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3. 19:29ㆍ健康
# 1 SBS 버라이어티 쇼 ‘라인업’에 등장하는 개그맨 윤정수의 캐릭터는 ‘투명인간’이다.
그는 방송 도중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행동하지만 동료들은 대놓고 그를 무시한다. 제작진은 머쓱해하는 그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자막을 띄운다. 1992년 데뷔 후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던 그는 ‘라인업’ 출연으로 ‘존재감 없어 뜨는 연예인’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무한도전’에 출연 중인 개그맨 정형돈이나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였던 ‘까다로운 변선생’의 개그맨 이종훈 등도 ‘존재감 없는 연예인’의 부류에 속한다.)
# 2 김영하의 장편소설 ‘퀴즈쇼’에 나오는 주인공은 매일 ‘영퀴방(영화퀴즈방)’이라는 인터넷 채팅 공간에서 퀴즈를 푸는 게 인생의 낙이다.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살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애인과도 이별한 그는 매일 현실 공간에서 도피, 사이버 세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간다. 소설 속에서 영퀴방은 주인공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는 유일한 공간인 셈이다.
바야흐로 ‘존재감’이 유행어가 된 세상이다.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존재감’을 입력하면 무수한 게시물이 쏟아진다. “존재감이 없어 고민이에요”라는 고백이나 ‘○○그룹에서 가장 존재감 없는 멤버’라는 댓글, ‘묵직한 존재감을 지닌다.’는 상품 품평은 기본이다.
심지어는 ‘존재감 없는 버스 정류장’ ‘한국 대중음악에서 록(rock)이 존재감 없는 이유’ 등등 아무 단어, 아무 표현에나 존재감을 갖다 붙이는 경향까지 생기고 있다. ‘사람, 사물, 느낌 따위가 실재로 있다고 생각하는 느낌’. 국어사전에 기재된 존재감의 정의다. 다분히 철학적이고 실체가 없어 막막하기까지 한 이 말이 2008년 대한민국에 창궐한 까닭은 무엇일까. 사회 구석구석 침투해 있는 ‘존재감’의 흔적을 짚었다.
▲ 일러스트 박상철
1. 대학생… 학과 일에 나서 보고 학생회도 기웃거려 보고, 미니홈피 운영하며 방문객 수로 인기 과시해 보고…
대학 2년생 박보라(가명)씨는 학과 일에 열심이었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조용히 보낼 생각이다. 평소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져 있던 그는 대학 입학 후 내성적인 성격도 고치고 친구도 사귈 겸 학생회를 기웃거렸지만 마음의 상처만 입었다. “한창 활동할 때는 서로 굉장히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남는 게 없더라고요.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내가 얘한테 필요한 존재일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친하다고 여겼던 친구한테서도 벽을 느껴 더 이상 그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나 홀로 캠퍼스 생활’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수업도 거의 혼자 듣고 공강 시간에도 책 읽으며 조용히 지내는 경우가 많거든요. 편하면서도 가끔 겁이 나요. 사람들이 나란 존재를 기억이나 할까, 세상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을까 싶어서요.”
김씨 주변에는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운영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친구가 많다. 그러나 그는 얼마 전 자신의 미니홈피를 폐쇄했다.“그런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싸이 친구’는 정작 실제로는 별로 안 친한 경우가 많아요. 진실한 관계라기보다는 ‘나 이만큼 인기 있는 사람이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관계인 거죠. 그런 식으로 존재감을 확인하려 하면 더 공허해질 것 같아요.”
대학생 김성은(가명·20)씨는 입학 초기 친구들 사이에서 아웃사이더가 될 뻔한 경험이 있다. “저희 학교는 학부제로 운영돼 입학하자마자 반이 나뉘어요. 자연히 같은 반 사람들끼리 생활하게 되죠. 그런데 저는 남들이 대수롭잖게 여기는 일에도 과하게 신경을 쓰고 누가 무슨 말만 해도 내가 싫어 저러나 고민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좀 힘들었어요.” 다행히 김씨는 좋은 친구를 만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전 운이 좋은 편이죠. 그런 돌파구마저 없었다면 대학 생활 내내 우울하게 지내야 했을 거예요.”
2. 중고생… “조용히 앉아만 있으면 친구들이 무시해요”, 왕따 공포… 교우관계 고민 상담 줄이어
“성격이 소심한 편인데 새 학기 되니 죄다 모르는 애들뿐이에요. 존재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친구 사귀는 법 좀 알려주세요.”
“올해 고1이 되는 여학생입니다. 저는 친구들이 이야기하면 그냥 가만히 웃는 편인데 소리 없이 웃고만 있으니 애들이 제 존재감을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사교성을 키울 수 있을까요?”
개학이 임박한 지난 2월부터 네이버 등 인터넷 포털에는 이런 유의 글들이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다. 대부분 친구 관계에 어려움을 겪거나 왕따(집단 따돌림) 문제를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작성한 게시물이다.
생활 반경이 학교와 가정으로 한정돼 있는 청소년의 경우, 존재감에 대한 대부분의 고민 역시 두 울타리와 연관된다. 특히 교우관계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청소년 시기의 특성상 왕따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은 공포에 가깝다. 백지수 경기 부천동중 교사는 “우리 학교는 남자중학교라 상대적으로 왕따 학생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학급당 1~2명은 꼭 따돌림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말했다. “학기 초 교우관계 조사를 해보면 대개 왕따 학생이 나옵니다. 그런 아이들은 내성적이고 말수도 적은 편이어서 존재감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죠. 학교에서도 이들을 구제하려 백방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현실적인 여건상 제약이 많아요. 상담전문교사를 배치하고 지역 상담기관이나 병원과 연계하는 등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백 교사는 존재감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의 또 다른 공통점으로 ‘무심한 부모’를 꼽았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와 대화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가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이 학교나 사회에서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많은 게 당연하지요. 관심을 구하려는 제스처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부모들은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면 윽박지르기부터 해요. 그렇게 엇나간 관계는 악순환을 부를 뿐인 데도요.”
3. 직장인… ‘가늘고 길게 살자’ ‘튀지 않고 적당히’식 늘어, 사표 내도 잡는 사람 없고…, “아, 나라는 존재”
몇 달 전까지 컨벤션 기획 일을 하다 잠시 휴식 중인 선현정(31)씨는 ‘언제 직장 생활을 했나’ 싶을 만큼 예전 생활이 까마득하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으면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개월간 야근도 불사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회사에 다니던 지난 3년 여 간 가족도, 친구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래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팀이 있고 몇 년간 계속해오던 전문 분야가 있다는 자부심이 그를 버티게 해주었다.
그러나 작년 가을 “좀 쉬고 싶다”며 사표를 냈을 때 그는 자신을 붙잡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았다. “내심 회사에서 나는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너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이 몇 명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때 깨달았죠. 아, 내가 일에 대해 갖고 있던 존재감이 허상이었구나.”
7년차 공무원 이소연(가명·32)씨는 지난해 경험한 일로 최근까지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 자신이 속한 팀에서 맡은 프로젝트에 사소한 문제가 하나 생기면서 여기저기서 싫은 소리를 들은 것. “성과가 좋을 땐 칭찬 일색이지만 조그마한 문제라도 발생하면 정색하고 비판하는 게 공무원 집단이에요. 그러다 보니 ‘최선을 다해 잘하자’는 생각보다는 ‘튀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는 “공무원 사회에는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가늘고 길게’ 가려는 직원이 유난히 많다”고 했다. 특히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믿었던 선후배로부터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을 보인다는 게 그의 설명. 재미있는 것은 회사에서 존재감이 희미한 이들일수록 하나같이 가정적이라는 사실. 이에 대해 이씨는 “직장에서 보상 받지 못한 존재감을 가족에게서 확인하려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인터넷 동영상 제작업체 퓨어엠 박명수(37) 대표에게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나만의 비결’이 있다. “다이어리에 사회에서의 내 역할을 쭉 적은 다음, 꼭 해야 할 일을 메모하고 실천하려 노력해요. ‘남편’이라는 역할 옆에는 ‘있는 힘껏 아내 사랑하기’, ‘자식’이라는 역할 옆에는 ‘주3회 이상 부모님께 전화 드리기’라고 적는 식이죠. 그렇게 하다 보면 존재감을 고민하는 불필요한 시간을 줄일 수 있어요.”
4. 주부… 자식 다 키우고 나니 “나는 누구인가” “이젠 뭘 하나”, 드라마에 올인하고 인터넷 커뮤니티 들어가고
전업주부 이희자(46)씨는 한때 심각한 주부 우울증으로 병원 문을 두드린 적이 있다. “남편과 애들 일로 정신없이 바쁠 땐 별 생각이 없다가 갑자기 한가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그럴 때면 내가 누구인가, 뭐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죠.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아봐도 뾰족한 수는 없어요. 마음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나 이웃을 만나 수다 떠는 게 고작이에요.”
그는 자신의 증세를 ‘자존감 결여’로 진단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없고 주변 사람에게 기대게 되더라고요. 어떨 땐 자식이 됐다, 어떨 땐 남편이 됐다, 어떨 땐 부모가 됐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상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게 충족되지 않으니 늘 힘들죠.”
결혼 후에도 회사에 다니다 육아를 위해 직장을 포기한 김민지(32)씨는 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 ‘뉴하트’에 푹 빠졌다. 두 아들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에게 드라마가 상영되는 수요일과 목요일 밤 10~11시는 ‘유일하게 나를 느낀 시간’이었다. “다른 시간은 분명히 내 생활인데도 내가 없어요. 날 위해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보니 드라마 볼 때만큼은 온 신경을 집중하죠. 스트레스도 풀리고 극중 인물에 내 모습을 투영하기도 하고. 배용준에게 열광하는 일본 아줌마들 심정을 백분 이해하겠더라고요.”
두 살배기 아들을 둔 주부 오민선(32)씨가 요즘 존재감을 확인하는 곳은 인터넷 커뮤니티다. 그는 이곳에서 각종 육아 지식을 공유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아이를 키우다 궁금한 걸 찾아보려 커뮤니티 몇 곳에 가입했어요. 응급처치 요령에서부터 좋다는 놀이방, 먹이면 좋은 음식까지 없는 정보가 없더라고요. ‘나도 한번 올려보자’ 싶어 이런저런 정보를 올리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엄청났어요. 어디서 샀느냐, 공동 구매하자, 사용 후기 좀 올려 달라…. 줄줄이 달리는 댓글을 보면 뿌듯하죠.”
오씨에 따르면 인터넷에는 그와 같은 ‘고수형 엄마’들이 꽤 많다. “동화책 전집을 고르고 좋은 교구 찾으러 외국 사이트 서핑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 거죠. 인터넷에 자신이 좋은 엄마, 현명한 아내라는 걸 과시하는 효과도 있고요. ‘한국형 마샤 스튜어트’를 꿈꾼다고나 할까요?”
5. 전문가 진단… “자기 포장의 시대…, 존중 받고 싶은 욕구 강해져, 소년에겐 내면 성찰 계기…, 지나치면 무기력증”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존재감에 대한 고민이 넘쳐나는 세태를 이해하려면 자기의식(self-consciosness)의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기의식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스스로의 행동, 성격 등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사적(private) 자기의식과 공적(public) 자기의식으로 나뉜다. 전자는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욕구에 모든 사고의 초점을 맞추는 유형을, 후자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없이 늘 타인의 반응을 살피는 유형이다. 자기의식 유형 이론에 따르면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전형적인 공적 자기의식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적극적인 자기 포장의 시대예요. 인터넷의 발달로 조금만 특별하면 얼마든지 스스로를 알릴 수 있죠. 상대적으로 무난하거나 평범한 사람들의 존재감은 옅어질 수밖에 없어요. 더욱이 대부분 외동으로 자라난 젊은이들은 이전 세대보다 (남에게) 존중 받고자 하는 욕구가 훨씬 강해요. 그런데 현실은 그 욕구를 다 채워주지 못하거든요. 그런 괴리가 존재감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곽 교수는 한 개인이 속한 집단 수는 갈수록 느는데 정작 집단 내에서의 소속감은 느슨해지고 있는 현상 역시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하나의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신의진 연세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존재감을 ‘자아존중감+자기정체성’이라는 의미에서 ‘셀프 이미지(self image)’로 규정한다. 그는 “존재감을 고민하는 청소년이 많아지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라는 입장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에 무조건 적응하던 아이들이 내적 성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온 힘을 다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쳤다면 지금 세대는 단순 생존보다 자신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으로 한층 발전한 거죠.”
전문가들은 너도 나도 존재감을 고민하는 현상이 꼭 좋은 것도,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곽금주 교수는 “왕따 현상만 해도 심하지만 않으면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자기성찰의 순기능이 있습니다. 반면 상처가 너무 깊으면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질 수도 있지요. 존재감에 대한 고민 역시 너무 과하지만 않다면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신의진 교수는 존재감에 대한 청소년 고민 해결의 몫은 어른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중1이 된 아들이 가끔 자신의 처지가 ‘학원 뺑뺑이 도는 인형’ 같다며 푸념합니다. 어쩌면 존재감을 고민하는 청소년 문제는 아이들에게 너무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가 그 원인 아닐까요? 아이들이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보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7/2008030701341.html 최혜원 기자 happyend@chosun.com 입력 : 2008.03.0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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