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21. 15:58ㆍ歷史
서울
서울 개략도
백악산(북악산)
태조 이성계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신사임당(申師任堂) 초충도(草蟲圖) 맨드라미, 수박
1504년 10월 29일-1551년 5월 17일)는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이다.
1899년 숭례문(崇禮門)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남대문이 숭례문이 된 것은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 때 풍수지리학에 밝은 무학대사를 데리고 경복궁을 지었는데 자주 불이 났다. 경복궁에 불이 나는 것을 막을 수 없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오행상 이 지구를 350도에 대해 24방위로 나뉘어 놓은 것을 나침반, 쇠철, 나전으로 분석해 봤을 때, 북방은 수(水)로서 물을 상징하고 중앙은 목(木)으로 나무를 상징하고 남방(南方)은 화(火)로서 불을 상징하는데 남쪽 불을 막아야 경복궁에 불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숭례문이라 하였다. 숭(崇)자는 오행상 목(木)이며 예(禮)자는 오행상 화(火)에 속하니까 나무(崇)위에 불(禮)이 떨어지면 나무가 타버리게 된다.
또 현판도 글씨를 옆으로 쓰지 않고 세워서 쓴 것도 나무에 불이 떨어져 화기(火氣)가 경복궁까지 들어올 수 있는 불이 남대문에서 다 타버린다는 뜻으로 숭례문(崇禮門)이라 했고, 세워서 썼다고 한다.
1395년(태조 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1900년대 숭례문
1904년 숭례문 원경(호주, George Rose)
1904년 숭례문 근경(호주, George Rose)
1907년 숭례문
1930년대 남대문로
남대문로 1정목 거리, 경성이 서구식 역사주의 양식건축의 거리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1950년 숭례문
1951년 겨울 숭례문
1952년 숭례문
1952년 숭례문 전차역
6.25 직후 숭례문 모습
1960년 숭례문(전쟁의 흔적)
1963년 중수공사를 마친 숭례문
1968년 숭례문
1970년 숭례문
1970년대 숭례문
1983년 숭례문
2008년 2월 10일 숭례문(崇禮門) 화재
2013년 숭례문 복원 개념도
1901년 서울성곽
1901년 종로
1902년 광화문
1903년 광화문
1904년 광화문(光化門)
관악산에서 치솟는 화기를 막고자 하는 풍수사상에서 세운 광화문 앞의 해태상
광화문(光化門)은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 년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병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이를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설상가상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그나마 도로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전통적인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10년 8월에 완공되었다.
서울 중구와 용산구 사이에 있는 남산은 북악산, 낙산, 인왕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1910년 처음 공원으로 개발되었으며 당시에는 '한양공원'이라는 고종의 친필 석비가 있었다.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仁慶山)이었으나 조선초 태조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온 뒤에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으로 지칭되었고 풍수지리상 안산으로 중요한 산이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목멱대왕 산신을 모시고있어 '목멱신사'라고 불리고 이때부터 인경산은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다.
조선 도읍 초기부터 신성한 영산으로 여겨져 온 남산은 종남산(終南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으로도 불렸다. 북악산, 낙산, 인왕산과 더불어 한양의 내륙분지를 형성하던 곳이고, 조선 도읍 초기에는 이들 산군들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쌓였다.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과 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국사당(國祀堂)과, 통신제도의 하나인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또한 성벽 일부가 남아 당시의 흔적을 보여 준다.
일제는 일제강점기에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해 사대문 안 어디에서든 보일 수 있도록 남산에 신사를 세웠다. 당시 신궁은 일본 본토를 통틀어도 15개밖에 없는 실정이었으나 식민지의 수도에 신사중에서 가장 격이 놓은 신궁 중의 하나로 조선신궁을 세워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1900년대 광화문
1915년 광화문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시정오년조선공진기념사진엽서(Postcard of the Joseon Products Show Commemorating the 5th Government)
1915년 한일강제병합 5년 기념으로 데라우치 총독이 야심차게 준비한 조선물산공진회, 요즘 말로는 박람회이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조선물산공진회를 보기위해 경복궁 앞에 몰려든 사람들이다. 2주동안의 기간동안 조선인구의 1할인 200만 명이 공진회를 보러 다녀갔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공진회라는 거대한 구경거리에 열광하면서 열심히 구경했으며, 임진왜란 이후 270여 년 동안 폐허로 있다가 1865년(고종 2) 중창되기 시작한 경복궁의 광화문을 비롯 근정전주위를 제외한 궁궐이 전부 헐렸어도 사람들은 슬퍼하거나 애처로워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구경거리에 그저 열광했을 뿐이다.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었다고 슬퍼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일제가 일부 건물을 훼손하거나 수축하여 경복궁에서 전국의 물품을 수집·전시한 대대적인 박람회와 동시에 매일신보 사옥에선 가정박람회도 개최하였다.
그 후 1917년 창덕궁 침전 일곽에 불이 나자 일제는 창덕궁 침전을 복원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 등을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헐어서 창덕궁의 침전을 복구하였고, 1916년부터는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등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 완공하고, 광화문은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하였다.
이외에도 1929년 5월에는 융무당(隆武堂), 융문당(隆文堂) 등을 헐어 한강로의 용광사를 지었으며, 1932년 10월에는 선원전을 헐어 장충동의 박문사(博文寺)를 지으며 경복궁을 훼손하였다.
용광사는 일본인이 지은 사찰이고,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당이었다.
1940년에는 건청궁 터에다 미술관(옛 전통공예전시관)을 지으며 수많은 내전 건물들을 헐어버렸다.
일제를 거치며 경복궁에 남게 된 건물은, 1865년(고종 2) 건립된 건물로 건춘문, 천추전, 신무문, 동십자각이 있고, 1867년 건립된 건물로 근정전, 사정전과 주변 회랑 및 행각, 제수합, 함화당, 경회루, 수정전(修政殿), 경안당 등이 있으며, 1873년 지어진 건물로는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이 있다.
광복 이후 경복궁 내에는 국립중앙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 후생관(용산으로 이전하기 전의 국립중앙박물관), 제2별관(옛 문화재연구소) 등이 건립되고, 서북쪽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제 모습을 다시 잃었다.
1929년 광화문(3층 누각으로 개조된 모습)
1929년 조선박람회 당시에 동십자각에서 광화문(해체이전·후) 방향으로 이어지는 연도의 풍경이다.
동십자각에 연결된 궁장을 헐어내고 지금의 모습처럼 만들어진 것이 1929년의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때이다.
1929년 조선총독부 시정 20주년 기념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
경복궁에서 시정 10주년을 기념해서 개최했던 대형박람회로 식민통치의 성과를 대중에게 선전하는 역할을 했다.
전시관은 조선관련 뿐 아니라 내지(일본), 대만 등을 포함하는 제국 전체의 전시관을 포함하고 있다.
광화문이 3층 누각으로 개조된 모습이다. 조선총독부가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복궁에서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과 업적을 알리기 위한 조선박람회를 개최하였다. 사진은 정문모습이다.
1907년 최초의 경성박람회가 개최된 이래 경성에서 개최된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 1929년의 조선박람회, 1940년의 조선대박람회 외에도 전국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박람회와 공진회가 개최되었다.
그 중에서 식민지 조선의 변모된 모습을 전 조선인에게 선명하게 각인시킨 행사가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와 1929년의 조선박람회였다.
일본은 강점 6년째인 1916년부터 조선 식민 통치를 위해 경복궁 내에 조선총독부를 짓기 시작한다.
광화문 바로 뒤쪽 흥례문을 허물고 1926년 조선총독부를 완공한다. 이때 광화문이 총독부 앞을 가린다는 이유로 완전 철거를 추진한다.
그러나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일제는 이듬해인 1927년 광화문을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의 북쪽(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으로 옮겨 버린다.
1923년 공진회를 개최하면서 해태상을 근정전(勤政殿) 서쪽으로 옮겨 버려뒀다가, 1929년 12월에는 총독부 앞으로 이전한다. 현재 광화문 앞의 해태상은 1968년 광화문 복원 당시 자리 잡은 것이다.
조선총독부박물관(朝鮮總督府博物館)은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안에 설치했던 박물관이다.
1915년 경복궁 안에서 개최한 산업 박람회인 조선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가 그 시초이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5년 동안 조선이 발전했음을 과시하기 위한 전시였다.
이후 박람회를 위해 지었던 건물을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 건물은 당시 조선에서 유일한 내화 건물이었다. 광복 이후 전시관 등으로 쓰이다가 1990년대에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철거되었다.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들어서 있던 공진회 건물들은 정적(靜的)이고 나지막한 경복궁의 건물들과는 달리 높은 위용을 보여주었다. 공진회장의 모습은 비밀스럽고 조용한 왕들의 폐쇄적 공간을 강하고 진취적인 선과 공간들이 빠른 속도로 열고 침범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근정문 앞에 홍화문과 유화문(維和門), 용성문(用成門), 협생문(協生門)이 한꺼번에 헐렸고, 근정문 앞을 흐르던 금천의 영제교는 돌사자 세 마리와 함께 뜯겨 나가 경복궁 서쪽 창고인 내사복(內司僕) 바깥 정원으로 옮겨졌다. 동궁인 자선당(慈善堂)도 함께 사라졌다.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joseon expo)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일제가 일부 건물을 훼손하거나 수축하여 경복궁에서 전국의 물품을 수집·전시한 대대적인 박람회
1916년 총독부 신청사가 착공되기 1년 전,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 동안 경복궁에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다.
일제강점기 경복궁에서 벌어진 각종 박람회
조선부업품공진회(1923), 동계전람회(1923), 조선가금공진회(1925), 조선박람회(1926), 시정 20주년기념 조선박람회(1929), 시정 25주년기념 조선산업박람회(1935) 등
[단독] 조선초 경복궁 깔아뭉갠 일제 박람회 터 드러났다
1945년 건춘문과 광화문(경복궁)
삼청동길의 경복궁 동문(東門) 건춘문(建春門)과 이전된 경복궁 남문인 광화문(光化門)
건춘문은 조선 태조가 한양천도와 함께 처음으로 세웠던 궁궐인 경복궁에 딸린 문으로, 문 안에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왕족·척신(戚臣)·상궁들만이 드나들었다.
또한 대궐에 열병(閱兵)을 위한 비상의 첩종(疊鐘)이 울리면, 왕을 직접 모시고 있던 시신(侍臣)들이 모여 명령을 기다리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과 함께 타버렸으며, 현재의 건춘문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정하면서 경복궁과 함께 1865년(고종 3) 12월에 상량(上樑)한 것이다.
1951년 동십자각
1965년 광화문 석축
1926년 7월 광화문 해체 시작. 1927년 광화문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옆으로 옮겨진다. 6.25전쟁 때 그마저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1968년 12월 11일 콘크리트로 복원(2010년 8월 15일 재복원)
1969년 콘크리트로 복원한 광화문
1970년 광화문
1972년 광화문
1973년 광화문
1978년-1979년 광화문(인왕산)
광화문광장
1900년 사직단
사직단(社稷壇) 서울 종로구 사직동(社稷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단지(壇址)
1394년(건립), 1636년(재건), 1694년(중수)
조선고적도보 속의 사직단의 모습, 훼손되기 전의 모습으로 보이며 사방에는 홍살문이 배치되어 있고 단 주위를 낮은 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는 원래 고대 중국에서 수목신앙과 마을공동체의 집단신으로 인식되다가 한왕조에 이르러서는 토지신으로 정착되었다.
기록에는 고구려와 통일신라에서 사직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고려성종 때 그 제도와 제단이 만들어진 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제사가 이루어졌다.
사직단에는 매년 2월과 8월 동지와 섣달 그믐날에 사직대제가 치러졌으며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1908년 사직대제가 폐지되었고 1911년에는 건물과 땅이 모두 조선 총독부에 인계되었다.
1922년 경성부에서 사직단을 공원으로 설계하면서 대지는 잘려나가고 경내에는 휴식을 위한 건물이 세워지고 수목이 심어지면서 신성한 공간으로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1945년 이후 정비가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경내에는 황학정, 단군성전, 도서관, 치안센터, 주민센터 등이 여전히 들어있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사직단은 임금이 토지신과 곡신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돌로 만들어진 네모난 제단이 2개 있다. 각각 사단과 직단으로 좌우로 아란히 놓여 있고 주위로는 사방의 문과 네모난 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단은 네모진데 토지신과 곡신신은 땅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으로 만든 것이다.
돌로 만든 단 안에는 노란색 흙이 채워져 있는데 이것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된 방위 개념으로 노란색과 흙은 중앙을 상징한다. 높이는 길한 숫자인 3에 맞추어 3척만큼 3단의 장대석을 쌓았다.
한 변의 길이는 25척이고 사방으로 3단으로 되어있는 계단이 있다. 단의 외곽 울타리는 유라고 부르는데 신성한 구역인 성계와 인간의 세상인 속계를 구분하는 것으로 한 변의 길이는 150척 정도이다.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宗廟),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1395년(태조 4) 공사를 착수하여 설단(設壇)이 완성되자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의 동·서 양단(東西兩壇)을 설치하였는데 동단에는 국사(國社: 正位土神), 서단에는 국직(國稷: 正位穀神)을 모셨으며, 단에는 주척(周尺)으로 높이 2.5자, 너비 1자의 석주(石柱)를 각기 세워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배향하였다.
단은 네모반듯하며 세벌장대석을 높이 3자가 되게 하고 한 변이 2장 5척(주척)의 크기로 평면을 설정하였다. 단의 4면에는 3층의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상 네 귀퉁이에는 구멍 난 돌이 박혀 있고 큰 쇠고리가 꽂혔는데, 이는 기둥을 세우고 차일을 치도록 설비하였던 것이다.
사직단에는 1년에 네 차례의 대사(大祀)와 선농(先農)·선잠(先蠶)·우단(雩壇)을 제사지내는 중사(中祀), 그 밖에 기곡제(祈穀祭)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사직단의 설치와 함께 사직서(社稷署)가 생겨 제사의 수발을 맡았다.
조선시대에 사직단은 경복궁 앞 육조거리 우측 첫 번째에 자리 잡은 예조 옆길을 따라 서쪽으로 곧장 가면 인왕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해방 후 1962년에는 도시 확장으로 정문이 뒤로 이건 되었고, 1970년대에는 북쪽에 종로도서관과 동사무소, 파출소가, 서쪽에 수영장 등이 건립되어 주변 환경이 다시 크게 훼손되었다.
1900년 경운궁 대안문(慶運宮 大安門)
순종 행차 광경
대안문은 1906년 2월 편액을 이등박문이 대한문으로 바꾸기 전까지 고종이 경운궁(나중에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뀜)에 거처하던 정문 역할의 동쪽 문이었다. 순종으로 양위 후 문 이름이 대한문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을 당시, 궁궐이 모두 불타버려서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거처하게 된 것이 덕수궁의 시초이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덕수궁은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을 짓기 전에는 임시로 즉조당(卽祚堂)을 정전으로 사용하고, 3문(門)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인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명례궁(明禮宮)을 옛 이름인 경운궁(慶運宮)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2년 들어 궁궐을 크게 중건하면서 정전인 중화전·중화문·외삼문(外三門)인 조원문(朝元門)을 세워 법전(法殿: 임금이 백관의 경축일 하례를 받는 정전)의 체제를 갖추었다.
얼마 뒤 인화문 자리에는 건극문(建極門)을 세우고 조원문 앞 동쪽에 대한문의 전신인 대안문(大安門)을 세워 새로 정문으로 삼았다.
1904년 함녕전(咸寧殿)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자 1904년에서 1906년에 걸쳐 이를 다시 중건하였고,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수리하면서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으며 지붕마루에 양성(兩城)을 하고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얹었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1900년대 돈의문(敦義門) 도성 안
돈의문에서 본 도성 안(왼쪽 경희궁, 오른쪽 언덕 상림원)
돈의문에서 바라본 모습(1900년 숭례문에서 돈의문 방향으로 전차노선이 개통, 1915년 철거되기 전 시기 추정)
돈의문(敦義門)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서대문(西大門)·새문·신문(新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 한양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다.
1413년(태종 13) 폐쇄되고 그 대신 그 북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출입케 하였다가, 1422년(세종 4)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하였다.
그 뒤 헐어진 것을 보수하여 1711년(숙종 37)에 다시 지었으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철거되었다.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즉 견고하게 쌓은 돌 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의 특징은 알 수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鷲頭: 망새)·용두(龍頭)·잡상(雜像)·선인 등을 배열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때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본인들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1901년 돈의문
1904년 돈의문
1901년 최초의 육교
1901년 홍교(虹橋), 홍예교(虹霓橋)
최초의 육교 1901년, 경희궁과 경운궁을 아치로 잇다
새문안길을 가로지르는 자문(紫門). 서대문과 광화문 사이의 전차선로가 보인다.
홍예교(虹蜺橋: 무지개다리)는 광해군 11년(1616년) 흥화문 안쪽에 세워졌었고. 일제 강점기에 묻혔다가 2001년 발굴하여 일부가 금천교로 복원하였다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으로 명성왕후가 시해 당하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년)을 감행한 것이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바로 인근의 경운궁(慶運宮)을 수리했고, 어느 정도 공사가 마무리된 이듬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경운궁 태극전(太極殿, 즉조당)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면서 황제의 위에 올랐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법궁(法宮) 경운궁은 황궁으로서는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당초 경운궁은 궁궐로 건립된 것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왕가의 후손이 살던 집이었으나, 의주 몽진에서 환도한 선조가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부터 궁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인조가 즉위하기까지 30년 가까이 정릉동행궁, 서궁 등으로 불리며 파란의 역사를 이어왔으나, 그 이후로는 왕실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화강암 ‘쌍무지개’ 다리 - 무지개다리의 뜻으로 홍교
1900년 1월 경운궁 궁장이 마무리되면서 고종은 경희궁(慶喜宮)에 관심을 기울였다. 광해군 9년(1617) 창건된 경희궁은 이후 철종 대까지 이궁(離宮)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고종 즉위 초 경복궁이 중창되면서 버려진 궁궐로 남아 있었다.
고종은 경운궁이 황궁으로서의 위엄을 차리기에는 협소했기에 가까운 곳에 있는 경희궁을 보수하여 한 궁궐처럼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시도가 바로 양 궁궐을 잇는 아치교의 건설이었다.
이 무지개 육교는 1901년(고종 38) 8월 폴란드계 독일인의 설계로 건설됐다. 2칸의 아치를 튼 ‘쌍무지개’ 모양의 이 화강암 육교가 한반도 유사 이래 최초의 육교였다.
기록이 남지 않아 여타의 제원은 알 수 없으나, 서대문로를 건너 경희궁과 경운궁을 연결했던 아치 육교의 규모는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교각의 일부가 러시아공사관 경내를 지났던 것으로 전해온다.
세계 첫 육교 이후 40년 만에
또한 남아 있는 사진을 살펴보면 육교 아래 아치로 전차 선로가 통했다. 고종은 아치 육교를 건설한 이후 경희궁 수리에 박차를 가했으나, 일제강점기 동안 경희궁은 결국 철저하게 훼멸되고 말았다. 아치 육교 또한 철거당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육교였던 이 무지개다리는 1861년 영국 런던에 세계 최초의 육교가 가설된 이후 40년 만에 건설된 것이었으며, 일본의 나고야(名吉屋) 육교보다는 58년이나 앞서 건설됐다.
1908년 이후 서대문에서 신문로 방향
경운궁(오른쪽)과 경희궁을 서로 연결하던 석조육교 홍교(虹橋 1902년 완공, 1908년경 철거)가 없다.
1902년 인화문(仁化門)
인화문(仁化門)은 본래 덕수궁의 정문이었는데 대안문(大安門)(현재의 대한문)주변으로 도로가 나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 자리에 건극문(建極門)이 새로 세워졌었다. 대안문의 현판은 이왕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건극문도 없는 상황이다.
1911년 혜화문
1900년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앞 전차길이 생기기 전 모습)
1901년 흥인지문(興仁之門) 앞의 종로통 전차길
1902년 흥인지문
1908년 이전 흥인지문
1953년 흥인지문
1954년 흥인지문
1967년 흥인지문
1980년대 흥인지문
1900년 보신각(普信閣)
보신각은 종각이라고도 하며, 고종 32년(1895) 보신각이라는 사액을 내린 데서 이름 붙여졌다. 파루(罷漏, 오전 4시)에 28번, 인정(人定, 오후 10시)에 33번 울리며 도성 4대문의 여닫는 시각을 알리던 종은 그 수명이 다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지금의 종은 1986년 제작된 ‘서울대종’으로 매년 새해 첫날이면 20t의 육중한 몸을 울려 한 해의 시작을 알린다.
유교사상을 국가경영의 기본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행’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고 그중 ‘믿음(信)’을 중심으로 여겼다. 도성의 4대문에 한 글자씩 포함된 네 가지 덕목들과 함께 한양 중심, 보신(普信)의 전각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국가통치의 이념을 되새긴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漢陽)에 종을 처음 건 것은 1398년(태조 7)으로, 광주(廣州)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靑雲橋) 서쪽 종루에 걸었다. 1413년(태종 13)에 종루를 통운교(通雲橋: 종로 네거리)로 옮기고 1458년(세조 4)에는 새로 대종(大鐘)을 주조하여 달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종루는 소실되고 종도 파괴되었다.
그 후 1619년(광해군 11)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이때 세운 종각은 임진왜란 전의 2층 종루가 아니고 1층 종각이었으며 여기에 건 종은 명례동(明澧洞) 고개에 있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이 종은 본래 원각사종으로 세조 때에 주조한 것인데 1536년(중종 31)에 남대문 안으로 옮겨놓았다가 1597년(선조 30) 명례동 고개로 옮겼던 것을 광해군 때 종각을 복구하면서 이전한 것이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 4차례나 화재와 중건이 있다가 1895년(고종 32)에 종각에 '보신각'이란 현액(懸額)이 걸린 이후 종도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종각이 파손된 것을 1953년 중건하였다가 1980년 다시 2층 종루로 복원하였다.
1901년 보신각(종로)
1900년대 보신각(普信閣)
‘종각’(鐘閣)이라는 지명은 종로1가 네거리 동남쪽 모퉁이에 보신각(普信閣)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종로’(鐘路)라는 명칭 역시 마찬가지다. 종각은 조선 건국 후 고려의 제도를 따라 세워지긴 했으나, 오늘날 종로로 이어져오는 종각의 역사는 조선 왕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종루는 태조 5년(1396) 지금의 인사동 입구인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처음 세워졌는데 당시 규모는 2층 누각에 5칸 건물이었다. 이때부터 종루에 종을 걸어 아침저녁으로 울리기 시작했는데, 저녁 10시에는 인정(人定)이라 하여 28번,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라 하여 33번을 울려서 시간을 알리고 사대문을 열고 닫았다. 도성 안의 하루의 시작과 끝이 종소리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태종 13년(1413) 도성의 중심로를 따라 행랑(行廊)을 지으면서 광통교 북쪽 운종가(雲從街), 현재의 종로 네거리로 종루를 옮겨 세웠다. 이때에는 시간을 재기 위한 물시계(누기(淚器))도 함께 설치하였는데, 그 기능이 정확하지 않아 불편을 거듭하다가 세종 19년(1437)에 이르러서는 경복궁 안에 있는 자격루에서 잰 시간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세종 22년(1440)에는 기존의 종루를 헐고 다시 지으면서 동서 5칸 남북 4칸으로 규모를 확대하여 위층에는 종을 달고 아래 누(樓) 사이로는 인마(人馬)가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단층의 기와집이나 초가로 이루어진 당시의 주변 환경 속에서 우뚝하게 솟아 당당한 위용을 자랑했을 이 종루는 아쉽게도 임진왜란으로 그만 불타버리고 만다.
그 후 광해군 11년(1619)에 단층 종각으로 다시 지었으나 그마저도 숙종 12년(1686)에 화재로 사라져 새롭게 중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 6년(1869)에는 운종가 일대에 대화재가 발생해 종각 역시 주변의 시전 건물들과 함께 소실된 것을 그해에 다시 건립하였다.
1895년 3월 고종은 이 건물에 ‘普信閣’이라는 현판을 내려 이때부터 오늘까지 보신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의 보신각은 단층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였다.
그 후 1915년에는 길을 넓히는 과정에서 약간 뒤로 이동했으며, 그것이 한국전쟁 때 파괴되자 1953년에 다시 뒤로 물려 중건하였다. 1978년에는 대지를 145평에서 850평으로 확장하게 되는데, 이때 건물이 또다시 뒤로 밀리면서 철근 콘크리트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을 서북향으로 세우게 된다.
이것이 지금의 보신각이다. 현재 규모는 건평 72평 연건평 144평이며, 건물의 기단 위에는 석조 난간을 두르고 사면의 중앙으로 5단의 계단이 놓였다. 또 1층 좌우 협칸 북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목조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종은 2층에 걸었다.
옛 건물에서 ‘각’(閣)이란 단층집이나 2층집의 1층을 가리키며, ‘누’(樓)는 지면에서 한 길 정도 떨어진 집을 지칭한다. 때문에 지금의 구조로 보자면 보신각은 오히려 ‘보신루’ 혹은 ‘종루’로 불러야 옳을 것이다.
1945년 보신각
1956년 복구된 보신각
1959년 보신각
1972년 보신각
1984년 보신각
1975년 11월 광희문
중구 광희동(光熙洞) 소재의 조선 사소문(四小門)의 하나
1975년 11월 광희문 복원공사 후 모습, 성문이 원래의 위치에서 남쪽(좌측)으로 15m 이동되었다.
동대문과 남대문의 사이, 즉 도성의 동남쪽에 있는데 1396년(태조 5)에 도성을 쌓을 때 창건되었으며, 1711년(숙종 37)에 고쳐 쌓았다. 1719년에 석축 위에 문루를 짓고 ‘光熙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한양도성은 1396년(태조5)축조, 1422(세종4) 중수, 처음에는 석성과 토성이 섞여있었으나 세종이 전부 석성으로 개축. 4대문과 4소문을 더하여 팔대문이라 하였다. 정동의 흥인지문, 정서의 돈의문, 정남의 숭례문, 정북의 숙청문이 4대문이며, 동북의 황화문(중종6년 혜화문으로 개면, 동소문). 서남의 소덕문(소의문으로 개명.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수구문), 서북의 창의문(자하문)이다.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한다.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에 복원할 때 홍예석축(虹霓石築)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옮겼고, 문루 12평을 새로 지었으며, 주변의 2백 평을 녹지화 하였다.
시구문 밖에는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 때문에 무당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하는 무당고개, 신당동이란 이름도 무당들이 많이 살아 원래는 귀신 신(神)자가 들어간 신당동(神堂洞)이었다. 옛 지도에는 이곳이 신당리(神堂里)로 되있다.
1975년 광희문
1972년 돈화문(敦化門)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에 있는 조선조 5대궁의 하나인 창덕궁의 정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문이다.
숙정문
신무문
1901년 청계천(淸溪川)
청계천(淸溪川)은 일제가 붙인 미명(美名)처럼 항시 맑은 물이 흘렀을까? 그렇지 않았다. 태종이 자연하천을 넓혀 판 인공 배수로였기에 '개천(開川)'이라 명명했지만, 만든 직후부터 장마철이면 흙탕물이 집과 사람을 삼키곤 했다.
그럼에도 세종 이후 200년간 준설은 없었다. 광교(廣橋) 아래 모든 물길이 메워져 버린 영조 때에야 천변(川邊)에 석축(石築)을 쌓고 토사를 퍼냈으며, 표석을 세워 준설의 기준점을 세웠다. "공경대부와 서민을 막론하고 개천이 막히지 않고 잘 흐르게 해야 한다."는 영조의 당부는 1908년까지 지켜졌다.
그러나 일제는 1918년까지 2, 3년 주기로 행해진 준천(濬川)을 하지 않았고, 빈민들이 모여들면서 청계천은 시궁창이 되고 말았다.
1902년 청계천 수표교
1902년 청계천(淸溪川) 수표교(水標橋)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20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던 다리이다. 세종 2년(1420)에는 다리 옆에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었기 때문에 마전 앞에 있는 다리라는 의미에서 마전교(馬前橋)라고 불렀다.
세종 23년(1441) 다리 서쪽 중앙에 나무로 수표(水標)를 만들어 세우면서 다리 이름을 수표교라고 불렀고, 이를 수표다리라고도 하였다. 이 수표는 성종 때에 돌로 만들어 세웠으며, 영조 36년(1760) 대대적인 개천 준설 후에 수표석을 다시 세웠다.
영조 때 준천 이후 수표교 교각에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겨서 이후 개천 준설의 표준을 삼도록 하였다. 영조 44년(1768)과 고종 24년(1887)에 개수하고 다리 난간에 ‘무자금영개조(戊子禁營改造)’와 ‘정해개축(丁亥改築)’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영조 때는 다리 동쪽에 준천사(濬川司)란 관청을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가 시작되면서 기초석을 제외한 다리 대부분이 철거 되면서 신영동으로 이전 되었다가 1959년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2003년 6월 청계천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청계천 위에 원래의 수표교를 본 따 만든 새로운 수표교가 생겨났다.
1904년 청계천
1930년대 광교 부근 청계천변
1930년대 광교 부근 청계천변 유료 빨래터. 빨래하는 아낙 뒤편 석축은 영조(英祖) 때인 1773년에 쌓았다.
1930년대 청계천 빨래터 모습이 담긴 사진은 역설을 범한다. 물이 깨끗해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펴낸 '조광(朝光)'에 1936년 연재된 서울 사투리가 귀에 감기는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믄, 둔(돈)을 내요?" "해마다 경성부청에다 갖다 바치는 세금만 해두 수십환야." "그런 줄 누가 알었나요?" "저런. 시굴서 첨 올라 물르구 그랬군 그래. 그저 이번은 그냥 눌러 봐 주구료." 상경한 지 며칠 안 된 촌 아낙이 '경알이(서울사람)'의 삶에 적응하며 겪은 소극(笑劇)을 묘사한 소설 속 대화는 그때 거기의 속살을 헤집는다.
"떼를 지어 빨래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불쾌하다. 걸레를 빨아도 더러운 물에 의복을 빠니 이 얼마나 비위생적이냐?"라고 개탄한 1928년 1월 20일자 동아일보 보도는 시대를 증언한다.
석축 바로 옆 빨랫돌 사이 물줄기는 하천수가 아닌 땅에서 솟은 샘물이었고, 이 샘터는 주인이 있는 유료 빨래터였다.
"들여다 보구만 있으면 으떡하니? 어서 발 벗구 들어가서 똥물에도 고개 푸욱 파묻고 그저 찾아봐야지." 장난치다 빠뜨린 동전을 찾으라는 어른의 성화를 귓등으로 흘리며, "경을 치면 쳤지. 누가 저 개천 속엘 들어가?"라고 내뱉은 소년의 독백은 아낙들이 돈 내고 빨래할 수밖에 없던 까닭을 짐작하게 해준다.
1945년 청계천 부근 시장
1951년 9.28 수복 직후 청계천과 종로
1953년 청계천 광교
1954년 종로와 청계천 일대의 모습
1950년대 長通橋
1950년대 청계천
경복궁 서쪽에는 청계천의 지천 중 으뜸이었던 백운동천이 흘렀다. 조선시대까지 청개천을 開川이라고 불렀다. 개천이라는 말은 원래 '내를 파낸다.'는 의미였으나 차츰 인공이 가해진 하천을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한양의 개천은 그러한 일반 명사가 그대로 고유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1966년 서울인구는 약 380만 명이었다. 그 가운데 1/3가량이 무허가 판자촌에 살았다. 특히 청계천변과 중랑천변에 많이 몰려 살았다. 정부는 1966~68년 도시 미화와 정비라는 명목으로 청개천 복개공사를 결정하고 무허가 판자촌 일소 대책을 밀어부쳤다.
서울 전역 판자촌을 대책 없이 강제 철거했다. 무려 4만3천동이나. 그리고 철거민 50만 명(후에 35만 명으로 변경)을 수용해 정착시킬 대규모 주택단지 개발계획을 세웠다.
그 후보지로 서울 중심부에서 반경 20Km에 위치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을 선정하여 이를 ‘광주대단지’라 명명하였다. 이 지역에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를 설치했다.
광주대단지 조성계획의 경우도 발표 당시에는 집없는 빈민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었다. 1968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의 서울시내 무허가 판잣집 정리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이 사업은 "시내 18만 채의 무허가 건물 중 우선 5만 채를 헐어 옮겨 수도 근교에 새로운 위성도시로 개발을 촉진해 나가겠다"는 구상 아래 1970년까지 3년 동안에 경기도 광주군의 약 200만평의 땅에 50만 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신도시를 개발하여 이곳에 불량주택 주민 약 55,650 세대 278,000명을 이주시킬 예정이었다.
1968년 주택단지경영사업인가로 서울시 무허가건물 일소에 따른 철거민정착주택단지로 조성되었다.
1969년에는 주택단지조성작업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철거민이 이송되어 가수용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1971년 8월 10일 서울시의 전매입주자에 대한 시가일시불토지불하방침과 경기도의 가옥취득세부과조치 때문에 이것을 시정하도록 요구하고 나선 입주민들의 소요사태를 이룬 8·10사건이 발생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부동산투기 억제와 수도권 인구분산 등의 계획에 따라, 1989년 4월 27일에 성남시 남단 자연녹지일원에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분당 신도시가 개발되기 전에는 이 지역에는 4천여 가구, 1만 2200명이 살고 있었다. 1989년 11월 5일 1단계공사가 착공되고 1991년 7월 1일 분당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91년 9월 17일분당구로 승격되었으며, 9월 30일 시범단지 첫 입주가 이루어졌다.
1994년 9월 1일 분당선 전철이 개통되고, 1996년 11월 23일 8호선 전철이 개통되어 교통난이 해결되었다.
1960년대 청계천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조선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는데, 제3대 태종이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영조 때에는 준설·양안석축(兩岸石築)·유로변경 등 본격적인 개천사업을 시행하였다. 이 공사로서 내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하였다.
순조·고종 때에도 준설공사는 계속되었는데 이 개천에 놓인 다리는 수표교(水標橋)·오간수교(五間水橋)·광교(廣橋)·영미교(永尾橋)·관수교(觀水橋) 등 모두 24개가 있었다. 국권피탈 후 일제강점기 초(이때에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는 근대적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가 이루어졌다.
8·15광복 후에도 청계천의 유지관리에 힘써 왔고, 1958년 6월부터 복개공사에 착수, 1960년 4월에 1단계로 광교∼주교(舟橋) 1∼4가 간을 완공하여 너비 50m의 간선도로를 만들었다. 1967년~1976년 청계고가도로를 건설, 상류에서 성동구사근동까지 5.4km 구간은 복개되었으나 중랑천 합류 지점까지의 2.4km 구간은 복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청계천 주변의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의 안전문제가 제기되자, 1994년~1999년의 5년에 걸쳐 남산 1호 터널에서부터 청계천4가에 이르는 길이 2,030m의 상판과 다리기둥, 들보를 보수하였다. 2002년 청계천4가에서 성동구마장동 사이에 이르는 길이 3,834m의 상판을 교체하는 보수를 마쳤다.
2003년 7월부터 시작된 서울시의 청계천복원사업 구간은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성동구 신답철교로 구간으로 5.8km에 이른다. 2005년 10월 1일 2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청계천 위에 놓인 총 22개의 다리를 중심으로 정조반차도를 비롯한 역사적 자료를 복원한 도심 속 하천으로 개통하였다. 주요 다리로는 모전교·광통교·장통교·버들다리·두물다리 등이 있다.
1960년대 청계천 판자촌 단칸방 가족의 고구마 저녁식사
1965년 청계천
복개 청계천과 평화시장, 전철
1930년대 일제의 침략으로 군수 물자를 신속히 수송하기 위해 청계천 복개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1945년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면서 완성을 못한 상태로 남게 되었고 그 후 위생문제와 교통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방치되다가, 1958년이 되서야 청계천은 복개공사가 진행되었다.
1959년 청계천 하류의 호안공사를 시작하면서 1961년 1월 건축법,토지수용법,도시계획법 등이 제정·공포되었다.
1962년부터 도시기반 시설인‘하류 석축공사’과 ‘하류 축제방사업’이 왕십리, 마장동 지역에 시행되었다.
한양대학교,서울교육대학,한양여자고등학교 등 교육기관이 1958년을 전후하여 행당동에 들어선 것이 이런 사업들을 시행하게 된 가장 강력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1966년부터 청계천 주변의 판자촌 철거와 주변 상가 건축, 청계 고가도로 공사가 시작되어 당시 서울의 근대화와 고속성장의 자랑스러운 상징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70년대 청계천
1972년 청계천
1973년 청계천
1973년 청계천 판자촌 화재
1983년 청계천
1902년 완성된 한양 도성도
1911년 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
측량시기 1910년 축척 5,000:1, 크기 153cmx123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所藏)
1914년 경성부명세신지도(京城府明細新地圖)
경성부명세신지도(京城府明細新地圖)는 1914년 6월 11일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 편찬(編纂) 발행(發行)한 축척(縮尺) 10,000:1, 크기는 세로 103cm, 가로 76cm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유물정보
1917년 경성부관내도(京城府管內圖)
<경성부관내도(京城府管內圖)>는 1917(大正6年)년에 간행된 『경성부부세일반(京城府府勢一般)』에 부속된 16,000:1의 지도이다.
앞면에는 <경성부관내도>가 있고, 뒷면에는 ‘경성부부세일반’이 표로 정리되어 있다. 지도에는 관공서와 각국 영사관 및 주요 건축물들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고, 등고선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도로는 1~3등급과 등외도로로 구분하고, 등급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여 표기하였는데, 1등급도로는 의주로, 서대문-종로4가, 신용산-남대문-태평로-세종로, 남대문로, 을지로1~2가, 종로4가-창경궁로-혜화문, 을지로-남산 조선총독부 등에 표시되어 있고, 2등급도로는 을지로3가-광희문, 종로4가-동대문-동묘 등에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신용산-서울역-남대문-태평로-세종로로 이어진 간선 가로축의 완성을 말한다. 그리고 일본인의 집단거주지인 남촌에 비해 청계천 이북의 북촌에는 세종로와 종로 그리고 종로-혜화문 구간에만 등급도로가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등외도로라는 점이 당시 사회상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한편, 뒷면에는 경성부와 관련된 인구, 교육, 종교, 위생기관, 농업과 공업 등 각종 산업, 예산, 주요관공서 현황 등이 도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경성부관내도>는 1917년, 1927년, 1934년 세 번 제작되었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변화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고종(高宗, 1852 ~ 1919.1.21.)
비(妃) 명성황후, 아버지 흥선대원군,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다.
초휘(初諱) 재황(載晃). 아명(兒名) 명복(命福). 초자(初字) 명부(明夫). 자 성림(聖臨). 호 주연(珠淵).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다. 비(妃)는 명성황후로,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이다.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의 전교(傳敎)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戚臣)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京都守備)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身布徵收),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重修)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惡貨)인 당백전(當百錢)의 주조(鑄造)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勞役)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통상수교거부정책,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 10) 11월, 명성황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명성황후와 그 일족인 민승호(閔升鎬)·민겸호(閔謙鎬)·민태호(閔台鎬)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고종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 나가야 했다. 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 조정은 개화·사대당(事大黨)의 격심한 알력 속에 빠졌다. 1881년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 신식 훈련을 받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 개화·수구(守舊) 양파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景祐宮)·계동궁(桂洞宮) 등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런 중에도 한·미, 한·영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서방국가와 외교의 길을 텄지만, 18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일 간의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청·일 전쟁을 유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 김홍집(金弘集)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개국 이래의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부터 한국 지배기반을 굳힌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여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홍범 14조(洪範十四條)〉가 선포되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독립국으로 행세하는 듯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하여져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3도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3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 영유(遼東領有)를 포기, 국제적 위신이 떨어지자 민씨 일파는 친러로 기울어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을 등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맞서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刺客)들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 고종에게 강압하여 친러파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유길준(兪吉濬) 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종두(種痘)·우체사무·단발령·양력사용·도형폐지(徒刑廢止) 등은 이 해의 제4차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자 김홍집·정병하(鄭秉夏)·어윤중(魚允中) 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 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8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 ·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홍만식(洪萬植)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代行政治) 체제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승하하였다.
1906년 을사늑약 무효 고종 친서
을사늑약 무효 고종 친서
고종황제가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906년 5월 독일 빌헴 2세에게 보낸 밀서로 고종황제의 측근이던 프랑스인 정무 고문 트레믈러를 통해 1906년 5월 독일 외교부에 전달됐다. 독일 정부의 동양어 전문 자문관이던 포르케 교수가 독일어로 번역했다. 당시, 독일 외교부는 독일에 불리한 국제 정세를 이유로 밀서를 국왕 빌헬름 2세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대덕국(독일) 황제 폐하"
"짐은 대덕국의 호의와 지원을 항상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에게 파국이 닥쳐왔습니다. 이웃 강대국의 공격과 깅압성이 날로 심해져서 마침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독립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짐은 폐하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약자의 보호자로서 본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폐하의 우의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짐과 조선의 신민은 귀하의 성의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을 하늘에 두고 맹세합니다.
광무 10년(1906년)1월 경운궁에서, 폐하의 좋은 형제"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7년 순종황제 즉위 동제(純宗皇帝 卽位 銅製, 記念章)
1909년 10월 26일 9시 25분 만주(滿洲, Manchuria)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특별 열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5번)
이토는 코코후초프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린 다음, 러시아 의장대 앞을 지나 환영 나온 각국 영사들이 서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군악대의 연주 속에 이토와 코코후초프가 나란히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 만철총재, 가와카미 토시히코(川上俊彬) 하얼빈 주재총영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만철이사,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 비서관, 무로타(室田) 귀족위원 등이 뒤따랐다.
그때 하얼빈 역 플랫폼 기둥에 달린 시계침은 9시 25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이토는 그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일본거류민단 환영객 앞을 지나 다시 러시아 의장대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러시아군 의장대 뒤편에 있던 안중근은 이 순간을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로 알고, 가슴에 숨겨뒀던 브라우닝 권총을 뽑아들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안중근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준 하늘에 감사하며 회심의 첫 발을 쏘았다. 그때 안중근과 이토와 거리는 불과 열 발자국이었다.
첫 탄알이 이토의 팔을 뚫고 가슴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총소리가 주악 소리에 뒤섞여 그때까지 경비병들은 영문을 몰랐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안중근은 다시 혼신을 다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째 탄알은 이토 가슴에 명중했다. 경비병과 환영객들은 그제야 돌발 사태를 알아차리고 겁을 먹은 채, 우왕좌왕 흩어지고 도망쳤다. 총을 맞은 이토는 가슴을 움켜쥐고서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비틀거렸다. 다시 안중근은 이토의 절체절명 마지막 남은 명을 확실히 끊어주고자 침착하게 가슴을 정조준 하여 회심의 세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세 번째 탄알은 이토 복부 깊숙이 명중되었다. 제3탄이 이토를 확실하게 절명시킨 결정의 탄알이었다. 그제야 늙은 여우 이토는 꼬리를 내리고 코코후초프 쪽으로 픽 쓰러졌다.
안중근은 그 자가 혹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만일을 대비하여 그 곁을 수행하던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수행 비서관 모리, 만철 이사 다나카 세 사람에게도 총알을 한 방씩 안겼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안중근이 사용한 권총 3점 브라우닝 연발 단총과 탄환
*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이유
안중근은 하얼빈 거사 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서 일본 관동도독부 검찰관 미조부치타카오(溝淵孝雄)에게 신문을 받을 때 이토를 저격한 15개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제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제2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
제3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 강제로 체결한 죄
제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제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제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제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제8 군대를 해산 시킨 죄
제9 교육을 방해한 죄
제10 한국인들의 유학을 금지시킨 죄
제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
제12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거짓말을 퍼뜨린 죄
제13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천황을 속인 죄
제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제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 안중근 숭모회, <안중근 의사 공판기>
*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이토를 저격하다
1910년 2월 7일 오전 9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장 미나베 주조(眞鍋十藏)와 공판 문답이다.
문: 피고는 작년(1909) 10월 26일 오전 9시를 지나 러시아 동청철도 하얼빈 역에서 미리 준비한 권총을 발사하여 추밀원 의장 공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하고, 그 수행원이었던 총영사 가와카미 준히코(川上俊彬) 궁내대신비서관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의 발과 다리 가슴 등에 각각 총창을 입혔다고 하는데 사실이 그런가?
답: 그렇다. 발사는 하였지만 그 뒤의 일은 모른다. 그것은 3년 전부터 내가 국사를 위해 생각하고 있었던 일을 실행한 것이다.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토를 죽였고, 참모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으로 도대체 이 법원 공판정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되었다.
문: 피고는 이번 이토를 살해하면 그 자리에서 자살이라도 할 생각이었는가?
답: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이토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은 사원(私怨, 사사로운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오직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토를 죽여도 자살 따위의 뜻은 없었다.
문: 피고의 직접 상관은 누구인가?
답: 김두성이다.
문: 피고는 특파원으로서 하얼빈에 왔다고 말하나 그것은 김두성으로부터 지휘를 받았다는 것인가?
답 : 이번 일에 새삼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고, 이전에 연추(煙秋) 부근에서 나는 김두성으로부터 청국과 러시아령 부근의 의병사령관으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날 오후 공판에서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나는 3년 간 각처로 유세도 하고 또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각지의 싸움에도 나갔다. 이번 거사도 한국의 독립전쟁이므로 나는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을 위해 한 것으로 보통의 자객(刺客, 테러범)으로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까닭에 나는 지금 이 법정에서 신문을 받고 있으나 보통의 피고인이 아니고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우리는 일찍이 이토는 일본을 위해 공로가 있다는 것은 듣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 천황에 대해서도 역적이라는 것을 들었다. 이제부터 그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1910년 8월 22일 Newyork Times(뉴욕타임즈)
‘Korea as a Nation to end this week.’('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
미국 영국등 서구 언론들은 한일 강제조약체결 전 부터 일본의 한국병합 사실을 타전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22일자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는 큰 제목과 ‘어떤 소요도 예상되지 않는다.’ ‘철저한 경찰 통제 때문에 한국인들은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모른다.’는 소제목들이 달렸다.
뉴욕타임스는 1910년 8월 18일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JAPAN IS ABOUT TO ANNEX KOREA)'라는 제목의 도쿄발(發) 기사에서 "오래전부터 예견되던 일본의 한국 병합이 곧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의 독립은 이미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맺은 조약(을사늑약) 때 실질적으로 종식됐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이어 8월 20일자에 "한국 전역은 일본의 강력한 군사적 감시 하에 있으며, 수많은 일본 군함이 한국 해안을 순찰하고 있다."면서 "일본은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여러 정황들을 볼 때 병합은 임박했다."고 썼다.
8월 22일자에는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에 사라진다(KOREA AS A NATION TO END THIS WEEK)'라는 제목 아래 "일주일 내에 '은둔의 왕국' 대한제국(Empire of Korea)은 역사적 용어가 되고, 1200만 인구는 일본에 더해지며, 잉글랜드만 한 크기의 영토는 일본제국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후 '한국은 이제 일본'(23일), '일본, 한국병합 공포한다.'(25일) 등 연일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전했다.
영국 유력지 ‘더타임스’도 8월 25일 "일본의 한국병합이 언제든 실현되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되어 왔으며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대영제국은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서 우월한(paramount)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했었다."고 보도했다.
‘더타임스’의 관심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관한 것이었다. 8월 27일자 ‘더타임스’의 '편집자에게' 코너에 '일본과 한국'이란 글을 실은 독자는 "일본은 상업 및 산업에서 모든 나라에 동등한 기회 원칙을 약속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썼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 합병조약문(合倂條約文)
1910년 8월 29일에 발행된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한일 조약의 한국어 원문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일방적인 위력에 의해 이루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한일 합방 조약(한국 한자: 韓日合邦条約)이라고도 불린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국권피탈(한국 한자: 國權被奪), 경술국치(한국 한자: 庚戌國恥) 등으로 호칭한다.
한일 병합 조약 전문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1.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2.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함.
3.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를 응하여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함.
4.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함.
5.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줌.
6. 일본국 정부는 앞에 기록된 병합의 결과로 완전히 한국의 시정을 위임하여 해당 지역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전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7. 일본국 정부는 성의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적당한 자금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 관리에 등용함.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위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함.
융희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메이지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
1904.1. - 대한제국 국외 중립선언 / 일본 군사적 요충지 점령
1904.2. - 러일전쟁 / 한일 의정서
1904.8. - 제1차 한일협약 / 고문정치
1904.8. - 제1차 한일협약 / 을사늑약 - 외교권박탈
1907. - 헤이그특사파견
1907.7. - 한일신협약 – 차관정치 / 정미7조약
1909.7. – 기유각서 / 사법권박탈
1910.6. - 경찰권 박탈 / 경무총감부 설치
1910.8. 29. - 경술국치(庚戌國恥) / 국권강탈 / 조선총독부 설치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7월), 제2차 영·일 동맹(8월). 러·일 포츠머스 강화조약(9월)을 체결 한국에서의 독점 권리를 국제적으로 승인
한국과도 3차에 걸친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재정·외교·내정권을 모두 빼앗았다. 이후 1909년 일본 내각회의에서 한국병합이 결정되고 천황이 이를 재가하자, 1910년부터 본격적인 병합이 이루어졌다.
6월에 새로운 통감으로 부임한 육군대신 데라우치는 모든 옥내외 집회를 금지시키고 신문·잡지에 대한 검열도 강화하여 사실상 한국을 계엄 상태로 만들었다.
이 가운데 이완용은 8월 18일, 내각회의에 합병조약안을 상정해 통과시켰다. 일본군이 서울에 집결하고 한국인은 2명이상 모일 수 없었던 8월 22일 오후 2시, 어전회의에서 합병 안을 가결시킨 이완용은 발길을 통감부로 돌렸다.
그리고 오후 4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한일합병조약안에 조인함으로써 조선은 건국 519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일본은 8월 29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조칙을 장제로 내리게 했지만 친필서명이 없어 지금까지 불법과 무효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910년 순종 황제 국가양여 칙유(勅諭)
1910년 순종 황제 국가양여 칙유(勅諭)
* 칙유(勅諭): 임금이 몸소 이름. 또는 그런 말씀이나 그것을 적은 포고문
황제의 부덕함을 토로하고 백성을 공궁함에서 구하기 위해 "한국의 통치권을 예전부터 친하고 믿고 의지하고 우러르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폐하께 양여"한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일본의 숙망이던 한국 지배와 공공연한 침략은 시작되고 朝鮮王朝는 건국 이후 27대 522년으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통치권의 양여를 인정한다며 발표한 칙유(勅諭·임금의 말을 적은 포고문)에는 행정문서에 사용한 어새(칙명지보·勅命之寶)가 찍혀 있을뿐 순종의 이름인 ‘이척(李拓)’은 서명되지 않았다
勅諭
皇帝若曰 朕이 否德으로 艱大한 業을 承하야 臨御 以後로 今日에 至하도록 維新政令에 關하야 亟圖하고 備試하야 用力이 未嘗不至로되 由來로 積弱이 成痼하고 疲弊가 到處에 極하야 時日間에 挽回할 施措無望하니 中夜憂慮에 善後의 策이 茫然한지라 此를 任하야 支離益甚하면 終局에 收拾을 不得하기에 自底할진則 寧히 大任을 人에 托하야 完全한 方法과 革新한 功效를 奏케 함만 不如한 故로 朕이 於是에 瞿然히 內省하고 廓然히 自斷하야 玆에 韓國의 統治權을 從時부터 親信依仰하던 隣國 大日本 皇帝陛下께 讓與하야 外으로 東洋의 平和를 鞏固케 하고 內으로 8域의 生民을 保全케하노니 惟爾大小臣民을 國勢와 時宜를 深察하야 勿爲煩擾하고 各安其業하야 日本帝國의 文明의 新政에 服從하야 幸福을 共受하라. 朕의 今日의 此 擧는 爾有衆을 忘함이 아니라 亶히 爾有衆을 救活코자 하는 至意에서 出함이라. 爾臣民 等은 朕의 此 意를 克體하라.
隆熙 4年 8月29日 御璽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支離)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일본의 조선지배 정책
식민통치 1기 - 1910 ~ 1919년 무단통치 - 무단, 헌병경찰 통지, 토지조사 사업, 회사령
식민통치 2기 - 1919 ~ 1931년 문화통치, 경찰통치, 산미증식 계획
식민통치 3기 - 1931 ~ 1945년 민족말살통치, 황국신민화, 병참기지화(1937년 이후), 남면북양 정책, 농촌진흥 운동, 중화학 공업 정책, 국가총동원법제정(1938), 국민전신총동원, 조선연맹(1938), 지원병제(1938), 국민징용령(1939), 국민근로보국령(1941), 학도지원병정병제(1943), 강제징병제(1944), 여자 정신대 근무령(1944)
1910년 8월 30일 〈매일신보〉 4면 2단 잡보
잡보
보사명호개정(매일신보사 이름 개정) "대한의 국호를 조선으로 개칭한 이후에는 대한으로 잉칭(仍稱, 그 전대로 이름)하는 것은 사소(事所, 사무소?) 불연(不然, 그렇지 않다)함으로 본보 명호와 본사 명칭 중 '대한' 두 글자는 산거(刪去, 지워 버림) 하였노라.
대한 제국 시절에 민족 언론 가운데 하나였던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8월 29일에 공포된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이렇게 그 이름을 빼앗겼다. 그뿐만 아니라 1910년 8월 30일부터 새로 발행된 〈매일신보〉는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노릇을 하였다. 이날 발행된 신문 1면의 첫 부분이 바로 전날 발표된 조선총독부 '관보' 호외로, 대한 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한다는 순종 황제의 '조칙과 칙유' 그리고 '일본 천황 폐하 조서'이다.
1918년 1월 21일 황실가족사진(덕수궁 석조전)
1918년 1월 21일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기 위한 사진으로좌로 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순종비), 덕혜옹주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 음력 2월 8일 ~ 1926년 4월 26일)
순종(純宗)은 대한제국의 제 2대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조선 왕조의 제27대 왕으로 보기도 하나, 고종과 달리 조선왕의 신분으로 재위한 기간이 전무하였다. 연호를 따 융희제(隆熙帝 : 재위 1907년~1910년)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은 이(李), 휘는 척(坧),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정식 시호는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고종의 유일한 적자이자 장자로 명성황후 민씨 소생이며, 어려서부터 병약하였고 후사는 없었다. 그의 아호 정헌(正軒)은 부황 고종이 그에게 내려준 아호였다.[1] 그는 한국 역사상 최후의 군주이기도 했다.
1907년 7월 20일부터 1910년 8월 22일까지 재위하는 동안 1907년 7월 20일부터 1909년 7월 12일까지 친정을 하였고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사건으로 대한제국 주재 일본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게 실권이 박탈되어 1909년 7월 12일부터 1910년 5월 30일까지 소네 아라스케가 실권을 잡았으며 1910년 5월 30일부터 1910년 8월 29일 퇴위할 때까지 역시 대한제국 주재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가 실권을 잡았다.
영친왕(英親王, 1897∼1970)
이름은 은(垠), 아명은 유길(酉吉), 호는 명휘(明暉)이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이다. 1900년 영친왕(英親王)이라는 봉호(封號)를 받았으며, 1907년 이복형인 순종(純宗)이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황위에 올랐을 때 형인 의친왕(義親王)을 제치고 황태자가 되었다.
1926년 순종이 죽은 뒤에는 이왕의 지위를 계승했다.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족인 마사코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며, 일본 왕족으로 대우를 받으며 일본군 장성을 지냈다.
왕은 태어날 때 이름을 갖지 않고 왕의 적장자로 태여나면 "원자"로 부르며 관례를 행하면서(字)를 받고 세자에 책봉되면 이름을 짓는다. 왕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가 없으며 과거 시험에 잘못하여 글자라도 쓰면 낙방되고 곤장 100대의 중형을 받았다.
1919년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1919년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
파리 장서사건 혹은 유림 독립선언, 제1차 유림단사건은 1919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한 유림의 인사들이 파리 평화회의에 독립탄원서를 보내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3·1 운동 이후 유림의 인사들은 유림이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를 대신하여 파리장서에 서명을 하였다.
한국의 유림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명이 김창숙의 연락으로 독립탄원서를 작성, 김창숙이 이 탄원서를 가지고 상하이에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다수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망명하였다.
곽종석·하용제·김복한 등은 감옥에서 순국하였고, 그 밖의 사람들도 형에 못 이겨 죽고 또 처형되었다.
주요내용
장서의 주요 내용은 한국은 삼천리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하며, 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병합으로 변하게 했고, 한국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고,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가 한국인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줄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1. 한국은 삼천리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한다.
2. 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병합으로 변하게 했고, 교활한 술책으로 한국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다.
3.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가 죽음으로 투쟁하는 우리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 줄것으로 믿는다.
밀양의 영남루 인근, 정읍의 정읍사공원, 서울의 장충단공원, 거창의 침류정에 파리장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19년 애국공채
1919년 독립공채
1920년 12월 28일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취임식(상하이)
1921년 대한독립운동비 제 1차 의연금 증서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 1874. ~ 1926.4.25.) 御葬儀
1926년 4월25일(음3월14일) 오전 6시 15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피맺힌 한을 토하는 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숨을 거뒀다. 고종에게 전위 받은 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 17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다.
1907년(광무11년) 7월19일(음6월10일)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물러난다.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27일(음7월19일) 경운궁(덕수궁)에서 조선 27대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다.
그 해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1906년 2월에 이미 통감을 설치해 국정을 간섭하게 됐으니 조선은 망국의 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이른 시점이었다.
통감 설치 이후 일본인이 정부 각처의 차관으로 임명되고 행정력을 모두 장악하는 차관정치를 실시한다. 이어 일제는 1908년 경제 수탈을 위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다. 1909년 법부와 군부를 각각 폐지해 사법권과 군수통수권까지 일본에 넘어갔다.
일제가 조선에 빼앗을 것은 국권 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거센 폭풍우 몰아치는 들판에서 깜박거리는 등불이었던 조선은, 1910년 8월29일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매국노가 앞장선 한일합방 조약이 맺어지며 불이 꺼지고 만다.
대한제국 멸망 후 순종(1874~1926)은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퇴위 당하고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격하돼 창덕궁에 갇혀 한 많은 세월을 보낸다.
홍릉[洪陵]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조선 제26대 왕 고종과 고종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의 능으로서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같은 능역에 있는 고종의 아들 순종과 순종비의 유릉(裕陵)과 동일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순종(純宗)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1872년 2월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척(拓)이며 어머니는 명성황후이다. 태어난 다음해 세자에 책봉되었고, 아홉 살 때인 1882년에 여흥민가의 규수와 혼인하였다.
바로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1904)이다. 순종의 재위기간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약 3년 동안이었으며, 재위에 오르는 과정뿐 아니라 평생을 암흑 속에서 보내야 했다.
순종은 일제의 침략으로 가장 큰 정신적 피해를 입은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순종은 어머니 명성황후의 비극적인 최후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
열국 외교관의 보고에 따르면 을미사변 당일 왕태자(후일의 순종)는 일본 자객의 칼을 맞아 기절하였고, 왕후(명성황후)는 절명의 순간에도 왕태자를 외쳐 불렀다고 한다.
당시 왕태자비(후일의 순명효황후) 역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그 날 이후 왕태자는 넋이 나간 듯 때때로 건청궁(乾淸宮)을 맴돌았다. 때로는 모후(母后)가 최후를 맞았던 옥호루(玉壺樓)를 들여다보며 어마마마를 부르짖다가 혼절하곤 하였다..
사건으로 인한 충격 때문인지 순명효황후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순명효황후와 사별한 순종은 2년 뒤 새로운 황태자비를 맞이하였다.
그녀가 곧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이다. 순종은 33세, 순정효황후는 13세였다
1907년 고종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퇴위하면서 순종은 내키지 않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름만 황제였을 뿐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순종은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어 궁중에서 연금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926년 향년 54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붕어 함으로써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였다. 순종의 유언으로는 다음과 같은 유언이 전한다.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일본이 제멋대로 만들어 선포한 것이다. 나는 종사의 죄인이 되고 이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노력하고 광복하라. 광복하라.’ (순종 융희황제 유조 中. 1926년 7월 8일자 신한민보 기사)
장례일인 1926년 6월 10일에는 서울 일원의 학생들이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순종의 붕어에 대한 조선인과 학생들의 피끓는 심정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저물어 가는 대한황실에 대한 백성들의 끈끈한 의리가 만세운동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이다.
고종, 명성황후, 순종의 글씨
명성황후와 편지
1901년 한성전기회사
1910년 대 산업은행 초기 모습
1906년 설립된 농공은행(農工銀行)을 1918년 합병한 조선식산은행이다. 현재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자리
1920년 조선은행
1938년 발행 조선은행 100원권 화폐
1920년 경성운동장
1950년대 서울운동장
1955년 서울운동장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 마스게임
1967년 서울운동장
일제강점기 시대의 매체와 인쇄물
1920년 경성방직주식회사 태극성 홍보포스터
1920년 구라부 크림
1920년대 금주운동 포스터
1924년, 1931년 고무신 광고
1927년 상아(象牙)를 이용한 코성형 수술
1928년 11월 14일 동아일보
1928년 11월 16일 동아일보
1929년 10월 30일 중외일보
1929년 10월 30일 중외일보
1922년 9월20일 허영(박문서관)의 표지
1923년 『어린이』(1923.3.~1934.7.)
1925년 3월10일 이수일과 심순애(보문관)의 표지
1925년 『보통학교 조선어 사전』
1925년 『보통학교 조선어 사전』(심의린)
한국인 제작한 최초의 한글사전 사진 1925년 10월 서울출판사 이문당에서 발간된 초판본
한국 최초의 사전은 1880년 불란서 선교사들이 만든 한불자전(韓佛字典).
국어사전의 역사는 출판되지 못한 비운의 사전 '말모이(1914, 말을 모은다는 뜻)'로 시작한다. '말모이'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전 편찬에 맞서 '조선인에 의한' 조선어 사전으로 기획됐다. 편찬 작업은 최남선(崔南善)·박은식(朴殷植) 등이 설립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소속의 국어학자 주시경(周時經)·김두봉(金枓奉)·권덕규(權悳奎)·이규영(李奎榮) 등이 맡았다.
1911년부터 편찬 작업이 시작돼 원고 집필은 거의 마무리되었으나 편찬자들의 사망·망명 등으로 출판이 무산됐다. 비록 출간되지 못한 원고본이지만, 우리말을 우리말로 풀이한 사전으로는 최초로 편찬된 것이어서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현재 남아있는 원고는 240자 원고지 231장인데 범례인 '알기', 본문, 색인인 '찾기', 한자어 자획 색인인 '자획(字劃)찾기'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어를 '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비슷한 말의 경우 가장 흔히 쓰이는 말에 뜻풀이를 했고, 다의어는 그 뜻을 구분해 풀이하는 등 국어사전의 원형적 모습을 보인다.
이와 함께 이규영 등이 5만 단어의 '사전(辭典)'이라는 이름의 국어사전도 계획했었지만, 편찬이 무산됐다. 이후 그 편찬 정신을 잇는 국어사전이 몇 차례 기획된다. 그 첫 결실이 경성사범학교 교사였던 심의린(沈宜麟)이 편찬한 '보통학교 조선어사전'〈사진〉이다. 1925년 경성 이문당에서 발행한 이 사전은 표제어 6106개에 불과하지만, 우리말 단일어 사전으로는 최초로 출판됐다.
심의린의 보통학교 조선어 사전은 1925년 10월 20일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최초의 사전으로 잘못 알려진 문세영 조선어사전보다 13년 정도 앞서 발행되었다.
이 사전은 지금까지 알려진 국내의 국어사전 중에서 최초의 것이다. 한국 사람이 편찬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한 한국 최초의 한국어 학습 사전이며, 한국 사람이 편찬한 최초의 인쇄된 한국어 단일어 사전이다.
'조선어 사전'이라고 북한어 사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일본 강점기 때에 만들어진 사전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우리말을 '조선어'라고 했다.
수록어휘가 10만여 개에 이르고, 배열방식이나 주석의 내용도 세련돼 현대식 사전으로의 면모를 보인다. 또 '한글맞춤법통일안'(1933)에 의해 표기된 최초의 사전이기도 하다.
1947년 조선어학회가 첫 권을 펴낸 '큰 사전'은 총 16만4125개의 표제어를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사전이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면서 시작된 '큰 사전' 편찬 사업은 조선어학회사건(1942년)이 일어나면서 간행이 무산됐으나, 1945년 9월 8일 경성역장이 조선통운 상자에서 말모이 원고 일부를 극적으로 발견했다. 이에 따라 광복 이후 편찬 사업이 재개되면서 1957년 총 6권 3804쪽으로 완간됐다. 현재 국립국어원이 2008년 10월 9일부터 홈페이지를 통해 서비스하고 있는 '표준국어대사전' 개정판에 실린 어휘는 51만여 개다
1920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어 사전"이 있긴 하지만, 우리말 어휘를 우리말로 설명한 국어사전 1938년 발간된 문세영(文世榮)의 "조선어 사전"이다. 어휘수가 8만개에 달한다.
현대적 의미의 본격적인 국어사전은 1947년 10월에 발간된 한글학회의 "큰사전"이다. 국어사전의 완성을 의미한 기념비적인 사전은 1961년 12월 28일 초판을 발행한 "국어대사전" 을 들 수 있다.
문학박사 이희승이 민중서관의 발행인 이병준의 기획 하에 6년의 세월을 거쳐 1956년 완공, 1959년 제작, 1961년 발행된 엄청난 기간과 인력을 동원해 완성한 국어사전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1927년 9월25일 가요집
1930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1930년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일제 말 국민정신총동원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이라는 전시총동원기구가 만들어지면서 10개 가구를 단위로 애국반을 조직했다. 매월 1회 개최되는 애국반회의(반상회)를 통해 각종 시책을 전달하였으며, 그 이행 여부를 검사하고 주민들끼리 서로 감시하도록 했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6월 중순경 민간 사회교화단체 대표자들이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자발적인 총후봉사활동을 내세우며 조직한 친일단체로, 일본의 황민화(皇民化) 정책에 선도적 역할을 했던 친일 단체이다. 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기구를 개편했다.
1938년 7월 7일 민간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조선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결성한 친일 전시동원 선전 조직이다. 같은 해 6월 22일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발기인 대회를 열었으며 한일 양국의 59개 단체, 56명의 발기인이 참석했는데, 한국 측에서는 윤치호(尹致昊), 최린(崔麟), 김활란(金活蘭), 김성수, 박흥식(朴興植), 방응모(方應模) 등 27명, 25개 단체가 참여했다. 발기인 대회에서는 한상용 등 6명의 이사, 박영철 등 13명의 창립총회 준비위원을 뽑았다.
지원병 독려는 물론 창씨개명 독려, 공출과 현금 독려, 폐품 수집, 일본어 강습회 등 활동이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이 단체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실천강령을 보면, ① 황국정신 현양 ② 내선 일체 완성 ③ 비상시 국민생활 혁신 ④ 전시 경제정책 협력 ⑤ 근로 보국 ⑥ 생업 보국 ⑦ 총후 후원, 즉 군인원호 강화 ⑧ 방공(防空) 방첩 ⑨ 실천망의 조직과 지도의 철저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41년 12월 미·영 타도 대강연회(연사는 이광수·주요한·김동환 등)와 결전 부인대회(연사는 김활란·모윤숙·박순천 등)를 개최하여 황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42년 2월부터 근로보국운동의 일환으로 부녀층을 광범위하게 동원하여 군복 수리작업을 전개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1주년인 7월 7일 창립총회를 열고 선언문을 통해 “동양 평화를 확보하여 팔굉일우의 대정신을 세계에 앙양함은 제국 부동의 국시이다. 우리는 이에 일치단결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여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양하며 국책의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 궁극의 목적을 관철한다.”고 연맹의 취지를 밝혔다.
1930년 보통학교 국어독본
1931년 신동아
1931년 이봉창의 한인 애국단 선서문
1932년 브나로드 운동 당시의 벽보물
1932년 브나로드 운동 당시의 벽보물
1931년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농촌의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이는 농촌에도 소학교와 중등 학교를 세우고, 나이가 많은 고령자와 장년층을 위해 야학을 설치하여 글과 숫자를 깨우치게 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대학생들과 대학 출신 인텔리들에게 이를 호소했고, 이들의 호소에 심훈, 최용신, 곽상훈, 박순천 등의 대졸 출신 인재들이 각지의 농촌으로 가서 봉사, 계몽활동을 하게 된다. 1931년 7월 동아일보에서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1929년부터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타파운동을 전개하였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1931년 7월 학생들은 동아일보의 후원을 얻어 ‘브나로드’라는 슬로건 아래 농촌계몽에 나섰다.
이 운동은 학생계몽대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강연대·학생기자대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학생계몽대는 남녀 고교생으로 구성하여 한글과 산술을 가르쳤고, 학생강연대는 전문대학 이상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학술강연·시국강연·위생강연을 담당했으며, 학생기자대는 고교와 전문대학생으로 구성되며 여행일기·고향통신·생활수기 등을 신문에 투고하도록 하였다.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각종 계몽과 칼럼을 통해 실력 양성이 한국인들의 살 길이고, 실력 양성을 위해서라면 일단 문자와 말과 글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들 자신이 앞장섰고 심훈, 나혜석, 허정숙, 최용신, 심대영 등의 청년 지식인들이 이에 적극 동참하게 되었다. 수많은 청년 지사들의 동참으로 한국인의 언어, 문자 식자율은 1910년 10%에서 1936년 무렵에는 65%까지 상승했다.
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김성수, 송진우와 동아일보 등을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하였지만 별다른 혐의접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
‘브나로드’란 원래 러시아 말로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원래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帝政)러시아 말기에 소련의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말 구호이다.
이 구호를 내세우고 1874년 수백 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부터 이 말은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동아일보사는 뒤에 명칭만을 빌려 쓴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뒤에도 계속하여 조선에서도 계몽운동의 애칭으로 사용되었다.
1935년 연애십계(동아일보에서 만든 신가정 잡지에 실린 내용)
1930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1926년부터 1945년 9월 까지 사용한 경복궁 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
지층과 지상 4층 건물로 건물에 사용한 화강석과 대리석은 전부 한국산이었다.
높이 165척의 중앙탑옥의 돔은 원설계도에는 사각추에 가까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건물은 둥글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건축양식이 절충된 역사주의양식건축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건물의 전면과 좌우에 베란다가 설치된 것은 유럽의 건축양식이 동남아시아를 거치면서 형성된 식민지스타일이다.
조선총독부는 독일인 건축가로 조선호텔 설계자인 '게 데라란데'에 의해 설계되었으나, 그의 사망으로 전 대만 총독부 기사이던 '야촌일랑(野村一郞)'이 설계를 마무리 했다.
조선총독부는 1995년 철거되었으며 돔의 상부는 잘려서 독립기념관에 옮겨졌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발판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제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통감을 주재시켜 이른바 보호정치를 시행하다가 1910년에는 그나마 명목만의 대한제국의 국가체제를 강제로 해체하고 국권피탈을 단행하여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일제는 이로부터 대한제국의 영토를 조선이라 개칭하였으며, 국가적 통치를 시행함에 따라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이보다 강력한 통치기구를 두기 위해 칙령(勅令) 제319호로 조선총독부설치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1910년 9월 30일 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관제가 공포되어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의 기능이 가동되었으며, 초대 총독에 앞서 통감으로 있던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취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조선총독부 건물공사는 1916년 6월 25일 지진제를 시작으로 1926년 정월 초엿샛날 완공.
당초 5년 계획 이었다가 8년으로 늘어났는데 고종 승하와 3.1 운동 등으로 공사가 늦추어졌다.
1951년 중앙청(서울을 점령하고 승리를 차축하는 중국군)
1950년 10월 18일 중앙청
1950년 09월 28일 9.28 서울수복 후
1951년 중앙청
1953년 중앙청
1957년 - 1958년 중앙청
1968년 이전의 중앙청
1972년 6월 5일 중앙청
<新民議員 가두시위> 국회정상화와 비상사태선언 철회를 내걸고 국회에서 농성투쟁을 벌이던 신민당의원 80여명이 국회 앞서부터 중앙청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1899년 최초의 철도 경인선(종점 용산역)
1924년 서울역 건설
경성역(서울역) 공사 현장
1900년 경성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1905년 남대문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23년 다시 경성역으로 바뀌었고, 1925년 역사(驛舍)가 준공되었다.
1899년 9월 18일 개통한 경인선은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노선이었지만, 개통 당시에는 한강 바로 앞의 노량진에서 끊겨 사실상 서울을 연결해 주지 못하였다.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의 개통으로 한성부에 드디어 철도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서울역은 이때 남대문정거장이라는 이름으로 10평 크기의 목조 바라크 건물을 염천교 아래 논 가운데에 가설하여 문을 열었다.
당시 용산역이 더 규모가 컸으며, 남대문정거장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5년 경부선을 개통하였고, 1906년에는 경의선을 개통하는 등 교통이 개선되었으나, 그 규모는 보잘것없었다.
경성부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경성의 관문이 될 중심역을 만들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경부선·경원선·용산선이 만나는 용산역은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 데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 신역사 건설에는 부적합했다.
따라서 도심과 가까운 기존의 남대문정거장을 경성역으로 개량하기로 하여 1922년 역사 건설이 시작되게 된다. 그 뒤 1923년 1월 1일 경성역(京城驛)으로 역명을 바꾸고 본격적인 경성부의 관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도쿄 역에 이은 동양 제2의 규모로 지어진 역사는 1925년 완공되었고, 이후 만주 방면의 국제 열차를 취급하는 등 한반도의 철도 교통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25년 서울역
서울역 위층의 구내 식당
서울역 요리실
서울역 이발소
1945년 서울역
1950년 10월 1일 서울역
1950-1953년 서울역
1954년 서울역
1957년 - 1958년 서울역
1960년 서울역
1965년 서울역
1966년 1월 21일 서울역 설날 귀성객들
1966년 서울역 앞
1966년 서울역
1967년 서울역 앞
1968년 서울역
1969년 서울역
1970년 서울역과 의주로 서대문(정면 안산)
1971년 서울역(추석 귀성객)
1972년 서울역(냉차)
1972년 서울역(추석 귀성객)
추석을 맞아 귀성객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귀성 열차를 타기 위해 진을 치고 있는 모습
1972년 서울역 주변
1973년 서울역
1977년 서울역
추석을 앞두고 붐비는 서울역
1977년 완공 서울옆 앞 대우빌딩(서울 스퀘어)
1980년 서울역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과 5.18의 서막
1982년 서울역(추석 귀성객)
1984년 서울역(추석 귀성객)
1988년 서울역
1992년 8월 6일 서울역(추석 귀성표 예매)
1994년 서울역
1930년대 용산역
1899년 종로 전차
1899년 09월 18일 개통하여 1968년까지 서울 시내에서 운행
서울에서 전차가 개통된 것은 1899년 5월 17일이었는데 동양의 도시로서는 두 번째였다. 이어 1914년에는 부산, 1923년에는 평양에서도 개통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자 고종 황제는 신하들을 이끌고 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을 자주 찾았다.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드는 임금의 행차를 지켜보던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은 청량리까지 전차 선로를 놓자고 고종을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운행하는 전차가 개통되었다. 전차는 처음 등장했을 때 쇠로 된 것이 사람을 태우고 다닌다고 해서 ‘쇠당나귀’로 불렸다.
자동차가 드문드문 다닐 때 노면 전차는 서울 시민의 발이었다. 종로·을지로·세종로·태평로·남대문로·한강로 등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에는 전차 레일이 깔렸었고 돈암동·청량리·마포·영천·효자동·원효로·영등포·왕십리 등 서울의 동서남북 웬만한 동네에까지 전차가 다녔다.
뚝섬까지는 세 칸짜리 기동차가 운행했다. 자동차나 행인이 지나가면 운전사는 페달을 밟아 ‘땡땡땡’ 하는 종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마치 ‘냉냉냉’처럼 들려 서울 전차에는 ‘냉냉이 전차’라는 별명이 붙었다.
전차는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에게 꼭 필요한 통학·통근 수단이었다. 창경원에 나들이 인파가 몰리는 봄철이 되면 돈암동 노선은 초만원이 되었다.
시골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전차는 반드시 타보는 관광 상품이었다. 이 노선, 저 노선을 타고 다니며 시내 구경을 했다.
광복 후에도 전차는 대중교통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전차는 신속성에 한계가 있었다. 시속이 7㎞밖에 안 될 정도로 느렸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자동차가 급격히 늘면서 자동차 통행에도 방해가 되었고 충돌 사고도 속출했다. 전차는 결국 퇴출의 운명을 맞았다. 전차는 1968년 11월 29일 밤 완전히 멈춰 섰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이즈음 발표된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은 운행이 중단된 전차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을 담고 있다. 현재 퇴역한 전차 중에 3대가 서울역사박물관과 국립서울과학관, 부산 동아대 부민캠퍼스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1900년 전차표 매점
1900년대 지방 국도를 지나가는 가마행렬
조선 한성부는 우리나라 첫 도로규칙인 도로보호법을 1896년 공포했다. 이어서 가장 부담이 되는 도로보수의 책임과 한계 그리고 가가(假家)보상법을 만들었다.
1904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륙정복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1906년 치도국을 신설하고, 전국 주요 도로개발 7개년 사업에 들어갔다. 이때 만든 도로 4곳은 개화 도로 형태를 갖춘 첫 신작로였다
첫 도로정비규칙인 치도법 공포
한성부윤(서울시장)이었던 박영효는 김옥균의 주장에 동조해 1883년 한성부(漢城府)에 치도부서를 설치하고 도로 개수비로 해마다 5만 원씩 지출하기로 했다. 김옥균은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이며 개화파 대변지인 한성순보에 치도약론(治道略論)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치도를 잘하면 농산물을 운반하기 편리해 인력을 절감할 수 있고 그 잔여 인력을 공장과 기술 산업에 취업시키면 국민에게 복을 가져온다.”
그는 이 글에서 우리나라를 다녀간 서양인들의 말을 인용해 ‘조선은 산천이 미려하고 백성들은 강직하며 대범하나 사람과 가축의 분뇨가 길에 산적해 있다고 하니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길을 넓히고 청결하게 하고 분뇨는 농사에 사용하면 농업과 위생이 동시에 해결될 것’이라 했다.
서양문물과 서양인들이 들어와 문명이 개화되면서 공로교통이 발달되어야 백성의 생활이 편해질 뿐 아니라 경제가 부흥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전국의 길을 다 고치고 넓혀 나가려 했으나 당장 그럴 만한 능력과 돈이 없어 우선 한성부터 먼저 치도사업을 벌였다.
그는 ‘치도(治道)하는 것이 부국이 근본이요, 상민과 농민에게 유조(有助)하고, 전국의 남녀노소가 모두 이 효험을 볼 터인즉 나라가 진실로 개혁해 개화한 나라가 되려면 치도부터 행하는 것이 옳은 이치’라며 독립신문에서도 치도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렇게 김옥균의 치도론뿐 아니라 독립신문에서도 적극적이라 한성부는 ‘도로를 편하게 신칙하는 조목’이라는 도로보호법을 1896년 공포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첫 도로규칙인 셈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 동·리의 거리와 구덩이는 각각 해당 집주인이 문 앞과 담 뒷길을 수축한다.
둘째, 도로의 편함을 위해 개국 504년 4월 이후로 길을 범하여 집을 짓는 것과 길에 물건을 파는 좌판과 땔나무 등을 늘어놓는 것을 금한다.
셋째, 사람들이 내왕하는 도로 밖의 남는 땅에는 집 짓는 것을 허용한다.
넷째, 길 위에 줄이나 새끼를 칠 수 없다.
다섯째, 남녀노소 모두 도로에서 대소변을 금한다.
여섯째, 도로변 가옥들은 창 밖으로 대소변이나 오물, 구정물을 버리지 못한다.
일곱째, 깨어진 그릇은 땅속에 묻어 길에 버릴 수 없다.
여덟째, 죽은 짐승은 공한지에 묻고 길에 버릴 수 없다.
아홉째, 도로변에 돈사 축조와 도야지 사육을 금한다.
열째, 백성들은 자기 집을 보수하기 위해 도로에 흙을 파서 구덩이 만드는 것을 금한다.
열한째, 패목과 패물, 종이와 천 조각 등을 소각해 도로에 방치함을 일체 금한다.
치도법에 이어 한성 내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법도 내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토현(광화문)에서 홍인문(동대문)과 대광통교(광교)에서 숭례문(남대문)까지는 이 나라의 대도(大道)이거늘 가옥이 도로와 하천을 침범하는 것을 필히 금지할 것이다. 두 도로의 폭이 50척 또는 70척 되는 곳이 허다하니 그 폭을 55척으로 규정하고…….”
이와 같은 도로 폭 규정은 한성 안에 무질서하게 늘어서 도로를 침범하는 가게 등 무허가 가옥들을 규제하려는 조치였다. 하지만 본질은 임금이 계신 수도 서울의 도로부터 정비하고 보수 확장하려는 본격적인 치도사업의 시작이었다.
이어서 지방도로에 관한 법도 공포되었다. 그 예로 경북관찰사(도지사)였던 박중양은 도로보존 규칙을 다음과 같이 공포했다.
“도로의 유지보존은 도로변의 각 면·동·리에서 부담하며 항상 노면을 평탄하게 유지하고 물이 잘 빠지도록 관리할 것이며 파괴된 곳이나 돌이 튀어 나와서는 안 된다.”
이런 새로운 도로 규칙을 만들었으나 법에 무딘 서울 백성들의 옛날 습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순검들이 단속에 나섰지만 도로상황은 여전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가장 부담이 되는 도로보수의 책임과 한계 그리고 임시 가옥인 ‘가가(假家)’를 보상하는 법을 만들었다.
큰 도로는 정부가, 동·리 길은 집주인이 보수하며, 1896년 4월 이후 새로 세운 가가는 보상하지 않으며, 도로 폭 55척 이상의 길옆에는 가가를 허용하되 허가기간은 10년이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러한 치도정책에 따라 서울의 길은 차츰 개화의 옷을 입기 시작했지만 치도 때문에 나오는 쓰레기더미가 골치 아픈 문제로 등장했다. 도로에 쓰레기를 못 버리게 하니 청계천이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이에 따라 경무청 순검들은 사대문을 지키고 있다가 문 안으로 들어오는 우마차를 잡아 의무적으로 청계천 쓰레기를 실어 내가도록 하고 한 번에 수고비로 돈 2전5푼씩을 한동안 지불했다.
이때부터 내부(내무부) 토목국에서는 남대문-용산, 신문(광화문)-삼개(마포), 염천교-삼개 등 3개의 신작로를 장안 길처럼 넓게 뚫어 나갔다. 도로보호규칙이 공포된 1896년 4월부터 장안의 도로들이 정비되어가자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도로교통법이 처음으로 공포되었다.
4월에 공포한 ‘도로를 편하게 신칙하는 조목’을 다시 보완해 공포했는데, 새로운 법이 두 가지 더해졌다. ‘말을 탄 사람은 도심도로에서 빨리 달리는 것을 금하며, 도로에서 보행하는 자와 타고 가는 자가 왕래하다가 서로 만나면 각기 오른쪽으로 피해 가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우리나라 첫 도로교통법인 우측통행규칙이었다.
1910년대 어떤 풍경(서울)
1915년 여학교 교복변천사
사진 교복 경기, <사진으로 보는 경기여고 90년: 1908-1998>
최초의 교복은 이화학당에서 붉은 목면으로 만든 치마저고리이다. 치마저고리를 각각 다른 색으로 입는 것이 전통이었던 당시에 상하 같은 붉은 색의 한복을 입은 여학생들은 ‘홍둥이’로 불리며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1907년에는 최초로 양장 교복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숙명여학교 교복으로 자주색 서지(serge) 옷감의 원피스에 분홍색 안을 댄 보닛(bonnet) 모자와 구두를 곁들인 유럽식 스타일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서양 선교사의 영향 하에 여학교를 중심으로 한복이 개량되었다. ‘어깨허리’가 만들어졌고, 저고리가 길어지는 대신 치마는 짧아졌다. 짧은 통치마는 한성고등여학교(옛 경기여고)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흰 저고리에 주름을 넓게 잡은 검정 통치마를 교복으로 정했다.
다양한 색상의 저고리와 치마 그리고 쓰개치마로 구성되었던 초기의 여학교 교복은, 차츰 흰 저고리와 검은색 또는 감청색 같은 진한 색 치마로 정착되어 갔다. 또한 겨울에는 방한용으로 검정색 두루마기를 많이 입었다.
1920년대부터 대부분 여학생의 복장이 백상흑하(白上黑下)로 통일되면서, 각 학교에서는 학교 특유의 개성과 표지를 교복에서 드러내었다.
치마 끝단에 흰 줄을 물결무늬로 꼬불꼬불하게 넣거나(동덕) 송도직 천을 사용하는(숭의) 등 형태·색상·옷감으로 변화를 모색했고, 치마 주름의 폭을 넓게 또는 좁게 하는 것으로 학교의 특징을 표시하기도 했다.
저고리의 등 길이가 길어지고 화장은 짧아지면서, 나중에는 저고리가 허리에 이를 만큼 길어졌다.
반면 통치마의 길이가 짧아져 발목 부분이 노출되자 여학교마다 통치마의 길이에 대해 신경을 쓰면서 대체로 무릎에서 발목길이의 1/3로 치마 길이를 규정하였지만, 치마 길이는 점점 짧아져 갔다.
아울러 여성체육의 발전으로 여러 종류의 스포츠 웨어가 소개되면서 여학교 운동복이 고안되었다. 당시의 운동복으로 정구복, 야구복, 기계체조복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 셔츠 상의에 ‘블루머’라고 하는 짧은 바지로 이루어졌다.
1930년대에는 양장교복이 다시 등장하고 확대 보급된다. 이는 개화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일제가 한복이었던 여학교 교복을 양장으로 바꾸도록 강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여학교가 양장교복을 채택했으며, 이때의 교복은 대체로 블라우스, 스웨터, 주름치마, 세일러복, 타이, 모자 등이었다.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 일제가 전시에 활동이 편리하고 간편하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여성에게 일본 여성의 노동복인 ‘왜바지(몸뻬)’를 입게 함에 따라 일부 여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왜바지를 교복으로 착용하게 하는 한편, 바지 교복을 제정하여 왜바지 착용을 피하기도 했다.
1930년 국창(國唱) 송만갑(宋萬甲)
송만갑(宋萬甲, 1865 ~ 1939.1.1.)은 조선 말, 일제 강점기의 명창이다. 전남 구례읍 봉북리 출신. 동편제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여기에 서편제를 가미하여 새로운 소리제를 창조하였다.
송만갑은 조선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최고의 판소리 명창 이다. 조선 후기의 판소리 가왕 송흥록의 후예로 송광록 송우룡 등 동편제 소리를 부르던 가문에서 태어나 소리 광대가 되었다.
송만갑은 종조부 송흥록이 '네가 크면 반드시 내 뜻을 받들어 후세에 전하라,'라는 당부를 거듭했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십대 이전에 명창 박만순과 아버지 송우룡에게 소리를 배워 일찍이 '소년명창'으로 명성을 얻었다.
십대 후반에는 지역의 민속축제인 '대사습놀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리꾼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20대에 들어서는 전국을 주유하며 소리를 불렀다.
1902년 37세가 되던 해에 상경하여 궁정에서 소리하는 어전 광대의 영예를 누렸으며, 20세기 초반에 새롭게 전개된 극장에서의 판소리 공연과 음반취입, 라디오 방송을 통해 당대 최고의 판소리 예술을 청중들에게 전해주었다.
1933년에는 이들과 함께 남도음악인들을 규합하여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하여 창극과 판소리 공연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은 교육부장을 맡아 수많은 제자를 양성해, '가장 많은 제자를 둔 명창'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1930년대 후반기부터는 이동백과 함께 창극 '춘향전', '흥보전', '심청전', '숙영낭자전', '어촌야화' 등의 지휘를 맡는 한편, 대 원로임에도 불구하고 창극의 단역을 맡아 동참하는 등, 창극의 발전에 열정을 다 바쳤다.
한편, 송만갑의 자서전에 의하면, 고종으로부터 명예직이 아닌 실직 감찰직을 제수 받아 함경도에서 근무한 적도 있고, 갑신정변의 주역인 충정공 민영환을 따라 중국 상해와 북경, 미국 등지를 다닌 적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궁정에 초청되어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한 명창들에게 명예직이 부여된 예는 적지 않지만 송만갑처럼 실직을 수행한 예는 극히 드물며, 더욱이 민영환과 함께 중국과 미국을 여행한 것은 여느 명창과 다른 특별한 삶의 궤적이어서 눈길을 끈다.
송만갑은 보통 말할 때는 쉰 목소리가 나오지만 일단 소리를 시작하면 고음의 매력적인 철성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또 동편제 소리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송만갑 소리의 기본은 세성을 쓰지 않은 통성의 소리였다.
송만갑이 소리를 하면 '칼빈총을 쏘는 것처럼 대단했다.'는 회고는 송만갑의 성량과 통성을 주로 하는 발성의 특징을 대변해 준다. 뿐만 아니라 송만갑이 잘 불렀다는 적벽가 중 '새타령'이나 춘향가 중 '십장가' 대목에서 새 소리를 묘사하거나, 춘향이 매를 맞으며 부르짖는 표현을 할 때는 마치 하모닉스를 내는 것 같은 신비로운 소리를 내는 등, 오직 송만갑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고유의 소리세계를 지녔던 것이다.
송만갑은 1913년부터 193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유성기 음반 87면에 여러 가지 판소리를 녹음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약 4시간 30분에 해당하는 유성기 음반 속의 소리 분량과 소리의 내용은 그가 당대 최고의 명창이었음을 실증해 준다.
50대부터 작고하기 몇 년 전인 70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노년기의 소리가 담긴 유성기 음반에는 그가 즐겨 부른 단가 진국명산과 남도민요 농부가를 비롯해 춘향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등 판소리 다섯마당이 망라되어 있는데, 이미 노년에 이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음반에 담긴 소리들은 연륜을 더할수록 더욱 완성도 높은 예술세계를 들려주어 지칠 줄 모르는 예술혼을 느끼게 해 준다.
뿐 만 아니라 송만갑은 1939년 1월 1일 작고하기 직전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무대에 섰으며,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등, 생애의 끝 날까지 판소리 명창의 예술혼을 불살랐다. 송만갑 사후, 김정문, 박봉래 등의 동편제 소리 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이 20세기 판소리 역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1930년 가수
왼쪽부터 이애리수, 김복희, 강석연
1934년 외솔 최현배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교수 시절 문과대 학생들과 함께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현충사)
1930년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어수업
1940년 일본 후지코시사 노무자 신분증
1920년대 말 승합택시
승합택시 - 손님을 기다리는 정원 20명 정도의 미니버스,
한국 최초로 택시영업이 시작된 것은 1912년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합자해 포드 T형 자동차 2대를 들여와서 시간당 5원의 요금을 받고 임대영업을 시작한 것.
1930년대 택시요금은 80전이었는데, 당시 전차·버스 요금이 5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택시를 보통 사람이 이용하기란 가히 `하늘의 별따기`이었다.
1928년 부영버스
전차만 있던 서울 거리에 시내버스가 합류한 것은 1928년. 이를 본 사람들은 집채만 한 크기에 놀랐고 차안에는 어여쁜 여차장이 손님을 반겼다. 대형 시내버스는 해방 전까지 전차와 함께 서울시민의 발이 됐다.
‘여기는 종로거리올시다∼.’
‘내리실 분은 앞으로 나오세요∼.’
‘여기는 종로거리올시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버스차장이다.
1928년 4월 22일 드디어 서울 거리에도 시내버스가 등장했다. 앞으로 서울시민의 발이 될 부영버스 1차분 10대가 일본에서 도착한 것. 그때까지 덩치가 작은 승용차만 보아왔던 서울시민은 대형버스를 보자 집채만 한 크기에 놀랐다. 게다가 버스 안에는 아름다운 처녀 안내양까지 있어 갖가지 화제를 뿌렸다. 당시 조선일보는 ‘도색의 부영버스’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22일부터 개업하여 1구간 7전으로 매 10분에 1대씩 운행하고 묘령의 여차장도 이채롭다. 서울 장안에는 전차가 사통오달하여 있고 인력거나 택시 등의 교통기관이 어느 정도 갖춰졌으나 아직 전차가 아니 놓인 골목이 많고, 또 인력거나 택시를 타면 돈이 많이 들어 시민의 불편이 크던 중 얼마 전에 경성부청에서 부영으로 싼 요금을 받으면서 시내 버스영업을 하기로 준비하여 오던 것을 실현하게 되었다.
일본에 주문하였던 버스 10대가 도착하였고 차장으로 쓸 여자인 ‘버스걸’과 운전사의 채용도 전부 완료하였으므로 봄날의 꽃 빛이 아주 무르녹는 오는 22일 아침부터 영업을 개시하기로 되어 우선 20일에는 시내 유지 2백 명을 초대하여 시승 겸 개업의 자축연을 장충단에서 거행할 터이다.
이리하여 금춘부터 묘령의 버스걸과 남색 버스가 장안에서 이채를 띄우려 하는데 부영버스의 운행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동차 운전 대수는 제1기분으로 10대요. 1대의 승차 정원은 좌석 14명 외에 가죽 손잡이에 매달리어 타는 인원이 8명으로 계 22명이요. 1구간 요금은 7전이며 발차 시각은 10분에 1대씩이다.
운행노선과 구간의 정류장 이름은 제1노선이 경성역~총독부(구 중앙청)~본정4정목(충무로4가)~경성역이요. 제2노선은 경성역~명치정(명동)~황금정4정목(을지로4가)~창경원 앞이요. 제3노선은 경성역~황금정3정목(을지로3가)~경성운동장~장충단이라 한다.’
그 무렵 서울 시내버스 여차장의 나이는 열여섯 살에서 스무 살 사이가 가장 많았었고 이들이 입었던 옷차림은 꼭 구세군이 입는 유니폼 비슷한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이 옷차림이 여간 멋진 게 아니었다.
여기다 또 혀끝이 살짝 돌아가는 듯 한 억양으로 ‘여기는 종로거리올시다∼.’‘내리실 분은 앞으로 나오세요∼.’라고 외치는 모습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서울 시내버스를 한 번 타고난 다음에는 밤잠을 못자는 총각들이 많았다.1930년대 이 무렵만 해도 우리 서울의 버스 여차장은 불과 마흔 여덟 명뿐이었다. 그리고 이들 여차장은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옛날 ‘구 한국 군대’의 ‘훈련원’이 있던 자리. 다시 말해서 지금의 을지로 6가 쪽 국립의료원 일대에 버스 차고지와 함께 여차장 숙소도 있었고 그 곳이 바로 ‘부영버스 차고지’였다.
초창기 버스 여차장들은 하루 아홉 시간 근무에 하루 40전, 한 달이면 12원의 월급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여차장들의 씀씀이가 무척 헤프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버스 여차장들은 늘 현금을 취급하다 보니까 ‘은근 슬쩍’하는 그런 게 있었나 보다. 그래서 한 달 월급은 12원이지만 평균 40원 정도의 수입이 보장된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고, 그래서 그 시절 우리서울의 버스여차장이 더 인기가 있었다.
1928년 서울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내버스와 여차장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당시 신문들은 이렇게 대변했다.
더위와 싸우는 여성 붉은 넥타이를 휘날리며 오라이, 스톱을 경쾌한 목소리로 연방 부르는 거리의 꽃. 혹은 야심으로, 혹은 장난으로, 혹은 진심으로 이 꽃 냄새를 맡으려고 버스를 타는 뭇 남성들이 많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꽃다운 그들도 생활전선의 용사이다.
좁은 버스 안에 많은 승객들의 눈이 자기 한 몸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며 빙글빙글 웃는 낯짝 두꺼운 사나이들, 그녀는 양말에 난 펑크를 생각하고 얼굴을 붉히며 눈 둘 곳을 몰라 하는 모양이 애처롭다. 더운 여름 버스를 온종일 타고 다니니까 퍽도 시원스럽게 보일지 알 수 없으나, 말을 들으니 그렇지도 않더라.
“승객이 많이 타면 차내가 후끈후끈하고 콩나물 대가리처럼 들어선 사람들 사이를 이 사람 저 사람 비비고 들어가 ‘표를 찍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애원합니다.
짓궂은 남자들은 조금 비켜 달라고 하면 못 들은척하고 나에게 모욕을 줍니다. 처음에는 정말 속이 상해서 싸움할 듯이 분하였습니다마는 지금은 중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황금의 노예입니다.
이 생활이 호강스러워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빈곤 때문입니다. 옷을 입고 밥을 먹기 위함입니다. 집에는 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과 어머니와 세 식구가 나의 수입으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과년한 색시가 무슨 일 때문에 버스걸로?’ 하고 비웃지만 우리 집에서 내가 벌지 못하면 동생의 학교는 물론 내일의 우리 생활이 매우 불안한 형편입니다.”
이러한 버스걸의 사연을 알 것 같으면 누구라도 그들을 무심히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들은 용감하게 생활과 싸우며 유혹과 싸우는 거리의 꽃이다.
부영버스와 함께 서울거리에 나타난 여차장들이 다리가 반쯤 드러나는 신식 양장 유니폼을 입고 앞에는 표 가방을 둘러맨 채 표를 찍어주며 낭랑한 목소리로 ‘오라이’, ‘스톱’하는 미소 띤 자태에 젊은 총각들의 마음을 단번에 들뜨게 하여 안내양의 인기는 금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차장에 반한 할일 없는 건달이나 부잣집 도령들은 점찍은 차장 아가씨를 유혹하기 위해 그 아가씨가 타고 다니는 버스를 온종일 타고 따라다니며 치근덕거리기 일쑤였다. 이렇게 여차장들은 고루했던 이 땅에 자유연애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 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사각모를 비스듬히 쓰고 다니던 제대생들은 서울 장안 양가 규수들의 흠모의 대상이라 딸 가진 부모라면 사위로 삼고 싶어 했던 최고 지성파 청년들이었다. 이들이 버스를 타고 아무리 놀려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은근한 눈길을 주던 여차장들도 많았다. 특히 경성제대 의대생들은 짓궂기로 이름나 차장 아가씨들을 울리기도 잘했거니와 웃기는 데도 도사들이었다.
1930년대 초 서울 장안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차장 한 모 양은 우리나라 영화 개척의 선봉장이었던 윤백남 감독에게 스카우트되어 여배우로 출세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차요금이 버스보다 쌌기 때문에 차츰 전차 쪽으로 승객을 빼앗겨 적자가 누적되자 더는 시내버스를 운영할 수 없게 된 경성부청은 개업 5년 만에 결국 경성전기회사로 운영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당시 시내버스는 구간 당 7전인 데 비해 전차요금은 구간 없이 3전이었다.
1933년 4월 운행버스 54대를 넘겨받은 경성전기는 인수한 부영버스의 색깔을 바꾸어 은색 바탕에 청색 띠를 두르고 경전마크를 단 뒤 경전버스로 이름을 바꾸고 30년대 중반에 와서 요금을 5전으로 내려 받다가 해방과 더불어 사라졌다.
1929년 대구 부영버스와 최초로 등장한 시내버스 안내양
승객으로 부터 요금을 받고 승하차를 돕기 위해 경성부청에서는 10대 후반의 고등학교 졸업한 처녀들을 모집하여 교육한 후 고용했다.
1927년까지 서울, 부산, 평양 같은 대도시에 대형 시내버스가 없었다. 7, 8명 정도 탈 수 있는 승합자동차와 택시가 버스 역할을 했으나 이것도 전화나 인편으로 불러서 타는 지금의 콜택시 아니면 전세 택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1928년 초 경성부청(서울시청)에서 서울장안의 시민교통을 돕기 위해 20인승 대형버스 10대를 일본에서 들여와 서울시내 중요간선도로에 투입하여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시내버스가 처음 등장했다.
부영버스는 손님을 끌기 위해 차표를 끊어 주는 예쁘장한 아가씨 차장들을 버스에 태워 장안의 큰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진취적이고 신식교육을 받았다는 여차장들은 양장 유니폼을 입고 앞에는 차표가방을 맨 채 표를 끊어주며 살짝 웃는 미소 때문에 총각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어 여차장들의 인기는 금세 하늘로 치솟았다.
할일 없는 건달이나 부잣집 도련님들은 점찍은 여차장들을 유혹하느라고 그 아가씨가 탄 버스를 하루 종일 타고 다니며 치근덕거리던 풍속도를 연출했었다.
1920년대 말 서울장안에서 여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차장 H양은 결국 영화계에 스카우트되어 일류 여배우가 되었다.
1931년 (舊)학무아문
(舊)학무아문 (學務衙門) 分室 建物
조선 말 국내의 교육과 행정업무를 관장하던 學務衙門 分室 建物의 전경.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개혁안에 따라, 의정부 아래에 둔 8아문 가운데 하나이다. 기존의 예조 업무 일부와 관상감(觀象監)·육영공원(育英公院)·사역원(司譯院)의 업무, 그리고 교육과 학무행정을 관리하였다.
직제는 학무대신(學務大臣) 밑에 협판(協辦)을 두고, 그 아래에 총무국·성균관상교서원사무국(成均館庠校書院事務局)·전문학무국(專門學務局)·보통학무국(普通學務局)·편집국 회계국(會計局) 등 6국을 두었다.
전문학무국은 중학교·대학교·기예학교·외국어학교·전문학교·사범학교에 관한 사무를 맡고, 보통학무국은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관장하였다.
1895년에 명칭을 학부(學部)로 개칭하고 조직편제도 대신관방(大臣官房: 비서과·문서과·회계과), 학무국(2등국: 소학교 및 학령아동취학, 사범학교·외국어학교·전문학교·기예학교·외국유학생에 관한 사항), 편집국(3등국: 교과용 도서번역, 편집, 검정, 도서구입·보존·관리 및 인쇄에 관한 사항) 등으로 통폐합되었다.
기존의 성균관 등 유교 관련업무와 관상감의 사무는 별도의 관제에 따라 학부대신 감독하의 기구로 독립하였다.
관원은 각 국마다 국장으로 참의(參議) 1명씩과 주사(主事) 2∼4명씩 모두 18명이 있었다.
1931년 서울 시내에 처음 등장한 유람버스와 안내양들
1931년 서울 시내에 처음 등장한 유람버스와 예쁜 안내양들
관광버스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31年 서울이었다. 경성유람합승자동차회사가 韓日합자로 설립되어 16人승 버스 4대로 지금의 소공동 조선호텔 건너편에 본사를 두고 시내 영업을 시작했다.
관광버스가 나타나자 장안의 명물로 인기를 끌었는데 장안에서 제일 예쁘다는 안내양들을 태워 가는 곳마다 낭랑한 목소리로 설명하고 안내를 해주는 멋에 장안의 한량들을 바람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떤 부잣집 도련님은 아예 관광은 뒷전으로 미루고 안내양을 감상하려고 버스 한구석자리를 전세 내어 하루 종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어쩌다 촌 老人네들이 유람버스를 탔다가 다리를 반이나 내놓은 채 해괴한 신식 옷을 입고 남자들 앞에서 부끄럼 없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지껄이는 안내양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다 못해 世上 말세라며 눈살을 찌푸리던 “男女 7세 부동석”의 고루한 이성관이 뿌리 깊은 시절의 관광버스였다.
시내 유람 버스는 아침 8시와 오후 1시에 본사를 출발, 서울의 명승고적을 두루 돌았다. 차에서 내려 구경하는 곳이 13곳, 차에 탄 채 구경하는 곳이 20여 곳이었으며 한 바퀴 도는 데 5시간 정도가 걸렸다.
남산, 장충단, 창경원, 파고다공원, 한강은 내려서 설명해 주었고 조선은행,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경성운동장, 경성제대, 대학병원, 보신각, 창덕궁, 경복궁, 조선호텔 등은 차에서 설명해 주었다.
요금은 어른 2원 20전, 어린이 1원 50전이었으며 10명 이상 단체손님의 경우 10%를 할인해주었다. 당시 쌀 한 가마에 35원 하였으니 유람버스 한 번 타자면 쌀 한말은 내다 팔아야 했다.
벚꽃이 만발한 화창한 봄날이나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가을철 일요일에는 아침부터 유람객들이 버스회사 앞에 장사진을 이루어 다른 회사 버스를 빌려 증차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낭랑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안내하는 아리따운 여자 안내양들은 장안의 한량들을 사로잡아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1920년대 양정고보 당시 손기정(뒷줄 오른편 첫번째)
1933년 3회 경영마라톤 대회 (역주하는 손기정, 우승)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孫基禎, 1912 ~ 2002.11.15.), 남승룡(南昇龍, 1912.11.23. ~ 2001.2.20.)
손기정선수는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고 있어 경기 후 일본으로부터 마라톤 금지조치를 당했다.당시 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고 악수를 한 사람이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였다.
우승자 접견 시 히틀러가 어디서 왔냐고 묻자 손기정은 코리아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히틀러가 "우승을 축하하네. 젊은이 그대 조국의 영광을 위해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해 주기 바라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야만 했고 누구보다 감격스런 그 자리에 그들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마치 죄를 지은 죄인마냥 고개를 떨어뜨리며 그냥 그렇게 서 있어야 했다.
당시 올림픽 공식기록영화 제작자인 베르타 리펜슈탈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진짜 묘한 느낌이었다. 그토록 영광스러운 순간에 승자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이을 수 있는지……"
손기정 선수는 우승을 해서 받은 월계수로 치욕스런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지만 '남승룡'선수는 그럴 수도 없었다. 치욕스런 일장기를 가리기 위해 바지를 올리고 또 올렸지만 일장기는 가리지 못했다.
그들에 얼굴에는 메달에 기쁨은 없었고 미안함과 슬픔이 가득했다.나라를 잃어 내 조국에 국기를 달지 못하고 뛰어야 했던 그들은 그렇게 아픔을 숨기며 일장기를 가리려 애썼다. "남승룡은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것보다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부러웠다고 했다."
식민지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예속된 삶을 의미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동메달리스트 남승룡은 은메달을 딴 영국의 하퍼처럼 승리를 만끽할 수 없었다.
시상대에 올라 주최국 독일의 히틀러 총통이 월계관을 씌워줄 때에도,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시상대를 내려올 때도 손기정과 남승룡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일본의 국가대표로서 세계챔피언이 되었던 이들이다. 당시 일본 방송은 이들의 승리를 ‘조국 일본’의 영광으로 돌렸다.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에 대한 총독부의 제재조치는 식민지시대 조국의 의미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일제는 한국을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다. 일본의 법률과 제도를 한국에 형식적으로 도입하면서 한국인을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 만드는 교육을 실시했다. 서울 도심에는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모던 보이’ ‘모던 걸’ 같은 새로운 인간 군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1936년 손기정과 미국의 참나무(pin oak)
손기정이 나치 독일로부터 받은 미국의 참나무(pin oak) 묘목(좌)은 그의 모교 양정고보에 식재됐고, 학교가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손기정 기념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손기정 선수는 모교인 양정고보에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었던 나치 독일로부터 받은 월계관 기념수를 심었다. 손기정기념재단 이준승 사무총장은 "시상식 당시 히틀러가 손기정 선수에게 직접 메달과 월계수 묘목을 수여하지는 않았지만, 히틀러가 손기정 선수를 불러 악수를 했다."라고 전한다.
원래 그리스에서는 지중해 부근에서 자라는 월계수의 잎이 달린 가지로 월계관을 만들었으나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북미 원산인 참나무의 잎이 달린 가지를 대신 사용했다.
독일인은 참나무를 신성시하며 독일서 발행하는 유로화 동전 1, 2, 5센트 뒷면에 독일산 참나무(robur) 잎을 새겨 넣을 정도로 게르만 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히틀러가 올림픽을 통해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독일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 독일산 참나무 잎으로 월계관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손기정에게 수여한 참나무는 역설적이게도 훗날 독일의 적국인 미국의 참나무(pin oak)다. 이준승 사무총장에 따르면 "당시 독일이 여러 국가로부터 참나무 수입을 하던 터라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한다. 이 묘목이 크고 보니 미국산 참나무였다는 것이 확인됐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화다.
어쨌든 손기정이 받아 온 월계수는 그리스의 월계수가 아니며, 그것을 수여한 주체가 나치 독일이었을지라도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받아 안은 영광의 금메달과 월계관은 식민지 백성인 조선인들에게는 더 없는 희망이었으리라 상상해본다.
현재 양정중·고등학교는 1991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했고, 월계수가 심어진 옛 교정은 현재 손기정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서울 중구 소재).
1936년 손기정과 최승희
손기정 선수 마라톤 우승 환영회에서
1932년 임자 없는 나룻배의 나운규와 김연실
1939년 조선악극단 일본 순회공연
도쿄 왕궁 앞 기념 촬영(홍청자, 왕숙낭, 박향림, 이난영, 한 사람 건너 김능자, 장세정, 이화자)
1920년대 의열단(義烈團)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11월 7일 만주 길림성에서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운동단체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이다.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겸,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규, 서상락, 권준 등 13명이었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 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폭력항쟁으로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으므로 광복을 위해 폭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아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이때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군 수뇌·대만 총독·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神)이다. 말하자면 의열단에서는 폭력투쟁으로 일본의 지배, 착취, 친일파들의 일본과의 결탁에 맞선 것이다.
의열단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1931년 3월 의열단장 김원봉과 의열단원 박차정의 결혼사진(국립여성사전시관 제공)
1898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한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국내 일제 수탈 기관 파괴와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했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도 지냈다.
그러나 광복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김원봉은 1948년 월북한 이후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됐고, 같은 해 9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이후로도 노동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지만, 1958년 김일성의 연안파(옌안파) 제거 때 숙청됐다.
1938년 10월 10일 약산 김원봉(조선의용대 창립식)
1940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위해 줄을 선 사람들(경성부청)
1940년 2월 11일, 일제, 창씨개명제 실시
조선총독부가 1939년 11월 10일에 공포한 창씨개명제를 1940년 2월 11일부터 실시했다.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만든 창씨개명제는 조선민족 고유의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도입할 목적으로, 모든 조선인은 이날부터 6개월간인 8월10일 사이에 자신의 `씨(氏)`를 결정하도록 강제했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은 일제가 황민화 정책의 '완성편'으로 실시한 조선민족 말살정책 가운데 하나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을 대륙병참기지화하는 동시에 '내선일체'를 내걸고 조선인들의 황민화, 즉 '일본인화' 정책을 강행했다.
일본식의 ‘씨(氏)’를 만들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고치는 이 창씨개명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일본의 ‘씨’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호적을 새로 편제할 때 전 국민을 일률적으로 호주를 정점으로 하는 친족집단으로 나눠 통치체제의 기본으로 삼아왔다. 뿌리가 없는 이 친족집단이 ‘가(家)’였으며, 씨는 가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따라서 창씨개명의 목적은 조선의 전통적인 부계혈통 관계를 해체시키고 일본식의 씨단위 국가로 만들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흐려놓으려는 것이었다.
일제가 대다수 조선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창씨개명'을 강제한 보다 실리적 목적은 1942년에 추진된 '징병제' 실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1945년 3월 6일자 일본 내무성이 작성한 기밀문서에서 그 진의가 확인되고 있다.
"…… 특히 징병제를 실시한 오늘날 황군으로서 조금의 차별도 없이 (조선인 병사와 일본인 병사가) 혼연일체가 되어 군무에 계속 정진할 수 있고, 만일 현재 군대 안에 金모, 李모 등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면, 그 이득과 폐단 또한 저절로 밝혀지게 되고……"
<조선 및 대만 거주민 정치처우에 관한 질의응답, 내무성 관리국, 1945. 3. 6>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8월까지 조선인 전체의 80% 개명을 목표로 3도의 경찰부, 258개의 지방 경찰서, 2943개의 주재소 순사를 동원해 협박을 일삼기 시작했다. 창씨를 하지 않는 사람의 자녀에게는 각급학교의 입학을 거부했고, 교사들에게는 어린이들을 이유 없이 구타케 하고 집에 가서 창씨개명을 안 해서 맞았다고 말하도록 시켰다. 창씨하지 않은 호주는 `비국민`의 낙인을 찍어 사찰을 하고, 노무징용의 우선 대상으로 삼거나 식량 배급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갖은 사회적 제재를 가했다. 이에 6개월 동안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한 사람이 인구의 80.5%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홍보한 친일파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공주 갑부 김갑순은 창씨제가 시행되기 전부터 '김정갑순(金井甲淳)'으로 창씨 하였다. 대표적인 또 한 사람은 춘원 이광수였다.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선씨고심담(選氏苦心談)'(1940.1.5), '창씨와 나'(1940.2.20) 등을 실으면서 창씨제도를 적극 홍보하였다.
식민통치 1기 - 1910 ~ 1919년 무단통치 - 무단, 헌병경찰 통지, 토지조사 사업, 회사령
식민통치 2기 - 1919 ~ 1931년 문화통치, 경찰통치, 산미증식 계획
식민통치 3기 - 1931 ~ 1945년 민족말살통치, 황국신민화, 병참기지화(1937년 이후), 남면북양 정책, 농촌진흥 운동, 중화학 공업 정책, 국가총동원법제정(1938), 국민전신총동원 조선연맹(1938), 지원병제(1938), 국민징용령(1939), 국민근로보국령(1941), 학도지원병 정병제(1943), 강제징병제 (1944), 여자 정신대 근무령(1944)
1933년 배를 타고 봉은사로 소풍을 가는 모습
1940년 부민관(府民館)
부민관(府民館)
1935년 경성부가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고 태평로 1가에 세웠던 부립극장(府立劇場).
부민관터는 본래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위패를 봉안한 덕안궁이 있던 곳이다. 경성전기회사는 서울의 전기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그 대가로 50만원을 납부하였다. 그 돈을 바탕으로 경성부의 부민들을 위하여 5,600여 제곱미터의 규모의 다목적 강당을 지어 문화공연장으로 사용하였다.
일제말기에 부민관은 일제의 전쟁독려를 위한 정치집회를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모윤숙과 이광수는 부민관에서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라는 연설을 하였다.
해방 후 미군 사령부가 사용하였고, 한국전쟁 때 서울수복 이후부터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을 하였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별관로 이용하다가 지방자치제 확대 실시와 함께 서울시의회가 사용하게 되었다.
부민관(府民館)은 경성부(京城府)가 경성에서 강연회라든가 연극·영화·음악·무용 등을 공연할 만한 공연장의 필요성에 따라 경성전기주식회사의 기부금으로 태평로 1가에 세운 극장이다. 당시 기부금 100만원 중 50만원은 빈민들을 위한 경성부립부민병원을 건립하는 데에 사용하였고, 나머지를 보태어 62만원으로 부민관 부지 1,780평을 마련하고 1934년 7월 30일에 기공, 1935년 12월 10일에 준공되었다.
건물규모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연건평은 1,717평, 대강당 1,800석, 중강당 400석, 소강당 160석 규모였다. 이외에도 담화실·집회실·부속실·누간(壘間)·특별실·식당·이발실까지 갖춘 근대식 다목적 회관으로 당시에는 드물게 냉·난방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후 미군정이 임시로 사용하다 1949년 서울시 소유가 되었고, 1950년 4월 29일 국립극단이 창단되면서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국립극단이 피난지 대구로 이전하자 서울 수복 뒤 1954년 6월, 제 3대 국회부터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1970년대 중반에 국회가 여의도의 새 의사당으로 이사 감으로써, 부민관은 시민회관으로 사용되었고 1976년 세종문화회관이 세워지면서 그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1991년부터 현재까지 서울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경성부는 부립극장이 준공되자 성대한 개관식을 갖고, 경성관광협회의 주최로 5대 권번 기생들을 총출연시켜 기념공연 행사를 열었다. 대부분의 극장이 일본인 소유였던 당시에 부립극장의 건립은 각 사회·문화단체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시설도 좋아서 극단들이 끊임없이 대관하여 공연을 가졌다. 이곳에서 극단 화랑원(花郎苑)·현대극장(現代劇場) 등이 창단공연을 가졌고, 극예술연구회 등 유수한 연극단체도 이 극장을 본거지로 활동하였다. 이 밖에도 신파극단과 악극단들도 많이 이용하였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극단들이 부민관 무대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제작했으며, 공연장의 부족으로 감히 엄두내지 못하던 연극인들이 뜻을 모아 중앙무대(中央舞臺)·인생극장(人生劇場) 등 새로운 극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한편 중요 강연회가 여기에서 많이 열렸고, 각종 연희·오락 등도 공연되었다.
한편, 이곳은 ‘부민관폭파 의거’가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1945년 7월 24일 대한애국청년단원 강윤국(康潤國)·조문기(趙文紀)·유만수(柳萬秀) 등이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이 조직한 대의당(大義黨) 주최로 동남아, 일본 괴뢰정부의 대표가 참석하는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이곳을 폭파한 사건이다
부민관은 대관중심 극장으로 우리 연극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관립극장(官立劇場)이라는 한계로 인해 친일어용극이나 관제행사에 주로 사용되었다.
1941년 9월 12일 동대문 앞 행군(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
1944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등학교 전신) 기숙생들
경성고등보통학교는 1906년 경성(현 서울)에 설립된 관립(국립) 중등학교로,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45년 우마차에 인분통을 싣고와 밭에 거름을 주는 모습
1945년 서울
1945년 8월 16일 오전 9시 서대문 형무소앞
1945년 9월 말 용산역 앞(일본 귀환행 열차를 타기위해 앞에 대기 중인 대한 일본인들)
1945년 11월 수학 수업(경기중학교)
1945년 11월 서울
1946년 남대문시장
1947년 동대문 전차 종점
1948년 3월 서울 근교에 위치한 경성방직 방적공장
정경기(整經機) 앞에서 여성 노동자가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1948년 8월 당산동(영등포 부근)
1950년 -1953년 6·25 전쟁 중의 모습들
1950년 6월 25일 남침하는 북한군
1950년 6월부터 1953년 9월까지 계속 된 6.25전쟁은 서울을 그야말로 폐허로 만들었다. 150만 서울 시민 중 110만 명 이상이 서울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파손된 정부기관 건물만도 4,967동이었고, 은행과 병원을 비롯한 공공시설, 일반 기업체 건물 등의 파괴는 헤아릴 수 없었다.
1953년 3월 말까지 9개 구청 중 3개 구청의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나머지는 반 정도가 파괴되었으며, 각급학교는 1,596교실, 연면적 11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1950년 6월 6.25 직후 서울
1950년 6월 26일 한국전쟁 발발 다음날 서울 중심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국군, 한강인도교 폭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시켜 다리를 건너던 수 백 명의 민간인과 군인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북한군의 남침 사흘째인 27일 새벽 위태롭게 서울을 지탱하고 있던 창동 방어선이 무너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으로 피신을 하였다. 신성모 국방장관도 그날 오후 2시,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28일 새벽 2시에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라디오 방송은 이미 대전으로 피신을 한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와 국군은 서울을 사수한다.’는 녹음방송을 되풀이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당초 국군은 북한군 전차의 서울 시내 진입 2시간 후 한강 인도교와 경부선·경인선 철교를 동시 폭파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 시간은 대략 28일 오후 4시쯤으로 예측됐다.
하지만 창동 방어선을 돌파하여 28일 새벽 돈암동까지 진출한 전차 2대가 화근이었다. 이 2대의 전차는 정찰목적으로 들어온 것이었지만 무능한 군 수뇌부는 오판을 하였다.
오전 1시 45분 시내에 북한군 전차가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 인도교 폭파를 책임지고 있던 육군본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명령을 내린다. “탱크가 시내에 들어왔다.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
하지만 한강교는 정부의 서울 사수 방송만 믿고 있다가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 민간인들의 행렬로 가득 차 있었다. 최 대령은 “지금 사람이 많이 오는데요.”라며 주저했지만 채 총참모장은 “즉시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45분 뒤 엄청난 폭음과 함께 6개의 교각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교각이 폭파되면서 다리가 사람들과 함께 한강으로 무너져 내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정확치는 않지만 대략 600명에서 800명에 이르는 민간인과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한강 인도교 폭파는 무책임하고 어이없는 결정이었다. 그때까지도 압도적인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분전하고 있던 국군의 주력부대가 퇴로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4만 명의 국군 병력이 한강 이북에서 고립되어 뿔뿔이 흩어졌고, 그때까지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중장비도 고스란히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다.
국민들의 분노가 거세지자 군 당국은 폭파의 실무 책임자 최창식 대령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최 대령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그 해 9월 21일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한강 인도교 폭파는 150만 명의 서울시민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다. 하지만 예고 없는 한강교 폭파로 시민들의 피란길까지 끊어 놓았던 정부는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색출’ 등 정치적 보복에 앞장섰습니다. 이른바 ‘도강파’와 ‘잔류파’의 대립과 갈등도 깊어졌다.
한국전쟁 발발 나흘 만에 발생한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과 군 수뇌부의 무능이 불러온 참극으로 기록되고 있다.
1950년 6월28일자 조선일보 호외
1950년 7월 16일 전쟁 당시 여의도비행장
1950년 9월 28일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에서의 시가전
1950년 독립문
1951년 3월 16일 폐허가 된 종로 일대
1951년 4월 29일 을지로 입구
1951년 국군
군화, 겉옷, 모자 - 한국산, 코트, 소총, 탄환 – 미국산
1951년 10월 서울시
1951년 성균관대학교 정치학 학사 제1호 졸업장
1954년 성균관대학교 제1호 수료증서
동생을 업고 있는 남매
가죽 가방 지고 학교 가는 길
1952년 아이를 업고 웃고 있는 어머니
1952년 시장
1950년대 좌측통행(Keep to the left) 계도 포스터
1900년대 우측통행, 1950년 이전 우측통행, 1950년 이후 좌측통행, 2010년 이후 우측통행
1953년 6.25 종전 후 서울시 모습
1952년 7월 22일 2년여만에 복구된 한강철교
1952년 한강철교(漢江鐵橋) 한강의 교량 중 최초로 건설된 교량
북한의 남침 직후 폭파되었다가 1952년 7월 22일, 2년여 만에 복구된 한강철교를 이승만 대통령이 각료 등과 함께 기차를 타고 지나며 손을 흔들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사흘만인 1950년 6월28일 새벽, 유일하게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인 인도교(현 한강대교)가 폭파됐다. 다리를 건너던 4천여 명 중 800여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서울 사수(死守)'를 약속한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가 6월27일 새벽 대전으로 떠난 뒤였다. 서울을 지키던 채병덕 참모총장이 인민군의 남하를 늦추겠다며 다리 폭파를 결정했고 한강 인도교와 철교에 TNT를 설치하게 했다.
뒤늦게 김백일 참모부장이 폭파를 미루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현장에 전달되지 못했다.
인도교 폭파는 국민의 생명을 해친 것은 물론이고 작전으로도 실패했다. 6∼8시간 후 한강 북쪽에 도착한 인민군은 폭약 불발로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경부선 철교와 경인선 철교를 이용해 한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한강 이북에서 인민군과 전투를 하고 있던 국군 3개 사단은 인도교 폭파 소식에 당황해 무너졌고, 무기와 장비를 고스란히 인민군에 내줬다.
일본 육상자위대 간부학교의 육군전사연구보급회는 "한국군 주력부대는 조기에 퇴로를 차단당한 탓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무너졌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비판이 대두하자 9월21일 폭파를 실행한 최창식 공병감을 '적전비행(敵前非行)죄'로 처형했다. 하지만 최 공병감은 1964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서울 수복 후 인도교 폭파를 사과하기는커녕 피하지 못한 이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벌했다.
법원은 2013년 5월 납북자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를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위령비는 세워지지 않았고, 민간단체가 2007년부터 진혼제를 열고 있을 뿐이다.
1953년 한강 철교
1951년 서울시
1952년 서울시
1950년대 서울시
1952년 조선호텔
1952년 한국상업은행
1953년 한국은행
1950년대 한국은행 앞 로터리
1953년 전쟁 직후 서울 거리
6.25 전쟁 직후 서울 거리 모습, GMC 트럭 엔진에 드럼통을 펴서 망치로 두드려 만든 버스
1954년 월드컵 한국축구단 환영식 시가행진
일본 누르고 스위스 월드컵 본선 첫 진출
1954-1955년 중앙우체국
1952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혜화동)
1970년대 동숭동 시절 서울대학교
정문 앞 개천은 혜화동에서 이화동까지 흐른다.
당시 서울대생들은 정문 앞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 불렀다. 건너편에는 학림이라는 찻집이 있었다.
동숭동 동명은 원래 이 지역을 백동(柏洞) 즉 잣골이라 불리었으나, 1914년 4월 1일 경성부의 동명 제정 때 숭교방 동쪽에 위치해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동숭동은 조선 초 한성부를 5부 52방의 행정구역으로 나눌 때 동부에 해당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당시 행정구역 개편 때 쌍계동(雙溪洞), 하백동(下栢洞), 신대동(新垈洞), 상백동 등이 동숭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대동, 하백동, 상백동, 쌍계동 등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동숭동이 되었으며, 같은 해 9월 경성부 동부출장소 동숭동이 되었다가 1915년 6월 출장소 제도가 폐지되어 경성부 동숭동이 되었다.
1936년 4월 동명이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됨에 따라 동숭정이 되었으며, 1943년 4월 구제(區制) 실시로 신설된 종로구 동숭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이 동(洞)으로 바뀔 때 동숭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동숭동은 행정동인 이화동(梨花洞) 관할 하에 있다. 동숭이란 지명은 숭교방(崇敎坊) 동쪽에 있다는 데 연유한다.
남상문, 쌍계동, 웃잣골, 아랫잣골, 신댓골 등의 자연마을, 신대우물, 백동우물, 큰우물, 어수물 등의 우물이 있었다. 남상문은 조선 선조 때 군수를 역임한 남상문의 이름에서, 웃잣골은 잣나무가 있다는 데, 신댓골은 중종 때의 학자 신광한(申光漢)이 마을의 풍치가 아름다워 '신대명승(申臺名勝)'이라고 명명한 데 명칭이 연유하며, 129번지는 신광한이 살던 곳이다.
1975년 이전 당시의 서울대학교(건축가 김석철 설계)
서울대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이다.
근대적 국립 고등교육기관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895년 4월 19일 고종의 칙령을 통해 최초의 근대 법학 교육기관으로 설립된 '법관양성소'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한성사범학교, 의학교, 농상공학교 등을 설립했다. 이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서울대학교의 근간이 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1946년 공포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에 의거하여 그 해 10월 국립서울대학교를 개교했다.
경성대학(옛 경성제국대학)과 경성경제전문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경성사범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여자사범학교·수원농림전문학교 등 8개 관립전문학교, 그리고, 사립학교인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일괄 통합하여 9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종합대학교였다.
1946년에 국립서울대학교로 개교했다가 정부 수립 후 교육법이 제정되면서 1949년 12월 31일 학교의 공식 명칭을 '국립서울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바꾸었다. 2011년에는 국립대학법인으로 전환했다. 교훈은 '진리는 나의 빛'이다. 경인지역을 대표하는 거점 국립대학교이자 국내 최고 지성의 전당으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다.
1970년대 서울대 관악캠퍼스
1978년 서울대학교 제 32회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가 답사를 낭독하고 있다.
1986년 대입원서 마감(서울대학교)
2003년 서울대학교
1954년 4월 5일 청운국민학교 입학식날
엄마손 잡고 손수건 달고 등교하는 어린이들
1955년 고등고시 시험장(서울대학교)
1959년 3월 1일 중학교 신입생
부모와 함께 교모와 교복 가방을 구입하고 있다.
1960년대 경기여자중 입학원서 접수
1961년 12월 2일 중학교 입학시험(경복중학교)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루기 위해 소집된 학생들이 수험표를 배부 받고 있다.
1961년 중학교 입학시헙이 치뤄지고 있는 경복중학교 교문 밖의 학부모들
1961년 중학교 입학시헙이 치뤄지고 있는 경복중학교 담을 사이로 하고 수험생과 자녀와 부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70년대 고등학교 입시에서 자녀의 합격을 기원하며 교문에 엿을 붙이는 학부모
1970년대 고교입시
고교 평준화 이전 한 중학생이 부모의 응원을 받으며 입시를 치르기 위해 시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1974년 2월 2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서울과 부산에서는 최초로 고등학교 배정을 위한 컴퓨터 추첨이 진행됐다.
이른바 고교 평준화가 시행됨으로써 중학생들이 악명 높은 고교 입시지옥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다.
평준화 정책은 1972년 11월경부터 준비되었다. 당시 문교장관 민관식 주도로 시안이 만들어져 1973년 2월 20일 박정희 재가를 거쳐 28일 기본 계획이 확정 발표됐다.
1974년 대구, 인천, 광주. 1979년 대전, 전주, 마산, 청주, 수원, 춘천, 제주 등 정국으로 확대됐다.
1972년 합격자 발표(중앙대학교)
1974년 대학입시 체력장
1976년 현금등록과 수강신청
1970년대 서울시내 초등학교 교실
1978년 서울 매동국민학교 입학식
1978년 매동국민학교 입학식
1980년대 대학입학 학력고사
1980년 2월 5일 한양대 미술실기고사
1981년 9월 대학입시 체력장
1981년 학력고사 첫 실시
학력고사(學力考査)는 대학입학 학력고사(大學入學 學力考査)라고 불리는 교육제도로 1982학년도 대학입시부터 1993학년도 대학입시까지 고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다.
현재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유사한 시험이었으므로, 학력고사는 사실상 대학 입학을 위한 시험이었다.
대학입학학력고사는 4지선다형 지식암기형 문제가 너무 많다는 비판으로 인해 1994학년도부터는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변경되었다.
이전의 대학입학연합고사(1954)나 대학 단독으로 출제한 입학고사(1945~1953, 1955~1961, 1964~1968), 대학입학자격국가고사(1962~1963), 대학입학예비고사(1969~1981) 등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1981년 연세대학교 입시창구
1992년 연세대학교 원서접수 마지막날
1955년 우유배급(중구 만리동)
1950년대 봉은사 일주문
1955년 봉은사 가는 길 - 귀로(歸路), 동아일보 특선작(김희중)
1955년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
박인수 사건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 1심 판결에서 판사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인수 사건이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시기였던 1954년 4월부터 1955년 6월까지 대한민국 현역 해군 헌병 대위를 사칭한 박인수가 여대생을 비롯해 70여명의 여성들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가졌던 성추문 사건을 말한다.
사건에 연루된 여성들 중 69명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피해자라 주장하였으나 쌍방 합의에 의한 간통으로 드러났으며, 이 중 1명의 여성만이 처녀였다고 한다.
박인수는 중학을 중퇴하고 해병대에서 헌병 부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애인에게 배반을 당하자 타락하기 시작했다. 박인수는 군에서 전역한 1954년 4월부터 주로 해군장교 구락부, 국일관,낙원장 등을 무대로 해군 헌병대위를 사칭하며 소위 '처녀 사냥'에 나섰다.
그리고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70여명의 여성과 관계하였다. 훤칠한 키의 미남자였던 박인수는 헌병으로 복무시절 익힌 사교춤 실력으로 여성들을 유혹했는데 피해여성들의 상당수가 여대생들이였으며 국회의원과 고위관료의 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법정에서 검사가 '혼인을 빙자한 간음'이라고 주장했으나, 박인수는 이를 부인하였다.
박인수는 '자신은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고, 여성들이 스스로 몸을 제공했다.'하면서 그 많은 여대생은 대부분 처녀가 아니었으며 단지 미용사였던 한 여성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런 박인수의 주장은 '순결의 확률이 70분의 1이다'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세상의 큰 관심을 모았었다.
이에 1심 법정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하면서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단지 공무원 사칭에 대해서만 유죄를 선고하여 2만환의 벌금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2심, 3심에서는 유죄가 선고, 1년의 징역형이 확정되었다.
1956년 연탄 공장(서울)
1959년 전직 차관 부인의 간통사건
1959년 전직 차관 부인의 간통사건 공판을 방청하기 위해 여인들이 대거 대법정으로 몰려들고 있는 모습. 당시 이를 정리하기 위해 기마경찰까지 동원됐다.
1959년에는 전직 차관 부인이 17살이나 어린 ‘춤 선생’과 바람이 난 사건이 관심을 끌었다. 아내를 고소한 전직 차관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이혼 목적보다는 아내에 대한 형사 처분을 위해 고소했다.”며 증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인은 항소심에서 “간통죄를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남편이 제기한 이혼소송에서도 승소해 가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50년대 담배
1959년 라이파이(RAYPHIE, 1959-1962), 김산호
1950년대 앙드레 김(André Kim, 김봉남)
한국의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André Kim, 김봉남)은 1962년 패션계에 데뷔한 이래 50여 년간 한국의 대표적 패션 디자이너로 활약하였다
1950년대 말 서울 반도호텔에서 열린 웨딩패션쇼에 모델로 출연, 디자이너가 되기 전 영화배우의 꿈을 가진 적이 있으며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다. 영화 출연 후 바로 영화배우의 꿈을 접었다.
1962년 디자이너로 데뷔한 앙드레김은 패션공부를 하며 모델로도 활동을 했다. 데뷔 후 유명 영화배우의 옷을 만들며 이름을 알린 그는 1966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한국정부는 그가 별세한 다음날인 2010년 8월 13일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1954년 미24보병대 위문공연에서 china night 를 열창하고 있는 김시스터즈
김시스터의 멤버는 숙자, 애자, 이난영의 오빠(작곡가 이봉룡)의 딸 민자로 1953년 구성되었다.
이난영의 두 딸(김숙자, 김애자)과 이난영의 오빠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민자)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는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노래와 함께 춤까지 췄는데 미8군 무대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김시스터즈는 1959년 아시아 걸그룹으론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했다고 당시 기사가 전하고 있다.(최초 미국진출 한국 여가수는 옥두옥. 1956년 옥두옥이 RCA Victor 레코드사에서 미국 데뷔 앨범을 냈다.)
김시스터즈는 1967년 50만 달러를 세금으로 내 라스베이거스에서 유명한 고액 납세자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76달러였던 시절 김시스터즈가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받은 주급은 무려 1만 5,000달러였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걸그룹은 1939년 결성된 저고리시스터로 알려지면서 저고리시스터부터 소녀시대까지 한국 걸그룹 역사는 73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전한다. 저고리시스터는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이난영, '오빠는 풍각쟁이야'로 유명한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민요가수 이화자로 구성된 4인조 걸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6·25전쟁의 와중에 미 8군 무대에 서다 1950년대 말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던 3인조 여성 보컬 김시스터즈나 1960~80년대 지구 마을을 돌며 한국의 선율과 가락을 선사한 선명회 합창단은 한류(韓流)의 원조로 꼽을 수 있다고 한다.
1960년대 김시스터즈
1953년 데뷔한 김씨스터즈는 주한 미군 무대에서 활동하다 미국 매니저의 눈에 띄어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다. 뛰어난 가창력에 춤 실력까지 갖춘 이들은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미국 전역을 돌며 공연을 펼쳤고, 유명 쇼 프로그램에도 수십 차례 출연했다.
1962년 아시아 가수로는 최초로 빌보드 메인차트 6위에 오른 김씨스터즈는 3인조 여성그룹 슈프림즈보다 앞선 세계 최초의 아이돌 걸그룹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28가지의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하루 종일 연습에 매달리는 ‘연습벌레’였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걸그룹은 1939년 결성된 저고리시스터로 알려지면서 저고리시스터부터 소녀시대까지 한국 걸그룹 역사는 73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전한다. 저고리시스터는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이난영, '오빠는 풍각쟁이야'로 유명한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민요가수 이화자로 구성된 4인조 걸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6·25전쟁의 와중에 미 8군 무대에 서다 1950년대 말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던 3인조 여성 보컬 김시스터즈나 1960~80년대 지구 마을을 돌며 한국의 선율과 가락을 선사한 선명회 합창단은 한류(韓流)의 원조로 꼽을 수 있다고 한다
이난영의 두 딸(김숙자, 김애자)과 이난영의 오빠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민자)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는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노래와 함께 춤까지 췄는데 미8군 무대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김시스터즈는 1959년 아시아 걸그룹으론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했다고 당시 기사가 전하고 있다.
(최초 미국진출 한국 여가수는 옥두옥. 1956년 옥두옥이 RCA Victor 레코드사에서 미국 데뷔 앨범을 냈다.) 김시스터즈는 1967년 50만 달러를 세금으로 내 라스베이거스에서 유명한 고액 납세자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76달러였던 시절 김시스터즈가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받은 주급은 무려 1만 5,000달러였다고 한다.
1957년 윤복희(HLKZ-TV OB SHOW)
1956년 5월 12일 최초의 TV방송이 있었고, 세계 순위 15번째, 아시아 4번째 방송이었다.
1951년 12월 서울 중앙극장 낙랑악극단 무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곱게 단장한 드레스 무대 의상을 입은 6살짜리 귀여운 어린이 가수가 등장했다.
1946년 3월 9일 서울 종로 인사동에서 코미디언 윤부길씨와 무용가 성경자씨의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성음악전문학교 성악과 1회 졸업생인 아버지 윤부길은 국내 원맨쇼의 창시자로 '부길부길쇼'를 통해 1940년대 말부터 KPK 등 악극단 무대를 주름 잡았던 인물이다. '고향선'이란 예명으로 유명한 고전 무용가였던 어머니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으로 전설적인 춤꾼 최승희의 제자였다.
또한 록밴드 <키보이스>의 창립 멤버로 한국 록의 개척자라 할 만한 윤항기 목사는 그녀의 친오빠이다. 이처럼 걸출한 대중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린 시절, 사내아이들처럼 딱지치기, 말 타기, 구슬치기, 쥐불놀이를 좋아했던 적극적인 성격의 개구쟁이였다.
흙을 핥아먹는 기이한 버릇이 있었던 그녀의 본명은 '윤복기'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부유했던 그녀의 집안은 부친이 힘겨운 출연 스케줄을 견디지 못해 마약에 손을 대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6.25 전쟁, 9.28 수복, 1.4 후퇴 등 민족의 아픈 역사와 함께 선생도 고난의 시절을 함께 겪어야 했다.
"부산 피난 시절, 악극의 스타 전옥씨의 딸 최신옥과 함께 소꿉친구로 춤추고 놀면서 무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긴 피난살이 후 서울로 돌아온 부친은 낙랑악극단에 다시 출연을 했다.
이미 무대에 관심이 지대했던 윤복희는 부친의 반대에 맞서 "무대에 세워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며 당돌하게 손가락에 상처를 내며 떼를 썼다. 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부친은 혜은이의 부친 최성택씨가 단장으로 이끌던 낙랑악극단의 중앙극장 무대에 세워주었다.
불과 6살인 1951년 12월. 그녀에게 맡겨진 역할은 쇼의 끝 장면에 산타할아버지가 큰 자루를 메고 나오면 그 자루 속에서 나와 'I love you 리루 리루'를 노래하며 뒤뚱뒤뚱 춤을 추며 퇴장하는 것이었다.
1963년 윤복희
1963년 18세 때 에이원쇼에서 활동하던 시절 윤복희
- 아버지 윤부길은 극단 운영자
- 어머니는 춤꾼 최승희 제자
- 타고난 끼로 11살때 미8군 무대
- 어릴 적 집 나간 오빠 윤항기는 키보이스 결성해 한국 록 주도
“여섯 살 때부터 아편중독에 걸린 아버지(윤부길)에게 사탕을 사주기 위해 무대에 섰다”는 윤복희는 열여덟 살 때 유주용과 결혼, 아이를 가졌으나 “둘 다 어렵게 살아왔으니 아이만은 잘 기를 수 있는 여건이 되면 낳자”는 합의하에 낙태를 했다고 밝혔다.
이후 아이를 갖지 못한 윤복희는 얼굴도 못 본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지금도 피터팬 등 어린이 무대에는 몸을 아끼지 않고 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1961년 16세부터 윤복희는 송영란과 투스쿼럴스(두 마리의 다람쥐라는 뜻)라는 듀엣을 조직하여 남산 UN센터에 출연을 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꽤 인기를 얻었다. 남산 UN센터에 출연하던 어느 날 에이원쇼의 단장이 구경을 왔다가 이들을 에이원쇼의 멤버로 스카우트했다.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할 수 있었던 쇼단에서 윤복희는 만돌린, 기타, 색소폰, 드럼, 트럼펫, 하모니카 등의 각종 악기는 물론이고 아크로바이트까지 섭렵하며 재능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에이원쇼에서 활동하던 1963년 10월 쇼단과는 별개로 필리핀에 2주 동안 공연을 다녀오자는 제의가 있어서 10월28일 10명이 따로 팀을 꾸려 필리핀으로 공연을 떠났다. 얼마 안 있어 이 팀은 귀국하고 4명만 필리핀에 남아서 코리언 키튼즈라는 이름으로 계속 해외활동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윤복희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1960년대 설탕가게
설탕이 귀하던 시절 일반 소비자들은 지정된 판매소에서 한정된 양만을 구입할 수 있었다.
1960년 YWCA 주최로 열린 축첩(蓄妾) 반대 시위
1960년대 국민학교 점심 옥수수빵
미국의 원조를 받던 궁핍한 60년대 국민학교 배식으로 분유 끓여 만든 우유와 함께 나오는 밀가루없어 옥수수가루로 만든 옥수수빵을 먹으려 줄을 서곤 했다.
지금처럼 오븐에 굽지 않았고 원통형 석유 보일러로 스팀을 내서 쪄서 나왔고, 가로 세로 두께 50x80x8cm 큰 틀에 쪄 나오면 다시 약 8cm 정도 두부 모양으로 잘라서 학급마다 나눠주었다. 매일도 아니고 2일에 한번 꼴로 먹을 수 있었다.
이 옥수수빵은 미국에서도 이미 콘브레드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발효가 필요 없고 빠르게 조리가 가능해 효율적이었던 콘브레드는 그 당시 노예로서 일하는 흑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음식이었다.
1961년 CARE(Cooperative for American Remittance Everywhere)는 식량 구호를 돕기 위해 1965년부터 국민학교에 옥수수(Cornmeal: 고운 옥수숫가루가 아닌 거친 싸라기)를 제공했다.
처음에는 콘밀을 죽으로 가공했지만 일부 학교에서 노동력을 감당할 수 없거나 음식준비에 필요한 조리기구 시설을 마련할 수 없기에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분유를 받아 집에 와서 물을 섞어서 도시락에 담아 솥에 중탕해서 쪄 먹었고 걸쭉한 콩죽(옥수수) 한 컵씩 마셨고 옥수숫가루, 밀가루를 미국 원조로 받던 시절, 1968년 국민학교 시절에는 설탕, 계란도 귀한 재료라서 급식 옥수수에는 사용도 못했다.
계란은 선생님께 드리는 귀한 것이었고, 설탕도 모자라는 시절 사카린, 뉴슈가 등으로 단맛을 내었다.
1951년 서울시(종묘)
1950년대 초반 서울
1950년대 서울
1952년 서울시
1955년 남산상공에서 본 서울시내
1956년 서울시
1958년 서울시(경복궁 일대)
경복궁은 서울이라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 중에서도 가장 권력과 가까운 공간이었다. 경복궁은 패배한 기존의 권위를 상징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권력의 보금자리라는 점에서 이중성을 보인다. 특히 1896년 고종이 경복궁을 떠난 이후 상당한 시간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을 ‘파괴’하고 ‘활용’하는 방식에 반복적인 기시감이 나타나는 것은 경복궁이 가지는 이러한 특성에서 기인한다.
1960년대 경복궁은 다시 활용되기 시작하며 여러 가지 기능이 덧씌워졌다. 파괴된 중앙청은 10여 년이 흐른 1961년에야 복구기술위원회가 구성돼 1962년 11월부터 다시 행정의 공간으로 이용됐다. 또한 서북쪽 일대에 30경비단이 들어서면서 부대 일대 및 신무문과 경회루에 대한 출입이 제한됐다. 방치되던 경복궁에 대한 문화재 보존을 위한 노력도 미미하지만 시작됐다.
한편으로 경복궁은 4·19 이후 다시 개방되며 공원적 성격도 강화됐다. ‘아메리카 카우보이쇼’, ‘국제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1962년에는 ‘군사혁명1주년 산업박람회’가 개최됐다. 박람회장에는 각종 진열관과 공연관 등 30채의 건물이 설치됐다. 국제관에는 미국의 인공위성 모델이 진열되고, 반공관이 마련됐다. 당시 문화재 관리국장 문응국 대령은 3개년 계획으로 경복궁을 분수와 화단, 야외극장, 어린이놀이터, 동물원 등이 구비된 대규모 시민공원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1963년 10월에는 경회루 동쪽 약 7천 평의 잔디밭을 헐어 골프장을 만들려다가 중단되기도 했다.
문화공보부가 만들어지는 1968년을 전후해서 경복궁은 ‘민족의 얼’을 살리는 교육공간적 성격이 부가됐다. 경복궁에 광화문, 영추문 등이 복원되고, 국립박물관, 한국민속박물관 등 박물관이 다시 집중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변화에 새로운 것들이 덧붙여지는 양상이 계속 중첩되면서 경복궁은 중앙청, 박물관, 공원, 문화재, 군사시설 등이 누더기처럼 착종돼 있는 혼돈의 공간이 돼갔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경복궁에서 행정부가 떠나고, 1990년대에 들어 구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군사시설이 이동하고, 복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원문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1960년 서울시
1963년 1월 1일 서울시
1960년대 초 서울의 모습. 오른쪽 긴 도로가 을지로, 왼편이 종로, 중앙 청계천으로 종로 끝 부분에 동대문이 보인다.
1963년 서울시
1965년 서울시(통의동)
1968년 서울시
1973년 서울시
사진 좌측 인왕산, 우측 남산 타워, 그 아래로 남산 어린이 대공원, 그 아래쪽으로 보이는 곳은 용산공원, 그 뒤로 보이는 산이 북한산의 문수봉과 향로봉
1955년 한양대학교
1957년 - 1958년 독립문
1960년 장충체육관 신축공사
1973 용산 미군부대 내부 전경
1970년 을지로, 청계천, 종로, 세운상가 종묘, 3.1빌딩
1970년 세운상가와 종묘
1971년 세운상가
1971년 4월 29일 청계천 고가도로와 당시 최고층의 33층 삼일빌딩
1972년 낙원상가아파트
1956년 북한산
은평구 역촌동에서 바라본 북한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대한민국 오악(五嶽)에 포함되는 명산이다. 세 봉우리인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가 큰 삼각형으로 놓여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삼각산(三角山) 또는 삼봉산(三峰山), 화산(華山)으로 불렸고 삼국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불렀는데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 형상을 닮았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자리 잡고 살 만한 땅을 고를 때 이 봉우리에 올라 서울의 지세를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세 개의 봉우리에 따온 이름인 삼각산이라고 불렀다. 북한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서울의 옛 이름인 한산(漢山)에서 유래한 것이며 한산의 북쪽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백운대의 남쪽에 있는 만경대는 주변 경관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예로부터 국망봉이라 불렸다. 무학대사가 조선의 도읍지를 정할 때 삼각산에 올라서 내려다보고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56년 옥수동
강 건너 보이는 곳이 앞구정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속한 동이다. 응봉산이 동의 서쪽에 있으며, 남동쪽으로 한강과 접한다. 마을에 옥정수(玉井水)라는 우물이 있어 옥정숫골이라 불리다가 옥수동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과 북쪽에서 흘러오는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므로 두뭇개, 두멧개, 두물개 또는 한자음으로 두모주(豆毛洲), 두모포(豆毛浦)라고 불렀다.
1911년 경성부 두모면 두모리(豆毛里)라 하였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두모리로 되었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옥수정(玉水町)으로 되었고, 1943년 성동구에 속하였으며, 1946년 옥수동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강변에 많은 정자가 있었다.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세운 유하정(流霞亭)은 정조(正祖)가 규장각에 하사하여 신하들이 이용하도록 하였고, 연산군(燕山君)이 한남동과 경계되는 언덕에 황화정(皇華亭)을 지었는데, 그후 중종(中宗)이 이것을 제안대군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아 황화정과 유하정은 같은 정자인 것으로 보인다.
강변도로 둔치에는 몽구정(夢九亭)을 비롯해 9개의 정자가 있었고, 동 이름의 유래가 된 우물 옥정수는 옥수로를 개통하면서 매몰되었다.
8번지를 핑곳골, 빙곳골, 빙고동으로 부른다. 조선시대 초에 세워진 동빙고(東氷庫) 터가 있는 곳으로, 동빙고 북쪽에는 사한단(司寒壇)이 있었다. 이 단은 수우신(水雨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얼음이 잘 얼게 해달라고 동빙제(凍氷祭)를 지내던 곳인데, 달맞이봉 아래쪽에 있었다.
244번지 동쪽에는 조선 초기에 국가에서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뽑아 일정 기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도록 한 독서당(讀書堂)이 있었고,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고개라고 하였다.
1956년 옥수동
금호동 고개에서 본 옥수동의 모습 12시 방향이 독서당길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길 방향
조선시대 도성의 동남쪽인 오늘날의 광희동 2가 105번지에 위치한 광희문(光熙門)을 나서서 지금의 약수동에서 두뭇개(豆毛浦) 곧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긴 고갯길을 독서당고개라 하였다.
두뭇개에 독서당(讀書堂)이 있어서 선비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며 독서당에서 공부하였으므로 독서당고개라고 하였다. 지금 한남동에서 옥수동을 거쳐 금호동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에 ‘독서당길’ 표지석이 있는데, 이는 독서당고개의 일부분이 된다.
조선시대 두뭇개독서당은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 244번지 일대에 있었다. 지금도 옥수동 3통 일대를 ‘한림말’이라 하는데, 한림말이란 ‘한림(翰林)마을’을 말한다. 한림(翰林)이란 조선시대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통칭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곧 ‘선비가 글 읽던 독서당마을’이란 뜻이다.
한림말 독서당자리에는 1950년대만 해도 부군당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공부자도통 고금연원기념비(孔夫子道統古今淵源 紀念碑)」라 새겨진 큰 돌비석이 서있어서 여기가 독서당터 부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온통 주택가로 변하였다. 이곳에 있던 독서당을 동호당(東湖堂)이라 하였다.
옥수동 곧 두뭇개 앞강을 동호(東湖)라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동호당에 앞서 용산에도 독서당이 있었으므로 이곳의 독서당을 용호당(龍湖堂) 또는 남호당(南湖堂)이라 하였기에 독서당을 일명 호당(湖堂)이라고도 하였다.
독서당제도란 조선시대에 뛰어난 선비들에게 특별히 말미를 주어서 독서당에서 글을 읽게 한 제도를 말하는데, 그 연원은 세종 때부터이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선비 중에서 뛰어난 젊은 관리 20명을 뽑아 경연(經筵)에 들게 하고 아울러 문한(文翰: 문필에 관한 일)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은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야 퇴근하기 마련이어서 일관(日官)이 퇴근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야만 궁궐에서 물러나올 수 있었다. 세종은 내시로 하여금 점심·저녁상을 차려 대접케 하는 등 이들에 대한 대우가 극진하였다. 이로부터 선비들이 다투어 공부에 열중하였고 이에 따라 뛰어난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세종은 왕 8년(1426)에 집현전학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자하문 밖(지금의 세검정) 장의사(藏義寺)에서 공부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시초가 되었다. 사가독서제는 문종·단종을 거쳐 세조 때에 이르러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 하여 세조 2년(1456) 집현전이 혁파되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 후 성종이 즉위하자 용산 한강가 언덕에 있는 빈 절을 고쳐서 사가독서하는 장소로 삼고 그 이름을 독서당이라 하였다. 이것이 독서당이란 이름의 시초로서 여기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공정한 추천을 통해 엄정히 뽑힌 사람들이었다. 이 독서당을 일명 남호당(南湖堂)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 후 독서당은 연산군 10년(1504)에 있었던 갑자사화로 폐쇄되었다가 중종 때 재개되었다. 중종은 즉위 직후 얼마동안은 정업원(淨業院)을 독서당으로 사용하다가 중종 12년(1517) 여염과 멀리 떨어져 있고 경치가 뛰어난 동호(東湖), 즉 두뭇개 뒷산 응봉 기슭에 새로 독서당을 짓게 하였다.
동호독서당은 그 규모가 크고, 차림새의 화려하기가 용산의 독서당보다 월등하였다 한다. 또 국가에서 지급하는 식량이며 공급품이 풍부하였다. 모두들 공부에 열중하여 독서당은 항상 빈집 같이 조용하였다 한다. 그 규모는 처음에 대청과 남루(南樓)가 있었고 다락 북쪽에 침방(寢房)이 있었다. 광해군 4년(1612)에 문회루(文會樓)를 짓고 30년 후 다시 문회루 서북쪽에 있는 연못 뒤에 누각 하나를 더 지었다.
중종 12년(1517) 동호독서당이 세워진 후 임진왜란으로 불타기까지 70여 년간 동호독서당은 문사(文士) 양성기관으로서 최대의 이바지를 하였으며, 이곳을 거쳐 간 인물들이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몇몇 사람들을 소개하면, 조광조(趙光祖)·민제인(閔濟仁)·주세붕(周世鵬)·이황(李滉)·정유길(鄭惟吉)·노수신(盧守愼)·심수경(沈守慶)·기대승(奇大升)·이산해(李山海)·심의겸(沈義謙)·정철(鄭澈)·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이발(李潑)·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오억령(吳億齡)·한준겸(韓浚謙)·기자헌(奇自獻) 등을 들 수 있는데, 독서당 출신들이 얼마나 나라에 공헌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독서당은 집현전·홍문관의 옥당(玉堂) 못지않게 높이 평가되었던 것으로, 중종 때는 고시(考試)하는 법이 대단히 엄격하여 만약 계속하여 입격(入格)하지 못하면 퇴학시켰다. 독서당에서 공부하는 당원(堂員)에 대한 예우는 극진하였다.
이들을 돌보기 위해 급여 사무자가 9명, 심부름꾼 8명이 배치되었으며, 물자 공급을 여유 있게 하였다. 특히 성종·중종·명종 등 여러 왕들은 궁중의 음식을 내려주어 이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는데, 성종은 수정으로 만든 술잔까지 하사하였다.
독서당 당원의 선발숫자는 한 번에 평균 6명 정도를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세종∼영조 때까지 350년간 320명이 선발되어 사가독서하였다. 그 선발과정은 대단히 엄격하였으며, 조정의 적극적인 권장과 관심 속에서 당원들은 학문에 정진함으로써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니, 조선시대 동호독서당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동호독서당은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에 타서 한 때 폐지되었다가 선조 40년(1607)에 다른 곳에 임시로 설치되어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숙종 35년(1709) 이후에는 이 제도가 시행되지 않았다. 정조 때 규장각을 개편하고 이 곳 학자들에게 두뭇개 유하정(流霞亭)에 가서 한동안 독서하게 하였는데, 이것도 호당제도(湖堂制度)를 본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세종로
1950년대 세종로
1953년 6월 25일 세종로(이승만 대통령 연설)
1956년 중앙청에서 바라본 세종로
1956년 7월 24일 3대 대통령 취임식 및 광복절 행사
1956년 10월 21일 세종로
1959년 세종로
왼 쪽의 건축 중인 건물은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시민회관으로 사용한다.
1960년 세종로
1962년 세종로
1966년 세종로
1966년 4월 29일 세종로 지하도 공사
1966년 7월 23일 세종로 지하도 공사
광화문 지하도 공사가 한창인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의 모습이다.
1966년 10월 29일 세종로 지하도 공사 완료
1967년 세종로
1967년 세종로(제19회 국군의 날, 삼군 분열식)
1960년대 말 세종로
1972년 세종로(조선후기 경희궁)
경희궁지 옛 모습 – 서울중고등학교(옛 경성중학교)
부지 7만 2천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이 있던 곳으로 광해군 때 왕궁을 지어 경덕궁이라 부르다 1760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280여 년 동안 동궐인 창덕궁, 창경궁과 더불어 서궐의 위치에서 양대 궁궐의 자리를 지켜왔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興化門), 황학정(黃鶴亭)만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들어온 뒤로 숭정전은 1926년 남산 산록에 이치 되어 조계사(曹谿寺)의 본당으로 사용되었고, 흥정당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황학정은 1923년 사직단 뒤로 옮겨졌다.
흥화문은 1932년 伊藤博文(林利助, 하야시도시스케)를 위하여 짓던 절,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쓰였으며 최근까지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으로 옮겨왔다.
경희궁 자리에는 1910년 일본인을 교육하는 경성중학교(옛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을 경희궁 근처로 잡고 통감부 중학교를 경희궁 터에 세우고 지형도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꿔 버리는 등 그 만행이 시작되었는데 1922년 6월에는 경희궁의 동편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부지로 25,500평을 떼어냈고 1927년에서 1928년에는 경희궁 남쪽 도로를 확장하면서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킨다.
거기에 건물들은 대부분 매각 시켜 버리고 만다. 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던 숭정전(경희궁의 정전)은 1926년 3월 일본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에 매각 이건 되었다. 대내 정전인 회상전은 1911년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그리고 편전인 흥정당은 1915년 소학교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8년 용산의 광운사로 팔려나갔다.
이렇게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경희궁의 건물들은 완벽하게 소멸되고 말았으며, 경희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한 때 이곳에 경희궁이라는 궁궐이 있었다는 의미인 ‘경희궁터’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1973년 세종로
1974년 세종로
1977년 세종로
1977년 100억불 수출의 날 기념 아치(세종로)
1970년대 세종로
1973년 태평로(太平路)
좌측 체신부(현 서울지방국세청), 우측 서울시청, 가운데 광화문과 중앙청
태평로는 남대문 서북쪽 현 대한상공회의소가 들어서 있는 부근에 태평관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태평관은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 때까지 명나라 사신이 머물던 숙소였다.
1980년 2월 28일 세종로
1981년 세종로
국군의 날 시가행진
1980년대 세종로
2021년 3월 4일 세종대로
세종대로의 중앙을 차지하고 거대한 중앙분리대로 여겨졌던 광화문광장이 2021년 11월까지 서측도로(세종문회화관 앞)는 광장에 편입되어 세종대로 사람숲길과 연계된 도심 보행로로 바꾼다. 그러기 위해 2021년 3월 6일 0시부터 광화문광장 동측도로(교보빌딩 앞)를 양방향 통행으로 바꾸기 위한 작업을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진행하고 있다.
2021년 3월 6일 광화문광장 확대 조성
폐쇄된 광화문광장 서측도로
서울시는 이날 0시부터 광화문광장 서측도로(세종문화회관 앞)을 폐쇄하고 동측도로는 기존 편도 5차로에서 양방향 7~9차로(주행차로는 7차로)로 확장했다. 전체 주행차로는 기존 10차선에서 3차선 줄었다.
1952년 서울시청
1954-1955년 서울시청
1957년 - 1958년 서울시청
1960년 4월 19일 서울시청 앞
1960년 시청 앞
1966년 서울시청
1967년 시청 앞 행렬(숭례문, 대한문)
1968년 서울시청 현관 표어
1972년 서울시청 앞 지하철 공사장
1973년 서울시청 부근
건너편에 체신부(현 서울지방국세청), 국회(현 서울특별시의회), 조선일보 건물이 나란히 서있다.
1978년 서울시청 앞 국기하강식
1976년엔 대법원이 경례 거부 학생에 대한 학교 징계는 당연하다고 판결했다. 체제비판을 안보위기로 호도하고 잇단 긴급조치로 원천봉쇄하며 국가주의로 치닫던 정부는 더욱 국기, 국가, 국화, 국가원수 등 국가상징물에 대한 숭배를 강화해 나갔다.
이 무렵 거리에서 국기 하강식의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데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으면 초등학생조차 손가락질을 하며 “저 아저씨, 공산당인가 봐.”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1977년 10월 경향신문 사회면 톱은 '높아진 국기에의 존엄성-1분 멈춤 거리의 조국애'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보도했다.
"18일 하오 6시 시청 앞 등 서울 중심가에서 애국가 주악이 방송으로 울려 퍼지자 모든 시민이 국기게양대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태극기를 향해 차렷 자세로 예의를 표했다.
시끄럽게 장난치며 어울려가던 한 떼의 고교생이 발을 멈추어 섰고 그 뒤로 노신사, 숙녀, 바삐 가던 시민들이 우뚝 제 자리에 서 요란하던 거리는 삽시간에 고요한 광장으로 변했다…." "한 시민은 국기하강식을 통해 나에게 영광된 조국이 있음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뿌듯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유신정부는 그러나 '요란한 거리를 고요한 광장으로 변모시키는' 그 국기하강식도 민간자율로만 하는 것은 못미더웠다.
내무부는 78년 10월1일부터 국기하강식을 범국민적으로 펴기로 하고 관공서와 공공단체 학교 등은 매일 의무적으로 실시토록 하는 지침을 전국 시도에 시달했다.
이 지침은 "국기하강식을 볼 수 있거나 애국가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모든 옥외 국민은 그 자리에서 차렷 자세로 국기를 향해 경례하고 옥내에서는 차렷 자세를 취하되 태극기 쪽이나 애국가가 연주되는 방향을 향하도록" 규정했다.
1971년 극장 애국가가 상영된 지 7년 만에 이제 거리의 애국가에 국민이 부동자세로 경례해야 하는 강제의무가 부과된 것이다.
대한민국 전 국토는 오후 6시, 전 국민 차렷! 경례! 구호 속에 1분 동안 일체의 동작을 멈춰야 했다. 획일과 일사불란을 목표로 하는 군대 못지않게 조국에 충성을 다짐하는 일치된 국민의 모습을 보며 국가지상주의자들은 쾌재를 불렀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어떤 작은 몸짓도 비애국적 꼬리표를 붙여 저항할 수 없게 한 제도는 유신정권 몰락 후에도 근 10년간 존속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오히려 강화하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 학생들은 학교 정문에서 한번, 조회 한번, 매 수업시간 한번, 종례 한번, 거리 국기하강식 한번, 혹시 극장에 가면 거기서 또 한 번 등 하루 몇 차례씩 국기에 대한 경례를 표하며 살기도 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를 두 달 앞둔 3월 1일. 모처럼 가족과 극장을 찾은 시민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본 영화에 앞서 애국가를 상영하니 모두 기립해 달라."는 방송이 나온 것이다.
이날 서울 등 전국 도시지역 381개 극장에선 국내 처음으로 영화 시작 전 애국가를 상영했다. 문공부 지시였다. 관객들은 일부 앉은 채, 또 일부는 엉거주춤 일어서 태극기가 휘날리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걸 지켜봤다.
이튿날 문화공보부는 애국가 상영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발표했다. "애국가의 올바른 보급과 존엄성, 애국심 고취를 위해" 애국가 상영을 극장연합회와 합의했다는 것. 또 이 조치를 읍면동 포함 전국 782개 모든 공연장으로 확대하니 관객은 일제히 일어나 경의를 표하라는 것이었다.
1분 40초 애국가 영화는 이후 20년간 국민의 일상(日常)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국기, 국가가 좋든 싫든 국민 의식에 또렷이 각인되는 역사가 새로 시작된 것이다.
처음 극장 애국가를 틀 때만 해도 그것이 오래가리라고 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상영 1주일째인 3월8일 신민당 김수한 대변인은 "전국 극장의 '애국가 영화'는 정부여당이 관권을 악용해 벌이는 사전선거운동의 표본"이라는 짧은 성명을 발표했다.
4월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군인 출신 박정희 후보가 국민들의 안보의식과 애국심을 적절히 섞어 건드려 3선을 달성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쯤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언론 역시 중요한 사안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문화공보부는 이미 전 해부터'국기,국가,국가원수에 대한 예절'을 범국민적으로 계몽한다며 학교마다 지침을 적은 책자를 배포하고 있었다.
대통령을 국가(國家)와 동격시하고 국기, 국가(國歌)로 표상되는 애국심을 곧 국가원수에 대한 예절로 인식하게 하는 원려(遠慮)였지만 이를 간과한 것이었다. 일부 언론은 국기와 국가에 대한 존엄성 고취는 때늦은 감이 있다며 환영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던 3월 15일, 애국가가 연주되는데도 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20대 청년이 즉심에 회부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는 극장마다 경찰 임검석이 있었지만 일반인이 담배를 피우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즉심회부가 애국가 상영 때 기립하지 않은 괘씸죄인지, 아니면 극장 내 흡연 때문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 탓에 사람들은 애국가 도중 그냥 앉아있다가는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걸 분명히 깨달았다.
그뿐 아니었다. 신문 독자투고란에는 애국가 앞에서 경건하지 못한 태도를 비판하는 글이 줄을 이었다. 애국가 연주 중 의자를 덜컹덜컹 밀거나 껌을 씹는 행위, 옆 사람과 잡담하거나 사랑을 속삭이는 것들이 모두 비애국적 행동이라고 매도하는 것들이었다.
일부는 영화 필름이 낡아 '비가 오는 것'이나 필름이 끊겨 애국가가 한 소절 떨어져 나간 걸 지적하며 극장이 돈벌이에 급급해 국민 애국심 고취엔 무신경하다고 비난했다. 하루 4, 5회 1년 내내 쉼 없이 애국가를 상영하는 극장으로서는 참 난감한 일이었다.
어쨌든 관객들은 차츰 극장 안에서 앞 뒤 옆 사람을 의식하게 됐다. 일어선 건지 뭔지 엉거주춤하거나 자세를 삐딱하게 해 애국가를 듣다가는 어떤 말을 들을지 몰랐다. 옆 사람이 입술을 움직이자 덩달아 애국가를 따라 불러 끝내 온 관객이 제창하는 일도 일어났다. 어느 열렬한 애국자는 "극장에서 '잠시나마 일어서서 애국하는 마음을 가다듬자.'고 방송하는데 한국 사람이 오죽 나라사랑을 안 하면 극장에서, 그것도 잠시나마 애국하자고 말하겠느냐?"고 일갈하기도 했다.
60년대와 달리 70년대 극장에선 에로영화와 호스티스 영화가 종종 상영됐다. 이런 작품을 건 극장에서 사람들은 심한 심적 갈등을 느끼기도 했다. 생각해보라. 장엄하게 휘날리는 태극기와 우렁찬 애국가 앞에 차렷! 자세로 서서 조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한 뒤 바로 반라의 여인들이 몸부림치는 장면을 숨죽여 보는 것을…. 일종의 코미디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애국가가 면제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 부조화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생각이 이상한 사람들로 치부됐다. 맑은 정신으로 애국가를 듣고 흐린 정신으로 음란물을 본들 문제가 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애국가가 나오면 바로 부동자세를 취하는 일은 극장 밖의 일상생활로도 빠르게 퍼졌다.
오후 5시(겨울), 6시(봄, 여름, 가을) 국기하강식 때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차렷 자세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하기 시작했다. 모자를 쓰고 있으면 불경으로 간주됐다. 모자를 벗어 들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붙여 경의를 표했다. 어린이들은 땅따먹기나 줄넘기를 하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면 배터리 나간 자동인형처럼 동작을 멈췄다. 국기 하강이 끝난 뒤 몰래 움직였느니 아니니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1972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국기를 존중하는 일이 바로 애국이며 우리는 국기를 통해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훈시했다. 곧 이어 문교부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해 모든 행사에서 학생과 교원들이 암송해 국기에 대한 존경심을 높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초·중·고생은 대표 학생의 선창에 따라 암송하고 대학생은 마음속으로 암송하도록 하라고 친절한 지침도 덧붙였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국기가 오르내릴 때 경례하지 않는 이들은 나라와 등 돌린 사람으로 간주돼 배척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 종교적 이유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학생, 종교인들이 구속되거나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학생들 중 일부는 "국기에 대한 '주목'은 괜찮지만 '경례'는 교리 상 우상숭배가 분명하다."며 자신들을 제적한 학교 측을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했다. 중고생은 물론, 초등학생들도 과도한 국기에 대한 경례에 대해 반발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언론은 물론, 사회의 그들에 대한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러던 1989년 1월 20일, 문화공보부는 "매일 오후 5시 또는 6시에 시행해오던 애국가 방송을 1월 23일부터 하지 않도록 방송사에 협조 의뢰하는 한편 이날부터 영화관에서의 애국가 상영도 폐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이를 둘러싸고 국가지상주의, 병영주의, 획일주의, 개인의 자유침탈 등을 이유로 반대가 많았다거나 종교단체 중심으로 폐지 주장이 있었다는 배경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국기, 국가에 대한 일률적 경례는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 경례거부로 구속되거나 학교에서 쫓겨난 이들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애국심을 건드려 국가주의를 확립하려 했던 사상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글 민병욱(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1978년 서울시청 앞(거문도 침투 북한 간첩선 전시장)
1987년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
1954-1955년 대한문(덕수궁)
1957년 대한문
1973년 덕수궁 주변
1956년 뚝섬 유원지
1955년 박정희 보직 신고
1955년 여순 14연대 반란이 진압된 후인 1948년 11월, 朴正熙 소령은 좌익 연루자로 지목돼 肅軍(숙군) 수사책임자이던 金昌龍 소령(당시 1연대 정보주임)에게 체포됐다. 수사 과정에서 朴正熙에게 전기고문까지 했던 金昌龍은 朴正熙가 수사에 적극 협조하자 白善燁 정보국장, 金安一 특무과장 등과 함께 朴正熙를 救命하는 데 일조했다.
무기선고까지 받았다가 목숨을 구한 朴正熙는 6·25 발발과 함께 현역으로 복귀, 이 사진 속에서는 金昌龍과 같은 계급의 정보국 소속 장교로 나란히 섰다. 金昌龍은 1953년 준장으로 승진한 朴正熙가 美 포병학교로 유학을 가려할 때, 朴正熙의 좌익경력을 문제 삼아 출국을 막으려 하기도 했다.
1956년 1월 金昌龍이 姜文奉 2軍 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암살자들에 의해 피살되자 5사단장으로 있던 朴正熙 준장은 『허, 그 사람이 그렇게 죽다니…. 내가 사형 받을 뻔했다가 그 사람 덕분에 살아났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3년 후 朴正熙도 金載圭에 의해 암살당했다.
1951년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은 金宗平(후에 金宗勉으로 改名) 준장(후에 서울신문 전무 역임)이었다. 특무부대(국군기무사령부의 前身)와 첩보부대(국군정보사령부의 前身)는 그의 통제를 받았다. 金昌龍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金宗平은 후일 金昌龍이 조작한 「동해안 반란 음모사건」으로 獄苦를 치렀다.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49년 2월 당시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의 결정에 따라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55년 원주의 1군사령부 사령관인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에서 셋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 신고를 받은 뒤 격려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군복을 벗었다가 6·25 전쟁이 터진 뒤 복직했다.
1956년 대통령선거
1957년 9월 이승만대통령과 각 시도 경찰국장이 경무대에서 기념촬영
태반이 친일경찰인 이들은 이승만이 쫓겨나기까지 충성을 바쳤다.
1949년 6월 6일 아침 남대문로에 있는 반민특위 사무실.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찰관 40명이 일제히 사무실로 난입했다.
건물 주변은 기마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휘두르면서 소리 질렀다.
"여기 있는 놈들 모조리 끌고 가라."
총을 든 경찰관들은 닥치는 대로 특위 직원들을 붙잡아 두들겨 패면서 쓰리쿼터에 실었다.
여기저기서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가면서 욕설을 해댔다.
"여기 있는 놈들 대부분이 빨갱이들이야~ 여긴 빨갱이 소굴이라구."
모두 35명이 끌려가고 통신기기와 호신용 무기, 서류 전체를 압수해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국법을 수행 중인 국가요원들에게 이러고도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으냐?"
윤기병이 이죽거렸다.
"최운하 과장과 조응선 주임을 진작 내주셨으면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내놓으시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며칠 전 반민특위가 체포한 악질 친일경찰 최운하와 조응선을 풀어달라는 얘기다.
경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급하게 달려온 권승렬 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은 권총까지 뺏기고 밀려났다.
중부서로 붙잡혀간 특위 직원들 35명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중 22명이 심하게 두들겨 맞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제헌의회가 구성되자 이승만 정부의 반발을 무시하고 반민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반민족행위자의 범주와 처벌 규정, 특위의 구성과 활동, 특별재판부 구성을 담고 있었다.
이 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948년 10월 12일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국회의원인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김상덕 위원장은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 2.8독립선언을 주도해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중국으로 망명해 일제 타도의 선봉에 섰던 독립투사다.
그는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고, 중국에서 독립투쟁을 벌이다 남한에서 돌아온 후 납북돼 북한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반민특위는 국민의 성원을 업고 의욕적으로 출발했다.
반민특위가 가장 먼저 검거한 친일파는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이었다.
그는 조선비행기 공장을 세워 일제의 침략전쟁에 기여한 인물로, 해외도피를 기도하다 체포되었다.
이어 만주에서 일본 헌병의 앞잡이로 무려 250여 명의 독립투사를 붙잡아 17명을 처형한 악질 친일파 이종형을 잡아들였다.
그는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도 "내가 감옥에 들어온 건 빨갱이를 잡는데 앞장서서 사방에 적을 만든 탓"이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했다.
이어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가 변절한 최린, 친일 변호사 이승우, 평안북도 특고과장을 지내면서 많은 독립투사를 잡아들인 악질 경찰 이성근, 고종황제의 당질로 매국 활동을 한 이기용을 구속했다.
이기용은 자택 응접실에 일왕 히로히토의 사진을 걸어놓고, 일본 왕실로부터 받은 훈장 30여개를 진열해놓아 조사관들을 놀라게 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25일 드디어 악질 중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을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전국 도처에서 독립운동가를 무차별적으로 체포해 여러 명을 고문해서 죽인 친일경찰의 상징이었다.
노덕술은 수배 중에도 번호판을 단 경찰 지프에 경호원까지 태우고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다녔다.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노기충천하여 김상덕 등 특위위원들을 경무대로 불러 그를 석방하라고 강요했다.
특위위원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국내에 지지기반이 약한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친일파를 보호해 장기집권의 무기로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민특위와 정부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일제 경찰 출신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진행됐다.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난수와 사찰과 차석 홍택희는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불러 국회의원 3명을 납치해 38도 선상의 어느 지점으로 끌고 오면 그 다음은 경찰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겁을 먹은 백민태가 검찰에 자수하면서 이 음모는 무산됐다.
친일경찰들은 급기야 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자."며 준비에 들어갔다.
습격 전날 밤 시경국장 김태선에게 계획을 전해들은 내무차관 장경근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태의 책임은 내가 진다.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다."며 이승만의 사전 양해가 있음을 암시했다.
이렇게 해서 친일경찰들은 1949년 6월 6일 백주대낮에 국가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이다.
물리력을 빼앗긴 김상덕 위원장과 특위 위원들은 사퇴서를 제출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런 와중에 반민특위를 국회에서 지지해주던 김약수 부회장 등 소장파 의원들이 '남로당의 프락치'라는 혐의로 대거 구속되었다.
이어 반민특위의 정신적 기둥인 백범 김구마저 암살당하면서 '친일파 처단'은 물 건너가 버리고 대한민국은 '친일파의 천국'으로 전락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상덕은 북한 내무서원들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갔다.
그 뒤의 소식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2006년 9월 3일 북한을 방문한 독립운동가 유족들에 의해 평양 룡궁동에 있는 재북인사묘역에 묻혀 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
한반도 남쪽이 친일파들의 수중에 떨어지자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는 까마득히 지워졌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이 제대로 실시되기까지 17년 동안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 단 두 명뿐이었다.
이승만 혼자 받으면 비난을 받을 것 같으니까 이시영을 끼워 넣었다는 해석이 정설이다.
이것이 독립을 되찾은 대한민국의 실상이다.
1960년 자유당 중앙당부 게시판의 3.15 정.부통령선거 개표상황
자유당(自由黨)은 1951년 12월에 대한민국에서 창당된 보수정당이며 대통령 이승만을 당수로 하였으며, 장택상, 이범석, 장면, 배은희, 이기붕, 함태영, 이갑성, 백성욱이 주요 간부였다. 최초 공화민정회(共和民政會)와 5개 정치, 시민단체인 대한청년단, 국민회(1945년),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연맹, 대한부인회 등이 연합하여 출범하였다.
여기에 한민당 탈당파, 대한국민당 탈당파, 그리고 원외 자유당을 창당한 조선민족청년단이 추가적으로 참여하였다. 1951년 이후 제1공화국 기간 중 여당으로 존속하였고, 1960년 이후 해체 위기를 겪었으며 일부는 탈당 민주공화당과 신민당 등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제3공화국에서 극소수 의원만 남은 군소정당으로 존속하다가 해체된다.
1961년 5·16 군사구테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박정희, 중령 김종필, 소령 이낙선 등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8기, 9기 출신 일부 장교들이 장면 내각의 무능력과 사회의 혼란을 이유로 제6군단 포병여단,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해 청와대를 장악,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때 시청 앞 광장에선 장도영 중장 5월 20일, 박정희와 함께 중앙청 광장에서 장도영(張都暎, 1923년 1월 23일 ~ 2012년 8월 3일)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장면 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이었고, 5.16 군사 구테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지냈다.
1961년 군사쿠데타가 성공하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장관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6월 정변 주체세력에 의해 해임되고 8월 22일 중장으로 예편되었다.[7] 이후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때 장도영을 체포 연행한 대위가 노태우였다.
1963년 3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월 형집행면제로 풀려났다.
1961년 5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내각수반에 장도영(전 육군참모총장), 외무 김홍일(첫줄 왼쪽에서 네 번째), 내무 한신, 재무 백선진 등을 임명하는 등 혁명내각을 구성하고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를 하고 있다. 첫줄 가운데 양복차림을 한 이가 김동하
1961년 5월 29일 5.16 참여군인 위문공연 모습
1961년 12월 덕수궁 담장
군사정부 시절 도시미관 선진화라는 이름하에 덕수궁 돌담을 모두 허물고, 철책담장으로 바꾸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세종로 모형전시장
시민들에게 알기 쉽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세종로에 모형을 전시함
- 공보부에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모형 전시관을 서울 세종로에 설치, 시민에게 공개함
- 오재경 공보부장관이 송요찬 내각수반 및 내빈 관람자들에게 설명
- 1차 경제개발은 1962년에 시작해서 1966년도가 목표 연도임
- 제1차 산업, 농림, 수산
- 제2차 산업, 광업, 제조업, 건설업
- 제3차 산업, 전기, 운수, 보관, 통신, 주택, 서비스 등을 연차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계획
- 투자 총액수는 3조 2천억 환으로 개발에 착수
- 근대적 경제 발전의 토대가 만들어질 것임
한국의 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실상
- 경제개발 5개년계획 모델은 사실 장면내각에서
- 스탈린이 주도한 소비에트 경제개발 모델이 원조
1962년부터 1996년까지 1~7차에 걸쳐 수립된 경제개발5개년 계획
1.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
2.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7-1971)
3.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72-1976)
4.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77-1981)
5. 제5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84-1986)
6. 제6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1987-1991)
7. 제7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1992-1996)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1962~66 주요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농업 생산력 증대 ②전력·석탄 등의 에너지 공급원 확충 ③기간산업 확충과 사회간접자본 충족 ④유휴자원 활용 ⑤수출증대로 국제수지 개선 ⑥기술진흥 등. 정유·비료·화학·전기기계 등의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초기에 투자재원을 확보하지 못해 난관에 부닥쳤으나, 한일회담의 타결과 경제개방화 조치로 일본자본을 비롯한 외국자본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고도성장의 궤도에 올라서게 되었다. 외자의존도가 60%에 이르는 가운데 당초 목표치인 7.1%를 웃도는 연평균 8.5%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했으며, 1인당 GNP는 83달러에서 123달러로 높아졌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1967~71 중점목표는 다음과 같다. ①식량자급·산림녹화·수산개발 ②화학·철강·기계공업 건설에 의한 공업고도화 및 공업생산배가 ③7억 달러 수출 달성 ④가족계획 추진에 의한 인구억제 ⑤국민소득 증대 ⑥인적자원 개발.
이 기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목표치 7%를 훨씬 상회하는 10.5%에 이르렀으나, 곡물수입은 4천만 달러에서 2억 7천만 달러로 급증했고, 외자도입의 증가와 국제수지의 만성적 적자라는 문제를 안게 되었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1972~76 고도성장 및 중화학공업화를 목표로 추진되었으나, 71년 8월의 <닉슨 쇼크>에 의한 국제통화질서의 붕괴, 73년 10월의 제1차 석유파동 등으로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외자도입과 수출드라이브정책, 중동건설 붐으로 고비를 넘겨 연평균 11%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했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1977~81 성장·형평·능률의 기조하에 자력성장구조 확립, 사회개발을 통한 형평 증진, 기술혁신, 능률향상을 목표로 내세웠다. 77년에는 1백억 달러 수출달성, 1인당 GNP 944달러가 되었지만, 78년에는 물가고와 부동산투기·생활필수품 부족 등 고도성장정책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79년의 제2차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80년에는 사회적 불안과 흉작이 겹쳐 마이너스 성장에까지 이르렀다가 81년부터 점차 회복세를 보여 7.1%의 실질성장을 기록했다.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
1982~86 안정·능률·균형의 이념 아래 ①경제안정기반 정착과 국민생활의 안정에 의한 경쟁력 강화 ②고용기회의 확대에 의한 소득증대 ③소득계층간·지역간 균형발전에 의한 국민복지 증진에 목표를 두었다. 그 구체적 발전전략으로 ①10% 이내의 물가안정을 위한 구조적 인플레 요인 대폭 정비 ②7~8%의 지속적 성장을 위한 투자효율 극대화 및 저축증대 ③경쟁 촉진을 통한 시장기능 활성화 ④수출 주도전략 지속 및 대외개방정책 적극화 ⑤비교우위산업 육성 ⑥국토의 균형개발 및 환경보전 ⑦국민의 기본수요 충족 및 사회개발 적극추진을 내세웠다.
1963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표
1966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표
1962년 3.1절 기념식을 끝내고 김두한, 박정희 의장 기념촬영
박정희(朴正熙, 1917.11.14. ~ 1979.10.26.), 김두한(金斗漢, 1918.5.15. ~ 1972.11.21.)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貨幣改革 currency reform)
화폐개혁본부가 설치되어 있는 한국은행에 헌병들이 경비하고 있다.
1962년 6월 10일을 기하여 화폐개혁이 단행되었다. 이는 해방 후 두 번째였다. 종전의 ‘환’ 통화를 10분의 1로 바꾸어 ‘원’단위로 한 개혁이었다.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부정축재와 음성적으로 축적된 자금의 투기화를 막고, 악성 인플레를 방지하기 위해 통화 개혁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서울과 각 시(市)에 예입신고(預入申告)
1962년 6월10일 자정부터 실시됐던 긴급통화조치법에 의해 50환권 이하의 주화를 제외한 일체의 구화는 유통이 금지되었다. 9일 밤 10시 정각 ‘화폐 개혁’ 단행의 중대 발표가 있은 뒤의 서울 시내 일반 상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
화폐 개혁’ 발표 후 포목점에서는 값을 깎자고 들지도 않고 돈이 있는 대로 치마, 저고리감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샐러리맨들은 한 아름씩 과자꾸러미를 사들었다고 한다. 밤늦은 시각 종로와 을지로에서는 택시운전자들의 승차거부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시민들로 법석을 이루었다. 돈이 쓸데없어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천원권 지폐 발행
1975년 8월 14일 천 원짜리 새 지폐가 발행, 유통되었다. 한국은행은 경제 성장에 따른 화폐 수급 원활과 일반 국민의 거래 편의를 위해 현행 5천원 권과 5백원 권의 중간인 천원 권을 발행키로 한 것이었다. 당시 발행된 천원 권 지폐는 5천원권보다 작고 5백원 권보다는 컸으며 색깔은 암적자색으로 앞면에는 퇴계이황 초상과 무궁화, 뒷면에는 도산서원의 조감도가 들어있었다.
자취 감추는 ‘백 원 지폐’
1977년, 백원 권 지폐가 유통과정에서 완전히 퇴장되면서 최고 액면가의 2배인 2백원을 호가하는 고화로 대접받았다. 백원 권 지폐는 지난 1970년 11월 백원 권 주화가 나오면서 한국은행이 유통을 축소시켰고 지난 1973년 초부터는 발행을 중지했다.
화폐개혁
1차 - 1905년 - 한국 재정과 화폐를 일본 장악
2차 - 1950년 - 조선은행권圓→한국은행권圓
3차 - 1953년 – 원(圓)→환(圜), 100원(圓)=1환(圜)
4차 - 1962년 - 환→원, 10환=1원
1963년 5월 15일 제 5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와 6.8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김영삼, 김대중, 김두한, 차지철 후보의 선거 포스터
민주공화당 로고에서 황소 그림을 볼 수 있다.
박정희 16만 표 신승한 후 김형욱을 중정부장에 앉혀놓고 사실상 1인 통치 영구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박정희 후보의 포스터는 약력도 없이 깔끔하다. 포스터에는 “우리들과 그리고 귀여운 아들딸들이 좀 더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땀 흘려 일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반면에 윤보선 후보의 포스터는 약력과 신민당의 7개 공약이 빼곡히 적혀있다. 포스터에는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뿌리뽑자!!”라고 적혀있다. 문맹자가 많아 후보 기호를 작대기로 표시했다.
공화당은 파벌과 보스에 좌우되던 기존 정당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당이 국회의원을 장악하는 근대적 정당체제를 도입했다. 포스터를 비교해 보아도 훨씬 세련되다.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선거포스터 두 사람 모두 신민당의 총선 구호였던 ‘단일 야당 밀어주어 일당 독재 막아내자.’를 내걸었다.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은 부산 서구에서 출마했는데, 공화당 후보를 여유 있게 이기고 4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김대중은 전남 목포에서 출마했는데, 공화당이 전 체신부장관 김병삼의 지역구를 옮기면서까지 낙선전략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었다.
1964년 시청앞 한일협정반대운동(韓日協定反對運動)
6.3 사태(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전개된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한 야당, 지식인, 학생,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
한일협정반대운동은 1964년 3·24시위에서 6·3시위까지 이르는 한일회담반대운동과 1965년 8·27시위까지의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4년 박정희 정부는 ‘3월 타결, 5월 조인’으로 조기타결 방침을 굳게 세웠다.
박정희 정부는 8월 26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이후 김홍일 등 예비역 장성들이 구속되었고, 교수 21명이 ‘정치교수’로 학원에서 추방되었다.
또 학생 서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를 공식 해체시키고, 9월 25일 중앙정보부는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학생 11명을 구속 기소하고 6명을 수배했다. 이날 위수령이 해제되면서 한일협정반대운동은 종결되기에 이르렀다.
1967년 대통령 선거벽보
1967년 8월 17일
1967년 8월 17일 당시 중령이었던 손영길(오른쪽) 전 참모장이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이·취임식 후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와 기념촬영을 했다.
맨 왼쪽은 손씨 후임으로 30대대장을 맡은 전두환
손영길의 후임 제30대대장으로 육사 동기인 전두환, 김복동이 물망에 올랐으나 손영길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두환이 더 믿을 만하다”고 건의해 전두환으로 낙점됐다.
1968년 4월 27일 광화문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을 앞두고 광화문 4거리에서 인부들이 크레인을 이용해 기단 위로 동상 본체를 올리고 있다.
40여년前 제작참여자 찾아, 그동안 묻혔던 비화 밝혀
서울 광화문광장의 6.5m 높이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66년 점토로 본을 뜰 때만 해도 5m 높이로 계획됐었다. 하지만 동상이 들어설 세종로 폭이 100m로 확장되면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해 동상 규모를 키워라"라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와 동상 키는 갑자기 1.5m 더 커졌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동상을 만들던 고(故) 김세중 작가였다. 자택 마당에 각목과 비닐, 플라스틱을 이용해 가건물 형태로 만든 작업장은 5m 정도 높이였다. 김 작가는 작업장 플라스틱 천장을 뚫은 후 동상 얼굴과 투구를 조각해야 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제작 비화(秘話)가 40여년 만에 세상에 드러났다. 1966~68년 장군상 건립에 참여했던 사람들 육성을 통해서다. 서울시는 지난달 초 이순신 장군 동상 보수가 시급한 것으로 나타나자 동상 제작에 참여했거나 관련 내용을 아는 사람들을 애타게 수소문했다.
서울시는 "총 22건의 제보가 들어왔는데, 직접 참여했거나 가까이에서 목격한 7명과 자문회의를 열어 당시 작업 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68년 4월 인부들이 주물공장(당시 서울 성동구 성수동2가 소재)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을 조립하는 모습. 동상 몸체를 총 6조각으로 나눠 주조한 뒤 전기용접으로 이어 붙였다.
* 선박엔진·놋그릇 녹여 동상 만들어
"공장 앞마당에는 트럭으로 실어 온 포탄껍질, 놋그릇, 고물상 수집품 등이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아버지께서는 몇날 며칠을 밤새도록 불을 지펴 쇳물을 만드셨는데, 가끔 탄피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어요."
동상 주조를 담당했던 '대광공업사'(당시 성수동2가 소재) 대표 길광춘씨의 딸 길희숙(56)씨는 "작업 당시 이순신 장군 동상 머리 부분이 너무 얇게 나타나 주물을 한 번 더 부었는데도 김종필씨가 한 번 더 부으라고 지시해 세 번을 붓게 됐다."고 말했다.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구리도 구하기 어려웠다. 대광공업사에서 주조 기술자로 일했던 김주남(65)씨와 류용규(63)씨는 "처음에는 국방부에서 가져온 탄피를 사용하려 했다."며 "그러나 주물(융해된 금속을 틀 속에 넣고 응고시키는 일)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자 탄피는 모두 버리고, 해체된 선박에서 나온 엔진·놋그릇·놋숟가락 같은 일반 고철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마저도 모자라 재료가 조달되는 대로 여러 번에 걸쳐 작업을 해야 했다. 류씨는 "그래서 동상의 재질과 두께가 고르지 못했고, 색상 또한 균일하지 않아 청동 고유의 색을 내지 못했다."며 "옛날 동상 같은 분위기를 내려고 짙은 청록색의 페인트와 동분(동가루)을 섞어 표면을 칠했다."고 말했다.
* "8t 동상, 떨어뜨리면 큰일 난다."
2년간 작업 끝에 동상이 완성되자 1968년 4월 27일 광화문사거리에서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하지만 높이 6.5m, 무게 8t의 동상을 세우는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화일전력 소속 크레인 기사였던 이기종(72)씨는 경기 가평군 청평댐에서 작업 중 회사로부터 "내일 아침 광화문사거리로 크레인을 긴급 출동시키라."라는 연락을 받았다.
바로 작업을 중단한 이씨는 새벽 4시 청평에서 크레인을 끌고 출발해 오전 10시 광화문사거리에 도착했다. 이때 사용된 크레인은 일본에서 수입한 최신 장비로 이순신 장군 동상을 들어 올릴 수 있었던 국내 유일의 크레인이었다.
이씨는 "동상을 들어 올릴 때는 사고를 막기 위해 대낮인데도 세종로의 모든 전차 운행을 금지했다."고 말했다. 동상 제작 전반을 감독한 한교택(80)씨는 "동상 제작 비용은 당시 돈으로 약 1780만원 정도였다."고 말했다.
1968년 11월 21일 주민등록증 교부
전국에서 처음, 제1호 발급이었다.
110101-100001. 육영수씨는 110101-200002. 정일권 국무총리도 이틀 뒤 서울 성동구 충현동에서 주민등록번호 110405-100001을 부여받는다.
스스로 주민번호 ‘유출’한 박정희
당시 숫자 12개로 이뤄진 주민등록번호는 생년월일이 들어가도록 1975년에 일제 갱신된 지금의 13자리 주민등록번호와 구성 방식이 달랐다. 앞쪽 6자리는 지역번호, 뒤쪽 6자리에는 성별 1자리, 개인 일련번호 5자리가 부여됐다.
2006년 7월12일치 <중앙일보>에 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주민등록번호가 그대로 노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날 한나라당 새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가 열렸는데, 투표를 위해 신분을 확인하는 박근혜 후보의 주민등록번호 520202-2××××××가 투표장 컴퓨터 모니터에 떴다. 사진기자가 이 장면을 찍었고, 모자이크 처리 없이 신문지면에 그대로 실렸다.
아버지와 딸의 주민등록번호 모두 신문에 실렸지만 세상은 바뀌었다. 아버지 박정희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스스로 공표하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번호 하나로 관리되는 세상이 왔음을 알렸다면, 38년 뒤 그 딸은 아버지 시대가 주조해낸 주민등록번호 유출에 당혹해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주민등록증을 위조하거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할 간 큰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는 인구 동태 파악, 신원 확인과 간첩 색출을 위해 주로 쓰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에서 건당 30원에 주민등록번호가 팔리는 세상도 아니었고, 도용당하면 나도 모르는 통장이 개설되거나 돈이 빠져나가는 세상도 아니었다.
1354년(고려 공민왕 3년) 호패(號牌, 戶牌)
1950년 도민증(道民證)
1962년 5월 10일 주민등록증(住民登錄證)
호패는 조선시대에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닌 패를 가리키는데, 기원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 들어온 것은 1354년(공민왕 3년)으로, 이때는 전 백성에게 발급한 것이 아니라 수·육군정(水陸軍丁)에 한하여 실시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호적법의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
『속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2품 이상은 아패(牙牌), 3품 이하 잡과 합격자는 각패(角牌), 생원·진사는 황양목패(黃楊木牌), 잡직·서얼·서리는 소목방패(小木方牌), 공천·사천의 경우는 대목방패(大木方牌)를 사용했다. 이 제도는 1627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6·25전쟁이 시작된 1950년에 긴급 실시된 도민증(道民證)이 있었다. 이 도민증은 주민등록증이 의무 발급된 1968년 5월까지 사용되었다. 북한 무장간첩 김신조 등이 서울에 침입한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간첩 등을 쉽게 식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했다.
1962년 5월 10일 ‘주민등록법’을 시행하게 되어 한국국민은 주민등록을 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주민등록증 발급이 의무 사항이 아니었고, 1968년 5월부터 새 주민등록법에 따라 12자리의 주민등록번호가 생겨나면서 전국에 확대 실시되었다.
1971년 04월 11일 지하철 착공식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 벽보
1969년 6월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3선출마를 위한 개헌 움직임이 진행되자 이를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시작되고, 7월 17일에는 '3선개헌 반대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개헌안은 9월 14일 새벽 민주공화당 소속 의원만이 모인 가운데 국회 제3별관에서 변칙 통과되었고, 10월 17일 국민투표로 가결됨으로써 박정희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다시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선거 방식은 국민이 직접 선거에 참여해 최다수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직접선거 방식을 채택하였다.
후보자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신민당의 김대중(金大中), 국민당의 박기출(朴己出), 자민당의 이종윤(李鍾潤), 정의당의 진복기(陳福基) 등 5명이 출마하였다.
선거인명부에 등재된 유권자 수는 총 1555만 2236명으로, 이 가운데 1241만 7824명(투표율 79.8%)이 투표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 날의 대통령선거는 무엇보다도 3선개헌을 통해 출마한 박정희 후보와 당내 경선을 통해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세대교체 바람을 몰고 온 김대중 후보의 대결로 국민의 관심이 모아졌다.
선거 결과 634만 2828표(득표율 53.2%)를 얻은 박정희 후보가 539만 5900표(득표율 45.2%)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 이듬해 유신체제의 출범과 함께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 밖에 12만 2914표를 얻은 진복기가 3위, 4만 3753표를 얻은 박기출이 4위, 1만 7823표를 얻은 이종윤이 5위를 차지하였고, 무효가 49만 4598표, 기권이 309만 2500표였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서울 유세(장충동)
전국득표수
지역득표수
1972년 10월 17일 10월유신
1972년 박정희 10월 유신 발표
유신헌법 국민투표일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특별선언이 예고됐다. 국민들은 TV와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박정희 대통령은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우리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아들여…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 입니다." 라고 연설을 시작했다.
이날 대통령 특별선언은 헌법을 중단하고 비상국무회의가 헌법을 대신하는 비상조취를 취한다는 것과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금지한다는 충격적인 내용 이었다.
즉각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언론과 방송, 출판은 사전 검열이 시작되었다. 세종로 국회의사당 앞에는 탱크가 진주해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았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시킬 권한이 없었는데 국회를 해산한' 헌법 파괴가'가 자행된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헌정질서가 바뀌면서 제3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제4공화국이 들어섰다.
이승만은 재선을 위해 발췌개헌을 했고, 3선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했다. 그 과정에서 국회의원을 가두고, 절차도 거치지 않고 기립표결이라는 편법을 동원했다.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헌법적 비상조치, 10월유신에 따른 유신헌법의 채택으로
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 선거 및 최고 의결기관으로 설치되었고,
② 직선제이던 대통령선거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간선제로 바뀌었으며,
③ 대통령 임기가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되었고,
④ 국회의원 정수(定數)의 1/3을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일괄 선출하고,
⑤ 국회의원의 임기를 6년과 3년의 이원제(二元制)로 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의원은 3년으로 하였으며,
⑥ 국회의 연간 개회일수를 150일 이내로 제한하고,
⑦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없앴으며,
⑧ 지방의회를 폐지하고,
⑨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로 확정되고, 국회의원의 발의로 된 헌법개정안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의결함으로써 확정되도록 이원화하였다.
그 밖에도 1972년 10월 17일의 비상조치와 그에 따른 대통령의 특별선언을 제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헌법에 못 박았다.
이상과 같이 국민의 판단과 비판, 선택권을 원천 봉쇄한 독재체제였다. 그리하여 체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자는 국민상호감시제를 통해 색출하여 엄단하는 초유의 독재체제를 실행하였다.
1972년 유신헌법 국민투표
1972년 11월22일 경향신문
1972년 유신헌법 홍보문구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 공포
1973년 국군의 날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선거 투표
1974년 8월 15일 8.15 기념식장
1974년 8웡 15일 8.15 기념식장에서 피격당하는 육영수
육영수 피살사건의 진상
74년 8월 15일, 당시 내무부 치안국 부국장이었던 이건개 전 의원은 서울 이태원의 친척집에서 TV로 광복절 기념식을 지켜보다 총성 소리가 나자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후 이 부국장은 육여사 피살 사건 합동수사본부 부본부장으로 역사적 사건의 수사에 관여했다.
“현장에 도착하니 시경국장 치안국장 등은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관중을 다 내보낸 상태에서 총알을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세광이 쏜 첫 번째 탄두가 보이지 않아 이것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나는 혹시 하는 생각에서 범인이 앉았던 좌석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첫 번째 탄두는 의자다리에 박혀 있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육여사가 어떻게 총에 맞아 절명했는지를 규명하려 했지만 방송사 VTR을 구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녹화테이프를 모조리 수거해갔기 때문이었다.
이건개 부본부장은 합수부를 대표해 박종규 실장을 찾아가 녹화테이프를 요청했다. 그리고 왜 경호실장이 문세광을 쏘지 않았느냐고 직설적으로 묻자 박 실장이 이렇게 대답했다.
“갑자기 그 놈이 달려 나오며 총을 쏘기에 나도 총을 뽑으려는데 그때 내 오른손에 프로그램이 들여 있었단 말이야. 이걸 왼손으로 옮겨 잡고 총을 뽐내며 연단으로 튀어나갔지. 그런데 난데없이 눈이 부셔 앞이 안 보이는 거요. 천장에 달려 있던 조명 때문이었소. 조명을 피하려고 옆걸음을 쳤는데 그게 그만 영부인 쪽이었던 거요. 놈이 그런 나를 보며 갈긴 총알이 그만…”
당시 이 본부장은 녹화테이프를 수사관계자들과 함께 초저속으로 25회 반복해서 봤다.
“문세광은 무대 앞으로 달려 나오는 경호실장을 의식해서 4탄을 발사했는데 경호실장이 육여사 앞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총알은 육여사의 두부를 관통하고 만 것이다. 초저속으로 보면 문세광이 쏜 총탄이 영부인에게 맞는 장면이 나온다. 영부인이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은 누가 뛰어나오는지 보려고 그런 것이다. 비디오테이프를 자세히 보면 문세광이 절뚝거리면서 뛰어나오는 게 보인다.”
이건개 부본부장은 당시 극장 통로 변에 경찰이 앉아 있었는데도 이들이 범인을 제지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문세광의 이동경로에는 경찰관 36명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경호실이 행사 전 경찰에게 ‘우리가 다 할 테니까 우리의 지시가 있을 때만 움직여라.’고 명령을 내렸다. 때문에 경찰은 꼼짝도 앉고 있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1975년 10월 유신 3주년 기념식(시민회관 별관)
1976년 박정희 대통령 경호팀과 기념촬영
차지철 경호실장(오른쪽 끝) 전두환 작전차장보(오른쪽 두 번째)
‘윤필용 장군 쿠데타 음모사건’ (1973년 3월)의 최대 수혜자는 전두환 장군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윤필용 사건 이후 청와대 권력지형에 변화가 왔고, 그것이 전두환에게 이어졌다.
전두환은 1976년 3월 제1공수여단장을 마치고 바로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발탁돼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된 후, 1977년 소장으로 진급하고 1978년 1월 제1사단장에 부임한다. 그리고 1년 2개월 만인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이어 10·26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중심으로 한 ‘음모와 암투’의 중심에 선다.
윤필용 사건 당시 청와대 핵심 권력자들은 대통령비서실장 김정렴, 경호실장 박종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보안사령관 강창성 장군 등이었다. 사건 이후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후임에는 진종채 장군, 강창성 보안사령관 후임에는 김종환 장군이 보직됐다.
그해 12월에는 김대중(DJ) 납치 사건으로 이후락 중정부장이 해임되고, 검사 출신 신직수 부장이 임명됐다. 다음 해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피격돼 서거하면서 박종규는 물러나고 5·16 혁명에 가담한 공수부대 출신 차지철 의원이 경호실장에 보직된다. 1975년은 윤필용, 손영길 장군 등이 안양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로 출감하는 등 조용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1976년 신직수 중정부장이 해임되고, 후임에 김재규 부장이 보직되자 청와대 주변 정보·보안 분야 권력자들 중 대통령을 수시로 면담하고 보고할 수 있는 ‘문고리 권력’ 서열이 바뀌게 된다.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문고리 권력은 1위 비서실장, 2위 중앙정보부장, 3위 경호실장, 4위 보안사령관 순이었다. 그런데 1974년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면서 이런 구도가 바뀌고, 서열 3위 경호실장이 1위로 올라섰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이 말기에 들어선 1976년12월 경호실장 차지철은 군 장성들을 경호실에 거느리면서 위상을 과시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박정희의 사망을 10.26 사건이 발생한 후 불과 3시간 만에 포착했다. 엄청난 사건이 불의에 터진 상황에서도 전두환은 치밀하고 냉철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으로부터 '박정희 사망'을 카폰으로 보고받자마자 사령부로 들어가 상황 파악을 했으나 정보가 매우 제한돼 있었다. 11시경 육군본부 보안부대로부터 국방부 회의실에 국무위원들이 모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는 국방부로 향했다.
당시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와 함께 가장 조직적인 위기관리 촉각을 키워 준 집단이 보안사였다. 그 보안사 수장으로서 우연찮은 기회를 잡은 덕도 있지만 정치장교 전두환의 정세파악 후각은 남달랐다.
그는 이미 5.16쿠데타 당시 국내 여론층과 미국의 반대 태도를 바꾸는데 결정적 단서가 된 육사생도의 지지행진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쿠데타에 반대 입장이던 육사교장 강영훈을 박정희에게 밀고해 구금시킨 뒤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이 가능해졌다.
그런 공으로 대위 전두환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비서실 요원으로 들어간다. 이어 중앙정보부 창설과 함께 그 인사과장으로 파견됐다. 전두환은 30대의 젊은 장교 때 이렇게 5.16쿠데타 속에서 훈련받은 정치장교였다. 전두환이 초급장교 때부터 5.16쿠데타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이때 육사 11기 전두환과 함께 하나회의 창설자들인 노태우는 방첩대 내사과장으로, 그리고 박정희가 사단장 때부터 전속부관인 손영길은 최고회의의장 비서관으로 일했다.
박정희는 1963년 이른바 민정이양으로 군복을 벗고 정치권에 본격 들어가기 직전인 62년 12월, 전두환에게 국회의원 출마 준비를 주문했다. 이때 5.16쿠데타 주체세력 중 차지철 대위도 군복을 벗고 경기 이천에서 출마해 당선된다. 그러나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지역기반이 약하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사양했다.
"각하, 군에도 충성스런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정희는 전두환의 이 말에 머릿속에서 번득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 군부 내에 측근 친위대가 필요하지… 박정희는 더 이상 전두환에게 일찍 정치권에 들어갈 것을 권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전두환은 박정희의 군내 친위대로 본격 육성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의 행보는 그 때 박정희에게 했던 말 "군내에 남아 있어야 할 충성스런 친위대"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충성의 대상인 보스 박정희 피격에 대한 법치적 사법처리를 훨씬 넘어선 징벌과 보복 성격이었음이 드러난다.
1977년 등화관제(燈火管制) 훈련
학도호국단 교련(敎鍊)
교련교육의 모체는 1949년 자유당 정권이 학원통제와 학생 동원을 위해 만든 학도호국단이었다. 그리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해 폐지되었다
1968년 1.21 김신조사태를 거치면서 현역병들은 군생활이 자동으로 최대 6개월 연장되었고, 학생들에게도 군사교육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1969년부터 고교 필수 과목으로 부활한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 징발 및 훈련이 교련 과목의 모체에 해당되며 전후에도 유사시에 고등학생들이 병력으로 변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과목이다. 때문에 교련 교사는 다른 과목과는 달리 전현직 위관급 장교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1975년에는 학도호국단이 부활하였다. 1989년부터 제5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서서히 폐지수순을 밟으면서 1994년부터 구급법으로 대체되고 이후 선택과목으로 변하다 2007년까지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및 대학교에 재학중인 일반 학생들에게 실시된 군사관련 교육 훈련 과목이다.
대학교 교련
문무대(文武臺)와 전방입소 훈련. 훈련을 받는 육군학생군사학교의 별칭이 문무대였던 탓에, 대학 교련이란 말보다 문무대 훈련이란 말로 더 유명하다.
대학교에서도 3학점으로 비슷했으며, 1970년대엔 군필자 포함, 이후엔 군 입대 예정자에 한해 필수과목이었다.
즉 신체검사에서 제2국민역이나 면제 판정을 받았다든지, 여자라든지, 이미 군대 갔다 왔다든지 하는 경우는 교련 이수 대상자가 아니었다. 대학교 때 교련수업에 참여하지 않아 교련학점을 이수하지 못하면, 강제 입영되기도 했다.
운동권 학생들은 교련을 독재정권의 학생통제수단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거부하다가 단체로 강제 입영된 경우도 많았다
문무대나 전방입소 훈련을 받는 학생들을 위로하기 위해 대학교 총장이 해당 육군 부대를 방문하곤 했다. 특히 지거국(지역거점국립대학) 총장의 경우 사단본부에 4성기가 게양되고, 군악대는 장성에 대한 경례를 육군 4성장군에 맞게 연주했다.
4성장군처럼, 대학교 총장은 사단장의 영접을 받으며 의장대를 사열했다. 대학교 총장이 아니라 참모총장인 듯 지방 거점 국립대 및 종합 국립대 총장의 의전은 무려 장관급, 즉 군인에 대응하면 실제 대장 계급에 상당하기에 저런 대접을 한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하는 1학년 남학생들은, 성남에 있는 육군학생중앙군사학교에 70년대에는 9박 10일, 80년대에는 5박 6일 동안 소집되어 군사 훈련을 받았다. 입소하는 남학생들을 위해서 여학생들이 초콜릿, 사탕, 담배 등을 선물로 주곤 했다. 교련복을 입고 입소하여, 군복으로 갈아입고 얼차려부터 시작해 짧은 기간 내에 유격, 총검술, 화생방 등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일과시간이 무척 빡빡했다.
대학교 2학년 남학생들이 전방의 육군 부대로 5박6일간 입영하여 군사훈련을 받는 제도. 1988년을 마지막으로 없어졌다.
1973년 4월 26일 교련 교육의 시범(경기여고생)
1970년대 여학생 군사훈련
1973년 4월 26일 고교생 교련 교육 행사
1975년 화생방 훈련받는 여고생들
1977년 충무공 탄신 기념 서울특별시 학도호국단 도보 행군
1980년대 총기분해와 조립중인 학생들
1980년대 문무대 집체훈련
1981년 교련
1983년 교련(문무대 입소한 대학생들)
1979년 10월 27일자 1면(동아일보)
1979년 박정희대통령 국장(세종로)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
12월 13일 낮 광화문에 주둔 중인 쿠데타군. 뒤로 중앙청이 보이고 경복궁 담장은 일제에 훼손된 채 그대로 남아있다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하나회의 멤버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등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이며,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1980년 5월 3일 고려대생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시위
1980년 5월15일
전국 대학생 10만여명이 서울역에 집결해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1980년 5월 14일 중앙대학교(흑석동)
1980년 서울의 봄
서울역 앞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 한명이 전경에게 끌려가고 있다.
1980년 10월27일 8차 개헌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연회를 즐기던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므로 해서 유신체제가 붕괴했지만 그해 12월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해 8월13일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자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전두환 정권은 10월27일 새 헌법을 공포하며 민주공화국을 자칭했지만 그 내용은 권위주의 헌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헌법 전문에서는 ‘4·19 의거’와 ‘5·16 혁명’을 삭제하고 ‘제5공화국’을 선언했다. 대통령 임기는 7년 단임으로 선거인단이 선출하는 간선제를 규정했다. 대통령의 국회해산권과 비상조치권은 약간의 제한을 뒀지만 그대로 유지했다. 국회의 국정조사권을 명시하고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제의 근거를 규정했다.
“유구한 민족사, 빛나는 문화, 그리고 평화애호의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한 제5민주공화국의 출발에 즈음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1960년 6월 15일, 1962년 12월 26일과 1972년 12월 27일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전문)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인단에서 무기명투표로 선거한다.”(제39조1항)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제45조)
“국회의원의 선거구와 비례대표제 기타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제77조3항)
“국회는 특정한 국정사안에 관하여 조사할 수 있으며, 그에 직접 관련된 서류의 제출, 증인의 출석과 증언이나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 다만, 재판과 진행 중인 범죄수사·소추에 간섭할 수 없다.”(제97조)
1980년대 반정부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내 요소요소서 불심검문을 자주 행했다.
1980년 공수특전단(거여동 공교장)
1980년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발령된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사회정화정책의 일환으로 군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이며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 초기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례로 꼽힌다. 1980년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와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계엄포고령 13호' 발표에 이어 '삼청5호계획'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되었다. 폭력범과 사회풍토문란사범을 소탕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무자비한 인권탄압이 이루어졌다.
1981년 1월까지 총 6만 755명을 체포하고 보안사령부·중앙정보부·헌병대 요원과 검찰·경찰서·지역정화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A·B·C·D의 4등급으로 분류하여 A급 3252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고 B·C급 3만 9786명은 4주 교육 후 6개월 복역케 한 다음 2주 교육하여 훈계 방면하였으며, D급 1만 7717명은 경찰에서 훈계 방면하였다.
삼청교육대 순화교육은 연병장 둘레에 헌병이 집총 감시하는 가운데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가혹한 방법의 훈련을 감행하였다. 1988년 국회의 국방부 국정감사 발표에 의하면 삼청교육대 현장 사망자가 52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3백 97명, 정신장애 등 상해자 2천 6백 78명이 발생하였음을 보고하였다.
12일 국방부에 따르면 보상을 신청한 삼청교육대 피해보상 대상자는 모두 3650명으로 이 가운데 기각자를 뺀 3518명이 421억 원을 보상받았다. 1인당 평균 1150만원을 보상 받은 셈이다. 하지만 신청자들의 고령화와 소멸시효로 인해 보상을 받은 대상자는 2009년 226명, 2010년 17명, 2011년 8명, 2012년 2명으로 해마다 줄었다. 지난해에는 보상대상자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2004년 9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 국방부 산하에 관련 위원회를 설치하고 보상신청을 받았다. 삼청교육대에 입소한 대상자는 6만755명으로 입소우 가혹행위로 54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다.
과거사 보상대상자 가운데 군 첩보부대 소속 특수임무수행자들 수도 줄어들고 있다. 보상대상자는 2009년 1343명(보상금 1038억 원)이었지만 2010년 1028명(545억 원), 2011년 900명(438억 원), 2012년 653명(390억 원)으로 줄었다. 지난해에는 158명이 83억원을 보상받았다. 지금까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금액은 총 6899억 원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특수임무수행자 등 과거사 보상대상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며 "삼청교육 피해자의 경우 보상금 증액과 관련한 행정소송이 있어 추가적인 보상금을 위해 올해 예산 2억5000만원을 편성했다."고 말했다.
* 삼청교육대 생활수칙
1. 선동 및 도망치는 자는 사살한다.
2. 수련생은 교육대 요원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3. 음주 및 흡연은 금한다.
4. 신문, 잡지구독 및 라디오 TV 시청을 금한다.
5. 허가되지 않은 면회, 외출이나 외인접촉을 금한다.
6. 동료 간의 언쟁충돌, 기간 장병에 대한 반항자는 엄단한다.
7. 집단행위를 금한다.
1984년 전투경찰이 서울대에 진입하여 잔디밭에 배치되어 있는 모습
1980년대 한양대학교
1980년 김영삼 가택연금조치
1987년 6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김대중
김대중납치사건
1971년 한국 대통령선거의 야당후보자였던 정치가 김대중씨가, 1973년 8월 8일 한국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고 반정부운동을 전개하였던 야당총재 김대중씨가 투숙하고 있던 도쿄호텔에서 납치당하였다.
그 후 일본경찰의 수색과 관계자의 증언에 의해,
(1) 이 사건이 한국중앙정보부(KCIA : 현재의 국가정보원)의 행위라는 것,
(2) 김대중씨는 관서까지 자동차로 연행된 후 구금상태인 채로 배에 태워져 바다 속에 투기의 위험에 처하였을 때, 미국국적 비행기의 추격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 마침내 서울에서 석방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국정부는 책임의 소재를 확실히 하지 않은 채 일본정부에 사죄하고 정치적인 해결을 하였지만, 일본의 주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로서 국회 및 기타 공적인 수준에서도 또한 언론계에서도 오랫동안 비판을 받았다.
이른바 ‘유신체제’의 강화에 의해 정권의 장기집권을 노렸던 박정희 진영으로서는 김대중씨가 자유로운 상태에서 미국과 일본에서 반정부세력의 결집을 도모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었으며 특히 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일본에서 민주한국 반정부를 수립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김대중씨는 그 후 오랫동안 자택감금을 당하였으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98년에는 건국이래 최초로 50년 만에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 되었다.
6월항쟁 六月抗爭(1987년 6월 10일 ~ 6·29선언)
1987년 6월 10일부터 6·29선언이 있기까지 약 20일 동안 계속된 민주화시위.
198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4·13호헌조치」발표 후, 그해 6월 10일을 정점으로 20여 일 동안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중항쟁이자 민주화운동.
87년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이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 이양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종교계 및 재야 각 단체에서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이 잇따라 발표되는 등 비난여론이 빗발치는 가운데, 새로 창당된 통일민주당은 재야와의 공동투쟁을 위한 연계를 모색, 5월 27일 범야권 연합조직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발족시켰다.
한편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대표하여 김승훈(金勝勳) 신부가 발표한 성명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축소>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확산되자 국본은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 규탄대회를 민주헌법 쟁취투쟁과 결합시켰다.
6만여 경찰병력을 투입한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18개 도시에서 일제히 일어난 이날 시위에 차량행렬은 경적을 울려 호응했고 연도의 시민들은 박수로 격려했다.
시청 1개소, 파출소 15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2개소 등 21개소의 공공시설물이 파손되고, 경찰 708명, 일반인 30명의 부상자(경찰 집계)를 내며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는 밤 10시부터 6월항쟁의 <태풍의 눈>이 된 <명동성당 점거농성>으로 이어졌다.
15일 해산때까지 닷새 동안 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성당 밖에서는 연일 대학생들과 이들에 합세한 인근 사무직 노동자들의 지원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한편 6월 9일 교내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李韓烈, 20살, 경영학과 2년)이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하자, 12일 연세대생들의 <살인적 최루탄 난사에 대한 범연세인 규탄대회>를 시발로 전국 각 도시로 최루탄발사 규탄시위가 확산되었고, 국본은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 최루탄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전국 14개 도시에서 20여 만 명이 시위에 참가한 이날 서울에서는 전경이 무장해제당하고 남대문 경찰서가 돌과 화염병세례를 받았으며, 부산에서는 서면에서 부산역에 이르는 약 4km의 간선도로가 시위대에 의해 약 6시간 동안 장악됐다.
19일과 20일에는 시위의 중심이 광주·순천 등지로 옮겨져 이 지역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는 한편, 시위구호도 <호헌철폐> 등에서 <독재타도> <민주쟁취> <군부독재 지원하는 미국은 물러가라> 등으로 격화되면서 군 투입설이 나도는 가운데 20일 국본은 성명을 발표, △4·13조치 철회 △6·10대회 구속자 및 양심수 석방 △집회시위 및 언론자유 보장 △최루탄 사용중지 등 4개항을 요구, 이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할 것을 밝혔다.
24일 전두환과 김영삼 민주당총재의 여야 영수회담이 결렬되자 26일 국본은 평화대행진을 강행,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읍 지역에서 1백여 만 명이 시위에 참가,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다.
6월항쟁 중 최대 규모인 이날의 시위는 집권세력으로 하여금 <6·29선언>을 발표, 직선제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케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무직 노동자 등 중산층이 대거 참여, 국민전체가 정권에 등을 돌렸음을 보여준 6월항쟁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뜨거워져온 국민의 민주화 열기가 폭발한 사건으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종말을 가져왔다.
1988년 5월 26일
농민들이 쇠고기 수입 조치에 항의 하는 시위를 벌이던중 풀어 놓은 소한마리가 농민의 마음을 대변하듯 국회로 발걸음을 향하고 있다.
1988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만난 3金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과 3金 모임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
1961년 오리온 다방의 모습
1961년 길거리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빈민들
1960년 초반의 왕십리
정도(定都) 600년의 역사와 함께 유서 깊은 곳이다. 경원선 기차가 지나가고, 시내 각처로 나가는 전차가 다녔으며, 서울을 동서로 횡단하는 왕십리길이 있었기에 교통이 편한 왕십리에 서민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다.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 초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까지 와서 도선대사의 변신인 늙은 농부로부터 10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하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곳은 도성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답십리・왕십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왕십리 일대는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하여 조선 500년간 한성부에 속하였다. 왕심리(往審里) 왕심리(往尋里) 왕심리(旺深里)왕십리벌이라고도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임금이 되고 나서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풍수지리에 능한 무학대사에게 이 일을 맡겼다. 대사는 신령스런 산으로 알려진 계룡산 주변을 새 도읍지로 생각했으나 큰 나라의 도읍지로는 부족한 듯 싶어서 발길을 다시 북쪽으로 돌렸다.
한강을 건너 현재의 서울 땅에 당도하니 나라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터였다. 무학대사는 감탄을 하면서 그곳을 궁궐터로 잡으려 했다.
무학대사가 잡은 터는 지금의 왕십리 근처였다. 그런데 한 노인이 소를 몰고 대사의 앞을 지나가며 소를 꾸짖었다.
“이놈의 소가 미련하기는 꼭 무학이 같구나. 왜 바른 길로 가지 않고 굽은 길로 들어서느냐?”
순간 무학대사의 머리가 띵해졌어. 대사는 느끼는 게 있어서 얼른 소를 몰고 가는 노인을 붙잡았어.
“노인장, 지금 소더러 뭐라고 하셨습니까?”
“미련하기가 꼭 무학이 같다고 했소.”
“무슨 말씀이신지요?”
“요즘 무학이 놈이 새 도읍지를 찾아다니는 모양인데, 좋은 곳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찌 미련하다고 하지 않겠소.”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공손히 절을 올리며 다시 물었다.
“제가 바로 무학이옵니다. 제 눈으로는 이곳이 한 나라의 도읍지로 최상인 듯한데,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겠습니까?”
“이곳으로부터 서북쪽으로 10리를 더 가시오.”
무학대사는 노인의 말에 따라 10리를 더 갔어. 가서 보니 과연 명당이었다. 대사는 노인이 점지해 준 곳을 조선의 임금이 거처할 궁궐터로 정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으니, 그곳이 지금의 경복궁 터. 그리고 무학이 노인을 만났던 곳을 10리를 더 가라고 일러준 곳이라 하여 이때부터 ‘왕십리(往十里)’라 불렸다.
1962년 노고산동 버스종점
1963년 개량된 부엌
1963년 2월 3일 개량된 입식 부엌
싱크대와 식탁, 식탁 위 라디오, 법랑냄비, 연탄아궁이와 무쇠 솟, 석유난로
1960년대 어느 교수의 논문에 게재된 입식 부엌의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솥단지가 두 개 걸려 있다. 또 솥단지 뒤로 둥근 배관시설이 보인다. 배관은 바로 연기가 빠지는 굴뚝이다. 입식 부엌이지만 연탄을 연료로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가스 연료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양옥이나 아파트를 지어도 연탄 화덕을 집안에 둬야 했다. 그래도 허리춤 높이의 입식 요리대에서 음식을 만들어 바로 옆에 있는 식탁으로 옮겨 상을 차리는 것만으로도 사진 속의 주방은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전통적인 한국식 주택은 방과 부엌이 분리돼 있었다. 부엌은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부엌을 방 안에 둘 수가 없었다. 솥을 걸어 놓은 아궁이에 땔나무나 연탄으로 불을 때어 밥도 짓고 화기가 구들을 통과해 방을 덥혀 주었다.
솥과 그릇, 찬장, 화덕 같은 취사도구와 요리도구들은 별도의 부엌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상도 그곳에서 차려졌다. 부엌에서 차린 상을 들고 나와 마당과 마루를 지나 방안으로 옮기는 일은 번거롭기 그지없었다.
특히 부엌의 화덕과 부뚜막의 높이는 어른 무릎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여성들은 구부정한 자세로 일해야 했다.
1960년대에 현대식 주택과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주방 문화에도 변화가 생겼다. 방과 거실, 부엌이 같은 공간에 있게 된 것이다. 화장실도 주방 옆에 있는 서양식 주거문화가 서서히 자리 잡게 되었다.
1963년 원조에 의한 아동 급식
1963년 삼양라면(三養拉麵)
1963년 바구니를 이고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1963년 11월 11일 남산
1964년 판잣집 철거 후 한남동
1960년 9월 신도교역의 복사기(미우만백화점 1층 복사기 전시장)
복사기 첫 등장. 1960년 8월 미우만 백화점 1층 전시장 우상기 사장이 일본의 복사기를 들여와 전시하였는데 당시 집 한 채 가격
1964년 12월 한국 최초의 복사기 ricopy 555 신도교역(신도리코)는 현재와 같이 일반 복사용지가 아니라 감광지를 사용하였다.
1964년 12월 한국 최초의 복사기(ricopy 555, 신도교역, 신도리코)
현재와 같이 일반 복사용지가 아니라 감광지를 사용
1964년 1월, 신도리코는 국산 청사진 복사기용 특수 감광지 개발에 성공했으며, 이후 1964년 12월, 신도리코는 국내 최초의 복사기 Ricopy 555 개발에 성공한다.
개발된 복사기는 저렴한 가격으로 성능은 수입품과 나란히 할 정도로 할 만큼 훌륭한 제품이었다고 합니다. Ricopy 555 출시는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신도리코는 급격하게 사세를 확장하기 시작.
그 결과 성동구 하왕십리에 공장을 증설하게 되었으며 1966년 208%, 1967년 171%의 매출 성장을 지속하게 된다.
1960년대 전화상
전화는 수요가 증가하는 만큼 보급이 따라주지 못했다. 한 동네에 전화가 한 대밖에 없는 곳도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같이 썼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전화 신청이 밀려 백색전화 한 대 값이 250만 원대까지 치솟기도 했다.
집 한 채 값을 웃도는 금액이었다. 백색전화는 투기의 대상이었다. 백색전화는 소유할 수 있어서 사고 팔 수 있는 전화를 말한다.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아 양도할 수 없는 전화는 청색전화라 불렀다. 백색과 청색은 전화기 색깔이 아니라 가입 대장 명부의 색깔이었다.
1962년 공중전화
1926년에 처음으로 전화국·우체국의 구내에 설치되었으나, 그후 전화의 수요증가에 따라 가두·점포 등의 이용도가 높은 곳에는 옥내외를 가리지 않고 널리 설치되어, 1994년 현재 전국에 약 29만 대가 보급되었다.
1962년 서울시내에 공중전화 '박스'가 등장했다. 개인 관리인 없이 체신부가 직접 관리하는 무인 전화 '박스'는 시민들이 5원짜리 동전만 넣으면 거리의 소음을 피해 혼자 조용히 통화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 모인 동전은 각 관할 전화국에서 매일 두 번씩 거두어 갔다.
1970년대 공중전화
1963년 9월 14일 전화 교환원
1967년 전화국에서 근무 중인 전화교환원
1970년대와 그 이전에는 수동식 전화기가 주로 쓰였다. 수동식에는 자석식과 공전식이 있다. 모두 교환원이 필요하다. 자석식은 전화기에 붙은 핸들을 돌리면 교환원이 나오고 전화번호를 말하면 교환원이 연결해 준다. 공전식은 전화기를 들기만 하면 교환원이 나온다. 교환원은 '교환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교환원은 가입자가 번호를 말하면 받는 사람의 전화로 연결해 준다. 사진은 1967년 3월 전화국에서 근무하던 교환원들의 모습이다. 이런 수동식 전화 연결은 전화 가입자가 적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60년에 전화 가입자는 8만 6600여명에 불과했다. 서울에서는 겨우 몇 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자동전화도 부분적으로 개통됐는데, 1960년 2월 24일 서울 영등포 전화국에서 자동전화가 개통될 때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했다. 당시 이 전화국에 총 42명의 전화교환원이 근무했다고 한다.
1964년 자동차전화(car phone)
Motorola IMTS MJ 전화기 최초 출시, 1964년 모토로라 최초의 다이얼식 카폰이자 국내 최초도입 다이얼식 카폰
1984년 5월 셀룰러 방식 카폰 상용서비스가 개시됐을 당시 카폰을 생산하는 곳은 금성전기, 대영전기, 현대전자, 동양정밀공업 등 4곳이었으며, 대체적으로 국산화율이 20% 수준에 불과해 사실상 수입 완제품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단말기 가격은 평균 300만원 수준이었고, 여기에 88만5천원의 설비비와 각 2~3만 원 정도의 채권, 장치비, 면허세, 제 신청료 등을 더하면 총 410만원은 들여야 카폰 사용자가 될 수 있었다.
당시 포니2 자동차 가격이 400만 원대였음을 감안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었다.
일반 가입전화나 다른 자동차간의 통화가 가능한 공중전화이다. 택시나 자가용차 등에서 특정인이 특정목적으로 특정국과의 사이에 사용되는 무선전화와는 구별된다. 즉, 공중무선전화와 자가무선전화의 구별이다. 통화방법은 동일한 무선전화이기 때문에 동질적이다. 다만 그 소속 또는 용도가 다를 뿐이다. 다이얼에 의해 자유롭게 상대에게 접속할 수 있도록 자동식 교환기에 연결되어 있다.
무선주파수는 150∼400㎒의 전파가 사용되고 있다. 송수신의 병행을 위하여 복수의 주파수가 배당되고 있어, 전화하고자 할 경우에는 어느 하나의 주파수를 택일하고, 통화 중에는 그 주파수를 전용하기 때문에 타국 또는 다른 전화와 혼신되는 일이 없다. 또 다른 사람이 통신을 수신하지 못하도록 비화(秘話)장치를 첨가할 수 있다.
한국 자동차전화 의 역사
1960년 장관 등 20명의 고위관료 차량에 한국최초의 MTS(Mobile Telephone Sevice)방식 카폰(1way, 25w, VHF송수신기) 설치(서울지역 서비스), 1967년 제작된 모토로라 카폰(MOCOM-70)이라며 아래 사진을 싣고 차량에 탑재하던 이동 무선 송수신장치로 국내 최초로 도입된 카폰이다.
1961년 8월 15일 인천, 의정부 등 경기도 일부지역까지 카폰 이용지역 확대 개통,
가입이동차량용 1way(단향) 25w VHF 송수신기 20대를 우선 정부각료의 차량에 설치하고 선택호출장치는 서울중앙전화국에 설치하였다. 이로써 차량 통행 중에도 가입자 상호간, 혹은 일반가입자와의 통화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멀리 인천, 의정부 등지에 있는 가입자와도 원활한 통화를 할 수 있는 가입이동무선전화업무가 1961년 8월 15일에 개통되었다.
1965년 언론기관 등 일반기업체 가입자 포함한 총 가입자 수가 78명에 이르렀다.
* 초기 차량이동전화 이용방식: 최초에는 통화자가 교대로 말하는 단방향시스템이었으나 차츰 양방향 시스템으로 개선되었고, 차량 간, 차량과 일반유선전화 간 통화가 가능했으나 항상 교환원을 통하여 연결되는 수동식 채택.
1973년(1968년?) 기계식(자동식, 다이얼식) IMTS(Improved Mobile Telephone Sevice)방식 카폰 도입,
1975년에 NMRS(New Mobile Radio System)방식 카폰 도입,
1976년 반전자식 IMTS방식(다이얼식) 카폰 340여대 도입(당시 프리미엄 1천만 원)
* 1984년 버튼식(전전자식) 셀룰러 카폰이 출시되기 전까지 이용.
1984년 버튼식(전자식) 카폰 도입
1984년 3월, 한국통신의 자회사인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동년 5월부터 AMPS(Advanced Mobile Phone Service) 셀룰러 시스템이 도입되어 차량전화 서비스를 개시함으로써 실질적인 이동전화(카폰)의 대중화가 시작되었음(1985년 카폰 가입자 수 2,659명).
* 이때 4개 국내회사(금성전기-NEC, 현대전자-노바텔, 동양정밀-EF존슨, 대영전자-모토로라)에서는 외국회사와의 기술제휴로 버튼식 카폰을 생산(부품국산화율 20%미만) 또는 수입하여 시판하기 시작하였으며 수개월 늦게 삼성반도체통신(도시바제휴)도 합류하여 5강 체제를 이룸.
1986년 최초 국산카폰 출시(삼성반도체통신 SC-1000)
1988년부터 국내에서 휴대폰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무선이동통신 무게의 추가 카폰에서 휴대폰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여 1991년도에 휴대폰 가입자 수가 카폰 가입자 수를 앞서게 됨.
*이때만 해도 카폰과 휴대폰의 판매경쟁이 치열하였으나 이후 카폰이 밀렸고 1999년도에 카폰서비스가 종료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짐.
1960년대 중반 유명했던 아리랑 라디오
휴대용으로 나온 ARIRANG 라디오는 유명세를 탔으나 금성 Goldstar 상표에 밀려 결국은 1970년 초 사라지고 말았다. 뒤에는 ARIRANG LTD, CO라는 회사명이 또렷하다.
1965년 눈표냉장고(GR-120, 금성사)
1965년에는 국산 최초 냉장고가 등장했다. 금성사가 만든 120리터짜리 '눈표 냉장고'(금성GR-120)가 그 주인공이다. 이 제품은 냉장고와 냉동실이 함께 붙어 있는 1도어 일체형 디자인이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내에선 일부 부유층만 고가의 수입 냉장고를 사용하고 있었다. 대부분 냉장고가 없는 가정에선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채워 음식을 보관했다.
냉장고가 보편화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이다. 1970년대 금성사가 2도어 냉장고를 출시해 인기를 끌자 삼성전자도 냉장고 출시에 박차를 가했다. 관련 기술은 점차 발전해 1981년에는 3도어, 1986년에는 5도어 냉장고까지 등장했다.
1966년 한국 최초의 흑백 TV(VD-191, 금성사, 현 LG)
한국 최초의 흑백 TV 수상기가 등장한 것은 1954년 7월 30일 미국 RCA 사 한국 대리점에서 20인치 화면의 폐쇄횔 TV 수상기를 일반 시민에게 공개하면서였다고 한다.
국영 TV가 개국하기 이전이었으니 당시에는 TV 수상기를 보는 것 자체가 진귀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1961년 12월 국영KBS 개국, 미국, 일본에서 수입된 TV만 유통, 1962년 정부는 TV수상기 보급을 확대해 경제개발계획을 홍보한다는 계획 아래 금성사에 TV생산을 권고.
출시 전 언론의 반발, 당시 외환유입에 따른 환율상승과 좋지 못한 전력사정으로 TV생산에 대한 국내 여론은 최악이었다.
정부의 권고를 받은 금성사는 1963년 일본 히타치제작소에 기술연수팀을 파견하고 생산시설을 도입하는 등 TV생산 계획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후 1965년 말 'TV부품 도입에 소요되는 외화는 라디오를 수출해 벌어들인 달러를 활용한다.'는 조건으로 부품수입 허가를 얻어내게 되었다.
1966년8월, 마침내 국내 최초의 흑백TV 'VD-191' 500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모델명 VD-191는 ‘진공관 형식의 19인치 1호 TV’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인치(48cm)짜리 사이즈의 흑백TV이며 당시 6만원 (쌀27가마)의 가격이다. 제품 가격이 당시 제조업 생산직 근로자의 1년 연봉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한다.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공개추첨을 통해 판매할 정도였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시장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금성사는 월1500대로 생산량을 늘렸고, 1966년 말까지 1만대를 생산했다. 당시 국내 TV보급대수가 10만대였으나, 단 5개월 만에 금성TV가 전체보급대수의 10%를 차지하게 된다.
문화재청에서는 우리나라 전자산업 기술 분야에서 가치가 큰 유물로 인정하여 2013년 8월 27일 문화재로 등록하였다. 우리 관 소장 금성 라디오 A-501은 등록문화재 559-2호, 금성 텔레비전 VD-191은 등록문화재 561-2호로 각각 등록되었다.
금성사와 삼성전자의 경쟁 시작
이 무렵 정부는 전자공업을 수출 전략사업으로 중점 육성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게 되고, 삼성전자는 1970년 일본의 산요와 합작으로 흑백TV를 생산하게 된다.
1972년에는 독자적으로 흑백TV생산에 성공하였으며, 1975년 예열이 필요 없는 '이코노TV'를 시장에 내놔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이때 삼성전자와 금성사(현LG전자의 전신)의 경쟁 구도가 구축되었다. 당시 외국에서 부품을 수입하며, 힘겹게 만들기 시작했던 두 회사가 지금은 세계의 TV시장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두 회사가 되었다.
1968년 한국 최초 에어컨(GA-111, 금성사)
한국 최초 에어컨은 금성사가 1968년 선보인 창문형 에어컨 '금성GA-111'이다. 이 제품은 정부의 수입대체와 외화 절약 계획에 따라 개발된 것이 특징이다.
당시 수입에만 의존했던 에어컨 시장에 처음으로 국산 제품을 내세웠다. 다만 높은 가격 때문에 일반 가정보다는 호텔이나 백화점 등에 주로 설치됐다.
1969년 백조 세탁기(WP-181, 금성사)
금성사가 국내 최초 2조 수통식 세탁기 '금성WP-181'을 생산했다. 제품은 알루미늄으로 제작, 세탁과 탈수 용량은 1.8㎏, 4단 수위 선택 스위치와 스프링식 타이머 등이 부착되었는데, 2조식 수동 세탁기이다.
2조식 수동 세탁기는 세탁하는 통과 탈수하는 통이 분리되어 있어서 세탁한 세탁물을 탈수통으로 옮겨서 탈수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생산 초기에는 보급이 저조했지만 197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세탁기는 기능이 매우 단순해서 세탁보다는 주로 ‘탈수’기로서의 역할이 더 컸고, 세탁기와 별도로 탈수기라는 제품이 나오기도 했는데, 보통의 가정에는 이 탈수기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WP-181은 처음 1500대를 생산할 계획이었으나 수요를 감안해 500대를 우선 생산하기로 하고 1차로 195대를 생산했다. 그러나 고형 비누를 사용하는 데 익숙한 소비자 생활 습관과 세탁기를 사치품으로 여기는 시대 분위기 때문에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생산을 일시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소비자 생활 패턴을 크게 변화시킬 대표적 가전제품이었지만 초기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은 세탁기 보급률 70%였으며 한국은 세탁기를 사치품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출시 첫해 생산대수는 195대, 가격이 5만 3000원으로 당시 대기업 대졸사원 초봉이 월 2만원이었다.
결국 생산을 중단하였다가 1971년 "빨래는 시간낭비입니다."라는 신문광고를 내세우며 생산을 재개했다. 2kg 용량으로 시트 5장과 와이셔츠 10장을 세탁한다고 선전했다. 1974년 생산량 2만대를 넘어서면서 세탁기 시장이 커졌다.
1971년에 다시 용량 2㎏짜리 모델 ‘WP-2005’를 개발, 그 해 49대를 생산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생산량과 성능을 높여갔고 1972년 10월 2일에는 일본 히타치제작소와 전기세탁기 생산을 위한 기술 제휴를 하고 1973년 5000대를 생산한 후 1975년 이후에는 매년 2만대씩 증산할 계획을 추진했다고 한다.
소비자 인식도 점차 바뀌어서 금성사는 1974년에 생산량 2만대를 넘어서며 본격적으로 세탁기 시장을 창출해 나갔고 1976년에는 수출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반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사용한시기는 1974년도 이후로 봐야 되겠다.
금성사 백조 외에 무지개 대한전선, 은하 삼성전자, 백구 신일산업, 비너스 한일전기 등의 세탁기가 시장에 나온 것도 그 즈음이다.
원시적인 형태의 세탁기는 1691년 영국의 특허자료에 남아 있으며, 전기 모터가 달린 큰 드럼통이었던 최초의 전기세탁기는 1908년 미국의 알바 피셔라는 발명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잦은 고장과 소음으로 대중화되기 어려웠던 최초의 전기세탁기는 1911년에 되어서야 판매할 수 있었으며, 그 후 본격적으로 세탁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국내에서는 1969년 금성사(현 LG전자)에서 최초로 세탁기를 생산하였으며, 1974년에 삼성전자도 세탁기 사업을 시작하였다.
1980년 중반 경제의 고도성장과 이에 따른 도시화의 결과로 핵가족화가 진행되었으며, 아파트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여성의 사회진출 또한 활발히 일어났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은 국내 세탁기 산업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바쁜 현대생활에서 밀려 있는 빨래를 몰아서 세탁하기 위해 세탁기의 대형화를 가져왔다. 국내 세탁기 산업이 성장하면서 LG전자는 1983년 100만 대 생산을 기록하였다.
1990년대 맞벌이, 독신자 및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 증가는 코스별 맞춤 세탁, 다양한 옷감의 세탁기능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특성화된 세탁기가 본격적으로 출시된다. 대우전자의 “공기방울 세탁기”, 금성사의 “통돌이 세탁기” 등 혁신적인 제품들이 많이 출시되었다.
LG전자는 1983년 100맨대, 1990년 500만대를 기록한 데 이어 1996년에 국내 최초 세탁기 생산 1000만 대를 기록하였다.
1970년 삼성최초의 흑백 TV(SS-H313, 삼성산요전기, 현 삼성전자)
1970년 6월 2일 금산위성통신지구국 개통
금산위성통신지구국은 1970년 완공된 한국 최초의 위성지구국이다.
금산위성통신지구국의 건립으로 국제통신위성기구의 공식 가입국이 되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미국은 물론 홍콩, 대만 등 태평양 연안 7개국과 자유롭게 국제전화를 이용할 수 있게 됨은 물론 TV 생중계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1965년 중국집 식사 가격표
1965년 중국집 식사 가격표
1965년 - 짜장면 35원, 커피 35원, 곰탕 60원
1974년 – 짜장면, 우동, 짬뽕 100원
1974년 - 일반빵 10원
1974년 - 비락우유 70원
1975년 - 비락우유 100원
1970년 중반 - 삼양라면 20원
1975년 - 버스 35원!
1976년 - 쭈주바 30원
1976년 - 택시 기본요금 200원
1967년 살찌는 약 광고
1966년 빙수기계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韓日會談, 1951-1965)
한일회담(韓日會談)은 1951년부터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또는 한일협정)이 타결되기까지 14년간 총 7차례에 걸쳐 있었던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일련의 협정을 말한다.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한일회담(韓日會談) 주요일지
△ 제1차 한일회담(1952.2.15.∼4.25.)
- 한국 측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항' 제시
- 일본 측의 대한 일본인 재산청구권 주장으로 결렬
△ 제2차 한일회담(1953.4.15.∼7.23.)
- 독도 문제 및 평화선 문제에 대한 양측 이견 노출
- 한국전쟁 휴전 후 제네바회담 개최 등에 따라 휴회
△ 제3차 한일회담(1953.10.6.∼10.21.)
- 어업(평화선)문제 및 청구권문제를 둘러싸고 대립 계속
-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타 망언(10.15.)으로 회의 결렬
△ 중단기(1953.10.∼1958.4.)
- 한일 간의 심한 감정 대립으로 회담 중단
△ 제4차 한일회담(1958.4.15.∼1960.4.15.)
- 기시 내각 출범에 따라 회담이 재개됐지만 지지부진
- 회담 재개 및 휴회를 거듭, 1960년 4.19 민주혁명으로 중단
△ 제5차 한일회담(1960.10.25.∼1961.5.15.)
- 한일 양국, 장면·이케다 내각 출범으로 회담 재개
- 청구권에 대한 법리적 논쟁 탈피, 실질적 진전을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 미미
- 1961년 5.16 쿠데타 발생으로 중단
△ 제6차 한일회담(1961.10.20..∼1964.4.)
- 양국 간 이해 및 동북아 안보환경 변화로 국교정상화 시급
- 1961.10.20. 본회의 개최
- 1961.11.22.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케다 회담, 조속한 시일 내 국교정상화 합의
- 1962.10.20. 김종필·오히라 메모(무상 3억, 유상 2억, 상업차관 1억불 이상)
- 1964.4. 한국 내 한일회담 중단요구 시위격화로 회담 중단
△ 제7차 한일회담(1964.12.3∼1965.6.22)
- 1965.2.20. 기본관계 조약 가조인 및 양국 외상 공동성명 발표
- 1965.6.22. 기본관계 조약 및 청구권 협정 등 4개 협정 서명
- 1965.8.14. 국회비준(찬성 100, 기권 1, 야당 보이콧)
- 1965.11.12. 일본 중의원 비준
- 1965.12.11. 일본 참의원 비준
- 1965.12.18. 비준서 교환(서울) 및 협정 발표
1966년 5월 서울도시계획 기본계획 수립
1966년부터 만 4년 재임한 ‘불도저 시장’ 김현옥은 ‘돌격 건설’의 기치 아래 서울의 모습을 탈바꿈시켰다. 강변로, 청계고가 등 수많은 도로, 지하도와 육교를 건설했고 세운상가를 만들었다.
또한 땅콩 밭 여의도를 개발하고 곳곳에 시민아파트를 지었다. 그 과정에서 빈민 주거지를 대규모로 철거, 이전하기도 했다. 1970년 와우아파트의 붕괴로 그는 물러났지만, 이때 시작된 ‘개발열풍’은 1980년대까지 지속된다.
1966년 6월 김현옥과 박경리
1966년 6월 조선일보가 마련한 대담 에서 김현옥(왼쪽) 시장과 소설가 박경리가 서울시 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 달 만에 서울시장이 경질되고 불도저가 입경(入京)했다. 불도저가 기자회견을 가졌다.
"서울이 온통 판잣집이다. 14만5000채다. 교통도 문제다. 교통난을 광복절까지 31% 완화하도록 하겠다."
서울공화국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독립문과 마포, 동쪽으로는 돈암동과 청량리와 왕십리까지였다. 도로는 거기에서 끝났다. 광화문에서 국경을 넘어 갈현동까지 지프차로 반나절이 걸렸다. 전차(電車)는 시속 20㎞로 기어 다녔다.
그 좁은 영토에 자동차가 2만대를 넘었고 버스만 3000대에 육박했다. 농촌 사람들이 몰려든 서울에는 350만 명이 살았다. 6·25전쟁 때의 두 배가 넘었다. 청계천변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판잣집은 헐어도 헐어도 도깨비처럼 또 생겨났다. 많은 여자가 무작정 상경해 종묘 앞 공터 사창굴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종삼(鐘三)'이라 불렀다. 소설가 이호철이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다. 제목은 '서울은 만원이다'였다. 김현옥의 눈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불도저는 아현동에 고가도로를 만든 뒤 관철동에 31층짜리 빌딩을 짓고 광교에서 마장동까지 고가도로를 세웠다. 3·1빌딩과 3·1고가도로였다. 3·1은 일제 청산과 근대화를 상징했다. 고가도로는 1969년 3월 22일 개통됐다. 17개월 만에 완공된 이 도로를 불신한 미군이 이용 금지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개미마을의 잿빛 영토는 깨끗하게 사라졌다.
철거된 개미마을 사람들은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 시켰다. 세종로와 명동 지하도, 남대문시장 육교, 홍제동 도로 확장 공사는 4월 19일 착공해 10월 3일 개천절에 끝냈다. 육교는 짓기 쉽다고 광복절에 끝냈다. 지하도 6개, 육교 16개와 도로 5개의 건설 공사가 한날한시에 시작됐고 거의 동시에 끝났다. 공사판이 돼버린 서울을 두고 불만이 쏟아졌다. 김현옥이 말했다. "나는 모른다. 대통령한테 물어봐라." 아무도 묻지 않았다.
164일 만에 길이 154m, 높이 2.66m짜리 세종로 지하도가 완공됐다. 공약보다 사흘 이른 9월 30일이었다. 배우 김희갑과 최은희가 상량(上樑)을 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테이프를 끊었다. 이튿날 국군의날 퍼레이드가 그 위를 지나갔다. 물론 이후 수없이 땜질을 해대야 했지만.
종묘에서 필동까지 개미마을이 사라진 공터에는 세운상가가 올라갔다. 공사가 한창이던 1968년 9월 26일 오후였다. 예쁘장한 아가씨가 골목에서 걸어오더니 현장 점검을 나온 김현옥을 붙들었다. "아저씨, 놀다 가요."
다음 날 공무원과 사복 경찰들이 남자란 남자는 죄다 불러 세우고 검문을 해댔다. 직업이 뭐고 주소는 어디며 왜 왔고 몇 번째냐고. 명단 발표가 열흘을 가자 종삼은 사라졌다. 창녀 853명과 포주 111명, '삐끼' 170명이 종적을 감췄다. 사람들은 "역시 불도저"라고 했다. 두 달 뒤인 11월 30일 전차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종 황제 시절인 1899년 5월 17일 처음 종을 울린 지 69년 6개월 13일 만이었다.
1960년대 마포 당인리발전소
1969년 옛 강변3로 , 당인리 발전소
1960년대 잠실동
잠실, 신천지역은 한강의 범람원으로 발달했던 부리도(浮里島)에 위치했었다는 설과 자양동과 이어진 반도였다는 설이 있다.
잠실섬은 1930년대만 해도 온 섬에 뽕나무가 무성했으며 1945년 이후 채소밭(땅콩, 우엉, 청참외)으로 변했다가 1971년 잠실섬이 하안남쪽에 연육(連陸)되는 물막이 공사로 인해 육지로 변했다.
남서쪽으로 흘러오던 한강의 흐름이 오랜 세월에 걸친 홍수 때마다 약간씩 북서쪽으로 흐르게 됨으로써 생겨난 하중도(河中島)인 잠실섬의 남쪽 흐름을 막아 육지에 이어지게 하는 공사는 1970년 4월에 착수되었다.
100만평이 넘는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주축으로 그 주변 일대 440만평의 광역에 걸친 구획정리사업도 동시에 추진되었다.
이 잠실구획정리사업에서는
① 지구 북측의 공유수면 매립부분을 집단체비지로 하여 대한주택공사에 일괄 양도함으로써 대규모의 집단아파트를 건설케 한 점
② 공유수면 매립지구의 서단 약 13만평을 집단공원용지로 하여 이를 종합경기장 부지로 할애한 점(’88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은 이렇게 마련되었다.)
③ 남류하던 흐름을 폐쇄할 때 그 일부를 남겨 호수로 하였다는 점 등 지난날의 구획정리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담한 시책들이 시도되었다.
조선 초기에 양잠업을 장려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이곳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각종 문헌에 의하면 이 시대의 잠실은 민가의 것이 아니라 국립양잠소인 잠실도회를 뜻한다.
조선 말기까지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 신천리 및 잠실리였고, 1914년 고양군 독도면 잠실리로 바뀌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면서 잠실동으로 되었고, 1975년 강남구, 1979년 강동구를 거쳐 1988년 송파구 관할로 되었다
'송파 옛 사진전' 서울시사편찬위원회와 서울시역사박물관, 동네 향우회, 그리고 30여명의 주민들의 기증
1960년 논현동
1969년 논현동
1960년 신림동
1990년 신림동
1960년대 봉천동
1960년대 봉천동천막촌(奉天洞天幕村)
1960년대 수재민이 이주하여 천막집으로 시작하였다고 한다. 2, 3, 5, 6, 10동 일대
관악산 근처의 마을로서 산이 험하고 높아 마치 하늘을 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동 이름이 붙여졌다.
전래 지명이 많이 남아 있는데, 봉신동(奉新洞)은 1963년 봉천동과 신림동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했던 행정동으로서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낙성동(落星洞)은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라고 하여 낙성대를 세운 마을로서 탑골이라고도 불린다.
‘달동네’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됐는지에 대한 정설은 없다. 60∼70년대 신문에서 각종 개발 사업의 여파로 도심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나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이 달이 잘 보이는 산자락에 천막을 짓고 산다는 의미로 ‘달나라 천막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이 말이 1980년 TV 일일연속극 ‘달동네’가 방영된 이후부터 불량·불법 가옥이 몰려있는 산동네를 의미하는 대명사격으로 사용됐다.
청계천 주변, 청량리, 사당동, 봉천동, 행당동, 삼양동, 하월곡동, 상계동, 상도동 등 서울 곳곳에 자리 잡았던 달동네는 80∼90년대 이후 대부분 높은 ‘아파트 숲’으로 변하게 됐다.
1961년 봉천동 철거민 촌의 어린이들
취학년령이 되었지만 인근에 학교가 없어 입학하지 못하고 있다.
1969년 관악구(冠岳區)
1980년 봉천동
1960년대 송파 잠실
1961년 한강수영장
1970년대 한강 백사장
1961년 샛강 나루터(나룻배가 둥실 떠 가던 압구정동)
1962년 한남동(漢南洞) 나룻터
강남사는 주민이 나룻배로 서울에 출근
한남동(漢南洞) 나루터 강남 사는 주민이 나룻배로 서울에 출근한다.
멀리 보이는 산 관악산 옆 삼성산, 1969년 제 3한강교 개통으로 사라진 풍경
새말 나루터 - 강남구 신사동에 있던 나루터, 새말에서 한남동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자명으로 신사도선장이라고 하였다.
한강에는 일찍부터 광나루(廣津), 삼밭나루(三田渡), 서빙고나루(西氷庫津), 동작나루(銅雀津), 노들나루(露梁津), 삼개나루(麻浦津), 서강나루(西江津), 양화나루(楊花津) 등이 있었다.
특히 광나루·삼밭나루·동작나루·노들나루·양화나루는 한강의 5대 나루로 손꼽혀 일찍부터 각종 물품과 사람들의 집합장소로서 유명하였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오늘날 많은 다리들이 가설되면서 나루가 사라졌지만 가설된 다리의 위치가 대부분 조선시대 나루가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즉 광나루에는 광진교와 천호대교가, 삼밭나루에는 잠실대교가, 뚝섬나루에는 영동대교가, 두모포에는 동호대교가, 입석포에는 성수대교가, 한강나루에는 한남대교가, 서빙고나루에는 반포대교가, 동작나루에는 동작대교가, 흑석진에는 한강대교가, 노량진에는 한강철교가, 용산진에는 원효대교가, 마포나루에는 마포대교가, 서강나루에는 서강대교가, 양화나루에는 양화대교와 성산대교가, 공암나루에는 행주대교가 각각 가설되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강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우리말에서 '큰 물줄기'를 의미하는 '한가람'에서 비롯하였다. '한'이란, 큰, 정확한, 한창인, 같은을 뜻하는 접두사이며, 가람은 강의 옛 말이다. 즉 '큰 강'이라는 뜻이다.
한강은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대수(帶水)'라 불리었고, 광개토대왕비에는 '아리수(阿利水)'라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서는 '욱리하(郁利河)'라 불렀다. 한강의 명칭에 ‘漢’이라는 글자를 쓴 것은 중국 문화를 도입한 이후의 일이다. ‘아리’, 즉 ‘알’은 고대에 크다거나 신성하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한’도 이와 비슷한 뜻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北瀆)'이라 표기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강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시점은 백제가 중국의 동진과 교류하기 시작한 즈음인데, 그 때부터 ‘한수(漢水)’ 또는 '한강(漢江)'이라 불렀다 전해진다.
아리수, 욱리하, 이하, 왕봉하 등으로 불려왔다.
1967년 한남동(漢南洞) 나룻터
한남동과 강남 사이를 이어주던 유일한 수단인 나룻배. 강 건너 신사동, 반포동 일대에 미류나무가 보인다.
이 나룻배들은 한강에 1969년 12월 26일 제3한강교(현.한남대교)가 개통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1972년 서울시내 장마철 홍수(한남동)
1980년 나룻배(성북구)
1969년 제1한강교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와 동작구 본동을 연결하는 다리.
1917년에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도록 인도교로 건설된 교량이다. 현재는 차량과 사람이 모두 통행할 수 있으며, 서울 도심과 여의도 동부의 노량진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강대교는 1900년에 건설된 한강철교 이후 최초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인도교로 건설된 것이다. 이 때문에 개통 초기에는 제1한강교라고 불리었다. 1912년에 교량가설계획을 수립한 후 1917년 10월에 준공되었다.
1925년 7월의 을축년 대홍수로 중지도에서 용산 쪽으로 건설되었던 소교가 유실되었다. 1929년 9월에 소교를 재개통하였고 폭은 18m로 확장되었다. 너비 36.6m, 길이 841.5m이고 교량 중간에 중지도가 있는 한강상 최초의 도로교이다.
1900년 한강철교가 가설되고 17년 동안 인도교가 가설되지 않은 것은 당시의 도시 내 교통수단이 보행위주였으며 화물은 철도와 지게로서 운송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반도에 민간인의 영업차가 들어온 것이 1912년이었고 이때부터 다리가설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한편, 노량진의 본동 쪽 한강교는 종전대로 사용하다가 1934년 3개년 계획으로 공사비 251만 8,000원을 들여서 현재의 타이드아치(tied arch) 형식의 다리로 다시 1937년에 준공하였는데, 이 때 한 한국 다리 기술자가 감독으로 참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1950년 6·25동란으로 타이드아치 3경간이 파괴되었던 것이 1957년 1월에 복구공사를 착수하여 1958년 5월 15일에 준공되어 서울의 명물이었던 한강대교가 새로운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1981년 원래의 한강인도교 하류 쪽에 전과 동일한 6경간 타이드아치를, 그리고 거더교 구간에서 상류 측에 19경간의 판형교를 가설하여 교량을 완전히 2배로 확장하였는데, 이때부터 이름이 한강대교로 바뀌었다.
1969년 12월 26일 한남대교
한남동(漢南洞)과 강남구 신사동(新沙洞) 사이를 잇는 다리로 한강에서는 네 번째로 건설된 교량으로,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의 진입 관문 역할을 한다. 1966년 1월 19일 착공해 4년 만인 1969년 12월 25일 준공하였다.
경부고속도로와 서울의 도심을 잇는 또 하나의 관문인 제3한강교가 개통되어 교통난 해소와 70년대의 도로 수송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제일 넓은 교폭 27m, 6차선인 이 다리는 길이 915m, 공사비 11억, 연인원 20만 명이 투입된 매머드 공사의 산물이다.
시공은 현대건설(주), 설계는 동성기술단이 맡았고, 총 공사비는 11억 3300만 원이 들었다.
제3한강교와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강남 개발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쟁유사시 서울 시민들이 한강을 건너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한편 이 다리의 개통으로 수백 년 내려오던 한남나루터의 사공들은 벌이를 잃게 됐다.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 서울에서 부산까지 개통됨으로써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전 지역의 일일생활권시대로의 개막과 서울의 강남지역에 대규모 신시가지 개발시대를 열게 한 교량이다.
1970년 강남구 일대
1973년 반포아파트
반포동의 유래
조선조 말: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상반포리・하반포리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 서울시 영등포구 반포동
1973년 7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780호: 서울시 성동구 반포동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 서울시 강남구 반포동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북쪽: 북한산, 인왕산, 남산, 북서쪽: 동부이촌동, 남쪽: 반포천, 사당천(방배천)
1970년 삼성동과 잠실
1962년 마포아파트
아파트 단지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된 마포아파트
1961년 10월 16일 착공, 1962년 12월 1일 1차사업으로 Y형 주거동 6동 450호 완성, 판상형 주거동 4동 192호는 1964년 11월 30일 2차 사업으로 완성 총 10개동 642가구의 대단지 완공. 1991년 3월 28일 철거
아파트가 서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대였다. 일제는 회현동에 3층짜리 공동주택(미쿠니아파트)을 지은 데 이어 1932년 충정로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충정아파트(도요타아파트)를 지었다. 혜화동과 적선동 등에도 아파트가 선보였다. 주로 일본인 임대·거주용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8층짜리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이었으니 충정아파트는 당장 도시의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아파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 르 코르뷔지에가 주창한 미래주택 개념에 따른 획기적 건축물이었다.
이 아파트는 한때 호텔(트레머호텔, 코리아관광호텔)로 개조됐다가 다시 아파트(유림아파트)로 되돌아갔다.
1979년 충정로 8차선 확장으로 건물 절반이 뜯겨나가는 곡절을 겪었지만 살아남았다. 서울시는 지난해 충정아파트를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로 공인, ‘100년 후의 보물, 서울 속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정부 수립 이후 지어진 최초의 민간아파트는 1958년 중앙산업이 성북구 종암동에 세운 종암아파트였다.
17평짜리 4층 건물에 152가구가 살았다. 정식명칭은 ‘종암아파트먼트하우스’였지만 ‘종암아파트’로 줄여 부르면서 ‘아파트’라는 용어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잘나가는 기업인, 정치인, 예술가들이 입주했으며 최초의 옥내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부엌이 장안의 화제였다.
특히 양변기로 대변되는 화장실 문화의 대혁명을 알린 옥내 좌식화장실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은 변기에 앉아 일을 보는 해괴망측한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도입’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온돌이 깔린 침실이 현관이나 주방, 거실보다 한 단이 높은 특이한 구조였다. 1995년 종암선경아파트로 재건축됐다.
1962년 안양으로 이전한 마포형무소 자리에 대한주택공사가 최고급 마포아파트(도화동 삼성아파트)를 건립하자 서울의 모던보이와 모던걸 사이에 아파트는 일약 선망의 대상이 됐다.
입주 초기 연탄보일러 중독사고가 연발하고 부유층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아파트주변에 담장을 쌓아 외부와 격리시키는 ‘자폐적 공간’을 조성하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세계 유일의 ‘한국형 아파트 단지’의 모델등장이었다.
서울로의 ‘광적인’ 인구유입은 주택난을 부채질했다. 도심과 가까운 지역의 산비탈과 국공유지변 하천부지를 꽉 메운 토막집과 판잣집을 밀어내고 시민아파트를 지었다. 당시 지은 낙산 시민아파트 등 대부분 시민아파트는 경관훼손 사례로 낙인 찍혀 1990년대 철거 신세를 면치 못했다.
김현옥 시장(1966~70년 재임)이 주도한 시민아파트는 본래 철거민 수용용이었다. 시민아파트 1호는 천연동 금화아파트였다. 한 서울시 공무원이 해발 203m의 산꼭대기에 아파트를 짓는 이유를 묻자 김 시장은 “이 바보야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볼 것 아니냐?”라고 답했다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전해진다.
1968~69년에 지은 시민아파트는 어김없이 산허리 또는 산등성이에 지어졌다. 전시행정의 표본이었다. 그래서인지 경관 하나는 끝내주는 금화아파트는 아직도 살아남아 개발연대기의 암담함을 나타내는 영화촬영장으로 쓰인다.
1963년 만리동
만리재 언덕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촬영
1시 방향 서울역, 신문이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리 장독대, 우물 등을 덮으라는 사전방송을 했다.
서울역 뒤 서부역 서쪽에 있는 만리동 동명은 이곳에 있는 마포구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만리현(萬里峴) 고개 이름에서 유래되었는데, 만리재는 세종 때 문신 최만리(崔萬里)가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만리재 북쪽에는 봉황과 학이 내려와 도성을 바라보았다는 봉학산(鳳鶴山)이 있는데, 지금은 꼭대기까지 집들이 들어서 있다.
약현성당(藥峴聖堂: 사적 252)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물이다.
1972년 중림동
1980년 만리동
1966년 한양대 부근
1967년 이화여대앞 거리
1971년 이화여대앞 거리
1967년 불광동 국민주택촌
1967년 신촌로터리
1968년 개발 중인 여의도
1971년 9월 말 완공된 5·16 광장(현 여의도공원)
1970년 10월 말 "여의도 도면을 가지고 서울시장이 들어오라"는 청와대 지시가 내려왔다.
부랴부랴 달려간 양택식 시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여의도에 대광장을 만들라. 이른 시일 내에 계획을 세워 올리라."고 지시했다. 梁시장이 갖고 간 도면에 朴대통령은 직접 붉은 색연필로 구획선을 그었다. 길이 1.35㎞, 폭 2백80~3백15m로 12만평 규모였다. 전혀 안 팔리고 있긴 했으나 여의도 내 요지 12만평을 광장으로 만들라고 하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누구 명령인데 안 따를 수 있겠는가.
홍익대 박병주 교수에게 광장 설계를 부탁했다. 朴교수는 워싱턴의 스미소니언박물관 앞 광장을 참고해 화단과 녹지를 적절히 배치한 설계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설계안을 받은 청와대 측은 "다시 그려 올리라."고 지시했다. 일주일 뒤 올린 두 번째 설계안도 반려됐다.
또 다시 고친 설계안을 이번에는 梁시장이 직접 들고 朴대통령을 만났다. 설계 도면을 흘낏 본 朴대통령은 "이런 것이 아니고 포장만 해서 梁시장 이마처럼 훤한 광장을 만드시오."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결국 朴대통령은 녹지나 화단이 없는 아스팔트 포장의 광장을 원한 것이었다.
광장은 71년 2월 착공돼 그해 9월 말 준공됐다. 완공 일주일 전쯤에 광장의 정식 이름을 정해야 했다. 梁시장은 청와대로 들어가기 전에 내게 어떤 이름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민족의 광장'이나 '통일의 광장'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돌아온 梁시장은 힘없는 목소리로 "5.16 광장으로 하라고 하셨어."라고 말했다. 생각해 간 이름을 꺼내기도 전에 朴대통령이 광장 이름을 정했다고 했다.
손정목, 2003, 서울 도시 계획 이야기 2, 한울, pp.67-68.
1973년 여의도 국회의사당
여의도는 섬 아닌 섬이다.
한강은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를 지나며 서남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바꾼 뒤 동작대교 아래서부터 북서쪽으로 다시 휘돌아간다. 방향을 바꾼 한강은 노량진에서 양화대교 못 미친 곳까지 작은 샛강 길을 냈다.
한강 본류와 샛강이 만들어낸 섬이 바로 여의도다. 당초 여의도는 밤섬과 이어진 하나의 하중도(河中島)였다. 1960년대 말 밤섬을 폭파해 얻은 골재로 제방(윤중제)을 쌓으면서 두 개의 섬으로 나뉘었다.
여의도는 서울의 개발사(開發史)를 상징한다. 모래섬이었던 이곳은 1916년 일제가 비행장을 만든 뒤 1971년까지 프로펠러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 비행장을 철거하기 전인 1968년부터 시작된 한강종합개발 공사로 여의도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1967년 김종필 당시 국회의장(공화당)이 여의도를 국회의사당 신축부지로 발표했고 1975년 준공했다.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 대한민국 국회의 여의도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여의도는 한국 정치의 본산인 동시에 한국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가 들어서면서 금융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또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 본사가 세워져 지상파방송의 본산이 됐다.
1970년대 여의도(귀신바위와 샛강)
1960년대말 역삼동 항공사진
1966년 제1한강교 부근
1966년 뚝섬 빨래터(사진 홍순태)
서울 성동구 성수동(聖水洞), 광진구 자양동(紫陽洞) ·구의동(九宜洞) 일대, 한강 북안의 저지와 범람원 지역. 한강과 청계천이 만나는 지점에 발달된 범람지역
과거에 이곳은 전관평이라 했고, 강남 봉은사와 삼전도가 있는 수도산 쪽으로 건너는 나루터였으며, 마포로 내려가는 목재 등을 운반하는 배에서 세금을 받던 곳이다. 조선조부터 임금님이 사냥을 하고 무예를 검열했고, 주민들의 행락 장소로 노래와 춤을 즐기던 곳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이 섬에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낸 곳이라 하여 둑섬, 둑도라 불리었다.
이후 '뚝섬'으로 소리가 바뀌었다. '살곶이벌'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칩거하던 조선 태조가 서울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태종이 뚝섬에서 맞았는데, 태조는 태종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는 고사에 연유된 것이다.
1949년 서울로 편입되기 이전에는 한강의 하항(河港)과 근교농업지로 유명했으나 1940년대 후반부터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뚝섬까지 운행했던 전차는 왕십리 똥파리차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전차의 경유지였던 왕십리 들판에 각 가정의 화장실에서 수거해온 오물의 하치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차를 타면 천정에 파리떼가 새카맣게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시설이 좋지 않아 전차로 뚝섬까지 와서 강물에 나무판자를 띄워 만들어 놓은 세탁장에 수십 명이 둘러 앉아 세탁을 하고 대나무로 엮어 만든 빨래걸이에 널어 말린 다음 집으로 돌아갔다.
한강 수운의 쇠퇴로 뚝섬은 하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한강변은 유원지로 조성되었고, 1950년대 후반 이래 공장이 건설되면서 도시화가 가속되었으며,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대규모 주택단지와 상가도 형성되었다. 뚝섬지구의 도시화는 서울 동부 교외지역 도시화의 대표적인 경우로서 현재 뚝섬의 서부지구인 성수동은 서울의 대표적 공업지대의 하나이다.
반면에 동부지구인 자양동·구의동 일대에는 주택단지가 조성되었으며, 건국대학교와 세종대학교가 자리하고, 어린이대공원이 건설되어 서울 교외의 주택지 ·학원지구 및 녹지지대를 형성한다. 1989년까지는 이곳에 경마장이 있었다. 흔히 뚝섬이라 할 때는 뚝섬유원지와 성수동 공업지대에 한정하는 경우가 많다.
1968년 용산
1968년 중지도 유원지
강 건너 한강 노들나루(동작구 노량진의 조선시대 이름) 일대 모습
1969년 금호동
1970년대 강남개발 이전
굽어있는 경부고속도로 좌측이 잠원동, 반포동, 우측이 신사동, 신사동 위가 아파트 들어서기 전 압구정동(狎鷗亭洞), 제3한강교(1966년 1월 착공해 69년 12월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개통, 1984 한남대교로 개칭)
잠실(蠶室): 조선 시대에 양잠을 장려하고자 왕실 또는 관부가 시범소로서 특정한 지역에 설치한 누에치는 장소
서울 잠원동은 유명한 뽕밭이었다. 모래 토질이어서 무가 잘 자랐고, 그래서 단무지가 유명하던 동네였다.
압구정동은 배나무가 많던 과수원골이었고, 타워팰리스가 있는 지금의 도곡동은 도라지가 잘 자라던 곳이었다.
잠실 개발 당시에 잠실대교가 없어서 잠실에 가려면 광진교를 건너 천호동을 거쳐서 갔다.
1970년대 이전에 잠실일대에는 뽕나무가 가득했던 잠실도, 부리도, 무동도라는 섬들이 있었다.
지금의 석촌호수 일대는 당시 한강의 본류인 송파강이었으며 지금의 한강인 신천강이 있었는데 1971년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잠실 물막이 매립공사 시작하여 송파강 매립공사가 이루어지면서 3개의 섬은 사라졌고 매립이 덜된 곳은 석촌호수로 남게 되었다.
잠실을 개발할 때 흙과 모래가 부족하자 연탄재까지 동원해 강을 메우고 육지와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잠실섬을 육지로 만들면서 75만평의 부지가 생겨났다. 북쪽은 물속으로 신천강의 너비를 넓혀 지금의 행태가 만들어 졌고, 1973년 주변지역을 통합하여 340만평의 잠실아파트 단지 그리고 종합운동장이 만들어 지면서 지금의 잠실의 모습이 되었다.
잠실섬과 부리도(浮里島)또는 부래도(浮來島)는 한강에 있었던 섬이다. 옛날에는 강북이었으나, 조선시대 홍수로 신천강이 생겨 섬이 되었다.
행정구역상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와 신천리였으며, 현재의 서울 잠실에 해당한다. 한강의 범람이 자주 일어나 물에 잠기는 일이 빈번해 1970년대 잠실지구 종합개발 계획으로 인하여 육지가 되었다.
1970년 뉴타운 강남시대의 시작
영동은 강남구와 서초구 일대를 일컫는다. 1970년대 강남은 모래벌판, 고사원, 논밭과 낮은 야산으로 이루어진 전원풍경이었다.
이 지역개발은 1970년 경부고속도로와 제3한강교(한남대교) 개통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개발 당시에는 강남이라는 지명은 없었고 영동지구라 했다. 당시 강남은 영등포구와 성동구에 속해 있던 것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영동출장소로 출범했다. 영등포에서 '영'자와 성동구에서 '동'자를 따온 작명이었다.
정부는 1970년 11월. 제3한강교(한남대교) 준공에 맞추어 837만평에 달하는 영동지구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주거지역을 조성해 강북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인구분산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세금감면 등의 각종 특혜정책들이 이어졌다.
토지구획정리 사업은 결과적으로 땅값상승으로 부동산 투기 붐을 조성하였다. 1963년 땅값 수준(지수)을 100으로 했을 때 논현동은 13만, 압구정동 8만 9천, 신사동 10만이었다. 1980년 이지역 땅값은 1천배 가량 오른다.
이를 말죽거리 신화라고 불렀다.
영동지구 개발이 급속히 진행된 배경에는 70년대 서울시정의 최대 과제였던 '강북 인구집중 억제'정책이 있었다. 양택식 시장은 72년 초 "사치·낭비 풍조를 막고 도심 인구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종로·중·서대문구 등에 바·카바레·나이트클럽·술집(50평 이상)·다방·호텔·여관·터키탕 등 각종 유흥시설의 신규 허가는 물론 이전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종로·중구 전역, 용산·마포구 내 시가지 전역, 성북·성동구 내 일부 지역을 포함한 약 8백40만평을 '특정시설제한구역'으로 묶어버렸다. 이 같은 강북억제책은 거꾸로 강남개발촉진책이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도시의 기능이 변하기 시작했다. 강북의 바·카바레·술집 등이 가장 발 빠르게 강남으로 옮겨갔다. 규제도 없고 세금도 깎아주는 데다 주차도 편리한 신사·압구정·논현동 일대가 화려한 유흥가로 변했다.
정치적으로 북에서 언제 대공포를 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북의 대공포 사정거리가 미치지 않는 강남지역에 개발정책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1970년 11월 영동 1지구 472만 평, 2지구 365만 평에 대한 개발계획이 발표되었고 1973년 6월에는 영동지역 약 천만 평을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영동신시가지 개발사업
1963년 1월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광주, 시흥군에 속한 채소를 재배하는 한적한 농촌이었다.
1966년 1월 제3한강교 건설공사의 타당성 확보와 강남개발구상으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1967년 11월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확정하면서 고속도로부지 확보를 위한 영동1.2지구 구획정리사업(1지구는 서초구, 2지구는 강남구)를 시작했다.
1970년 11월 영동지구 신시가지 개발계획이 발표되었고, 1973년 6월에 서울 영동지구(950만평)을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하였다.
1970년 10월 양택식 서울시장이 영동지구 837만평 인구 60만을 수용하는 새시가지 개발을 발표.
1970년 11월 영동 1지구(472만평)와 2지구(365만평)에 개발을 통합하여 영동 신시가지 개발 사업이 착수
당시 영동은 영등포 동쪽에 있다하여 영동이라 불리었는데 뽕나무밭, 복숭아밭, 배받이었으며 시골과 야산들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강남일대 땅값은 평당 200원선으로 당시 파고다 담배 5갑 수준이었다.
정부는 강북지역 인구집중을 억제하고 강남을 분산하는 정책으로 경기고, 휘문고, 서울고, 숙명여고 등이 옮겨졌고, 그 결과 강남 8학군이 생겨나게 된다.
1974년 서초동 역삼동 논현동 주거지가 평당 3-4만 원선, 상업지는 평당 15만 원 선이었다.
1985년에는 서초 역삼 논현동 일대 주거지가 평당 300-500만 원 정도가 되었으며, 2000년 주거지 땅값은 평당 1000만 원대 상업지는 평당 3000만 원대 이상이 되기도 했다.
1971년 서초구 반포, 방배 일대
현재의 이수고가차도 위치에서 남쪽으로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이 현재 사당역 쪽 남태령이고, 서초구에는 반포천과 사당천(방배천)이라는 개천이 있었는데 작은 하천은 현재 복개된 방배천이다.
1972년 우면산에서 본 서초동 일대
서초동은 꽃시장이 있던 동네였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속했던 미군이나 주머니 사정이 괜찮았던 서울 부자들이 서초동 꽃시장에서 꽃을 사갔다.
1973년 구로공단
1975년 잠실과 송파일대
개발되기 이전의 황량한 잠실과 송파일대 사진으로 이 위치에 청담교가 건설되었으며, 멀리 보이는 건물이 잠실대운동장이 건설되기 전 잠실학생체육관이다.
1974년 판자촌(성산동)
서울 마포구 성산동 판잣집 주민들 피땀으로 푼돈 모아 대지 5천 평 마련
판자촌 주민들의 끈질긴 집념은 끝내 그들의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1976년 4월 17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산천변의 판자촌을 떠나는 주민들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비록 초라한 판잣집이었지만 10년을 살아온 옛집을 떠나는 아쉬움과 그토록 갈망했던 떳떳한 내 집 마련의 꿈이 실현된 감격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성산천변 무허가 판잣집 주민 250가구 1300여명이 마련한 새 보금자리는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신리 일대였다. 이들 판자촌 주민들이 이곳에 이주를 결심했던 것은 서울시로부터 철거 계고장을 받은 1975년 12월부터였다.
1965~66년 사이 삼남지방에서 물난리를 겪은 후 서울에 온 이농민이 대부분이었던 이들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성산천변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정착해 언젠가는 떳떳한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일념으로 1974년 8월 내 집 갖기 마을금고를 설치해 악착같이 저축을 해 결국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 11년 9월 망원정 북녘의 성산포에 석교를 만들되, 우선 판교를 만들게 하다. 세종 2년 3월 두 임금이 성산에서 사냥하고 곧 적산에 돌아와 머무르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성 10 리 안을 기술하는 내용에서 성산(城山)이 나온다. 『관동지도』, 『청구도』, 『대동여지도』에도 성산리가 표기되어 있다. 성산동은 옛 기록에 나오는 성산리에서 유래하였다. 성산리는 옛날 이 부근의 산들이 성처럼 둘러싸여 있으므로 성메 또는 성미로 부르던 것의 한자식 표기이다.
1974년 7월 서울 마포 인터체인지 너머로 보이는 여의도 모습
1976년 잠수교
강남지구의 개발촉진 및 유사시의 도강수단으로 준공된 잠수교가 서울에 내린 집중호우로 개통 이후 처음으로 침수되자 경찰은 잠수교의 차량통행을 금지시키고,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
1976년 현대고등학교 자리에서 촬영한 현대아파트(압구정동)
1970년대 한강개발 후 한강
1960년대 여의도와 밤섬은 물이 빠지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곳이었으며, 한강은 모래사장이 발달해 여름이면 직접 물에도 들어 갈 수 있었고, 조그마한 배를 띄우기도 했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러 개의 섬과 드넓은 백사장이 있었던 한강은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공유수면매립과 한강종합개발의 여파 속에 그 모습이 크게 바뀌고 말았다.
1970년대 초에는 한강주변이 어떠한 보수, 대책 장비도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 하천의 하류지역은 자유곡류하천으로, 범람이 잦은 지형이며, 이러한 하천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기, 즉 장마기간이 있는 여름에 범람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이다.
직선화, 보수화 과정에서 둑, 강바닥 등에 과도하게 콘크리트를 사용하였다.
1969년 3월 대한항공공사 인수식(김포공항)
1945년 트럭 한 대로 한진상사를 창업하고, 1956년 주한 미8군과 군수물자 수송계약을 체결하면서 기업을 키우기 시작했다.
한진그룹
한진(주)·대한항공(주)을 모기업으로 하는 대규모 기업집단이다.
1945년 조중훈이 한진상사(韓進商事)로 발족하여 화물운송업을 하다가, 1956년 주한미군과 화물수송계약을 체결하면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58년 한진상사(주)로 법인전환 설립등기를 마쳤고, 1969년 대한항공을 정부로부터 인수하여 항공운송에 진출하였다. 이후 운송업·건설업·금융업·레저업·여행알선업 등에 진출하여 급성장하였다.
1994년 한진지리정보(주)를 설립하였고 1995년 거양해운(주)을 인수하였다. 1998년에는 (주)한진관광과 (주)KAL개발을 (주)한진관광으로 합병하였고, 1999년 한진건설(주)과 한진종합건설(주)이 한진중공업(주)에 흡수합병되었다. 2000년 한진해운(주)이 자회사인 (주)싸이버로지텍을 설립하였으며, 2001년 (주)항공종합서비스와 (주)칼호텔네트워크를 계열회사에 추가하였다.
주요 사업은 관광사업, 전세여객자동차·화물자동차·버스·여객·자동차운송사업, 수출입업, 외국상사 대리점 및 외국항공표 판매대리업, 창고업 및 항만하역업, 양곡하역 및 보관업, 해외용역, 해상화물운송업·선박대여업, 항공화물운송 대리점업, 자동차 및 그 부품 판매업 등이다.
계열회사로는 (주)한진을 비롯해 (주)대한항공·한국공항(주)·(주)진에어·(주)한진해운·한진관광(주)·(주)항공종합서비스·(주)칼호텔네트워크(주)·정석기업(주)·한진정보통신(주)·토파스여행정보(주)·한국글로발로지스틱스시스템·(주)싸이버로지텍·(주)싸이버스카이·유니컨버스(주)·(주)한일레저·정석학원·인하학원·21세기 한국연구재단 등이 있다.
1969년 전국 남녀 타자 경진대회
1970년대 전국 고교 주산부기대회에 참가 중인 여고생들
1970년 분식집
1970년 비닐 물총 주스(오렌지)
1970년 남산야외음악당
1973년 남산 중턱
1970년대 남산공원
1970년대 초반경의 남산공원의 모습. 남산신사의 흔적이 사라지고, 식물원과 어린이회관을 지어서 공원을 만들었다.
처음 세워진 공원은 1897년에 문을 연 왜성대공원(倭城大公園)으로, 임진왜란 때 왜병의 주둔지인 것을 일본인들이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시에 일본인들은 도로를 내고 벚나무 600그루를 심었다.
1908년에는 현재 남산3호터널 부근에 한양공원(漢陽公園)이 조성되었으며, 1910년에는 다시 시민공원으로 개장하였다. 현재 남산공원은 크게 장충지구와 예장지구·회현지구·한남지구로 나뉜다.
① 장충지구: 국립중앙극장과 어린이야구장, 테니스장, 롤러스케이트장 등이 있는 장충단공원 지역을 말한다. 문화재로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장충단이 있고, 인근에 장충체육관과 신라호텔이 있다.
② 예장지구: 남산골 한옥마을 부근을 말한다. 전통공예관과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 박영효 가옥 등 시내에 흩어져 있던 전통 한옥 여러 채를 옮겨 놓았다. 이 지역은 남산골 제모습찾기 운동의 하나로 1998년 4월 18일에 문을 열었다.
1994년 11월 29일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타임캡슐을 묻은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이 있다. 문화재로는 서울특별시 지방문화재 제5호인 와룡묘가 남아 있다.
③ 회현지구: 과학교육원과 남산도서관,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남산 팔각정과 서울타워가 있는 남산 정상까지를 포함하고 있어 남산의 여러 구역 중 가장 넓다. 과학교육원은 1970년 어린이회관 건물로 지어진 것이다.
남산 위에 우뚝 선 서울타워는 본래 종합전파탑이 있던 곳으로 1975년에 건립되었다. 5층의 회전전망대는 해발 480m의 높이로 서울의 전경을 훤히 볼 수 있으며, 건물 안에 해양수족관과 지구촌민속박물관이 있다.
④ 한남지구: 야외식물원이 있다. 남산골 제모습찾기 운동의 하나로 1994년 외인주택을 철거한 뒤 그 자리에 각종 식물을 심고 1997년 2월 18일에 문을 열었다. 연중무휴로 개방한다.
1971년 독립문
1970년 숙명여대 앞(청파치안센터 건너편 숙대 올라가는 길목)
1970년 풀빵장수
1970년 영화 7인의 숙녀
정면에서 바라보면 맨 왼쪽이 이영숙, 남정임, 윤정희, 한사람 건너 김창숙
1970년대 김추자(북한 간첩에게 보내는 암호라는 소문이 돌았던 손짓)
1970년대 단국대 신입생들
1970년대 수도여사대 학생들(현 세종대)
1970년대 중앙대생들
1972년 제26회 황금사자기(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1972년 김수미(코텍스 광고)
1970년대 윤정희(농협 광고 모델로 활동)
1975년 2월 문숙
1976년 패티 김 (Patti Kim, 金惠子, 1938년 2월 28일 ~ )
1976년 여우(김윤경, 남정임, 나문희, 윤여정, 김혜자)
1970년대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풍경
1970년대 통금단속
1945년 9월 7일부터 37년간 실시돼온 야간 통행금지를 1982년 1월 5일 새벽 4시를 기해 폐지됐다.
1971 어느 댄스홀
1973년 10월 20일 고고 추다 잡힌 학생들
1975년 8월 2일 심야 불법영업 하는 클럽에서 춤추다 단속에 잡힌 사람들
1970년대 서울버스
1972년 4월24일 기차통학생
서울로 열차통학을 하는 학생들이 열차에 잔뜩 매달려 있다.
1973년 서울버스(경성여객, 종로 2가)
1973년 고속버스 안내양
1978년 서울버스
1977년 노동절행사 버스안내양(장충체육관)
1970년대 행사에 동원된 버스안내양
1972년 영등포 입체교차로
1973년 홍지문(弘智門)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및 蕩春臺城)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 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1973년 서초동 향나무
1974년 청량리역
1974년 인왕산
1970년대 중반 성북동
아리랑 고개에서 정릉 쪽 산동네
성북동 비둘기
김 광 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1980년 낙산
1981년 청계고가도로
1982년 국제 무역박람회장, 현 코엑스 자리 그 뒤로 숲속의 봉은사(삼성동)
1980년대 봉은사 주변(삼성동)
1981년 은마아파트 앞 초가집(강남 대치동)
1982년 은마아파트 앞 논두렁(대치동)
1983년 송파구
1985년 서초 IC
서리풀이 무성하여 상초리(霜草里), 즉 '서리풀'이라고 하던 데에서 동 이름이 유래한다.
1987년 제1한강교
1972년 택시미터기
1972년 삼륜차(종로)
1970년대 식모로 들어온 10대 어린 소녀의 부엌일
1970년대 봉제공장 여성들
1970년대 여고시절
1974년 가격표
1975년 4대 4 미팅
1975년 역할 바꾸기(서울역)
1975년 군대 내무반
1975년 10월 18일 보행 위반자 단속(동대문경찰서)
1976년 고교야구대회 관중석(서울운동장)
1976년 야외카세트(광나루 강수욕장)
1977년 강남 시외버스 터미널
1970년대 공중전화
1977년부터 공중전화 요금이 5원에서 10원으로 인상되었다.
1976년 8월 18일 북한의 판문점도끼만행사건
1976년 후지카 곤로 광고(정해창, 홍세미)
1978년 동네 공동수돗가로 물을 길러 모여드는 주민들
1979년 종로구의 목욕탕앞에 붙은 안내문
1979년 카터 미국대통령 환영식
1970년대 어느 주택
1980년 7월
거리에 좌판을 펴놓고 손금으로 운명을 점치는 점술가가 무더운 날씨에 길거리에 손님이 없자 어린이들과 한담을 즐기고 있다.
1980년 공중전화(서울역)
1980년 바둑과 강아지(중림동)
조선시대의 지명인 약전중동(藥典中洞)과 한림동(翰林洞)에서 글자를 따 붙인 이름이다.
조선 초기에는 서부 반석방(盤石坊)과 반송방(盤松坊) 지역이었다. 1914년 서부 약전중동과 한림동 일부, 형제정동(兄弟井洞) 일부를 합하여 중림정(中林町)이라 하였고, 1943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46년 중림동으로 바뀌었고, 1975년 중구 관할이 되었다.
아현삼거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약고개, 약전현(藥田峴)이라고 했는데,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거리에는 조선 말기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金正浩)가 거주하였으므로 1991년 기념비를 세웠다.
1982년 스승의 날 師道헌장 선포식
1981년 연무대발 서울행 고속버스 승객들
통금을 넘어 14일 새벽 0시 20분에 도착한 이들에게 야간통행증(夜間通行證)을 주고 있다.
1982년 1월 5일 통행금지 해제
통금으로 차량과 인적이 끊긴 서울역 앞
1982년 1월 5일 새벽 4시를 기해 1945년 9월부터 37년간 계속된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일부 전방의 접적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일제히 해제되었다.
이로써 그 동안 유보되었던 국민의 권리가 회복되었고, 인신 자유의 구속 수단이 줄어들었으며, 한국 사회는 군사정권의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다양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야간 통행금지는 1945년 9월, 미국의 군정사령관 존 R.하지(John R. Hodge) 중장의 군정포고 1호가 발동되면서 시작된 이래, 빈곤 속에서 횡행하는 범죄를 줄이는 등 순기능도 있기는 했지만, 국민의 야간생활 통제는 물론 인신(人身)을 구속하는 수단 등으로 작용함으로써 순기능보다 훨씬 많은 반발과 역기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존속한 군국주의의 산물로서, 그 동안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과 박정희(朴正熙) 군사정권의 국민통제 수단으로 널리 이용되는 등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러던 차에 1981년 3월 출범한 제5공화국의 전두환(全斗煥) 군사정권은 비정상적인 정권 탈환에 따른 국민의 반발을 무마시키려는 속내를 감춘 채 시의 적절하게 야간 통행금지조치 해제계획을 진행하였다.
1981년 11월 19일,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민주한국당·국민당이 만장일치로 야간 통행금지 해제건의안을 채택하기로 합의하고, 그해 12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건의안을 통과시킨 뒤, 이듬해 1월 5일 드디어 해제조치를 단행하였다.
야간 통행금지의 상징인 서대문 로터리를 가로막았던 육중한 방어울타리가 걷히고, 이 해제조치에 연이어 중고교생의 두발 자율화와 교복 자율화가 시행됨으로써 자유화·대중화 시대의 바람이 일어 인적이 끊어졌던 한밤의 거리가 인파로 넘치고, 중고교생들의 장발이 늘어나는 등 새로운 사회 풍속도가 나타났다.
1981년 잡지광고
1982년 국민학교 동아전과(6-1)
1980년대 프로야구 구단 신문광고
1980년대 농심 짜파게티
1983년 3월 2일 교복 및 두발 자율화
1983년부터 시작된 중고등학교 교복의 자율화 조치
문교부(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가 1983년부터 중고등학생이 교복을 입지 않고 자유복을 입을 수 있도록 하는 교복자율화조치를 시행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처음으로 교복을 입기 시작했던 1898년 이후 85년 만의 일이다.
한국의 교복 역사는 배재학당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때의 교복은 도포 차림이었고, 1904년 한성중학교가 개교하면서 순 한국식 검은색 두루마기에 검은색 띠를 두른 교복 형태가 등장하였다.
그러다 1939년 일본이 남자들에게 국방색 국민복을 입히기 시작하면서 학업과 일상 훈련까지 겸할 수 있는 국민복이 등장하였고, 이러한 형태의 교복이 광복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후 1969년 중학교 평준화 시책이 시행되면서 시도별로 획일화·균일화된 교복이 등장하였고, 학교별 특성을 없애기 위해 삭발에 검은 양복과 양철 단추, 이름표, 학교 배지와 학년 마크를 단 일정한 교복 형태가 1982년까지 유지되었다.
1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83년 교복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중고등학생들이 자유복을 입게 되었는데, 이는 1982년의 통행금지해제와 두발 자유화에 이어 행해진 조치로, 심리적·신체적·사회적 발달단계에 있는 청소년들의 심리적 위축감과 소외감을 해소하고, 개성 신장과 민주의식 함양 등을 통해 책임감을 심어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교복자율화 시행 2년 후인 1986년 2학기 때부터 다시 복장자율화 보완조치를 채택해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교복을 입거나 자유복을 입도록 하였는데, 이는 자유 복장에 따른 교외 생활지도의 어려움과 탈선행위 및 가계 부담 증가 등을 해소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다. 현재까지도 이 제도가 유지되고 있다.
1983년 3월 2일 교복 자율화 등교(서울여고)
1983년 어떤 아이(중림동)
1986년 어떤 아이들(사당동)
1987년 중림동(고무줄 놀이)
고무줄놀이는 길게 늘어진 고무줄을 양쪽에서 잡거나 기둥에 묶어 고무줄의 탄력성을 이용하여 노래에 맞추어 고무줄 사이를 넘나드는 놀이이다. 주로 여자아이들이 하는 놀이이다.
통상적으로 고무줄을 양쪽에서 잡아 놀이를 하는 경우, 고무줄 위치를 바닥에서 발목으로, 발목에서 무릎으로, 이후 엉덩이, 허리, 겨드랑이, 어깨, 머리, 머리 위 한뼘, 팔을 머리 위로 끝까지 뻗친 높이 순으로 단계를 올려가며 상대보다 높은 단계까지 이르게 되면 놀이에서 승리한다.
고무줄놀이를 하며 부르던 노래는 대부분 학교에서 배운 동요(童謠)가 많았으나 때로는 군가(軍歌)나 당시 유행되던 노래도 있었다.
일제 때나 해방 후 주로 불리던 노래는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 새야 새야 파랑새야…,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가랑잎 때굴때굴 어디로 굴러가…,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앵두 따다 …,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등 민족사의 애환(哀歡)을 담은 노래들이나 군가도 있었다.
그러나 6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무리를…,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등 학교에서 배운 동요(童謠)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1988년 한국은행
서양식 석조 건축물로 1912년 조선은행(한국은행), 1925년 경성역(옛 서울역), 1926년 경성부청(서울시청), 그리고 가장 상징적인 건물인 조선총독부가 1926년에 10년간의 공사를 거쳐 완공된다.
동대문 바로 밖이라는 최적의 입지를 가진 창신동 돌산 채석장은 경성부 직영 채석장으로 탈바꿈해 매일 발파와 석재 채취가 일어나는 아수라장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떠진 돌들은 조선총독부 건물의 한 부분을 이루기 위해 경복궁 경내로 운송됐다.
1980년대 국립중앙박물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모습
1909년 11월 1일 창경궁 제실박물관 개관이 그 시초다. 1915년 12월 1일 조선총독부에 박물관이 개관하였고, 1945년 9월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인수 개편하여 1945년 12월 3일 덕수궁 안의 석조전 건물에서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개관하였다.
1953년 8월 서울환도 이후 잠시 남산 분관에서 머무르다 1954년 10월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였다. 1972년 7월 19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8월 25일 경복궁에 박물관을 신축하여 확장 이전하였다.
1986년 옛 중앙청 건물로 이전하였으나 건물이 철거됨에 따라 1996년 경복궁 내의 사회교육관 건물을 증개축하여 개관했다. 2004년 10월까지 경복궁에서 운영되다가 2005년 10월 28일 용산가족공원 내의 새로운 건물에서 개관했다.
1988년 경복궁과 국립중앙박물관
1988년 국립중앙박물관(구 중앙청)
2014년 경복궁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9월 17일 - 10월 2일, 16일간)
1990년 서초동 법원청사 준공
1990년대 핑클 (Fin.K.L)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이끌고 방북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9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 1면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2010년 4대강사업
4대강사업(2008-2013)
금모래은모래강변 - 오탁방지막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류 쪽 가물막이를 터서 흙탕물을 본류로 방류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2008.2. ~ 2013.2.)가 추진한 한국형 녹색 뉴딜 사업. MB 정부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강(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사업을 핵심사업으로 추진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인 시절이었던 2008년 2월 대통령직 인수위는 국정과제의 하나로 한반도 대운하사업을 선정, 그해 12월 4대강 사업 추진을 발표하였다.
4대강 사업은 총사업비 22조 원을 들여 4대강(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외에도 섬진강 및 지류에 보 16개와 댐 5개, 저수지 96개를 만들어 4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하겠다는 목표로 추진됐다. 그러나 야당은 예산 낭비와 부실공사 우려가 있다며 대대적인 반대에 나섰고, 이후 정치적 논란은 계속됐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은 정부의 사업 추진 발표 후 두 달 만인 2009년 2월, 「4대강 살리기 기획단」이 만들어지며 본격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해 6월에는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 마스터플랜이 확정됐으며, 7월부터 홍수 예방과 생태 복원을 내걸고 본격적인 착공에 돌입했다. 9월에 사업자가 선정된 이래 4대강 주변은 생활ㆍ여가ㆍ관광ㆍ문화ㆍ녹색성장 등이 어우러지는 다기능 복합공간으로 꾸민다는 계획 아래 사업이 진행되어 2013년 초 완료되었다.
그러나 2013년 1월 감사원이 「4대강 사업 주요 시설물 품질과 수질 관리 실태」에 대한 감사 결과에서 4대강 사업이 총체적 부실을 안고 있다고 발표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감사원은 앞서 2011년 초 발표한 4대강 1차 감사에서는 「공사비 낭비와 무리한 공기단축 외에 전반적으론 홍수 예방과 가뭄 극복 등에 4대강 사업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반면 2차 감사에서는 4대강 사업을 ▷설계 부실에 따른 보의 내구성 부족 ▷보강 공사 부실 ▷수질 악화 등 총체적 부실이라는 상반된 결론을 내놓아 논란이 되었다.
한편, 4대강 사업은 수질 개선, 가뭄· 홍수 예방 등을 기치로 내걸고 22조 2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이 투입됐지만, 해마다 4대강 유역에서 녹조가 창궐해 녹조라떼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여기에 물고기들의 떼죽음 사례는 물론 16개 보에 가로막혀 거대한 호수가 된 곳에는 큰빗이끼벌레까지 창궐하면서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2016년 11월 12일 촛불시위
2018년 박근혜
2020년 COVID-19
사진 출처: Designers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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