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6. 16:14ㆍ敎育
광화문에서
대학 총장의 무게
육판서(六判書)가 삼정승(三政丞) 중 하나를 못 당하고, 삼정승이 대제학(大提學) 하나를 못 당한다.’ 조선시대 대제학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대제학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에 소속된 정2품이지만 학식과 덕망이 만인의 귀감이 되어야 맡을 수 있는 자리였다. 대제학은 전임자의 추천이 있어야 임금이 임명할 수 있었고 종신직이었다.
조선의 대제학과 현대의 대학 총장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서울대 총장을 말할 때 대제학을 떠올리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대학이 늘어나면서 대학 총장도 많아지고 그 역할도 학문의 수호자에서 최고경영자(CEO)로 바뀌고 있지만 대학 총장에게 ‘지성의 대표자’이기를 바라는 사회의 기대치는 여전히 높다.
학문을 숭상하고 학자를 우대하는 것이야 좋은 전통이지만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학문이 정치권력에 봉사한 사례가 더 많았다. 유럽의 대학들도 중세에는 제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교황 또는 황제의 ‘보호’를 위장한 간섭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대학들은 간섭에 맞서 싸웠다. 대학들이 교회나 왕권과 대립하며 스스로 자신의 입지와 영향력을 확대해 왔던 것이다. 성직자의 특권이 교수와 학생에게 확대 적용된 것도 그런 ‘투쟁의 결과’였다.
유럽에서 자유와 자율을 본질로 하는 대학의 전통은 그런 과정을 거쳐 구축됐고 미국으로 전해졌다. 대학 총장에 대한 미국 사회의 존경심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하버드대 총장을 ‘공화국 제1의 시민’이라고 칭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선 유명 대학 총장의 인사(人事) 뉴스가 가볍게 취급되지만, 미국 영국 등의 유명 대학 총장 교체 소식은 톱뉴스를 장식한다. 대학 총장이 주도하는 커리큘럼 개편이나 모금 활동은 바로 사회적 어젠다(agenda)가 된다.
그제 대통령과 대학 총장들의 청와대 대좌는 안타깝게도 2007년 대한민국 대학의 현주소와 함께 대학 총장들이 권력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지를 보여 주고 말았다. 대통령이 전국의 대학 총장들을 이런 식으로 불러 모아 ‘가르치는’ 나라가 선진 민주국가 중엔 없지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야 검사든, 기자든 ‘맞장 토론’을 하자는 캐릭터이니 그렇다고 치자. 교육인적자원부가 참가를 독려했다고는 하지만 뻔히 예상되는 대통령의 ‘일장 훈계’ 앞에서 ‘고개 숙인 침묵’으로 일관하려고 152명의 총장님이 청와대로 모여들었단 말인가.
노 대통령은 “우리 사회는 강자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 “여러분은 성공한 사람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된다”며 총장님들을 몰아붙였다. 총장들은 대입 규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말문을 닫은 채 재정 지원을 늘려 달라는 청원을 주로 올렸다고 한다. 대학 교육의 자율성을 지켜낼 의지도 용기도 없는 총장들이 정부 예산만 조금 더 따내면 ‘인재양성, 교육입국’을 이루어 낼 것인가.
이석우 전 경희대 교수는 저서 ‘대학의 역사’에서 “(유럽의) 중세 대학도 학사문제, 등록금, 학교 구성원 간 이해(利害) 상충 등 많은 난제를 안고 있었다.”면서 “대학의 자율성 확보는 그것을 지켜내는 대학의 의지와 사회의 동의가 있었을 때 가능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제 청와대 풍경은 대학의 위기와 총장님들의 위기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 [광화문에서 / 동아일보]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입력2007.06.27 20:02
[송호근칼럼] 총장들의 관병식
"옥수수 밭은 일대 관병식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甲胄)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소설가 이상의 수필 ‘산촌여정’의 한 구절이 입에 맴돈 것은 갑자기 찾아온 폭염 탓만은 아니었다. 6월 26일 낮, 청와대에서 열렸던 대학총장들의 회합이 있은 후 요양차 산골을 찾았던 이상의 권태로운 눈에 잡힌 땡볕의 옥수수밭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회합의 공식 명칭인 ‘토론회’가 시사하듯, 토론의 명수들인 교수들과 부대끼면서 평생 토론으로 단련된 토론의 수장들이 숨은 실력을 십분 발휘했다면, 그리고 토론회가 흔히 그렇듯 합의는 없지만 훗날을 기약하고 흔쾌히 헤어진 회합이었다면,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고의 정치권력이 이 시대의 지식권력을 도열시킨 관병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와대는 총장들의 일대 관병식’으로 그 풍경이 바뀌었고, ‘완장 찬’ 대통령이 뿜어낸 비장한 훈시 바람(風)에 총장들은 마치 옥수숫대처럼 제 몸 부딪는 소리를 서걱서걱 냈던 것이다. 그게 쑥스러웠던지, 몇몇 총장은 재정 지원이나 여성 육성 대책이 절박하다는 분위기 파악 못한 발언을 겨우 했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한 김신일 부총리가 ‘지역균등할당제’라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자 어느 겁 없는 지방대 총장이 ‘재고해 줄 것’을 제의했다는 것이다. 그가 괘씸죄에 걸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152명의 관병식은 정권의 평등주의에 더 충실하게 복무할 것을 명하는 소집자의 거침없는 훈시, ‘소조(小鳥)의 간을 떨어뜨릴 듯한 그 예포 소리’에 일대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박수로 화답한 것이 그렇게 하겠다는 암묵적 결의였는지, 간이 붙어 있음을 확인한 안도의 표시였는지, 아니면 실어증 유발에 대한 항의였는지는 모른다. ‘서울대 자존심 때문이라면…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도 없고…’라는 훈시자의 결재 도장에 향도 격인 서울대 총장은 대학의 세계사에 등재된 ‘대학 자율’을 아예 지워야 할 위기감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고, ‘공무원들이 그렇게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때 도열한 총장들은 혹시 유탄이라도 맞을까 두려워 발언 욕구를 스스로 단속했을 것이다.
탈권위주의를 방패로 어떤 집단과도 ‘권력적으로’ 다투기를 즐기는 대통령이기에 총장 관병식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대통령이 대학총장들을 몽땅 불러 훈시했다는 소식은 전대미문이나, 한국에서는 아직 가능하다고 치면 그만이다. 사학들이 어느 날 모여 현 정권이 제일 업적으로 치는 내신 위주 입시 정책을 배반하는 결단을 내렸으니 비상 소집 통지를 받고 청와대에 불려갈 법도 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기금 확보에 굶주린 사학총장들이 연간 예산 10%인 정부 지원 명단에서 제명되지 않으려고 서로를 달랬을지도 모르고, 25% 정도인 국립대학 총장들은 통치자에 대한 예의 때문에 결석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례없는 이 ‘세기적 쇼’가 만천하에 방영되는 가운데, 평소 존경받을 만한 말만 골라했던 대학 총장들이 공공교육관의 결핍을 질책하는 통치자의 일장 훈계에 평소 소신과 열정을 생존전략과 현명한 처신으로 환산해야 하는 모습은 슬프다.
약자 배려를 호소하고 그런 목적의 교육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최고 권력자의 당연한 몫이지만, 모든 대학이 그것에 복무해야 사회정의가 실현된다고 밀어붙이는 것이 선출 권력의 정당한 행위인지는 따져 봐야 한다. ‘공공 이익을 위해 대학 자율도 규제받을 수 있다’고 통치자가 강조했을 때, 국가가 겨냥하는 바가 과연 공익인가를 따져 보는 유일한 행위자가 대학이다. 그래서 대학은 민주정치보다 세 배나 오랜 세월인 600년을 지속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불과 5년이면 상한 냄새를 풍기고야 마는 정치권력이 대학 이념과 ‘가야 할 길’을 브리핑하고 총장들이 억지로 받아 적는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연출된 것은 우울하고 근심스럽다. 브리핑 차트가 지시하는 대로 대학이 일사불란하게 따를 것을 명하는 통치자가 그 대가로 무엇이 유실되고 있는지를 알고나 있다면, 대학과 교수사회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이 불길한 근심의 화연(火煙)을 경보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총장들의 관병식이 끝나자 무언의 대학 부고장을 찍어 내는 인쇄기 소리가 요란하다. 중앙일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