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31. 11:20ㆍ文化
진중권, 미학 오딧세이 2, 현대예술의 특징인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과 개방성
슈톡하우젠의 「피아노곡 제11번」은 재미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말하자면 커다란 악보에 일군의 악구(樂句)▖들이 제시되어 있어 연주자가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마음대로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연주자는 미리 제시된 악구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곡을 일단 시작한 뒤 계속 악구를 선택하면서 곡을 이어나가야 한다. 이렇게 연주자가 자유로이 이 악구들을 몽타주▖할 수 있으므로 연주할 때마다 그 곡은 상이한 악구들의 콤비네이션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연주자는 폭넓은 곡 해석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조형예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탈리아 카라카스 대학의 건축과는 “매일 새롭게 발명해야 하는 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건 이 학과의 강의실 벽이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어 학생들이 그날그날 벽을 움직여 건물의 내부를 새롭게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의 건물 구조가 어때야 하는지는 강의 내용이 결정한다. 그날 다루어지는 건축학적 문제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건물 구조는 그날 강의 내용에 가장 알맞은 형태로 다시 지어진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는 한 권의 ‘책’을 쓰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다. 사실 이 책은 원래 그의 창작 생활의 목표일 뿐 아니라 세계 자체의 목표로서 완성이 될 예정이었다. 만약 이 책이 완성되었더라면 온 세상이 그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뻔 했는데 다행히 그가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그 대담한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그 초안이 남아 있어 우린 그가 이 계획을 어떻게 실행에 옮기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원래 ‘책’은 움직이는 건축물이 될 예정이었다. 말하자면 ‘책’ 속의 페이지들은 정해진 순서를 갖고 있지 않아, 독자는 ‘환입(換入)’의 규칙에 따라 마음대로 그 순서를 바꿀 수 있다. 그러면 한 권의 책에서 거의 천문학적인 숫자에 가까운 조합의 가능성이 생긴다. 비록 환입의 가능성이 통사론적으로 제한된다 하더라도 거기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의미한 배열순서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책 읽기는 마치 한 조각 한 조각 퍼즐의 그림을 짜 맞추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 단, 이 경우에 미리 완성된 단 하나의 그림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몇 개의 퍼즐 조각에서 예상할 수 없는 수많은 그림이 나올 수 있다.
「장미의 이름」의 저자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는 여기에서 현대 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본다. 말하자면 현대 예술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작품의 완성을 독자의 손에 맡기는 데 있다. 오늘날의 예술에선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에 문을 열어놓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제 예술 작품은 완성품의 형태로 독자에게 배달되지 않는다. 현대 예술은 열려 있다. 이런 특징을 에코는 ‘개방성’이라고 부른다. 열린 예술 작품은 더 이상 일률적으로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독자는 작품 속에 들어가 작품을 스스로 완성하는 가운데 거기에서 무한히 다양한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은 ‘움직이는 예술(Kunst in der Bewegung)’이라 할 수 있다.
▖악구(樂句):음악 주제가 비교적 완성된 두 소절에서 네 소절 정도까지의 구분
▖몽타주(montage):영화 필름의 편집. 단편적으로 촬영한 각 필름을 창조적으로 편집해서 의식적인 영화 예술을 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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