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7. 17:50ㆍ法律
‘고지도에 독도는 우리 땅’ 국제재판선 힘 못쓴다
[토요판] 역사적 권원은 중요한 문제 아닐 수도…
한국이 반세기 동안 실효 지배했지만…일본도 꾸준히 이의제기
지난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뒤이은 일왕 관련 언급으로 한-일 관계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은 1962년 이후 50년 만에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이 조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실제 재판이 시작된다면 어떤 쟁점들이 다뤄지게 될까?
1965년 한일협정의 독도밀약
정일권 총리-고노 자민당 부총재… “해결하지 않은 것으로 해결”, 한국의 실효지배 암묵적 인정
최근 엠비 독도방문 이후
“더 이상 한국 배려할 필요없다.”… 전혀 새로운 전방위 공세 예고, 일부선 “mb 즉흥적 행보로 일본의 도발 키웠다”는 비판도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7년 전의 일이다. 그때도 한일 관계는 격랑 속을 헤매고 있었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기회가 날 때마다 과거 침략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있었고, 일본 시마네현은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통과시켜 한국인들을 분노케 했다. 거기에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표기한 일본 방위백서(2005년부터)가 발간된데 이어, 역사 왜곡 교과서 출판이 잇따르며 한·일간의 역사 갈등은 폭발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참다못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4월25일 ‘한일 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문’을 발표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담화에서 노 대통령은 한국인들에게 독도는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라, 한민족이 지난 세기에 겪었던 고통을 상징하는 ‘역사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지금은 유엔(UN)의 사무총장이 된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독도는 한일관계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말했던 것도 그 무렵이다.
한국이 동의 안하면 그만이지만…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때도 일본인들의 반응은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고이즈미 총리는 “일한의 우호관계를 대전제로 냉정히 대처하고 싶다”고 말했고, “(두 나라의 정상회담에) 언제든지 응할 뜻이 있다”고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갈등의 소지를 만든 게 일본인데다, 역사 인식에 근거한 한국 쪽의 엄중한 추궁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기도 했을 것이다.
지난 10일 이뤄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당시와는 사뭇 다르다. 일본 정부는 당장 무토 마사토시 주한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 언론들은 정부가 한국과 정상간 셔틀외교 중단, 한-일 통화스와프 협정 재검토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외환위기에 취약한 우리 정부가 일본과 통화스와프 협정을 얼마나 힘들게 만들고 확대해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일본이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뜬금없는’ 일왕 발언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언론의 반응도 뜨겁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12일치 사설에서 “영토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에 한쪽의 국가원수가 방문하는 것은 상대국을 도외시하는 폭거”라며 흥분했고, <아사히신문>은 “가장 가까운 우방이라 했던 일본과의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가의 행동으로 보기에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한·일 양국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잡아 끈 또 하나의 조처를 꺼내 놓았다. 독도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기로 한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가 사이의 법적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엔의 주요 사법기관 가운데 하나로 그 설치 근거는 유엔 헌장(92~96조)에 두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법재판소는 ‘강제 관할권’을 갖고 있지 않아 실제 재판소에 가려면 분쟁 당사국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독도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뤄질 수 없다.
일본 정부는 이 같은 상황을 모르고 있을까.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겐바 고이치로 외무대신은 지난 11일 이 조처를 취하는 이유에 대해 “일본의 주장을 국제사회에 제대로 이해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가 소송에 응하진 않겠지만, 이제 세계의 주요 국가로 성장한 한국이 제소에 응하지 않으면 국제적 위신이 추락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언젠간 응소할 수밖에 없다는 노림수인 것이다. 민주당의 실력자 가운데 하나인 마에하라 세이지 정조회장도 “한국이 자신이 있다면 응소하면 된다. 응소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도발했다.
실제 독도를 둘러싸고 지난 60여 년 동안 한일 두 나라가 벌여 온 논쟁을 살펴보면, 이번 조처는 1965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이 유지해 온 독도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은 한·일 양국 정부 모두가 부인하고 있지만 1965년 6월 체결된 한일협정 과정에는 두개의 커다란 밀약이 있었다. 하나는 6차 회담이 진행 중이던 1962년 11월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장관 사이에 맺어진 청구권의 액수와 성격에 관한 밀약이고, 다른 하나는 회담이 막바지로 치닫던 1965년 1월 정일권 국무총리와 고노 이치로 자민당 부총재 사이에 맺어진 독도 밀약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8·15 광복절을 닷새 앞둔 10일 오후 경북 울릉군 독도에 도착한 이 대통령이 전망대에서 해안을 둘러보고 있다. 뒤로 보이는 것이 서도다. 사진=청와대 제공
범양상선 박건석의 저택 홈바에서 벌어진 일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뒤, 독도가 한일 양국 사이에 주요 이슈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1952년 1월18일 발표된 대한민국 국무원 고시 제14호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이 나오면서부터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일본의 선진 어업으로부터 한국 주변의 어장을 보호하기 위해 독도의 동쪽에 ‘이승만 라인’(평화선)을 긋고 일본 선박의 출입을 막는다.
일본 정부는 즉각 이를 시정하려 했지만, 냉전 시대 자유진영의 분열을 우려한 미국이 협조하지 않았다. 이원덕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장이 일본 쪽 한일회담 외교문서에 나오는 독도 관련 부분을 정리·분석한 보고서를 보면, 일본은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얻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 여의치 않자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추진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1954년 9월, 6차 한일회담이 이뤄지던 1962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제안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두 나라는 독도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일본통 정치경제학자인 노다니엘은 2006년 6월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인터뷰에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타결을 앞두고 한·일 양국 고위 관계자 사이에 독도를 둘러싼 밀약이 합의됐다는 내용은 들은 뒤 이 내용을 확인해 <독도밀약>(2008년)이라는 책을 썼다. 이를 보면, 1965년 1월11일 서울 성북동의 범양상선 소유주 박건석의 저택 홈바에서 정일권 총리와 일본 국무대신의 밀사인 우노 소스케 중의원 의원(나중에 총리) 등이 모여 독도에 대해 한일 양국이 “해결하지 않는 것을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에 언급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맺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이 한국의 독도 지배를 사실상 용인하는 대신 양국 정부가 각각 독도는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양국 사이의 독도 정책의 큰 틀이 결정된 것이다.
이 정신에 따라 그해 6월 체결된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에서 두 나라는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고,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해 해결을 도모하기로 한다.”고 합의한다. 이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포함해 한국의 동의 없는 독도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게 됐다. 독도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보자면 아쉽기 짝이 없지만, 일본이 한국의 실효지배를 암묵적으로 인정했다는 성과를 부인할 수도 없는 밀약이 탄생한 것이다. 중국도 1978년 8월 일본과 평화우호조약을 맺으며 “우리 세대는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 못하지만, 우리 다음 세대 그리고 그다음 세대는 반드시 해결책을 찾을 것”(덩샤오핑 당시 부주석)이라며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문제를 미봉하고 넘어간다. 영토문제란 난제를 마주해야 했던 덩샤오핑의 고뇌가 전해져 온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지난 50년 동안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일본인을 향한 립서비스 외에 한국의 독도 실효지배를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10일 이 대통령의 방문에 이후 일본의 입장은 “더 이상 (한국에 대한) 배려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겐바 외무대신)는 쪽으로 전환됐다. 이른바 ‘협약의 정신’이 무너지고, 한국의 독도 실효지배를 변경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라는 오래된 카드를 다시 꺼내든 것이다.
그렇다면 독도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뤄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국제사법재판소가 지난 1945년 이후 아시아 지역의 영토 분쟁에 내린 판결로는 타이-캄보디아 사이에 벌어진 프레아 비히어 사원 사건(1962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의 시파탄 섬 사건(2002년), 말레이시아-싱가포르의 페드라 브랑카 섬 사건(2008년) 등 세 개가 있다.
타이-캄보디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판례
9세기께 만들어진 힌두 사원인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04년 타이의 전신인 샴 왕국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배하고 있던 프랑스는 주변의 당그레르산 정상을 중심으로 위쪽은 타이, 남쪽은 캄보디아의 영토로 국경을 확정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착오로 실제로는 산의 북쪽에 있는 사원이 남쪽에 있는 것으로 표기됐다. 그러나 타이는 1934년 이 사실을 확인하고도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다가 1949년이 되어서야 사원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캄보디아를 몰아내고 실효 지배를 시작했다. 캄보디아는 1959년 10월 이 사건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고, 재판소는 1962년 6월15일 캄보디아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다. 타이가 지도의 오류를 깨달은 뒤에도 오랜 시간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은 이 땅의 소유권이 프랑스(그리고 그 뒤를 이어받은 캄보디아)에게 있음을 인정한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또 다른 예인 싱가포르 해협 동쪽 끝에 있는 페드라 부랑카 섬 사례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는 이 섬이 1844년까지 말레이시아의 영토였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후 영국과 싱가포르가 이 지역에 대한 해난사고 조사, 방문 규제, 해군 통신장비 설치 등의 주권 행사를 하는 동안 말레이시아 쪽에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 섬이 싱가포르의 영토임을 인정했다.
앞의 판례에서 확인되듯 국제사법재판소는 분쟁 지역이 과거 어느 나라에 가까웠는지를 뜻하는 ‘역사적 권원(權源)’보다 그 지역에 대해 상대국이 별다른 문제제기를 안하는 가운데 계속적이고 평화적인 주권 행사를 해온 사실을 영유권 분쟁의 중요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는 국내 언론들이 독도가 우리나라 땅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이따금 제시하는 고지도가 독도 문제를 다루는데 그다지 중요한 변수가 아닐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 우리 정부가 반세기 넘게 독도를 실효 지배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이 한 나라의 실효적 지배의 효력을 부정할 수 있는 꾸준한 항의를 해온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독도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뤄진다면, 지금까지 진행된 어떤 영유권 관련 재판보다 치열하고 긴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재판소의 판단에 영향을 줄 쟁점으로는 일본이 1905년 1월28일 각의 결정으로 독도라는 무주지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한 사실이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에 해당되는지 여부, 1951년 9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에서 제외되는 영토에서 독도가 명기되지 않은 것에 대한 해석, 1952년 1월 이승만 라인으로 시작된 한국의 실효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 등 간단치 않은 쟁점들을 논의해야 한다. 어찌됐든 앞으로 독도에 대한 일본의 도발적인 공세는 강해질 것이고, 우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적잖은 외교력을 낭비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영토인 독도에 한국의 대통령이 입도한 사실을 같은 한국인으로 비난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뼛속까지 친일·친미적’인 외교 기조를 유지하며 지난 4년 반을 허비한 대통령이 취한 행동으로 보기엔 너무 즉흥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순 없다. 이 대통령만큼 대한민국을 사랑했을 역대 대통령들이 독도를 방문하지 않은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텐데,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전방위적 독도 도발에 5천만이 받을 스트레스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실제적 피해를 생각해 보면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diplomacy/547540.html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등록 : 2012.08.17 15:19 수정 : 2012.08.18 14:23
[독도 분쟁 특별기고] 원래 일본 땅 아니니까 잃을 것 없다는 속셈
독도 문제 전문가로 외교통상부에서 10년간 독도 문제를 담당했던 홍승목 전 네팔 대사가 특별기고를 보내 왔다. 국제법규과에 근무하던 그가 1996년 독도 관련 논문을 준비하던 프랑스 국제법학자 티에리 모르만느와 나눈 대화를 정리·요약한 글이다. 모르만느 박사는 독도 영유권이 ‘일본 쪽에 있다’는 논지의 논문을 쓰던 중 이 대화를 나눈 다음 논문 주제를 북방 영토로 바꾸었다. 이 글은 국제법 학자들에게 뒤늦게 알려져 2003년 ‘대한국제법학회논총’에 실렸다. 최근 홍 전 대사의 블로그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 독도 영유권 분쟁과 관련한 한국의 입장을 설명해줄 수 있는가.
“1965년 한·일 기본협정 체결 회담 이래 한국 측의 입장은 ‘국제법적으로, 역사적으로 너무나 당연히 한국의 영토이므로 사소한 트집에 대꾸하지 않는다’는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 분쟁을 국제재판에 의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일본의 입장을 한국은 왜 거부하나. 한국이 법적으로는 자신이 없다는 증거가 아닌가.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가자고 했고 한국은 이를 거부했을 뿐이다. 즉 ICJ라는 특정의 법정에 가는 데 대해 이견이 있었을 뿐이다.”
- 한국은 ICJ에 가는 것을 거부할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인가.
“물론이다. 아마도 ICJ에 가더라도 한국이 이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두 가지 특별한 이유로 ICJ에 가야만 자신에게 약간이나마 승산이 있다고 보아 ICJ를 고집하는 것이고, 한국은 굳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면서 ICJ에 갈 이유는 없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우선 일본은 ‘ICJ에 의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면서 중국과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은 ICJ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 실효적으로 일본이 점유하고 있으니 반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네가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경우에는 재판에 갈 수 없고, 상대방이 실효적 점유를 하는 경우에만 재판에 가자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비슷한 문제를 두고 일관성이 없는 것이 좀 수상(fishy)하지 않은가.”
- 독도를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으니 ICJ에 가지 않으려는 점에서 한국도 일본과 비슷하다고 보는데.
“참으로 순진한(naive) 생각이다. 그렇다면 소위 러시아와의 ‘북방 영토’ 문제에서는 러시아가 해당 섬들을 점유하고 있으므로 일본은 적극적으로 ICJ에 가자고 해야 할 텐데, 오히려 러시아가 적극적이고 일본은 러시아의 제의를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 사실이다. 무슨 이유라고 보는가.
“간단하다. 일본은 ICJ에 판사가 있는데 한국은 없으니(※현재 일본인은 소장을 포함해 재판관이 2명이고 한국인은 없음), 한·일 간 문제는 ICJ에 가는 것이 명백히 자기에게 어드밴티지(advantage·이점)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ICJ에 각각 판사를 두고 있으니 일본은 아무런 어드밴티지를 기대할 수 없다.”
- 일본이 ICJ를 고집하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했는데 나머지 한 가지는.
“일본은 ‘독도를 영토로 편입한 조치는 식민주의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내심으로는 보수적인 ICJ가 적어도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 당시에는 식민주의에 의한 조치도 합법이라고 판단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당초부터 일본의 영토가 아니니까 패소해도 잃을 것은 없고 어쩌다가 이기면 순이익이라는 계산 때문이다. 일본으로선 일종의 ‘부담 없는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 솔직히 한국이 자신 없으니까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외부의 시각이 있는데.
“한국 국민에게는 독도가 ‘주권과 독립의 상징’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 때 제1단계로 1905년에 독도를 빼앗고, 그 5년 후에 제2단계로 나머지 전 국토를 빼앗아 식민지화를 완성했다. 일본이 ‘다케시마(竹島)는 일본 영토’ 운운하는 것이 한국 국민에게는 ‘너희는 아직 완전히 독립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우리의 식민지’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모욕을 받고 냉정해질 수 있겠는가. 독일이 프랑스더러 ‘알자스로렌은 돌려받아야 하겠어. 파리가 점령되기 전에 이미 독일이 점령한 것이잖아!’ 한다면 프랑스 국민이 점잖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재판으로 해결하는 게 좋겠어!’라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 한국은 일본의 ‘1905년 영토편입조치’가 무효라고 주장하지만, 독도가 1905년 이전에 이미 한국의 영토라는 근거는 충분한가.
“한 가지 물어보자. 일본의 주장대로 독도가 1905년까지는 무주지(無主地·terra nullius)였을 가능성이 정말 있다고 보는가.”
-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참으로 식민주의적인 발상이다. 20세기에 와서 태평양의 외떨어진 곳에서 ‘새로 발견된 땅(terra incognito)’이라면 몰라도 한·일 두 인근 국가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이미 수세기 전부터 양국 국민이 그 섬의 존재를 잘 알면서 그 부근에서 어업을 해 왔다면 두 나라 중 한 나라의 영토라고 보는 것이 상식 아닐까. 1905년에 정말 무주지였다면 영국이든 러시아든, 아니면 쿠바든 에티오피아든 아무 나라나 먼저 독도를 자기 영토로 편입할 수 있었다는 논리인데…타당한가.”
- 1905년에 이미 한국 영토였음을 한국이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한국 영토였다는 증거는 충분히 있다. 1905년에 일본이 비밀스럽게 영토 편입 조치를 한 후에도 한국 정부는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같은 해에 한국 정부의 외교권을 탈취한 후 다음 해인 1906년에 일본관리 일행을 울릉도에 파견해 군수에게 ‘독도는 이제 일본 영토가 되었기에 독도를 둘러보러 왔다’고 통보했다. 이에 울릉군수는 깜짝 놀라 중앙정부에 ‘본 울릉군 소속인’ 독도에 대해 일본인 관리 일행이 통보해 온 내용을 보고하고 내용을 조사토록 건의했다. 당시 양국 정부의 영유의식을 너무나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는가.”
- 1905년 이전의 역사기록으로서 독도가 한국의 고유 영토임을 입증할 만한 것은 어떤 것이 있나.
“(역사 기록에 나오는) ‘우산도(于山島)’는 우산국이라는 역사적인 나라 이름에서 나온 것이고, ‘삼봉도(三峰島)’는 독도의 외형이 3개의 봉우리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추측된다. 또 ‘가지도’는 가지(물개)가 사는 섬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독도에 물개가 많이 산 사실은 일본의 19세기 기록에도 나타난다.”
- 안용복 사건이라는 사소한 에피소드를 한국 측이 독도 영유권 주장의 주요 근거로 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개인의 영웅담을 영유권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 과연 타당하다고 보는가. 더구나 안용복이 범법자로서 문초를 받으면서 진술한 내용이니 신빙성도 의문스러울 텐데. (※ 조선 숙종 때 어부였던 안용복은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통지문을 얻어냈으나 관원 사칭 등을 이유로 귀양을 갔음.)
“‘울릉도와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라는 인식에 있어서 안용복이라는 서민에서부터 중앙정부에 이르기까지 일치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니까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안용복은 남을 해친 파렴치한 범법자는 아니다. 강도를 잡느라 차로에 뛰어들다 보니 결과적으로 교통신호 위반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 일본 고지도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시한 것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마 일본 고지도에 한국의 영토로 인정한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일본 고지도의 공통점은 울릉도와 독도를 한꺼번에 한국 영토로 표시하거나 혹은 한꺼번에 일본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울릉도가 한국 영토라면 독도도 당연히 한국 영토라는 인식을 나타내는 것 아닌가.”
- 일본은 독도가 “1905년 편입 조치 이전부터 일본의 고유의 영토이고 1905년에는 시마네현에 편입시켰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 ‘고유 영토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거짓말을 하다가 들키자 더 큰 거짓말을 해 어려움을 모면하려는 유치한 발상이다. ‘고유 영토설’이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과거의 제국주의·식민주의의 효력에 의문이 생기자 종래의 ‘영토 편입설’을 보강하기 위해 갑자기 지어낸 것이다.” 홍승목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사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749/9079749.html?ctg=2002&cloc=joongang|home|newslist1 입력 2012.08.18 00:53 / 수정 2012.08.18 12:31
홍승목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사
◆ 약력
서울대 법대 졸업. 국제법 석사과정 수료, 외교통상부 국제법규과장·조약과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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