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0. 20:57ㆍ徒步
영남대로의 출발점인 동래읍성을 다녀왔다.
경로는 다음과 같다.
충렬사>화목타운아파트(513m)>동래읍성동장대(1.7km)>인생문(500m)>동래사적공원(890m)>부산3.1독립운동기념탑(450m)>복천박물관(680m)>동래복천동고분군(360m)>동래읍성북장대(950m)>동래읍성북문(490m)>동래읍성서장대(360m)>동래향교(1.7km)
○장대將臺란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도록, 성, 보, 둔, 수 따위의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臺를 말한다. 이것을 배치한 방향에 따라 동·서·남·북 방향에 따라 동·서·남·북장대라고 한다.
동래읍성은 무엇이던가? 동래읍성은 조선시대 동래부 행정중심지로 역사와 전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리고 동래향교 등에서 수학한 청년들이 청운의 꿈과 인생을 걸고 과것길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과거 급제나 낙방의 소식을 가지고 가는 길이었고, 사랑과 이별의 길이었고, 혼례의길이었고, 소박의 길이었고, 보부상의 길이었고, 관리가 임지로 가거나 떠나는 길이었고, 새로운 삶을 찾아 가는 길이었다. 공사公私 간에 얼마나 많은 나그네의 회한과 애정, 애환의 여정이 서려있는 길이런가?
영남대로는 오늘의 중앙정부에서 관장하는 국도와 같은 격으로 관도官道이다. 현재까지는 기·종점을 흔히 동래읍성이라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부산진성이다.
『산경표山經表』의 저자로 잘 알려진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도로고道路考』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통하는 전국 각지로 뻗은 9개의 큰 도로가 있었는데 이를 구대로九大路라고 하였다.
초기에는 오대로五大路였으나, 후기에 이르러 9대로로 늘어났다. 이 9대로는 도성都城 안의 길이 각 성문城門을 통하여 지방으로 가는 도로망과 연결되어 있다.
영남대로는 제4도로로서 남대문을 출발하여 한강진漢江津(서빙고 부근)을 건너 남동쪽으로 판교참板橋站~험천險川~용인을 지나 동래부(東萊府) 부산진에 이르는 길로 960리, 384km이다.
영남대로는 일제가 망가뜨린 조선의 간선도로로 남대문에서 동래까지 총 960리, 384㎞에 이른다. 이는 경부고속道·철도보다 거리 70~80㎞ 더 짧았다. 이 도로는 과것길·조공품 운반로, 조선통신사 이동로 등 우리 정치·생활사 축도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실생활과 직접 닿아 있는 길이다. 일각에서는 ‘왕의 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 도로의 실질적 의미를 퇴색시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제는 철도와 신작로로 개설하여 역사적 의미 덮어버렸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때 한양(서울)~동래(부산)를 오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한양의 남대문에서 출발해 문경새재를 넘는 중로中路를 택하면, 용인~안성~충주~문경~상주~칠곡~대구~청도~밀양~양산~동래까지 걸어서 15~16일이 걸렸다. 총연장은 960리(384㎞)로 지금의 경부 국도나 경부선 철도보다 거리상으로 70~80㎞가 짧았다는 점에서, 조상들의 지리적 혜안을 엿본다.
도로의 폭은 넓은 곳이 10m, 좁은 곳이 3m 정도였다. 대부분 수레와 사인교가 지나갈 수 있었으나, 문경의 관갑천잔도, 삼랑진의 작원잔도, 물금의 황산잔도 같은 벼랑길은 디딤판을 밟고 가까스로 지날 수 있었다.
30리마다 역驛을 두었다. 장국밥 한 그릇 먹고 짚신 신은 길손이 한 번 쉴 때쯤을 표시하는 '일식一息' 또는 '참站'의 거리가 30리였다. '한참 간다'는 거리 개념도 여기서 나왔다. 지역별로 10여 개의 역을 한데 묶어 종육품 관직의 찰방察訪이 관리했으며, 역의 기능을 보조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관館과 원院이 설치됐고, 서민들의 주막도 들어섰다.
영남대로는 한민족사의 축도로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길이 아니었다. 이 길은 구석기 신석기 때부터 한반도에서 살다간 선인들의 자취와 궤적의 총합이었다. 고려시대의 우역제도郵驛制度를 바탕으로 조선 초기에 확립된 역제 속에 '영남대로'라는 공로가 자리한다. 이 길을 오간 사람이 숫제 얼마일 텐가. 과것길의 선비부터 등짐 봇짐을 맨 장꾼들, 나들이 길의 민초들, 왕명을 수행하는 파발들과 공문서의 수발, 세금으로 거두는 세미, 조공품 운반, 관리들의 여행도 모두 이 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1592년 임진년엔 수십만의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 영남대로를 따라 진공해왔고, 선린우호를 내세운 통신사들은 이 길을 따라 부산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영남대로가 잘 관리, 운영된 시기는 사람과 화물의 이동이 활발하여 사회가 발전했고, 영남대로가 황폐화되었던 시기는 우리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때와 대체로 일치한다. 영남대로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정치·생활사의 축도縮圖였다.
이 길의 의미와 가치를 읽고 정리하기도 전에, 이 땅을 강점한 일제는 철도와 신작로를 앞세워 영남대로를 철저하게 유린했다. 침략을 노린 문화말살이었다. 그후 한국전쟁과 경제개발 연대를 거치면서 영남대로는 기억 저편으로 멀어졌다.<국제신문에서 일부 인용>
참고로 구대로九大路는 다음과 같다.
제1도로(서울~의주)는 돈의문敦義門(서대문)으로 나가서 국토의 북서쪽 끝인 의주까지 가는 길인데, 홍제원弘濟院~양철평梁鐵坪을 경유, 고양~파주~장단~개성을 거쳐 의주까지 434km이다.
제2도로(서울∼경흥)는 동대문으로 나가서 수유치水踰峙를 넘어 파발막擺撥幕~만세교를 거쳐 북동으로 나가 서수라西水羅(경흥군에 있는 읍)까지 984km이다.
제3도로(서울∼평해)는 동대문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평해군(울진군 평해면)에 이르는 길인데, 중량포中梁浦~망우리를 지나 왕산탄王山灘~평구역平丘驛~봉안역奉安驛~고량진高梁津을 거쳐 평해에 이르는 길로 352km이다.
제4도로는 남대문을 출발하여 한강진漢江津(서빙고 부근)을 건너 남동쪽으로 판교참板橋站~험천險川~용인을 지나 동래부東萊府~부산진에 이르는 길로 384km이다.
제5·6도로는 모두 남쪽으로 고성현固城縣~통영으로 가는 길로서, 모두 남대문에서 시발한다. 그 중 제5도로는 제4도로를 따라 판교참~험천~용인을 거쳐 유곡幽谷(문경)역까지 가서 그 곳에서 함창~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나가는데, 유곡에서 통영까지의 거리가 212km이다.
제6도로는 동작진銅雀津 또는 노량진을 건너 과천~성환~천안~공주~삼례~전주~남원~함양~진주~고성 등을 경유하여 통영에 이르는데, 연장 거리 394km이다.
제7도로는 남대문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제주도에 이르는 길로서, 제6도로를 따라 동작진 또는 노량진을 건너 삼례까지 가서 갈라져 금구~태인~정읍을 지나 관두량館頭梁까지 가서 수로水路로 제주에 이르는데, 삼례역에서 관두량까지가 184km, 총길이는 388km이다.
제8도로는 남대문에서 소사素砂(부천)를 거쳐 평택~갈천~요로원을 지나 보령의 수군절도영水軍節度營에 이르는 길이다.
제9도로는 서대문에서 서쪽으로 양화진楊花津을 건너 양천陽川~김포~통진~갑곶진甲串津(강화면)을 지나 강화에 이르는 길이다.
동래읍성
임진왜란 부산 최대의 격전지 동래읍성 조선시대 에 현재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산동과 수안동 일대에 존재했던
namu.wiki
동래읍성지
조선 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으로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임진왜란때는 부산 진성과 함께 일본군의 1차 공격 목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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