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첫 박사학위

2010. 6. 14. 10:30一般

한국인 첫 박사학위 오늘 100돌, 다시 보는 ‘청년 이승만’

‘카이로 선언’ 한국 독립 명시, 이승만과 관계있나

오늘 14일은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 소유자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학위의 주인공은 이승만(1875∼1965) 초대 대통령. 국제법과 외교사를 주제로 한 박사학위 논문이 1910년 6월 14일 미국 프린스턴대 이사회를 통과했다. 그 해 7월 18일 졸업식에서 나중에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이 되는 윌슨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 증서를 받았다.

이승만의 나이 35세 때 일이다. 당시로 보면 매우 늦은 나이였다. 미국 유학 전 그는 20대 중·후반 시절을 한성감옥에서 보냈다. 29세 때 출옥 직후 도미, 5년 만에 조지워싱턴대 학사-하버드대 석사-프린스턴대 박사 학위를 모두 따내는 기적 같은 일을 해낸다. 이후는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이 같은 그의 청년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게 늘 따라다니는 ‘독재자 이승만’이란 꼬리표에 그밖의 모든 일은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4·19혁명으로 하야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1970∼80년대 그에 대한 평가는 주로 불명예 부분에 초점이 맞춰졌다. 90년대 후반부터 ‘이승만 다시보기’가 전개됐다. 대한민국 뿌리 찾기의 일환이었다. 그를 통해 건국 대통령으로서 그의 업적은 상당부분 재조명됐다. 요즘은 청년시절과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로 관심이 확장되고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의 모습.[유영익 지음 『이승만의 삶과 꿈』에서]

박사학위 취득 100주년’을 맞아 잊혀진 그의 청년시절을 ▶감옥 ▶영어 공부 ▶유학 ▶독립외교 등 4개의 키워드로 되돌아 봤다. 그가 미국에서 단기간에 학사-석사-박사를 마친 배경에 초점을 맞췄다. ‘이승만 재조명 운동’을 주도해 온 유영익 한동대 T H Elema 석좌교수(전 연세대 석좌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 감옥

이승만은 24세 때인 1899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만 5년 7개월을 한성감옥에서 보냈다.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투옥됐다. 당초 사형이 예고됐으나 결국 종신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감옥에서 사형을 예감하면서였다.

감옥은 그에게 하나의 대학이었다. 그가 5년 만에 미국에서 학사-석사-박사를 마칠 수 있었던 배경엔 감옥에서의 공부가 있었다. 『만국공법』(원제 『Handbook of International Law』, 중국어 번역본 『만국공법 요약)』), 『청일 전기(戰紀)』(중국어 원제 『청일전쟁 본말』) 두 권을 번역했다. 또 『Corea: the Hermit Nation』이란 영어 원서를 바탕으로 해서 『독립정신』이란 책을 저술했다.

모두 국제법과 외교사 관련 책들이다. 어려서 한학을 익힌데다 탁월한 영어 실력을 갖췄기에 가능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감옥에 넣어준 책을 가지고 공부하며 이미 상당 수준의 학식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영어 서적·잡지를 통해 얻은 새로운 정보를 ‘제국신문’ 등에 기고하기도 했다. 미국의 교육과정을 개괄 소개한 논문 ‘미국의 교육제도’(중국어 번역본) 같은 경우 붓글씨로 일일이 필사하기도 했다.

○ 영어 공부

이승만은 배재학당 영어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은사 서재필을 통해 서양 문명을 접했다. 배재학당에서 1학기를 마친 후엔 ‘영어 조교’로 특채됐다. 영어를 가르치며 배운 셈이다. 그만큼 습득이 빨랐다.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 연설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감옥에서도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한 사전’을 만들 정도였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1904년 말, 민영환·한규설이 그를 밀사로 발탁, 미국에 보낸 배경에는 무엇보다 탁월한 영어 실력과 감옥에서 익힌 국제정치 지식이 있었다.

그의 하버드대 시절 노트가 전해진다. 이를 유영익 교수가 하버드대 교수에게 보여주자 “동양인이 잘 틀리는 정관사, 부정관사 등도 대부분 맞는, 거의 완벽한 영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 유학

하버드대 석사과정 재학 시절의 이승만(뒷줄 맨왼쪽)과 그의 급우들. 가운데 앉은 인물은 브라운대에서 초빙된 국제법 담당 객원교수 윌슨(M M Wilson). [유영익 지음 『이승만의 삶과 꿈』에서]

1904년 말 이승만은 밀사로 미국을 방문한다. 한반도에선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의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정세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과 별도로 태프트-카스라 밀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허용했다.

밀사 사행이 실패한 후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유학을 택한다. 아버지의 유학 권유도 있었다. 그 역시 만일을 대비해 한국을 떠날 때 미국 선교사들이 써준 19통의 추천장을 가지고 갔다. 미국의 어느 대학이 좋은 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조지워싱턴대를 3학년에 편입한 것은 ‘배재대학’ 2년 학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하버드대 석사 1년, 프린스턴대 박사 2년 과정을 일사천리로 마쳤다. 프린스턴대에서 그가 주로 수강한 과목은 국제법·외교학·철학사 등이었다. 5년간 장학금으로 다녔다.

이승만의 박사논문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다. 심사위원 3명으로부터 높은 평점을 받았고, 졸업 후 1912년 1월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책으로 출간됐다. 미국의 대학출판부에서 책이 나온다는 것은 논문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유 교수는 “그의 논문은 전시에 중립국 선박이 전쟁 지역에 드나들며 통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를 국제법상으로 보장하는 데 있어 미국이 끼친 영향에 관한 것”이라며 “미국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이승만이 신생 공화국 미국이 국제법 발달에 기여한 점을 살펴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 독립외교

헤이그 특사 이상설이 1908년 8월 초에 뉴욕을 떠나기에 앞서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외교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그의 독립외교 노선은 어떤 성과가 있었는가. 이 부분도 지금까지 저평가돼 왔다. 중국의 임시정부와 만주의 무장투쟁이 주로 평가 받았다. 의혈활동과 무장투쟁이 있었기에 외교노선도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만, 외교가 없이 한국의 독립이 가능했을까. 요즘 새롭게 주목 받는 부분이 이 대목이다.

특히 1943년의 ‘카이로 선언’이 그러하다. 미국·영국·중국의 수뇌가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공약했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특별히 명시해 놓은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가 한 둘이 아닌데 왜 유독 한국만 명시했는가. 그동안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주창해서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올해 3월 출간된 『카이로 선언:대한민국 독립의 문』의 저자 정일화 박사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주창했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의 심복이었던 홉킨스가 카이로 선언의 초안을 작성했고, 이를 루스벨트와 처칠이 약간의 수정을 한 후 완성됐다는 것이다.

유영익 교수는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그들이 알아서 한국 독립 조항을 특별히 넣었을 리는 없다.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는 상태다. 카이로 선언과 이승만의 독립외교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 앞으로의 연구 과제”라고 말했다. http://news.joins.com/article/333/4239333.html?ctg=1700&cloc=home|list|list2 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2010.06.14 00:25 입력 / 2010.06.14 00: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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