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24. 16:30ㆍ旅行
금강변 부여읍(扶餘邑) 정동리의 앞 범바위[虎岩]에서부터 부여읍 현북리 파진산 모퉁이까지의 약 16㎞ 구간을 백마강이라 한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는 금강은 서쪽으로 꺾여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웅진(熊津) 또는 금강이 되고 유구천(維鳩川)을 합하여 남쪽으로 곡류하면서 부여군에 이르러 고성진(古省津) 또는 백마강이 된다. 금강은 백마강을 지나 논산천(論山川)을 합하고 강경을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황해로 들어간다.
백마강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았던 바위를 조룡대(釣龍台)라 하고 강의 이름도 사하(泗河)에서 백마강(白馬江)으로 바뀌었다고 하나, 백제 말기보다 1백 60여년 앞선 무령왕시대의 기록에 이미 금강을 ‘白江(백강)’으로 표기했던 사실이 있고, 역사적으로 말(馬)을 ‘크다’는 뜻으로 써온 것을 감안할 때 백마강은 곧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부여읍·규암면·장암면·세도면·양화면에는 백마강 양안에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평야가 넓게 분포한다. 이들 평야 지대는 논으로 개간되어 우리나라의 주요한 미곡 생산지가 되고 있다. 뒤쪽에 천연의 백마강을 끼고 앞으로 광활한 평야를 가지고 있는 부여는 백제 중흥의 웅지를 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백마강 일대는 538년(성왕 16)에 국도를 웅진에서 사비성(泗沘城)인 부여로 옮겨, 660년(의자왕 20)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의 심장부였다. 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에는 부소산성·군창지(軍倉址)·고란사(皐蘭寺) 등의 사적이 있으며, 동쪽 끝 약 100m 높이의 단애에는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의 낙화암(落花巖)이 있다.
이 지점이 바로 백마강 곡류의 공격사면이다. 백제 때의 요새로 660년에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당나라 군사가 쉽게 상륙하여 백제군을 치고 신라군과 연합하여 사비성을 공격하였던 곳이다.
663년(문무왕 3)에 백제 부흥을 꾀하는 백제와 일본의 수군(水軍)과 나당연합의 수군이 격전한 백촌강(白村江)의 싸움터도 여기이다.
가사
1.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아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2.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검은
임사랑도 끊었구나 아-아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