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 번이라도 봤으면

2023. 12. 12. 16:18日記

눈이 잘 오지 않는 부산, 1975년 1월은 눈이 잦았고, 22일 수요일은 폭설이 쏟아져 온 천지를 하얗게 덮었었다. 가까운 연산동과 망미동을 경계하는 배산은 물론이고, 앞으로는 금련산, 뒤로는 멀리 백양산, 금정산도 온통 눈이었다.

1974년 12월인가, 다음해 1월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방학 중 어느 날 시내 남포동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저녁 무렵 연산동 집으로 귀가하니 얼굴도 현대적이고, 옷도 세련되게 차려입고, 멋진 부츠를 신고, 키도 나만하며 그것도 경상도 억양이 전혀 섞이지 않은 아주 깔끔하고 세련된 서울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한 아가씨가 친구와 함께 와서 내놓은 전셋방을 보고, 어머니와 전세 계약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참에 나와 딱 맞닥뜨렸다.

나는 대번 첫눈에 이 아가씨에게 매료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혜화여고를 19회(1975)로 졸업하고 당시 부산여전(현 부산여대) 도서관과에 진학을 앞두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이름은 沈愛羅였다.

애라는 가끔 단짝 친구들을 데려와서 자기 방에서 놀기도 했고, 나와는 어쩌다 마당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서로 눈인사만 주고받는 서먹한 관계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연산동 쌍미섬유 아래 개천 옆으로 난 길을 끼고 있는 집이었고, 옆으로는 감천암(현 감천사)으로 진입하는 조그마한 다리가 있었다. 얼마 전에 가보니 그 집은 없어졌고, 개천은 복개가 되어 2차선 도로로 포장되어 상전벽해가 되어 있었다. 그 이후에 조금 윗쪽인 곳에 살았던 집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집은 한국전쟁 반공포로 출신인 영도에 살았던 이종사촌 자형에게 도급을 주어 지은 집이었다. 감개무량하였다. 남구시대를 마감한 대연동 571-38의 집도 이 자형에게 도급을 주어 지었다. 이 두 주택은 워낙 튼튼하게 지은 집이라 그런지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견고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개학을 해서 내가 학교에서 일찍 귀가해서 가끔 마당이나 대문 앞을 쓸고 있을 때에 이 멋쟁이 아가씨가 귀가하면서 마주치면 서로 눈인사만 주고받는 아주 데면데면한 관계이었다. 내가 원체 낯을 가리는 소심한 성격 때문이었지 싶다.

애라는 서울에서 태어나 영관급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원주에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본과 무역을 한다는 언니가 학비와 생활비를 부담하고, 오빠는 서울에서 출판사인 교학사에 근무한다고 하였다. 어머니도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부산으로 와서는 송도에 있는 모윤숙 선생 별장에서 언니와 생활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학교로 갈 때면 연산동 대창버스 종접에서 출발하는 1번이나 2번 버스를 이용했는데, 1번 버스를 타면 기점에서 바로 타기 때문에 앉아서 가지만, 애라가 즐겨 이용하는 2번 버스를 이용하면 기점 다음 정류소에서 승차하기에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기도 하였다. 버스 안에서 애라가 그 맑고 고운 목소리로 오빠, 오빠 하면서 서울말로 나에게 말을 건네면 차내의 온 승객이 우리를 보는 것만 같았다. 당시만 해도 주위에서는 라디오의 아나운서 목소리 외에는 여성의 그렇게 맑고 고운 목소리로 발음하는 서울말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더 가깝고, 친밀해 졌다.

우리는 애라가 쓰는 재래식 부엌을 사이로 두고 각자 방을 따로 썼다. 나의 방은 거실로 통하는 방문과 애라의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이 있었고, 애라는 외부로 출입하는 문이 있는 부엌을 통해 드나드는 방을 썼다. 각자 방에서 음악을 들으면 무슨 음악을 듣는지 다 알 정도였다. 애라가 사용하던 재래식 부엌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각자 서로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폴 앵카', '엘비스 플레스리', '나나 무스쿠리'와 색소폰으로 연주한 '연민의 정' 그리고 국내 가수들의 포크송들을 카세트 테이프로 즐겨 들었다. 특히 박인희가 낭송한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도 많이 들은 기억이 있다.

무슨 과목인지 기억이 없지만 이즈음 애라가 학교를 마치고, 야간에 서면 학원가에서 수강을 하고 밤 10시쯤 귀가하였다. 이때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밤 10시면 시내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꽤 늦은 시간이 되고 만다. 이를 걱정하신 어머니께서 처자가 야심한 시간에 다니면 위험하니까 가서 데리고 같이 오라고 하신다.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애라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연산동에서 버스를 타고 서면으로 가서 애라와 만나서 귀가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연산동행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 타기 전에 우리는 그날 영업을 종료하려던 서면의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서둘러 마시면서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가끔 수업이 없는 낮에는 우리는 거실에서 애라가 들고 온 커피 기구를 가지고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려서 먹기도 하였다. 나는 여태까지 그렇게 커피를 내려서 먹는 것을 처음 보았다. 동명극장 앞 '라파엘'이라는 음악다방에서도 가루커피를 사용하였다. 하이볼이라는 것도 나는 그때 비로소 알았다.

가끔 우리는 둘이 시내로 나가 남포동, 광복동을 걷기도 하고, 다방에도 갔다. 거기서 애라의 친구도 만나기도 하였다. 불편하였지만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말이다. 곧장 같이 잘 다녔다. 그러나 어깨는 서로 맞대고 걸었지만 손은 잡지 못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단양 구인사에 기도하러 가셨기 때문에 며칠 집을 비우셨다. 자연히 우리는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그때 나는 트럭에서 모래를 하차시키다 트런 운전사가 트럭 적재함 날개를 갑자기 내리는 바람에 오른손 손가락을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하고 붕대를 감고 있었다. 숟가락질이 서툴렀다. 애라가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반찬을 집어서 놓아주면 밥을 먹었다. 물론 설거지도 애라의 몫이었다.

그날밤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술을 먹어보기로 하였다. 어머니께서 요리할 때 쓰시던 '백화수복' 청주 반 병이 있었다. 내가 가게에 가서 맥주를 더 사왔다. 둘이서 마셨다. 애라도 술이 약하고, 나도 술이 약하였다. 자리가 파하여 부엌으로 난 쪽문을 이용하여 애라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면서 건너 와서 자기 방을 구경하라고 한다. 나는 그 방을 밖에서 들여다민 보았다. 과연 아가씨 방이라 아기자기도 하였지만 생전 처음 보는 여학생 방이라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기분도 야릇하였다. 꽂혀 있는 책도 보였고, 장남감도 보였고, 기모노를 입은 일본 인형도 보였다. 언니가 주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방주인을 최대한 존중해주고 싶었다.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날 우리는 2주 후에 원동 천태산으로 친구들과 함께 등반을 가기로 약속하였다. 그날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엇다.

다음날 어머니가 오셨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 이때부터 애라가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모윤숙 선생 별장으로 간다는 애라를 따라 송도까지 같이 가서 유엔호텔 근처 종점에서 같이 내렸다. 같이 모윤숙 선생 별장까지 같이 가겠다는 나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은 행선지인 모윤숙 선생 별장까지 같이 가지 못하고, 나는 쓸쓸히 발걸음을 돌렸다. 거기서 애라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오빠는 부모가 있는데 왜 부모도 없는 자기를 동정해서 그러느냐면서 자기는 동정이 싫다고 하면서 쌀쌀하게 굴었다.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이후 애라가 집으로 귀가하는 시간이 늦어지면 혹시나 하고 전에 자주 갔던 서면으로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결국 나름대로 준비한 천태산 등반 날짜도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그러다 5월 어느 날 학교에 갔다가 귀가하니 애라는 이사를 가고 방은 비어 있었다. 말없이 떠나간 애라로 인해 너무 허전하고 안타까웠다. 그러다 며칠 후에 애라가 택시를 불러 타고 왔다. 두고 간 흙으로 만든 보잘 것 없는 숫불 화로를 가지러 왔단다. 나를 다시 보러 왔겠지 하는 나의 기대를 져버리고 잘 가라는 나의 말에 대한 대답도 없이 애라는 떠나가고 말았다. 쌍미섬유 밑으로 난 길을 따라 3공구 쪽으로 타고 왔던 택시를 도로 타고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그 이후 가을에 부산여전에 축제가 있어서 혹시라도 애라를 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가 보았다. 하지만 거기서 본 것은 애라의 제적 공고를 보았을 뿐이다.

나는 애라가 갑자기 변한 이유를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스라이 떠오르는 그 애라의 추억이 평생 잊지 못할 가슴 시린 나의 첫사랑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이라도 꼭 한 번 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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