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이 걸어온 길(지방)

2022. 7. 21. 13:41歷史

경상도

밀양 무봉사 태극나비

신라 말 국운이 기울어 사회 혼란이 가중되던 어느 해, 고려 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일하기 직전 후백제 견훤과 밀고 밀리는 격전을 거듭하고 있던 시기였다. 나비가 나올 춘삼월도 아닌 2월 어느 날 갑자기 한 무리의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와 무봉산(아동산, 88.1m)을 뒤덮으며 날아다니다가 며칠 동안 영남루가 서 있는 뒷산을 덮으며 날아다니던 나비는 죽은 흔적도 없이 흔적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괴이한 일이 있었다.

무봉사를 감싸고 날아다녔던 나비의 날개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당시 통일신라는 국론이 분열되는 등 나라가 모진 혼란에 휩싸여 있었던 때라 사람들은 어떤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가 건국되면서 과연 어지럽던 사회의 혼란은 멈추고 마침내 태평성대를 맞게 됐다. 그 후에도 가끔 이 태극나비가 무봉산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에 경사가 있었다. 그래서 고려 초에는 이 나비를 보호하라는 왕명과 함께 국성접(國成蝶)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런데 이 나비는 조선조 500년과 일제강점기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가 1945년 8월 15일 오후 3시쯤 한쪽 날개는 감청색깔 또 한쪽 날개는 기명색깔의 태극무늬를 한 손바닥만큼 큰 태극나비가 무봉사 법당에 날아 들어와서 사흘 만에 죽었다. 그해 8월 19일과 10월 25일에도 각각 태극나비가 나타났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이승만 대통령께 보내고 또 다른 한 마리는 무봉사에 보관하고 있다. 그래 그런지 무봉사를 참배하고 나면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고 한다.

이 태극나비의 전설은 표충비각의 땀과 밀양 얼음골의 신비, 만어사의 어산불영경석과 함께 밀양의 4대 신비의 하나로 전해져 왔다.

1912년 영남루 앞을 흐르는 밀양강(남천강)의 배다리 모습

1912년 국내 첫 버스와 운전사

영남루 앞을 흐르는 밀양강의 배다리 모습. 지금은 남천교가 놓여있다

한국 처음으로 버스영업이 시작된 곳은 남해안의 마산∼삼천포 간이다.

일본인 에가와는 일본에서 차 1대를 가져와 1911년 12월 말에 승합차 영업허가를 받아 10개월 뒤에 운행을 시작했다.

첫 버스는 8명이 탈 수 있는 소형버스로서 천막지붕을 단 승합차였다

경남 마산∼진주 간, 진주∼삼천포 간에 승합차 영업을 하겠다고 신청한 자가 있어 경무부에서는 12월 29일자로 허가하였는데, 영업자는 허가일로부터 5개월 이내에 개시한다 하며 영업 개시 후의 요금은 다음과 같다더라. 마산∼진주 간 3원80전, 진주∼삼천포 간 1원30전’

이것은 편도요금인데, 당시 이 지방의 물가를 보면 쌀 한 가마니에 5∼6원, 집 짓는 토목공이나 미장이의 하루 품삯이 60전 하던 시절이었으니 꽤나 비싼 것이었다. 진주의 새신랑이 마산서 시집온 새색시와 자동차를 타고 처음으로 처가 나들이를 다녀오자면 쌀 3가마니 값인 15원20전이 들어가 웬만한 부자 아니고는 자동차를 탈 엄두를 못 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돈 잘 버는 일본 장사꾼들이 많이 이용했다.

우리나라 처음으로 노선버스 영업허가를 받은 에가와는 허가일로부터 10개월 후인 1912년 9월에 첫 운행을 시작했다. 첫 버스는 8명이 탈 수 있는 소형버스로서 천막지붕을 단 승합차였다. 이 사실을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진주에 거주하는 에가와의 경남 마산∼진주 간의 자동차영업은 8인승 차가 도착한고로 9월 17일에 시운전을 하여 20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차는 당분간 1대로 운영하여 마산 혹은 진주에서 발차하고 운전시간은 5시간으로 한다. 진주∼마산 간의 요금은 3원80전, 마산∼군북 간은 2원, 군북∼진주 간은 2원2전, 특등은 3할씩 증액하되 2개월 내에는 차를 증차하여 매일 운행한다더라.’

1930년 밀양농잠학교 졸업앨범(부산에서)

1936년 밀양공립심상소학교(일본 전쟁영웅 찬양글을 쓰는 학생들

1944년 학생 노동력 동원(밀양공립보통학교) 

1951년 밀양역

1951년 밀양장

1953년 밀양장

1950년대초 밀양시

1950년대초 영남루 일대(밀양)

1950년대초 영남루(밀양)

1950년대초 호박소(밀양)

1950년대초 낙동강 부근(밀양)

1950년대 밀양시

1965년 어느 집(밀양)

1973년 밀양여중 소풍

1993년 밀양시 전경

1993년 북성로(밀양)

1910년 진해(鎭海)

동쪽은 부산광역시와 북쪽은 김해시·창원시와 접하였고, 서쪽은 마산만을 사이에 두고 옛 마산시와 마주하였으며, 남쪽은 진해만을 사이에 두고 거제시와 마주하였다.

동쪽에 보배산(479m)·굴암산(662m), 서쪽에 산성산(400m), 북쪽에 천자봉·장복산·불모산(802m) 등이 솟아 있고, 남쪽으로 진해만을 끼고 있어 배산임해(背山臨海)의 지형을 이루었다. 천연의 양항(良港)을 이룬 넓고 깊은 만(灣)에는 구릉성의 크고 작은 반도와 곶 그리고 유인도 4개를 포함한 26개의 섬이 산재하였다.

고대에는 가야 연맹체에 속하였다가 신라에 편입된 지역이다. 훗날 진해시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완포향(莞浦鄕)은 웅지현과 골포현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 웅지현은 웅신현으로, 골포현은 합포현으로 개칭되어 의안군(義安郡: 훗날의 창원)에 속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완포향이 현으로 승격하여 합포현에서 분리 독립하였고, 조선시대인 1452년(문종 2) 웅신현(지금의 웅천동)·완포현·천읍부곡(지금의 웅동)이 통합되어 웅천현으로 개편되었다.

웅천현은 1510년(중종 5) 웅천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1512년 현으로 환원되었고,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로 진주부 관하의 웅천군으로 개편된 뒤 이듬해 실시된 13도제에 따라 경상남도 웅천군이 되었다.

1908년 웅천군과 진해군(후의 창원군 삼진)이 창원부에 통합되었고,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일본이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고자 군항시설을 설치하면서 군사기지 역할을 하였다. 1910년 마산부제(馬山府制) 실시에 따라 마산부 진해면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창원군에 편입되었으며, 1931년 진해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55년 9월 1일 진해시로 승격한 뒤 1973년 창원군의 웅천면이 편입되었고, 1975년에는 거제군의 저도·망와도가 편입되었다가 1993년 거제군으로 환원되었다. 1983년에는 의창군의 웅동면 일원이 편입되었고, 1995년 3월에는 웅동 2동의 일부가 부산광역시에 편입되었다.

현재 창원, 마산과 통합, 통합창원시 진해구로 개편었다.

1912년 일본해군 진해방비대 청사(진해구 현동 72-4)

1910년 설계를 하여 1912년 2월 준공

국가지정등록문화재 제195호로 지정. 2000년까지 대한민국 해군작전사령부로 사용하다가 현재 진해해군기지사령부 청사로 사용

1920년대 진해(鎭海)

1913년 엿장수와 아이들(진주)

1913년 조랑말과 노인(진주)

1915년 곤양공립보통학교 졸업식

1915년 마산 여자고등보통학교 목조 1층 교사 낙성식

1920년 진주시

1921년 남해 이동공립보통학교 운동회

1930년대 구 마산역(신마산역) 광장

1936년 기숙사식사 시간(마산여자고등학교)

1936년 살구받기(공깃놀이, 울산진학교)

1938년 학생 군사훈련 모습(거제사동보통학교)

1940년 통영 화양학원 교사 시절 윤이상(1917~1995)

가운데 세 명 가운데 가장 오른쪽

1940년 여학생들의 군사훈련(하동공립보통학교)

1940년 합천 삼가농업보습학교(三嘉農業補習學校) 졸업생(해인사)

1941년 세계지리 수업시간(진주공립보통학교)

1942년 성호공립보통학교(창원)

1942년 군사훈련(통영소학교)

1942년 황기(皇紀) '2602' 모양으로 앉은  학생들(통영소학교)

1944년 수학 수업(거창공립심상소학교)

1945년 조선여자근로정신대(진해 51 해군 항공 조병창)

6·25 전쟁 중 경남의 여러 모습들의 기억(1950년~1953년)

1950년 진해시

1952년 구두닦이(거제)

1952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진해)

1953년 지개를 진 소년들(거제)

1953년 동생을 업은 소녀들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석방(거제)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마산 무학초등학교)

1960년대 마산시

1962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통영)

1968년 해인사삼성각(海印寺三聖閣)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유세(고성)

1977년 해인사(팔만대장경 판고와 판각)

1981년 해인사(성철스님과 법정스님)

1981년 12월 17일 경남 합천 해인사 백련암에서 당시 조계종 제6대 종정이던 성철스님(왼쪽)과 함께 자리한 법정스님

종정 추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백련암에서 수행하고 있던 성철스님을 법정스님이 찾아갔다.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의 대담

법정스님: 큰스님 모시고 대담을 갖기 위해, 안거 중인데도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흔히 밖에서 말하기를 큰스님 뵙기가 몹시 어렵다고들 합니다. 스님을 뵈려면 누구나 부처님께 3천 배를 해야 된다고 하는데, 일반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째서 3천 배를 하라고 하시는지, 그리고 언제, 어디 계실 때부터 그런 가르침을 시행하게 되셨습니까?

성철스님: 흔히 3천 배를 하라 하면 나를 보기 위해 3천 배를 하라는 줄로 아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승려라면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어느 점으로 보든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남을 이익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늘 말합니다.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오시오. 나를 찾아와서는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그러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부처님께 절하라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3천 배 기도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절해라, 자신을 위해서 절하는 것은 거꾸로 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3천 배를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심중에 무엇인가 변화가 옵니다. 변화가 오고 나면 그 뒤부터는 자연히 스스로 절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남을 위해서 절하는 것이 잘 안되어도, 나중에는 남을 위해 절하는 사람이 되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며,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정스님: 요즘 세태를 보면 날이 갈수록 인간사회가 험악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인간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사회에서 존엄의 터전으로 내려온 기존의 가치체계나 규범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철스님: 그렇게 되는 그 근본책임은 어디에 있느냐 할 때, 나는 정신적인 지도역할을 맡고 있는 종교인에게 있다고 봅니다. 살인, 강도 등 범죄가 있다면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정신적인 지도책임을 맡고 있는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참다운 지도를 하지 못하고 참다운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근본책임이 종교인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정스님: 그렇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독립된 현상만이 아니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저희들 자신이 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철스님: "종교인에게도"가 아니지요. "에게도"가 아니고. 실제로 책임은 근본 책임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종교인이란 정신을 지도하는 근본책임을 맡았으니, 예전 스님들이 늘 하시던 말씀이 '극중한 죄인은 내가 아니고 누구냐'고 했습니다. 종교인 자체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 종교인이라는 사람, 성직자라는 사람부터 근본 자세를 바로 잡아서 참다운 정신적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위의 정신적 지도부터 잘못되었다고 하면 밑에서 지도 받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니 근본책임을 맡은 종교인, 성직자인 우리가 참회해야 한다고 봅니다.

법정스님: 세계의 많은 학자들, 특히 토인비 같은 역사가는 현대 문명의 해독제로서 불교사상을 크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야말로 인류 구제의 길잡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오늘의 인류에게 기여하기 위하여 불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철스님: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내가 무슨 불교를 잘 안다고 자처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는 한도에서 말하자면, 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데 있습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다. 그리고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

여기에 우리 불교의 근본이 서 있습니다. 성불한다고 하여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고 하는 것은 실은 방편설입니다.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는 것은 부처 아닌 중생을 부처로 변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고, 현실 이대로가 절대고,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이 본래 부처인 이것을 바로 보고, 현실이 본래 절대 극락세계인 이것을 바로 보자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방편으로 서방의 극락세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눈을 감고 잘 모르니, 어떠한 표준을 말하기 위해서 서방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조스님 말씀에 '동방 세계 사람이 염불해서 서방 세계에 간다면 서방 세계에 있는 사람은 염불해서 어디로 가느냐?'고 했는데 그 말이 참 좋은 말씀입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모든 것이 본래 광명 속에 살고 있고 우리 자체가 본래 광명입니다. 전체가 본래 부처고 전체가 본래 극락 세계인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섬기자' 이것입니다.

부처님이니까 부처님으로 섬기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불교 믿는 처음 조건에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모셔라, 모든 존재를 부모로 섬겨라, 모든 존재를 스승으로 섬겨라 하는 3대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근본 생활을 불공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 모든 상대가 부처인 줄 알면서 부처님으로 섬기고 존경하고 봉양한다면 극락세계를 따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대로가 극락세계가 아니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모든 생명이 본래 부처라는 이것부터 알아야 되겠습니다.

법정스님: 스님께서 한창 정진하시던 것과, 요즈음 선원이나 강원에서 스님들이 처신하는 것을 견주어 보시면 생각이 많으실 줄 믿습니다. 어린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진실한 수행자가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성철스님: 우리 젊을 때 한 것이 다 옳고 지금은 잘못한다고만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때그때의 특기와 장점이 있습니다. 출가한 사람이란 무엇이 목적이냐 하면, 결국 대법을 성취하여 일체를 위해 사는 인격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스님 네는 개인주의여서는 안 됩니다. 출가의 목적에서 볼 때, 참으로 큰 활동을 하기 위해 세속을 버리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수행하는 기간 동안에는 세속을 버리고 사는 것 같지만, 근본 목적은 성불해서 중생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를 위해서 수행하고 자기를 위해서 견성한다면 그것은 외도입니다. 수행도 남을 위해서 하고 나중 생활도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

이것이 불교의 출발이자 종점인데 요즘 가만히 보면 세속적으로도 정신 방면이 소외되고 물질 본위로 치중되고 있듯이 우리 불교도 그런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흔히 공부하는 스님들이 와서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공부하는 데 5계를 한번 지켜보라고 하지요.

첫째, 잠을 적게 잔다. 세 시간 이상 더 자면 그건 수도인이 아니지요.

둘째, 말하지 말라, 말할 때는 화두가 없으니 좋은 말이든 궂은 말이든 남과 말하지 말라, 공부하는 사람끼리는 싸움한 사람같이 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든 말하지 말라.

셋째, 문자를 보지 말라. 부처님 경도 보지 말고 조사 어록도 보지 말고, 신문 잡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참으로 참선하여 자기를 복구시키면, 이 자아라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다해도 설명할 수 없고 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어떤 문장이나 부처님이라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자아를 완전히 깨치려면 불법도 버려야 합니다. 불교를 앞세우면 그것이 또 장애가 됩니다. 참으로 깨끗한 자아에게 비춰보면 먼지요, 때다 그 말이지요. 오직 화두만 해야 합니다.

넷째, 과식하지 말고 간식하지 말라. 음식은 건강이 유지될 정도만 먹지, 과식하면 잠이 자꾸 오고 혼침해서 안 됩니다. 소식이 건강에도 좋고 장수비결입니다.

다섯째, 돌아다니지 말라. 해제하면 모두 제트기같이 달아나는데 그러지 말란 말이지요.

이 5계를 못 지킨다면, 그런 사람은 공부 안하는 사람입니다. 이 5계를 지키며 이렇게 10년을 공부하면 성불할 수 있습니다. 수백 명에게도 더 일러주었는데, 그래도 지키는 사람 아직 못 봤어요. 아마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야. 물론 숨어서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법정스님: 스님의 생활신조라고 할까, 좌우명 같은 것을 들려주십시오.

성철스님: 내가 늘 생각하는 쇠말뚝이 있습니다. 쇠말뚝을 박아 놓고 있는데, 그것이 아직도 꽂혀있습니다. 거기에 패가 하나 붙어있어요.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

'영원한 진리'하면 막연하지요. 내가 불교인이니 그것은 불교밖에 없는가 하고 혹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견문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더러 책을 읽어보았는데 불교가 가장 우수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불교를 그대로 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만약에 앞으로라도 불교 이상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이 옷을 벗겠습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서 진리를 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내 기본자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진리를 위해서 산다는 이 근본 자세는 조금도 변동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진리에 살려면 세속적인 일체 명리는 다 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앞서면 진리는 세속적인 영리를 추구하는 도구가 되어 버리니, 그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승려가 될 때는 신조가 있는데 여하한 일이든지, 세간 일이든지, 출세간 일이든지, 절일이든지, 사회적인 문제든지, 일체 관여치 않는다는 것이지요. 무슨 회의든지 참여 안 한다. 그래서 절의 모임이나 사회의 모임에 참석해 본 일이 없습니다.

법정스님: 스님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준 서책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성철스님 : 내가 여러 가지 한 것처럼 보이지만, 주로 한 것은 선(禪)입니다. 내가 제일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조사 스님 네의 어록은 "조주록"과 "운문록"입니다.

법정스님: 요새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성철스님 : "보현행원품"입니다. 행원품이란 모든 존재의 실상 그대로 그 자체 모든 일체가 절대라는 것을 분명하고도 해박하게 설명해 놓은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 일체가 부처이니 자기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남을 위해서 사는 거룩한 길이 거기 있습니다.

"화엄경"하면 불교의 근본인데, 이 "행원품"은 바로 그 "화엄경"의 엑기스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불교 활동하는 데에도 행원품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정스님: 스님께서는 어떤 인물을 존경하십니까?

성철스님: 인류 역사상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도 참으로 많지만, 내가 볼 때는 참으로 자아 회복을 하여 그 문제를 우리에게 소개한 분은 부처님이시고, 그 뒤에 와서는 육조스님이 계시지요.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 사바가 본래 극락이라는 것, 정토라는 것, 현실이 그대로 절대라는 그 소신을 가장 해박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 분이 부처님과 육조스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법정스님: 사람은 한 번은 죽습니다. 많은 생물 가운데서 유달리 인간만이 자기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는 모든 종교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스님의 생사관을 듣고 싶습니다.

성철스님: 생사란 모를 때는 생사입니다. 눈을 감고 나면 캄캄하듯이. 하지만 알고 보면 눈을 뜨면 광명입니다. 생사라 하지만 본래 생사란 없습니다. 생사 이대로가 열반이고 이대로가 해탈입니다. 일체 만법이 해탈 아닌 것이 없습니다.

윤회를 얘기하는데, 윤회라는 것도 눈감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실 눈을 뜨고 보면 자유만 있을 뿐이지 윤회는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 몸을 받고 또 받고 하여 이어지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것은 윤회라고 하는데 아는 사람이 볼 때는 그것은 모두 자유다, 그 말입니다.

대자유!

눈을 뜨고 볼 때는 그래서 생사가 곧 해탈이고 생사 이대로가 열반입니다. '생사 곧 해탈'이라고 하겠지요. 생사란 본래 없습니다. 현실을 바로만 보면, 마음의 눈만 뜨면 지상이 극락입니다. 이 현실 그대로가!

1970년 산달국민학교 졸업식(거제)

1976년 창동 시민극장(마산)

1970년대 통영 죽림 향교 홍살문

1970년대 북마산역

북마산역은 지금의 마산항 제1부두선(임항선) 상에 있었고, 북마산역과 구마산역의 거리는 걸어서 10분 정도면 도착할 정도로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지만 각기 다른 노선 상에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용산역-신용산역처럼 별도로 기능했다.

정부 당국은 이런 비효율을 개선하기 위해 마산 시내에 있는 3개 역을 모두 석전동에 있는 지금의 마산역으로 통합하고, 기존 역들은 여객 취급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중리에서 마산으로 바로 갈 수 있도록 철교를 놓아서 열차가 임항선으로 우회운행할 일을 없애버렸다. 이른바 삼역 통합이다.

1970년대 마산 가포 해수욕장

1970년대 진해 해병대 신병훈련소

1978년 중원로터리(진해)

1980년대 쌍계사(雙磎寺)

1980년 어느 아이(의령)

1980년 소년과 지게(의령)

1981년 오곡도(통영)

1982년 어느 아버지와 아들(김해)

1982년 오후의 어느 다방(김해)

1982년 똥과자를 즐기는 아이들(김해)

1982년 김해 명지

1982년 포니 30만대 생산돌파 기념

1983년 오광대놀이의 후예(고성)

1987년 2월 7일 호헌 철폐(마산역 광장)

1987년 6월 10일 경남 마산 어린교 오거리(현 경남도민일보 앞)

1987년 6월 10일 서성동(마산)

1990년 쌍계사(雙磎寺)

1997년 우포늪(창녕)

대구, 경상북도

1900년대 달서문

1900년대 대구읍성 남문

1905년 울릉도(鬱陵島) 도동항 일본상선

1910년대 초가가 즐비한 팔달문 밖

1914년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

잡풀이 자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석탑 중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분황사는 '향기가 나는 임금의 절'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의 신라시대 모전석탑. 높이 9.3m. 국보 제30호. 634년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다고 한다.

현재 3층까지의 탑신부가 남아있는데 네 모퉁이에는 사자상 한 마리씩을 배치했고 탑신 4면의 감실 입구에는 8구의 인왕을 배치하였다.

1968년 분황사(芬皇寺)

1915년 봉덕사종(奉德寺鐘)

봉덕사 신종 에밀레종 구 경주박물관으로 옮기는 모습

통일신라의 경덕왕(742~765년)은 아버지 성덕왕(702~737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동 12만 근을 내어 종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해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아들 혜공왕이 이어받아 771년에 종을 완성한다.

이것이 바로 국립경주박물관 앞에 전시돼 있는 성덕대왕신종(일병 에밀레종, 국보 제29호)이다. 이렇게 주조된 에밀레종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인 봉덕사에 봉안된다.

그래서 봉덕사종이라고도 불리는 이 종은 홍수 등으로 절이 퇴락하자 잡초 속에 뒹굴다 조선 세조 때(1492년)영묘사로 옮겨진다. 그 뒤 1506년 (중종 원년)에 경주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인 봉황대 옆 종각으로 재차 옮겨 가는데, 이곳에서 성문을 여닫을 때나 군사의 징집을 알릴 때 타종되다 1915년 경주 동부동에 있던 구박물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다.

18.9톤에 달하는 이 종을 옮기는 당시의 모습을 담은 빛바랜 사진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경주박물관이 신축된 1975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동한다.

1919년 불국사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절. 법흥왕22년(535) 개산(開山)이라 전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경덕왕10년(751)에 김대성(金大城)이 석굴암과 동시에 건설하였다.

불국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목조 건물이 모두 불타고, 1604년부터 150년간에 걸쳐 조금씩 복고와 중수가 계속되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 완전 퇴락의 길을 걸었다.

1923년경부터 일본인들에 의하여 여러 차례 정비가 되기 전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불국사의 그 때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1921년 불국사

1922년에 발행한 조선총독부 사진첩에 게재된 것이다. 자하문의 누각과 범영루가 퇴락한 채 남아있고, 회랑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동양의 불교국가에서 석조(石造)로서는 가장 뛰어나고 오랜 작품으로 알려진 다보탑도 기울어져 있다.

1973년 현재와 같이 수리했고,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보수하였으니 이는 수리 전의 사진이다.

이 사진에는 다보탑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1902년 세키노다다시(關野貞)가 조사했을 때 네 마리, 1909년 두 마리가 있었고 1916년 고적도보에 두 마리가 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사진의 각도로 보아 1922년 이전에 세 마리가 이미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불국사

1970년 불국사

1988년 불국사(佛國寺)

1989년 불국사(佛國寺)

1920년대 석굴암

1929년 팔공산 동화사

1920년 첨성대(瞻星臺)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건물. 높이 약 9.5m. 국보 제31호. 역법을 만들기 위한 일월행성의 운행관측과 천문현상의 관찰로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의 목적에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1921년 첨성대(휘문고등학교 학생 수학여행)

1920년대 대구부 본정통(현 대구시 중구 서성로)

1920년대 동문로(대구)

1930년대 선화당(宣化堂)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1982년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감영(慶尙監營)의 정청(政聽)으로 쓰이던 관아건축(官衙建築)이며 관찰사가 집무를 맡아보던 곳으로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올 때 지어진 건물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인 단층 팔작지붕 목조건물로,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양식(樣式)과 익공식(翼工式)을 절충한 2고주(高柱) 7량가(樑架)의 겹처마 집이다.

경상도 감영은 원래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安東)에 있었는데 1601년(선조 34)에 경상좌도, 우도가 통합되면서 관찰사(觀察使) 김신원(金信元)이 경상감영을 대구로 옮겨왔다. 이때 대구는 경상도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경상감영은 국권피탈까지 이 자리에 있었으며, 인근에 많은 부속기관을 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선화당, 징청각 두 건물만 남아 있다.

경상감영은 조선시대인 1670년(현종 11)과 1730년(영조 6), 1806년(순조 6)의 세 차례에 걸쳐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1807년에 관찰사 겸 부사(府使)인 윤광안(尹光顔)이 다시 지은 것이다. 1969년까지 경상북도 도청사로 쓰이다가 도청을 이전하고 1970년에 경상감영이 있던 터를 널리 보전하기 위해 중앙공원(中央公園)을 조성할 때 다시 수리하였다.

1933년 도산서원(陶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있는 서원이다.

1933년 당시 도산서원 내부 있던 도산서당과 서원 전경으로서, 싸리문과 건물 기둥에 陶山書堂이란 세로 팻말을 걸어둔 모습이 보인다

도산서원은 영남 사림의 중심이자 퇴계 이황을 모신 곳이다. 해마다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낸다. 퇴계는 본디 도산 남쪽에 도산서당을 짓고 자리 잡아 후학을 가르치다가 그 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니 5년간의 공사 끝인 1561년에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퇴계의 말년인 61세 되던 해였다.

그 뒤 1570년에 퇴계가 돌아가자 서당의 뒤쪽에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발전시켰다. 1575년에 선조로부터 사액 받았으며 서원을 꾸미면서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서원의 형식을 정립하였다. 건물뿐 아니라 서원을 지탱하는 내부규칙인 서원안도 마련되어 후에 다른 서원들의 모본이 되었다.

동·서재(東·西齋)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 전교당(典敎堂: 보물 210)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 상덕사(尙德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 원래는 이황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곳으로, 1575년 한호(韓濩)의 글씨로 된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영남(嶺南) 유학의 연총(淵叢)이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은 모두 무사석계층(武砂石階層)이며 방주(方柱)의 사용이나 초공(草工)을 끼운 대들보의 간략한 가구(架構) 등 전체적으로 간소하다. 서원 안에는 약 400종에 달하는 4,000권이 넘는 장서와 장판(藏板) 및 이황의 유품이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숭양서원(崧陽書院) 등과 더불어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69년 문화체육부에서 해체 복원하여 면목이 일신되었다.

1933년 독도

강치를 잡던 일군의 시마네현 오키의 어부들과 고용되어 해산물을 채취하던 제주해녀들

1938년 삼성상회(三星商會, 대구)

1936년 협동정미소(방앗간)로 시작, 대구시 중구 인교동 소재 삼성상회는 고 이병철 삼성회장이 1938년 당시 자본금 3만원으로 사업을 처음 시작한 장소, 삼성 이건희 회장의 출생지이기도 한 곳이다. 1997년 9월경 해체돼 목조 구조물은 현재 삼성물산 대구지점(서구 중리동 소재) 창고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1948년 삼성물산공사 설립

1953년 제일제당 (현 CJ제일제당) 설립

1954년 제일모직공업 (현 제일모직) 설립

1956년 호주박람회에서 삼성물산에 참가

1957년 대한민국 최초로 사원공개 채용 실시

1958년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인수

1963년 신세계백화점과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인수

1964년 한국비료(현 삼성정밀화학) 설립

1965년 중앙일보 창간, 삼성문화재단 설립

1966년 중앙개발(1997년 에버랜드리조트로 개칭) 설립

1968년 전주제지(현 한솔제지) 설립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설립

1969년 삼성전자공업(현 삼성전자) 설립

1969년 일본의 산요와 제휴하여 '삼성산요전기' 설립

1970년 삼성전기 설립, 삼성-NEC 전기공업 (현재의 삼성SDI) 설립

1972년 제일합섬(현 웅진케미칼) 설립

1973년 제일기획 설립

1973년 '임페리얼'로 호텔업 진출, 그 해 11월에 '호텔신라 (현 신라호텔)'로 개칭

1974년 삼성중공업 설립

1975년 삼성산요전기를 삼성전기로 개칭

1976년 용인자연농원 개장

1977년 삼성정밀 설립(2000년, 삼성테크윈으로 개칭)

1978년 삼성항공 설립(1991년, 삼성전자에 편입 (2000년, 삼성탈레스로 분사))

1978년 호암미술관 완공

1982년 호암미술관 개관, 삼성 라이온즈 창단

1983년 삼성조선과 대성중공업이 삼성중공업으로 통합

1985년 삼성데이타시스템(현 삼성SDS) 설립

1987년 11월 삼성의 창립자 이병철 사망

1987년 12월 이건희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

1988년 창업 50주년을 맞이하여 제2창업 선언

1988년 CCKA카드 인수, 삼성카드로 개칭

1991년 코리아 엔지니어링을 삼성엔지니어링으로 개칭

1991년 신세계백화점과 한솔그룹 분리

1992년 국제증권을 인수하여 삼성증권으로 상호변경.

1993년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분리

1993년 제2창업 선언 5주년을 기념해 그룹 CI 변경, 싱글 삼성 정책「신경영」 선포

1994년 삼성의료원 설립

1995년 삼성어린이박물관 개관

1995년 제일합섬(현 웅진케미칼) 분리

1996년 용인자연농원 개장 20주년, 에버랜드로 개칭

1996년 성균관대학교의 재단으로 재영입되어 고급인력육성에 막대한 투자 시작

1997년 삼성프라자 분당점 개점, 올림픽 파트너로 공식 선정. 이로 인해 2004년 15조7천억원으로 수익 증가

1998년 창립 60주년 기념식

1998년 삼성시계, 대도제약 청산

1998년 삼성전자가 일본의 나가노 동계올림픽 스폰서로 공식 선정

1999년 중앙일보와 보광이 삼성그룹에서 분리

1999년 삼성건설의 삼성아파트가 삼성쉐르빌로 개칭

2000년 삼성SDS 정보통신본부 분사, 유니텔(현 삼성네트웍스) 설립

2000년 삼성자동차가 워크아웃, 삼성자동차가 프랑스의 자동차회사 르노에 인수되어 르노삼성자동차 출범

2000년 삼성전자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하계올림픽 스폰서로 공식 선정

2002년 유니텔이 삼성네트웍스로 개칭

2002년 삼성전자가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스폰서로 공식 선정

2003년 삼성전자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디자인회계 전략회의 개최

2004년 삼성전자가 그리스의 아테네 하계올림픽 스폰서로 공식 선정

2005년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의 지진, 해일에 지원

2006년 에버랜드 개장 30주년, 현재의 에버랜드리조트로 개칭

2006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구단 첼시 FC와 유니폼 스폰서 계약

2006년 삼성전자가 이탈리아의 토리노 동계올림픽 스폰서로 공식 선정

2007년 삼성건설이 두바이의 버즈 두바이 건설에 참여

2007년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취임 20주년

2008년 4월 22일 비자금이 폭로되면서 이건희 회장 사퇴. 이 후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삼성그룹의 대외대표를 겸함

2008년 11월 17일 삼성그룹 사옥이 현 시청역 태평로에서 강남역 강남역사거리부근으로 새사옥 이전, '삼성타운'이라는 새 이름으로 30층 이상 빌딩 3동으로 구성

리모델링 예정인 현 시청역 태평로에 삼성증권, 삼성카드등 입주예정

2010년 1월 삼성전자가 캐나다의 벤쿠버 동계올림픽 스폰서로 공식 선정

2010년 2월 8일 이건희 전 회장 18개월 만에 IOC 위원으로 복귀

2010년 3월 23일 이건희 전 회장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

1939년 10월 10일 안압지 수학여행

1940년 신사참배(순흥소학교)

1944년 소흥학교(순흥소학교) 교사

1945년 약전골목의 세화당한의원(대구)

1954년 마리린 몬로(대구)

대구 동촌비행장에는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배우 백성희와 최은희가 마중을 나갔다.

1962년 하강국민학교(월성)

담임교사가 미국으로 부터 원조 받은 옥수수 죽을 끓여 나눠주고 있다.

1974년 동촌유원지(대구)

1974년 포항 송도해수욕장의 전성기, 포스코 완공 및 가동

1974년 포항시민탑(오거리)

1976년 여학생들의 교련복(안동 경안여상)

1980년대 달성공원

1988년 동대구역

1990년 봉정사(안동)

1990년 부석사(浮石寺)

1991년 도시침수(포항시 북구)

1994년 달성공원(대구)

2000년 경북대학교(대구)

전국

1903년 퉁고우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1913년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

점제현신사비 평안남도 용강군(현 온천군)에서 이마니시 류가 발견 했다는 점제현 신사비, 북한에서는 다른 지역의 암석 재질이라고 분석했다.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지금의 온천군 성현리)에 있는 점제현비, 점제현의 장이 현민을 위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내용의 비문이다.

북한 국보급 제16호로 지정된 고대의 비석으로, 점선현신사비 또는 염제현신사비라고도 읽는다. 윗부분은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는 부분은 높이 1.51m, 너비 1,09m, 두께 0.12m이다.

화강암 자연석을 장방형으로 다듬고 한 면을 평평하게 갈아낸 뒤 그 안을 세로로 7등분하여 그 획내(劃內)에 예서(隸書)로 글자를 새겨넣었다. 글자 수는 모두 79자인데, 확실하게 판독되는 글자는 59자이며, 점제현의 장(長)이 산신(山神)에게 백성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서기 85년경에 제작되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서 규모는 작으나 학술적인 가치는 매우 크다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9월 조선총독부의 고적(古蹟) 조사를 통하여 발견되었다. 당시 조사에 참여한 일본의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토성리(지금의 온천군 성현리)의 어을동고성(於乙洞古城)의 동북쪽으로 약 485m 지점에서 이 비석을 발견하였으며, 이곳이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낙랑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인 점제현의 현성(縣城)이었음이 증명되었다고 발표하고 비석의 이름을 '점제평산군비(黏蟬平山君碑)'라고 명명하였다. 이로부터 이 비석은 이른바 '한사군 재한반도설(漢四郡在韓半島說)'을 뒷받침하는 유물로서 한반도가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일제가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른 곳에 있던 비석을 옮겨와 역사를 조작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 근거로 비석의 재질인 화강암을 분석한 결과, 그 생성연대가 현 소재지인 온천군과 용강군 일대의 화강암 생성연대보다 약 2800만~2200만 년을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이 비석이 다른 지방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며, 일부 학자들은 이 비석의 원래 위치를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롼허강(灤河) 유역의 제스산(碣石山)으로 보고 있다.

1900년대 대동강 물장수

대동강 물장수는 약 30리터의 물을 어깨에 지고 다녔다.

물 값은 대략 1,000갤런 (3,785리터)에 22펜스 (약 92전) 정도였다. 물장수 한 사람당 약 10~20호를 상대로 거래하였고,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각 가정에 물을 배달했다. 물을 지고 다니면서 파는 물장수도 있었다.

1886년 육영공원의 교사로 부임한 헐버트의 기록에 따르면 물장수는 방대한 조직을 갖춘 공인된 제도였다. 대략 1800년대 전후로 물장수가 등장 했다고 한다. 북청 물장수도 이에 포함된다. 물장수는 아침저녁으로 각 가정에 물을 배달하는 사람을 뜻한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직업 중 하나가 물장수 였다고 한다.

1908년 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서울에서 물장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2천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1910년 민적 통계표에 따르면 당시 서울 인구가 233,590명 이었으며 이중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3,62명 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서울 상업 인구의 15%가 물장수 였던 샘이다.

물장수가 이렇게 많았던 이유는 물을 배달시켜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인데, 서울 시내의 우물의 수질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1910년대 서울 시내의 우물의 수는 총 11,410개였다. 이중 식수로 사용하기 부적당하다고 판단된 우물은 9,911개였다. 우물은 많았지만 식수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우물은 많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우물을 소유할 집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울 사람들은 물장수에 의존해 식수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봉이 김선달

조선 후기의 풍자적인 인물 봉이 김선달은 평양출신의 재사(才士)이다. 김선달이 대동강 나루터에서 사대부집에 물을 길어다 주는 물장수를 만났을 때 기발한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그러자 선달은 물장수들을 데리고 주막에 가서 얼큰하게 한잔을 사면서 꼬드겨서 한양상인들을 속여서 대동강 물을 팔아먹을 계략을 꾸민다.

결국 봉이 김선달은 한양 상인들에게 대동강물이 조상대대로 내려온 것이므로 조상님께 면목이 없어 못 팔겠다고 버티면서 이를 물려줄 자식이 없음을 한탄까지 한다. 한양상인들은 집요하게 흥정을 해서 당시 황소 60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인 4천 냥을 봉이 김선달에게 주고 대동강 물을 사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1900년대 개성의 선죽교(善竹橋)

1900년대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호)

인조 2년(1624)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로 현존하는 유일한 장대이다. 장대는 군대를 지휘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세운 건축물을 말한다.

산성 내에서 가장 높은 일장산 꼭대기에 위치하기 때문에 성 내부와 인근 주변을 조망하는 데 유리하다.

수어장대는 처음에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西將臺)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2층으로 고쳤다.

1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또한 현판은 1층에 ‘守禦將臺’, 2층에 ‘無忘樓(무망루)’로 되어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과 효종이 북벌에 끝내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붙인 이름이다.

1903년 제물포

1907년 강화외성 진해루(鎭海樓)

1907년 유달산(목포)

1910년 전주장

1900년대 평양

모란대와 대동강, 평양에서 경치가 가장 좋다는 곳이다. 모란봉정상에 최승대가 보이고 아래 강변 쪽의 건물이 부벽루다. 당시 평양의 인구는 6만 명 정도였고 개성은 3만 명쯤 되었다고 한다.

1904년 대동강과 모란봉

1907년 대동강에서 본 대동문(大同門)

1907년 대동문(大同門)

1910년대 대동문(평양)

1900년대 함흥 남환문(낙민루)

1904년 압록강(鴨綠江)

1910년대 모란대(평양)

1908년 – 1922년 평양 칠성당(七星堂)

칠성신을 모셔놓은 신당. 칠성신은 하늘의 북두칠성을 신으로 믿어 인격신화한 것이다.

칠성신의 기능은 인간의 짧은 명을 길게 잇는 수명장수이다. 칠성당이 민간에서 동신당(洞神堂)으로 신앙되는 예는 많지 않다.

호남 지역에서는 민가의 뒤뜰 장독대 한 옆이 칠성단 또는 칠성당자리가 되어 정화수를 바치고 소원, 특히 아이 낳기와 아이의 수명장수를 비는데, 이 경우는 집안에 있는 가신(家神) 신앙에 해당한다.

이러한 민간 신앙 외에 절에 가면 경내 한 귀퉁이에 산신당이나 칠성당이 있어서 불교에서 칠성을 신앙하는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칠성당은 대개 한두 평 정도의 조그만 당이고, 안에는 칠성과 산신의 그림 등을 모시고, 또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명다리들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이 보통이다.

칠성 신앙은 도교의 장생불사 신앙과도 관련된다. 무속에서 무신도(巫神圖)로 표현된 칠성신은 인격을 갖춘 7사람의 점잖은 남자 그림인데, 모자를 쓴 앞이마에 각기 별을 상징하는 둥근 광채를 박아서 그렸다.

또, 칠성신의 근원을 밝히는 '칠성풀이'가 있다. 이 칠성풀이는 칠성님이 명산대천에 기도를 드리고 얻은 아들 7형제가 계모의 간계를 벗어나서 죽음을 면하고 하늘의 북두칠성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그 뒤 7형제가 명이 길어졌다는 것으로서 수명 장수와 관련되는 칠성신에 대한 민간의 신앙을 잘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한 예이다.

1910년 빨래하기

1910년 어느 강변

1910년 어느 서당

1910년 어느 농가의 부엌

1910년 인천항

1910년대 장흥장

1911년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스님

강원도 회양군 장양면 장연리 금강산 장경봉(長慶峯)

1912년 회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淮陽 金剛山 長安寺 四聖殿)

1925년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1933년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1913년 소금장수

천일염은 염전에 가둔 바닷물을 태양빛에 말려서 소금을 얻는 방식으로, 일제강점기에 널리 보급됐다. 천일염이 '왜염'으로도 불리는 까닭이다. 한국 전통 소금은 '끓일 자(炙)'를 쓰는 자염이다.

말린 갯벌흙을 깨끗한 바닷물로 거른 다음 장작불에 장시간 뭉근하게 끓여서 구워낸 소금이다. 입자가 곱고 순하고 구수한 맛에 영양도 만점이지만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데 비해 대량 생산은 어려워 천일염에 밀려났다.

한국인들은 소금을 음식의 맛을 내거나 오래 보관하기 위해 식품을 절이는 데만 쓴 게 아니다. 소금의 쓰임새를 소개하는 코너에서는 충남 논산의 시골 마을에서 화재를 막으려고 뒷산에 묻은 소금 단지도 볼 수 있다.

주민들의 허락을 받아 가져왔다고 한다. 이런 액막이 소금단지는 보통 가정집의 한 구석이나 절집 시렁에도 흔히 놓여 있었다. 자다가 오줌을 싼 아이에게 쌀을 까부르는 키를 씌워 소금을 얻으러 다니게 한 것도 지금은 사라진 정겨운 풍경이다.

국내 소금 생산량의 86%가 전남에서 난다. 특히 신안군에 염전이 많다. 깨끗한 바다, 질 좋은 갯벌에 수심이 깊지 않고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크면서 일조량도 풍부해 천일염 생산에 최적인 덕분이다.

1915년 어느 어르신

1920년 어떤 사람(평안남도)

아이의 독감을 치유하는 목걸이(가는 새끼를 스물한 개 꼬아서 만든다.) 

1922년 금강산 유점사 오십삼불

1924년 금강산 유점사

1932년 광주여자보(영어수업)

1930년대 대동강변(옹기를 쌓아놓고 배로 실어 나르는 모습)

1930년대 안주

1933년 어느 농촌길

1933년 마애3존불

1933년 개울가의 아낙네

1933년 망중한(忙中閑)

1930년대 평양여자고보(여자 육상의 선두 주자)

1946년 어느 농촌

1946년 이를 잡기 위한 방역소독(인천시)

1947년 38선을 남하하는 일가족의 모습

1948년 38선

1950년 어느 구멍가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1950년 12월 19일 흥남철수작전(興南撤收, Hungnam Evacuation)

LST(Landing ship for tank=전차 양육함)를 타려고 몰려든 함흥 피난민들

North Korean refugees use anything that will float to evacuate Hungnam. Here they jam the decks of a South Korean LST and many fishing boats. December 19, 1950.(Navy)

미국민간상선 메러딕스 빅토리호 SS Meredith Victory 7800톤급 수송선 한 척에 1만4000명의 피란민을 수송한 기록이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그 작전은 분명 군의 철수작전이었다. 한국에서는 철수라 말하지만 미군은 재배치(Redeployment)라는 용어를 쓴다.

12월 15일 미 해병 제1사단의 출항을 시작으로 하여 17일 국군 수도사단, 21일 미 제7사단이 차례로 흥남항을 벗어나면서 교두보의 방어선은 차차 축소되었다. 제3방어선에 남아서 뒤를 돌보던 미 제3사단이 12월 24일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나자 철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세계전사상(世界戰史上)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진 이 해상 철수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10만 5000명의 병력과 1만 7000대의 차량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비와 물자를 옮겼을 뿐 아니라, 9만 1000명에 이르는 북한 피난민들도 구출하였다.

메러딕스 빅토리호는 흥남철수작전에서 가장 마지막에 남은 상선들 중 하나였는데, 원래는 유엔군들에게 항공유를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왔던 배였다. 하지만 흥남철수작전에 투입되기 위해 부산에 모든 물자들을 내려놓고 흥남으로 돌아왔다.

이 배에는 항공유가 300톤가량이 있었기 때문에 승선을 거부할 수도 있었으나, 이 빅토리호의 선장은 1만 4천명에 달하는 피난민들과 17명의 국군들을 태우고 12월 23일에 흥남에서 출발하여 24일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부산항에는 피난민이 너무 많아 다시 부산을 떠났고, 거제도로 향하여 결국 그곳에 도착했다. 이 배는 이러한 진기록을 세워 기네스북에 등재가 되기도 했는데, "단일 선박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the greatest rescue operation ever by a single ship)"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즉, 1,000여 평에 달하는 부지에 당시 민간 상선으로 참전해 무려 1만 4000여 명의 피난민을 철수시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던 것이다. 이 메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철수작전의 대표적인 수송선으로 불리지만, 이외에도 193척에 달하는 수송선이 동원되어 국군과 미군, 그리고 10만에 달하는 피난민들을 모두 남쪽으로 긴급히 철수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모두 철수한 뒤에는 흥남부두를 폭파시켰고, 이 흥남철수작전은 이렇게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무려 열흘에 걸친 사투 끝에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이 끝난 날이 크리스마스이자 중공군이 흥남을 점령한 12월 25일의 하루 전날인 크리스마스 이브였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도 불린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바로 이 흥남철수작전의 철수과정을 본떠서 모티브로 만든 것이었다. 흥남철수작전은 무려 50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흥남부두에 갇히게 된 사건인데, 여기서 10만에 달하는 최대한의 시민들을, 너무 많았기에 흥남 출신의 사람들을 모두 철수시킬 수 있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별을 맛보아야 했고, 바로 이 이별을 소재로 만든 것이 이 노래인 것이다.

1951년 4월 피난민촌(전남 화순)

1951년 조선대학교 공사 중(광주)

1951년 11월 1일 육군훈련소 창설 기념식(논산)

1953년 안양초등학교 5학년

1953년 수원시

1955년 북한 경비병(돌아오지 않는 다리)

1959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제84회 탄진 경축 시가행진(대전)

1960년대 아이들

1960년대 어느 가정의 모습

1960년대 '이(蝨)'를 잡기 위한 D.D.T 분무(동해시)

1968년 안양시

1969년  안양시

1970년 진남관 충무공 이순신 동상(여수)

1970년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모습(동두천)

1970년 문말린

1970년 문말린(Marlene Mondalek 1941 ~ )

English class in Gangjin county's St. Joseph Girls' High School, 1970.

광주. 전남지역에서 장애인 등 불우이웃을 위해 교육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헌신한 문말린 ‘사랑의 씨튼 수녀회’ 총장은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 출신으로 지난 1968년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전남 강진에서 가난한 농어촌 여성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장애인을 위한 ‘광주은혜학교’와 ‘씨튼어린이집’을 설립하고, 사회복지시설과 교육시설, 성당에 수녀들을 파견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수녀기도모임’을 주도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1997년 이후 미국에서 활동 중에도 광주지역 장애인을 위해 해마다 12만2천 달러(1억4천여만 원) 이상을 후원하고 있다.

광주시 명예시민은 문말린 수녀를 포함해 3월 현재까지 외국인이 51명과 내국인 11명 등 총 62명이다.

1970년 8월 8일 논산 훈련소

1970년 어느 시골 풍경(고창)

1972년 흥정(평택)

1973년 의정부

1976년도 추석때 찍은 어느 여인들의 모습(청주)

1970년대 유성온천

1970년대 어느 부엌

1970년대 청주시(무단횡단 단속 현장, 보행위반 체형상자)

1960~70년대 보행위반, 질서위반, 풍기위반자들. 나무 판때기로 만든 이동식 상자를 설치, 1시간씩 체벌 교육 10분 동안 무릎 꿇은 후 교육필증까지 받아야

1960년대부터 풍기 단속과 거리질서 확립 캠페인을 벌이면서 일어난 경찰관들과 시민들의 실랑이, 도시의 중심가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흔한 풍경이었다.

나무 판때기로 만든 이동식 상자를 설치해 놓고 경찰관들이 배치돼 보행위반, 질서위반, 풍기위반 등을 어긴 시민들을 상자속에 1시간씩 가둬 체벌 교육을 시켰다.

상자 속에 들어가면 오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보며 히죽히죽 웃곤 했다. 갇힌 사람들은 쓴 웃음을 지며 1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위반자 대부분이 남성이었지만 어쩌다 여성들이 걸리면 상자속에 들어가 1시간 동안 얼굴도 못 든 채 땅 만 보다 나와야 했다.

조립식 상자는 이동이 가능해 요즘의 음주단속 하듯이 위반 건수가 많은 도로변에 설치 오랫동안 계속됐다. 상자는 작은 것은 5명, 큰 것은 10명 정도로 크기도 다양했다.

1976년 안양시(삼원극장앞 무단횡단 적발)

1980년대 어느 부엌

1976년 청주 사직동(등교 늦은 학생은 창문으로)

1977년 재일동포 추석 성묘단 모국방문

1978년 소녀들의 활기찬 고무띄기

1980년 4월 사북항쟁(舍北抗爭)

사북 탄광 노조지부장의 부인 김순이씨가 납치돼 기둥에 묶여 있는 모습(1980년 4월 24일자 중앙일보 1면 사진)

10·26사태 이후 1980년 <서울의 봄>으로 고조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발생하여 80년대 노동자투쟁의 발화점이 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산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해 광부들이 일으킨 노동항쟁이다.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에 걸쳐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인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의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하여 광부와 그 가족 6,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발전한 대규모 노사분규를 말한다.

노사분규가 일어난 것은 이보다 앞선 4월 16일이었는데, 이때에는 시위가 격렬하지 않았다. 광부들은 4월 18일부터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지부장의 사퇴를 요구하였으나, 회사 측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채 경찰을 개입시키면서부터 유혈사태로 번져나갔다.

광부 측에서는 경찰이 어용노조와 회사 측을 두둔한다고 판단하였고, 더욱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어용노조 지부장마저 도망쳐 버리자,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4월 21일부터 광부들은 몽둥이·곡괭이 등으로 무장하고 경찰과 맞서 지서를 불사르는 한편, 철도와 사북읍 입구에 방어울타리를 치고 열차를 세워 검문검색을 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160여 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으며, 사북읍은 4월 24일까지 치안 공백상태에 빠졌다. 사태가 진정된 후 당시 계엄사령부는 관련 인물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이 사태는 경직된 노사관계와 광부들의 누적된 불만, 값싼 노동력 등이 빚어낸 참사로서, 이 사건 이후 전국 각지에서 노사분규가 잇따라 일어나는 등 1980년대 노사문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80년 5월 전남대

전남대학교 정문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1980년 5월 5.18 광주 민주화운동

1980년 대로(大路) 추격전과 투석전으로 맞서는 전북대 학생들

1981년 장성읍내(태백)

1983년 남한강 나루터(충북 제천)

1988년 교련복 소풍

1988년 수인선 소래철교

1990년 동학사(東鶴寺)

1990년 선암사(仙巖寺)

1990년 화엄사(華嚴寺)

1989년 거리 질서 캠페인(광주시)

1990년 써레질

1990년 홍수로 돼지가 다니는 행주동(일산)

1992 능곡역 버스정류장(일산)

1993년 추석 귀성객(서울-부산간 하행선 고속도로)

2006년 옥돌봉 철쭉

백두대간에서 세조2년 때부터 자란 약 550년(국내 最古) 된 국내 최고 철쭉나무가 발견됐다.

산림청은 이번에 발견된 철쭉 노거수(老巨樹)를 포함한 군락지 33㏊를 '산림유전자원보호림' 및 '보호수'로 지정해 적극 보호하기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따라 태백산에서 소백산을 향해 가다가 도래기재를 지나 옥돌봉(1,242m) 아래에 이르면 한 폭의 그림처럼 장관을 이루며 펼쳐진 철쭉나무 숲을 만나게 된다.

이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55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견뎌온 철쭉나무 한 그루다. 국립수목원에서 철쭉의 나이를 측정한 결과 550년(오차범위 ±30년) 된 것으로 판명된 이 철쭉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키 5m, 뿌리부문의 둘레가 105㎝, 가지 폭이 8.3m에 이른다.

세 갈래의 가지는 그 둘레가 각각 64㎝, 52㎝, 45.4㎝로서 인공미가 전혀 가미되지 않아 자연그대로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 정선군 반론산에 있는 200년 된 철쭉(천연기념물 제348호)이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작년 8월 영남알프스인 가지산 철쭉이 천연기념물 제462호로 지정되면서 최고령 나이를 갱신(450년)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최고령 나이를 갱신하게 됐다.

이 철쭉이 새싹을 틔울 당시(1456년, 세조 2년)는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났던 해로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인쇄술을 개발하여 성서를 찍어내던 시대다. 철쭉은 주목, 구상나무, 분비나무 등과 더불어 고산지대에 자라는 대표적인 수종으로 이중에 유일한 낙엽활엽수이자 화목류(花木類)다.

따라서 이번 철쭉나무 발견은 국내 최고령 철쭉이라는 의미 외에도 백두대간이 우리나라 국토의 생태 축으로서 생태통로(eco-corridor)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태백산과 소백산의 철쭉 군락지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산림청 관계자는 "철쭉이 자라는데 방해가 되는 주변 나무 제거, 뿌리경쟁 회피 등을 통해 후계림을 적극 조성해 나가는 한편 하층에 분포하는 처녀치마, 각시원추리, 노랑제비꽃 등의 초본식생도 적극 보호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7년 삼성-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고(태안)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0여 명이 사망, 실종된 대형 참사

고구려 상징 우표

오녀산성(五女山城)

고구려의 첫 도읍지

오녀산성(五女山城)은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번시 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 오녀산(五女山)에 위치한 산성(山城)이다. 해발 800미터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특유의 테뫼식 축성 양식을 보여준다.

오녀산성은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남북 길이 1500m, 동서 너비 300m이고, 전체 약 8km이다. 압록강(鴨綠江)의 지류로 비류수(沸流水)로 비정되는 혼강(渾江)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은 200m 높이의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되어 왔다. 동쪽과 남쪽의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성벽을 설치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전에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된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에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처음 언급되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홀본성(忽本城)이라고 하고, 삼국 시대 관련 다른 기록들은 대체로 졸본성(卒本城)이라 쓰고 있다. 《고려사》 공민왕조에는 오로산성(五老山城) 또는 우라산성(于羅山城)으로 쓰여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수도를 홀승골성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오녀산성의 옛 이름인 우라산성의 발음이 위나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고구려의 국내성은 이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해외

서시(西施)

기원전 5세기(춘추 시대 말기)의 사람으로 서시(시쓰, 西施, 생몰년 미상)는 고대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본명은 시이광(스이광, 施夷光)이다. 중국에서는 서자(시쯔, 西子)라고도 한다.

삼국지 등장인물

춘추전국 시대의 서시(西施), 전한 시대의 왕소군(王昭君), 삼국 시대의 초선(貂嬋), 당나라의 양귀비

초선(貂蟬)

왕윤(王允) 부중의 가기(歌妓). 아름답고 총명하여 왕윤이 친딸처럼 대했다. 동탁의 폭정으로 한 왕실이 차츰 기울자, 왕윤을 도와 ‘연환계(連環計)’를 행하여 동탁과 여포 사이를 교묘하게 맴돌며 두 사람이 반목하게 만든다. 여포가 왕윤을 도와 동탁을 죽인 뒤에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는다. 조조가 여포를 사로잡아 죽인 뒤에는 그녀를 허도(許都)로 실어 보낸다.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류약제 선우(復株絫若鞮單于)의 연지(),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이었으나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보내졌다.

이름은 장(, 출전은 한서)이다. 성을 왕, 자를 소군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군이라고 불리며 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형주 남군(현재의 호북성 사시) 출신으로 서시, 양귀비, 우희와 함께 고대 중국 4대 미녀들 중 1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왕소군 이야기는 민간전승, 설화, 시가 등으로 재창조되었으며, 당나라 시인인 이태백과 백거이, 송나라 시인 왕안석과 구양수 등에 의해 시로 창작되는 등 중국 문학 소재로 애용되었다.

양귀비(楊貴妃, 719년 6월 26일-756년 7월 15일)

당 현종의 후궁

홍무제 주원장(明太祖 朱元璋, 1328년-1398년)

명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 명 태조(재위 1368-1398).

황각사에서 탁발승 생활을 하다 홍건적에 들어가 승승장구하여 남경에서 명을 세우고,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몰아냈다몽골의 풍습과 제도를 철저히 금했으며, 한족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이룩했다.

2000년대 자금성(紫禁城)

1957년 이탈리아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기 위해 티켓(허가증)을 발급하는 경찰관

1960년 미국

남부 흑인으로서 최초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루비 브릿지를 호송 해주는 연방 요원들

1995년 Windows 95 launch, Virginia

사진 출처: Designers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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