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문화유적

2021. 6. 11. 08:15歷史

밀양에서 좋은 기운을 내는 땅으로는 읍내의 교동, 산외면의 다원, 부북면의 퇴로를 든다.

2021년 밀양시립박물관 전시해설자 양성교육이 2021년 6월 9일 ~ 7월 8일까지 매주 수, 목요일에 문화유적 현장 약 20여 곳을 방문하면서 이루어지는데, 6월 9일은 영남루를 6월 10일은 수산제를 답사하였다.

6월 9일 목요일

농경문화의 발달(水利施設)
수산제(守山堤): 경상남도 기념물 제102호

수산제(守山堤)는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3대 저수지의 하나이다.

삼한 시대부터 있었던 수산제는 주위의 고지대로부터 저지대로 모여든 물과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龍津江, 안강) 물이 넘쳐 농지로 범람해 들어오는 것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어 주변 농경지에 이 물을 대어 농사를 짓기 위해 쌓은 제방이다. 전체 규모는 약 4,468㎡ 정도 되었다고 한다.

또한 양수와 배수를 위하여 강바닥의 암반 밑으로 폭 1.5m, 높이 1.8m 가량의 수문을 내었다. 황토로 다져져 있던 제방과 저수지는 대부분 농경지로 바뀌었고, 그 수문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6월 16일 수요일

모렴당(慕濂堂)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

모렴당(慕濂堂) 안인(安忍)은 광주 안씨 중조 시어사 안수(安綏)의 9대손이고, 예안현감 안억수(安億壽)의 손자이고, 만호(萬戶) 안여효(安汝孝)의 맏아들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숙부인 정암(貞庵)공이 안평대군과 더불어 양산 적소(謫所)에서 같이 화를 당한 뒤에 관직에서 사퇴하고 또 자손에게도 벼슬길에 오르지 말기를 경계 하였는데 그는 1507년(중종 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사림에 높은 명망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원대한 앞날을 기대하였으나 조부의 유훈을 받고 부터는 과거에 올라 벼슬하려는 생각을 아주 버렸다. 일찍이 천거를 받아 익찬(翊贊) 벼슬로 불렸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揷浦(부북면 사포리)마을에 숨어 살며 못을 파서 연(蓮)을 심고 못 가에다 정자를 지어서 모렴당(慕廉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염계(灑溪) 주돈희(周敦희-송나라의 학자) 선생이 연을 좋아하던 뜻을 본받은 것이었다.

그가 조용히 앉아 태극도통서(太極圖通書)를 마음 새겨 읽으면서 성리학의 다함없는 묘리를 연구하였는데 못의 물빛이 추녀와 뜰에 비치고 연꽃의 향기가 안석과 문간에 스며들어서 끝없는 풍월과 더불어 말없는 중에 주(周)선생과 합치하는 의사가 있었다.

그 당시 그의 족형 태만(苔巒) 안구는 사간(司諫) 벼슬에 있다가 퇴직해 있었고, 복재(僕齋) 김유(金紐)는 점필재 선생의 손자인데 그와 더불어 이웃에 사는 벗이 되어 이야기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6월 16일 수요일

조선시대 밀양의 교육기관(敎育機關)

예림서원(禮林書院)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1567년(명종 2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종직(金宗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중동면 자씨산(慈氏山) 아래에 덕성서원(德城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에 복원하였다. 1634년(인조 12) 지금의 밀양시 상남면 예림리로 이건하였고, 서원 명칭을 예림서원으로 바꾸었으며, 박한주(朴漢柱)와 신계성(申季誠)을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이후 1680년(숙종 6) 지금의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다시 이건되어 보존되어 오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예림’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毁撤)되었다가 1874년에 강당을 복구하고 예림재로 개편하였으며, 1921년 향중(鄕中: 향원들의 동아리)유림이 사우(祠宇) 유지(遺址)에 설단(設壇)하고 향사(享祀: 제사)를 실시해왔다.

6월 17일 목요일

밀양 관아지(密陽 官衙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270호(2009년 7월 16일 지정)
밀양시 내일동

지방의 수령(守令)이 공무(公務)를 처리하던 곳을 관아(官衙)라 하는데, 『밀주구지(密州舊誌)』에 밀양의 관아에 대하여 “아사내외 동서헌별실백여간 임진왜란탕진무여 만력신해부사원유남중창(衙舍內外 東西軒別室百餘間 壬辰倭亂蕩盡無餘 萬曆辛亥府使元裕男重創)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밀양읍성이 축조될 당시에 관아도 백여 칸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본래 있던 건물은 선조25년(1592년) 4월 임진왜란으로 모조리 불타버렸는데, 왜란 후 선조32년(1599년)에 당시 부사 이영(李英)이 영남루 경내에 우선 초옥(草屋)을 세워 집무를 하다가 광해군 3년(1611년)에 원유남(元裕男)부사가 부임하여 원래 자리에 관아를 재건하였다.

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은 부사가 행정을 처리하던 곳으로 「근민헌(近民軒)」이라 불렀고, 동헌의 부속건물이라 할 수 있는 서헌(西軒)과 별실 등이 있었지만 자세한 용도는 알 수 가 없다. 다만『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등에는 내동헌(內東軒)과 외서헌(外西軒) 건물이 별도로 있고, 내동헌은 부사 부인이 거처하던 곳이라 적혀있는 점으로 비추어 볼 때, 부사의 내실(內室: 北別室), 책방(冊房: 梅竹堂), 주방(廚房), 창고 등으로 활용이 되었던 것 같다.

1611년 중건 후 300여 년간 관청으로 사용되어 오던 관아는 조선후기에 동헌, 정청, 매죽당, 북별실 내삼문 이외에도 연훈당(延薰堂), 전월당(餞月堂), 신당(新堂) 등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정확한 위치나 규모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군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27년도에 삼문동으로 밀양군청을 신축하여 옮겨 가게 되자 본래의 용도가 폐지되었고, (구)밀양읍사무소, (구)밀양시청, (구)내일동사무소의 청사 등으로 이용 되다가 2010년 4월 관아를 복원 하였다.

옛 관아에 속해있던 건물 중에 당호(堂號)가 확실히 남아 있는 건물

① 매죽당(梅竹糖: 책방):아사 별실의 하나로 부사의 비서사무를 맡은 책방이 거쳐하던 집이며, 고을 원의 자손들이 독서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한 당초의 건물은 허물어져 영조 51년(1775 년)에 부사 정존중(鄭存中)이 다시 세웠다가 한말에는 이곳을 부사의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② 헐소(歇所): 관아 정문 밖에 인접해 있었는데, 부사에게 문안을 드리거나 공사의 일로 부사를 만날 사람 은 반드시 이곳을 통하여 성명을 밝히고 쉬면서 대기하는 장소로서 “헐숙소(歇宿所)” 또는 “헐소청(歇 所廳)”이라 불리기도 했다.

③ 응향문(凝香門): 관아의 정문으로 2층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2층에는 북을 매달아 아침저녁으로 문을 열고 닫을 때에 북을 울렸다고 한다.

6월 23일 수요일

사명대사의 충의정신(忠義精神)

사명대사 유적지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생가 터와 유적지로 구분된다. 생가 터와 유적지는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해 있다. 유적지에는 상징광장, 사명대사 기념관, 추모마당, 수변광장이 있다.

사명대사생가지(四溟大師生家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116호(1992년 10월 21일 지정)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조선 중기 고승 사명대사(1544∼1610)가 태어난 곳이다. 1992년 10월 21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116호 사명대사 생가지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밀양 사명대사 생가지)으로 변경되었다.

조선중기의 고승인 사명대사는 1544년(중종 39) 지금의 경남 밀양시 무안면에서 교생(校生)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 정(正)이 된 후 대구 수령으로 있다가 그후 밀양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유학 종원을 낳고, 종원은 교생 수성을 낳았다. 본관은 풍천(豊川) 임(任)씨이다. 속명은 유정(惟政) 또는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13세 때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에게서 글을 배우다 그만두고, 직지사로 가서 신묵(信默)화상에게서 머리를 깎고 선문에 들어 갔다.

사명대사의 생가터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 일대나 422번지 일대, 두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 곳 가운데 현재 학계에서는 399번지 일대가 더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그 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풍수지리설로 볼 때 399번지를 축으로 하여 뒷산의 주맥이 흘러 내려오고 있으므로, 밀양에 터를 잡은 사명당의 증조부인 임효곤이 이 곳에 터를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자연마을의 생성 측면에서 볼 때 입향조인 임효곤의 관직으로 보아 반가(班家)의 터전을 형성할 지역으로 422번지 일대는 너무 좁다. 셋째, 문헌기록으로 볼 때 사명당이 어릴 때 생활을 기록한 것에 의하면 집 가까이에 연못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로 보아 399번지 일대가 가능성이 더 높다. 넷째, 현장의 지표조사에서 볼 때 399번지 일대에서 기와 파편, 생활용품 파편 등이 발견되었으며, 건축물의 유구로 보이는 담장 흔적들도 발견되었다.

표충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1972년 2월 12일 지정)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홍제사 내

표충비는 1742년 10월 사명대사의 5대손인 남붕선사가 경상북도 경산에서 돌을 가져다가 현재의 자리(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세운 것으로 좌대를 포함한 총 높이는 380cm, 비신의 높이 275cm, 너비 98cm, 두께 56cm의 큰 비석이다. 무안지서(파출소)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석의 정면에는 ‘유명 조선국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영당비명병서(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靈堂碑銘幷序)’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 비명’과 ‘표충사 사적기’를 음각했다.

비문에는 표충사의 내력, 서산대사의 행적, 사명대사의 행적 등을 4면에 고루 새겨 놓아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승병활동을 한 사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 내용, 선조 임금의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데리고 온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표충비는 비석 3면에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일명 삼비(三碑)라고도 불린다.

사명대사 임유정 스님이 무안면 고라리에서 아버지 임수성과 어머니 달성 서씨 사이에 태어나고 67세로 일생을 마감하기까지 54년에 걸친 승려생활을 한 행적과 함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구국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몸통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을 얹은 구조이며, 비의 몸통은 검은 색 대리석을 사용했다.

뒷면에는 서산대사 휴정의 행장을, 측면에는 밀양 표충사의 내력, 그리고 기허대사의 비명이 있다. 비문은 영중추부사 이의현이 짓고,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이 글씨를 썼으며, 판중추부사 유척기가 전서했다.

6월 24일 목요일

점필재의 지덕정신(知德精神)

추원재(追遠齋):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59호(1986년 8월 6일 지정)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숙자(1389∼1456) 선생이 터를 잡고 그의 아들인 김종직(1431∼1492) 선생이 평생을 보낸 집터이다.

김숙자 선생은 12세 때부터 길재에게 글을 배우고 세종 1년(1419) 문과에 급제한 뒤 현감 등의 벼슬을 지냈다. 16세기 성리학을 보급하고 사림이 확립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그의 아들인 김종직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으며, 김종직은 현재 성리학의 거두(巨頭)로 인정받고 있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된 것을 순조 10년(1810) 사림들과 그의 후손들이 다시 고쳐 세운 것이다.

7월 1일 목요일

오연정(密陽 鼇淵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5호(1995년 5월 2일 지정)
밀양시 교동

조선 중기 문신인 추천 손영제가 지은 정자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36년에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손영제는 이황의 제자로 학문과 정치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으며, 조선 명종(재위 1545∼1567) 때 정랑을 거쳐 예안, 김재, 울산 군수 등을 지냈다.

월연정(月淵亭):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3호(1985년 1월 14일 지정)
밀양시 용평동

조선 중종 15년(1520) 월연 이태 선생이 지은 건축물이다.

이태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추구한 조광조가 죽음을 당하는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금시당, 백곡재(今是堂, 栢谷齋):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8호(1996년 3월 11일 지정)
밀양시 용평동

조선시대 문신인 금시당 이광진 선생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이광진(1517∼?)은 명종 1년(1546)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후에 벼슬이 좌부승지에까지 이르렀다.

금시당이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말로 산수와 전원에서 여생을 즐긴다는 뜻이다. 명종 21년(1566)에 처음 지은 금시당은 임진왜란(1592) 때 불타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743년에 백곡 이지운 선생이 복원한 것이다.

백곡재는 백곡 이지운을 추모하기 위해 철종 11년(1860)에 세운 건물이다.

이곳에는 이광진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있어 금시당에서 내려다보는 밀양강과 잘 어우러져 있다.

7월 7일 수요일

퇴로리 이씨 고가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여주(麗州) 이씨(李氏)의 종택(宗宅)으로 조선조 후기인 1890년에 항재(恒齋) 이익구(李翊九)가 건립하여 100여 년 동안 5대에 걸쳐 보존된 전통적인 고가(古家)이다.

이 집은 기와를 얹은 흙담으로 구획된 부지에 남향으로 지은 목조 기와집으로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정침(正寢)과 중사랑(中舍廊) 그리고 별채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홑처마에 팔작(八作)지붕으로 "청덕고가(淸德古家)"라는 당호(堂號)가 있는 집이다. 중사랑은 아들인 성헌(省軒) 이병희(李炳憙)가 거쳐하면서 독서하던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이며 "성헌(省軒)"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다. 별채에도 내당과 외당이 있는데 내당은 정면 8칸, 측면 1칸이며 외당은 당초에 자녀들의 독서실로 사용했는데 "쌍매당(雙梅堂)", "죽려지실(竹濾之室)"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동서 익랑(翼廊)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그 밖에도 후원(後園)에는 가묘(家廟)가 있고 조화롭게 정원이 꾸며져 있다.

이 종택의 담장 밖에는 일문(一門)의 제숙소(濟宿所)인 천연정(天淵亭: 원래는 報本堂)이 있고 서촌에는 항재, 성헌 부자의 서고정사(西皐精舍)와 한서당(寒棲堂)이 있다.

서고정사(西皐精舍), 천연정(天淵亭), 삼은정(三隱亭)

서고정사는 항재 이익구(1838~1912년)가 고종 27년(1890년)에 두 명의 동생 농구. 명구와 함께 단장면 무릉에서 퇴로로 입거 하여 8년째 되는 해에 주의의 경관도 즐기면서 교육과 독서 저술에 전념키 위해 지은 별업(別業)이다.

삼은정은 1904년에 여주 이씨 후손인 용재 이명구(1852~1925)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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