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성곽

2009. 11. 28. 20:59風水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을 버리고 1394년 10월28일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을 새 도읍지로 정했다. 도읍의 본격적인 건설 사업은 그 해 12월 정도전(鄭道傳)에게 도시 건설을 착공하게 함으로서 시작 되었다. 경복궁을 선두로 종묘와 사직을 착공하는 등 궁성의 모습이 갖춰지고 1396년 전국 각지에서12만 명을 뽑아 도성의 성곽을 시작 98일 만에 완공하였다. 성곽의 길이는 17km로 각 구역마다 책임자를 정해 그들의 이름을 성벽에 새겨 넣었다.

성곽은 북악산(청와대 뒷산), 인왕산, 낙산, 남산 네 곳의 산을 연결해서 축조하였는데 이는 도시의 방어를 목적으로 하였다. 도성의 전체적인 완공은 30년 정도 걸렸지만 성곽은 석 달 만에 급조된 것이라 허술한 부분이 많아 세종 때에 이르러 석성으로 개축 되었지만 처음 완공 당시는 토성과석성이 혼합된 성곽이었다. 서울 도성은 수도를 방어하는 성이자 왕의 궁궐을 보위하고 있어 가장내부인 궁성인 경복궁, 그 바깥에 도성인 서울 성곽, 가장 외곽에 산성이 쌓여진 삼중 구조이다. 서울 성곽은 적의 공격에 대비한 성이기 보다는 궁궐을 보위하고 수도를 상징하는 성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변고를 치룬 왕조는 침략에 대비 유사시 적과 대응하기 위한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축조되었다. 서울 성곽은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인들이 도시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부분을 훼손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성곽은 70년대에 복원한 것으로 동대문과, 낙산, 성북동으로 이어져 북악산을 지나 인왕산, 세검정을 거쳐 북한산성에 이르는 성곽을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성곽은 숙종, 영․정조 때 개축된 것이 대부분으로 4대문과 4소문이 있다. 서울 성곽은 현재 사적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 성곽 및 4대문, 4소문 중 현재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 혜화문(동소문) 3문이 멸실 되었다.서울 성곽은 남대문부터 서대문에 이르는 성벽이 끊어져 있고,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가 끊어져 있으나 그 외 성벽은 복원이 되어 연결 되어 진다.

19세기 말 광화문 정문, 한양 대궐의 정문으로 문이 세 개다. 북한산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성의 방어 대책으로 축성론이 거론되어 숙종37년(1711) 4월3일에 착공하여 그 해 10월에 완공 했다. 북한산의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산줄기를 따라 연결된 산성의 총 길이는10km에 달한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산성의 용도가 적어져 많은 부분이 유실 되었고 일제시대와 6,25를 거쳐 파괴되었으나 최근 성곽을 복원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4대 개루왕5년(132)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인왕산 성벽과 탕춘대성을 연결하는 흥지문 또는 북한문 이라 한다. 좌측으로 물이 흐르는 오간수문이 있다.1921년8월 홍수로 유실 되었으나 77년 복원 하였다.

서울 성곽과 북한산성의 방위 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숙종44년(1718) 8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봄에 완성되었다.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을 연결시키고 있다. 탕춘대성이란 명칭은 현재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가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린 것이다. 인왕산 정상에서 내려온 성벽은 세검정 홍지문과 탕춘대성을 거쳐 북한산성으로 이어진다. 산중에 있는 성벽이라 보존이 잘 되었다. 인왕산 초입 교촌동 성벽은 인왕산 성벽으로 연결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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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서울의 중심은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도성 18km 안이다.

북악산은 경복궁의 뒤편에 솟았으며, 풍수지리상 현무의 자리에 속한다. 약 4km에 달하는 탐방로곳곳에는 빼어난 서울조망을 간직한 조망터가 많고, 구불구불 뻗은 옛 성벽을 따라 걷는 즐거움 또한 크다. 여유 있게 둘러보아도 2시간 30분이면 된다.

북악(北岳)은 서울의 주산으로 경복궁북쪽에 채 피지 않은 모란 꽃송이 모양으로 우뚝 솟아있다. 남산에 대칭해 북악이라 불렀으며, 일명 백악(白岳), 공극산(拱極山), 면악(面岳)이라고 불리었다.

백악 즉 북악은 서울의 중심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 가운데서도 더욱 뛰어나기에 조선왕조가 개국하면서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주산을 삼았다. 북악은 서울의 지형상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뒷산으로 북쪽에 위치해 남쪽으로 시가지를 품고 있는 자연지리 및 풍수지리상의 위치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겠다. 이러한 북악은 서울 도성 안 북쪽에 342.4m로 높이 솟아 있어 고려시대 이래로 주목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그 남쪽에 궁궐을 지었다. 그 후 오늘날까지 우리민족사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북악산은 1967년까지는 가벼운 등산길 이었지만, 1968년1월21일 북한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인해 수도권 경비 강화를 목적으로 북악산 길, 속칭 북악스카이웨이를 마련하고 등산로는 폐쇄했다. 이 등산로는 약 40년만인 지난 해 4월 5일 전면 개방되었고, 또 창의문에서 팔각정을 거쳐 성북구 까지 약 4km의 산책로가 마련되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창의문 쉼터가 가장 교통이 좋지만 그곳에서 북악산 오르는 길이 워낙 가팔라 보통은 말바위 쉼터나 홍련사 쉼터를 들머리로 잡는다.

성균관대 후문에서 지척인 와룡공원에 지붕이 달린 평상이 있는데, 이곳은 북악산을 찾는 많은 이들이 만남의 장소로 애용하는 곳이다. 여기서 성벽 너머로 이어지는‘말바위 쉼터 가는 길’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산성산행의 낭만과 여유를 즐기라는 듯 왼쪽으로 성벽을 끼고 한동안 평탄한길 이이어진. 입구등산로 주변으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른 십여 미터는 됨직한 아카시나무가 보기 좋게 자라고 있고, 국수나무, 벚나무, 정향나무 등 정겨운 우리나무들도 예쁜 명찰을 달고 반긴다. 돌이끼 낀 고성을 따라 이어지는 휴식 같은 길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침목 깔린 계단길이 나오고, 오르면 말바위 전망대다.

서울시 우수조망명소인 이곳에 서면 멀리 북동쪽으로 노원구의 수락산, 불암산에서 부터 남동쪽의 용마산까지 서울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아래 삼청터널 지나 만나는 삼청각과 길상사 등 성북동 일대의 옹기종기 예쁘게 들어선 주택단지도 손에 잡힐 듯하다. ‘말바위’는 서울성곽 중 북악산 북동쪽자락에 있는 바위로, 이름에 관해서는‘바 위 모양이 말의 머리를 닮아서 그리 부른다. 또는 ‘끝’ 말(末)자를 써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있고, 혹자는 부엉이 ‘휴’자를 써서‘휴암’이라고도 부르지만 모두 정설은 아니다. 산에 있는 바위라고해서 ‘뫼바위’라고 부르다가 ‘마바위’, ‘말바위’로 의미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말바위 전망대 위에‘말바위 쉼터’가 있다.

각 코스의 쉼터들은 출입통제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입구에 비치된 출입신청서를 작성한 후 신분증과 제출해서 패찰을 받은 후 본격적인 산행을 나선다.

성곽 위 여장(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몸을 숨겨 적을 감시하거나 치는 곳)을 오른쪽 에 끼고 이어지는 계단길에는 보도블록이 깔렸다. 여장 사이사이로 보이는 성밖 풍경을 보며 걷다보면 마치 조선의 초병이라도 된 듯 눈빛에 힘이 들어간다. 어느새 반듯하게 세워진 숙정문이 나타났다. 숙정문은 도성4대문 중 북대문으로, 유사시 왕이 이 문을 통해 보토현을 지나 형제봉능선을 따라 북한산성 대성문으로 피신하는 피신로이기도 했다.

성북동쪽 홍련사 쉼터에서 출발한길이 이 숙정문으로 이어진다. 숙정문에서 15분가면 왼쪽아래에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경복궁과 광화문, 종로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소다. 남산건너 불꽃너울처럼 일렁이는 산세의 관악산도 또렷하다. 관악산의 화기가 경복궁에 미치지 못하도록 예전에 광화문 앞에 불을 다스리는 해태상을 세웠다고 한다.

전망대 오른쪽으로 바위가 하나 보이는데, 그 꼭대기에 삼각점 같은 지석이 세워져있다. ‘촛대바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 곳곳에 박았던 철심 중 하나가 여기 있었다고 한다. 건너편 청운대에서 보면 촛대바위가 잘 보인다.

북악산에 걸친 서울성곽 중 가장 북쪽에는 ‘곡장’이라 부르는 특이한 성곽시설이 있다. ‘구부러진 성벽’이라는 뜻으로 성벽이 바깥쪽으로 불쑥 튀어나간 구조인데, 적의 동태를 살피고 방어하기 좋도록 일부러 만들어놓은 시설이다. 이곳에서면 북악산 정상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간 서울성곽의 역동적인 뒤틀림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또한 북악산 팔각정너머 북한산의 산세도 더할 나위 없이 멋지게 조망된다. 곡장에서 조금 내려서면 청풍암문(靑風暗門)을 만나면서 길은 성벽바깥으로 이어진다.

암문을 나서면 오른쪽에 서울성곽의시대별 축조형태를 비교해 둔 안내판이 있어 3차에 걸친 서울성곽의 축조 차이를 실제 성벽과 비교해가며 가늠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청운대를 만나 다시 성안으로 들어서기까지는 왼쪽으로 아름다운 옛 성벽을 끼고 가는 길이다. 옛것이 건네는 편안함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구간이다.

서울, 깊고 높은 아름다움 멋진 소나무가 자라고 통나무의자가 놓인 청운대도 둘도 없는 조망터다. 낙산과 홍인지문을 지나 멀리 남산으로 이어지는 성벽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운대를 지나 북악산정상으로 오르다보면 오른쪽성벽의 여장부분에 글자가 음각된 돌들을 보게 된다. 이는 대개 성벽 축조 당시 천자문 글자에서 따온 공사구역표시, 공사를 담당한 군현, 그리고 공사일자와 공사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등을 기록한 것들이다.

북악산 정상부의 다소 가파른 계단길이 시작되기 직전 오른쪽에는 흰 점이 군데군데 찍힌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1·21 사태 소나무’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아래의 안내판에는‘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했을 때 여기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이소나무에 15발의 탄환자국이 남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적혔다.

북악산 정상에는 ‘白岳山(백악산)’이라는 작은 표석이 세워져있다. ‘백악마루’라고 불리는 넓은 정상부에 서면 사방의 황홀한 조망에 넋을 잃을 지경이다.

북한산 향로봉에서 뻗어 내린 탕춘대 능선 자락으로 상명대와 구기동 주택단지가 올망졸망 살갑고, 평창동 산마을은 아무리 봐도 그림 같다. 인왕산의 기차바위 능선도 잘 보인다. 광화문 앞 세종로를 중심한 고층빌딩숲이 건네는 풍광도 좋다. 서울이라는 최고의 도시가 간직한 깊고 높은 아름다움을 북악산에서 제대로 볼 수 있다.

북악마루에서 날머리인 창의문 쉼터로 내려서는 길은 아주 가파른 계단이다. 성벽의 흐름도 아래로만 떨어져 내린다. 이 길을 반대로 오른다면 코에 단내가 나겠다. 성벽 너머로는 밤나무 숲이 울창하고, 가파른 길 덕분에 인왕산 자락과 세검정 쪽 풍광이 막힘없이 훤하다. 중간쯤에 깎아지는 성벽 옆으로 새둥지처럼 돌고래 쉼터가 들어서 있다. 여기서 창의문까지는 10여 분 거리다.

http://www.buka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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