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10. 18:09ㆍ試驗
마지막 司試 수석… 12번 떨어진 그녀, 주인공이 되다
[37세 이혜경씨 13년 만에 결실]
서른 넘자 주변선 공무원 권유… 죄송해서 부모님께 전화도 못해
"최종 3차시험 앞두고 카톡 설치, 엄마 된 친구와 13년 만에 통화"
사법시험 54년 만에 역사 속으로… 고시촌의 청춘들 새 길 찾아야
1963년 시작한 사법시험이 올해를 끝으로 폐지됐다. 지난 7일 합격자 55명의 명단이 발표됐다. 사법시험 마지막 수석은 단국대 법대 출신 이혜경(여·37)씨가 차지했다. 13년간 1·2차 시험 포함, 12번의 실패 끝에 얻은 영광이다.
지난 9일 이씨의 서울 '신림동 고시촌' 원룸 방 한쪽 벽은 손으로 '합격'이라고 쓴 A4 용지로 도배돼 있었다. 천장에도 이 문구를 붙여놓고 잠들기 전까지 봤다고 했다.
이씨는 "내 키보다 높이 쌓여 있었던 고시 책들과 어제 작별했다. 마음이 이보다 더 홀가분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 7일 오후 '최고 득점으로 합격했다'는 법무부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부모님과 두 살 터울 여동생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씨는 "거짓말 같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마지막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이혜경씨가 9일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한 카페에서 2차 시험을 준비하며 써온 모의시험 답안지를 펼쳐 보이고 있다. / 박상훈 기자
수원 영신여고와 단국대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4번의 1차시험과 8번의 2차시험 끝에 합격했다. 10년의 시간을 오롯이 사시에 쏟아 부은 그에게 법조인의 꿈을 이루는 길은 인고(忍苦)의 시간이었다.
이씨는 "학창 시절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고 성적도, 성격도 평범했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처럼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했다. 법전을 잡고 있던 주변 선후배를 따라 자연스레 사법시험을 생각했다. "법조인이 되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도 멋지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신림동에 들어온 건 지난 2004년 봄. 매년 선발 인원이 1000명에 달하고, 한 해 응시자가 2만 명에 육박했던 사법시험 전성기였다. 경험 삼아 치른 시험에선 연거푸 1차에서 미끄러졌다.
이씨가 처음 시험을 본 건 2005년. 이후 작년까지 1·2차 합쳐 총 12번의 불합격 통지서를 받아들었다. 수험 기간이 길어지고 초조함이 더해갔다.
서른 살이 넘자 주위에선 다른 공무원 시험이나 로스쿨 진학을 권했다. 매달 100만원 가까이 소요되는 생활비도 문제였다. 모교인 단국대에서 장학금을 받았지만 가족의 도움이 필요했다. 부모님께 선뜻 전화할 수 없었다. 빨리 합격하지 못하는 것이 불효처럼 느껴졌다. 결혼할 생각도 못 했다.
이씨는 "신림동 고시촌을 떠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미련"이라고 했다. 매번 한두 문제 차이로 낙방했다. 포기할 수 없었다. "다른 진로도 고민했지만 제일 잘할 수 있는 건 법 공부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고 했다. 조셉 마셜의 '그래도 계속 가라(keep going)'란 책 제목을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루 15시간, 300페이지씩 읽고 공부했다. 그런 일과를 거르지 않았다. 가끔 가수 거북이의 노래 '빙고'를 듣고 인근 도림천을 산책하며 머리를 식혔다. 최고의 일탈(逸脫)은 신림역 쇼핑몰 구경. 그마저도 배짱이 부족해 뭘 사진 못했다. 이씨는 "그땐 '시험에 합격하면 꼭 다시 사러 와야지.' 하고 눈에만 담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번 제59회 사법시험 2차 시험엔 186명이 응시했다. 합격자 55명 중 30대 이상이 46명(83.6%), 평균 연령이 33.4세로 2002년 법무부가 집계를 시작한 이후 최고 높았다. 이씨는 "모두가 치열한 고민 끝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뛰어든 사람들"이라며 "고시 낭인(浪人)이란 말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이씨는 신림동 고시촌의 쇠락을 함께 겪었다. 시험 정보를 귀동냥하던 서점이나 헌책방들은 이제 대부분 사라졌다. 점심때면 고시촌 식당에서 들리던 학생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도 예전 같지 않다. 이씨는 당분간은 고시촌에 머물며 13년의 생활을 갈무리할 생각이다. "내가 왜 이 시험에 그렇게 매달렸던가,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려 한다."고 했다. 이번에 같이 2차 시험을 준비했던 사람 중 상당수가 불합격했다. "함께 공부한 이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했다. 사법시험이 폐지됐고, 그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나이 어린 사시 준비생 상당수는 로스쿨 등으로 진로를 틀었다.
이씨는 내년 3월 사법연수원에 입소한다. 마흔 줄에 접어들어 처음 시작하는 사회생활에 걱정과 기대가 교차한다고 했다. 지난 1일 3차 최종 시험을 앞두고서야 카카오톡을 설치했다. "자판기 커피 아닌 아메리카노의 '쓴맛'도 알아가는 중"이라며 웃었다. 합격 소식을 듣고 13년 가까이 연락이 끊겼던 대학 동기들이 하나둘씩 전화를 걸어왔다. 대부분 어엿한 가장(家長)과 아기 엄마로 변해 있었다. 이씨는 "남의 얘기를 잘 들어줄 수 있는 법조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10/2017111000294.html 김은중 기자 입력 : 2017.11.10 03:02
법조인 총 20,766명 배출… 사법시험 역사 속으로
사법시험이 7일 55명의 마지막 합격자를 배출하며 54년간 법조인 등용문으로서의 역할을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가난했던 시절 출신이나 학력, 성별 등에 관계없이 오직 실력만으로 높은 성취를 거둘 수 있어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속담을 실현해주기도 했던 사시는 2명의 대통령까지 배출하며 대한민국 발전의 역사와 함께 했다. 하지만 턱없이 낮은 합격률 탓에 '고시낭인'이 양산되면서 고급인력을 낭비하는 제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시가 올해를 끝으로 폐지되면서 법조인 배출은 시험을 통한 선발 체제에서 교육을 통한 육성 체제인 로스쿨 제도로 일원화되게 됐다.
◇1947년 조선변호사시험이 효시
사법시험으로 대표되는 시험을 통한 법조인 선발 방식의 효시는 해방 이후 1947년 시작된 '조선변호사시험'이다. 이후 1950년 '사법관시보의 임명수습 및 고시규정'에 따라 '고등고시 사법과'로 정비돼 16회에 걸쳐 시험이 실시됐다. 그러다 1963년 '사법시험령'이 공포되면서 지금의 사시로 전환됐다.
사시가 시작된 1963년에는 상·하반기로 한해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이 치러졌다. 그해 상반기에 실시된 제1회 시험에서 41명, 하반기에 실시된 제2회 시험에서 45명을 선발했다. 이듬해인 1964년 상반기에 치러진 제3회 시험에서는 10명, 하반기에 실시된 제4회 시험에서는 22명을 뽑았다. 지금처럼 매년 1차례 시행된 것은 1965년 제5회 시험 때부터다.
초기의 사시는 평균 60점 이상을 얻으면 합격하는 절대평가 방식이었다. 합격인원을 따로 정해두지 않았지만 시험이 어려워 합격자가 많지 않았다. 1970년까지 합격자 규모는 매년 33~83명 수준에 그쳤다. 1978년 제20회 시험에서 100명을 선발해 처음으로 100명 선을 돌파했다. 1981년 제23회 시험부터 300명 선으로 합격인원을 늘렸고, 1996년 제38회부터는 500명까지 늘었다. 이후 1997년부터 매년 100명씩 증원해 2004년 제46회부터 1000명 선으로 합격자 정원이 대폭 늘어났다.
사시에 합격한 예비 법조인을 위한 실무교육의 요람 사법연수원 역시 사법시험의 역사와 함께 했다. 1971년 법원조직법 개정을 통해 대법원 산하에 신설된 사법연수원은 사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2년간 도제식 실무교육을 실시해 새내기 법조인으로서의 자질과 실력을 갖추도록 하는 모체가 됐다. 사법연수원이 생기기 전에는 사법관시보제가 있었으나, 1962년 4월 서울대에 사법대학원이 설치되면서 폐지됐다. 사법대학원을 마치면 판·검사의 임용자격과 함께 석사학위도 받았다.
하지만 사시는 2007년 7월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변곡점을 맞았다. 국회는 변호사시험법을 제정하면서 2017년 사시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2009년 전국 25개 로스쿨이 문을 연 뒤에는 법률시장 수급 사정 등을 고려해 사시 선발 인원을 점차 줄여 지난해에는 109명까지 감소했다. 올해 마지막 시험에서는 55명만 선발됐다. 올해까지 모두 59차례의 사시가 치러지는 동안 70만8000여명이 응시해 2.9%인 2만766명이 법조인의 꿈을 이뤘다.
◇엇갈린 '명암(明暗)'
반세기 넘게 사시는 사람들에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다. 고(故) 노무현(사법연수원 7기) 전 대통령이 고졸 학력으로 사시를 통과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가 국가 최고 지도자의 자리까지 오른 것이 대표적이다(그런 사람이 사법시험을 폐지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해?).
대학에서 민주화 시위를 하다 감옥에서 합격 소식을 들었던 문재인(64·12기) 대통령의 일화 또한 유명하다. 조재연(61·12기) 대법관의 수석합격기는 '인간승리'의 결정판이다. 강원도 어촌에서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난 조 대법관은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한국은행에 입사했다. 가족들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법조인의 꿈을 접지 않고 성균관대 법대 야간학부에서 주경야독 끝에 1980년 제22회 사시에서 수석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대형로펌 대표를 거쳐 지난 7월 대법관에 올랐다.
권오곤(64·9기) 전 유고전범 국제형사재판소(ICTY) 재판관은 '수석 3관왕'으로 유명하다. 1976년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이듬해인 1977년 제19회 사시에 수석 합격한데 이어 1979년 사법연수원까지 수석으로 수료했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공 신화' 뒤에 가려진 그늘도 많았다. 좁은 합격문을 뚫지 못해 고시촌을 전전하며 청춘을 보내는 '고시낭인'도 많이 양산됐기 때문이다. 또 '기수 문화', '연수원 동기' 등으로 대표되는 서열화와 이너써클화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법조계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제는 로스쿨 시대"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9월 사시 폐지를 규정한 변호사시험법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국회가 별도의 사시 존치 법안을 만들지 않는 한 사시의 역사는 올해로 막을 내리게 된다. 법조인 배출이 로스쿨로 단일화 되는 것이다.
법조계는 헌재 결정까지 나온 이상 사시 존폐 여부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은 이제 그만 접고 로스쿨이 법조인 육성의 요람으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굳건히 뿌리내리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형로펌의 한 대표변호사는 "사시는 지난 세월 소시민들도 공부를 통해 성공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역할도 많이 했지만, 보수적인 '기수문화' 등으로 급속도로 진행되는 한국사회의 발전에 발맞추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며 "다양한 전공을 가진 학생들을 질 높은 교육을 통해 법조인으로 육성함으로써 국제적 기준에 걸맞은 다양한 법률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야 할 때"라고 말했다. 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122554&kind=AA01 서영상 기자 ysseo@lawtimes.co.kr 입력 : 2017-11-08 오후 6: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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