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21. 13:00ㆍ法曺
[횡설수설-허승호] 법관의 양심
원님 재판이라는 말이 있다. 재판관인 원님이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호령하면서 곤장을 치면 죄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배겨낼 방도가 없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더 황당한 재판도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 2조는 ‘피고가 무술(巫術)로 사람을 미혹했으나 증명할 방법이 없을 경우 강에 던져 진위를 판단한다. 몸이 떠오르면 결백하지만 익사하면 유죄다’라고 돼 있다. 단죄 대상인 ‘무술의 미혹’에 비해 법이 전혀 정의로워 보이지 않는다. 중세 마녀재판은 더 무서웠다. 마녀로 지목된 여인을 강에 던져 떠오르면 마녀라며 다시 화형에 처했고 가라앉으면 ‘억울한 죽음’으로 봤다. 이래저래 죽게 돼 있다. 이처럼 재판권을 신령한 존재에게 넘기는 것을 신탁 재판이라고 한다.
▷배심 재판은 순회재판관 제도에서 시작됐다. 시골 마을의 사건은 재판관이 순회하며 판결했는데 재판관이 아무리 현명하다고 해도 하루 이틀 만에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해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재판관은 마을에 도착하면 일정 수의 주민을 무작위로 뽑은 후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그들이 일치해 말하는 사실을 근거로 판결했다. 배심제는 유력자를 편드는 재판부가 비상식적 판결을 하려 할 때 좋은 견제수단이었다. 하지만 삼성전자-애플의 특허분쟁처럼 배심원의 이웃과 외지인이 다투거나, 배심원이 다툼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들에게 재판을 맡기면 안 된다.
▷요즘 국내 법원에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판사의 편향성에서 나오는 ‘튀는 판결’이다. 최근 한 판사는 불법 도박 사이트를 개설해 30억 원을 번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라는 이례적으로 낮은 형을 선고했다. 그는 판결문의 상당 분량을 국가의 사행(射倖)사업 정책을 비판하는 데 할애한 뒤 “피고의 죄는 인정되지만 거악(巨惡)을 저지르는 국가가 단죄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며 이렇게 선고했다. 국가는 복권 경마 경륜 카지노 등 각종 사행사업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데 개인이 하면 왜 처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국가의 공익사업과 개인의 사익을 혼동하는 등 여러 가지로 무리한 법리다. 굳이 판사의 소신을 보여주려 했다면 판결 이전에 해당 법률의 위헌 여부를 따졌어야 한다.
▷우리 헌법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양심’은 개인의 독단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인식이어야 한다. 우리 사법제도는 하급심의 잘못된 판결을 상급심에서 바로잡기 위해 3심제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송 당사자들이 치르는 비용과 고통은 크다. 판사의 실력 및 소양 관리는 사법부의 주요 책무 중 하나다. http://news.donga.com/Column/3/all/20130221/53182917/1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기사입력 2013-02-21 03:00:00 기사수정 2013-02-21 03:00:00
[아침논단]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판결
통치권자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우리 법치주의는 1987년경 시작, 하지만 '법치주의 1.0' 단계에선 법의 정신과 취지까지는 못 살펴… 성숙한 '법치주의 2.0' 이루려면 법관의 지혜와 내공이 충만해야
얼마 전 지방법원의 어느 형사 단독판사가 내린 판결이 언론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사건 내용은 피고인이 불법 스포츠 도박장을 개설하여 부당이득 30억원을 취했는데 이례적으로 집행유예라는 관대한 판결을 내린 것이다. 언론의 관심을 끈 부분은 양형(量刑) 이유 대부분을 할애하여 상세하게 설명한 그 논리 구성에 있었다.
도박 등 사행(射倖) 행위를 규제하여 건전한 근로 풍토를 조성할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한다. 그런데 국가는 각종 공적 목적의 세수(稅收)와 특별 기금을 마련한다는 구실로 여러 복권 사업과 경마·경륜 등 사행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나아가 국가는 세수 확보에만 혈안이 되어 국가 주도의 사행 사업 규모를 더 키우려고 한다. 이와 같이 국가 스스로 이미 거악(巨惡)을 범하고 있는 마당에 사인(私人)의 도박장 개설 행위를 중죄(重罪)로 단죄하는 것은 형평성에 반하여 정의롭지 못하다는 취지였다.
이 판결에 대하여 언론은 '튀는 판결'이라느니 '얕은 정의감' '설익은 신조'라느니 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필자 역시 이 판결이 좋은 판결이 되지 못하였음에는 동의하면서도 사법부 내지 법관이 나아갈 길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은 심사숙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역사적인 시각에서 이 판결이 우리나라 법치주의 발전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법치주의란 쉽게 말하여 사람에 의한 지배, 즉 통치권자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진정한 의미의 법치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1987년의 6·29 선언, 그리고 1988년의 헌법재판소 출범 때였다고 생각된다. 그 이전에는 정치권력의 압박에 의한 왜곡된 판결이 드물지 않았고, 정의감으로 이에 저항한 법관들은 불명예 퇴직하였거나 각종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요즈음 심심치 않게 보이는 과거의 판결에 대한 재심(再審) 결정과 이에 따르는 무죄판결은 모두 이러한 오욕을 씻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기본적인 '법치주의 1.0 시대'의 시발점은 1987년경이다.
그런데 법치주의의 실질적인 완성은 끊임없는 진화 과정을 거쳐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어떤 법률이 왜 그와 같이 만들어졌는지, 즉 그 입법 취지를 분명히 밝히고 이에 맞추어 법률 조항들을 해석해 나가는 데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성숙한 '법치주의 2.0 시대'를 향한 기본적인 태도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 판결은 생각의 출발점은 제대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법치주의 1.0에도 이르지 못했던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법의 정신에 대해서는 등한시한 채 법규의 문자에만 얽매여 형식적인 법 해석을 해왔던 것에 비하면 약간 진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근래의 튀는 판결로 비판받아왔던, 억대 내기 골프 사건이나 강기갑 의원의 공중 부양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던 것과는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판결로 국민을 설득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법관의 자질, 즉 내공과 관련된 점이다. 이 점에서는 이번 판결 이유가 국민을 감동시키기는커녕 균형 감각 부족으로 국민을 실망시켰다고 생각된다. 이 판결은 애써 국가의 특별한 지위를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하여 개인과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려고 하였다. 즉 개인과 달리 여러 가지 공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재정 조성 필요성을 과소평가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그 존립과 번영을 위하여 각종 공적인 임무와 함께 권한 역시 부여받고 있음은 부정될 수 없다. 이 점을 간과한 판결 이유는 편향된 시각을 노출한 것으로서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점을 종합하여 보면 이번 판결은 법관이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점을 시사하였다는 면에서는 진일보하였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내공 면에서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도 많이 성숙하여 사회생활 곳곳에서 무엇이 정의인지를 묻고 답을 얻으려는 시도가 잦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 어려움은 법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기간의 농도 짙은 고뇌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지혜이다.
법관의 판결을 받은 국민이 "아하, 그렇구나" 하고 설득되지 못하고 "과연 그러한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면 이는 지혜가 농축되지 못하고 내공이 충만하지 못한 징표이다. 그리하여 이번 판결은 '법치주의 2.0'으로 가는 과정에서 '법치주의 1.2'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다. 법관들의 분발과 더욱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양삼승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영산대 석좌교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3/03/2013030300483.html 입력 : 2013.03.03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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