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탑

2012. 9. 28. 09:43佛敎

[서울] 상륜부, 벼락 맞아 400년간 사라졌다 1970년 복원

고려 정종 때만 지진 세 차례 1966년 도굴로 탑 아래 훼손… 다보탑은 2008년에 보수

27일부터 전면 해체·복원에 들어간 석가탑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기단부와 탑신부,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相輪部)다. 상륜부는 조선 선조 때인 1596년 벼락 피해를 입어 대부분 사라졌다가 400년 가까이 지난 후인 1970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을 모델로 새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1200년 넘는 세월을 건너오며 석가탑이 겪어야 했던 풍상(風霜)의 한 조각이다.

◇ 통일신라 최대 탑

아래에서 보는 느낌과 달리 석가탑은 거대하다. 높이는 10.8m. 웬만한 3~4층 건물 높이다. 1층 탑신 7.7t, 1층 옥개석 7.1t, 2층 옥개석 6t….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석탑인 만큼 부재 무게도 엄청나다.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을 통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탑 상륜부를 떠받치는 접시 모양 장식인 '노반(露盤)'도 500㎏이나 된다. 이 때문에 석가탑 해체·복원 작업은 탑 상륜부의 장식인 '복발(覆鉢)' 위쪽은 수작업으로 해체하지만, 아래쪽은 크레인을 동원해 해체하게 된다.

◇ 얼마나 훼손됐나

27일 현장에서 본 석가탑은 1층 탑신이 파괴되고, 상하층 기단 갑석(甲石)에 금이 가는 등 훼손 상태가 심각했다. 상륜부에서는 노반 모서리도 파손됐고, 꼭대기 보주는 금이 갔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석탑 내부를 채우고 있던 적심(자갈과 흙) 가운데 흙이 거의 빠져나왔기 때문에 각각 6~7t이 넘는 옥개석과 탑신의 무게를 못 견디고 탑 곳곳에 균열이 생기거나 파손됐다"고 설명했다. 연구소는 이 때문에 부분 보수 대신 탑 전체를 해체해 다시 조립하는 근본적 해결책을 택했다.

 

석가탑 아래 땅 속? - 석가탑 동쪽 측면에서 탐사한 전기비저항 단면도. 전기비저항탐사는 땅속에 전기를 흘려 전류 흐름에 저항하는 물질 특성을 측정, 땅속을 영상화시키는 방법. 석가탑 바로 아랫부분은 ‘다짐층’ 때문에 지하 4m까지 전기비저항도가 높게 나타났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 석가탑의 수난

석가탑은 그동안 지진과 벼락, 도난 때문에 훼손돼 대대적 보수를 거쳐야 했다. 1966년 석가탑 부분 보수 때 '석가탑 중수기(重修記)'가 나오기 전까지 수리를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중수기는 1024년과 1038년 두 차례 보수한 사실이 있다고 기록했다. 중수기에 따르면 1차 수리 후 10여년 만에 1038년 다시 보수하게 된 이유는 지진 때문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정종대에만 세 차례 지진이 경주를 덮쳤다고 썼다. 조선 중기인 1596년 벼락으로 상륜부가 파손됐다. 1916년 발행된 '조선고적도보'에는 상륜부가 없는 석가탑 사진이 실렸다. 1970년 석가탑 상륜부를 복원하기까지 머리 장식이 없는 세월을 400년 가까이 견뎌야 했다. 1966년에는 도굴꾼들의 손길까지 타서 탑 아랫부분 곳곳에 금이 가고 훼손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석가탑 해체 때 나온 부재들은 모두 재활용하고, 관람객들이 복원작업을 볼 수 있도록 공개해 문화재 교육의 장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한편 석가탑과 마주 보고 있는 다보탑(국보 20호)은 2008년 부분 해체·보수작업을 하며 부재 8점을 교체한 바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27/2012092702982.html?related_all 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입력 : 2012.09.28 02:58

◇ 석가탑 용어

상륜부(相輪部). 옥개석 위쪽의 여러 장식물

노반(露盤). 탑 꼭대기 지붕 바로 위에서 상륜부를 받치는 돌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의 지붕돌

갑석(甲石). 기단 위에 덮는 뚜껑돌

[서울] 1270년만의 전면 해체… 땅속 어떤 보물 나오나

석가탑 2014년까지 복원

1966년 보수 때도 무구정광다라니경 나와… 석가탑 아래 땅속 처음 발굴

신라 '타임캡슐' 발굴 기대

매년 30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21호·일명 석가탑)이 창건 1270년 만에 전면 해체·복원된다.

작년 5월부터 석가탑 훼손현황을 조사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4년 말까지 석가탑의 상륜부와 탑신부, 기단부와 내부 적심(탑 안을 채우는 흙과 자갈)을 완전히 해체하고, 석탑 아래 지반까지 조사할 계획이라고 27일 밝혔다. 해체한 석탑 부재는 깨끗이 닦아내고, 훼손된 곳은 접합·강화 처리를 한 뒤, 내부 적심도 다시 채워넣고 조립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고려 초인 1024년 석가탑을 해체·수리한 적이 있으나, 이번에는 탑 아래 땅속까지 발굴할 예정이기 때문에 창건 이래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신라엔 탑과 건물 지반 아래 공양품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신라인들이 쓰던 장신구나 허리띠 장식, 관식(冠飾) 등 일상용품같은 신라의 '타임캡슐'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석가탑은 근대 들어 1966년 도굴 미수사건으로 탑 하단부가 훼손돼 2층 옥개석까지 들어 올리는 보수공사를 실시했다. 당시 사리공에서 세계 최고(最古)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다라니경과 석가탑 중수기(重修記) 등이 나와 화제를 모았다.

문화재위원회는 2010년 12월 석가탑 정기안전점검 때 상층 기단 갑석의 북동쪽에서 갈라진 틈(길이 1.32m, 최대폭 5㎜)이 확인된 것을 계기로 전면 해체·복원을 결정했다. 연구소는 석탑 주변에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설덧집과 관람용 계단을 설치, 해체수리 과정을 공개할 예정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27/2012092702971.html?related_all 경주=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입력 : 2012.09.28 02:58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504/9455504.html?ctg=1700&cloc=joongang|home|newslist1

[보수 공사 역사로 본 석가탑 수난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나온 1966년, 옥개석 부서지고 사리병은 깨뜨려… 이 사고로 해체 공사 전면 중단돼

이번엔 탑 아래 땅속까지 발굴 “석가탑 신비 벗는 大사건 될 것”

 

지진, 벼락, 도난, 공사 사고…. 국보 21호 석가탑은, 풍파를 많이 겪은 한국의 문화재 중에서도 유독 파란만장한 사건을 시대별로 체험했던 '수난의 석탑'이었다. 이 탑의 해체·복원 공사는 2일 이후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966년 부분 해체 당시 2층 탑신의 사리공 부분까지는 조사가 됐지만, 2층 옥개석이 땅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한 뒤 공사 자체가 중단돼 그 아래부턴 미답(未踏)의 영역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드러나는 석가탑 속의 모습이야말로 '신라사(史)의 민얼굴'이 되는 것이다.

◇ 지진과 벼락, 60년대엔 도굴 시도

서기 742년(신라 경덕왕 원년) 건립된 석가탑 해체는 이번으로 네 번째다. 1024년(고려 현종 15년) 첫 번째 해체 수리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고(다보탑 해체라는 설도 있음), 1036년(고려 정종 2년)의 지진 피해로 2년 뒤인 1038년 다시 보수를 했다. 1596년(조선 선조 29년)엔 벼락을 맞아 상륜부(탑 위쪽의 장식물)가 손상됐다.

1966년의 세 번째 해체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다. 9월 초, 탑이 남쪽으로 6도 정도 기울어진 것이 발견됐다. 처음에는 8월 말 발생한 지진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밀 조사 결과 '사리를 탐낸 도둑의 소행'이었음이 드러났다. 도굴범의 손을 탄 것이다. 이들은 대담하게도 10t짜리 공기압축 잭을 들고 와 1층과 2층 탑신을 들어 올리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1966년 이뤄진 석가탑 부분해체 공사 / 조선일보 DB

◇ 액운 이어진 1966년의 보수공사

당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은 기울어진 석가탑의 전면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1966년 10월 13일, 2층 탑신의 사리공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유물이 나왔다. 아름다운 금동제 외합(外盒)과 은제 내합(內盒)은 물론,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로 판명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불과 두 시간 뒤에 사고가 터졌다. 2층 옥개석을 들어 올리다가 땅에 떨어뜨렸고, 그것이 하필이면 이미 해체해 바닥에 내려놓은 3층 옥개석 위로 떨어져 함께 파손됐던 것이다. 받침대로 쓰던 나무 전봇대가 썩어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다. 이 사고로 해체공사는 중단됐다. 전문가들은 "그 당시엔 대단히 황망한 상황이어서 더 이상 공사를 진척시킬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액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리 46과(顆)가 들어 있던 녹색 유리제 사리병을 불국사 고위 관계자가 옮기다 떨어뜨려 깨뜨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석가탑에 손을 대는 건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다.

 

2일 경주 불국사 석가탑 해체 공사 현장에서 2층 옥개석 해체와 사리장엄구 수습이 이뤄지고 있다. ① 6)무게의 옥개석을 들어올리고 ② 사리공의 비단 천을 걷어낸 뒤 ③ 철제 뚜껑을 열어 ④사리와 사리장엄구가 들어 있는 사리합(1966년 복제품)을 확인하는 모습 / 뉴스1·남강호 기자

◇ 다라니경 다음엔 또 무엇이?

지난해에야 비로소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용기를 냈다. 9월 석가탑 해체를 시작해 12월 상륜부 해체를 끝냈고, 지난 2월에는 부재 정밀 실측과 3D 스캔, 초음파의 조사를 완료했다. 새 상륜부는 봉암사 삼층석탑 등을 참고로 석가탑의 비례에 맞게 다시 만들 계획이다.

이제부터 시작될 2층 탑신의 해체부터는 '1000년 동안 숨겨졌던 역사의 베일'을 벗기는 셈이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탑 아래 땅속까지 발굴할 예정이기 때문에 창건 이래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석가탑은 경주 남산의 돌을 가져다가 만든 것이지만, 현재 남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기 때문에 석재 채취가 어렵다. 이 때문에 복원에 새로 필요한 돌은 석질(石質)이 경주 남산과 비슷한 포항시 기계면에서 갖다 쓸 예정이다.

☞ 석가탑

경북 경주시 불국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10.4m의 거대한 규모이며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른다. 1962년 국보 제21호로 지정됐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마주 서 있는 탑 가운데 서탑(西塔)이다. 정식 명칭은 불국사 삼층석탑으로 비례와 균형미가 돋보여 신라 석탑의 표본이 되는 탑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4/03/2013040300037.html 경주=유석재 기자 입력 : 2013.04.03 03:07

[오늘의 세상] 석가탑, 1271년 만에 베일 벗는다

탑 아래 땅속까지 발굴 예정… 신라 '비밀의 역사' 나올 듯

국보 제21호 석가탑(정식 명칭 불국사 삼층석탑)이 건립 1271년 만에 '비밀의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2일 오후 2시 30분, 경북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 씌워진 가설덧집 안. 꼭대기에 설치된 10t 크레인이 6t 무게의 거대한 2층 옥개석(屋蓋石·석탑의 지붕돌)을 번쩍 들어 올렸다. 옥개석이 천장으로 움직이면서 서서히 2층 탑신(塔身)의 윗부분이 드러났다. "사진기 플래시 터뜨리면 안 됩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관계자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탑신 위쪽, 가로·세로 41㎝, 깊이 19㎝의 정사각형 구멍인 사리공(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탑 속에 만든 공간)이 드러났다. 사리공은 비단 천으로 덮여 있었다. 탑신 전체에 비닐 장막이 쳐진 뒤 관계자들이 유물 수습을 시작했다.

천을 걷어내자 아래 면만 뚫린 정육면체의 철제 뚜껑이 나왔고, 다시 그것을 드러내자 1966년의 복제품인 사리합(금동제 외합)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가탑의 속살이 47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다.

3일부터 시작될 2층 탑신의 해체에 이어 탑 아래 땅 밑까지 파는 것은 신라 경덕왕 때인 742년 건립 이후 처음이다. 이제부터 드러나는 탑 속의 모습은 현대인에겐 모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날 사리공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사리를 담은 용기) 중 은제 사리소호(銀製舍利小壺)와 목제 사리병(木製舍利甁)은 1966년의 부분 해체 당시 다시 봉안된 유물이다. 이 유물들은 각각 사리를 1과(顆)씩 담고 있었기 때문에 사리와 함께 원래 자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당시 확인된 사리는 모두 48과였다. 이번에 다시 수습된 사리들은 불국사 무설전으로 옮겨져 내년 3월까지 사리친견법회를 마련할 예정이며, 조사와 보존 처리를 거친 뒤 재봉안 여부가 결정된다.

1966년의 부분 해체 때는 이 사리공에서 사리와 함께 금동제 외합(金銅製外盒), 은제 내합(銀製內盒)과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석가탑 중수기 등의 귀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 중 28건은 국보 제126호로 지정돼 현재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석가탑은 2010년 정기 안전 점검 때 상층 기단 갑석(기단 위에 덮는 뚜껑돌)에서 갈라진 틈(길이 1.32m, 최대 폭 5㎜)이 발견돼 지난해 9월부터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전면 해체 작업에 들어갔고, 내년 12월까지 복원 작업을 마칠 계획이다. 이번 해체·복원 공사는 탑 아래 땅속까지 발굴할 예정이기 때문에 신라인들이 쓰던 일상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4/03/2013040300233.html  경주=유석재 기자 입력 : 2013.04.03 03:04 | 수정 : 2013.04.03 09:46

국보 제21호 석가탑 해체 및 사리장엄구 수습

▲ 석가탑 2층 옥개석 해체… 부처님 ‘진신사리’ 담은 항아리 수습… 2일 석가탑 2층 옥개석 아래 탑신 안 사리공(그래픽 참조)에서 수습한 사리장엄구. 상자 모양의 사리합 안에 보이는 것이 사리호(壺)로 부처님 진신사리를 담고 있다. / 남강호 기자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ZFPpdrJi8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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