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은 일본 국적인가?

2024. 8. 15. 16:31歷史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의 국적은 일본이라는 김문수 주장대로라면?

3.1운동은 소요죄·내란죄, 임시정부는 반국가단체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립하지 않는 논리다. 왜냐하면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사필귀정으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 체결된 모든 조약·협정은 이미 무효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1910년에 한일병합조약으로 주권을 잃었기 때문에 우리가 국가의 기본 구성 요건 중 하나인 주권이 상실된 상태 아니냐. 그래서 국가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한국 국적일 수가 없었다는 주장은 1910년의 이른바 병합조약이라고 하는 조약이 유효하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 조약이 무효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조약 자체가 무효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 자체가 아예 원천적으로 성립이 안 된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은 그 조약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그 조약이 당초부터 무효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1910년 이후에도 한반도가 일제의 영토가 된 적이 없고 한반도의 인민이 일본의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일본이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병합하며 조선인에게 일본 국적을 부여한다고 했지만, 얄팍한 기만에 불과했다. 일부 친일파를 제외한 대다수 조선인에게 일본 국적은 침략과 압제의 상징일 뿐이었다. 실제로 조선엔 ‘내지’와 달리 일본 헌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쓰이는 법률도 달랐다. 일본은 ‘내지호적’과 ‘조선호적’을 철저히 구분해 둘 사이의 이동을 금했다. 일본인에게 조선인은 여전히 외국인이었으며, 지진 같은 위기가 닥치면 제거해야 할 차별·배제·편견의 대상일 뿐이었다. 조선인들은 일제가 망하는 순간까지 참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무효임을 확인한다."인데, 일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무효라는 것은 법률 용어이며, 그것은 처음부터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제의 35년간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이 된다. 지배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 측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마지막에 가서 '이미'라는 애매한 수식어를 붙였다. 그리고 한국은 한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해석을 하는 식으로 합의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 한국 정부 해석은 '무효'라는 것을 애초부터 효력이 없다는 것이고, '이미'라는 것은 그 무효를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한국 측은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그동안의 해석과 입장에 근거하여 '일본 국적'이라는 것은 성립될 수 없고, 일제강점기하에서 일제에 부역한 사람은 반국가, 반민족 행위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제에역하며 반국가, 반민족 행위를 한 사람들의 그 후손들이 조상들의 반국가, 반민족 행위들을 호도하거나 면책 받기 위해서, 식민사관에 동조하는 일부 사람들의 억지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은 일본 국적인가?

광복회 서울ㆍ경기지부 회원들이 13일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사퇴 촉구 집회를 하고 있다.

지난 6일 취임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발언과 역사 인식을 둘러싸고 자격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김 관장 임명이 반쪽 광복절을 만든 원인입니다.

독립운동가 후손 단체인 광복회는 임명 강행에 반대해 처음으로 광복절 기념식에 불참했고 48개 국내 역사학회와 단체는 임명 철회를 요구하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김 관장은 "사퇴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논란의 발언과 주장이 많습니다. 그 중 최근 불거진 것들은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이 일본 국적"이었다거나 "안익태와 백선엽 등에 대한 친일 여부를 재검증해야 한다." 는 등의 내용입니다.

이에 대해 팩트체크해 봤습니다.

① 일제강점기 우리 국민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14일 오후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누리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의 국적은 어디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국적은 법적인 자격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죠.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들의 국적은 일본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8월 12일, CBS 김현정 뉴스쇼)

'일제 강점기 때 우리 국민들은 일본 국민이었다'는 게 김형석 관장의 주장입니다. '한일 합방을 당해 원치 않게 일본 국민이 되었다'는 취지입니다. 외국에 유학 가려면 일본 여권을 가져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김 관장은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국적을 일본으로 했던 점 등을 근거로 삼았습니다.

김 관장은 '법적인 자격'을 강조했습니다. 외형적으로 김 관장의 말이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이 말엔 함정이 있습니다.

국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그에 맞는 권리와 의무를 부담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국민은 일본 국민과 같거나 상응하는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을까요. 다양한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무력 통치에 따라 노예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입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적법한 행위로, 자발적 지원에 의한 노동이라고 강조합니다. 일본 법원은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당시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우리 피해자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우리 법원의 판단은 다릅니다.

2012년 '일제 강제 동원 손해 배상 청구권' 소송 대법원 판결문

2012년과 2018년 대법원은 일본 법원이 피해자들을 합법적으로 동원된 일본인으로 보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없다는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强占)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라고 봤습니다.(2009다68620)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일본법의 적용을 받은 일본 국적자가 아닌 점을 밝힌 겁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한국어본(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김 관장의 법적으로 일본 국민이었다는 주장은 1910년 강제로 체결된 한·일 합병조약이 유효하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조약 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讓與)함"이라는 대목입니다.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 조약'〈사진 출처: 일본 외무성〉
1965년 8월 국회 한일간 조약과 재협정 비준동의안 심사특별위원회 국회 회의록

그러나 1965년 한일 양국의 기본 관계 조약이 체결될 즈음 우리 국회는 "1910년 8월 22일의 합방조약이나 그 이전 대한제국과 일본국 간에 맺어졌던 모든 조약과 협정은 과거 일본의 침략주의의 소산이며, 우리 민족 감정이나 일본의 한국 지배가 불만이었다는 우리의 기본 입장으로 볼 때에 당연히 무효라는 것은 두말 할 것 조차 없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 국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은 또 있습니다.

현재에도 시행되고 있는 국적법입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과 일본 법 체계를 연구해 온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일 병합 이후 일본은 자국에 있는 국적법을 우리나라에서는 시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배경에 대해선 "일본 국적법을 적용하면 한국민이 국적을 쉽게 이탈할 수 있게 돼 적용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적자가 되면 국적을 버리거나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가 주어지는데, 이를 주지 않은 겁니다. 일본은 대신 우리 국민을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국적법이 아닌 호적법을 만들어 적용했습니다. 결국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주장은 당시 상황을 평면적으로 접근해 주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② 안익태ㆍ백선엽 친일 여부 검증 필요하다?

“안익태 같은 경우에도 친일 인명사전에는 올라 있는데 이 보고서에는 빠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분들이 그럼 빠진 이유가 뭐냐. 법적으로 볼 때 이거 명확한 근거가 있는 분들만 채택을 한 겁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검증 작업이 필요하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4389명의 친일인명사전을 확인해 봤습니다.

친일인명사전 '안익태'(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① 1938년 일본 천황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연주되는 '에텐라쿠'(越天樂ㆍ월천악) 작곡ㆍ발표ㆍ지휘 ② 1940년 '일본 탄생 2600년 기념 봉축음악' 작곡ㆍ발표ㆍ지휘 ③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한 축전곡 '만주환상곡' 작곡ㆍ발표ㆍ지휘 ④ 1943년 독일 나치 정부 제국음악원 회원증 교부 ⑤ 1944년 파리에서 '일본축전곡' 연주 (친일인명사전, 안익태편)

안익태 기념재단 연구위원장을 지낸 김 관장은 안익태의 친일 행위는 법적으로 명확한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친일인명사전의 내용은 총 70개의 사료를 바탕으로 5개 이상의 친일 행위를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2006~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친일 대상자 1005명에 안익태가 빠진 것은 민족문제연구소에 비해 친일 행위 판단 기준이 축소됐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행위를 30개의 기준으로 나눴고 안익태를 “작사ㆍ작곡ㆍ노래ㆍ연주 등 창작과 단체활동을 통해 일제 식민 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로 봤지만 정부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에선 이를 20개 기준으로 축소하면서 예술 선동 친일 행위는 제외됐습니다. 진상규명 특별법 통과를 위한 여야 합의 과정에서 5급 이상 공무원, 예술·해외 활동 분야 제외 등 판단 범위가 대폭 좁아진 겁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정부 차원에서 이뤄진 첫 번째 진상 규명 활동이기 때문에 법 자체가 듬성듬성하게 만들어졌다”며 “적극적인 행위는 포함됐는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행위들인 특히 문화, 예술 활동들이 많이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안익태 유족 측이 지난 2021년 광복회를 사자(死者) 명예훼손으로 고발했지만 경찰은 혐의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불송치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경찰 안익태 사자명예훼손 수사결과 통지서

김 관장은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도 “108회에 걸친 간도특설대 실상 파악에도 '백선엽' 이름 없다”(2022년 8월 월간조선)는 기고를 통해 친일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간도특설대는 한국 사람들을 동원해 독립군 활동을 탄압하도록 조직된 특수부대였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백선엽'

하지만 백 장군은 민간, 정부 조사에서 모두 친일 행위자 명단에 올랐는데 정부 진상 보고서를 확인해보니 그는 자신이 1993년 일본어로 발간한 '간도특설대의 비밀'이란 책에서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7권, 825p)고 적었습니다.

범위를 좁게 잡은 정부 진상규명위가 백 장군을 친일행위자로 판단한 이유입니다.

김 관장은 친일인명사전이 민간에서 만든 주관적인 것이라며 검증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김 관장 역시 민간 학자에 불과합니다.

출처: [JTBC]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2210553 박성훈 기자 입력 2024-08-15 15:08 수정 2024-08-15 15:24

자료조사 지원 : 이채리 박지은

김문수가 쏘아 올린 국적 논란... 100년 전 우리는 일본인?

김문수 "일본 국적" VS 한덕수 "당연히 한국"
일본, 내지·외지 구분… 법체계도 달라
"한 나라라면 같은 법 적용했어야"
"한일병합조약 무효, 일제 신민 아냐"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4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인사청문회 당시 언급한 '일제강점기 선조 국적은 일본'이라는 주장을 공개석상에서 되풀이하면서 일제강점기 국적을 두고 때 아닌 논란이 일고 있다.

김 장관은 3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일제강점기에 거주한 한국민 국적은 어디냐‘라는 위성곤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한민국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었기 때문에 (당시) 대한민국 국적은 없었다."고 답했다.

김 장관은 다음날 KBS라디오 '전격시사'에서도 같은 취지로 발언했다. 1965년 한일 회담에서 일본의 식민지배 무효화를 합의했더라도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없는 사실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선조들은 일본 국적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 김 장관의 주장이다. 그는 고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일본 대표팀으로 출전한 점을 들며 본인의 논리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한덕수 국무총리는 "선조들의 국적은 당연히 한국 국적"이라며 "일본의 국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건 정말 오산"이라고 말해 김 장관과 정반대 입장을 보였다. 역사적 사실은 하나지만, 그에 따른 해석은 정반대로 엇갈렸다. 김 장관의 주장대로 우리 선조들은 일제강점기 시기 정말 일본인이었을까.

'조선인', 일본인과 다른 취급… 내지·외지 구분

1910년 8월 29일 반포된 한일병합조약.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일합병 당시만 보면 국적에 대해서는 공식화된 내용이 없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한일병합조약 원문을 보면 한국(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양여한다는 내용과 한국 황제와 그 후손의 지위에 대한 내용만 언급돼 있을 뿐, 일반 신민(시민)에 대한 국적이나 법적 지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일본은 합병일인 1910년 8월 29일 칙령 제318호 '한국의 국호를 개정하여 조선으로 하는 건'을 공포하며 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대한제국 신민들을 조선인으로 칭했다.

조선총독부는 법률을 대신하는 '제령'을 발표해왔는데, 제령에서 일본인과 우리 선조들을 엄격히 분리했다. 1912년 3월 조선총독부 관보에 제령 제13호가 실렸는데, 조선태형령에 대한 규정이었다. 조선태형령 제13조에는 '본령은 조선인에 한해 적용한다.'고 적시됐다. 일본인과 한반도 인민은 다르다는 점을 명시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대외적으로 조선은 일본의 영토이고, 조선인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일왕(일본 황제)의 신민이라고 주장해왔으나 대내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엄격히 구분해왔다고 보고 있다. 일본은 1918년 4월 '공통법'을 시행하면서 일본 제국의 내지(內地)와 외지(外地)를 구분했는데, 일본 본토가 내지, 조선과 대만, 사할린 남부(1944년 내지로 편입) 등 식민지를 외지로 분류했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내지와 식민지 상태에 있던 한국, 대만 등 외지는 권리가 분명히 달랐고, 법체계도 달랐다."고 말했다.

일본은 지역과 호적에 따라 차별을 뒀다. 한반도 인민이 외견상, 형식상 일제 신민(일본 국적자)으로 분류됐을지라도 어디에 적을 뒀는지, 현 거주지가 어디인지 여부 등에 따라 권리와 대우가 천차만별이었다.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호적에 따른 차등, 거주지에 따른 차등이 있어서 같은 일제 신민이라 할지라도 신민으로서 온전한 권리를 갖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며 "조선인이 일본에 거주하면 참정권 행사가 가능했던 반면 일본 내지 호적에 등재된 사람도 조선에 거주하면 제국의회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일본인이라면 같은 법 적용됐어야"

1943년 '타라와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의 감시 아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부상당한 동료들을 살피고 있다. 미국 태평양전쟁 박물관 제공

일본은 필요에 따라 한반도 인민에게 서로 다른 잣대를 적용하며 때로는 일본의 신민, 때로는 그렇지 않게 취급했다. 대표적인 것이 국적법이다. 일본은 자국에 있는 국적법을 한반도에서는 시행하지 않았다.국적법을 적용하면 국적자로서 국적을 버리는 것이 가능해져 자칫 통제 불능 상태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반도가 일본 영토가 됐다면 같은 법을 적용하는 것이 상식일 텐데, 일본이 상황에 따라, 편의에 따라서 일관성 없이 법을 적용해 이런 (국적) 논란이 벌어졌다."며 "일본 신민의 자격은 법률에 따라 정하게 돼 있고, 그걸 정한 것이 국적법인데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만 우리나라 사람들을 일본 신민으로 여긴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손기정 선수처럼 조선인도 해외에 나갈 때는 표지에 '대일본제국'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여권을 발급 받았다. 물론 여권에 이 사람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쓰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외에서는 일본인 취급을 받았던 셈이다.

핵심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

외무부(현 외교부)가 1986년 7월24일 국무회의에 안건으로 상정한 내역과 '대한제국이 체결한 다자조약의 효력확인' 문서 표지. 국가기록원

국적 논란과 동시에 언급되는 것이 1910년에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의 불법성이다. 국무위원 후보자에게 물어야 할 질문으로서는 '일제강점기 국적이 무엇이냐'보다는 '일제 침략의 불법성을 인정하느냐'가 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론 후자가 본질적인 질문인데 이를 국적을 통해 묻다 보니 불필요한 논쟁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것이, 식민 지배가 합법이냐 불법이냐에 대한 견해만 물으면 되는데, 국적을 따지다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며 "선조들이 일본 법제 하에 살았고, 만약 일본 법제상 일본 국적이라고 보더라도 한일병합이 불법이라 무효였다면 논리상 일본 국적을 강제로 부여받은 것도 무효가 돼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일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조인됐고, 그해 8월 29일 반포됐다. 그간 한국 정부는 해당 조약이 애초부터 불법이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반면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을 통해 사후적으로 무효가 된 것일 뿐, 체결 당시에는 국제법적으로 합법적이었다는 주장이다.

외교부는 지난달에도 일제의 국권 침탈이 불법·무효인지에 대한 입장을 밝혀달라는 광복회의 요청에 해당 해설을 인용하며 원천 무효라는 취지의 답변서를 보냈다고 밝힌 바 있다. 한일병합조약이 우리 국민 의사에 반해 강압적으로 체결됐고, 이에 따라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입장은 그간 일관되게 유지해 왔으며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라는 게 외교부 공식 입장이다.

반면 김문수 장관은 한일병합이 무효라는 정부 입장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4일 새벽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 전체회의에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동일성은 계속 유지되는 것"이라고 명시한 1986년 외교부 공식 문서 내용에 동의하냐는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의 질문에 거듭 "동의를 못하겠다."고 답했다.

1986년 7월24일 외무부(현 외교부)가 작성한 이 문서는 을사늑약과 한일강제합방조약 등이 무효임을 밝히고, 과거 대한제국이 타국과 맺었던 다자조약의 효력을 확인하고 조약번호를 부여한 문서다. 이 문서는 당시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포된 정부 공식 문서인데도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김창록 교수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무효라는 한국 정부의 입장은 한반도 통치권이 일본에 넘어간 적이 없어서 일제의 영토가 된 적도, 일제의 신민이 된 적도 없다는 의미"라며 "일본의 입장은 조약이 유효해 조선인이 천황의 신민이라는 것이지만, 우리 정부 입장에서 보면 선조들은 일본 국민이었던 적이 없다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90517510002587 윤한슬 기자 1seul@hankookilbo.com 입력 2024.09.08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