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한 생각
2021. 4. 10. 09:48ㆍ日記
2021년 4월 7일, 과거에 거주했던 부산시 남구 대연동, 내가 살았던, 추억이 배어있는, 지금은 남이 살고 있는 옛집을 찾았다.
1977년 초여름에 선비(先妣)께서 매일 연산동에서 51번 버스를 이용하여 대연동까지 가셔서 일꾼들을 부려 건축하여서 10월에 이사하여 1년 남짓 살았던 남구 대연동 427-34, 수산대학(부경대학교) 앞의 옛집을 찾았다. 그 집이 대지가 넓어서인지 지금은 더원팰리스오피스텔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다른 건물이 서 있었다. 그 집은 세가구가 충분히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2층으로 된 드넓은 저택이었다. 위치로 보나, 크기로 보나 만약에 그 집을 팔지 않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더라면 하는 헛된 생각이 날 정도의 집이다.
427-34(오른쪽 아래가 부경대학 정문이다.)
1978년 그 집에서 나는 스물일곱에 생애 첫 직장이자 정년퇴직을 한 직장인 동아고등학교로 첫 출근을 하였다. 3월 초순의 찬바람을 뚫고 해운대-운동장 간을 운행하는 40번 버스를 타고 첫 출근을 하였다. 3월 초순의 출근길의 매서운 찬바람은 귀를 아리게 했지만 그때의 감격스러움과 가슴 뿌듯함은 고희를 넘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다음 해 그 집을 팔고 집을 새로 지어 가을에 이사하여서 살았던 집을 찾았다. 3대가 적선하여야 얻을 수 있다는 남도로와 접해 있는 이집은 그 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으로 부산시립박물관 옆 복개대로와 골목 하나를 두고 있는 조용한 주택가이다. 집은 그때보다 많이 낡았고, 훌쩍 커버린 향나무와 재질이 바뀐 대문 외엔 그때와 똑 같은 모습이다.
571-38(왼쪽 아래가 부산시립박물관이다.)
이집도 선비(先妣)께서 지인으로부터 나대지를 구입하여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반공포로 출신으로 목수 일을 하는, 마음씨 좋은 이종4촌 자형의 힘을 빌려 건축하였다. 1978년 늦여름에 기공식을 하면서 북어와 술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낸 기억이 또렷하다. 조그만 잔디 마당이 있고, 1층과 기와를 덮은 중층과 2층은 옆에서 보면 ㅅ자 모양의 멋을 낸 지붕으로 된 집이다.
다음해인 1979년 가을에 나는 이집에서 결혼하였고, 우리 세 아이도 이집에 살 때 출생하였다. 말하자면 나의 인생의 출발점이 된 집이다. 내가 석사과정을 할 때 건강이 좋지 않아 내자가 친구 집에서 토룡을 사다가 마당 수돗가에서 씻어서 정성스레 약을 해주어 건강을 회복한 것도 이집이었고, 어머니께서 손자, 손녀를 유모차에 태우고 매일 산책하던 곳도 여기 앞길이다.
부경대학 앞의 부산예술회관에서 서쪽으로 가면 그때도 있었던 금강아파트
훌쩍 커버린 향나무
철재에서 스텐으로 재질만 바뀐 대문
앞쪽 동서로 난 길
옆의 남북으로 난 길
하지만 집은 남구에 있었고, 학교는 서구에 있었으니, 1984년 그때만 해도 교통수단은 복잡하고 불편한 시내버스밖에 없었으니, 이집을 정리하고 비로소 내 명의로 된 사하구의 집을 구해서 이사를 하였다.
대연동 571번지 38, 그 집에서 당리동 주택을 사서 이사한 것이 내 나이 서른셋일 때고, 큰아이가 다섯 살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이다. 그 집에서 큰 아이는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기숙학교로 진학하였기 때문에 우리보다 1년 정도 먼저 그 집을 떠나서 살게 되었다. 그런 큰아이가 근처에 갔다가 잠깐 그 집을 찾았단다.
누구나 어느 집이든 집에 대한 감회가 없는 집은 없겠지만 큰아이는 그 집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것이고, 나에게는 대연동 571번지 38, 그 집이 나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집이며,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그만큼의 큰 의미가 깊은 집이다.
이집도 대문의 재질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