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부산중앙중학교

2020. 5. 25. 04:23日記

얼마 전 기장군 정관읍에 사는 딸네집을 방문하였다가 산보삼아 주위를 둘러보니 인근(정관읍 방곡리)에 나의 모교인 부산중앙중학교가 떡하니 있었다. 모교가 몇 년 전에 서면(부산진구 전포동)에서 기장 어디론가 이전하였다는 것은 알았지만 여기일 줄은 몰랐다.

부산중앙중학교(교기, 교가, 본관, 가교사)

부산중앙중학교(기장)

퇴직하기 전 서면에 볼일이 있어서 모교가 있었던 곳으로 가보니 아주 낮선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름하여 궁리마루이었다. 지금은 거기에 놀이마루와 부산다문화교육지원센터가 들어섰다고 한다. 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실향민이 된 기분이었다.

현재 기장의 중앙중학교는 모표와 배지, 교가도 바뀌었고, 당시 교훈인 ‘참되자’는 문구는 어느 정도 살아 있고, 당시 우리학교의 교기라 할 만한 축구는 변치 않고 유지되고 있다 한다.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이 없다고 했으니 참으로 세상 무상이다.

돌이켜보건대 나의 모교 부산중앙중학교는 1960년 당시 경남공업고등학교 한편의 가교사에서 공립학교로 개교하였다. 곧이어 지금의 부전도서관(구 시립도서관) 옆의 육군형무소 자리에 터를 잡고 이전하였다. 입학시험을 치러 학교에 갔더니 운동장은 정지가 되지 않아 울퉁불퉁 하였고, 교사는 지금의 놀이마루가 있는 곳만 되어 있었고, 현재 부산다문화교육지원센터가 있는 곳은 건물이 없었다. 그 뒤편으로 경남모직과 도로 하나를 두고 1학년 교실인 판잣집 가교사가 있었다. 우리는 이 가교사에서 1학년을 보내면서 학교가 증축되는 것을 지켜보았고, 교사가 완공되고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본관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상급생은 아주 엄격하였고, 길거리에서 상급생을 만나면 반드시 거수경례를 해야만 했다.

입학식을 할 만한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시립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선생님들과 부모님들, 2, 3학년 약간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입학식을 하였다. 입학한 후부터 전체조례 때와 체육시간에는 항상 운동장의 돌을 줍고 정지작업을 하였다. 돌을 주울 때는 그곳이 군부대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군복 단추가 많이 보였다.

시립도서관 시청각실에서는 이영도 시인의 강연을 들은 기억이 있고, 중학교 2학년 때는 운동장이 완공된 기념으로 국어학의 거두인 외솔 최현배 선생님을 초빙해서 운동장에서 도열하여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가 5월쯤이었는데도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웠다고 기억하는데, 마침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철이라 학교 밖에서 들려오는 쩡쩡 울리는 선거유세 확성기 소리에 강연이 중단되곤 하여 선생님께서 연단에서 곤혹해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 우리는 외솔선생님의 함자를 교과서에서나 보았지, 당신께서 우리 한글에 남긴 공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뵐 수 있는 분을 직접 뵙고 육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인근의 시립도서관 시청각실을 빌려서 시조시인 이영도님을 비롯한 다른 명사들의 강연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중학교는 입학시험에 합격하여야 갈 수가 있었다. 입학시험은 전기와 후기가 있었는데 전기로는 경남중학교, 부산중학교, 개성중학교 정도였고 후기는 중앙중학교, 대신중학교, 동래중학교, 서중학교, 동아중학교 정도였는데, 경남중학교, 부산중학교가 소위 일류학교였고, 중앙중학교, 개성중학교, 대신중학교, 동래중학교, 서중학교, 동아중학교 정도는 서로 비슷한 학교이었고, 그 외의 학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였다.

당시에 입학시험을 치를 때면 도하 각 방송사와 신문사들은 마치 대목과 같은 분위기였다. 입학원서 마감과 동시에 경쟁률을 정시뉴스는 물론이고 긴급뉴스를 통해서 계속 보도하였고, 합격자 발표 때는 아나운서들이 합격자 수험번호를 낭랑한 목소리로 보도하였다. 우리는 가슴을 졸이고 주먹을 쥐고 손에 땀이 나도록 자기 번호가 나올 때까지 듣고 있어야만 했다. 물론 방송국의 합격자 발표는 위에 열거된 학교 중심으로만 보도하였다. 오늘날 대학입시 보다 더 치열하였고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얼마나 입시경쟁이 치열했으면 우리나라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경기중학교의 입학시험에서 소위 ‘무즙파동 사건’까지 일어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결국 법원의 판결로 일단락되기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이름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재수도 더러 하였는데, 나는 그 부산중앙중학교를 7회로 졸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