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 13:01ㆍ經濟
대한민국 경제 國父 호암 <이병철 삼성창업주>에게 길을 묻다
커버스토리 다시, 호암처럼!
보보시도량(步步是道場). 이것이 인생이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도량이라는 생각 아래 사업을 계속 일으켜왔다. 인생은 도량이고 나에게는 끊임없이 사업을 일으켜가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연마였다. 행복의 척도는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다. 인생을 도량이라고 친다면, 그 도량에서 살아가는 데 적합한 내 나름의 삶의 방법을 끝까지 지키고 싶을 따름이다. 인생이라는 석재에 신의 모습을 새기는 것도 좋고, 악마의 모습을 새기는 것도 좋다. 다만 나는 그 석재에 사업을 위해 산 한 사나이를 새겼으면 한다. <호암어록> 중에서
가난했던 그 시절, 눈 시리게 투명하고 하얀 것이 많았다. 추운 아침이면 처마 끝에 달려 있던 수정고드름, 장독대 위에 쌓인 흰 눈…. 그래서인가?
눈같이 흰 백설탕 가루에 대한 추억은 각별하다. 친구라도 집에 데려오면 어머니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접에 꼭꼭 숨겨두었던 백설탕을 한 술 넣어 휘휘 저어 주셨다.
갈비나 과일상자는 꿈도 못 꾸던 시절, 어쩌다 명절 때 들어온 설탕은 다락방에 숨겨 놓은 귀한 보물이었다. 먼 친척이 선물로 가져 온 생전 처음 보는 커피에도 설탕을 듬뿍 넣었고, 각설탕을 아삭아삭 씹어 먹던 기억도 유년의 추억이다.
황명수 단국대 명예교수는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 호암 이병철 연구’라는 논문에서 “우리나라에 커피문화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부터다.
1953년 설립된 제일제당에서 생산하는 값싼 설탕의 영향이 컸다”며 “커피의 국내 보급과 함께 다방문화도 대중 속에 뿌리내렸다. 마치 신대륙 발견 이후 영국이 홍차문화시대를 맞이한 것과 같다”고 적었다.
20세기 중반 제일제당에서 생산하는 설탕과 제일모직에서 생산하는 양복지는 한국에 커피문화와 맞춤양복 시대를 열게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제일모직이 탄생한 1954년 이후에는 당시 마카오에서 수입하던 영국제 양복지의 가격이 7만환에서 1만2000환까지 떨어져 제일모직은 마카오 밀수 원단을 몰아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삼성가족’의 뿌리는 조부로부터 배운 유학사상
▲ 조선양조공장 앞에 모인 호암(오른쪽에서 네 번째 정장 차림)·임직원과 가족들(연대 미상)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 그는 일제강점과 전쟁으로 피폐된 조국에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잇달아 설립해 설탕과 모직의 대량생산을 주도하며 먹고 입는 문화의 대변혁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소비재산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호암은 이후 기업인으로 살았던 50여 년 동안 금융·의료·중화학·전자·통신·반도체 등 쉬지 않고 새로운 산업에 도전하며 국가경제에 기여했다.
호암은 기업 활동뿐 아니라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도 각별해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문화재를 사재를 털어 사들이고, 잊혀 가던 우리의 소리 ‘국악’을 살리기 위한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생산 활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인의 역할을 넘어 반세기 역사의 한국문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해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간 ‘프런티어 정신’의 뿌리는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그의 생가에서 시작된다. 중교리는 1년 내내 큰 눈이나 큰비가 오지 않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2009년 12월1일 찾은 생가 마을에는 집집마다 열려 있는 감나무가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2007년 11월19일 호암 사후 20주기에 맞춰 개방한 생가는 개·보수 과정을 거쳐 말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연말연초에는 하루 1500명이 넘는 사람이 ‘이병철 회장처럼 큰돈을 벌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 위해 이곳을 찾는단다. 1910년 2월12일. 호암은 경주 이씨 집성촌인 이곳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찬우는 이곳에서 4대째 내려오는 천석꾼 지주였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된 1884㎡(570평)의 넓은 마당 한편에는 천석꾼의 집임을 증명하듯 제법 넓은 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서향으로 앉은 집 바로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둘러서 있다. 거기서 보면 멀리 10리 밖으로 남강이 흐른다.
풍수전문가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 명당이다. 호암은 감나무와 벽오동이 서있는 앞마당에서 뛰어 놀았다. 다섯 살이 되던 해-. 조부 이홍석(1838~97)이 만년에 세운 서당(문산정)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당은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생가에서 산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20여 분 걷다 보면 산속 깊이 숨어 있는 서당이 나온다.
호암은 1986년 발간한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어머니는 아침마다 책을 옆에 끼고 형과 함께 대문을 나서는 나를 지켜보았다”고 회고했다. 어린 시절 매일 아침 형과 함께 오솔길을 걷던 소년 호암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드넓은 하늘, 피어났다 사라지는 뭉게구름….
소년은 오솔길에서 세상 밖을 보았고, 미래를 꿈꿨다. <호암자전>에 따르면 조부 이홍석은 학문에 소양이 있어 당시 영남지역의 거유(巨儒)로 일컬어지던 허성제의 문하생으로 시문·성리학 등에 능했다. 호암의 부친인 이찬우는 생전 선친 이홍석으로부터 “문장은 경국의 대업이며 불굴의 성사다.
사람의 생명이나 영화는 유한하지만 문장의 생명은 무한하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조부 밑에서 자란 호암이 한학 공부를 강요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부에서 부친으로 이어지는 유교 가풍에 호암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5년 남짓의 한학 공부는 평생 호암 인생철학의 근원이 됐던 것 같다.
▲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있는 호암 생가
‘붓’을 버리고 ‘상인’의 길을 걷다
호암은 <호암자전>에서 “가장 감명 받은 책으로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논어>”라고 했고, “논어야말로 인간이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마음가짐을 알려준다.”고 적었다.
삼성그룹이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가족주의적 회사공동체로 ‘삼성가족’을 형성하고 ‘삼성효행상’ 등 전 사회적으로 도의교육 실천에 앞장선 것도 호암이 조부와 부친의 영향을 받아 유년시절 익힌 한학 공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호암은 이러한 한국의 전통사상에 서구의 합리사상을 접목해 훗날 삼성이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호암이 태어난 1910년은 한민족으로서는 잊지 못할 한일병탄의 해였다. 1987년 11월19일 78세로 서거할 때까지 그는 정치·사회·경제적으로 극심한 변화를 겪은 시대를 통과해야 했다. 1910년 한일병탄, 1919년 3·1운동, 1930년의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과 1942년 태평양전쟁, 1945년의 8·15 해방, 1950년의 6·25, 1960년 4·19와 1961년 5·16, 1979년의 10·26 등 10년을 주기로 대사건이 일어났다.
이 격동하는 사회에서 일생을 살았던 호암은 사회의 변화기마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업종을 개척해 한국기업의 롤 모델을 만들어 나갔다. 서당으로 가는 오솔길에 안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1936년 26세의 나이에 사업 투신을 결심한 호암은 부친으로부터 쌀 300석쯤의 재산을 받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창업한다.
호암이 처음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거창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호암자전>에 밝힌 당시 심정을 보자. “어느 달밤 순간적으로 사업에 대한 결심을 굳혔던 당시, 확고한 신념이나 소신 같은 것은 아직 없었지만, 사회적 제약 등 여러 가지 여건을 생각한 나머지 사업을 하고 싶다. 사업에 도전해 보고 싶다 - 그렇게 스스로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호암은 1930년 학업에 큰 뜻을 품고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정경과에 입학해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곧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밝은 달빛이 창을 너머 방 안으로 스며들던 그날 밤, 잠든 세 아이의 얼굴을 보며 “너무 허송세월했다. 뜻을 세워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던 것.
호암이 말한 ‘사회적 제약’은 일제 치하에서 운신의 폭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시대에 주요 관직은 모두 일본인 차지였다. 호암은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배 안에서도 ‘조선인’이라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경험을 기억했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을 감안해서였는지, 상인(商人)을 높이 보지 않던 유학자의 집안이었음에도 선친은 호암의 의사를 기꺼이 들어줬다.
“마침 너의 몫으로 300석쯤의 재산을 나누어 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 보는 것도 좋다.” 이렇게 하여 호암은 붓을 버리고 상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호암 인생에서 첫 번째 도전이었다. 1930~40년대는 우리나라 기업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시기는 일제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매우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했을 때다.
호암은 협동정미소를 창업한 이후 일출자동차회사를 인수하고 부동산사업에까지 진출해 660만여m2(200만 평)의 대지주가 되나 1937년 중일전쟁의 여파로 빚더미에 앉게 된다. 전적으로 은행 대출에 의지해 토지를 확장하던 차에 일본이 은행대출 전면금지정책을 펴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호암은 협동정미소·일출자동차·토지사업을 청산하면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는 일생일대의 실패를 경험한다.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터득한 것도 바로 이때의 실패로 얻은 교훈이다.
호암은 훗날 삼성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사업을 펼칠 때도 이 말을 염두에 두고 무리한 투자나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한번 쓰디쓴 실패를 경험한 호암은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다시 재기를 꿈꾼다. 삼성상회는 현재 ‘삼성’의 모체로, 주업은 무역과 제분업이었다.
‘삼성(三星)’의 삼(三)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다. 성(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뜻한다.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 호암은 재출발하는 사업에 이런 소망을 담아 직접 상호를 결정했다.
1950년대 ‘산업자본’시대를 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의 가장 시급한 경제적 과제는 ‘자립’이었다. 대구의 삼성상회를 출발로 조선양조주식회사 등을 거쳐 서울로 진출한 호암은 1948년 11월 ‘삼성물산공사’라는 간판을 달고 국제 무역업을 시작한다. 신생국가인 한국에서 가장 시급한 사업은 물자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국제무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마카오·홍콩·싱가포르 등 주로 동남아를 상대로 오징어 등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하던 초기만 해도 삼성물산공사는 무명의 회사였다. 하지만 호암은 이때부터 특유의 가족주의 경영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규모를 정하지 않고 사원이면 누구나 실적에 따라 수익배당을 받을 수 있게 했고, 직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애쓰면서 근무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삼성물산공사는 이런 합리적 경영 덕분에 설립 1년 만에 무역업계에 혜성으로 등장한다. 당시 천우사·동서상사·화신산업·미진상사·남선무역 등 상공부에 등록(1950년 3월)된 무역업체 543개 가운데 당당히 7위에 부상했던 것. 1950년대는 호암과 삼성의 역사에 대전환이 일어난 시기다.
삼성물산공사를 통한 재화가 축적되자 호암은 수입대체산업인 제당업과 모직업으로 눈을 돌렸다. 악성 인플레이션과 미국의 원조로 소비재 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던 1950년대는 6·25로 인해 수백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생겼고 가옥은 물론 일제가 남긴 산업시설마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950~60년대 미국의 대한 원조는 군사원조를 포함해 총 48억 달러였다. 이는 국민총생산(GNP)의 8%, 총투자의 64%, 총수입의 70%에 해당했다. 이 중 경제원조 규모는 총 24억10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방대한 원조에도 1953~60년 실질 GNP 연평균 성장률은 3.7%에 불과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53년의 61달러에서 1960년 70달러에 그치는 저성장을 이룬다. 당시 민생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에도 제지·제당·모직물은 국내 산업이 전무해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했다. 이들 물품에 대한 제조업의 필요성을 느낀 호암은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소비재 경기의 활성화를 꾀했다.
특히 제일제당은 근대적 생산시설을 갖춘 첫걸음으로, 상업 자본을 탈피해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한국 최초의 선구 자본이었다. 호암이 우리나라 근대 산업발전사에서 분기점을 마련한 것이다. 호암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설립은 시작에 불과했다. <호암자전>에서 밝힌 당시 호암의 심정을 엿보자.
1960년대 ‘기업가의 탄생’
최초로 생산된 설탕의 시제품 앞에서.“나는 제당 설립 2년 만에 거부(巨富)의 칭호를 받았다.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나 언제나 축재(蓄財)가 목적이기보다 신생 조국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 있었다. 기업가는 기업을 구상하여 그것을 실현시키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운영하면서 국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발전적으로 파악해 하나하나 새로운 기업을 단계적으로 일으켜갈 때 더 없는 창조의 기쁨을 가지는 것 같다.”
‘호암(湖巖)’이라는 호는 전용순(전 상공회의소 회장, 신민당 대표) 씨가 지어준 것이다. ‘호수처럼 맑은 물을 잔잔하게 가득 채우고 큰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준엄함을 가져라’라는 뜻이다. 1955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설립으로 거부의 칭호를 막 듣기 시작할 때 지은 ‘호암’이라는 호는 이후 그의 40여 년 기업인생에서 나침반이 되었다.
1960년대는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시대였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을 착수한 데 이어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7~71)을 거치며 성공적인 공업화를 구축하는 시기다. 이 시기 호암은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수출주도형 전략을 꾀한다. 1964년, 4390만 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한국비료 공장 건설을 주도했던 삼성은 국내 1위 기업이었다.
▲ 1980년 전경련이 주최한 제1기 최고경영자과정에서 자신의 경영철학을 피력하는 이병철 회장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이 소비재 기업으로 꾸준히 선두를 지켰고, 1958년 안국화재해상보험, 1963년 동방생명 인수로 금융업에도 진출, 삼성은 따라올 경쟁자가 없는 압도적 1위 기업이었다. 지금의 현대와 대우가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중동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였다.
현대에 1위를 내주었던 삼성은 외환위기 이후 현대그룹 등이 해체되면서 다시 재계 1위 기업의 명성을 되찾는다. 삼성의 질주가 한창이던 이 시기 호암은 일개 기업의 성장에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신세계백화점과 고려병원을 설립하고 동양라디오·동양TV·<중앙일보> 등 중앙매스컴을 통해 언론문화 창달에 기여한 시기도 1960년대다.
1965년에는 사재 10억 원을 기증하는 등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해 축적된 부의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1961년 호암은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의 전신)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경제인들의 상호 이해를 도모하기도 했다. 4·19 이후 계속된 혼란으로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국민이 생활고와 물자 고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정부와 공동 협력을 모색하기 위한 창구로 기업인 단체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이처럼 1960년대는 호암 개인에게나 한국경제사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시기다. 한국에 선진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기업가’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일본 자본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1840~1931)는 호암과 곧잘 비교되는 인물이다.
‘칼’이 지배하던 에도(江戶)시대를 마감한 일본이 문호를 개방하고,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본격적인 자본주의 길을 걸은 것은 우리보다 100여 년 앞섰다. 에도 막부 말기 치아라이지마(현 사이타마현)의 농업과 상업을 겸하던 집안에서 태어난 시부사와는 1869년 메이지 정부의 조세국장·구조개혁국장을 맡아 일본의 조세·화폐·은행·회계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했다.
그러던 시부사와는 1873년 33세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실업계에 투신한다. 일본에서 처음 주식회사 제도를 도입한 시부사와는 미즈호은행·도쿄가스·도쿄해상화재보험·태평양시멘트·데이코쿠호텔·지치부철도·도쿄증권거래소·기린맥주·세키스이건설 등 500개의 기업 설립에 관여해 일본 ‘최초’의 사업과 제도를 수없이 벌여 나갔다.
시부사와는 자본주의 체제에 공자의 윤리관을 적용한 선각자였다. 부와 도덕이 일치되었을 때만이 진정한 부를 쌓을 수 있고, 그 부가 장기적으로 사회에 환원될 때 개인·사회·국가가 함께 번영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가졌다.
유학자 집안에서 자란 호암 역시 도의사상을 기본으로 40여 년의 기업 활동 동안 “인류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업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훗날 ‘이병철’이라는 한국의 기업인은 100년을 앞서 나간 자본주의 스승 일본을 극복하고 도전해 결국 이겨내는 신화를 창조했다.
▲ 1. 삼성물산 발기인들 및 주변 친지들과 함께(1955년) 2. 제일합섬 구미공장 건설현장을 시찰하는 이병철 회장(1973)
1970년대, 기술자립시대 개막
1970년대 한국경제는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과 스태그플레이션 등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경제적 고초와 시련을 겪었다. 이런 악재에도 제3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기간인 1972~76년 GNP의 연평균 성장률은 9.7%로 높은 성장을 기록했다. 이 시기 호암이 역점을 둔 분야는 전자와 중화학공업이었다.
전자공업의 기술자립시대를 개막한 것이다. 1950년대 중엽에는 설탕이나 섬유제품이 국민에게 필수불가결한 데다 수입대체효과가 컸기 때문에 소비재 위주의 투자를 했으나 1970년대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또 다른 진보적 산업군을 찾은 것이다. 1969년에 설립한 삼성전자는 ‘이코노 TV’의 개발과 양산, 컬러TV의 자체개발 등으로 1970년대 들어 세계적 종합전자 메이커로 성장한다.
삼성전관·삼성전자부품·삼성코닝은 모두 1970년대 설립한 전자업체다. 1975년 삼성물산이 종합무역상사 1호로 전환하면서 삼성그룹의 수출 창구를 일원화해 시장 다변화에 참여한 것도 전자공업 활성화에 불을 붙였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조선을 설립한 것도 이 시기였다.
1980년대 들어 호암은 또 한 번 기업인으로서 생애를 건 일대 비약을 시도한다. 반도체·컴퓨터 등 첨단 기술 산업에 미래를 걸기로 한 것.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수출과 수입대체산업으로 축적한 산업기술을 토대로 첨단 기술에 과감히 투자하기로 결심한다.
1983년 10월 삼성전자 내에 반도체, 컴퓨터 사업팀을 조직했고, 1984년 5월엔 삼성반도체, 통신기기 및 VLSI 공장을 준공시키며 기술입국 시대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1986년 6월27일 호암이 삼성종합기술원 기공식에서 밝힌 의지를 보자.
“과학기술은 지식과 힘의 결합이며, 미지의 경지, 그리고 더 높은 정상으로 인간을 이끌어주는 무한탐구의 세계다. 영원한 기술 혁신과 첨단 기술 개발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야말로 자원빈국인 우리나라가 살 수 있는 길이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융성을 약속해 준다.”
호암은 유전공학에도 정성을 쏟아 인터페론 대량생산 기술 개발, 인공 감미료 아스파탐 개발 등에 공헌한다. 21세기를 겨냥한 항공·로봇산업과 첨단 정보산업, 첨단 의료기기 분야, 소프트 산업 개발에도 끝없는 채찍질을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시대를 앞선 프런티어 정신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닛케이비즈니스>지는 몇 년 전 과거 100여 년간 일본 100대 기업의 흥망을 연구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기업의 평균수명은 30년 정도라고 밝혔다. 1970년 <포천>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중 약 3분의 1은 겨우 13년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삼성그룹은 2010년 창립 72주년을 맞았다.
호암이 쌀 300석을 밑천으로 시작한 삼성상회는 호암이 작고한 1987년 11월 당시 37개 계열기업에 외형 14조원의 국내 최대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다. 작고한 지 23년여가 지난 지금 삼성은 2008년 말 기준 자산규모 318조원(금융기관 포함), 매출액 191조 원를 기록한 글로벌 기업 ‘삼성’으로 천문학적 성장을 했다.
이 거대 그룹이 몸집만 큰 공룡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 기업으로 진화해간 내면에는 호암이 심은 창업정신과 시스템이 흐른다. 1953년 제일제당 설립부터 1987년 11월19일 서거까지 30여 년간 호암의 경영사는 마치 영국의 산업혁명기와 같은 대격변을 겪었다.
그가 세운 삼성은 경공업 중심에서 첨단 산업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거쳤다. 1970년대 후반기에는 제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그룹의 성장률이 다소 둔화했으나 호암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 시기에 삼성반도체를 비롯한 신사업에 착수했다.
▲ 생전 용인 한옥에서
인재 제일주의로 신인류 ‘삼성맨’ 창조
1957년 국내 기업 최초로 공채 제도를 도입한 삼성은 은행이나 관직으로 몰렸던 한국의 인재들을 기업으로 끌어 들이는 전초 역할도 했다. 1960~70년대 ‘삼성’은 젊은이들이 미래를 걸어 보고 싶은 기업 1순위로 떠올랐다. 삼성이 만든 설탕을 먹고 자란 세대가 평일에는 제일모직에서 나온 양복을 입고 회사에 출근하고, 주말에는 신세계백화점에서 쇼핑했다.
삼성은 당시 이미 한국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삼성이 그룹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1970~80년 10년간 삼성그룹의 자산은 41%, 매출액 48%, 인력은 50% 증가했다.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는 시 <가지 않은 길>에서 “나는 남들이 덜 간 길을 택했고 /그것이 모든 차이를 만들었구나.”라고 노래했다.
시대를 앞서 간 호암의 신사업 도전은 바로 이 시가 상징하는 ‘프런티어 정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암이 선택한 경영이념은 사업보국·인재제일주의와 경쟁을 통한 합리 추구였다. 호암은 이 중에서도 기업을 성장시키는 제일 조건은 ‘인재’라고 생각했다.
인재교육에 앞장서 ‘삼성맨’(Samsung Man)이라는 신인류를 창조했고, 한국적 기업의 정서를 뛰어넘는 철저한 실력주의를 바탕으로 국내 최초 공개채용제도를 실행에 옮긴 것도 이런 이유다.
사업보국·인재제일·합리추구라는 창업주의 경영이념은 2세인 이건희 전 회장에게 계승돼 ‘인간존중·기술중시·자율경영’으로, 삼성 정신은 ‘고객과 함께, 세계에 도전, 미래 창조’로 진화했다. 호암은 비록 20세기를 살다 갔지만 그가 정착시킨 삼성의 유·무형 시스템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21세기 기업경영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 커버스토리 다시, 호암처럼! 왜 지금 ‘그’를 기억해야 하는가?
커버스토리 다시, 호암처럼! 왜 지금 ‘그’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0년은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호암이 태어난 1910년은 한일병탄이라는 치욕의 역사가 이루어지던 해였다. 호암은 불굴의 창업정신으로 시대와 역사의 굴곡에 도전하며 ‘삼성’이라는 일류기업의 토대를 닦았다. 삼성이 걸어온 길은 한국경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암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3월1일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한 후 1987년 타계할 때까지 반세기 동안 37개 기업에 이르는 산업을 일으키며 국가경제 발전의 주역을 담당했다. <월간중앙>은 호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금도 면면히 흐르는 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DNA를 추적하고, 한국경제와 한국기업이 나아갈 길을 물었다.
2010년 숫자로 본 삼성그룹(2008년 말 기준)
매출액 : 191조원
순이익 : 11.7조원
총자산 : 318조원
총투자 : 27조원
종업원 : 17만 명(해외 포함 27만 명)
그룹 내 박사 수 : 4865명
삼성그룹 계열사 : 64개
직수출 : 799억 달러
대한민국 전체 수출 비중 : 18.9%
시가총액 : 192조원(상장사비 23.2%, 2009년 8월 말 기준)
해외 거점 : 68개국 477개 사무소 및 지법인
월드베스트제품(세계시장 M/S기준) : 21개 제품
호암 창업연보
1910. 2. 12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723번지에서 출생
1936. 3. 마산 협동정미소 창업
1938. 3. 1 삼성상회(대구시 수동) 설립(무역·제분업)
1948. 11. 삼성물산공사 설립(서울 종로2가 영보빌딩)
1951. 1. 임시수도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 설립
1953. 8. 1 제일제당 설립
1954. 9. 15 제일모직 설립
1958년 안국화재 인수
1961. 8. 16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 초대 회장 취임
1963. 2. 26 동양TV방송(주) 설립
1963. 7. 15 동방생명 인수
1964. 8. 27 한국비료 설립 및 사장 취임
1965. 2. 4 삼성문화재단 설립 발표(사재 10억원 기증)
1965. 9. 9 삼성문화재단, 성균관대학교 인수
1965. 9. 22 <중앙일보> 창간
1965. 12. 3 성균관대 이사장 취임
1966. 5. 19 고려병원 설립, 대구대학 양도
1969. 1. 13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 설립
1971. 9. 15 삼성일렉트릭㈜ 설립
1972. 7. 1 제일합섬 설립
1973. 1. 17 제일기획㈜ 설립
1973. 12. 20 삼성코닝 설립
1974. 7. 10 삼성석유화학 설립
1974. 8. 5 삼성중공업㈜ 설립
1975. 5. 12 삼성물산, 종합무역상사 제1호로 지정
1976. 4. 17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개장
1977. 2. 8 통일건설을 인수해 삼성종합건설(주)로 상호 변경
1977. 8. 1 삼성정밀공업㈜ 설립
1977. 10. 18 삼성해외건설㈜ 설립
1977. 12. 5 삼성GTE통신㈜ 설립
1977. 12. 30 한국반도체 인수
1978. 3. 2 한국반도체, 삼성반도체로 상호변경
1978. 5. 29 용인 동방연수소 개원
1978. 9. 26 의료법인 고려의료재단 설립
1979. 3. 8 호텔신라 개관
1982. 2. 3 삼성라이온스 프로야구단 창단
1982. 4. 22 삼성문화재단 호암미술관 개관
1982. 6. 24 용인 삼성연수원 개원
1983. 6. 27 삼성시계㈜ 설립
1984. 4. 20 삼성의료기기 설립
1985. 1. 22 삼성유나이티드항공 설립
1985. 5. 1 삼성데이타시스템주식회사 설립
1986. 7. 1 삼성경제연구소 발족
1987. 3. 24 삼성항공, 삼성항공우주연구소 설립
1987. 10. 2 삼성종합기술원 개원
1987. 11. 19 타계
호암이 만든 ‘제1호’
공채사원모집(1957년) 한국적 정서를 탈피해 국내 최초로 필기시험과 인성면접 통한 공채제도 도입. 시험 장소는 서울 성북구 종암동 서울대 상대 강당. 최종 합격자 27명에 500여 명이 몰려 약 2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면접시험은 반도호텔 5층에 있던 삼성물산 본사에서 임원들의 1차 면접과 이병철 회장의 2차 면접으로 진행됐다.
당시만 해도 상경계 졸업생들이 입사시험을 치를 수 있는 곳은 은행과 부흥부에서 주관하는 정부기관 한두 곳뿐이었다. 은행에 연고가 없으면 시험을 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시절이어서 삼성의 공개모집은 큰 관심을 끌었다. 비서실(1959년) 호암은 실질적으로 비서실을 통해 그룹 산하 모든 회사를 직·간접적으로 조정했다.
그룹 내 계열 회사의 모든 정보는 비서실에서 집계해 호암에게 보고됐고, 호암의 지시도 비서실을 통해 전달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전략기획실로 이름이 바뀌는 등 시대에 맞게 변해가다 2008년 50년간의 역사를 마감했다. 종합상사(1975년) 1975년 삼성물산이 국내 종합상사 1호로 지정돼 1970년대 수출을 주도했다.
이어 대우실업·쌍용·국제상사·한일합섬·효성물산·선경·반도상사·금호실업·삼화·현대종합상사·율산실업 등 12개사가 종합무역상사 지정을 받았지만 이후 과다한 경쟁에 따라 율산·삼화·한일합섬 등 3개사는 탈락했다.
호암 이병철 회장 어록
■ 기업가에는 기업 육성이 애국의 길이다. <1976. 6. ‘재계회고’(서울경제신문)>
■ 사업에 좌우(左右)되지 말고, 사업을 좌우(左右)하라.
■ 三利가 있으면 반드시 三害가 있다.
■ 교만한 자치고 망하지 않은 자 없다.
■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
■ 사업에는 지름길이 없다.
■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논어>다.
■ 어떤 인생에도 낭비란 없다. <1986. 호암자전>
■ 인류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업만이 발전할 수 있다. <1975. 9. 17. ‘최고경영자와 대화’(내외경제신문)>
■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간다. <1985. 4. 22. KBS 대담>
■ 성공의 세 가지 요체는 운(運)·둔(鈍)·근(根)이다. <1972>
■ 믿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 <1983. 4. 28 비서실회의에서>
■ 시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판단이다. <1977. 1. 1. 신년사에서>
■ 일정한 선을 넘어선 부는 내 것이 아니다. <1971. 2. 사장단회의에서>
■ 10년 후를 내다보면 지금도 늦지 않다. <1978. ‘재계의 거목 이병철’에서>
■ 내가 버는 돈은 결국 국가 재산이다. <1985. 4. 22. KBS 방송 대담에서>
■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1986. 6. 27. 삼성종합기술원 기공식에서>
■ 기업가야말로 오늘날의 영웅이다. <1985. 4. 22. KBS 대담에서>
■ 남을 살려야 자기도 산다 .<1984. 8. 26. 일본 <요미우리신문> 기고문에서>
■ 돈만 벌려고 반도체를 한 것이 아니다. 반도체는 국가적 사업이고 미래 산업의 총아다. <1982. 11. 1. 반도체회의에서>
■ 삼성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 <1983. 12. 5. 비서실 회의에서>
■ 백년지계는 사람을 심는 데 있다. <1982. 4. 2. 보스턴대학교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기념강연에서>
■ 발전이 멈추면 그것이 곧 죽음이다. <1976. 6. ‘재계회고’(서울경제신문)에서>
■ 인간사회 최고의 미덕은 봉사다. <1987. 1. 7. <매일경제신문> 기고문에서>
http://news.joins.com/article/692/3949692.html?ctg=1100 박미숙 월간중앙 기자 splanet88@joongang.co.kr 2010.01.02 11:0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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