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지설(龜兎之說)

2010. 3. 27. 22:51歷史

[Why]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역사를 바꾼 불륜

대야성 전투 후 국제관계 급변

신라는 소국, 백제는 대국?

서기 642년 8월, 신라 왕족 김춘추(金春秋)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은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 성주 김품석(金品釋)의 아내였다. 당시 김춘추의 나이가 38세였으니 김품석 부부는 십대 청소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김품석이 '불륜 청소년'이었다는 것이다. 김품석은 부하인 검일(黔日)의 미색 뛰어난 아내를 강제로 취했다. 결과를 놓고 보면 한국사의 숱한 불륜 중에서 이처럼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뒤바꿔놓은 불륜도 드물 것이다.

원한을 품고 있던 검일은 대야성으로 진군해 오던 백제군의 회유에 넘어갔다.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성을 공격하자 검일은 창고에 불을 질렀다. 성이 함락되고 김품석은 항복했으나 처·자식과 함께 백제군에게 참살됐다.

이 전투는 백제가 신라의 목덜미에 칼을 겨눈 형국을 만들었다. 신라는 서부 국경지역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대(對) 백제 방어선도 지금의 경북 경산인 압량(押梁)까지 후퇴했다. 압량에서 서라벌까지는 40㎞도 되지 않는 거리다.

딸과 사위와 외손자를 잃은 김춘추의 반응에 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온종일 기둥에 의지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했다. 얼마 후에 '슬프다, 대장부로서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는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악화되는 수준을 넘어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킬 결심을 했다'는 뜻이다. 김춘추가 당장 원군을 청하러 달려간 곳은 진흥왕의 한강유역 탈취 이후 100년 가까이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고구려였다.

김춘추를 만난 보장왕(寶藏王)은 "(진흥왕 때 빼앗은) 죽령과 조령 이북의 땅을 돌려 달라"고 요구한 뒤 그를 가뒀다. 김춘추는 고구려 벼슬아치로부터 들은 '토끼의 간'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탈출했다고 정사는 기록한다.

위서(僞書)로 의심받는 '환단고기'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세 나라가 뜻을 모아 당나라 장안(長安)을 공격해 중원 땅을 함께 다스리자"는 '삼국연합론'을 제의했으나 김춘추가 거부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신라의 '여라(麗羅) 동맹'이 실패로 끝난 뒤의 연표는 숨 가쁘다. 645년 안시성 대첩으로 당 태종의 침략군은 고구려에서 패퇴했고 같은 해 일본에선 정치적 격변인 대화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났다. 2년 뒤인 647년 김춘추·김유신 세력이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신라의 실권을 장악했다.

'나당(羅唐) 동맹'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백제를 주적으로 삼은 신라와, 고구려를 주적으로 삼은 당나라가 손을 잡은 구도였다. 바꿔 말하면 신라는 고구려에 대해, 당나라는 백제에 대해 별 원한관계가 없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신라는 자력(自力)만으로는 결코 백제를 누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이다. 국사 교과서에 실린 신라 진흥왕 이후의 지도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지도만 놓고 보면 신라의 영토는 경상남·북도와 충청북도·경기도·강원도, 함경남도 일부에까지 뻗쳐 있고 백제 영토는 신라의 4분의 1 정도다. 그런데도 삼국시대 말기 두 나라 중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쥔 쪽은 백제였다.

어떻게 그 '작은' 백제가 신라 서부 최대의 요새인 대야성을 함락하고 신라를 망국의 위기에 빠뜨릴 수 있었던 것일까? '삼국사기' 열전을 보면 648년 김유신이 "대야성의 원수를 갚자"고 건의하자 진덕여왕은 이렇게 말한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침범했다가 위태롭게 되면 어찌하겠는가(以小觸大 危將奈何)?" 신라가 소국이고 백제가 대국이라니?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멸망 당시 백제의 규모에 대한 기록이다.

5방(方) 37군(郡) 200성(城)의 행정조직에 76만 호(戶)가 살고 있었다는 것인데 고구려 말기 인구는 69만7000호였다. 기록만 놓고 보면 백제 인구가 고구려보다도 많았던 것이다. 인구밀도가 높았던 것일까? 행정착오였을까? 세금 수취 방식의 차이였을까? 아니면 일각의 주장처럼 정말로 바다 밖에 '또 다른 백제'가 존재했던 것일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마지막에서 "백제 땅은 신라와 발해가 나눠 가졌다"고 기록한 것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보기에 따라선 만주 땅에도 백제 영토가 있었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통념과는 달리 삼국 중 가장 '큰 나라'는 백제였는지도 모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26/2010032601283.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08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10.03.26 15:59 / 수정 : 2010.03.2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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