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충신이냐 조선의 공신

2011. 8. 9. 11:57歷史

고려의 충신이냐 조선의 공신이냐는 서로의 견해 차이

조선 왕조의 건국을 둘러싸고 고려 후기 사대부는 정치적 행보가 달랐다. 유학을 바탕으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 도덕에 충실했던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 많은 사대부들은 고려에 절의를 지킨 반면, 고려 말 최고의 경세가라는 조준과 정도전 등은 무너져 가는 고려 왕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새 왕조 조선을 세웠다. 비슷한 시기에 성리학이라는 신사상을 받아들인 사대부들이 고려 말이라는 시점에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한쪽은 고려를 지키려는 수성파 사대부로, 다른 한쪽은 새로운 왕조를 세워 개혁을 하려는 창업파 사대부로 나누어지고, 궁극에 가서는 고려의 충신과 조선의 공신으로 갈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사대부에게는 정치 경제 운영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우선 누가 정치 운영의 주체가 되느냐? 인재 선발은 어떻게 하느냐로 차이가 생겼다. 이색, 정몽주 등은 기존의 인재 등용법인 음서제와 좌주문생제를 찬성하였다. 음서제를 실시하면 고급 관리의 자손은 어려서부터 관리가 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관리보다 빨리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좌주를 중심으로 문생을 세력화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이용할 수 있었기에 이를 찬성하였다. 반면 창업파 사대부는 권세가와 혈연적 관계를 맺지도 않았고 다른 사적인 인연도 없었으며, 관직에 나아갈 때도 좌주문생제의 혜택을 받지 못했기에 이 제도의 시행을 반대했다.

토지 제도에 있어서도 관리들에게 사전(私田)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보완하여 유지하자고 한 수성파 사대부와는 달리 창업파 사대부는 이 제도 자체를 혁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관리 개개인이 농민에게서 직접 세금을 거두는 사전을 축소하고 국가의 조세 수취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이를 통하여 수조권에 의한 중간 수탈을 없애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한 것이다. 토지 제도에 대한 이러한 차이는 두 사대부들의 경제적 이해 기반과 무관하지 않다. 수성파 사대부들은 상대적으로 생활 형편이 윤택한 반면 창업파 사대부는 같은 지배층이지만 국가로부터 경제적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군주관에서도 이들의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 수성파 사대부들은 혈연을 매개로 한 부모와 가족 관계를 우선시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가족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로까지 확대되었다. 반면, 창업파 사대부들은 국가의 공적인 관계, 사회적 명분을 중시했다. 수성파 사대부는‘사회적 관계는 의리로 맺어졌기 때문에 의리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지만 혈연의 관계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이다.’라고 하였고, 창업파 사대부는 ‘대의는 부모, 자식 관계에 앞선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사적인 인정에 치우치는 것을 ‘악’이라 하여 공적 의리를 중시하였다. 그렇기에 수성파 사대부는 절대적 군주관을 바탕으로 하여 군신 관계를 불변의 것으로 파악하였지만 창업파는 대의명분에 따라 얼마든지 군신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곧 창업파 사대부에게 군주는 존재 자체로 충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합치될 때만 정통이며 충성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가 고려의 충신과 조선의 공신이라는 차이를 만든 것이다.

출처 : 언어알약(지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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