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 11:56ㆍ一般
[정민의 세설신어] [169] 심장불로 (深藏不露)
초나라 장왕(莊王)이 즉위했다. 첫마디가 이랬다. "간언은 용서치 않는다." 즉시 국정은 내팽개치고 3년 넘게 주색잡기에 빠졌다. 보다 못한 오거(伍擧)가 돌려 물었다. "초나라 서울에 새 한 마리가 있습니다. 3년을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습니다. 무슨 새일까요?" "보통 새가 아니로구나. 3년을 안 날고 안 울었으니 한 번 날면 하늘로 솟고, 한 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하리라." 오거가 빙긋 웃고 물러났다. 왕은 그 뒤로도 계속 방탕했다. 이번엔 대부 소종(蘇從)이 직간했다. 왕은 화를 내며 죽고 싶으냐고 소리 질렀다. 소종은 초나라가 이대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차라리 죽어 충신의 이름을 얻고자 한다고 대들었다. 초장왕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즉시 주연을 파하고, 그날로 난행(亂行)을 그쳤다. 소종과 오거를 중용했다. 지난 3년간 곁에서 방탕을 부추겼던 자들을 일거에 내쫓았다. 얼마 후 그는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사기'에 나온다.
'매가 서 있을 때는 마치 조는 것 같고, 범이 다닐 때는 병든 것 같다'(鷹立如睡, 虎行似病). '육도삼략(六韜三略)'의 한 구절이다. 나무 꼭대기에 앉은 매는 졸음을 못 이겨 꾸벅꾸벅 조는 것만 같다. 눈앞에 사냥감이 나타나면 순식간에 박차고 올라 전광석화와 같이 낚아챈다. 어슬렁거리는 범은 병들고 굶주려 비실비실 쓰러질 것만 같다. 하지만 먹잇감을 향해 포효하며 돌진할 때는 그 서슬에 산천초목의 혼이 다 빠진다.
고수들은 한 번에 자기 수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깊이 감춰 좀체 드러내는 법이 없다(深藏不露). 하수들이나 얄팍한 재주를 믿고 찧고 까분다. 잠깐은 두드러져도 이내 흔적도 없다. '처음에 처녀처럼 얌전히 있으면 적이 문을 연다. 나중엔 달아나는 토끼같이 하니 적이 막을 수가 없다'(始如處女,敵人開戶;後如脫兔,敵不及拒). '손자(孫子)' '구지(九地)'에 나온다. 상대가 만만히 보도록 유도한 뒤 방심을 틈타 단번에 무찌르는 책략이다. '훌륭한 장사치는 깊이 감춰두어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한다. 군자는 덕이 가득해도 겉보기에는 바보 같다'(良賈深藏若虛,君子盛德若愚). '사기'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의 말이다. 얄팍함을 버리고 깊이를 지니라. 정민 한양대교수·고전문학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31/2012073102793.html 입력 : 2012.07.31 23:28 | 수정 : 2012.08.01 0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