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왕과 여자들

2009. 11. 20. 10:23歷史

[역사속의 Why] 고려의 왕과 여자들

인기 드라마 '천추태후'의 배경

고려에서는 왕의 본처를 왕후(王后), 첩은 부인(夫人), 어머니는 왕태후(王太后)라고 했다. 참고로 조선에서는 비(妃)와 빈(嬪) 그리고 대비(大妃)라고 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의 창업자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6명의 왕후(추존 포함)와 23명의 부인이 있었다.

조선의 경우 적자(嫡子)로 이어지던 왕통이 처음 방계로 이어진 것(傍系承統)은 선조 때다. 선조는 중종과 후궁 안씨의 손자였다. 그러면 고려에서 처음으로 방계 승통한 임금은 누구일까? 고려의 왕통은 태조 왕건이 943년 세상을 떠나고 혜종(惠宗·왕건과 장화왕후 오씨 사이에서 난 장남), 정종(定宗·왕건과 신명 왕태후 유(柳)씨 사이에서 난 둘째아들), 광종(光宗·정종의 동복아우) 등 이복(異腹)과 동복(同腹) 형제로 이어지다가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 경종(景宗)으로 이어진다.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는 이복남매 간이었다. 아마도 이 혼인이 없었다면 요즘 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천추태후'의 권력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종은 재위6년 만인 981년 2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태조 왕건 사후 38년이 흐르는 동안 혜종 정종 광종 경종 등 4명의 국왕이 바뀌었다. "소인들을 가까이 하고 착한 사람을 멀리했다. 이로부터 정치와 교화가 쇠퇴하였다"는 사평(史評)을 듣는 경종은 죽음을 앞두고 사촌 동생 개령군 치(治)를 불러 선위(禪位) 의사를 밝힌다. 자기 아들(훗날의 목종)은 아직 두 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종이 유일하게 평가를 받는 것은 이때 선위한 개령군이 왕위에 올라 비교적 안정된 정치를 베푼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령군 치는 경종의 외삼촌, 즉 훗날 대종(戴宗―추존왕)으로 불리게 되는 왕욱(王旭)의 아들이다. 왕욱과 (광종비) 대목왕후 황보씨는 둘 다 왕건과 신정왕태후 황보씨(원래는 왕후가 아니라 부인이었다가 개령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태후로 추존되었다) 소생이었다. 결국 왕건의 씨를 둘러싼 30명 가까운 여인들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자는 왕후가 아니라 부인에 불과했던 황보씨였다.

태조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던 왕욱은 이복누이인 선의태후(이것도 추봉) 류씨와 결혼해 아들 하나, 딸 둘을 두는데 그 아들이 성종(成宗)으로 즉위하게 되는 개령군이고 딸 둘은 각각 경종을 모셨던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이다. 경종이 미련 없이 개령군에게 왕위를 넘긴 것은 바로 이처럼 겹처남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되면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현대적 시각으로 봐도 이해하기 쉽지 않을 만큼 민망한 대목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981년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통치하고서 3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성종은 사관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특히 '고려사'를 편찬한 유학자들로부터 종묘사직을 설치하고 효자 효부를 기리는 등 유학적 세계관을 펼친 국왕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 성종도 역시 '고려' 사람이었다. 그의 왕후 류씨는 광종의 딸로 다른 종친에게 시집을 갔다가 뒤에 성종의 배필이 되었다 하니….

경종의 죽음으로 일찍 과부가 된 성종의 큰 누이이자 경종비였던 헌애왕후가 드디어 애정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미 경종과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던 헌애왕후는 남편이 죽자 궁궐 내 천추궁(千秋宮)에 거처하면서 외척인 김치양(金致陽)을 끌어들여 온갖 추문을 만들어낸다. 보다 못한 성종은 김치양을 외방(外方)으로 내쳤다. 997년 성종이 재위16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경종과 헌애왕후 사이에서 난 목종(穆宗)이 등극한다. 18세면 충분히 친정(親政)을 펼칠 수 있음에도 왕태후가 된 헌애왕후는 천추궁에 자리 잡고서 섭정을 한다. '천추태후'란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돌아온 탕아' 김치양은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고 심지어 목종 6년(1003년)에는 천추태후와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다.

천추태후와 같은 경종비였던 성종의 작은 누이 헌정왕후도 일찍 과부가 되자 왕건의 아들(이복 작은 아버지) 왕욱(王郁)과 통간하여 아들을 낳았다. 성종은 왕욱도 김치양과 마찬가지로 먼 지방(경상도 사천)으로 유배를 보낸 바 있다. 성종 사후 세상을 거머쥔 천추태후는 주변을 둘러보니 김치양과의 사이에 난 아들이 목종의 뒤를 잇는 데 방해물이 될 유일한 인물은 바로 헌정왕후와 왕욱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뿐이었다. 목종 재위기간 동안 왕순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왕순은 목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22년간 재위하게 되는 현종(顯宗)이다. 그 바람에 왕욱은 안종(安宗)으로, 헌정왕후도 효숙 왕태후로 추존됐다. 다소 복잡하지만 고려 초 왕실 상황은 그랬다.

이한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16/2009011601247.html 입력 : 2009.01.17 03:15 / 수정 : 2009.01.17 23:11

고려 목종을 폐립시킨 강조

천추태후의 반역음모 등 당시 어수선, '王씨의 고려' 지킨 그가 반역자인지 모호

시계를 정확히 1000년 전으로 되돌린다. 1009년(고려 목종12년) 1월(음력) 고려의 수도 개경에는 피 말리는 권력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병상의 목종(穆宗·재위 997~1009)은 친어머니인 천추태후와 그의 '연인' 김치양이 자신을 축출하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신왕(新王)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간파했다.

그냥 둘 경우 왕씨 왕조(王朝)가 김씨 왕조로 바뀔 판이었다. 여기서 목종은 그보다는 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자신에게는 숙부뻘인 대량원군(大良院君―훗날의 현종)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결심한다. 대량원군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견제를 받아 오랫동안 삼각산(북한산) 신혈사라는 절에 10년 이상 유폐되어 있었다.

문제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반역음모를 분쇄할 수 있는 무력을 확보해야 한다는데 있었다. 목종은 서북면 도순검사로 나가 있던 강조(康兆)를 떠올렸다. 목종은 한편으로는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을 개경으로 불러 올림과 동시에 강조에게도 사람을 보내 즉시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명했다. 서북면 도순검사는 평안도 일대를 책임진 최정예 부대 총사령관이었다.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목종은 강조를 믿고서 불렀는데 강조는 목종을 믿지 않았다. 강조의 생각은 이랬다. '상감의 병환이 중한데 태자를 아직 세우지 않았으니 악당들이 왕위를 엿보고 있는데 주변에 아첨과 참소만을 일삼는 사람들을 두고서 그 사람들 말만 믿고서 상벌(賞罰)이 공정하지 못하여 이런 위험한 혼란을 초래했다.' 결국 5000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개경으로 진군해 목종을 폐립(廢立)시키고 대량원군을 신왕으로 옹립(擁立)한다.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에서 강조는 열전의 '반역(反逆)'편에 실려 있다. 그러나 강조가 과연 반역자인지는 모호하다. 우선 그는 스스로 왕위에 오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사실 강조가 개경의 상황을 방관했으면 왕건의 고려는 끝나고 '김씨 고려'가 탄생했을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개경을 들이닥친 날의 상황을 보면 강조의 생각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천추태후와 목종을 축출한 강조는 무심코 건덕전(乾德殿) 앞에 왕이 앉는 탑(榻) 아래에 앉아 있었다. 이를 본 군사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에 깜짝 놀란 강조는 벌떡 일어서며 무릎을 꿇고서 이렇게 말한다. "후계 임금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는 '왕씨 고려'의 신하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얼마 후 신혈사에 유폐됐던 대량원군이 개경으로 돌아오자 즉위를 하게 되고 강조는 양국공(讓國公)에 봉해진다.

실권을 장악한 양국공 강조는 목종과 천추태후를 충주 적성현으로 내쫓았다. 동시에 강조는 사람을 시켜 목종으로 하여금 독약을 먹고 자살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목종은 거부했다. 결국 목종은 강조의 부하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고 만다. 다만 천추태후의 경우 이미 김치양과 아들까지 다 죽여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유배생활을 하던 태후는 현종20년(1029년) 65세를 일기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1년이 지난 1010년 거란의 성종(聖宗)이 뜬금없이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사실 침공 초기 강조의 탁월한 작전으로 거란의 침공은 좌절되는 듯했다. 이에 자신을 얻은 강조는 '적을 경시하는 마음이 생겨 사람을 데리고 바둑을 두었다.'

그는 적병이 몰려온다는 보고가 이어지자 "입 안의 음식과 같다. 적으면 안 되니 많이 들어오게 하라"고 큰 소리를 치다가 결국 거란병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비참하게도 그는 담요 같은 데 둘둘 말려 거란의 성종 앞에 끌려갔다.

성종은 강조의 포박을 풀어주면서 "나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물었다. 강조는 단호했다.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강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함께 거란군에 끌려온 그의 부하 이현운(李鉉雲)은 시(詩)까지 지어 바치며 거란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兩眼已瞻新日月(양안이첨신일월) / 一心何憶舊山川(일심하억구산천)'

나라를 배반하는 내용만 아니라면 대조미가 돋보이는 시구라 할 수 있다. '두 눈으로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으니/한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만을 생각하랴!' 이를 듣는 강조는 그만큼 속이 더 뒤집어져 이현운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리고 강조는 처형됐다. 이런 인물이 '반역'편에서 김치양 바로 뒤에 실려 있다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고려사'를 편찬했던 세종 때만 해도 훗날 반정(反正)이 일어나리라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강조의 행위는 반역보다는 반정에 가깝다. 이한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30/2009013001145.html 입력 : 2009.01.31 06:36 / 수정 : 2009.01.31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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