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2. 12:28ㆍ法律
[서희경 교수 '…헌법의 탄생'으로 본 대한민국 헌법史]
1898년 종로(만민공동회), 백정 출신 입에서 대한민국의 헌법은 시작됐다.
대통령제, 이승만의 욕심? 제헌의회 폭넓은 지지받아… 남북, 제헌 과정서도 경쟁… 헌법 초안 조항 수도 같아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대받는 사람이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지금 나라에 이롭고 백성이 평안할 길은 관민이 합심해야 이룩될 수 있소."
1898년 10월 29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개막 연설자는 백정 출신 박성춘이었다. 조선 왕조 500년간 백성이 처음 제 목소리를 낸 순간이었다. 근대적 정치주체인 '국민'의 탄생이기도 했다. 뒤이어 결성된 민회는 '헌의6조' 결의를 통해 '군민공치적 군주제'를 요구했다. '왕과의 공존' 속에서의 민관 협력, 민주공화주의의 기원이었다.
서희경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의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창비)은 만민공동회에서 싹트기 시작해 1919년 3·1운동, 임시정부를 거쳐 1948년 건국헌법으로 꽃피운 대한민국 헌정사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인다. 반세기(1898~1948)에 걸친 헌법의 뿌리와 진화 과정을 정치학·법학·역사학의 학제(學際)적 접근으로 조명했다. 주요 내용을 '우리 헌법에 관한 오해와 진실'로 풀어본다.
① 건국헌법은 해방 후 특정 정파의 작품?
국내에서는 이미 19세기 말 조선왕조에 대한 실망이 커지면서 근대 서구 헌법원리에 대한 논의가 폭넓게 이뤄졌다. 그 분수령이 3·1 운동, 정치적 결실이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해방 후 숱한 정파가 헌법 초안 경쟁을 벌이는 중에도 민주공화제·국민주권·권력분립이라는 근대입헌주의는 같았다. 건국헌법 역시 정치집단 간 치열한 대립과 동의의 과정을 거친 공동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있던 날 투표소 풍경. / 창비 제공
② 대통령제는 이승만 권력욕의 산물?
이승만은 대통령제 채택에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시종일관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제헌의회 본회의 심의과정은 대체로 자유로웠고 대통령제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대통령제 지지파는 사상·이념 혼란, 군소정당 난립 등 정치 불안을 막기 위해 신속 효율 행정이 필요하다고 본 반면 의원내각제 지지자들은 국회와 정부의 대립을 우려했다.
③ 임정헌법은 '원형헌법(proto-constitution)'?
임정헌법은 민주공화제·국민주권·기본권·권력분립 등을 기본원칙으로 했고, 건국헌법에 다 수용됐다. 두 헌법은 체계와 용어도 비슷하다. 임정헌법은 모든 한국 근현대 '헌법의 어머니'였다.
④ 남북한헌법은 이란성 쌍둥이?
북한헌법은 소련헌법을 기본으로 했지만 남한헌법을 의식했다. 북한헌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심의한 '조선임시약헌'(1947)에 대한 반대 안의 성격을 띠었다. 제헌 과정에서도 남북한은 서로 참조하고 경쟁했다. 각각 헌법 초안을 발표했을 당시 조항 수(총 10장 102조)가 같고 형식도 유사했다. (최종 결과는 북한 10장 104조, 남한 10장 130조). 민족경제 부흥, 부의 독점금지 등을 제시한 점도 비슷했다. 그러나 북한은 궁극적인 국가의 소유 및 관리·통제를, 남한은 필요에 의한 국가의 소유 및 관리·통제를 택했다. 남한의 제헌 과정은 아주 논쟁적이었던 데 반해 북한은 '반대'와 '타협'이 거의 없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21/2012082102827.html 전병근 기자 bkjeon@chosun.com 입력 : 2012.08.22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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