조부가 낙동강 벼룻길인 황산잔도를 지나다 동래부사 행렬과 마주쳤는데, '길을 막는다.'며 역졸이 밀치는 바람에 강에 빠져 죽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흙다리가 돌다리로
황산잔도는 자전거 도로 겸 탐방로 공사가 한창이다. 물금 뒷등 꼬불랑 산길을 돌아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로 간다. 배내골과 낙동강을 끼고 있는 화제(花濟)는 작은 산골 문향이다. 최치원이 노닌 임경대가 자리하고, 고려시대 이래 가마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는 화제의 마르지 않는 문학샘이다.
화제리의 자연마을 중 토교(土橋)는 이름 그대로 영남대로가 통과하던 흙다리가 있었던 곳.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돼 있는 화자교(火者橋)가 곧 흙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화(火)로 쓰인 것은 화제리의 불메골에 쇠를 벼리던 쇠부리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도 화제토교(火濟土橋)로 표시돼 있다.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잘 허물어지던 토교는 영조 때 마침내 돌다리로 고쳐진다. 이때 세워진 양산화제석교비(梁山花濟石橋碑)가 토교마을에 남아 있다. 비석에는 석교의 이름과 위치, 세운 내력과 감독한 관리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당시 공역에 참석한 동네는 이천·내포·범서·화제·증산·범어·별양·어곡리 등 8곳이고, 세운 때는 1739년(영조 15) 3월이다. 이 비석은 화제석교가 영남대로 상의 관로임을 알려주고 있다.
■사라진 주막거리
조선 후기 영남대로에는 곳곳에 주막촌이 성행했다. 주막은 관청이 운영하던 원(院)과 구별되는 일종의 민영 숙박업소. 대개 한 두 개의 침실과 술청으로 돼 있고, 밥과 술값은 받지만 숙박비는 따로 받지 않았다.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영남대로에는 약 100곳의 주막촌이 형성돼 있었고 평균 간격은 약 4㎞였다.
양산 화제~삼랑진 사이에도 주막이 적지 않았다. 원동면 서룡리의 신주막(새술막)에는 한창 때 보부상과 나그네들이 쉬어가던 30여 채의 주막과 함께 신주나루가 있었다. 하지만 자취는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모두 전답과 갈대숲으로 변했다.
신주막에서 낙동강 변을 따라 철길 좌측으로 나란히 놓인 영남대로는 원동면 원리의 원동역을 지나면서 철길 우측 편으로 꺾여 천태산 자락을 파고든다. 가는 길에는 가야진사(원동면 용당리)가 있다. 신라 눌지왕이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했다는 역사적인 나루터다.
천태산 자락에는 하주막과 상주막이 있었다. 하주막은 원동면 중리마을 바로 위에, 상주막은 삼랑진읍 검세리 원래 작원관(鵲院關) 부근의 대밭 자리라고 한다. 작원관은 원(院)·관(關)·진(津)의 역할을 담당하던 영남대로의 첫 번째 관문. 천태산이란 천험의 요새를 지나는 길목이어서 이곳만 막으면 누구도 육지로는 통행이 불가능 했다.
영남대로 복원 범시민위원회 이종규(41) 사무국장(삼랑진청년회 부회장)이 상주막에 얽힌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작원관의 문은 일몰과 함께 잠긴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그네들은 상주막에 들러 자야 하지요. 이때 상주막 주모들이 손님을 많이 모으려고 작원관의 기찰포교나 포졸에게 로비를 하여 문을 빨리 닫게 했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재미있는 민담이다.
작원관은 신라군이 가야를 치기 위해 나아갔던 요로였고, 임진왜란 때는 조선의 관민 300여 명이 왜적 1만8000명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벌인 격전지기도 하다.
■신비한 작원잔도
원동면 중리마을을 지나면 낙동강과 산이 딱 붙어서 걸을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어진다. 1900년 초 대륙 침략을 획책하던 일제는 경부선 철도 공사를 벌인다. 철도마저 놓을 수 없는 공간엔 터널을 뚫었다. 그 덕분에 영남대로의 벼룻길인 작원잔도(鵲院棧道) 일부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작원잔도의 원형을 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양산향토사연구회 정진화(79) 회장은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자전거 도로에 어떻게 됐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며 "문화재로 지정해 후세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 회장에게 작원잔도의 존재를 알려준 이는 원동 중리마을에 사는 서영도(83) 옹. 이곳 토박이인 서 옹은 담담하게 잔도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몇 백 년 된 옛길인데 쉽게 없어지나. 사람 손길이 안 닿으면 남지. 어릴 때 천태산 벼룻길에서 소 먹이고 풀 베고 그랬어. 동네 사람들이 삼랑진 장을 오갈 때도 더러 이용했지."
남아 있는 작원잔도 구간은 볼수록 신비했다. 까마득한 절벽에 걸린 외줄기 길과 그 길을 떠받힌 석축, 그 배경이 되고 있는 천태산…. 현장을 함께 본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74) 원장은 "조상들이 이런 황홀한 길을 걸어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떨린다."면서 "문헌에 나오는 원추암(員墜岩)을 밟는 감회도 남다르다."고 말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예전에 한 수령이 지나다가 떨어진 까닭에 원추암이라 한다.'고 해 놓았다.
4대 강 자전거 도로 공사는 작원잔도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다행히 밀양시와 뜻있는 시민들의 요청으로 잔도 구간 일부를 보존키로 했다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문화재 지정 작업이 우선인데도 현장에선 공사 강행 태세다.
현장 지표조사를 진행 중인 우리문화재연구원 이상현 연구원은 "1900년 초 일제가 철도 부설을 구실로 영남대로를 마구 훼손했지만, 작원잔도처럼 원형이 남은 곳이 없지는 않다."면서 "서울~부산에 이르는 영남대로 전 구간을 조사하여 보존할 곳은 지금이라도 조치를 취해놔야 한다."고 지적했다.
○ 삼랑진 '처자교 유적' 어찌되나
- 영남대로 일부 실체 드러내… 물길 터서 관람용 복원해야
낙동강변 밀양시 삼랑진 부근의 작은 절에 중이 살았는데, 동네의 아리따운 처자(처녀)와 사랑에 빠졌다. 두 남녀는 서로의 사랑을 걸고 교통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다리 놓기 시합을 벌였다. 중은 행곡천, 처자는 우곡천의 다리를 맡았고, 처자가 먼저 다리를 완성했다. 중은 자신의 교만과 게으름을 탓하며 서둘러 다리를 짓고는 마을을 떠났다. 사람들은 강가의 이 돌다리를 '처자교'와 '승교(중다리)'라 불러왔다. 삼랑진에 전해져 온 전설이다.
2010년 봄 4대 강 사업 낙동강 12공구인 삼랑진 강변에서 신기하게도 처자교 유적이 드러났다. (재)우리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처자교는 낙동강으로 흐르는 지천 위에 세운 쌍홍예의 석조 교량으로 너비 4.2m에 발굴된 길이는 25.3m다.
최영준(70·전 문화재위원) 고려대 명예교수는 "처자교가 놓인 길이 영남대로다. 지방에서 이런 수준의 다리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면서 "작원관과 작원잔도를 연계해 원형을 살려 복원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처자교 건설에 얽힌 얘기는 복원된 작원관에 옮겨져 있는 작원진석교비와 작원대교비에 소개돼 있다. 유적이 확인됨으로써 전설과 기록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처자교 유적은 발굴 후 보고서만 남긴 채 다시 흙으로 덮였다. 부산국토관리청은 "현장은 강변 저습지로 유적 보존이 어렵고 추가 발굴 대상지도 아니다."며 한발을 빼는 모습이다. 밀양시는 영남대로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와 함께 처자교 유적을 경남도 문화재로 등재할 계획이다.
삼랑진청년회 이종규(41) 부회장은 "저습지라 하지만 물길을 터서 관람용으로 복원해 놓으면 훌륭한 교육·역사자원이 될 수 있다."면서 "이 참에 인근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승교 발굴도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밀양의 뜻있는 시민들은 지난 23일 '영남대로 복원 범시민추진위원회' 창립총회를 갖고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나섰다. 실체를 드러낸 영남대로 일부가 복원될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출처: 국제신문 24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327.22024193550&kid=k4946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3-26 19:40:49
협찬: 화승그룹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4> 한양천리: 토교에서 작원관까지
- 영남대로 상에 조성된 벼룻길…일제 철도공사 피해 원형 보존, 4대강 자전거도로 코앞까지 - 양산 화제~삼랑진 30여개 주막, 모두 논밭이나 갈대숲으로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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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영남대로 작원잔도 찾았다
밀양 삼랑진읍 낙동강 벼랑, 폭 1~2m·길이 100여m 확인
- 문화재 지정해 보전 나서야
확실한 옛날 잔도(棧道·벼랑에 낸 길)였다. 천태산 기슭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가까스로 길이 뚫려 있었다. 고개를 들자 낙동강의 풍광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경이로운 벼룻길이었다. 문헌과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영남대로(황산도) 상의 작원잔도(鵲院棧道) 원형 일부가 확인됐다. 문화재급 가치를 지닌 옛길로 평가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낙동강 자전거 도로 공사에 치여 상당 부분이 훼손될 처지다.
지난 23일 본지 '영남대로 탐사팀'은 정진화(79) 양산향토사연구회장과 주영택(74)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과 함께 경남 밀양시 삼랑진~양산시 원동 사이의 영남대로 옛길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작원잔도 일부를 확인했다. 확인된 지점은 삼랑진읍 검세리 경부선 작원관터널 바깥의 낙동강 벼랑. 잔존 구간은 길이 100여 m, 폭 1~2m이며, 자연지형을 이용해 석대를 세우고 석축을 쌓은 형태다. 사닥다리를 걸기 위해 파낸 바위면의 홈도 발견됐다.
정진화 회장은 "최근 원동면 중리마을에 사는 한 지인이 옛날 벼룻길이 있다 하여 배를 타고 들어가 잔도를 확인했다."면서 "그곳의 원뿔 형태 바위는 문헌에 나오는 원추암(員墜岩)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밀양시 의뢰로 지난 2월부터 영남대로 지표조사를 벌여온 우리문화재연구원 이상현 연구원은 "매우 의미 있는 영남대로 유적이라 당국에 보존을 요청한 상태"라며 "인근의 삼랑진 처자교 유적과 작원관을 연계해 복원하면 훌륭한 문화 관광자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낙동강 자전거 도로 공사다. 부산국토관리청 관계자는 "밀양시 등에서 보존 요청을 해와 남은 잔도에서 다소 이격해 강바닥에 다릿발을 세우는 형태로 자전거 길을 낸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음 달 22일 제4회 자전거축전 전에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어서, 잔도가 제대로 보존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부산대 정징원(고고학과) 명예교수는 "확인된 잔도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선조들의 벼룻길 조성 방법 및 석축 공법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다."면서 "문경 관갑천 잔도 사례처럼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밝혔다.
출처: 국제신문 1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327.22001215745&kid=k4946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3-26 21:58:23
영남대로 작원잔도 찾았다
- 문화재 지정해 보전 나서야 확실한 옛날 잔도(棧道·벼랑에 낸 길)였다. 천태산 기슭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가까스로 길이 뚫려 있었다. 고개를 들자 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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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5> 한양천리: 삼랑진~밀양읍성 길
옛 운송 요충지·민초 생계길… 아리랑고개로 다시 넘겨주소.
- 강·길·산 세 갈래 만나는 삼랑진…경부선 철도·밀양강변과 동행
- 수운·육운시대 명암 겹치던 곳, 사라진 나룻배 포구나무
- 한양길 선비·보부상들 지름길
- 밀양읍성 동문~제사고개 구간, 800년된 모과나무만 우뚝
-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열려 다시 길의 중심으로 부활 예고
삼랑진(三浪津)은 강도, 길도, 산도 대체로 세 갈래다. 밀양강이 낙동강 본류에 흘러들어 만나니 세 물이요, 경부선과 경전선 철도가 마주치니 세 길이며, 천태산·금오산·만어산 자락이 잦아드니 삼랑 들판이다. 나루도 성했다. 삼랑, 조창, 뒷기미, 작원나루 등은 삼랑진의 수운시대를 대변한다. 나라의 관도(官道)인 영남대로가 이런 요충지를 외면할 리 없다. 도로가 철도를 앞지르면서 삼랑진은 한동안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최근 신대구부산 고속도로가 열리면서 다시 길의 중심으로 되살아났다.
■무흘역이 무월(無月)마을로
작원관을 지나온 영남대로는 1017호 지방도와 1022호 지방도가 마주치는 삼랑진읍 네거리에 이른다. 한양으로 급히 가야 하는 파발마가 오른쪽 길을 택했다면 제대로 길을 잡았다.
삼랑진읍 미전리 미전고개 근처에 무흘역(無訖驛)이 있었다고 하는데,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주민들에 따르면, 무흘은 미전리 무월(無月)터널 밑 마을로, 오래 전 미전리에 통합됐다. 일제가 기차 터널을 뚫으면서 '달이 없는(무월) 마을'로 만들었다니 기분이 착잡하다.
밀양으로 가는 영남대로는 1022 지방도(양산~밀양)를 가로질러 무월터널 위쪽 산등성이를 타고 무월터널 맞은편의 경부선 철도 좌측 편 밀양강변을 따라간다. 군데군데 길이 끊기지만 대체로 경부선 철도와 동행한다.
■수운·육운의 요충지
삼랑진은 수운·육운시대의 명암이 겹치는 곳이다. 지금의 삼랑진읍은 경부선 철도가 놓인 1905년 이후에 번성했으며, 그 이전에는 낙동강 밀양강 합수머리인 상부·하부·내부마을 일대가 중심지였다.
삼랑진역에서 약 2㎞ 떨어진 내부마을 일대에는 밀양 현풍 창녕 김해 양산 등지의 세곡을 모아 보관하던 삼랑창(三浪倉)이 있었다. 1765년(영조 41)에 설치된 이 조창은 통영에 있던 삼도수군절제영에 필요한 세곡을 조달했다 하여 통창(統倉·일명 후조창)으로도 불렸다. 통창골이란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내부마을의 '조창만댕이'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7개의 공덕비(영세불망비)가 늘어서 있다. 공덕비들은 주로 조창에 기여한 공적을 기린 것이고, 두 개는 철로 만든 비다. 김해 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내부마을 비석껄이 고개를 넘어 무흘역으로 갔음을 말해준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니, 왼쪽 산정에 다섯 형제의 우애를 기린 오우정(五友亭)이 보이고, 강 건너 김해 생림을 잇는 조창나루터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촌노들의 전언에 따르면 20세기 초까지도 이곳 통창골에는 주막꺼리가 있어 항시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선청(선주들이 근무하던 곳) 주변의 주막에서 낮술을 걸친 뱃사람들이 왈짜패, 장사치들과 뒤섞여 떠들고 흥정하는 소리가 강바람에 실려 올 듯하다.
■영남루 포구나무는 어디가고
밀양강을 따라 오르면 칠성마을의 광탄나루와 남포마을의 이창나루를 차례차례 지난다. 광탄나루 아래 종병탄(鍾柄灘)은 임진왜란 때 작원관 전투에서 패한 아군이 영남대로를 따라온 적군을 피해 건너다 대거 숨진 전적지. 이창나루는 읍성 남쪽의 관문으로 조창이 있었다.
남포마을 앞 가곡동 건널목에서 철길에 깔린 영남대로는 밀양역을 지나 용두산을 끼고 돌아 삼문동으로 건너는 용두보를 만난다. 지금의 삼문동은 강길로 둘러싸인 섬이지만 옛날에는 저습지여서 제방을 쌓아 수해를 막고 그 위를 관도로 썼다. 용두보를 건너면서 영남대로는 다시 오른쪽 경부선 철길과 Y자로 갈라서고, 길손들은 영남루 앞을 거쳐 읍성으로 들어서게 된다. 영남루는 밀양 관아의 객사 건물로 조선시대 3대 명루로 뽑히는 곳. 관리와 선비들이야 누각에 올라 시문을 읊기도 했겠지만, 민초들은 언감생심 쳐다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웠으리라.
나룻배가 밀양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인 시절에는 영남루 밑의 큰 포구나무에 배를 묶었다고 하는데 포구나무는 종적도 없다. 영남루를 앞을 지나 시장통으로 들어가면 옛 내일동 사무소가 나온다. 이곳에 밀양 관아 일부가 복원돼 있고, 길가에 각종 선정비가 늘어서 길마중을 하지만 별 감동은 없다.
■밀양에 남은 영남대로 옛길
지난달 29일 오전 밀양시 교동 밀양시립박물관. 김재학(51) 운영담당이 길동무를 자처하고 나섰다. 김 담당은 밀양의 몇 안 되는 향토사학자이자 밀양박물관의 사실상 책임자다. "박물관 뒷산으로 가 보시지요. 거기 영남대로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도시화 돼 버린 밀양에 영남대로 원형이 있다니! 군현지도와 일제 때의 지적도 등을 비교해본 결과 영남대로 본도가 분명했다. 김 담당이 안내한 곳은 밀양읍성 동문~제사고개 입구까지 약 1㎞ 구간. 밀양대공원 안에 조성된 추화산 자락 산책로 일부다. 노폭은 좁은 곳이 1~2m, 넓은 곳이 3~4m에 달했다. 동문고개 갈림길에는 과거 서낭당과 장승 자리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있었다. 길 곳곳에는 측구(側溝, 배수구) 흔적도 드러났다. 1993년 옛길 일부를 정비해 산책로를 만들었다는데, 지금 보니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밀양읍성의 성내 사람들과 행인들은 관리나 향교 어른들을 만날 확률이 많은 북문길보다, 동문 바깥으로 난 지름길을 주로 택했다. 동문 앞산을 비스듬히 넘어난 길은 산모퉁이를 따라 밀양시립화장장 뒤쪽 계곡을 통과해 동문고개로 향한다. 화장장 뒤쪽 삿갓산 기슭에 약간 돌아가는 옛길이 있어 따라갔더니, 네 갈래 길 복판에 모과나무 한 그루가 떡 버티고 있다. 김 담당은 "무려 800년이 된 영험 있는 모과나무다. 한양 과거길 선비들과 보부상들이 기도를 올리곤 했다."고 설명했다.
동문고개를 지나면 사신 등을 맞는 북정원(北亭院·현 밀양대공원 내 충혼탑 일대) 터가 나오고, 이내 제사고개를 넘게 된다. 고갯길을 넘어서자 쇳~굉음을 쏟으며 터널에서 열차가 빠져나온다. 산자락을 내려가면 북문길과 만나 긴늪송림 앞을 거쳐 청도쪽으로 접어든다.
김 담당은 "밀양대도호부가 번성하고, 밀양아리랑이 명성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남대로가 있다."면서 "옛길에서 풀어낼 수 있는 지역사는 실로 무궁무진한 것 같다."고 말했다.
○ 영남대로 옆의 무장화 케이블
- 일제 때 매설된 통신선로, 日~만주간 최단거리 표식
- 밀양만 수십 개… 옛길 증거
"이게 뭔지 아십니까?"
"… 모르겠는데요. 접도구역 팻말 같군요."
"일제강점기 지하 전화선 표식입니다. 끈질기게도 남아 있죠. 이것이 영남대로 노선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어요."
밀양에 남은 영남대로 옛길(동문터~제사고개 약 1㎞)을 답사하던 중 밀양시립박물관 김재학(51) 운영담당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매설된 '통신선로 표식', 일명 무장화 케이블이 흔들림 없는 영남대로 표식이라는 것이다. 표식의 크기는 가로×세로 15㎝, 높이 20~30㎝ 정도였고, 상단에 화살표 표시가 선명했다.
"대체로 영남대로 길 안쪽 1m 지점에 약 1.2m 깊이로 묻혔으며, 약 200m의 인입선 부위마다 콘크리트 표석을 묻어 두었어요. 이것이 일본 도쿄에서 만주 목경까지 연결됐다고 하더군요. 서울과 부산의 최단거리가 영남대로이니 최단거리에 케이블을 깐 거죠."
일제의 대륙침략은 경부선 철도 부설과 함께 용의주도하게 진행됐다. 지하 전화선도 이 과정에서 구축됐다. 당시 대륙 간 지하 전화선의 감도를 높였던 중개소도 아직 몇 군데 남아 있다.
김 담당은 "밀양지역에만 이런 표식이 수십 개 발견됐다."면서 "옛길 확인에 도움을 주고 있어 되도록 보존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 국제신문 9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403.22009195228&kid=k4946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4-02 19:5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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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5> 한양천리: 삼랑진~밀양읍성 길
- 강·길·산 세 갈래 만나는 삼랑진…경부선 철도·밀양강변과 동행 - 수운·육운시대 명암 겹치던 곳, 사라진 나룻배 포구나무 - 한양길 선비·보부상들 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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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2-6> 한양천리: 밀양 상동~청도역
아래는 강물, 위로는 벼랑, 그 사이로 터널… 현대판 '잔도' 운치
- 100년 역사 아치형태 상동터널
- 짧지만 통과 뒤에는 깊은 여운
- 청도천 건너 내호리 들어서니
- 옛 극장·흙담 정미소 등 오롯이
- 1960년대 모습 재현해 놓은 듯
- 신도리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 청도읍 길목 고수리 납닥바우
- 옛 길손들 만남의 장소·쉼터로
큰 길, 새 길, 잘 닦인 길을 선호하는 요즘이지만, 옛길이 오래되고 나른한 전통 마을에 뜻밖의 생기를 불어넣는 묘약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경남 경북의 경계인 밀양 상동면의 옛 유천역 일대와 청도 유천리(현 유호, 내호리) 주변이 바로 그런 곳이다. 옛길 찾기가 아니었다면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던 곳. 이를테면 옛길이 옛 마을을 불러낸 셈이다.
■옛길과 철도의 조우, 그 후
밀양 제사고개를 넘어선 영남대로는 24번, 25번 국도가 만나는 춘복마을까지 1km 정도 들판 길을 가다 두 갈래로 갈라진다. 긴늪유원지를 엿보며 밀양강(북천수)의 밀산교를 지나 25번 국도를 따라 청도 쪽으로 향하는 길은 주로 장꾼들과 민초들이 이용했던 영남대로다. 이 길은 외가곡~길곡~가곡~금곡원~상동나루(현 상동교)~구역마을~관마을~청도 유천으로 이어진다. 외가곡 마을에는 보두꾼과 마꾼(馬軍)들이 쉬어간 데서 유래했다는 보두껄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춘복마을에서 밀산교를 건너지 않고 곧장 신안리~안인리~유천 방면으로 가는 지름길도 있었다. 안인리 빈지소 유원지에서 옥산리까지 약 2㎞는 1945년 경부선이 복선화되면서 폐도화한 곳. 철도가 놓이기 전엔 이 길이 영남대로였다. 옛길이 철도로, 다시 자동차 길로, 최근엔 걷기 길로 바뀌고 있다 하니, 길의 유전(流轉)이다. 걸어보니 운치 만점이다. 아래는 물길, 위로는 벼랑, '현대판 잔도'가 따로 없다. 강변엔 벚나무와 감나무가 지천이다. 100여 년 전에 건설된 상동터널 2개가 온전히 남아 있고, 쓰다만 침목이 이정표인양 길가에 박혀 있다.
상동터널은 2005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강변의 벼랑을 뚫어 견치석(옹벽용으로 사용하는 가공한 돌)을 촘촘히 놓고, 적벽돌을 아치 형태로 쌓았는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터널은 각각 40m, 60m로 짧지만, 통과 뒤의 여운은 길다. 동행한 밀양시립박물관 김재학(51) 운영담당은 "옛길과 철도(폐선), 자동차도로가 완벽하게 포개진 길이어서 도로사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라고 말했다.
■흐르는 세월 품은 유천
옛길은 상동교가 놓인 상동나루와 구(舊)역마을, 관(館)마을, 옥천리를 지나 청도 땅으로 넘어간다. 구역마을은 지금은 사라진 옛 경부선 유천역 때문에, 관마을은 관리들이 묵었다는 유천역의 역관인 유천관(楡川館)의 존재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다.
25번 국도를 따라 청도 땅으로 들어가면 유천리(현 유호리와 내호리), 조들, 신도리, 원리, 고수리를 지나 청도읍내에 닿는다. 주렁주렁 달린 반시처럼 마을마다 사연이 다채롭다.
청도 유천(楡川·일명 느릅내)은 영남대로가 기억해야 할 마을이다. 청도천과 동창천이 만나는 삼각지에 위치하며 노루목고개, 동바우, 월마 등 신라 패망의 설화가 흐르고, 고려 조선시대엔 큰 역원이 자리했다. 동창천 상류에 운문댐이 막히기 전까지 은어가 많아 청도팔경 중 하나로 '유천어화(楡川漁火)'가 꼽히기도 했다.
청도천을 건너 내호리로 들어가자 입구에 오누이 공원이 길마중을 한다.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긴 이호우, 이영도 남매를 추억한 소공원이다. '우러르면 내 어머님 / 눈물 고이신 눈매 // 얼굴을 묻고 / 아, 宇宙이던 가슴 // 그 자락 / 학 같이 여시고, 이 밤 / 너울너울 아지랑이'. 이영도의 '달무리'가 여수를 자극한다. 곁에는 오빠 이호우의 '살구꽃 핀 마을'이 화답하듯 시비로 서 있다.
이들 오누이가 태어난 내호리의 한옥은 건축사적 의미 때문에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구석구석 문화의 향기가 짙게 배어든 모습이다.
진짜 볼거리는 시장통에 펼쳐져 있다. 흙담과 여닫이 나무문이 달린 정미소, 돌과 콘크리트, 판자를 덧대어 만든 극장건물, 양조장을 개조한 사료판매소, 지붕에 간판을 붙인 철공소…. 그리고 중앙소리사, 구생당약국, 수련다방, 의용소방대…. 이건 흡사 1960년대를 재현해 놓은 영화세트장이다. 그런데 실제였다.
문이 열린 영신정미소에 들어서자, 나락과 등겨, 먼지와 기름이 뒤섞인 특유의 정미소 냄새가 와락 안겨들었다. 진한 향수를 자극하는 냄새다. 정미소 주인 김말순(60) 씨는 "유천에선 거의 유일하게 돌아가는 방앗간이여. 한 80년은 됐다고 혀. 방앗간에 먼지가 돌아야 우리가 먹고 살아."라며 사람 좋게 웃었다.
거리에서 만난 한 주민은 "청도군민인 개그맨 전유성 씨가 오래전에 문 닫은 저 극장건물을 탐낸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귀띔했다.
유천은 이름처럼 강가에 느릅나무를 깊이 박고 흐르는 세월을 품은 채 21세기를 나고 있었다. 길로 번성한 역마을 위로 하늘처럼 높다란 교각을 받힌 신대구부산고속도로가 휑하니 지나간다. 해석하기 난감하지만, 어쨌거나 유천 시장통만은 그 자체로 향수가 숨 쉬는 근대문화의 거리로 살려야 할 것 같았다.
■새마을 정신의 발상지
신도리는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 새마을 정신이 발아한 곳이 영남대로를 끼고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때는 1969년 8월 어느 날. 전용열차에 몸을 실은 박정희 대통령은 수해 복구 현장 시찰을 위해 부산으로 가던 중 청도 신도리 부근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님자, 기차 세워!" 당황한 비서진은 기차를 세웠고, 기차는 몇 백m를 후진하여 신도리에 닿는다. 당시 신도리 주민들은 수해를 겪은 후 협동 단결로 마을길을 새로 닦고 스스로 환경 개선사업을 하고 있었다. 순간 박 대통령의 뇌리에 '그래, 이거다!'는 영감이 스쳤고, 이것이 새마을 운동으로 승화한다.
청도군은 지난해부터 신도마을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박정희 동상을 세우고 옛 '신거역'(신도리, 거연리를 합친 역명)을 복원해 관광자원화 하고 있다. 신도리 정수붕(65) 이장은 "새마을 발상지라 하여 우리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면서 "내국인들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이 찾고 있으며 2014년 농촌테마파크 사업이 끝나면 새마을 정신의 성지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만인의 쉼터, 납닥바우
철도와 국도를 벗하며 원리를 지나 청도읍으로 향하다 보면 고수리의 납닥바위를 지난다. 청도역 바로 옆이다. 걸어서 대구에서 반나절, 밀양에서 반나절 되는 곳이다. 물맛 좋은 찬물샘(冷井)이 있고, 50~60명이 함께 앉을 수 있어 길손들이 쉬어가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헤어지는 길손들은 "납닥바우에서 또 만나세."하고 떠났고, 뜻하지 않게 만난 길손들은 얼싸안고 상봉을 기쁨을 나누던 자리였다. 한양의 과거 소식이나 장꾼들의 물건 정보도 이곳에서 모이거나 흩어졌다. 역로의 이런 쉼터가 있어 전국의 길들은 따로 나 있었지만 모두 통할 수 있었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영남의 선비가 이곳의 찬물샘을 마시고 가면 운이 따른다는 말도 전해진다. '청도군지'에는 '납닥바위가 청·일 전쟁 때 일본군을 한양길로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도 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납닥바우는 1900년 초 경부선 철도공사 때 훼손됐고, 지금은 세평 남짓 바위 일부만 남아 있다. 고수리 주민 김상철(65) 씨는 "이 납닥바우는 원래의 바우가 아닐 거라. 위치만 대략 잡은 거지. 찬물샘이 있지만 철도 때문에 다가가기가 힘들어."라며 지형 변화를 아쉬워했다.
납닥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니 객수(客愁)가 솟구친다. 영남대로를 오간 관원과 역리, 선비, 장꾼들의 얘기소리와 한숨소리가 열차의 굉음에 실려 수런수런 귓전을 파고든다.
○ 기생 운심이를 아시나요
- 빼어난 검무에 재색까지 겸비… 황진이 명성 버금가
- 정조 때 관기로 한양서 명성 자자
- 나이 들자 고향 밀양 내려와 여생
- 지금도 음력 9월9일이면 추모제례
- "밀양검무는 진주 보다 오랜 역사"
밀양땅에 운심(雲心)이란 기생이 있었다. 조선 정조 때의 관기로서 검무에 능해 한양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18세기 말에 검무를 춘 기생들은 대부분 그의 제자였다. 황진이 버금가는 재색까지 겸비해 그가 춤을 추면 뭇 사내들의 가슴이 녹아내렸다고 한다.
나이가 들자 운심은 고향인 밀양시 상동면 신안리로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마음 깊이 사모했던 한 관원과의 만남을 그리다가 혹시 무덤에서라도 볼 수 있으려나 하고 관원들의 왕래가 잦은 역로(驛路·영남대로) 언덕에 묻히길 유언했다. 그렇게 해서 묻힌 자리가 신안리 꿀벵이(蜜岩·일명 굴바위)라고 한다.
그 후 운심이 묘를 벌초하면 한 가지 소원이 성취된다는 이야기가 퍼졌고, 실제로 시집 장가 못간 노처녀 노총각들이 앞 다퉈 운심의 묘를 찾아 참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것이, 5년 전쯤 운심의 묘가 사라져버렸다. 어떤 이는 폭우에 휩쓸려 떠내려갔다고 하고, 누구는 운심이가 꿈에 나타난다 하여 훼손했다고 얘기한다.
이런 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심이 전설의 끈을 끝까지 챙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밀양검무보존회 김은희(60) 회장이다. 김 회장은 매년 음력 9월 9일이면 어김없이 운심이 묘터를 찾아가 벌초를 하고 제를 올리고 있다. '왜 음력 9월 9일이냐'고 묻자, 김 회장은 "제사 날짜 모르는 날에 제사지내는 날이 그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직이 말했다.
"운심이는 춤추는 기생이라 하여 당시에는 천시됐던가 봐요. 하지만 지금은 달리 봐야죠. 운심이가 전수한 밀양 검무는 문화재 대우를 받는 진주검무보다 역사가 오래 됐어요. 박제가의 '정유각집'에 춤사위와 형식이 소개될 정도로 기록도 풍성하고요. 우리나라 검무의 효시는 바로 밀양검무예요. 제가 운심이를 챙기는 이유지요."
역로에 흐르는 사연이 신통방통 대견하다.
출처: 국제신문 6면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417.22006204832&kid=k4946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12-04-16 20:55:29
협찬: 화승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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