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 스님

2023. 12. 5. 11:58佛敎

춘성(春城, 1891~1977) 스님의 이야기

백담사 춘성 스님 부도

춘성(春城) 스님은 1891년 강원도 인제군 북면 남교리 설악동 백담사 입구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본명은 이창림(李昌林)이고, 출가 후 받은 법명이 춘성(春城), 법호는 춘성(春性)이며, 별칭은 무애도인(無碍道人)이다.

아홉 살 되던 해에 어머니 밀양 박씨를 따라 설악산 신흥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다가 불상을 본 후 출가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허락하지 않았고, 수년을 기다렸다가 1903년 13세 때 다시 부모를 간곡히 설득해 출가하게 됐다. 그가 승려가 되겠다고 백담사로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스님을 찾아가자, 한용운은 처음에는 그가 나이가 어리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한다. 여러 번의 간곡한 청 끝에 한용운 스님이 그를 받아주었다.

이렇게 해서 백담사에서 출가한 춘성은 10여 년간 만해 한용운 스님을 모시며 수학한 직계 제자이자 유일한 상좌였다.

1911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경학(經學)에 전념했다.
1915년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하고 경학(講學)과 강연으로 이름을 날려 이후 강백(講白) 또는 '화엄법사'(華嚴法師)라는 명성을 얻었다.
1917년 12월에는 다시 백담사로 가서 한용운 스님의 시중을 들었다. 한용운 스님은 상좌 춘성에게 먹을 갈게 해서 묵향을 맡거나 취미로 선시를 읊조리며 무료함을 달랬다.
1918년에는 스승 한용운이 창간한 불교잡지 <유심(惟心)>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한용운 스님이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다. 그 뒤 춘성 스님은 망월사에 머물며 은사의 옥바라지를 했다. 이때 그는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은사가 차가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어찌 제자인 내가 온기 있는 방에 몸을 누이고 잠을 잘 수 있겠소.”라며 춘성은 땔감이 절에 가득한데도 방에 불을 땐 적이 없었다고 한다.

춘성은 수시로 면회를 했고, 면회 과정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몰래 받아 범어사의 한 스님에게 전달해 우편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할 수 있도록 했다. 한용운의 <조선독립의 서>는 1919년 11월 4일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게재됐다. 동시에 옥중에 있는 한용운의 밀서를 받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한용운 스님의 직계 제자이자 유일한 상좌이지만 자신은 만해에게 파문당했다고 생각해서 어디에서 만해 스님의 수제자라고 하면 극구 부인했다고 한다.

그 사연은 이렇다.

한용운 스님이 아직 감옥에 있을 때 춘성이 정성을 기울여서 솜바지 저고리를 만들어 갖다 드렸다. 그런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한용운이 따져 물었다.

“이 솜바지 저고리를 만들려면 수월찮게 돈이 들었을 텐데, 너는 무슨 돈이 있어서 이 비싼 솜바지 저고리를 만들어 왔느냐?”라고 물었다.

춘성의 대답이 “절에 딸린 텃밭을 팔아 만들어왔다”고 하자, 한용운이 화를 내며 “절에 딸린 텃밭은 부처님 재산이거늘 감히 네가 마음대로 팔았단 말이냐?”라고 질책했다.

이에 춘성은 "텃밭은 나중에 다시 사면되지 않습니까?"라고 답했지만 한용운은 완고하게, “아니 될 소리! 너는 부처님의 재산인 사중(寺中, 절의) 땅을 사사롭게 쓰기 위해 함부로 팔았으니 죄 중에도 큰 죄를 저질렀다! 난 너 같은 상좌를 둔 일이 없으니 오늘부터 내 제자라는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 마라!”라고 하면서 제자가 정성들여 만든 솜바지 저고리를 받길 거부했다.

이 일로 춘성 스님은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누군가 자신에게 스승이 누구냐고 물어도 “저에게는 은사가 안 계십니다.”라고 계속 답했다고 한다.

한때 춘성은 서울 대각사(大覺寺)에서 당대의 선지식이던 용성(龍城, 1864~1940) 스님의 문하에서 10년 간 화엄학을 공부해, <화엄경>을 거꾸로 외웠을 만큼 실력을 드러내 당대 최고의 '화엄법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허위의식 없이 알몸을 그대로 드러낸 선지식이었다. 그는 승려이자 한용운 스님을 도운 독립운동가이고, 문인이었다. 거침없는 육두문자와 풍자를 해서 불교계에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했다. 종교의 참 뜻을 깨우친 선승으로 평생을 옷 한 벌 바리때 하나만으로 살다간 철저한 무소유의 실천가였다.

1920년 설악산 신흥사의 주지가 됐으며, 재임시 불전답(佛田畓)을 많이 확보했다 한다. 아마 은사 한용운 스님에게 질책을 받은 보상을 하려고 애쓴 것 같다.
1930년 덕숭산 수덕사를 찾아가 만공(滿空, 1871~1946) 선사 문하에서 법사로 전법수행했다. 춘성은 정혜사 큰방에서 문을 폐(閉)하고 정진을 했다. 스님은 수덕사 정혜선원에서 겨울에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불도 지피지 않고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참선수행을 거듭했다.

덕숭산에서 정진할 무렵 춘성은, “수마가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큰 장애이다.”라면서 1937년 추위가 심한 북방에 자리한 금강산 유점사로 수행처를 옮겼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고 있을 무렵, 겨울이 되자 춘성은 정진 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위해 비장한 결심을 했다. 그는 법당 뒤 빈터에 구덩이를 파고 그 자리에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다.

잠을 이기기 위해서 한 겨울에 물 항아리 속에 들어갔다. 한겨울에 찬방에서 눕지도 먹지도 않은 채 14일간 정진하기도 했다. 이 때 몸이 굳어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비몽사몽간에 관세음보살이 놓아준 금침을 맞고 기사회생했다고 한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3년간 수행하다 마지막 동안거 결제일에 “이제 잠은 항복받았다.”고 하며 해탈했다고 한다.

그는 출가 이후부터 입적할 때까지 평생 이불을 덮지 않고 자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불의 음이 ‘이불(離佛)’이라는 부처와 이별을 뜻한다며 평생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잔 승려이기도 했다.

춘성은 생전 서랍이든 문이든 잠그지 않았다. 잃어버릴까 봐 걱정이 된 제자 하나가 춘성에게 말했다. “스님, 그래도 잠가야지요.”하니, 춘성이 말했다.

“야 이놈아! 내가 아비 어미 다 버리고 중이 되었는데, 무엇이 그리 중요한 게 있다고 잠그겠느냐?”라 했다.

춘성은 일상생활을 할 때에도 항상 넓은 방에서 기거를 했다. 모든 사람이 오다가다 방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방에서 생활했다. 대중이 잘 볼 수 없는 뒷방에서는 절대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문이 열려 있더라도 그는 태연히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

1940년 2월 이후 조선총독부는 미나미 지로의 담화 이후 창씨개명과 협력을 요청하였으나 춘성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1944년 스승인 한용운의 입적을 본 후 세상이 무상함을 탄식하고 모든 것을 놓고 다시 만공(滿空)을 찾아갔다.
1944년 덕숭산 만공 회상에 들어가, 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만공이 말재주와 글 쓰는 재주가 뛰어난 점을 염려했다. 그러자 춘성은 오직 화두 참구로 수행에 전념했다.

젊은 시절 서울 대각사에서 당대의 선지식이던 용성 스님의 문하에서 10년 간 정진하기도 했던 춘성은 50살이 돼 뒤늦게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에서 만공 선사를 만나 크게 발심했다.

춘성은 수덕사에서 만공 화상에게 '무(無)'라는 화두를 받았는데, 이 화두가 그에게 있어 수행의 지표이자 원칙이 됐다. 춘성은 무소유와 무애행을 일관되게 실천했다. 이때 만공 스님을 법사로 건당(建幢)해 춘성(春性)이란 법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만공의 법을 이어받았다.

※건당(建幢): 수행 구도(修行求道)가 다른 이의 사표가 될 만큼 원만해서 법을 전하는 스승에게서 법맥을 이어받는 일

1945년 8월 15일 간화선을 수행하던 중 망월사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그 뒤 덕숭산으로 되돌아가 참선에 정진했다.
1946년 10월 20일 만공의 입적 이후 서울 도봉산 망월사(望月寺)로 와서 망월사의 주지로 시무했다. 그는 망월사로 부임하는 즉시 이불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다.

스님의 문하에서 수행했던 이의 회고에 따르면 망월사에는 아예 이불이 없었다고 한다. 잘 때는 방석으로 배만 덮고 잠깐 눈을 붙인 뒤 다시 일어나 정진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앉을 자리조차 변변치 않은 망월사 선방에서는 40~50명의 선승들이 모여들어 수행 정진했다고 한다.

세 끼 공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얻어먹는 것은 춘성 스님의 욕뿐이었음에도 그들이 춘성 스님을 좋아하고 존경했던 것은 춘성 스스로 자기 방조차 없이 밤 9시부터 1시간 정도 누웠을 뿐 그 외엔 눕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암살당해 7월 6일 서울에서 국민장을 치를 때 춘성 스님은 선두에서 목탁을 치며 행렬을 인도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승려들은 모두 피난했다. 3일 후 서울 점령 소식을 접했지만, 그는 조선인민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망월사를 떠나지 않고 도량을 지켰다. 특히 그는 망월사(望月寺) 천중선원(天中禪院)을 지켜냈다.

천중선원은 문경 봉암사와 함께 조계종에서 세운 특별선원으로 지정됐던 곳이다. 한용운과 함께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백용성이 망월사에서 법문을 하면서 처음 세워진 뒤로 백학명을 조실로 해서, 석우, 고봉, 운봉, 설봉, 동산, 경운, 고암, 상월, 춘성 등이 대거 참여해 선풍을 이어갔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참선도량으로서의 맥이 끊길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춘성 스님이 홀로 남아 지킨 덕분으로 망월사는 간화선풍의 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50여년을 망월사에서 보냈는데 80 노구에도 월사 선원 큰방에서 대중들과 같이 잠을 자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는 모습은 이제 하나의 전설이 됐다.

그는 망월사의 조실로 여생을 보냈다. 망월사를 찾은 선승들이 보는 것은 파계요, 듣는 것은 욕뿐이었다. 그들은 잠도 편히 잘 수 없었고, 세끼 공양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승속을 망론하고 그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그는 고령에도 참선 정진했다고 한다. 대체로 나이가 들면 체력이 약해져서 몇 시간씩 앉아 있는 좌선을 생략하는 수가 많은데, 춘성당은 80이 넘어서도 대중들과 똑같이 좌선 정진했다고 한다.

춘성은 평소 녹차와 막걸리를 즐겨 마셨는데, 막걸리와 맥주, 소주 등의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다만 불자와 보살들이 대접할 때 곡차, 맥차라고 하면서 마시고 술이라 하면서 마시지는 않았다고 한다.

1976년 여름에 이르러 장좌불와를 그만두었다. 장좌불와를 시작한지 3년 만에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랑이 송곳니처럼 튼튼했던 치아가 하나 둘 흔들거리더니 나중에는 틀니를 해야 할 만큼 앞니는 물론 어금니까지 몽땅 빠져버렸다.

춘성 스님에게는 그 흔한 재산도 없고 지팡이조차 없었다. 한 벌의 가사와 모자만이 그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춘성 스님이 입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젊은 상좌가 스님에게 물었다.

“열반에 드신 뒤에 사리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하자,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답했다.

이 상좌가 그에게 "열반에 들어 다비를 하고 난 후, 스님의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 할텐데요?"라고 하자, 그제야 춘성은 "야, 이놈의 자식아! 내가 신도들에게 보여주려고 사느냐?"라며 호통 쳤다고 한다.

1977년 봄 북한산 화계사에서 문도를 모아두고 마지막 법어를 강론했다.

춘성은 ‘내가 입적한 후에라도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도 세우지 말 것이며, 오직 수행에만 힘쓰라’고 당부했다.

1977년 8월 22일 오후 7시 15분 도봉산 망월사에서 입적에 들었다. 당시 춘성의 향년이 세수 87세, 법납 74세였다.
1977년 8월 24일 서울 화계사에서 영결식이 거행됐다. 종정 서옹 스님이 아래와 같은 영결법어를 선언하고 영결식이 진행됐다.

춘성노사행리처(春城老師行履處) 춘성 노스님 노니신 곳,
삼세불조부득규(三世佛祖不得窺) 삼세의 불조도 엿볼 수 없도다.
칠전팔도차세중(七顚八倒此世中) 이 세상에 걸림 없이 한바탕 진탕치고,
천화향십마처거(遷化向什處去) 어디로 가시는고,
한성가두현전신(漢城街頭現全身) 서울 길거리에 전신을 나투도다.

그는 생전에 간소하게 장례를 치른 뒤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 유언했는데, 그의 장례식 때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결식과 다비식은 서울 화계사에서 문도장(門徒葬)으로 엄수됐으며, 유언에 따라 꽃상여 대신 거적 몇 개로 시신을 덮었으며, 다비 후 서해 바다에 뿌렸다.

그가 열반했을 때 몽땅 말라죽었다던 망월사 천중선원 뒤쪽의 소나무들이 다시 소생했다고 한다.

비석과 부도는 1981년 성남시 태평2동, 춘성이 한때 주지로 있었던 봉국사에 모셨으며, 비문은 탄허(呑虛) 스님이 찬(撰)했다. 또 하나의 부도는 그가 출가한 백담사 개울 건너 오른편 소나무 숲 속의 개울가에 있다.

이토록 투철한 수행과 특이한 기행으로 한 평생을 살다 가신 스님을 보내는 날 밤, 후배 선승들은 다비식장에서 스님이 생전에 즐겨 부르시던 <나그네 설움>을 부르며 춘성 스님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특기할 일은 춘성 스님은 통렬한 풍자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명한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나는 중대장

통행금지가 있을 때였다.
하루는 통행금지 시간을 지나서 스님이 서울 시내를 걷다가 순찰하던 방범대원과 마주치자 방범대원이 물었다.
"거기 누구요?"
"나? 중대장이야."
"아니 스님 아닙니까?"
"그렇지, 내가 바로 중의 대장이지."
방범대원이 다가와서 '왜 중대장이라고 거짓말을 하느냐'며 추궁하자, 그는 '다른 중들 같으면 통금시간에 절대 외부 왕래를 할 생각도 못하지만, 나는 이렇게 버젓이 다니니 내가 바로 중들 중의 대장, 중대장 아니냐?'며 응수했다고 한다. 방범대원도 괴짜 스님이로군 하면서 보내 줬다고 한다.

2) 내 x은 골백 번 부활한다

하루는 스님이 서울역에서 전철을 탔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버스와 전차, 기차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극렬 기독교인들의 공격적인 선교가 기승을 부렸다. 극렬한 기독교 선교자들의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총독부 당국조차 손대지 못했다.
기독교 선교사들 한 사람을 일본 헌병이나 경찰이 체포하려 들면 이를 외국에 알려서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를 종교의 자유도 허용 못하는 옹졸한 존재로 몰고 가 난처하게 만들었으므로, 총독부조차도 손을 못 대고 있었다.
춘성 스님이 서울역에서 전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기독교 전도사들이 전차 내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피켓을 들고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전차 안에 춘성 스님이 앉아 있는 걸 보고 더 큰소리로 외쳐댔다고 한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는 독생자로 태어나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나니……
그 중 어떤 기독교 신자가 춘성 스님의 앞에 와서 부처는 죽었지만 예수는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며, 한번 죽은 부처 대신 죽었다 살아나신 예수를 믿으라고 했다.
그런데 스님이 그 말을 건넨 사람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부활이 뭔데?"
"부활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오. 부처는 죽었다가 살아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소."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부활이라고?"
"그렇소."
스님은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너는 내 x을 믿어라. 예수는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내 x은 매일 죽었다가 매일 아침 다시 살아난다.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면, 골백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내 x을 믿으면 구천원(구원(9圓)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자기는 구천원(九千圓) 받을 수 있다고 응수한 것이다.) 이상은 받지 않겠는가!”
피켓을 든 기독교인들은 혼비백산 사라졌고 이를 지켜보던 전철 승객들은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3) 내 본적은 우리 아버지 x지

산에서 나무를 베던 중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에게 잡혀가 조사를 받았는데, 경찰이 반말로 “이봐, 당신 본적이 어디야?”라고 묻자, 스님이 큰 소리로, 당당하게 "우리 아버지 x지다."라고 답하자 당황한 경찰이 그럼 고향은? ”우리 엄마 x지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들이 왜 나무를 베었는지 묻자 "그야 산에 널브러진 나무를 가져와 요긴하게 쓸까 해서 그랬지."라고 말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보슈, 경찰 양반. 이 우주는 감옥이야 감옥! 사람들을 실정법으로 다스리면 성자들도 죄인이 되는데, 사람을 처벌하려면 평등하게 해야지, 자비와 선의로 행동한 사람들을 처벌하면 안 돼. 시골의 중들이 시줏돈을 받아 거지에게 주면 그것도 공금횡령이 되지만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건 죄가 아니야." 하고 장광설을 설파했다.
이 말을 들은 경찰들은 기가 차 그냥 보냈다. 나중에 절에 돌아가서는 "아 글쎄 그놈들이 내 말귀를 못 알아들어"라고 웃었다고 한다.

4) 어느 할머니의 혜안

어느 할머니에게 노처녀 손녀가 있었는데, 하도 눈이 높아서 웬만한 남자는 성에도 차지 않아 혼사가 자꾸 늦어졌다. 이에 할머니가 손녀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고자 스님에게 보냈다.
춘성 스님이 법문을 하던 중 그 노처녀를 지목하고, "네 좁아터진 그 곳으로 내 큰 것이 들어가겠느냐."고 했다. 기겁을 한 노처녀는 홍당무가 돼 그만 법당을 뛰어나가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서 할머니에게 하는 말이, "그 스님 엉터리 땡초다."라고 하자, 할머니가 왜냐고 물으니 처녀가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럼 그렇지. 바늘구멍보다도 좁은 네 소견머리에 어찌 큰스님의 바다 같은 깨우침이 들어가겠느냐!"라고 나무랐다고 한다.

※ 훗날 스님에 대한 평가

평론가 조용헌은 “천하의 무애도인이자 걸승” 또는 “천하의 걸림 없는 무애도인”이라고 평했다. 조용헌은 “한평생을 걸릴 것 없이 통쾌하게 살다 간 사람이 춘성 스님이다. 두려움 없는 무외의 삶을 살다간 사람이 춘성당이다. 내 자신 별 볼일 없이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춘성당을 생각하면서 힘을 얻는다.”고 했다.

조용헌은 그를 검객으로도 비유했다. “검객 춘성이 사용했던 보검은 다름 아닌 육두문자였다. 쌍욕을 살활자재로 휘두르면서 무 자르듯이 어떤 놈의 통념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심약한 사람에게 배짱을 심어주면서 거리낄 것 없이 통쾌한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라고 했다.

 

춘성春城 스님

춘성春城 스님 대전을 지난 열차 속에서 목사가 일어섰다. “여러분들 예수 믿읍시다.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믿읍시다.“ “아이 시끄러워 죽겠네. 잠도 오는데.“ “스님 가만 계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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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춘성(春城, 1891~1977) 스님의 이야기>

https://blog.naver.com/soli33/223250995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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