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3. 16:55ㆍ法律
양승태, 자신이 반대했던 논리 뒤에 숨다
[한겨레21] 사법 농단 재판에서 ‘공소장일본주의’ 등,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꺼내 든 양 전 대법원장
2009년 2월18일 신영철 대법관 취임식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양승태 당시 대법관은 박시환 대법관 등 ‘독수리 5형제’와 치열한 법리 논쟁을 벌였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박시환·김영란·김용담 대법관, 이용훈 대법원장, 신영철·양승태·김지형 대법관, 뒷줄 왼쪽부터 차한성·전수안·박일환·이홍훈·김능환·안대희·양창수 대법관.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대법관 시절(2005년 2월~2011년 2월) ‘독수리 5형제’와 대척점에 서 있었다. 사법부 보수 세력을 대표한 그는 강고한 ‘보수연합’을 이끌며 이홍훈·전수안·박시환·김영란·김지형 등 진보 성향 대법관들을 소수로 만들었다. 국가보안법과 집시(집회·시위)법 위반 사건 등에서 시민의 권리를 앞세운 ‘독수리 5형제’는 공권력을 우선시하는 양 전 대법원장 쪽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건에서도 많이 부딪쳤다. 양 전 대법원장은 학생들에게 기독교 예배를 강요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대광고 종교 교육 사건’(일명 강의석 사건)에서 “스승에게 불손한 행동을 한 것은 퇴학당할 만하다.”며 학교 편에 섰다. 당시 진보 대법관들은 “종교의 자유 침해에 저항한 강의석을 퇴학시킨 것은 부당하다.”며 강씨 손을 들어줬다. 이는 진보 대법관들이 주도한 유일한 법정의견(다수의견)이었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이건희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다수의견보다 더 관대한 별개의견을 내기도 했다. 진보 대법관들은 이 회장을 처벌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진보 대법관과 사사건건 부딪친 양승태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지금 ‘독수리 5형제’의 신세를 톡톡히 지고 있다. 사법 농단 재판의 피고인이 된 탓이다. 그의 변호인은 과거 진보 대법관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연일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공소장일본주의’다. 공소장일본주의는 피고인을 기소할 때 공소사실만 적은 공소장을 제출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의 기본 원칙이다. 재판부가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은 법정에서 검사와 피고인의 공방을 지켜본 뒤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재판부가 공판 시작 전에 유무죄를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검찰이 공소사실 외에 다른 내용을 추가한 공소장이나 수사기록 등을 함께 제출하면 그것을 본 재판부가 예단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피고인은 재판에서 현저하게 불리해진다.
양 전 대법원장 쪽은 공판준비기일(공판 준비를 위한 재판으로 피고인은 출석 의무가 없다) 시작 전에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 재판장 박남천)에 의견서를 제출해 검찰의 ‘공소장일본주의 위반’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를 일부 반영해 3월25일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공소장에 공소사실과 직접 관계가 없거나 너무 장황하고 불필요하게 기재된 부분이 있다”며 검찰에 공소장 변경을 요구했다. 그러자 양 전 대법원장 쪽은 한발 더 나아가 4월22일 3차 공판준비기일에서 “공소장 변경이 아니라 아예 공소기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진보 성향 대법관들이 10년 전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밝혔던 소수의견과 맥을 같이한다. ‘검찰이 공소장일본주의를 위반했다면 당연히 공소기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당시 양 전 대법원장은 이 소수의견을 반박하는 보충의견을 냈다. 자신이 10년 전 반박했던 의견에 지금은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 사건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이명박 정권의 실세로 꼽혔던 이재오 의원을 꺾고 당선된 문 대표가 1년 반 만에 의원직을 상실해 야당 탄압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창조한국당은 당시 총선 출마를 원하는 비례대표 후보한테서 6억 원을 빌리면서 연 1% 이율의 ‘당채’(당 사무처에서 발행한 채권)를 발행해줬다. 검찰은 1%가 시중금리보다 낮아 그 차이만큼 창조한국당이 이득을 얻었기 때문에 사실상 공천헌금이라며 문 대표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문국현 유죄판결 기억 안 나시나요?
문 대표는 1·2심에서 모두 당선 무효형인 징역 8월이 선고되자 상고했고, 대법원은 전원합의체에서 이 사건을 심리했다. 변호인들은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공소장에 공소사실 외에 창조한국당 당직자들이 주고받은 전자우편과, 비례대표 후보자와 문 대표의 통화 내용 등 온갖 잡다한 것을 덧붙인 것에 주목했다. 변호인들은 검찰이 공소장일본주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공소기각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9 대 4로 문 대표의 상고를 기각했다. 다수의견은 “피고인이 1·2심에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법원 역시 범죄 사실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지장이 없다고 판단해서 공판이 진행되어 법관의 심증 형성이 이미 이뤄졌다면, 공소장일본주의를 어겼다는 이유로 공소를 기각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전수안·박시환·김영란·김지형 대법관은 “공정성에 흠이 있는 상태로 재판이 시작되면 그 이후의 모든 재판 과정에 첫 단계의 불공정성이 영향을 미쳐 전체 재판 과정에 심각한 흠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 공소기각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양 전 대법원장은 소수의견을 반박하는 보충의견을 냈다. 그는 “사안이 복잡하거나 범행 수법이 교묘한 경우에는 범행에 이르는 과정이나 배경 등 전후의 정황에 관한 설명 없이 단순한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만을 기재해서는 공소사실을 완성도 높게 특정할 수도 없다. (중략) 검사가 공소장에 필요한 범위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기재하고, 공판 과정에서 증거를 제출함으로써 이를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형사공판 절차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들을 꾸짖기도 했다. “공소장일본주의를 소수의견과 같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경직되게 이해한다면 오히려 형사사법 절차를 비효율적, 비현실적으로 만들어 정의의 실현에 장애가 초래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그의 의견은 지금 사법 농단 재판에서 검찰의 반박 논리로 활용된다. 검찰은 3월25일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이렇게 반박했다. “이 사건은 지난 6년 동안 양 전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한 조직에서 반복적으로 저지른 복잡한 범죄를 다루고 있다. 직권남용 범죄의 특성을 보면 외견상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 과정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전후 사정과 범행 동기 등을 자세히 설명해야 공소 유지가 가능하다.” 검찰은 공소장에 적힌 내용을 모두 재판에서 입증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처럼 과거의 소신과 정반대 주장을 한 탓에 양 전 대법원장 쪽이 외치는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은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검찰은 그의 주장을 ‘시간 끌기 전략’으로 규정한다. 검찰 관계자는 “사법 농단 사건은 이미 대법원 진상조사단에서 한 차례 조사해 공개된 것이다. 큰 줄거리는 그때 다 공개됐는데, 검찰 수사기록을 보고 재판부가 더 갖게 될 예단이 뭐가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략 https://news.v.daum.net/v/20190503153802866?f=p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입력 2019.05.0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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