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6. 17:02ㆍ佛敎
지정번호 : 명승 및 사적 제1호
지정연도 : 1963년 3월 28일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시대 : 신라
크기 : 면적 388,879㎡(117,541평)
불국사는 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境內)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 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국사의 건축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자경루, 다보탑과 석가탑, 무설전 등이 있는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불국사 전면에서 바라볼 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당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병화로 소실되어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글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정교하게 잘 다듬은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불국사의 높이 8.2m의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전체의 균형이 알맞아 간결하고 장중한 멋이 있으며, 높이 10.4m의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위에 여러 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건축처럼 짜 맞추었는데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다. 신라시대의 여러 절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하는 것으로 평가 받는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영제부인과 기윤부에는 왕의 모친 지소부인을 위하여)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고구려가 패망한 지 83년이 되는 751년(경덕왕 10)에 낡고 규모가 작았던 이 절을 당시의 재상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며 오히려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한편,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三創)되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다. 이 기록에 의하면 김대성은 이 공사가 착공된 지 24년 만인 혜공왕 10년(774)에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사망했으며, 그 뒤 불국사는 국가적 사업으로 이어져 착공 30년 만에 완성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건대, 처음에 소규모로 창건되었던 불국사를 통일 뒤 재력이 풍족해진 경덕왕 때 김대성이 대찰로 확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람으로 완성되어 신라 호국 불교의 도량으로서 법등을 이어온 불국사는 조선 선조 26년(1593) 왜병의 침입 방화로 650여 년간 내려오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 후 대웅전 등 일부의 건물이 다시 세워져 그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불국사가 문화유산으로 보존 전승되고 나라를 사랑하는 호국정신을 기리는 도량으로서 옛모습을 되찾게 하고자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쳐 창건 당시의 건물터를 발굴 조사하고 그 자리에 다시 세움으로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은 확실하다.
당시 신라인들은 이상적 피안의 세계로 불국사를 그렸는데 그러한 불국을 향한 염원은 3가지 유형으로 잘 나타났다.
하나는 [법화경]에 근거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석가염불의 사바세계를, 그리고 [무량수전]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요, 또 다른 하나는 [화엄경] 에 근거한 비로전을 중심으로 하는 비로자나불의 연화자세계의 불국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 놓았다.
불국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해탈교(解脫橋)를 건너면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있는 천왕문(天王門)이 나온다. 다시 천왕문을 통과하여 반야교(般若橋)를 지나면 큰 석축이 나타나는데, 이 석축 위에 펼쳐진 세계가 바로 불국토인 것이다.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를 넘어 자하문(紫霞門)에 들어서면 펼쳐지는 곳이 석가여래의 사바세계다. 대웅전 앞 좌우에는 현세불(現世佛)인 석가여래를 상징하는 석가탑(釋迦塔)과 과거불(過去佛)인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다보탑(多寶塔)이 있다.
다시 연화교(蓮花橋)와 칠보교(七寶橋)를 올라 안양문(安陽門)을 들어서면 극락전(極樂殿)이 나오는데 그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금동 아미타여래상이 있다. 아미타불(阿彌陀佛)(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 계시는 서방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상징하는 성역(聖域)이다. 안양(安養)이란 바로 이 극락정토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그 문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며 극락왕생을 바라는 아미타 신앙이 매우 성행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즈음 만들어진 불국사에서 극락전이 있는 공간은 대웅전이 있는 공간보다 좁고, 석축의 높이도 전체적으로 한 층 낮게 되어 있다. 이는 아미타정토가 가장 낮은 근기(根機)를 가진 중생을 위한 것이라는 화엄사상에 입각하여 설계한 때문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무설전 뒤쪽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毘盧殿)이 있는데 비로자나불이 하고 있는 손모양인 지권인(智拳印)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님을 상징한다. 화엄사상에 따르면 근기가 가장 높은 중생이 도달 할 수 있는 경지가 연화장(蓮華藏) 세계로, 이는 법신불(法身佛)로서 절대적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머무는 세계이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이 일곽은 경덕왕 10년에 지어졌다.
그 당시에는 극락전을 전후좌우로 두르는 회랑을 비롯하여 석등 및 많은 건물과 석조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극락세계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이 건물들은 대부분이 1593년 왜란 때에 방화로 불타 버렸고, 지금의 연화교, 칠보교를 비롯한 석조물만이 남아있다. 안양문을 넘어서면 극락전에 이른다. 견고한 석단 위에 목조로 세워진 극락전은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후 근 200년 만인 영조 26년에 중창되었고, 1925년 일제하에 다시 중수되었다.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불국사는 다보탑,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석탑과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교, 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교 칠보교가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이용한 예술품의 훌륭한 솜씨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비로자나불상,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아미타여려좌상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들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경내에 있는 문화재로는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 20호), 불국사 3층석탑(국보 제 21호), 연화교· 칠보교(국보 제 22호), 청운교· 백운교(국보 제 23호),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 26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 27호), 불국사 사리탑(보불 제 61호)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 ·15광복 후인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經樓)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아미타여래 좌상은 금동불(金銅佛)로서 높이 1.8m, 머리 높이 48cm이며, 무릎의 넓이는 1.25m이다. 자비스럽고 원만한 얼굴은 정면을 정시(正視)하였고 어깨는 가사(袈裟)를 걸쳤고 오른손을 가볍게 오른쪽 무릎에 얹었다. 왼손은 손바닥을 벌리고 가운데 손가락을 굽혀 설법하는 모습을 표시하고 있다. 원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산스크리트 어 (Amitbh, 무량한 빛) 또는 (Amityus, 한량없는 목숨)의 음역이다. 한문으로는 무량수(無量壽) 또는 무량광(無量光)이라고 번역되었다. 그 부처님이 태양이 지는 서쪽에 있는 지극히 행복한 나라에 계신다고 하여 그 나라를 극락정토(極樂淨土)라고 불렀다.
아미타불은 그 좌, 우에 각각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동반하며, 이 두 보살로 하여금 중생들을 돕게 하시는 부처님이다. 따라서 이 부처님을 모신 곳을 극락전(極樂殿)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부른다. 금동아미타여래 좌상은 국보 제 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전은 서방정토의 부처님이신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성전으로서 극락보전 · 무량수전 · 무량전 · 보광명전(普光明殿)· 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신라시대 부터 극락정토신앙이 강하여 내부 구조는 대웅전만큼이나 화려하다. 기둥과 천장에는 단청을 하고 삼존불 뒤쪽에는 극락의 법회 장면을 그린 극락회상도나 극락구품탱화 등을 건다. 이밖에 후불탱화로는 아미타불화 · 아미타불내영도 · 관음도 등을 건다. 본존인 아미타부처님은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끝이 없어 백, 천억 불국토를 비추고(無量光), 수명 또한 한량없어 백, 천억 겁으로도 헤아릴 수 없다(無量壽). 그래서 이 부처를 모신 전각을 무량수전이라 하고 보광명전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전은 이 부처님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아미타부처님의 좌우 협시로는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둔다. 여기서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자비를 상징하는 지혜로써 중생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지혜를 상징하는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널리 비추어 삼도의 고(三道苦)를 없애고 끝없는 힘을 얻게 한다.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으로 인도하는데, 한국에서는 고려 및 조선시대에 극락왕생 신앙이 성행하면서 아미타불의 협시로 등장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즉 《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을 근거로 하여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세운다. 한국 불교에서는 대웅전·대적광전과 함께 3대 불전으로 꼽힐 만큼 중요하며, 대표적인 건물로는 영주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국보 18호)을 들 수 있다. 전각은 남향이고 아미타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므로 불상 앞에서 기원하는 사람은 극락이 있는 서쪽을 향하게 된다. 부여의 무량사극락전(無量寺極樂殿, 보물 356호)이나 강진의 무위사극락전(無爲寺極樂殿, 국보 13호) 등도 같은 경우이다. 김천 직지사처럼 극락전을 아예 서쪽에 동향으로 세운 곳도 있다.
참고 : 한국의 세계유산(http://www.ocp.go.kr/l_trea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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