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祖 朱元璋, 高皇帝

2010. 11. 14. 10:21歷史

주원장 [朱元璋, 1328.10.21~1398.6.24]

요약

중국 명(明)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1368∼1398). 홍건적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각지 군웅들을 굴복시키고 명나라를 세웠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 한족(漢族)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출처] 주원장 [朱元璋 ]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고, 재위연호(在位年號)에 의해 홍무제(洪武帝)라고도 한다. 호주(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여러곳을 전전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元)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이때 그의 병력은 2만 명에 달했고 자신을 오국공(吳國公)이라고 호칭했다. 홍건적 군대가 원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나머지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진우량과 소주의 장사성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마침내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켰다. 1368년 남경에서 명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주원장은 한민족(漢民族)의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모든 몽고 풍속을 금지시키고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중앙에는 1380년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여 육부(六部)를 독립시키고 도찰원(都察院)·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들 기관을 황제 직속하에 두었다. 지방에도 포정사사(布政使司:行政)·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軍事)·안찰사사(按察使司:檢察)를 병립(並立)시키고 이들을 중앙에 직결시켜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군림하여 절대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24인의 황자(皇子)를 전국의 요지에 분봉(分封)하여 제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편, 농민통치에도 힘을 기울여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里甲制)를 설치하고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부역의 징수를 공평히 하고 정책의 침투를 꾀하였다.

주원장이 실현하고자 했던 군주독재권의 강화는 공포정치에 의해 실현되었는데 특히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그와 동고동락한 측근들 대부분을 숙청하였다. 이때 목숨을 잃은 측근이 2만 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이런 비극을 감내했던 이유는 그의 아들에게 보다 확고한 황제의 지휘권을 물려주기 위함이었는데 큰 아들이 급사하는 바람에 손주(건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고 왕위 계승자가 아직 어려 숙청작업은 더욱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주원장이 걱정하였던 황제의 위협세력은 그를 도왔던 개국공신들이 아니라 26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이었다. 주원장은 만년에 고독하게 살다 1398년 7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고 그가 죽은 이후 아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140686

통도사 불이문 현판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경남유형문화재 제252호. 현판은 명 태조 주원장의 친필로 '원종제일대가람'이라 쓰여 있다. 출처 : © doopedia.co.kr

명(明)나라의 초대 황제[원 천력 원년 9월 18일(1328년 10월 21일) ~ 홍무 31년 윤 5월 10일(1398년 6월 24일)]

재위 1368년 ~ 1398년

묘호(廟號) 태조(太祖)

시호 고황제(高皇帝),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

황후 효자고황후

부친 인조

모친 순황후

다음 황제 건문제

묘호 태조(太祖)

이름

1328년 주세진과 진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났을 무렵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후에 주흥종(朱興宗)으로 개명했다가 주덕유(朱德裕)로, 홍건군에 참가하는 무렵에는 주원장(朱元璋)으로 개명했다. 자(字)는 국서(國瑞)이다.

홍건적의 난

몽골이 건국한 원나라는 14세기에 들어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 통치력이 저하되었다. 거기에 천재지변에서 전염병까지 일어났기 때문에 백련교도(白蓮敎徒)가 1351년에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호주종리(濠州鐘離) 출신의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지만, 원말(元末)에 세력을 떨친 홍건군(紅巾軍)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웠다. 홍건군이던 곽자흥의 장수였던 주원장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長江) 유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1363년 홍건적 군벌이던 장사성(張士誠)과 진우량(陳友諒)을 파양호 전투에서 격파해 진우량을 사살했으며 1365년 장사성도 격파했고 1367년 마침내 장사성과 그 잔당까지 모두 사살하였다.

1368년에 명나라를 건설하였고, 연호(年號)를 홍무(洪武)로 정하였는데, 홍무제라는 명칭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외정

홍무제는 건국한 직후에 20만 대군을 이끌고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상도(上都)로 도망쳐 북원(北元)을 건국함에 따라, 만리장성(萬里長城)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결국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明)을 건국하여, 한족(漢族) 왕조를 복원시켰다. 1372년 서달(徐達)을 보내 북원까지 정벌하려 했으나 코케 테무르의 반격으로 크게 패배했다.

치세

홍무제는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외정을 자제하고, 농촌의 토지 조사 및 인구 조사를 진행해 이갑제, 위소제를 배포하고 내정의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홍무제는 건국공신을 숙청하고, 재상이 있던 중서령을 폐지하고 6부를 황제 직속으로 만들어 독재체제를 만들었다.

말년에는 한 고조 유방(漢高祖劉邦)을 능가할 정도로 건국 공신들을 대거 숙청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1379년 재력가 심만삼(沈萬三)을 낙향시키고 1380년 좌승상 호유용(胡惟庸)을 역모를 꾀했다 하여 처형하고 그와 연루된 1만 5천 명을 죽였으며 1384년 이문충을 독살하고 1385년 노장 서달도 독살당했다.

1390년 초대 승상 이선장(李善長) 등이 호유용의 역모에 다시 연루되어 1만 5천 명이 처형되고 1393년 양국공(凉國公) 남옥(藍玉)도 역모 혐의를 받고 2만 명의 연루자들과 처형당했다. 그리고 4대 선생이던 유기도 낙향해 있다가 독살당하고 송렴도 유배지에서 죽었다.

1398년에 홍무제가 죽자, 그의 손자인 흥종 의문태자 장남 주윤문(朱允炆)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건문제이다.

사후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로 추존되었다.

가족

부친 : 인조순황제 주세진(仁祖淳皇帝 朱世珍)

모친 : 순황후 진씨(淳皇后 陳氏)

황후 : 효자고황후 마씨(孝慈高皇后 馬氏 1332~1382)

장남 의문황태자 주표(懿文皇太子 朱標) - 흥종 효강황제(興宗 孝康皇帝)

차남 진민왕 주상(秦愍王 朱樉)

삼남 진공왕 주강(晉恭王 朱棡)

사남 연왕 주체(燕王 朱棣) - 성조 영락문황제(成祖 永樂文皇帝)

오남 주정왕 주숙(周定王 朱橚)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D%99%8D%EB%AC%B4%EC%A0%9C

태조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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