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8. 09:18ㆍ歷史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해동의 요순' 세종은 왜 짜증과 불통의 대마왕이 되었나?
(가) “너희는 설총은 옳다 하면서 내가 한 일은 그르다 하는 이유가 뭐냐.” “이 따위가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저속한 선비다.” “내가 너희에게 처음부터 죄주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보자보자 하니 안 되겠다. 죄를 벗기 힘들겠구나.”
사뭇 감정적인 언사로 일관하고 있는 발언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러나 이것은 새 발의 피다.
(나) “대소신료들이 떼지어 날 겁박하는 것이냐” “난 어진 임금이 아니다. 부덕한 임금이라 마음대로 한다.” “내가 세 살 먹은 아이들을 달래는 것 같구나.” “너희가 정승이냐?” “친형제 같은 원로대신도 날 친견하지 않는다. 너희가 무슨 물건이기에 날 보려고 하는가.” “정승 1000명이 나와 말해봐라. 그래도 난 굽히지 않는다.” “분명한 일은 임금 독단으로 한다.”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국보 제320호)에 숨겨놓았다는 부인 사랑의 비밀코드.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는 시아버지(태종) 때문에 멸문의 화를 입은 바 있다. 세종은 처가의 불행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부인이 승하하자 창덕궁 곁에 불당을 세우려 했지만 대소신료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러나 세종은 “난 어진 임금이 아니다. 그러니 불당 하나 쯤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강행했다. 그 때문일까. 세종은 석가모니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으며 부인을 향한 비밀메시지를 담았다는 해석이 있다. 즉 <월인천강지곡> ‘기이’편에 “(부인은)~눈에 보이는 듯 생각하소서. 귀에 들리는 듯 생각하소서.”라는 대목을 넣었다는 것이다.
■ 소통의 대마왕인데…
인용된 말을 곱씹어보면 전형적인 독재자 ‘필’을 풍기니 연산군을 연상할 것이다. 그러나 틀렸다. 독재자의 향기가 배어나는 이 분은 해동의 요순이요,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이시다. 세종대왕이 누구인가. 한글을 창제하고 우수한 금속활자를 만들었으며 역사 농업 음악 과학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성과물들을 책으로 편찬했다.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했다.
무엇보다 세종의 으뜸덕목은 ‘소통’이었다. 단적인 예로 세종은 농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종의 소득세인 공법의 실시를 두고 퇴직 하급관료까지 참여하는 지금의 공론화위원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했다. 그것도 모자라 전국 방방곡곡의 세민(細民·가난한 백성)까지 17만 명이 참여하는 여론조사까지 실시했다.(1430년 3~8월) ‘소통의 대마왕’ 세종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랬으니 후대의 신하·임금들도 세종을 ‘워너비’로 여겼다.
“세종은 ‘해동의 요순’이라 일컬어졌고, 성종은 ‘세종의 고사’를 따라 간언을 받아들이고 선비를 사랑했습니다. 세종과 성종을 따르는 것이 곧 성인을 본받는 것이라 했습니다.”(<명종실록> 1548년 3월14일)
■“설총은 옳고, 난 그르다는 거냐?”
이런 세종대왕이 왜 그렇게 짜증을 부리고, 심지어는 ‘난 부덕한 임금이니 내 맘대로 한다’고 독선을 떨었을까.
인용문 (가)에 등장하는 ‘세종의 왕짜증 사건’은 1444년(세종 26년) 2월20일자 <세종실록>에 기록됐다.
바로 훈민정음 반대 상소를 올린 최만리(?~1445)와의 논쟁이다. 세종은 1443년(세종 25년) 12월30일 세종은 ‘친히 언문 28자를 지어’ 이를 훈민정음이라 한 바 있다.(<세종실록>) 최만리의 상소는 그로부터 한 달 20여일 후인 1444년(세종 26년) 2월 20일 올라왔다.
최만리(?~1445)는 ‘언문’은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따라는 사대주의에 어긋나는 부끄러운 일이라 했다.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는 것이라고도 했다. 최만리는 “설총(655~?)의 이두는 비속한 말이지만 그나마 중국 글자를 빌려서 어조(語助)에 사용했기 때문에 학문을 일으키는 데는 일조했다.”고 나름 평가했다. 그런데 뭐 하러 저속한 글자를 만들어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는 것이었다. 최만리는 특히 “이번에 창제된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일 뿐(不過新奇一藝耳)”이라고 사정없이 깎아 내렸다.
무엇보다 세종을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백성’ 부분이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나랏말이 중국의 말과 달라 잘 통하지 않아서 어리석은 백성이 자기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하기 훨씬 이전부터 한자와 이두만으로는 무지한 백성을 깨우치기 힘들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1426년(세종 8년)에는 “법조문은 한문과 이두로 복잡하게 쓰여 있다.”면서 “문신이라도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법조문을 이제 막 배우는 생도는 얼마나 어렵겠느냐?”고 지적했다. 세종은 최만리의 ‘사대주의에 어긋난다.’ 운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이두’ 부분을 집중 공략한다.
“설총이 이두를 만든 것이 뭐냐.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너는 설총은 옳다 하면서 너의 군상(君上·세종)이 하는 일은 그르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세종은 최만리의 상소 등 반대파들의 반발을 때로는 감정적인 언사로 대응하며 맞받아쳤다.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는 이렇게 한차례의 홍역을 치른 뒤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간송미술관 소장]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어리석은 선비 같으니…”
세종은 최만리를 숨 돌릴 틈 없이 몰아붙였다.
“대체 네가 운서(韻書·한자의 운을 분류하여 일정한 순서로 배열한 일종의 발음자전)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특히 애써 창제한 한글을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일 뿐(不過新奇一藝耳)’이라고 폄훼한 최만리에게 무척 빈정이 상한 듯 했다.
“네가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했느냐. 아니 내가 늘그막에 할 일이 없어 글자를 만들었겠냐. 지금 이게 매사냥이나 하고 있는 것 같으냐. 말이 지나치다.”
세종은 “너희가 나를 보좌하는 신하들이 맞냐?”면서 “(한글창제의 이유를) 분명히 알면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다그쳤다. 비단 최만리뿐이 아니었다. 세종의 짜증은 다른 신하들에게까지 번진다. 처음에는 한글창제에 찬성했다가 반대로 돌아선 김문(?~1448)을 ‘이랬다 저랬다 인사’로 비판했다. 또 홍문관 응교 정창손(1402~1487)을 콕 찍었다.
일전에 세종이 정창손에게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도>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정창손은 그때 세종의 말에 반기를 들었다.
“<상감행실도>를 반포한 후 과연 충신·효자·열녀가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의 행실은 그 사람의 자질에 달렸지 언문 번역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세종은 바로 감히 임금의 말에 토를 단 정창손에게 ‘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비’ 운운하고 욕했다. 세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세종의 ‘짜증’으로 통과된 훈민정음
“사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다. 그냥 최만리의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사리 분별없이 말을 바꿔 대답하는구나. 아니 되겠다.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세종은 마침내 최만리는 물론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 등을 의금부에 가뒀다. 대부분은 다음날 풀려났지만 정창손은 파직됐다. 또 ‘갈지자’ 행보를 했다는 이유로 ‘김문은 국문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소통의 대마왕이라는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에 관한 한 신료들의 반대의견을 감정적으로 깔아뭉개고 밀어 붙었다.
분명한 사실은 극렬할 수 있었던 훈민정음 반대상소가 단 한차례의 상소와 세종의 짜증, 그리고 약식처결로 종결되었고 2년 뒤인 1446년 반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세종의 ‘무논리 왕짜증’이 한글창제를 일사천리로 이끈 원동력이 된 셈이다.
월인석보 판목(보물 제582호). 충남 공주 갑사에 소장됐다. 세종은 사랑하는 부인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둘째아들 수양댜군을 시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다룬 <석보상절>을 편찬했다. 훗날 즉위한 세조(수양대군)는 <석보상절>과 <월인진천강지곡>을 합해 <월인석보>를 제작했다.
월인석보 판목(보물 제582호). 충남 공주 갑사에 소장됐다. 세종은 사랑하는 부인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둘째아들 수양대군을 시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다룬 <석보상절>을 편찬했다. 훗날 즉위한 세조(수양대군)는 <석보상절>과 <월인진천강지곡>을 합해 <월인석보>를 제작했다.
■ 불당을 세우라는 임금과, 죽어도 안 된다는 신하들의 논쟁
1444년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세종의 짜증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인용문 (나)를 보자. 1448년(세종 30년) 세종이 ‘짜증 대마왕’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한 사건이 나온 발언이다.
이 해 7월17일 세종은 “창덕궁 중장(重墻·안쪽 담장) 밖에 있는 문소전(태조와 그 위의 4대조상을 합친 다섯 신위를 모신 곳)의 서북쪽에 불당을 설치하라.”는 명을 내린다. 원래 문소전 동쪽에 불당이 있었고 그곳에 승려가 7명 머물렀다. 그러나 1433년 불당을 허문 뒤에 다시 세우지 않았는데, 세종이 자리를 옮겨 다시 세우라고 승정원에 명한 것이다. 세종은 불당을 굳이 세우는 이유를 “선왕이 세운 불당을 다시 세우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자 요즘의 대통령비서실격인 승정원 관리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길례를 받드는 문소전에 흉하고 더러운 무리(승려)가 곁에 끼어 있으면 어찌 마음이 편하겠냐?”고 아우성쳤다. 세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주 희한한 논리로 대응한다.
“말을 하지 않겠다. 내가 하나하나 대답하면 임금이 너무 말이 많다는 구설에 오를 것이 아니냐.”(<세종실록> 1448년 7월17일)
■“정승 1000명이 와봐라. 내가 말을 듣나.”
다음날인 18일에는 집현전과 삼사(홍문관·사헌부·사간원)까지 반대 대열에 합류했다. 세종의 논리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집현전 직제학 신석조가 19일 새벽까지 두 번에나 임금을 찾아 반발했지만 세종은 “그래? 그럼 궁궐 100보 밖에 세우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신석조가 “궁성 안이나 밖이나 오십보백보”라 대들자 세종은 한마디로 일축해버린다.
“의정(정승) 1000명이 와봐라. 그래도 내 뜻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도승지 이사철이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자 세종은 “이 문제는 내가 독단으로 처리하겠다.”고 잘라버렸다.
“무릇 일이 의심나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는 게 맞다. 그러나 분명한 일은 임금이 독단으로 한다. 너희는 내가 권신의 반대에 부딪쳐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아는가.”
평소 모든 정사를 신하들과 함께 토론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성군 세종의 모습이 아니다. 세종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사철과 신석조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친형제와도 같은 늙은 대신이라도 나를 친히 보지 못한다. 너희가 무슨 물건이기에 반드시 날 보려고 하는가.(汝等何物 必欲引見乎)”
원로대신도 아닌 ‘물건’이 감히 임금을 친견하려드느냐는 것이다. 필자가 원문을 인용하는 것은 이것이 진짜 실록에 기록된 세종대왕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석보상절>(보물 제523호). 세종은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세조)에게 특명을 내렸다.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편찬해서 불교신자인 소헌왕후를 추모하자는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양나라 승우 율사(444~518)의 <석가보>와 당나라 도선 율사(596~667)의 <석씨보> 등을 바탕으로 <석보상절>을 편찬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난 어진 임금이 아니다. 그래서 내 맘대로 한다.”
이번에는 요즘의 장관격인 의정부 육조판서가 나섰다. 여기서도 세종은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이야기를 마구 풀어놓는다.
“백성들이 날 어진 임금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요즘엔 그렇지 않다. 어질지 못한 임금이 불당 하나 내 맘대로 짓지 못하겠느냐.”
발언내용만 보면 억지논리였다, 세종은 “선왕을 위해 짓는 불당인데 뭐가 불가하다는 거냐?”고 고집을 피웠다.
세종은 ‘예전 신하들은 너희처럼 그렇게 유난 떨지 않았다.’면서 “내가 너희들의 똑같은 말을 수없이 듣고 똑같은 말로 대답해야 하느냐. 내가 견딜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 시기의 <세종실록>을 보면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뜻의 ‘부답(不答)’이니 ‘불보(不報)’, 윤허하지 않았다는 의미인 ‘불윤(不允)’이니 하는 단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등장한다. 이 시기에 또 자주 등장하는 세종의 이록이 있다. “나는 어진 임금이 아니다.(我則不賢)”라는 화풀이성 고백이다. 19일 판서들인 하연과 정인지가 나서 불당설치를 반대하자 “어진 임금이라면 반드시 경의 말을 따르겠지만 부덕한 임금이라 따를 수 없다.(若賢君則必從卿等之言 予則否德 不能從也)”고 똑똑히 밝혔다.
그럼에도 반대여론은 들불처럼 번져 성균관 유생인 유상해와 감안경이 반대상소를 올리자 세종은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이들이 “무엇을 알았다는 거냐.”고 되묻자 세종은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며 “내가 대신의 말도 듣지 않았는데 하물며 너희 말을 듣겠느냐?(大臣之言 尙未聽也 況爾等言乎)”고 일축했다. 세종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공격하는 대신들의 상소에 “하루에 상소가 5건인데 어찌 내가 다 읽을 수 있느냐?” “내가 어진 임금이 아니라서 따를 수 없구나.” “똑같은 대답을 어찌 반복해서 할 수 있느냐. 함구한다.”는 등으로 대응했다. 21일과 22일 대신들이 “불당 건립을 취소하라.”고 다그치는 대신들에게 “날 지금 협박(恐動)하는 것이냐?”고 맞받아쳤다.
■ 86살 황희 정승의 간언마저 일축한 세종
22일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자 당시 86살의 영의정 황희가 노구를 이끌고 나섰다. 황희는 “얼굴에 종기가 난 몸으로 상소를 올린다.”면서 “불당설치는 후대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의 대답은 ‘불보(不報)’, 즉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희 정승의 간곡한 당부까지 묵묵부답으로 거절한 세종이었던 것이다.
끝내 집현전 학사들이 집단사표를 냈고, 성균관 유생 및 사부학당(서울에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교육기관) 학생들까지도 수업거부운동까지 펼쳤다. 그래도 세종은 요지부동이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은 물론 유생들까지 흩어지고 대성(사헌부와 사간원)까지 뒤따를 것이니 내가 이제 독부(獨夫)가 되었다.”고 개탄했다. 세종은 “너희가 날 임금으로 여기면 출근하라.”면서 수업을 거부한 유생 500여명에 대해서는 “엄히 국문하라.”는 명까지 내렸다. 대신들은 일제히 엎드려 “임금에게 직언한 학생 500명을 옥에 가둔 사실을 역사서에 쓴다면 후세에 무슨 꼴이냐?”고 고하면서 통곡했다.
■ 천민출신 풍수가를 도로 천민으로 추락시킨 세종
세종은 이성을 잃은 듯 했다. 8월8일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된 목효지라는 풍수가가 불당의 터를 문제 삼는 상소를 올리자 전혀 세종답지 않은 조치를 취한다. 즉 세종은 목효지가 상소에서 “신(臣)은~”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문제 삼았다.
“아니 천인도 신(臣)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
세종은 “그 자를 의금부로 끌고 가 고문토록 하라.”고 명했다. 승정원에서 “귀천의 제한 없이 모두 신(臣)이라 칭할 수 있다.”면서 “아무 문제가 없고 상소를 올린 자를 죄줄 수 없다.”고 했다. 세종은 목효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재상이나 관리, 대간(사헌부·홍문관·사간원)은 물론이고 집현전 관리들과 성균관 유생까지 들고 일어났는데 천인 출신의 풍수가까지 대드니 폭발해버린 것이다.
세종은 목효지에게 환속을 명해 전농시(국가제사에 쓸 곡식을 담당하는 관청)의 종 신분으로 되돌려놓았다. 해동의 성군 세종대왕이 맞나 싶을 정도의 실록 기사다.
■ 양위 불사 선언에 이사 투쟁까지 벌인 세종
그럼에도 불당 반대 여론이 들끓자 세종은 극약처방을 내린다.
“그렇게 불당이 궁궐과 가깝다면 내가 이어(移御·임금이 거처를 옮김)하면 되지 않겠느냐.”하면서 넷째아들인 임영대군(1420~1469)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종실록> 1448년 8월4일조는 “임금이 모든 대소신료와 유생들의 반대에 몹시 불쾌했고, 양위의 뜻을 여러 번 비쳤으며 결국 이어하고 말았다. 그때부터는 누구도 간언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임금 노릇 못해먹겠다.”고 ‘선위의 뜻’까지 비치는 배수의 진을 치고 나서야 세종은 불당건립을 강행했다.
세종은 소통의 대마왕이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을 불통의 지도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판이다.
<월인석보> 제25권(보물 제745-9호). 장흥 보림사 소장이다. 세조(수양대군)가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합본형태로 1459년(세조 5년)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 세종이 이성을 잃은 이유
이쯤에서 지울 수 없는 궁금증이 인다. 아무리 선왕의 뜻이라고 하지만 세종은 왜 그다지 불당 건립에 ‘올인’ 했을까.
1448년 8월4일 <세종실록> 기사와 그 후 68년 후인 1516년(중종 11년) 3월6일 <중종실록> 기사에 단서가 나온다.
“임금이 만년에 지병이 겹쳐 고생한대다 두 아들(광평대군·평원대군)이 잇달아 죽고 여기에 소헌왕후(부인)마저 승하하여 임금의 마음이 기댈 곳이 없었다. 이에… 궁궐 옆에 불당을 두었다.”(<세종실록>)
“일찍이 소헌왕후께서 승하하셨을 때 불당을 대궐 안에 짓고자 하자….”(<중종실록>)
세종이 왜 절대 다수 신료의 비판과 공격을 받으면서도 불당을 설치하려던 것이었을까. 유교 뿐 아니라 국가에 도움이 되고 백성의 실생활에 이로운 것이라면 불교든 뭐든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고 볼 수 있다. 또 숭유억불의 기조를 지향하는 왕조에서 군왕이 공공연하게 유신들 앞에서 불교를 향한 호감을 드러냄으로써 일종의 견제와 균형을 의도했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의 전통이 사라지지 않은 조선 초기였다. 백성들 사이에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신앙을 단시일에 없앨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민심을 안정시키는 방책이었다.
■ 세종의 짜증 속에 비친 부인사랑
그러나 ‘인간 세종’에 초점을 놓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인용한 <세종실록>과 <중종실록> 기사의 교집합이 하나 있으니 바로 ‘소헌왕후의 승하’이다. 세종의 부인인 소현왕후 심씨(1395~1446)는 참 기구한 여인이었다. 원래 임금 자리와는 상관없는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과 혼인했지만 졸지에 세자빈이 되었다. 남편이 즉위함으로써 왕후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했지만 행복한 순간은 잠깐이었다. 외척의 발호를 지나치게 염려한 태종이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온(1375~1418)에게 역적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명백한 모함이었다. 심온은 자결을 강요받고 말았다.(1418년)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이었지만 상왕으로 올라서 군권을 휘두르던 아버지(태종)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었다. 처가가 멸문의 지경으로 몰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글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그림을 곁들인 한글번역본으로 편찬한 <삼강행실도>(시도유형문화재 제160호). 세종의 한글편찬은 결국 글모르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소헌왕후의 심정은 천갈래만갈래로 찢겼을 것이다. 그나마 역적죄를 뒤집어쓴 친정가문이 실제로 천역에 종사하지 않은게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소헌왕후는 평생 속마음을 숨기며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남편(세종)과의 사이에 8남2녀를 두었는데, 문종과 세조(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내로라하는 아들들을 두었다. 소헌왕후는 또한 내명부의 귀감이 되었다. 성격이 워낙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기강이 엄정했다. 후덕한 소헌왕후의 내조 덕분에 세종은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소헌왕후는 남편 세종이 군주의 본보기가 된 것처럼 이상적인 왕비의 롤모델로서 존경을 받았다.
세종으로서는 그런 부인의 가문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을 것이다.
1446년(세종 28년) 3월 소헌왕후가 위독하자 세종은 부인의 쾌차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고, 곧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부덕한 내가 군주가 되어… 집안의 우환이 계속된다. 중궁(中宮)이 질병을 만나 치료하는 방법을 쓰지 못하게 되니….”(<세종실록>)
■ 사랑하는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헌왕후가 승하했다. 소헌왕후 보다 두 살 연하인 세종은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세조)에게 특명을 내린다.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편찬해서 불교신자인 소헌왕후를 추모하자는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양나라 승우 율사(444~518)의 <석가보>와 당나라 도선 율사(596~667)의 <석씨보> 등을 바탕으로 <석보상절>을 편찬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해(1446년) 9월 반포한 훈민정음으로 <석보상절>을 번역했다. 세종은 이 <석보상절>을 보고 583곡에 이르는 노래를 지었는데, 이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수양대군(세조)는 훗날 왕위에 오른 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합본형태로 이뤄진 <월인석보>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선조가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하여 의주에 있을 적에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로 쓴 교서(선조국문유서·보물 제951호)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왜적에 협조하는 이들이 많았다. 선조는 일반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는 한글교서를 내려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병인년(1446년)에 소헌왕후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세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은 이에게 명복을 빌어주는 것은 전경(독경을 위한 불경)보다 더 큰 공덕은 없을 것이니 네(수양대군)가 석보를 번역하여 만드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하시어…. <석보상절>을 만들고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세종에게 올렸더니 읽어보시고 바로 찬송을 지어 이름을 월인천강지곡이라 했다.”
그런데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이 소헌왕후가 승하한지 불과 이틀 뒤인 3월26일 “왕자들을 시켜 불경을 만들라.”고 지시하자 의정부(내각)에서는 찬성했는데 승지들이 반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승지들은 소헌왕후가 병중에 있을 때 불법을 빌려 왕후의 쾌차를 빌 때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사태가 워낙 급박했던 터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승지들은 “만약 부처의 감응이 있다면 왕후의 병세에 차도가 있어야 했는데 소용없지 않았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승지들은 “혹세무민하는 불교를 믿어서는 안 된다.”면서 “윗사람(임금)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세종을 다그쳤다. 세종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보상절>을 편찬하도록 했고,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세종으로서는 부인이 죽은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았는데 불서(<월인석보>)의 편찬을 반대하고 나선 유신(儒臣)들이 얼마나 괘씸했을까. 그래서 세종은 그 지긋지긋한 반대에도 “난 어진 임금이 아니다.” “정승 1000명이 와서 반대해봐라. 내가 듣나”하며 창덕궁 옆에 불당설치를 강행했을 것이다. 평생 마음 고생했을 부인을 추모하려는 마음에….
정조가 원조시절에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한글은 일반백성 뿐 아니라 임금에게도 좋은 소통의 도구였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 월인천강지곡에 숨겨진 코드
또 하나 세종이 <월인천강지곡>를 지으면서 노래의 한 대목에 ‘부인 사랑의 코드’를 살짝 얹어놓았다는 해석도 흥미롭다.(김영욱의 <한글>, 루덴스, 2007에서)
월인천강지곡은 기본적으로 석가의 일대기를 악장이라는 운문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580여곡 중 유독 ‘기이편’의 종결어미가 심상치 않다. “세존의 일을 사뢸 것이니 만 리 바깥의 일이지만 눈에 보이는 듯 생각하소서. 세존의 말씀을 사뢸 것이니 천 년 전의 말이지만 귀에 들리는 듯 생각하소서.”라는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생각하소서.’라는 종결어미를 보라.
만약 이 종결어미를 듣는 사람이 독자일 경우 그 표현은 ‘~리’나, ~니’로 끝날 것인데 유독 두 문장에서만은 ‘하소서’로 끝난다. 그런데 이 ‘하소서’체는 ‘하게’나 ‘하오’ 등과 달라서 극존칭의 대상에게만 사용되는 어투이다. 현대 한국어에서도 기도문에서만 쓰이지 일상생활언어로는 쓰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극존칭의 대상은 소헌왕후 심씨가 아닐까.
세종은 죽은 아내를 위해 석가모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화제를 꾸미고 이를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서사시 속에 숨겨놓은 것은 아닐까. 사랑 코드를 일종의 비밀편지처럼 붙여 아내에게 보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부인은)~눈에 보이는 듯 생각하소서. 귀에 들리는 듯 생각하소서.”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이야기는 이런 ‘왕짜증 사건 2편’에도 만만치 않은 사연을 담고 있다. 경향신문 http://photo.khan.co.kr/khan_index.html?artid=201811221021001&code=960100 이기환 선임기자 입력: 2018.11.22 10:21 수정: 2018.11.23 18:58
<참고자료>
김영욱, <한글>, 루덴스, 2007
고영근, 박금자, 고성환, 윤석민, <월인천강지곡의 텍스트분석>, 집문당. 2003
김슬옹, <28자로 이룬 문자혁명>, 아이세움, 2007
박현모, ‘성주와 독부 사이-척불논쟁과 정치가 세종의 고뇌’, <정치사상연구> 제11집 2호, 한국정치사상학회, 2005
민명숙, ‘월인천강지곡의 성립과 불교사적 의의‘, <선문화연구> 21권,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16.
조선 최초의 '전 백성' 여론조사, 그걸 세종이 해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430년(세종 12년) 세종은 공법 시행을 놓고 무려 5개월간 17만명이 참여한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찬성 57.1%(9만8657명, 반대 42.9%( 7만4149명)로 집계됐다.
“전국의 전·현직 관리는 물론이고 세민(細民·가난하고 비천한 백성)들에게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 그 결과를 아뢰도록 하라.” 1430년(세종 12년) 3월 5일 세종대왕은 가히 혁명적인 명을 내린다. 호조가 ‘전답 1결 당 조 10두 징수’를 골자로 한 공법(세금) 방안을 제출하자 세종이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지시한 것이다.
이 최초의 여론조사에는 무려 5개월여가 걸렸다. 꼭 4개월이 지난 7월5일에는 ‘여론조사 중간점검 회의’까지 열었다. 이때 호조판서 안순(1371~1440)은 “지금까지의 조사를 보면 경상도에서는 찬성이 많고 함길·평안·황해·강원 등은 반대가 많다”고 중간보고했다. 세종은 “각 도의 (여론 조사) 결과가 도착하면 중앙 및 지방의 관리들은 공법의 장단점과 해결방안을 마련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세종실록> 1430년 8월10일자에 실린 공법 관련 기사에서 여론조사를 분석한 각 도별 결과. 전라와 경상 등 상대적으로 전답이 많고 비옥한 지역의 찬성률이 높았고, 강원 평안 함길 등 척박한 지역일수록 반대여론이 높았다. (소진형의 논문에서 인용한 표를 재정리한 것)
■ 찬성 57.1%, 반대 42.9%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8월10일 마침내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총 17만2806명 가운데 찬성 9만8657명, 반대는 7만4149명’이었다. <세종지리지>에 따르면 당시의 조선인구가 69만 2477명이었으니 인구의 4분의 1이 참여한 대규모 여론조사였던 것이다. 어린이를 빼면 전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국민투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날짜 실록은 3품 이하 전·현직 관리들의 찬반과 각도 감사·수령과 백성들의 찬반 결과를 숫자로 기록했다. 즉 3품 이하의 전·현직 관리 중 찬성은 702명(현직 259명 전직 443명), 반대가 510명(현직 393명 전직 117명)이었다. 3품 이상의 고위 및 3사(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관리들은 “공법의 장단점과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세종의 지시에 따라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했다. 기자가 1430년 8월15일자 <세종실록>에서 의견을 피력한 3품 이상 및 3사 관리들의 찬반을 분석해보니 찬성은 26명 안팎이었고, 반대는 89명 안팎이었다. 절충안을 제시한 경우도 2~3명 정도는 됐다.(물론 숫자 없이 의견만 피력한 정3점 이상 및 삼사 관리들만 인용했으니 정확치는 않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공법을 추진하려 했다. 세종은 1427년(세종 9년) 4품이하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중시)의 책문(일종의 논술고사)에서 ‘공법의 단점을 보완할 대책을 강구하라’는 시제를 냈다. 이때 ‘공법시행을 적극 찬동한’ 정인지가 장원을 차지했다, 정인지는 훗날 공법추진의 담당자가 됐다.
시도별 여론조사 결과에서 주목할 것은 전라도(찬성 2만9547명 반대 269명)와 경상도(찬성 3만6317명 반대 393명), 경기도(찬성 1만7106명 반대 241명) 등 3도에서 99%의 찬성 몰표가 나왔다는 점이다. 개성 유후사(특별시)에서도 94.1%(찬성 1123명 반대 71명)가 찬성했다.
그러나 충청도(찬성률 33%·찬성 6995명 반대 1만4039명)와 황해도(22.3%·찬성 4471명 반대 1만5618명)의 찬성률은 저조했고, 논밭이 부족한 강원도는 12.6%(찬성 944명 반대 6898명)에 그쳤다. 특히 국경지대인데다 땅이 척박한 평안도는 4.5%(찬성 1332명 반대 2만8510명)에 머물렀으며, 그나마 함길도는 주민의 단 1%(찬성 78명 반대 7401명)만이 공법에 찬성했다.
전체적으로는 여론조사에 응한 백성의 57.1%가 찬성표를, 42.9%가 반대표를 던졌다, 그렇다면 여론조사 결과가 과반을 기록한 이상 ‘해마다 전답 1결 당 조 10두 징수’를 골자로 한 공법안은 통과돼야 마땅했다,
■ 3분의 2 가중 다수결 원칙까지
그런데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장시간 관리들의 백가쟁명식 견해와 대책을 모두 청취한 세종은 고심 끝에 뜻밖의 결정을 내린다. “영의정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이날 영의정 황희과 우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등이 “공평치 않고 자칫 국가재정의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공법의 시행을 극력 반대했다. 그러니까 세종은 5개월간이나 공들여 진행해온 여론조사 결과에 반해 공법안의 시행을 ‘보류’한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공법의 시행을 추진하던 세종은 1443년(세종 25년) 10월 27일 또 한 번 흥미를 끌만한 제안을 던진다.
세종대왕의 최고의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훈민정음> 창제하라 할 수 있다. 공법의 완성 또한 세종의 숨겨진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지금 공법은 시행하지 않더라도 후세 자손들은 반드시 재론할 것이다. 그러니 미룰 수 없다. 과인은 경상·전라 양도의 백성 중 공법의 시행을 희망하는 자가 3분의 2가 되면 우선 이 양 도에서 시행할 것이다.”(<세종실록>)
어떤 중요한 정책을 두고 일종의 국민투표라 할 수 있는 여론조사를 실시한 왕조시대 군주가 급기야 현대에서도 시행하기 어렵다는 3분의 2 가중 다수결 원칙까지 천명했다. 민주주의의 기틀이 다져진 유럽에서도 볼 수 없는, 가히 해동의 성군다운 세종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 세종의 최악의 세법을 택했다
렇다면 세종대왕이 그토록 시행하고자 했던 공법(貢法)은 무엇인가. 공법은 해마다 일정량의 곡물을 거두는 정액제 세금을 가리킨다. 그러나 맹자는 풍흉에 관계없이 일정세액을 거둬가는 공법을 최악의 세법으로 지목했다.(<맹자> ‘등문공’) 일정액을 책정하다보니 풍흉에 관계없이 풍년 때는 너무 적게, 흉년 때는 너무 지나치게 거둬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동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왜 맹자가 ‘최악의 세법’이라 폄훼한 ‘공법’을 도입하려 했을까. 여말선초의 세금제도는 답험손실법이었다. 일단 ‘논 1결마다 조미 30두, 밭 1결마다 잡곡 30두’로 정했다. 그런 뒤 가을철 추수기에 관리들이 현장 조사를 통해 한 해 농사작황의 등급을 정하고(답험·踏驗), 그 작황 등급에 따라 적당한 비율로 조세를 감면(손실·損失)해 주었다. 이것이 답험손실법의 골자다.
세종의 업적으로 물시계인 자격루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진실로 아름다운 법이었다”는 세종의 평가처럼 답험손실법은 제대로 작동되기만 한다면 그렇게 이상적인 제도일 수 없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문제가 아닌가. 이 제도는 전적으로 현장조사관의 능력과 인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법규정은 미비했고, 전문성 있고 청렴한 관리는 적었다. 그런 마당에 수령과 감사에 재량권을 주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었다.
그러자 태종은 1415년(태종 15년) 다른 도의 위관(임시로 뽑은 관리)이 1차로 현장 조사한 뒤, 2차로 해당 고을의 수령이 재검하며, 3차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경차관·조관)가 최종적으로 심사해서 결정하는 ‘3심제’를 도입했다. 현장조사 하는 위관의 지나친 재량권을 막으려고, 다른 지역의 관리를 투입하는 상피제를 채택했고, 그것도 모자라 중앙관리를 파견해서 세율을 최종결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법과 편법이 난무했다.
■ 현장조사 관리 접대에 등골이 휘어진다.
“매양 벼농사를 답험할 때 중앙에서 조관을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감사(도지사)에게 위임하기도 하며… 각 지방 향곡(鄕曲·두메산골)에 늘 거주하는 지방관을 위관(委官)을 삼았는데… 이들이 조세행정에 어둡기도 하고, 혹은 사정에 끌려 멋대로 줄이거나 보태고… 간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기도 하며…”(<세종실록> 1430년 3월5일)
세종은 무엇보다 현장조사에 나선 관리들의 접대에 백성들의 등골이 휘어진다는 것을 너무도 가슴아파했다.
“현장조사에 나선 관리는 물론이고 하인들의 접대비용까지도 모두 민간에서 나오고… 농민들은 앞 다퉈 술과 음식으로 후히 대접하면서 ‘세금 좀 낮춰 달라.’고 청탁한다. 접대비용이 오히려 세금 액수와 맞먹고….”(<세종실록> 1437년 7월9일자)
1435년(세종 17년) 답험손실법의 폐단이 수치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해 작황이 좋았는데도 충청도에서 현지조사(답험)를 통해 집계된 실전(실제로 경작하고 있는 전답)의 결수가 겨우 8%에 그친 것이다.(<세종실록>) 현지 수령과 감사(도지사)의 현지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받아야 할 세금이 줄줄 새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고 직접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지 않았다. 백성들은 세금과 맞먹는 접대비용 및 뇌물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격루가 물시계라면 앙부일기는 해시계다. 이 또한 세종대왕의 업적이다,
■ 공법은 부자에게는 다행, 빈자에게는 불행?
그렇다면 세종은 왜 찬성이 과반을 기록한 여론조사 결과에도 ‘보류’ 결정을 내렸을까. 우선 영의정 황희(1363~1452), 우의정 맹사성(1360~1438), 찬성 허조(1369~1439) 등 고위 관리들의 반대가 거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반대론자들은 세종식 공법이 ‘부자에는 다행이고, 백성에는 불행’이라고 주장했다.(<세종실록> 1430년 8월10일)
즉 비옥한 전답을 점유하는 자들은 거개가 부강한 자들이며 척박한 전토를 갖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빈한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답이 넓고 비옥한 전라·경상도 등에서 99%의 찬성 몰표가, 척박하고 비좁은 평안·함길에서는 거꾸로 95~99%의 반대 몰표가 나왔다는 것이다. 특히 기존의 답험손실법에서는 ‘결당 30두’ 원칙에서 그 해의 풍흉에 따라 감해주었는데, 공법은 ‘1결당=10두’라는 일정액을 부여했다. 반대론자들인 이것이 문제라 했다. 이들은 “부자나 빈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들에게 1결당 10두씩 일정한 양의 세금을 거두는 것은 결국 부자에게만 유리한 세금제도이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결당 10두’로 세금을 낮추는 결과가 되니 세수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도 지적됐다. 또한 풍년·홍년을 가리지 않고 일정액을 거두는 것 자체가 백성들의 불만을 사는 요인이라 꼬집었다. 반대론자들은 차라리 조세 관련 전문 관료들을 육성해서 현지조사(답험손실)에 나서게 하는 등의 제도개선을 주장했다.
세종은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개발하려 애썼다. 세종은 각 도 감사에게 명하여 각지의 익숙한 농군들에게 물어 땅에 따라 이미 경험한 바를 자세히 듣고 수집하여 편찬하고, 인쇄, 보급했다. 세종 시대의 문신인 정초와 변효문 등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농서다.
■ 여론조사의 조작 가능성 제기
어떤 이들은 여론조사의 결과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형조판서 정연(1389~1444)가 대표적이다.
“부자는 일반적으로 좋은 전답을 갖고 있고 빈민들은 척박한 땅을 경작합니다. 그래서 부자는 공법을 좋아하지만 빈민은 싫어합니다. 지금 경상·전라 양도의 경우 공법 찬성자가 3분의 2가 넘지만 아마도 호족과 부유층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세종실록> 1438년 7월10일)
한마디로 정연은 전라·경상 양도의 ‘공법=찬성 몰표’는 호족과 부유층의 여론조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조참판 안숭선(1392~1452)은 공법 찬성론자이기는 했지만 ‘다수결’로 정책을 결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옛 것을 좋아하고 새 것을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감정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현혹되어 다른 백성(소수의 백성)의 선호도에 따라 발언한다면… 결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세종실록> 1438년 7월 10일)
세종의 공법 여론조사는 이처럼 ‘여론조작’ 및 ‘다수결의 원칙’과 관련된 논란으로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리 있는 주장들이었다. 특히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 등 재상들의 반대는 ‘과반의 찬성여론’에도 세종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세종은 ‘황희 등의 의론(반대)에 따른다.’며 한발 물러선 이유다.
세종은 조선의 하늘에서 일어나는 각종 천문현상 및 북극고도 관측과 각종 역법이론을 연구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인 칠정산을 만들었다.
■ 애덤 스미스보다 350년 먼저
하지만 세종이 ‘공법’을 줄기차게 주장한 이유가 또 있었다. 바로 ‘불확실성을 배제한 공평조세’였다. ‘조세의 공평’은 고전학파 경제학의 창시자인 영국의 애덤 스미스(1723~1790)가 조세부과의 4원칙 가운데 하나로 ‘예측가능한 공평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조세의 기본원칙으로 강조됐다.(<국부론>) 애덤 스미스는 특히 ‘아무리 큰 불공평도 아주 작은 불확실성만큼 유해하지는 않다’는 주장했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보다 350여년이나 앞선 15세기 중엽, 그것도 절대군주인 세종이 ‘불확실성을 배제한 공평과세를 부르짖었고, 그것을 나름 실행에 옮겼으니 이것이야말로 천고에 빛날 세종의 또 다른 업적이 아닐까.
과장이 아니다. 1437년(세종 19년) 7월9일 세부적인 공법안을 만든 호조가 세종에게 아뢴 대목을 보라.
“공법이 만들어지면 백성들은 모두 미리 바칠 조세의 양을 알아서 스스로 납부하게 되므로 번거롭지 않을 것이며… 세법은 만세에 행해질 것입니다.”(<세종실록>)
그것이 바로 평균 수확량을 고려해서 매년 일정액의 조세를 징수하는 공법을 도입한 이유이다. 조세의 확실성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세종 말년에 개발된 신기전, 조선시대에 사용된 로켓추진 화살이라는 평을 듣는다.
■ 꺼져가던 불씨 살린 정인지
꺼져가던 ‘공법’의 불씨를 되살린 이는 바로 충청도 감사 정인지(1396~1478)였다. 정인지는 공법논의가 중단된 지 6년이 지난 1436년(세종 18년) 2월 22일 “풍흉에 따라 수확량과 세율을 조정하는 답험손실법이 가장 알맞지만 그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공법을 시행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정인지는 특히 “‘공법보다 좋지 않은 법이 없다.’는 <맹자>의 언급은 후대의 실수로 전해진 것”이라 단언했다.
정인지가 누구인가. 바로 세종이 ‘공법’을 과거(중시·重試)의 책문 시제로 출제했을 때 ‘답험손실법의 폐단이 너무 크니 공법을 시행해야 한다.’는 출제자의 의도에 꼭 맞는 정답을 써서 급제자 12명 중 장원(수석)을 차지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정인지는 세종의 공법 시행에 실무책임자가 되었다.
그랬으니 1446년(세종 28년) 6월18일 세종은 “경(정인지) 등이 중시(과거)에서 책문의 답안을 썼고, 경이 충청감사에 있을 때 공법 재추진의 상소를 올려 청했기 때문에 내가 결단을 내렸다.”고 치켜세웠다.
■ 세수증가보다 민생이 먼저
물론 세종은 황희 등의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일부 도(전라·경상)에서 시범으로 실시하면서 최대한 반영해가며 공법의 틀을 짜갔다. 그 와중에 “전라·경상도민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실시한다.”는 ‘가중 다수결’의 개념까지 설파한 것이다.(<세종실록> 1443년 10월 27일) 시험 운영 중 드러난 문제점은 그때그때 수정·보완했다.
단적인 예가 1438년(세종 20년)부터 공법을 시험 운용하자 단 1년 만에 세수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공법 시험 시행으로 세수가 늘었지만 예전 답험손실법의 폐단으로 드는 부당한 비용의 일부를 오히려 세수로 환수했다.”고 밝혔다.(<세종실록> 1439년 5월4일)
그렇지만 세종은 공법 시험 시행에 따른 세수증가를 당연시하지 않았다.
1441년(세종 23년) 7월 5일 우의정 신개(1374~1446)는 “공법을 시범시행중인 전라도(52%↑)와 경상도(70%↑)는 물론 처음 시행하는 충청도(108%↑)에서도 세수가 급증했다.”면서 백성의 가중된 부담을 우려했다.
그러자 세종은 “내가 백성을 괴롭혀 세수 증대를 꾀하려고 하는 줄 아느냐?”고 묻고는 “그저 답험손실법의 폐단을 없애고 민생을 편리하게 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설득했다.
세종은 4군6진과 대마도 정벌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1419년(세종 1) 6월에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임명하여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 그림은 전쟁기념관에 있는 대마도 정벌 기록화다.
■ 세종 덕분에 창고가 넘쳐난 조선
결국 세종은 논의중단과 재개, 그리고 시험 운용을 통해 공법을 아주 세밀하게 다듬어갔고, 1444년(세종 26년) 윤 7월23일 ‘전분 6등과 연분 9등’의 공법을 마침내 확정했다.
결부법(면적이 아니라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는 토지계산법)을 근간으로 해서 비옥도에 따라 각 전답의 면적을 6등분으로 나눠 1차 공평과세를 이루는 것이 전분 6등법이다. 또 해마다 풍흉에 따른 계량적인 세율로 조세를 징수하여 2차 공평과세를 실현하려는 것이 연분 9등법이다. 덧붙여 이전까지는 농부의 수지척(손가락 길이)으로 어림잡아 계산하던 제도를 폐지하고 표준자(주척)을 기준으로 한 과학적인 양전척을 사용하도록 했다.
공법은 한마디로 부정부패를 원천봉쇄하는 제도를 마련해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었다. 처음엔 원망했던 백성들도 차츰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이렇게 세종이 즉위 후부터 30년 가까이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심지어는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전국의 17만 명이 참여한 여론조사까지 실시하면서, 미세조정을 거쳐 가며 완성한 공법은 이후 조선의 공식 세법이 되었다. 1460년(세조 6년) 편찬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으나 말이다.
성종시대에 들어 “백성들은 세종께서 만든 전분 6등, 연분 9등의 공법을 편리하게 여겼고, 참으로 만세토록 지켜 시행해야할 법”(<성종실록> 1474년 7월24일)이라고 했고, “공법이 완성되자 백성들이 원망했지만 오래 행한 뒤에는 도리어 편하게 여겼다.”(<성종실록> 1478년 1월17일)고 했다.
■ 세종의 업적에서 추가해야 할 공법
1551년(명종 7년) 7월4일 영의정 이기(1476~1552)는 “예전 성종조에 와서는 창고가 다 차고 쌀을 저장할 곳이 없었다.”면서 풍성했던 조선왕조의 ‘리즈 시절’을 회상했다.
“<경국대전>에 정해진 공법은 지극히 자세하고 정밀하여…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게 중용을 지켰는데… 창고가 다 차고 쌀을 저장할 곳이 없었는데… 백관은 물론이고 기술자들의 녹봉과 보수가 차고 넘쳤습니다.”
세종이 그렇게 조세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면서 이룩한 국가의 재정수입으로 조선은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다.
흔히들 세종대왕의 업적을 논할 때 훈민정음 창제를 첫손으로 꼽고 ‘대마도 정벌’과 ‘4군6진 개척’, ‘앙부일구’해시계)·‘자격루’(물시계)·측우기 등 과학기술의 발명, 신기전 등 각종 화약무기의 개량 개발,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서 ‘농사직설’ 편찬, 한성을 기준으로 한 역법 ‘칠정산’의 편찬 등을 열거한다.
그러나 그러한 업적 가운데 국민투표를 방불케 하는, 그야말로 왕조시대에 걸맞지 않은 ‘전 백성 여론조사’까지 실시해서 이룩한 조세제도, 즉 공법의 확립을 빼놓는다면 지하의 세종대왕께서 섭섭해 하실 것 같다. 왕위에 오르는 그 순간부터 26년간이나 민주적 절차에 의해 절차탁마하며 공들여온 ‘확실한 조세제도’였으니까 말이다.
(이 기사는 오기수의 단행본인 ‘<세종 공법>’(조율·2016년)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또한 소진형의 논문인 ‘세종시대 공법 논쟁에서 나타난 조세개혁과 인정의 관계, 그리고 그 범주 및 의미’(<정치사상연구> 24, 정치사상학회, 2018)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0080500001&code=960100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2019.10.08 05:00 수정: 2019.10.08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