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Avatamsaka-sutra, 華嚴經]

2014. 2. 27. 12:45佛敎

화엄경(Avatamsaka-sutra, 華嚴經)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Mahavaipulyabuddhāvatamsaka-sūtra)

(영)Garland Sūtra (산)Avatamsakasūtra

대승불교 경전으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간주되어온 방대한 분량의 대승불교 경전이다.

418~420년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Buddhabhadra : 覺賢이라고도 불림)에 의해 한역된 60권본과 695~699년 실차난타(實叉難陀 Siksananda)에 의해 한역된 80권본, 그리고 티베트어 번역본이 완본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산스크리트 원본은 산실(散失)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80권본은 39품, 티베트본은 45품, 60권본은 34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화엄종을 대성시킨 현수대사(賢首大師) 법장(法藏:643~712)이 60권본을 바탕으로 〈화엄경탐현기 華嚴經探玄記〉라는 해설서를 쓴 이래 60권본이 가장 널리 유포되어왔다. 이 경전은 원래 별도로 전해지던 여러 경들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며, 4세기 중엽 중앙 아시아에서 그 완본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34품 가운데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이 가장 먼저 형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2가지 품은 산스크리트본도 전해지고 있다.

이 경전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과 그로부터 화엄(華嚴)처럼 피어나는 과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내용은 석가모니의 성도(成道) 장면에서 시작되며, 온 세상을 구성하는 원자만큼 무수한 보살과 신적 존재들이 함께 그 성도를 찬탄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에 인드라 신의 궁전에서 큰 모임이 이루어지고, 보살들이 석가모니를 대신해서 가르침을 베푼다. 비슷한 모임들이 지상과 천상의 7곳에서 8회(80권본에서는 9회)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그 모임들에는 항상 큰 영광의 상징들이 나타난다. 그 모임들에서 보살들은 모든 존재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현상은 다른 현상의 원인이 되어 상호의존하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가 다 그대로 부처라고 가르친다. 〈화엄경〉의 마지막 품을 이루고 있는 입법계품은 선재동자(善財童子)라는 소년이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만나면서 도를 추구하는 이야기로서, 〈화엄경〉의 가르침을 평이하고도 재미있게 펼쳐내고 있는 것으로 매우 널리 알려져 있다. 〈화엄경〉은 한역된 이래 동아시아 사상사에 심대한 공헌을 해왔으며, 중국에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6세기에 현수종(賢首宗)이라고도 불리는 화엄종이 흥기했고 선불교와 신유학의 발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원효와 의상 이래로 〈화엄경〉이 중점적으로 연구되었고, 특히 한국 선불교 전통상 지눌의 선교합일(禪敎合一)에서도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한국 불교를 특징짓는 경전의 하나로 간주되어왔다. 일본에서도 화엄종은 크게 성행했는데, 동대사(東大寺)의 대불(大佛)은 그 영향으로 건립된 것이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5h2275a

화엄경(華嚴經)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경전이며, 한국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 가운데 하나로 불교전문강원의 대교과(大敎科) 과정에서 학습되어 왔던 불교 최고의 경전으로 원명은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이며, 현재 한역본(漢譯本)으로는 권수에 따라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60화엄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화엄, 반야(般若)가 번역한 40화엄 등 세 가지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60화엄에는 34품(品), 80화엄에는 39품이 들어 있으며, 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40화엄은 60권본과 80권본의 마지막 장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화엄경≫의 완역본은 아니다.

이 한역본이 나타난 이래 우리나라 및 중국에 화엄사상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그 회통적인 철학성은 동양사상 속에서 하나의 강력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 경은 60화엄의 경우 7처(處:경을 설한 장소) 8회(會:경을 설하는 모임) 34품, 80화엄의 경우는 7처 9회 39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을 설한 장소를 60화엄에 의해서 살펴보면, 제1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와 제2 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는 지상(地上)이고, 제3 도리천회(忉利天會)와 제4 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 제5 도솔천궁회(兜率天宮會), 제6 타화자재천궁회(他化自在天宮會)는 천상(天上)이며 제7은 다시 지상의 보광법당회와 제8 중각강당회(重閣講堂會)에서 설한다.

이 여덟 회좌(會座) 중 보광법당회가 두 번 있으므로 7처가 되고, 80화엄의 경우는 보광법당회가 세 번 있기 때문에 9회가 된다.

그 내용을 보면, 제1회는 석가모니불이 마가다국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이제 막 대각(大覺)을 이루고 묵묵히 앉아 광채를 발하고 있다. 그 둘레에는 많은 보살들이 있어 한 사람씩 일어나 부처님의 덕을 찬양한다. 이 때 석가모니는 이 경의 교주(敎主)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일체가 되어 있다.

제2회에서는 석가모니가 자리를 옮겨 보광법당의 사자좌(獅子座)에 앉아 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먼저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의 법을 설한 뒤 10명의 보살들이 각각 열 가지의 심오한 진리를 설한다.

제3회부터는 설법 장소가 천상으로 옮겨진다. 제3회에서는 십주(十住)의 법을 설하고, 제4회에서는 십행(十行), 제5회에서는 십회향(十廻向), 제6회에서는 십지(十地)를 설한다. 이 제6회는 현재 범어의 원전이 남아 있는 십지품(十地品)이며, ≪화엄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이 품은 ≪십지경 十地經≫으로 따로 편찬되었다.

≪화엄경≫과 ≪십지경≫은 고려 및 조선 시대 승과(僧科)의 교종선(敎宗選) 시험과목으로 채택된 중요 경전이기도 하다. 이 십지품에서는 보살의 수행발전 단계를 열 가지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

십지의 제1은 환희지(歡喜地)로, 깨달음이 열려 기쁨이 넘쳐 있는 경지이다. 제2 이구지(離垢地)는 기본적인 도덕의 훈련 과정이며, 제3 명지(明地)는 무상(無常)의 성찰을 통하여 점차 지혜의 빛을 나타내며, 제4 염지(焰地)는 진리를 향한 열의로 그 지혜가 더욱 증대하며, 제5 난승지(難勝地)는 평등한 마음을 갖추어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지배를 받는 일이 없는 경지이다.

제6 현전지(現前地)는 십평등지(十平等地)를 갖추어 일체가 마음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 허망한 것임을 깨달아 아는 경지이다.

제7 원행지(遠行地)는 일체불법(一切佛法)을 일으키는 경지로서 열반(涅槃)에도 생사(生死)에도 자유로이 출입하며, 제8 부동지(不動地)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는 경지로서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이 자연히 솟아나오며, 제9 선혜지(善慧地)는 훌륭한 지혜를 성취하고 무애행(無碍行)이 이룩되는 경지로서 부처님의 법장(法藏:진리의 창고)에 들어가 불가사의한 큰 힘인 해탈의 지혜를 얻으며, 제10 법운지(法雲地)는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은 번뇌의 불길을 모조리 꺼 버린 해탈의 경지이다.

또한 이 십지품은 그 전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 노력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한다는 이타행(利他行)의 수행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십지는 지혜와 자비가 완성됨에 따라 나타나는 여래성(如來性)의 흥기(興起)와 성기(性起)의 외적인 표현이며, 그에 관한 이론적 체계화로 평가되고 있다.

제7회는 다시 지상의 보광법당에서 지금까지의 설법을 요약해서 설한다. 제8회는 입법계품으로 이 또한 범어 원전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는 선재(善財)라는 동자가 53인의 선지식을 찾아 도(道)를 구하는 과정을 적어 정진이 곧 불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만나는 선지식 중에는 뛰어난 보살만이 아니라 비구·비구니·소년·소녀·의사·장자(長者)·창부(娼婦)·외도(外道) 등 갖가지 직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다.

이는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보리심의 유무가 문제라는 대승불교의 수행 이상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 경에는 십현연기무애법문(十玄緣起無碍法門)·사법계설(四法界說)·육상원융론(六相圓融論) 등 불교의 세계관 및 인생관 등의 주요 사상들이 함축성 있게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이 경을 가져와서 강설한 이후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경이 화엄사상으로서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이 경을 연구하고 화엄종을 창종함에 따라 본격화되었다.

그 뒤 우리나라 불교 교학(敎學)의 중심은 이 경과 ≪법화경 法華經≫을 중심으로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이 경은 선종(禪宗)에서도 그 연구가 활발하여 소의경전으로 삼았으므로, 선종이 주류를 이루었던 조선시대에도 선승들이 한결같이 이 경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특이한 흐름을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승려가 편찬한 이 경에 대한 주석서는 [표]와 같다. 이 경의 판본으로는 신라시대의 화엄사석벽각판(華嚴寺石壁刻板) 및 1098년(숙종 3)의 수창판(壽昌板) 등 25종이 현재 전해오고 있다.

[표] 한국인 찬술 화엄경 주석서

시 대

저 자

주 석 서 명

권수

현존

여부

신 라

元曉

華嚴綱目

1

 

 

華嚴經疏

10

 

 

華嚴經宗要

 

 

華嚴經入法界品抄

2

 

義湘

一乘法界圖

1

 

 

入法界品

1

 

 

華嚴十門看法觀

1

 

智通

華嚴錐洞記

2

 

道身

華嚴一乘問答

2

 

表員

華嚴經文義要決問答

5

 

 

華嚴經要義問答

3

 

海印三昧論

1

 

太賢

華嚴經古迹記

10

 

緣起

華嚴經要訣

12

 

 

華嚴經眞流還源藥圖

1

 

 

華嚴經開宗決疑

30

 

見登

華嚴一乘成佛妙義

1

 

珍嵩

一乘法界圖記

1

 

 

華嚴孔目記

6

 

義融

華嚴經釋名章

1

 

審祥

華嚴經開宗決疑

1

 

梵如

華嚴經要訣

6

 

可歸

華嚴經義綱

1

 

法融

法界圖記

1

고려

均如

釋華嚴經敎分記圓通

10

 

 

釋華嚴經旨歸章圓通

2

 

 

華嚴三寶章圓通記

2

 

 

十句章圓通記

2

 

 

一乘法界圖圓通記

2

 

 

搜玄方軌記

10

 

 

孔目章記

8

 

 

五十要問答記

4

 

 

探玄記釋

28

 

 

入法界品抄記

1

 

知訥

華嚴論節要

3

 

體元

華嚴經觀目在菩薩所

2

 

 

說法門別行疏

 

 

 

 

華嚴經觀音如識品

1

 

미상

法界圖記叢髓錄

4

조선

雲岑

華嚴一乘法界圖註

1

 

定慧

華嚴經疏隱科

미상

 

尙彦

淸凉摘抉隱科

1

 

 

鉤玄記

1

 

最訥

華嚴品目

1

 

有一

華嚴遺忘記

5

 

義沾

華嚴經私記

1

≪화엄경≫은 삼국시대에 유통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로 넘어오면서 신라 화엄학이 정립되었다. 아울러 화엄종이 성립되어 화엄사찰이 건립되기에 이르렀고, 화엄사상도 정립되었다.

현재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화엄경≫은 구례 화엄사에 있는 화엄석경(華嚴石經)이다. 이 석경은 세 종류의 ≪화엄경≫ 번역본 중 어느 것을 새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새긴 연대도 677년(문무왕 17)과 886년(정강왕 1)의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국보로 지정되어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백지묵서사경(新羅白紙墨書寫經)≫은 754년(경덕왕 13)에 필사된 주본(周本)의 일부이다. 여기에서 이 당시에 이미 공덕경(功德經)으로 필사된 것으로 보아 754년보다 훨씬 이전에 전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시대 후기에는 이미 세 종류의 ≪화엄경≫이 모두 전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도 균여(均如)·의천(義天) 등의 고승에 의해 ≪화엄경≫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많은 연구 주석서가 전해 오고 있다.

이 당시에 간행된 것으로는 1020년(현종 11)에 현화사(玄化寺)에서 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을 판각한 기록이 있으며, 해인사에는 1098년에 판각된 삼본화엄경판과 1200년대에 판각된 것이 섞여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도 해인사에서 판각된 1098년 간기(刊記)가 있는 진본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이와 같은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진본·주본·정원본이 여러 종 보존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시대의 간본으로 추정되는 증륜사(拯倫寺) 판본도 전해지고 있다. 이를 보면 고려 숙종 때 삼본화엄경이 모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주 부석사에도 삼본화엄경판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들은 매행 34자씩 배열되어 있는 경판으로 13세기경에 판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엄경≫은 다른 경에 비해 권수가 많아 한번 판각하기란 쉽지 않다.

이 밖에 국가에서 판각한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에 이들 삼본화엄경이 포함되어 있고, 고려 초 의천에 의하여 ≪화엄경≫에 대한 연구 주석서들이 대부분 전래되었다. 속장경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화엄경수소연의초 華嚴經隨疏演義鈔≫ 40권으로 현재 일본 나라(奈良)에 전해지고 있다.

이와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사경공덕(寫經功德)을 위한 ≪화엄경≫의 사경이 금과 은을 사용하여 상당히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선(禪)·교(敎) 양종이 되면서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화엄종이 역사적인 특성을 잃어버려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화엄경≫은 여전히 선교합일사상에서 선·교를 막론하고 주된 자리를 유지하였으나, 다른 경전에 비해서 ≪화엄경≫의 판각은 한동안 침체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인악(仁嶽)과 연담(蓮潭)이 나와 화엄학에 대한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여전히 불경 가운데 왕좌를 누리면서 간행도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유통된 ≪화엄경≫은 한동안 당나라 징관(澄觀)의 소초(疏鈔)에 정원(淨源)이 다시 주석(注釋)을 붙인 120권짜리 ≪화엄경≫이 유행하다가, 징관의 ≪화엄경수소연의초≫가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화엄경≫ 하면 징관의 소초 80권으로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화엄경≫은 워낙 분량이 많은 데다 조선 초기에는 사찰경제가 많은 핍박을 받아 간행이 매우 벅찬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당시는 주로 해인사 대장경판 등 고려 때 목판에서 인출하여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조선 중기에 내려와 불교전문강원에서 ≪화엄경≫이 교재로 채택되어 ≪화엄경≫ 주석본을 참고하게 되었을 것이며, 아울러 ≪화엄경≫ 주석본 판각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판본으로는 1556년(명종 11)에서 1564년까지 9년이 걸려 황해도귀진사(歸眞寺)에서 한강 이북에 있는 20여 개 사찰의 협력을 받아 징관의 소초에 정원이 주석을 붙인 ≪대방광불화엄경소 大方廣佛華嚴經疏≫ 120권본을 판각한 것이 있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서 1635년까지 3년 동안 순천 송광사에서 귀진사 판본을 복각(覆刻)하였는데, 이 때 판각한 경판이 아직도 송광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판은 경상도서봉사(栖鳳寺)와 전라도 여러 사찰의 협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황해도 귀진사 판본은 거리 관계로 구해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686년(숙종 12)에는 영각사(靈覺寺)에서 또 한 차례 복각하였다. 이후 이 120권짜리 ≪화엄경소≫는 더 이상 판각되지 않고 ≪화엄경소초≫가 판각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120권짜리보다 80권짜리 ≪화엄경소초≫가 더 간결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화엄경소초≫는 성총(性聰)에 의하여 1689년부터 1692년까지 전라남도 순천시징광사(澄光寺)를 중심으로 판각되었다. 이 판각도 대원암(大源庵)과 범어사 등 남쪽 사찰의 협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 중 ≪화엄현담 華嚴玄談≫이 빠졌으므로 1700년에 범어사에서 판각하여 보충하였다.

그 뒤 징광사판이 불타 버려서 상언(尙彦)이 영각사를 중심으로 1773년(영조 49)부터 1775년까지 3년이 걸려 징광사판의 오류를 바로잡아 복각하였다. 이 판도 역시 영각사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원정사·묘각사 등 전라도·경상도 사찰의 협조로 이루어졌는데, 1948년 지리산 공비들에 의하여 불타 버렸다.

이후 영각사판이 낡아 1855년(철종 6)에서 1856년 사이에 영기(永奇)가 중심이 되어 봉은사에서 통도사·범어사의 협조로 판각한 경판이 현재까지 봉은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판은 영각사판을 복각한 것으로, 현재 각 강원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화엄경 판각은 여러 사찰에서 힘을 합쳐서 판각한 것과 다른 경전처럼 동시대에 여러 사찰에서 판각한 것이 없고, 경판이 소실된 뒤에 복각한 것이 특징이다.

≪화엄경≫은 워낙 양이 많으므로 판각이 성행하지 않았고, 대신 각 품별(品別) 판각이 상당히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보현행원품> 판각이 제일 성행하였다.

1245년(고종 32)에 정안(鄭晏)이 판각한 해인사본을 비롯하여 1449년(세종 31)의 간본, 1469년(예종 1)의 안성 청룡사판, 1721년(경종 1)의 운흥사판, 1736년(영조 12)의 동화사판, 1742년의 성산 쌍계사판(경판은 해인사에 있음), 1760년(영조 36)의 은진 쌍계사판, 1774년(영조 50)의 지리산 대암난야판(臺岩蘭若板), 1898년의 표충사판과 대둔사판(大芚寺板)이 있다. 특이한 점은 이들 판본이 모두 반야의 번역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밖에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는 고려시대 목판으로는 1331년(충혜왕 1)의 <관음지식품 觀音知識品>, 1349년(충정왕 1)의 <약신중 略神衆>·<정행품 淨行品>·<여래출현품 如來出現品>·<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 등이 있다.(집필자 이기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775

화엄경소(華嚴經疏)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가 분황사(芬皇寺)에 거주할 때 〈화엄경소〉를 저술했는데, 제사십회향품(第四十廻向品)에서 절필(絶筆)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책은 8권의 미완성본으로 전래되었는데, 고려 숙종 때의 고승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원효가 쓴 〈화엄종요 華嚴宗要〉와 합본하여 10권으로 만들었다. 진역(晉譯) 60권본을 대본으로 한 것으로 원제는 〈진역화엄경소〉이다. 현재 국내에는 서문과 제3권인 〈여래광명각품 如來光明覺品〉만이 남아있다. 만주에 판본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원효가 이 책을 쓴 목적은 교파간의 대립과 논쟁을 화쟁(和諍)시키는 데 있었다. 그는 서문에서 불법은 일(一)도 아니고 다(多)도 아니며, 1개의 법이 곧 일체법(一切法)이라고 했으며,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화엄의 교리를 주석하여 이를 증명하려 했다. 책의 전질이 전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중국책에 일부분이 인용된 4교판론(四敎判論)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4교판론은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법장(法藏)의 〈화엄경탐현기 華嚴經探玄記〉, 그의 제자인 혜원(慧苑)의 〈간정기 刊定記〉, 이통현(李通玄)의 〈신화엄경론〉에 인용되어 있다. 교판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의 준말이다. 석가모니의 설법은 경우에 따라 다른 표현을 사용하므로 내용의 상하위 개념을 나누어 경전을 분류하는데, 후대에 여러 종파가 서로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원효는 교(敎)를 새로이 분류함으로써 대립을 해소하고 서로의 불교경전이 평등함을 밝히려 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원효는 전체를 4교로 나누었다. 먼저 삼승교(三乘敎)와 일승교(一乘敎)로 나누고, 삼승교를 다시 법공(法空)을 밝히지 않는 것은 별교(別敎), 법공을 통설(通說)한 것은 통교(通敎)로 나누었다. 또한 일승교 중 보법(譜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수분교(隨分敎)라 하고, 보법을 드러낸 것은 원만교(圓滿敎)라 했다. 그리하여 4교를 설했는데, 별교에는 사제교(四諦敎)·연기경(緣起經) 등을, 통교에는 반야경(般若經)·해심밀경(解深密經) 등을, 수분교에는 영락경(瓔珞經)·범망경(梵網經) 등을, 원만교에는 〈화엄경〉·보현교(普賢敎) 등을 배당했다. 원효의 독특한 학설로 중국과 일본의 교판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5h227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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