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복지의 싸움

2013. 10. 15. 13:01經濟

[특파원 칼럼/박현진]미국 사태 본질은 시장과 복지의 싸움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려고 며칠 전 뉴저지 주의 차량국(DMV)을 찾았다. 주민에 대한 서비스가 나쁘기로 악명 높은 기관이지만 이날은 유독 심했다. 오후 들어 늘어선 줄에 지쳐갈 무렵 직원 한 명이 나와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일손이 부족해 일찍 문을 닫는다는 소리에 곳곳에서 아우성이 쏟아졌다.

미용실 마트 등의 점주들을 만나 봐도 요즘 손님이 줄었다고 울상이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연방정부 잠정 폐쇄(셧다운)와 국가부도(디폴트) 가능성에 따른 소비심리 위축을 이유로 믿고 있다. 곧 3주차로 접어드는 미국 셧다운과 현실화될지 모를 디폴트 공포는 미국 사회 곳곳에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현 상황을 ‘가장 재미없고 위험한 치킨게임(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모두 파국으로 치닫는 극단적인 상황)’이라고 부르고 있다. 높아지는 비판 여론에 아랑곳 않고 정치권은 미국 및 세계 경제를 볼모로 꿈쩍도 않고 있다.

한국 국회에서 민망할 정도의 정쟁이 벌어질 때 교본으로 삼았던 곳이 ‘타협 민주정치’의 본산인 미국 의회였다. 그런데 왜 이 지경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을까. 버락 오바마 대통령 및 민주당 진영과 공화당이 물러설 수 없는 혈투를 벌이는 고지는 ‘오바마케어’다.

미국에 온 한국인들이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의료비용이다. 공공 의료보험제도 속에 살다가 보험 없이는 출산에 수만 달러(수천만 원)가 드는 것을 알고 혀를 내두른다. 미국은 조건에 맞는 극빈층과 65세 이상 노령층의 의료보험은 정부가 지원하지만 대부분은 철저히 자기 부담으로 민간 의료보험을 들어야 한다. 이 때문에 3억1666만 명 인구 가운데 10%가 넘는 3200만 명이 의료보험이 없다. 만 65세 미만의 성인 인구로 따지면 5명 중 한 명꼴에 육박한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현실을 깨뜨리겠다고 오바마는 대선공약으로 내걸었고 2010년 3월 의회 다수당이었던 민주당과 함께 ‘오바마케어 법안’을 통과시켰다.

3년 반이 지난 지금 당시 패배를 맛보았던 공화당이 오바마케어에 딴죽을 건 횟수는 미 언론에 따르면 무려 35회다. 이번에도 오바마케어의 축소 없이는 정부 폐쇄를 풀 수도 없고 국가부채 증액 한도 협상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명목상 이유는 전 국민의 의료보험 의무화를 골자로 한 오바마케어 시행으로 국가 재정에서 매년 평균 1760억 달러(약 188조 원)가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든다. 재정 적자에 허덕이는 실정을 감안하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 없지 않다.

하지만 좀 더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이데올로기의 싸움’인 듯하다. 반대론자들은 시장 경제체제에 사회주의 실험을 하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12일 모건 그리피스 공화당 의원(버지니아)은 “1776년 미 필라델피아 독립선언 때 몇몇 반역자들은 미국을 무너뜨릴 공모를 했다. 단기적으로 국가부도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지만 (오바마케어는) 미국 혁명에 버금간다.”고 말했다. 대치 국면의 무게를 알 수 있는 발언이다.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럽도 시장경제와 복지 사이에 심각한 내홍을 겪었고 한국도 기초연금 축소 여부를 둘러싸고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사과하기도 했다. ‘시장경제의 첨단에서 사회주의의 실험’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 어떤 솔로몬의 지혜를 도출해 낼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http://news.donga.com/List/Column/3/04/20131014/58186156/1 박현진 뉴욕 특파원 witness@donga.com 기사입력 2013-10-14 03:00:00 기사수정 2013-10-14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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