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 시대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2010. 2. 19. 11:40職業

[ESSAY] 융합 시대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 김미경 KAIST 경영대학원·의과학대학원 교수·의학박사·미국 변호사

의사를 그만두고 미국에서 법대를 다녔다.

피를 토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법률가의 눈으로 의학을 접하면서 의사 시절 몰랐던 면들을 깨닫는다.

다채로운 삶에 감사할 따름이다.

최근 들어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내 연구실로 찾아오는 학생들이 부쩍 늘었다. 심지어 다른 대학 학생들까지 찾아온다. 내가 한국에서 전문의로 15년간 일한 뒤 미국에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딴 경력 때문인 것 같다. 의사이자 프로그래머, 벤처기업가였던 안철수 교수가 내 남편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융합은 서로 다른 두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연결 고리를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융합분야에 도전하는 것은 많은 사람의 꿈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새롭게 학교에 다니는 것에는 이러한 과정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위험이 있다.

우선 융합이 아니라 새로 전공한 분야로 밀려가게 될 수 있다.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은 한번 쌓아놓았다고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노력과 현장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금방 뒤처지게 된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수준으로 떨어져 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새로 시작한 분야만 계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의사를 그만두고 미국에서 법대를 다닐 때, 미국과 일본에서 의학 관련 자문 의뢰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법대 공부도 벅차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법대를 졸업하고서 스탠퍼드 의대의 자문교수로서 예전 전공했던 분야의 발전한 기술과 응용 분야를 따라잡는 데 3년이 걸렸다.

지금까지 고생해서 쌓았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에, 시간적·경제적· 심적인 부담이 매우 크다. 아무런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밑바닥부터 다시 다져야 했고, 사람 네트워크도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으며, 나이 들어 공부하다 보니 너무 힘들어 피를 토하기도 했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많은 고생을 하고 졸업하고서 융합 분야의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더라도, 사회적인 보상에 실망할 수도 있다. 의대와 법대를 모두 졸업하면 기회가 많을 것 같지만, 아직 국내에서의 현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의대에서는 기왕에 뽑을 사람은 의대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지, 의대 일 절반, 법대 일 절반을 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법대에서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융합분야는 각 분야에 맡기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대학 총장, 기업체 사장과 같은 최고 책임자가 비전과 신념을 가지고 추진해야만 융합적 인재가 모이고 일이 시작될 수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경우가 많지 않은 편이다. 고생해서 두 분야의 학위를 받더라도 오히려 더 자리를 찾기 힘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융합적 인재가 되기 위해 꼭 다시 학교에 다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스탠퍼드 법대 지도교수였던 행크 그릴리(Hank Greely) 교수는 과학이라고는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생명과학 분야와 관련된 이슈들에 관심을 가지고 일하다 보니 틈틈이 공부를 하고 강의를 들으면서 전문지식을 쌓았다. 나중엔 의사나 생명과학자와 전문적인 대화를 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은 스탠퍼드 법대에서 법과 생명과학센터(Center for law and the biosciences)의 소장이며 의대 유전학교실의 명예교수다.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2006년 노벨 의학상을 받았던 스탠퍼드 의대 앤드루 파이어(Andrew Fire) 교수도 자신이 출원한 특허의 법률적인 부분들을 법률가들과 같은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법대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융합을 잘하기 위해서는 다시 새로운 분야의 학교에 다니지 말고 하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은 학생이 자기의 미래 진로와 융합 분야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균형 잡힌 시각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쓰게 됐다.

두 가지 전문 분야에 익숙하기까지의 과정이 비록 힘들고 고생스럽지만, 보람이 큰 것이 사실이다. 의학과 법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세 가지 분야가 생겨난다. 생명과학의 지적재산권 분야, 생명과학과 의과학의 윤리 분야, 의료 소송 분야가 그것이다. 이러한 분야들은 어느 한 쪽만 아는 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분야다. 나는 두 분야의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는 근무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누가 시키기 때문에 일을 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법률가의 눈으로 의학기사나 논문을 접하면서, 의사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들을 깨달을 때마다 다채롭고 풍요로운 삶에 감사할 따름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18/2010021801719.html?Dep0=chosunnews&Dep1=hotnews&Dep2=news02 입력 : 2010.02.18 23:09 / 수정 : 2010.02.19 01:54

[女세상의 중심] 15년 의사생활 접고 KAIST서 법학 가르치는 김미경 교수

신혼 달콤함도 못 누린 남편과 가족으로 사는 기쁨 누리려 스탠퍼드大 교수직 마다했죠.

대학에서 두 사람은 `철수와 영희`라고 불렸다. 함께 밥을 먹고, 서로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주고 공부를 하며 항상 붙어 다닌다고 붙은 별명이었다.

대학 1년 선후배로 만나 결혼에 골인하자 남편은 군의관 복무를 위해 진해로 떠났다. 남편이 회사를 세워 서울에 있을 때 아내는 의대 교수로 천안에 있었다. 남편이 미국 펜실베이니아大 MBA로 유학을 떠났을 때 아내는 교환교수로 캘리포니아에 있었다.

부부에게는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이처럼 드물었다. 김미경 카이스트 교수(47)가 스탠퍼드大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국내로 돌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남편 안철수 KAIST 석좌교수(48)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가족으로서 함께 사는 게 중요했어요. 같은 학교에 있게 되면서 요즘은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제외하곤 매일 만나죠." 가족과의 평범한 행복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그녀가 왜 남들은 한 번 가기도 힘든 길을 두 번씩이나 걸었을까.

◆ 뭐든지 남보다 늦었다는 `공부의 신`

기자를 기다리는 카페에서도 김미경 교수는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영어로 적힌 두꺼운 논문에 코를 박고 주위 사람의 인기척도 잘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운동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 그저 무언가를 읽고 공부하는 게 `자신의 삶`"이라고 했다. 서울大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그녀에게 `공부의 신`이 된 비결을 묻자 "저는 그리 똑똑한 편이 아니에요. 뭐든지 남보다 느려서 처음부터 무언가를 잘 해본 적이 없어요. 곰처럼 우직하게 따라잡는 편이었죠."라고 고개를 젓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은 의대를 떠나 `안철수 연구소`를 세웠지만 아내는 병원에 안착했다. 병리학 의사로 15년간 순탄한 길을 걸었다. `의약분업`으로 병원이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섰을 때 그는 문득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로서 사회적인 판단 앞에 갈팡질팡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장기이식의 윤리문제, 의료사고도 마찬가지였다. 병리학 의사로서 지식재산권이나 특허법, 의료법 등 법문제와 부딪힐 일도 많았다. 의사로서 궤도에 안착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려면 더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2년 의사가운을 벗어던지고 미국 워싱턴大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만학`이 만만할 리 없었다. 수업이 끝나는 순간 복습이 시작됐다. 다음 수업시간 전까지 수업준비 자료를 다 읽어야 했다. 피를 토하는 날도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놓지 못했고 잠을 자지 않으려고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다. 나중에는 어디서 커피를 마시면 잠이 가장 덜 오는지를 알게 될 정도였어요." 2학년이 되자 조금씩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고 논문 공모에서 상을 받아 출판까지 이어졌다. 스탠퍼드大에서 특별연구원으로 초청받은 것도 그 덕분이었다.

◆ 의학도와 법학도의 접점에서

커피 한 잔을 시키면서도 단 것은 빼달라며 건강을 염려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의사의 모습이다. 말을 하면서도 문장이 흐트러지지 않는 정확한 어법은 법률가의 언어였다.

그녀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메소포타미아 법전에서 시작한 오래된 학문이라는 점, 자격이 있어야 하고 사회를 위해 일하고, 나이가 들수록 무르익어 잘하게 된다는 점에서 의학과 법률은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힘든 공부를 겪어냈지만 법률가의 눈으로 의학을 보게 되면서 그녀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융합`의 시대인 만큼 의학과 법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분야가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 생명과학에는 지식재산권이 필요해졌고, 의과학에는 윤리가 필요해졌다.

KAIST는 의대도 법대도 없는 학교였다. 그래서 그녀가 계속 융합학문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술경영대학원에서 창업자를 위해 비즈니스 법과 지식재산권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로스쿨에서 맞은 두 번째 방학 때 연방법원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만난 여자 판사는 휴가 때에는 아프리카 보츠와나 같은 신생국의 법체계를 만드는 일을 도왔다.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휴가시간을 봉사활동으로 보내는 모습을 통해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법률가의 삶을 배우게 됐다. "제 나이에 제가 할 수 있는 일보다는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요."

◆ 엄마로서, 아내로서, 교수로서…

매일 아침 7시 30분까지 병원에 가야 했던 엄마는 소풍가는 딸에게 버스 밖에서 손 흔드는 일도 해주지 못했다. 딸에게 너무 미안해 그녀는 언제나 딸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했다.

단국대 의대 교수로 천안캠퍼스로 출퇴근할 때 조교실에 맡겨 두면서까지 딸을 데리고 다녔고 미국에선 학교를 마친 딸과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을 두고 2008년 한국에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떨어져 지내게 됐다.

딸은 바쁜 부모를 원망하기보단 이해해줬다. 그녀는 "아이가 원하는 부모는 단지 헌신적인 부모만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어느 때부터인지 딸은 엄마가 보통 아줌마이기보단 사회인으로서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기를 원했어요. 고마운 일이죠."

유명한 남편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부부의 인생 궤적은 닮은꼴이다. 남편은 의대를 떠나 컴퓨터를 고치기로 결심했고 아내는 의대 교수직을 던지고 법을 공부하러 떠났다. 그녀는 "남들이 보기에는 남편이 느려 보일지 몰라도 생각이 정리되면 돌아가는 법이 없다"면서 "의학을 그만둘 때도 그랬는데 어찌 보면 저도 비슷하다"고 했다.

인생도 말투도 닮아가는 동무 같은 부부는 함께 집에 있을 때는 각자 공부를 한다고 했다. "저도 대학 다닐 때는 영화도 보고 했는데 요즘은 그저 공부만 하게 되네요. 하하."

주말이면 두 사람이 책을 읽고 있는 심심한 가정이 그려진다. 부부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가볍지만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은 명석한 공과 대학생들에게 창업과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아내도 그들에게 법적인 방패를 마련해주고 있다. 두 사람은 말투처럼 느긋하지만 묵직한 새로운 길을 내딛는 중이다. 대한민국에는 꼭 필요한 발걸음이다.

■ She is…

1963년생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15년간 병리학자로 일하며 성균관대 의대 삼성의료원 부교수로 재직했다. 2002년 미국 시애틀 워싱턴大 법대에 입학했다. 2005년 졸업 후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스탠퍼드 법대 특별연구원으로 2년간 `생명과학과 법 센터`에서 일하며 스탠퍼드 의대에서 조교수 겸직 발령도 받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8년부터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ㆍ의과학대학원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http://news.mk.co.kr/v2/view.php?sc=40000008&cm=_오늘의%20화제&year=2010&no=125399&selFlag=&relatedcode=&wonNo=&sID=402 김슬기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2010.03.11 16:53:38 입력, 최종수정 2010.03.11 2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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