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2009. 11. 28. 18:18ㆍ風水
문화재 풍수 - 선인들의 터 잡기
◀ 김상범/ 풍수연구가
<1> 산과 민족의 정서, 산정기 따라 '명당' 결정, 과학적 근거 이전의 믿음, 서원·주택 등 어디나 적용
최근 들어 집과 토지 등 부동산에 접근하는 시각에 풍수지리를 접목해 보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본지는 우리 문화재 건축물들의 배경에 깔린 풍수지리의 이론적 배경을 알아보는 '문화재풍수' 연재 시리즈를 마련했다. 글을 쓸 김상범씨는 부산대 동아대 영산대 등의 평생교육원에 출강하고 있으며 풍수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바로 웰빙, 자연친화적 삶, 환경 우선의 사고와 맥을 같이한다고 역설한다.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흔히 부르던 교가의 가사 중에는 대부분 '○○산 줄기줄기 뻗어내려~' 또는 '○○산 정기 받은~' 같은 소절이 포함돼 있다. 자주 이 같은 노래를 부르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산의 정기를 받으며 자라왔다고 심정적으로 생각한다. 과학적으로 '산의 정기가 있다, 없다'를 논하기 전에 우리 민족은 그 같은 정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서'라는 단어는 중요하다. 앞으로 이야기할 풍수지리(風水地理)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정서'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놀라거나 급한 일을 당할 때 자신도 모르게 '엄마~'라고 소리치는 것도 '정서'의 소산이다. 다급한 상황에서는 모든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고 믿는 '어머니'를 무의식중에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산'이라는 존재에 그런 의미와 정서를 부여하고 있었다. 한반도는 어느 다른 나라보다 수려한 산이 많다. 몇 천 년 동안 그러한 터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산에는 정기가 있다고 믿어 왔고, 산의 정기로 인해 좋은 일과 흉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믿는 정서를 가지게 되었다. 산에 대한 정서는 곧 한반도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 건축물들을 살펴보면 거의 모두가 소위 '명당(明堂)'에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도읍을 정할 때나 궁궐을 정할 때, 사찰이나 서원, 양반집을 지을 때도 명당을 택했다. 수많은 우리 문화재 건축물들이 산줄기와 산줄기,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를 기준으로 하는 풍수지리의 원리에 따라 명당에 들어갔던 것이다.
<2> 좋은 터 요건 '장풍', 바람 잠잠한 '새둥지' 봉정사, 절 둘러싼 산들이 거센 바람 막아줘
풍수지리(風水地理)란 바람(風)과 물(水)의 영향을 받고 있는 터(地)에 대해 이(理)치적으로 알아보고자 하는 학문분야이다. 터에는 길한 터와 흉한 터가 있는데, 이를 구분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바람과 물이라는 것이다. 그 바람과 물을 자세히 분석해 좋은 터를 고르고, 그 터에 사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학문인 것이다.
풍수라는 단어는 장풍(藏風)과 득수(得水)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먼저 '장풍'이란 '바람을 감춘다.'는 뜻으로 풀이되는데 이는 많은 뜻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쉽게 접근해 보자.풍수에서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대는 터를 좋은 터로 보지 않는다. 바람이 부드럽게 온화하게 부는 터를 좋은 터로 보는 것이다. 즉, 좋은 터는 바람으로부터 주변의 산들로 인해 잘 보호받도록 지형이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상북도 안동시의 봉정사(鳳停寺)와 같이 주변의 산들로 잘 둘러싸여 있는 터가 장풍이 잘 되어 있는 좋은 터이다. 봉정사는 1300년 전 통일신라 때 명당에 지어진 절이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봉정사의 앞산으로 가서 사찰의 뒷산과 좌우측 산들을 관찰해 보면 봉정사는 주변 산들에 의해 둘러싸여 거센 바람을 받지 않는 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경내에 들어서면 안온한 느낌과 부드러움을 저절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봉황이 머무는 사찰'이란 이름에 걸맞게 절터의 뒷산이 봉황의 몸이며 좌우측 산은 날개다. 봉정사는 봉황의 입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알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문화재풍수'의 안목이다. 장풍이 잘 된 좋은 터는 새가 둥지를 터는 보금자리와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바깥의 거센 바람이 보금자리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보금자리 안에서는 항상 부드럽고 온화한 바람만 있는 것이 장풍이며, 이는 풍수지리에서 지켜야 할 큰 원칙으로 꼽힌다.
<3> 주택·아파트의 장풍, 바람 불면 땅기운 흩어져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다. 이 시험은 3년마다 치러졌다. 잡과 안에는 음양과(陰陽科)라 하여 풍수지리 시험도 있었다. 풍수지리 시험과목은 모두 10개였다. 그 중 '청오경'과 '금낭경'이라는 2과목은 외워서 시험을 쳐야 했으며, 나머지 8과목은 책을 보고 시험을 쳤다.
책의 내용을 전부 암기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과목이었던 금낭경이라는 책에 '기승풍즉산(氣乘風則散)'이라는 구절이 있다. '지기(地氣)는 바람을 맞게 되면 흩어져 버린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땅 기운이 모여 있는 곳에 바람이 많이 불게 되면 그 기운이 흩어지므로 좋은 터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좋은 터가 되려면 주변의 산들에 의해 잘 둘러싸여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곧 풍수에서 말하는 장풍(藏風)이다. 장풍이란 지난 회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바람으로부터 터를 감추어준다' '바람으로부터 터를 안전하게 보호해준다'라는 뜻이다.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터는 좋고, 강한 바람이 부는 터는 좋지 않은 것이다.
장풍의 개념을 현대적인 건축물로 응용해 볼 수 있다. 먼저 단독주택끼리 모인 지역을 보자. 이곳의 건물들은 낮은 건물들로 배치되어 있고, 자기 집의 담장이나 주위의 이웃 건물들이 바람을 잘 막아주므로 장풍이 되는 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이웃집도 주변의 건물들로 인해 바람이 적게 부는 장풍의 터가 된다.
즉 이웃 건물들끼리 서로서로 장풍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작은 도로나 좁고 짧은 골목 사이로도 바람이 강하게 지나가지 않는다.
이번에는 고층 건물들끼리 모인 아파트 단지를 보자. 아파트 단지는 높은 건물들인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면서 거센 바람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장풍이 잘 되지 않는 것에 해당된다.
산과 산 사이의 고개에 항상 바람이 많이 부는 것과 같다. 물론 주변 산들에 의해 잘 둘러싸여 있는 아파트 단지라면 장풍이 잘되고 있는 터이다. 반대로 소위 조망권이 뛰어나다는 해변의 고층 아파트들은 장풍의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좋은 터는 아니다.
풍수의 여러 다른 요건들은 따지지 않고 건축물의 높이와 배치로서만 장풍의 요건을 따진다면, 저층의 단독주택 지역이 고층의 아파트 단지보다는 좋은 요건이라 하겠다.
<4> 득수의 중요성, 산의 기운, 물줄기로 가둔다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들의 터를 보면, 모두 강을 옆에 끼고 자리하고 있다. 큰 도읍이나 작은 마을도 반드시 강이나 개천 옆에 입지하고 있다. 물은 인류의 생존에 절대적인 것이며, 물이 없으면 삶의 어떠한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민족들은 물이라는 것을 단지 생활용수로만 활용했지만, 한반도와 중국의 민족은 생활용수 이외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다. 물에도 기가 있다고 본 것이다. 물의 기운을 잘 활용, 좋은 터를 구해보자는 것이 풍수에서 말하는 득수(得水)라는 개념이다.
득수에 대해서 알아보자.
◀ 경복궁 근정전 앞의 금천
마을이든 집이든 어떠한 터든, 주변의 산에서 하나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그 터를 이루고 있다. 산기운이 내려온 후에는 그 기운이 잘 모여 있어야 좋은 땅이 된다.
산기운이 더 이상 흘러 내려가지 않고 정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물줄기이다. 산기운은 물줄기를 만나면 그것을 넘어가지 못하고 정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계수즉지(氣界水則止)'라고 한다. '기는 물을 만나면 멈춘다.'는 뜻이다.
왼쪽 사진 중 위쪽 사진은 경복궁 근정전 앞의 금천(錦川 또는 禁川)이라는 물줄기다. 이 물줄기는 왕을 위한 근정전과 강녕전에 좋은 산기운이 모여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아래쪽 사진은 경기도 여주에 있는 조선시대 효종왕릉인데, 왕릉 앞에 물줄기를 더욱 견고히 만들어 산기운이 왕릉에 집중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 효종왕릉 앞의 물줄기
<5> 양기·양택·음택 풍수, '풍수=묏자리'는 일제의 계략
풍수지리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사람들에게 질문하면, 3초 만에 '무덤 보는 것'이라고 답한다. 풍수지리가 무덤 외 어떤 분야에 활용되었는지를 재차 질문해야 그때야 비로소 스님들이 사찰을 지을 때, 사대부들이 자기 집을 지을 때,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풍수지리를 활용했겠다. 등의 답을 한다.
우리 역사를 보면, 무덤 이외에도 풍수지리가 활용된 분야는 너무 많다. 풍수지리는 무덤 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터에 대한 것도 풍수지리다. 오히려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를 삶터에서 더 많이 활용하였다.
풍수는 양기풍수(陽基風水), 양택풍수(陽宅風水) 그리고 음택풍수(陰宅風水)로 나눌 수 있다.
양기풍수는 '양(陽)의 기운을 받는 공동체 삶터(基)'에 대한 풍수이다. 특정인이 그 터의 주인이 아니고, 그 삶터의 모든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풍수다. 한반도 전체 터에 대한 국토풍수, 서라벌·개성·한양처럼 수도에 대한 도읍풍수, 주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풍수가 있다.
양택풍수는 '양의 기운을 받는 개인적인 삶터(宅)'로써 주인이 있는 집터에 대한 풍수이다. 임금이 살았던 곳에 대한 궁궐풍수,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공부를 하고 제사를 지냈던 서원풍수, 사대부들이 삶을 영위했던 전통가옥풍수, 그리고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절에 대한 사찰풍수 등이 있다. 음택풍수는 무덤풍수이다. 왕과 왕비의 무덤인 왕릉풍수가 있고, 개인 무덤인 묘풍수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양기풍수, 양택풍수 그리고 음택풍수를 모두 활용하였는데, 어느새 풍수지리라고 하면 무덤을 보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것의 결정적인 이유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우리민족을 더욱 분열시켜 식민통치에 유리하게끔 식민풍수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즉, 좋은 생기(生氣)가 모인 터에 사는 한반도 민족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면, 일본은 식민통치 하는데 더욱 불리할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양기풍수와 양택풍수는 없애버렸고, 민족의 분열을 조장할 수 있는 '개인 가문의 영광'이나 '개인 자손의 영달'이 우선인 음택풍수 쪽으로 눈 돌림을 하게 만든 일본의 식민정책 중 하나가 식민풍수였다.
<6> 국토풍수, 한반도, 대륙 향해 포효하는 범
◀ 근역강산맹호기상도
'국토풍수(國土風水)'는 한반도 터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풍수지리로, 민족의 자긍심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한반도는 토끼 모양'으로 알고 있다. 한반도가 토끼 모양이라고 알려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이고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 시작은 1900년께이고, '한(韓)민족은 토끼 같은 연약한 민족이므로, 일본인들이 잘 다스려주겠다'라는 의미에서 출발했다. 즉, 일본인들이 우리를 나약한 민족으로 세뇌시켜 수월하게 지배해 보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에 발끈한 육당 최남선은 1908년 소년지 창간호에 '한반도는 호랑이 모양의 나라'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2년 뒤 한일병합이 되면서 힘찬 호랑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한반도에는 토끼만 널리 퍼지게 됐다. 해방 이후에라도 즉시 고쳐졌어야 할 내용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또한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한반도의 호랑이가 긴 잠을 자다가 비로소 1980년대 초부터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像圖)'라는 그림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 호랑이를 보라. 일본 땅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듯이 광활한 만주벌판과 대륙을 향해 용맹스럽게 포효하고 있다.
그리고 풍수지리적 입장에서 볼 때, 호랑이 모양의 산에서는 가장 강한 기운이 호랑이 입(호구혈·虎口穴)에 모여 있으므로, 그곳을 좋은 명당 터로 본다. 이 그림에서도 한반도의 가장 큰 상징인 백두산이 가장 기세 있는 호구 혈에 정확히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 도읍지, 초승달 터 잡아야 국운 왕성
'도읍풍수(都邑風水)'는 나라의 수도에 대한 터를 대상으로 하는 풍수이다. 한반도에서 흥망성쇠를 겪었던 왕조들은 풍수지리로 수도를 택지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석탈해가 지리를 알아 호공의 땅을 빼앗아 월성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석탈해가 토함산에서 내려다보니, 초승달과 같이 보이는 한 봉우리가 오래 살만한 땅이라서 빼앗아 살았다'고 적혀 있다. 초승달은 점점 보름달로 될 것이니, 초승달 모양의 터에 살면 석탈해가 가진 터도 보름달처럼 넓어질 것이다. 이것이 석탈해가 풍수적으로 월성을 택지한 이유이다.
◀ 경주 반월성 모형도
현 경주박물관 옆에 있는 월성은 주변 지형에 비해 몇 미터 높은 곳에 위치한 널따란 평지다. 주변 터에 비해 더 높다는 것은 물난리가 나도 침수 당할 일이 없으며, 높은 신분이라는 권위도 나타낸다. 또 월성은 초승달 모양(사진)을 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개성을 수도로 정할 때 도선국사의 도움을 받았다. 도선 국사는 한반도 풍수지리의 시조로, 왕건의 훈요십조에 '도선이 산수의 형세를 살펴서 세운 사원 외에는 마음대로 사원을 창건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할 정도로 실력과 권위를 인정받았다.
조선 태조 이성계도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 풍수지리를 활용했다. 한양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말은 고려 11대 문종 때부터이다. 이때 인주 이씨인 이자연은 딸 3명을 문종의 왕비로 출가시켰다. 한강 하류 유역의 인주 이씨 가문은 자신들의 권세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하여 '송도는 지기가 쇠하였다', '한양이 명당이니 옮겨야 한다.'는 소문을 낸다. 그 영향은 고려 후기까지 계속 되었고, 이성계는 그런 소문이 자기의 정치적 상황과 부합하므로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하자마자 27일 만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다는 어명을 내렸다. 이와 같이 선대 왕조들은 도읍을 정할 때 풍수지리를 활용했다.
<8> 마을풍수, 산청 남사마을, 여의주 자리
◀ 사진①(위) 사진②(아래)
'마을풍수'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터에 대한 풍수이다. 한반도 마을들의 상당수가 풍수지리를 활용하여 입지했다.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산청 남사마을, 아산 외암마을 등 수많은 마을들이 그러하다.
그런 마을에는 풍수지리와 관련된 전설을 갖고 있다. 풍수전설은 마을이 그 터에 자리 잡게 된 연유를 말해주며,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긍지를 갖게 해주었다. 또 미래에 흥왕하게 될 것이라는 힘을 주기도 했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의 남사마을은 풍수지리를 활용하여 입지한 마을이다. 마을 남쪽에 용 모양의 산이 있고, 북쪽에도 용 모양의 산이 있다. 남룡이 북룡의 뱃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고 있는 산모양이다. 사진①은 남룡의 모습이다. 사진에서 오른쪽은 머리 부분이고, 왼쪽은 꼬리 부분에 해당된다. 용머리는 고개를 돌려 중앙을 향하고 있다. 용머리 앞에 있는 터는 여의주 자리가 되는데, 그 좋은 자리에 남사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특히 용의 입 바로 앞에는 골목이 있고, 골목 안 정면에는 대문이 있다. 그 집은 골목 입구에 口(입구 자) 모양의 나무 두 그루를 조성했다. (사진②) 용의 입에서 나오는 힘찬 산기운을 그대로 받기 위해서 만든 풍수비보(風水裨補)인 것이다.
한반도는 산이 많다. 아침에 눈떠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산을 바라보며 살다보니 주변 산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으며, 산에는 신령스러움(地靈)과 산기운이 있다는 정서를 가졌다. 그러한 정서가 풍수지리를 뿌리내리게 했다.
<9> 궁궐 풍수, 용상 뒤 병풍도 음양조화
'궁궐 풍수'는 왕이 사는 궁궐터와 건축물을 대상으로 하는 풍수다. 궁궐은 최고 권력자인 왕의 집이며, 국가의 중앙행정처였다. 풍수지리를 믿었던 왕들은 나라의 번영과 종묘사직을 위해서 당연히 풍수 지리적으로 좋은 궁궐에서 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왕은 뛰어난 인재들을 활용, 가장 수준 높은 풍수 이론을 궁궐에 적용시켰다.
우리나라에서 궁궐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곳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서울의 궁궐들이다. 이들 궁궐은 주변 산줄기와 물줄기를 풍수적으로 분석하여 택지됐다. 그리고 경복궁 안에서 제일 큰 건물인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과 법령 반포 등 국가대사가 거행된 곳이다. 그렇게 중요한 건물의 전후좌우에 풍수지리와 관련된 석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왕이 앉는 용상 주변까지도 풍수지리를 활용했다. 용상 뒤에는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사진)이란 병풍이 있다. 하늘의 붉은 원은 태양으로 양을 상징하고, 하얀 원은 달로 음을 상징하므로 음양이 조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다섯 개의 봉우리는 오행의 기운이 모두 갖추어진 산들이다. 가운데에 가장 크게 그려진 산봉우리 앞에는 용상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왕은 제일 왕성한 뒷산의 기운을 받는다. 병풍 좌우측으로는 소나무가 있는 산들이 있다. 이 산들은 뒷산의 오봉과 어울려 산기운이 흩어지지 않도록 장풍(藏風)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 봉우리의 양옆으로는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 물줄기들은 계수즉지(界水則止)의 원리를 뜻한다. 즉, 산기운은 물을 만나면 멈추므로, 용상에 좋은 산기운이 모여 있음을 의미한다. 일월오봉병은 왕이 앉는 용상을 명당으로 만드는 풍수비보(風水裨補)이다. 궁궐에 사는 왕은 주변 산들과 건물들을 포함하여 용상의 병풍까지도 풍수지리를 활용하였다.
<10> 사찰 풍수, '머리감는 여인' 토함산과 불국사
'사찰풍수'는 사찰의 터와 건축물을 대상으로 하는 풍수이다. 불교를 믿었고 풍수지리도 믿었던 우리 민족은 많은 사찰들을 명당에 택지했다.
경주 불국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명찰이다. 그 곳에는 풍수지리가 활용된 건축의 미가 있다.
경주 외동읍 영지에서 토함산을 풍수적으로 바라보면, '여자가 머리를 감고 있는 산 모양(옥녀세발형)'이다. 토함산에서 경주 시내 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들을 여자의 머리카락으로 해석한다. 불국사는 그 산줄기 중에 가장 좋은 산기운을 가진 기슭에 자리한다.
또한 불국사의 아름다움은 전면에 배치된 축대(위쪽 사진)에 있다. 비탈진 불국사에서 대웅전 뒤에 축대가 있었다면 그런 아름다움을 연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축대가 무슨 이유로 앞에 있게 되었을까.
여자가 머리를 감고 있는 산 모양에서는 산줄기인 '머리카락'이 손상되는 것은 좋지 않다. 머리카락이 손상되면 땅기운도 손상된다. 그러므로 불국사는 뒤쪽을 깎아서 축대를 만들지 않고, 앞쪽으로 축대를 쌓아 땅을 파지 않고 건축한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감으려면 물이 필요하므로 마당에 연못을 파놓았다. 축대에는 '물이 찰랑거리는 듯한 항아리 모양(사진)'의 돌기둥도 만들어 놓아 금상첨화를 이루어 놓았다.
그 위에 범영루(泛影樓)라는 현판은 '물 위에 비춰진 고운 여자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누각'을 뜻한다. 이 외에도 수많은 문화재급 사찰들은 풍수지리를 활용하여 주변의 산들과 조화를 이루며 택지, 건축되었다.
<11> 서원 풍수, 사대부가 직접 택지, 명당 많아
'서원풍수'는 조선시대의 서원을 대상으로 하는 풍수이다. 사대부는 자신들의 선현을 모시는 서원 터를 정할 때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직접 풍수지리를 공부해 택지하고 건물 방향을 정했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점잖은 유학자들이 유학만 공부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승까지 역임했던 하륜, 황희, 맹사성, 유성룡, 이항복, 송시열 등 많은 사대부가 풍수지리를 했다.
사대부에서 사(士)는 선비를 의미하고, 대부(大夫)는 3정승 6판서를 포함, 종4품 이상의 관직을 가진 양반들을 지칭한다. 그런 관직에 오른 사대부들은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과거시험에서 문과 급제했던 인재들이다. 그들이 남겨놓은 문화재가 서원이며, 이름난 서원들은 거의 명당에 위치해 있다.
경북 안동시에 있는 도산서원을 보자. 도산서원의 혈자리는 전교당이라는 강당이 아니고,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짓고 기거하셨던 도산서당(사진)이다. 서애 유성룡을 비롯한 수십 명의 정승 판서들이 배출된 터가 도산서당이다. 도산서당의 뒤뜰은 담장으로 둘러싸서 다른 건물을 세우지 않았다. 이것은 뒷산에서 도산서당으로 내려오는 좋은 산기운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도산서원에 갔을 때, 잠시 쉬더라도 도산서당에서 쉬면 명당의 기운을 받을 수 있다. 현대에 와서도 집 뒤에 도랑이 있으면 좋지 않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배산임수'일 때 집 뒤에 도랑이 있으면 집으로 들어오는 산기운을 희석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서원은 궁궐이나 사찰처럼 화려하지 않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서원에 가서 몇 개의 건물들만 잠시 둘러보고는 별 감동 없이 나온다. 조선시대 서원은 유교와 풍수가 함께 있는 곳이다. 그 점을 유념하고 서원을 보면 그 맛은 훨씬 깊어진다.
<12> 전통가옥 풍수, 집안 청결로 좋은 기운 수용
'전통가옥 풍수'는 양반집을 대상으로 하는 풍수이다. 지금 남아 있는 양반집은 거의 조선시대의 것이다. 풍수지리로 좋은 터를 잡으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했고, 권력도 갖고 있어야 수월했다. 일반 백성들은 돈도 권력도 없었으므로 좋은 터를 정해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경제력과 권력을 갖춘 사대부들은 풍수지리를 직접 공부해 자기 집터와 선산을 정했다. 그렇다고, 풍수지리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사대부라는 것은 아니다. 사대부들의 풍수지리를 풍월로 들어서 떠들고 다닌 사람들도 많았다.
영의정 유성룡을 배출한 하회마을의 '양진당'이라는 전통가옥을 보자. 대문을 열면 밖으로 좋은 산봉우리가 보인다. 벼슬을 나타내는 홀봉(笏峯)이다(사진). 좋은 모양의 산봉우리는 좋은 산기운을 갖고 있으므로, 양진당은 그 기운을 대문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사대부들은 깨끗한 집을 만들어 놓고 좋은 산기운을 맞이하려고, 아침마다 마당쇠에게 마당을 청소시켰다.
'집안에 먼지가 조금은 있어야 부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던 일반 사람들의 얘기다. 옛날 양반집이나 요즘 부자집들을 보면, 전부 청소가 잘 돼 있었고 지저분한 집은 없었다.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상황에 갑자기 손님이 찾아오면 집안은 어질러져 있고, 청소가 덜 돼 있기 십상이다. 그때 손님은 집주인에게 '집안에 먼지는 좀 있어도 된다. 청소할 시간에 한 푼이라도 버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니 먼지가 있다고 미안해하지 마라'는 뜻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반질반질 윤기가 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깨끗하고 단정한 느낌이 들 정도로는 정리정돈하고 청소를 해야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다.
<13> 왕릉 풍수, 국운 좌우할 선왕의 묘 자리
'왕릉풍수'는 말 그대로 왕릉을 대상으로 하는 풍수이다. 왕족의 무덤은 능(陵), 원(園), 묘(墓)로 분류된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왕세자나 왕세자비 그리고 가까운 왕의 친척 무덤은 원이라 했으며, 그 외의 왕족 무덤은 묘라 했다. 한 때 왕과 왕비였지만 폐위된 연산군, 광해군, 장희빈의 무덤들은 묘라 불린다.
풍수적으로 왕릉을 공부하려면, 서울 근교에 모여 있는 조선시대의 왕릉이 가장 바람직하다. 경주의 신라 왕릉은 풍수이론이 정립되기 전의 왕릉이 많으므로 풍수공부하기에는 조심스럽다. 고려 왕릉의 대부분은 개성 주변에 있으므로, 답사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앞으로 특별한 얘기가 없는 한, 필자가 말하는 왕릉은 조선 왕릉이다.
풍수지리는 사대부뿐만이 아니고 왕들까지도 신봉했다. 왕세자로 있다가 왕으로 등극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선왕의 국장(國葬)을 치르는 일이다. 선왕을 좋은 터에 묻어야 새 왕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던 조선왕조다.
새 왕은 신하들에게 선왕을 모실 명당을 찾으라고 하명한다. 그러면 신하들은 자기가 갈고 닦은 풍수실력을 발휘한다. 조선시대에는 시대에 따라 훈구파와 사림파,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 등의 당파가 있었다. 국장을 치를 때, 신하들은 자기 당을 대표하여 선왕을 모실 좋은 명당터를 왕에게 상소한다.
이때, 풍수실력이 좋아서 명당을 택지하여 상소하면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되고 자기 당파의 정치적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풍수실력이 짧아서 명당을 상소하지 못하거나, 흉당을 명당으로 잘못 알고 상소하면 조선왕조의 발복을 저해하는 신하로서 역적이 돼 유배, 사사받게 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사대부들은 풍수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왕릉은 풍수이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 이론을 집약시켜 놓았다. 고속도로나 국도 주변에 보이는 일반 묘들은 검증되지 않은 터라 할 수 있지만, 문화재인 조선 왕릉은 그 당시 최고의 풍수실력가인 사대부들이 목숨 걸고 잡았던 터이며, 검증된 터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풍수공부를 조선 왕릉에서 검증하면서 시작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14> 담장과 장풍, 거센 바람 막고 좋은 기운 모아
◀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충효당
문화재인 궁궐·사찰·서원·양반집·이름난 마을들을 다녀보면 명당에 위치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좋은 명당이라 할지라도 풍수이론의 모든 조건을 구비한 명당은 거의 없다. 명당이라도 조금씩은 흠이 있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명당에 약간의 흠이 있음을 알고, 그 땅에 알맞은 풍수비보(風水裨補)를 하고 살았다. 풍수비보를 요즘은 풍수인테리어라 부르기도 한다.
장풍(藏風)이라는 풍수이론을 가지고 현대적인 풍수인테리어를 활용해보자. 장풍이란 거센 바람으로부터 터를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좋은 기운을 모으는 것이다. 터에 거센 바람이 불지 않도록, 주변 산줄기들이 새의 둥지처럼 잘 둘러싸여 있어야 좋다. 그것이 여러 겹으로 터를 둘러싸고 있으면 더욱 좋다.
궁궐·서원·양반집 등을 보면 마당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의 영역을 나타내기 위해서 담을 둘러쌓았다. 집을 둘러싼 담은 가장 가까운 장풍을 만들어준다. 담은 담 밖의 거센 바람이 담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올 때, 부드러운 바람으로 만들어 주어 집안에 좋은 기운이 모여 있도록 해준다.
아파트에는 담이 없다. 섀시와 창문이 거센 바깥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의 방이 작다고 방과 붙어있는 발코니를 없애고 넓혀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두 겹으로 돼 있던 장풍을 한 겹으로 만든 경우가 된다. 방은 넓어졌을지 몰라도 풍수인테리어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이다.
퇴계 이황선생이 주무셨던 도산서당의 방은 2평도 되지 않았으니 아이들 방의 크기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듯하다.
또한 잠을 잘 때에는 커튼을 치고 자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한 겹이라도 더 많은 장풍을 이루어 좋은 기가 모이고 안락한 잠자리를 만들어 낸다.
<15> 산맥과 정맥, 신경준 책 '산경표'가 정통 족보
우리는 어릴 적부터 태백산맥·소백산맥·노령산맥 등을 듣고 배웠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 선조들은 그런 산맥 이름들을 몰랐다. 그렇다면 그런 산맥 이름들은 언제 만들어진 것인가. 1903년에 고토 분지로라는 일본 학자가 한반도의 지하자원을 연구한 논문에서 비롯되었다.
그 논문의 산맥 개념은 우리가 평소 생각했던 산맥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보통 '산맥'이라고 하면, 산과 산 사이는 능선으로 연결이 되어 있으며, 그 길이는 몇 십 ㎞ 또는 몇 백 ㎞가 될 정도로 긴 산줄기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산맥의 능선은 강이나 물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산악인들이 산맥을 종주하다 보면, 노령산맥은 금강을 건너야 하고, 차령산맥과 광주산맥은 한강을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면서까지 산맥을 타는 것은 종주가 아니다.
산악인들이 등산을 처음 시작할 때는 주변의 산이나 전국의 이름난 산들을 올라간다. 산에 많이 익숙해지면 큰 산맥들을 종주하게 된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종주를 할 때 산맥이 물에 의해 끊어져 있어서 산악인들은 항상 고민했다. 땅 속의 지하자원을 연구한 논문을 믿고서 땅 위의 산들을 등산했으니 산맥의 종주가 될 리가 없었고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80년께 '백두대간'과 '13정맥(正脈)'이라는 산줄기가 기록된 '산경표(山經表)'라는 책이 발견된 후부터, 산악인들은 물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은 산줄기를 등산하는 진정한 종주를 하기 시작했다.
산경표는 조선시대 영조 때 실학자였던 신경준이 옛 자료를 모아 쓴 책이다.
산경표는 백두산부터 시작된 한반도의 큰 산줄기를 족보 형식으로 쓴 것으로 이 책은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의 산줄기와 거의 같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선조들은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의 산줄기를 알고 있었고, 풍수지리에서도 이와 같은 산줄기를 활용한다. 풍수지리학은 산줄기와 물줄기를 분석하는 학문이다. 잘못된 산줄기와 물줄기 자료를 가지고 풍수를 한다는 것은 나중에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산을 보아 왔던 시각을 많이 잊어 버렸다. 또한 한반도의 지하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일본의 식민논문을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은 우리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16> 풍수로 본 산줄기, 한반도 모든 산의 시조 '백두산'
한반도의 산줄기는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되어 있다. 1대간은 백두대간을, 1정간은 장백정간을, 그리고 13정맥은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13줄기의 큰 산줄기들을 뜻한다. 이 산줄기들은 우리 조상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 산줄기를 파악한 것이고, 또한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풍수지리와 관련, 2가지의 개념을 가지고 이 산줄기들을 풀어보자. 첫째로 '산은 물을 건널 수 없다'이며, 둘째는 '물은 산을 갈라놓는다.'이다.
먼저 '산은 물을 건널 수 없다'에 대해서 알아본다. 한반도의 산들은 모두 백두산에서 시작된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리는 산줄기는 산과 산을 능선으로 연결하면서 한반도 전역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 산줄기들은 두 갈래, 세 갈래 등으로 나눠지면서 계속 뻗어 내려오다가 마지막에는 개천이나 강이나 바다를 만나서 산줄기가 끝나게 된다. 이렇게 산줄기가 물에 의해 정지한 것을 풍수에서는 계수즉지(界水則止)라고 한다.
다음으로 '물은 산을 갈라놓는다.'는 것은 개천이나 강물이 그 양 옆의 산줄기들을 갈라놓아 서로 산기운이 오고가지 못하게 함을 뜻한다. 예를 들면, 낙동강은 부산 쪽의 산줄기와 김해 쪽의 산줄기를 갈라놓아 서로 다른 산기운을 갖게 만든다. 즉, 부산 쪽의 산줄기들은 낙동강을 넘어 김해 쪽으로 갈 수 없고, 김해 쪽의 산줄기들은 낙동강을 넘어 부산 쪽으로 갈 수 없다.
한국인이라면 애국가에 나오는 백두산이 우리나라의 최고의 산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백두산이 제일 높고 큰 산이기 때문에 최고의 산으로 상징되는 것도 있지만, 그 외에도 풍수지리적인 입장에서도 최고의 산이 된다.
첫째로 '산은 물을 건널 수 없다'라는 논리에서, 만주 쪽의 산기운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한반도의 산으로 올 수 없고 한반도의 산기운도 만주 쪽의 산으로 갈 수 없다. 둘째로 '물은 산을 갈라놓는다.'라는 논리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은 만주 쪽의 산과 한반도의 산들을 갈라놓는다. 오직 백두산만을 통해서만이 만주 쪽 산과 한반도의 산들이 연결되어 있다.
만주대륙의 산기운은 모두 백두산만을 통해서 한반도로 유입되어 다시 모든 한반도의 모든 산으로 뻗어나가므로 백두산을 시조 산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17> 풍수의 3대 기류, 산 모양새가 좋은 땅 위치 좌우
풍수지리는 '산에는 산기운이 있고, 물에는 물 기운이 있다'고 전제하고 시작하는 학문이다.
즉, 땅에는 땅마다의 땅기운(地氣)이 있으니 좋은 땅과 흉한 땅을 잘 살펴 택지하고, 그 자리에서 어디를 바라보고 건축물을 짓고 살 것인가, 조상의 유해를 잘 모실 것인가 하는 것이 풍수지리다. 그러기 위해서 2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는 터를 잘 택지해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터에서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풍수이론들이 만들어지고 발전했다. 풍수 이론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형세론, 형국론 그리고 좌향론이다. 형세론과 형국론은 터를 정하는 이론이고, 좌향론은 터 잡은 후에 어느 쪽으로 방향을 정할 것인가를 논하는 이론이다.
형세론과 형국론을 먼저 사용하여 그 터를 정하고, 그 터가 정해지고 나면 좌향론을 사용하여 그 터에 맞도록 건축물이나 봉분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순서가 된다.
형세론(形勢論)은 통일신라 때 중국 당나라에서 수입된 이론으로, 산줄기와 물줄기를 구분해서 좋은 땅과 흉한 땅을 구분한다. 뒷산에서 어떠한 터까지 연결되어 들어오는 산줄기를 파악하고, 그 터를 둘러싼 주변의 여러 산들을 분석, 그러한 산과 산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를 파악하여 어느 땅이 좋은 곳인가를 알아내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뒷산, 주변의 산, 흐르는 물, 골짜기 등등 각 분야별로 파악하여 그 땅이 좋은 곳인지를 판단하는 이론이다.
형국론(形局論)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풍수이론으로, 산모양을 보고서 좋은 땅을 찾는 이론이다. 산 모양이 봉황, 사람, 소 모양을 닮았으니 하는 이론이다. 산 모양이 어떤 모양을 닮았기에 그 안에서 좋은 땅은 어느 곳일 것이라는 풍수이론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산이 소(牛) 모양의 산이라 하자. 소에서 가장 좋은 기운이 모여 있는 곳은 항상 먹을 풀이 있어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위장이 되므로, 마을이나 집이 위장 부위에 해당하는 터에 택지하는 것이다.
좌향론(坐向論)은 앞산이나 옆산을 분석하거나, '나경'이라는 옛날 나침반을 사용하여 건물이나 봉분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18> 기세 있는 산, 산정기 보내주는 발전소 '세산'
◀ 북한산(사진)처럼 기세 있는 산은 그 지역에 산기운을 보내 준다.
한반도는 산악 국가이다. 그 삶의 터전에서 우리 민족은 항상 산을 바라보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산악을 숭배하게 되었고, 누구나 좋은 산정기를 받아 태어나고 자라고 살기를 바랐다.
큰 산에는 큰 산기운이 있고, 작은 산에는 작은 산기운이 있다. 신라시대부터 이미 삼신오악(三神五岳)의 큰 산기운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삼신(三神)은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이며 오악(五岳)은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팔공산이다.
이런 산을 '기세 있는 산'이라고 해서 세산(勢山)이라고 한다. 위의 산들을 포함해서 덕유산 속리산 월출산 같은 세산도 있고 큰 도시나 지역에 산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서울의 북한산, 부산의 금정산 같은 세산도 있다.
세산은 그 지역에서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지고 이름난 큰 산이다. 세산은 그 지역에 산기운을 만들어 보내주는 발전소 같은 산이다.
그런데 세산은 워낙 규모가 크고, 큰 바위들도 많이 튀어나와 있고 거칠기까지 한 산들이 많다. 그러므로 세산은 힘찬 산기운을 보내주면 되는 것이지, 집터나 무덤 터에 아주 가까이 있을 필요는 없다. 전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발전소를 우리 집 뒤에 놓아둘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도읍이나 큰 마을에 산기운을 보내주는 세산들을 보면, 몇 ㎞ 또는 몇 십 ㎞ 떨어진 곳에서 산기운을 보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산이 힘차고 좋은 만큼 그 지역에 크고 좋은 기운이 전해진다.
<19> 단정한 산, 강한 기운 부드럽게 하는 '형산'
◀ 경북 경주 인터체인지 근처 망산은 단정한 모양의 형산이다.
지리산 소백산 북한산 월출산과 같이 산이 크고 웅장하면 엄청나게 기세 있는 산기운을 갖는다. 그런 산을 세산(勢山)이라 한다. 크고 웅장하다 보니 산 전체나 정상에 바위들이 크게 튀어나와 있어 거칠기까지 한 세산들도 많다.
거칠고 강한 세산의 산기운이 살고 있는 터까지 직접적으로 오면 안 된다. 세산의 강한 산기운은 부드럽게 변해서 터까지 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 뒤에 작은 산이 있는 것이 좋다. 이런 산을 형산(形山)이라 한다. 궁궐 사찰 서원 왕릉 등 문화재를 다녀보면 그런 건축물 뒤에는 작은 산이 버티고 있다.
형산의 역할은 세산의 거칠고 강한 기운을 부드럽게 해주는 것이다.
세산이 산기운의 발전소 역할을 한다면 형산은 집 뒤에서 변압기 역할을 한다. 형산은 세산의 강한 산기운을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전환시켜 준다.
형산은 단정한 모양의 산이면 좋다. 즉 형산은 부드럽고 균형 있게 솟아오른 산이 되거나, 둥글게 솟아오른 산이면 좋다. 바위가 거칠게 튀어나와 있거나, 돌들이 부스러져 흘러내리거나, 산모양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는 형산은 좋지 않다. 자기 집 뒤에 단정한 형산이 있다면 좋은 산기운을 받고, 평지에 있는 집도 조금 멀리서라도 그런 형산의 기운을 받는다면 좋다.
<20> 세산 형산 혈, 혈자리서 세산 안보여야 좋은 터
◀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주변. 큰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듯한 불암산이 멀리 보인다.
어떤 터에 산기운을 보내주는 기세 있고 웅장하고 거친 큰 산을 세산(勢山)이라고 한다. 세산의 산기운은 너무 강하므로 부드러워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세산의 산줄기가 어떤 터 뒤까지 와서는 부드럽게 작은 산으로 변화되어야 좋다. 이런 산을 형산(形山)이라 한다. 단정하게 솟아오르거나 균형 잡힌 형산이면 그 터에 좋은 산기운을 보내 준다.
사진을 보자. 경기도 구리시에 9개의 조선 왕릉이 모여 있는 동구릉(東九陵)이다. 큰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듯한 세산인 불암산이 멀리 보인다. 가까운 곳에는 나지막한 형산인 검암산이 있다. 그리고 형산 아래에 혈자리인 왕릉이 있다.
즉 세산(불암산)의 강한 산기운이 형산(검암산)의 부드러운 기운으로 변하여 혈자리(왕릉)에 좋은 산기운을 전해주고 있음을 뜻한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터에서 세산이 보이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터에서 강하고 거친 세산이 보이면, 그만큼 강하고 거친 산기운이 그 터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 혈자리에서 뒤를 보면 형산인 검암산만 보이고, 세산인 불암산은 보이지 않는다.
문화재급인 사찰이나 서원이나 전통가옥들을 답사해보면, 중요건물에서는 대부분 형산만 보이고 세산은 보이지 않는다.
거친 세산 가까이 있는 터일 경우에도 단정한 형산의 보호를 받아 세산이 보이지 않으면 좋다. 〈끝〉
신도시 개발에 대한 한 풍수
왜 한강변 아파트는 모두 한 방향을 향하나?, 富貴를 이어온 명문가가 한남동에 몰리는 이유?, ‘동탄2차신도시’ 풍수는 교육·행정도시 적격
◀ 경기도 화성 동탄2지구 신도시 예정지역 일대. 사진 위쪽으로 보이는 동탄1지구 동쪽에 660만 평 규모로 조성된다
신도시 건설계획 발표가 잇따르고 있다. 최근 나온 동탄신도시 개발에도 많은 이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아파트 풍수’에 관심이 많은 한 풍수학자가 정부의 신도시 건설에 대해 충고한다.
신도시에 입주를 희망하는 이들의 관심사는 무엇일까? 그 답은 분명하다. 우선 현재의 분당처럼 쾌적한 삶의 공간이 되어 아파트값이 제대로 형성될 것인가, 다른 하나는 교육환경이 분당·강남처럼 좋아질 것인가 여부다.
쉽게 말해 ‘돈’과 ‘교육’문제가 오늘날 도시인들이 아파트와 주택을 구매하는 최우선 조건이다. 최근 건설계획이 발표된 동탄신도시의 성패 또한 이 두 가지 조건을 정부나 시공업체들이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도시 건설을 바라보는 풍수 전문가들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우선 후보지의 특성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땅 위에 표현되는 도시의 특성과 품격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 도시를 공간적으로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도시의 성쇠(盛衰)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풍수를 흔히 ‘산(山)과 물(水), 방위(方位)’에 관한 이론이라고 한다. 산과 물, 그리고 방위에 따라 그곳에 사는 사람의 성품이 달라지고 부귀빈천(富貴貧賤)에도 차이가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를 과연 황당한 수사로만 여길 것인가? 이미 조성된 대도시에서 그 증거들을 찾아보겠다.
서울을 관통하는 가장 큰 물길은 단연 한강이다. 산업화와 함께 서울이 도시화하고 부가 집중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돈이 집중되는 지역과 한강의 흐름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림1 참조>
‘물길의 흐름’이 ‘돈의 흐름’ 결정
아래 그림에서는 ‘물길’이 감싸고 도는 지역을 서교동(1960년대) → 여의도(1970년대) → 동부이촌동(1980년대) → 강남(1990년대) → 광진구(2000년대) → A지역(?)으로 표기했다.
이것은 한강변을 좌우로 해서 1960년대에는 서교동에 부자들이 몰렸다 이곳이 포화하자 1970년대에는 여의도로, 1980년대에는 동부이촌동, 1990년대에는 강남, 최근에는 광진구 일부에 돈이 몰리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곳에는 지금도 여전히 돈 많은 부자들이 살고 있다.
▲ 한강의 물길을 따라 조성된 서울의 아파트군
각 지역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발견된다. 무엇보다 강의 물길이 해당 지역을 감싸고 돌고(環抱)있다는 점이다.
풍수적으로는 물이 감싸고 도는 곳을 ‘퇴적사면’이라고 하여 좋게 여긴다. 퇴적사면은 돈이 몰리고 건강에도 좋은 땅이라는 이유에서다. 반면 물길이 등을 보이는 반대편을 ‘반궁수(反弓水)’라 하여 꺼린다.<그림2 참조>
한강을 가운데 두고 조성된 이들 서울의 부도심을 살펴보면 시대적으로 약간의 차이도 발견된다. 한강 하류부터 시작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돈이 집중되는 지역이 새로 생겨났다는 점이다. 또한 물길을 감싸고 도는 둘레의 크기에 따라 부자 동네의 크기도 비례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에서 제시한 마지막 ‘A’ 지역이 어디이며, 언제 개발돼 그곳에 돈이 몰릴지 궁금한 독자들은 일반 교통지도를 펴 놓고 한강의 흐름을 살펴본다면 쉬 그 지역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산의 얼굴·등이 ‘길흉’ 결정하기도
이곳, 즉 A지역의 개발이 시작된다면 그곳에 돈이 몰릴 것이며, 이곳의 개발이 완료되면 서울의 한강 주변은 완전 포화 상태가 된다. 그때를 즈음하여 이미 박정희·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하다 실패한 ‘수도 이전론’이 또 다시 시대의 화두가 될지 모른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한강의 ‘강변북로’를 따라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한강변에는 특정 회사에서 지은 아파트가 일관되게 일정한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어떤 까닭이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풍수를 적용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풍수에서는 물이 흘러드는가, 아니면 흘러나가는가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에 따라 길흉화복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거 조선 초 한양 천도를 하면서 서울의 주산을 북악으로 할 것인가, 인왕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오랜 논쟁을 벌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최근 한강 주변의 아파트들은 좋은 조망권 덕분에 평수에 따라 적게는 몇천만 원에서 많게는 몇억 원까지 프리미엄이 따로 붙어 있다. 그렇지만 한강이 바라보이는 모든 아파트가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그림3 참조>
<그림 3>에서는 상류에서 흘러오는 물을 바라보게 지은 아파트, 흘러나가는 쪽을 바라보게 지은 아파트,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게 지은 아파트 등 세 방향으로 크게 나누어 보았다. 모두 한강을 조망하기는 마찬가지이니 똑같은 프리미엄이 붙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풍수 전문가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풍수에서 물은 곧 재물이다. 돈(재물)이 흘러들어와야지, 빠져나가면 결코 안 되는 탓이다. 흘러드는 물길 쪽을 바라보는 집을 높게 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 연유한다.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아파트는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 아파트뿐만 아니라 마을이나 무덤도 마찬가지로 기(氣)가 빠져나간다고 흉하게 여긴다. 여기서 말하는 기(氣)는 곧 재물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예부터 풍수가들은 작게는 집·무덤·마을, 크게는 도읍지까지 그곳을 관통하거나 감싸고 도는 물길의 향배를 꼼꼼히 따졌던 것이다.
산 또한 물 못지않게 중요하다. 산의 크기·모양·토질 등 하나하나가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먼저 예로 들겠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산은 앞과 뒤쪽이 모두 균등한 기울기를 갖기는 어렵다. 한쪽은 완만한 경사를, 다른 한쪽은 급경사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이때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곳이 산의 얼굴(面)이 되고, 그 반대쪽이 등(背)이 된다.
얼굴이 되는 쪽에는 흔히 넓은 명당(들판)이 형성되고, 여러 물줄기가 합쳐져 완만하게 굽이굽이 흘러가지만, 등이 되는 곳에는 명당이 형성되지 못해 척박한 땅이 된다. 풍수에서는 얼굴 쪽에 터를 잡아야지 등 쪽에 터를 잡는 것을 금기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산들을 살펴보면, 얼굴이라기보다 등 쪽에 해당하는 산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그림4 참조> 아파트 또한 산의 얼굴과 등 쪽에 모두 들어설 수 있지만, 좋고 흉한 것까지 같을 수는 없다.
<그림 4>에서 경사가 완만한 얼굴 쪽은 물이나 바람의 흐름이 완만한 곳이어서 사람이 살기 편안한 땅이다. 반대로 등 쪽에 아파트가 들어서면 그곳에서의 평균 거주기간이 짧다. 누구한테 배신당하거나 회사가 부도나거나 돈을 떼이는 일이 많다.
물과 산에 이어 방위도 매우 중시된다. 왜 그럴까?
북반구 중위도 권역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는 남향이라야 쾌적한 기후 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냉난방 시설이 발달해 외부 기후 조건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지만, 서향 혹은 남서향 아파트나 주택이 얼마나 불편한가는 주부들이 더 잘 안다.
주부들이 편안하게 거주할 수 있는 방위는 가정의 화목에 매우 중요하다. 주택난이 심각했을 때와 투기 대상으로 아파트를 생각해 아무것이나 사들이고 팔 때라면 몰라도 ‘웰빙’을 염두에 둔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 아파트의 방위라고 할 수 있다.
풍수는 지형지세·기후와의 어울림
풍수의 3요소인 산·물·방위의 기본을 이야기했지만, 이것만 잘 살펴도 돈이 붙고 행복한 가정이 되는 터전을 만들 수 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만 좋아도 되는데,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된다면 금상첨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혹자는 서울에서 이 같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곳이 과연 어디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부(富)와 귀(貴)를 이어온 명문가들은 대부분 이를 지키려고 한다.
일반에도 잘 알려졌지만, 삼성그룹이 영빈관으로 활용하는 서울 한남동의 승지원 터도 그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이 1980년대에 지었다는 이곳 승지원에서 바라보면 한강물이 마치 방방하게 고여 있는 타원형 호수처럼 보인다. 앞서 언급한 대로 풍수에서 물은 재물을 상징하는데, 재물이 그득하게 고여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승지원은 남산을 주산으로 등지고 있다. 강 건너로 보이는 우면산은 소(牛)의 등이나 노적봉처럼 보이는데, 이 또한 지극히 단정하고 후덕하다. 단정하고 후덕한 노적봉은 곧 재물을 표현한다. 더구나 승지원은 따뜻한 남향을 하고 있다. 산·수·방위 세 가지를 기본적으로 충실하게 살펴 이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은 것이다. 고 이병철 회장은 누구보다 풍수에 조예가 깊었다고 알려져 있다.
토목과 건축기술, 그리고 냉난방 기술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 풍수라고? 많은 이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지만, 아무렇게나 산다면 몰라도 돈을 불리고 귀한 가정을 꾸리고자 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왜 다른 나라에서는 중시하지 않는데 우리만 유독 풍수를 따져야 한다는 말인가? 단지 전통 사상으로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집단 무의식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그 해답은 우리나라 산천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신라 말의 전설적 풍수 대가 도선(道先)국사에 이름을 가탁한 조선 후기 승려 출신의 어느 풍수 학인은 우리나라 땅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산세를 보면) 뭇 산은 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여러 물은 다투듯 빠르게 흘러나갑니다. 때로는 마치 용이나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모습이기도 하고, 여러 짐승이 제각각 도망치는 형세이기도 합니다. 혹은 멀리 달아나 제압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너무 짧게 끊어져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 하나하나를 모두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동쪽지역이 좋으면 서쪽지역이 나쁘고, 남쪽이 길하면 북쪽이 흉한 모습입니다.
(중략) 비유컨대 우리나라 땅은 병이 많은 사람과 같습니다.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는 것은 산천의 기운에 감응하는 까닭으로, 인심과 산천의 형세는 서로 닮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심이 통일되지 않으므로 구역에 따라 나뉘어 아홉 나라 혹은 세 나라로 분열돼 서로 전쟁이 끊이지 않고, 도적이 횡행해 억제하기 불가능한 것은 땅의 지세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백운산 내원사 사적기)
이 기술은 지나치게 우리 산천의 지형지세를 나쁘게 설명한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산길·물길·바람길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사람 살기에 부적절한 공간이 많다는 것을 지적한 것 또한 사실이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터 잡기에 풍수적 지혜를 활용하고자 하는 전통이 강했던 것이다.
그것은 옛날 터 잡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판교신도시 건설 과정에서 건설교통부가 ‘바람길’을 살려 자연친화적 아파트 건설을 꾀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동탄신도시는 돈 모이는 地勢
풍수에서 말하는 바람길·물길·산길은 구체적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까? 바람길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건강에, 물길은 재물(돈)의 증식에 영향을 준다. 또한 땅기운이 흐르는 산길이 제대로 확보되면 산천 정기를 제대로 받아 훌륭한 영재가 많아진다.
요즘 국력을 위해서는 인구 증가가 필요하다며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인구 증가가 능사가 아니다. 훌륭한 영재를 많이 배출해야 세계 경쟁에서 앞설 수 있다. ‘인걸은 지령이다’라는 말이 가장 절실한 시절에 좋은 땅에 터를 잡는 것도 특히 중요하다. 그것이 풍수의 지혜가 필요한 대목이다.
▲ 동탄신도시 예정지. 좌청룡이 발달해 교육·행정도시로 발달할 것이라고 풍수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그러면 최근 정부가 발표한 ‘분당급에 준하는 신도시인 화성 동탄지역’은 풍수적으로 어떤 곳일까?
새로 발표된 ‘분당급에 준하는 동탄신도시’는 이미 개발 중인 ‘동탄신도시’ 동쪽에 자리 잡았다. 기존 동탄신도시가 경부고속도로 서쪽에 있다면, 새로운 동탄신도시는 대부분 고속도로 동쪽에 위치한다. 이곳의 일반적 특징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서울의 주산 북악산과 같은 중심 되는 큰 산(主山)이 없다.
2. 신도시 예정지의 동쪽 경계지역을 200∼300m 안팎의 낮은 산들이 감싸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동과 북동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물은 남쪽으로 흐른다.
3. 경부고속도로가 예정지를 관통한다.
4. 북서쪽 신갈저수지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와 북동쪽 동탄면 신리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동탄면 소재지 남쪽에서 합수(合水)해 오산천으로 남하한다.
5. 주변 산들은 작은 꽃봉오리가 이어지 듯 부드럽고 아기자기하다.
6. 1개의 골프장이 예정지 한가운데 있고 나머지 2개도 인접해 있다.
이를 풍수 명당도로 그려보면 <그림5>와 같다.
이것들을 풍수는 어떻게 해석하며, 어떤 길흉화복을 예언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장남식 ‘풍수역학연구소’소장의 전반적 풍수 감정은 이렇다.
“이곳은 전체적으로 좌청룡이 발달한 곳이다. 청룡은 명예를 주관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기를 받는 곳은 교육·행정도시로 발달할 수 있다. 중심축을 형성하는 높고 큰 산(풍수에서는 主山이라고 말함)이 과거 계급-계층사회에서는 강력한 지도자나 영웅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곳은 그러한 주산이 없는 대신 작은 꽃봉오리 같은 산들이 아기자기 서로 기대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지기(地氣)를 받아 자유민주주의의 덕목인 평등과 자유의 가치를 존중하는 인물들이 발현될 땅이다.
또한 북서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과 북동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이 동탄면 소재지에서 합수해 수구를 막아줌으로써 새로 들어설 신도시 내의 지기의 누설을 막아준다. 돈이 모이는 곳이다. 총론적으로 말하면 돈이 모이며 자유시민의 덕목을 고양하는 교육과 행정의 도시가 될 것이다.”
그는 전반적으로 좋은 터이지만, 문제점도 지적했다.
하나는 예정지 서쪽으로 경부고속도로가 관통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예정지 안에 골프장이 있다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전체적으로 남향이지만 동쪽에 산이 많고 서쪽은 낮아 어떻게 보면 도시 전체가 서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남향이냐 서향이냐가 무슨 대수냐고 하겠지만, 앞에서 설명했듯 집안살림을 하는 주부들에게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고치거나 역이용해 풍수상 길지로 바꾸는 방법이 바로 풍수지리의 ‘좌향(坐向)’을 염두에 둔 공간배치론이다. 풍수적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배치하면 이러한 흉지를 길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좌향에 따른 공간 배치에서 풍수적 지혜를 활용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우선 공사비가 적게 들며, 분양이 쉽게 이루어진다. 또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만족해 하며, 궁극적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품성 형성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풍수에서는 1차적 작업인 터잡기뿐만 아니라 좌향에 따른 공간 배치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동탄신도시’의 공간 배치를 어떻게 하면 앞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명품도시가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장남식 소장은 다음과 같은 풍수적 견해를 제시했다.<그림6 참조>
“첫째, 예정지를 관통하는 경부고속도로 주변 좌우에 최고급 고층 아파트를 지어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해야 한다. 많은 동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10여 동만 디자인 공모를 통해 지어 놓으면 그 자체로 신도시 브랜드가 되며, 사람들로 하여금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것이다.
둘째, 좌청룡에 해당되는 동쪽의 산을 등지고 학교와 관공서들을 짓되 서향하게 한다. 명예와 권력의 지기를 뿜어주는 좌청룡을 등지고 들어서는 학교와 관청에서 공부하거나 근무하는 사람들은 잠재력과 능력이 배가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명문 교육도시가 될 것이다.
셋째, 대부분의 아파트는 현재 예정지 안에 있는 골프장을 둘러싸고 짓되 남향으로 한다. 남향집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주부들에게 좋다. 이렇게 하면 기존 골프장은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형상이 된다. 골프장이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서 있다고 가정해보라. 얼마 안 돼 그 골프장은 고객이 줄어들 것이며, 자연스럽게 녹지공원으로 바뀔 것이다. 어차피 골프장이나 공원이나 땅의 성격은 같다.
이렇게 하면 산들이 동쪽으로 몰려 있으면서 물은 남쪽으로 흐르는 지형지세를 자연스럽게 살려 그 위에 학교와 아파트들을 들어서게 할 수 있고, 골프장 문제도 저절로 풀릴 것이다.”
동탄신도시는 기본 입지가 풍수적으로 좋은 곳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곳을 염두에 두고 풍수적 좌향론을 참고로 몇 가지 공간 배치를 고려한다면 도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이렇게 산과 물을 풍수적으로 살펴 신도시가 들어설 터를 정하고, 좌향을 바탕으로 한 공간배치론에 따라 관공서·아파트·상가를 지으면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도시’가 된다. ‘명당도시’란 현대인이 선호하는 ‘명품도시’ ‘자족도시’를 뜻한다.
다시 조명받는 ‘도시풍수’
“서양 고대도시 건설도 ‘풍수’ 접목…, 광해군 때 ‘교하천도론’ 일기도”
우리나라의 풍수 역사에는 상당한 부침이 있었다. 전통적 풍수 관념이 도시 건설이나 주택(아파트)풍수로 발전하지 못하고 조선 중기 이후 묘지풍수로 타락한 탓이다.
그것은 조선 왕조의 국교인 유교 탓이었다. 유교의 실천 덕목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였다. 실천 덕목으로서의 효 관념이 풍수지리와 접목하면서 돌아가신 조상을 잘 모신다는 ‘묘지명당’ 관념으로 퇴락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묘지풍수에 한정된 것일 뿐, 풍수의 또 다른 분야인 양기(陽基)풍수는 도시 건설과 아파트 풍수에 기여할 많은 콘텐츠를 갖추고 있다.
서구에도 풍수와 비슷한 개념을 도시 개발에 ‘훌륭하게’ 적용한 고대 국가들이 있다.
“도시의 터를 잡는 입법자들뿐 아니라 도시를 건설하는 건축가들도 어떤 지역은 상대적으로 인간에게 좋거나 나쁜 성격을 형성하게 하고, 어떤 지역은 수질이 또 어떤 지역은 그 땅에서 자라는 생물이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영향을 주거나 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내용을 보면 마치 동양의 어느 풍수 전문가가 한 말처럼 들리지만, 발언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BC 429∼347)이다. 그 혼자 생각해낸 말일까? 그렇지 않다. 그 이전의 선배 학자이자 서구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BC 460∼377)가 이미 주장한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공기·물·장소>라는 글에서 “인간이 거주하는 곳의 기후와 땅이 인간의 물리적·도덕적 성격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면서 새로 들어설 도시의 입지·물·공기뿐만 아니라 도시의 전체적 좌향까지 강조했다.
고대 그리스의 두 현인이 신도시를 만들 정치가들에게 주었던 이러한 메시지는 BC 1세기에 로마의 유명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에게도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비트루비우스는 고대 그리스 건축학의 고전 <건축십서>에서 “건축가는 그 지역의 토양과 대기의 특성, 지역 특성, 그리고 물의 공급 등과 관련된 의술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썼다. 우리의 풍수 내용과 흡사한 주장이다.
이렇게 풍수와 유사한 관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도시와 건물들이며, 그 이후 르네상스를 거쳐 지금까지 서구 건축·조각·회화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은 계속된다.
우리나라에서 도시 건설에 풍수를 적용한 사례를 꼽으라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한양 입지 선정이다. 당시 한양은 도읍지로 쉽게 결정된 것이 아니다. 계룡산 신도읍·개성·무악(현재의 연세대 일대)·한양 등을 두고 치열한 풍수논쟁을 벌였는데, 이와 관련한 방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에는 도읍지를 한양에서 경기도 파주 교하로 옮기려는 ‘교하천도론’이 일기도 했다. 교하천도론의 배경에는 한양의 땅 기운이 쇠했으니 파주 교하로 옮기자는 당시의 풍수학인 이의신의 상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교하천도론과 풍수 논쟁이 벌어지지만, 얼마 후 광해군의 실각으로 천도론과 풍수 논쟁은 사라진다.
1979년까지 5년 동안 ‘백지계획’이라는 비밀 프로젝트가 정부에 의해 진행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수도를 서울에서 충남 공주군 장기면(현 행정수도와 근접지역)으로 옮기려는 비밀스러운 계획이었다. 그러나 ‘백지계획’은 박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말 그대로 백지가 돼버렸다. 이때도 풍수지리를 어느 정도 참고했다.
이후 전남도청을 광주에서 무안으로 옮길 때(풍수학자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관여), 행정중심복합도시 입지 선정, 2006년 각 도에 분산될 ‘혁신도시’ 입지 선정에서도 풍수를 어느 정도 참고했으나, 시민들에게는 그것이 그리 구체적으로 마음에 와 닿는 사건은 아니었다. 공공 관청이 들어서는 것인 만큼, 시민들과는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http://news.joins.com/article/2780022.html?ctg=1200
풍수지리로 본 서울 남대문 일대
관악산 火氣 못 다스려 숭례문(崇禮門)에 禍, 삼성본관 명당… 때 되면 地氣 상승
숭례문이 불에 타고 인근에 사옥을 둔 삼성이 특검 수사를 받는 등 숭례문과 인근 지역에 악재가 잇따르자 이곳 지기(地氣)가 다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시중에 유포되고 있다. 그러나 풍수 전문가들은 "근거 없는 얘기"라고 일축한다.
심재열 인천대 겸임교수는 "관악산에서 솟아오르는 불의 기운(火氣)이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어 항상 화재를 조심해야 한다."며 "사람이 대비를 소홀히 해 불이 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장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조선왕조가 마련한 안전장치 3개 중 2개가 없어졌기 때문에 숭례문에 불이 났다고 풀이한다.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조선왕조는 서울역과 남산 사이에 만든 연못 '남지'와 광화문 옆의 해태상, 숭례문 등 세 가지 안전장치를 만들었다"는 게 고 회장의 설명이다. 그러나 남지가 메워지고 해태상이 광화문 복원공사를 위해 이전하면서 숭례문이 홀로 관악산의 화기와 맞서야 했다는 것.
고 회장은 "숭례문이 혼자서 화기를 떠맡으려니 이길 수 없었다."며 "화기를 막을 안전장치가 모두 없어져 도성 안쪽에 재앙이 올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또 태평로1가 삼성 본관 건물은 지기가 다하기는커녕 천하 명당이라는 게 풍수 전문가들의 일치된 설명. 고 회장은 "태평로는 중국 청나라 때 사신들이 묵었던 숙소가 있던 곳이며 삼성 본관 건물은 과거에 돈을 찍어내던 자리로 돈이 쌓이는 터"라며 "명당인 이곳을 특검 수사와 연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심 교수도 "삼성 사옥과 롯데호텔, 한국은행 본점은 모두 명당 중 명당"이라며 "명당도 한때 굴곡을 겪게 마련이고 이때가 지나면 기운이 다시 올라간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삼성이 명당을 버리고 서초동으로 옮기려는 게 잘못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심 교수는 "삼성타운을 만들려면 태평로에 해야 한다"며 "좋은 터를 놔두고 왜 강남으로 가려 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풍수 전문가들이 손을 내젓고 있지만 삼성 사옥 주변 상권은 예전의 활기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소문 인근에서 담배와 문구 등을 취급하는 상인 이 모씨는 "5년 전만 해도 일주일에 500만원씩 팔았는데 지금은 100만 원 정도밖에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점심시간 서소문 뒷골목 식당에는 들어설 틈이 없을 정도로 여전히 사람이 많지만 옛날만 못하다.
삼성의 서초동 이전 소식에 관련 업체가 함께 이전하는 점도 상권 침체에 한몫하고 있다는 게 상가 주민들의 지적이다. 남대문시장 쪽에서 맞춤양복집을 운영하는 사장도 "이 일대에서 잘 되는 집은 일부 식당과 테이크아웃 커피점 정도일 것"이라며 "직영점이라 인건비며 기타 경비가 거의 안 드는 데도 남는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풍수만으로는 상권의 흥망을 설명하지 못하는 셈이다. 매일경제 김인수 기자 / 이유진 기자 2008.02.14 07:56:04 입력, 최종수정 2008.02.14 08: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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