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태기(관계+권태기)

2016. 8. 19. 18:52一般

“하루 카톡 500건”… 관태기 빠진 한국

지난해까지 대기업 홍보 부서에 근무했던 김○○(여)씨는 마당발로 통했다. ‘사람이 재산’이란 생각에 와인 모임을 조직하고 애견 관련 사이트도 개설해 활동하며 500여 명의 인맥을 유지했다. 그러다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남자와 결혼하면서 회사도 관뒀다. 김씨는 “하루에 많게는 네 번씩 결혼식에 참석하고 집에 들어왔다가도 상사가 부르면 화장 고치고 뛰어나가던 삶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피곤한 인맥사회… 평균 194명 저장, 대화는 24명

“인맥관리 중요” 90%지만 “인맥 때문에 피곤하다” 70%

지인 많아도 친한 친구 없어… 혼밥·혼술 문화 점점 늘어나

중견 출판기업 영업직으로 일하는 김모(35)씨의 카카오톡 친구는 955명이다. 하루 500건 안팎의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점심 식사는 편의점 도시락이나 컵밥 등으로 혼자 때운다. 김씨는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많이 만나지만 점심시간만이라도 이를 피하고 싶다. 관계 맺는 게 너무 피곤해 결혼도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관계 맺음에서 비롯된 피로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특히 2010년을 전후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급속한 확장으로 사적인 관계 맺기에 가속도가 붙고 광대화하는 과정에서 부작용도 생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온라인·오프라인 구분 없이 폭이 넓어지는 것에 반비례해 관계의 깊이는 얕아지는 ‘관계 확장의 역설(영국의 문화인류학자 던바의 법칙)’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한다.

실제로 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국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5월 25~26일) 결과, 전체 응답자 중 89.8%가 “인맥 관리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70.3%는 “인맥 관리가 피곤하다.”고 말했다. 학력이 높고(대재 이상 74.3%) 자영업자(78.8%)나 사무직(75.3%)일수록 “피곤하다”는 답변이 많았다. 또 조사 대상자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전화번호는 평균 221.6개였으나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15.5%(34.5명)에 불과했다.

관계 확장의 역설… “점심이라도 혼자 먹고 싶다.”

카카오톡 등 메신저에 저장된 평균 194.3명 중 정작 대화는 23.6명과만 나눴다.

이처럼 구성원의 피로감이 크다는 건 8·15 해방 이후 격변기와 현대화 시기를 거치며 공·사 양쪽 영역에서 인맥이 ‘출세의 척도이자 생활의 중심’을 차지했던 사회 패러다임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경고로 읽힌다.

윤○○ 한신대 철학 교수는 “그동안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 사회에선 학연(學緣)·지연(地緣)·업연(業緣)으로 얽힌 사적 관계가 공적 영역을 점유해 온 게 사실”이라며 “그러다 보니 목적 달성 수단으로서의 관계 맺기가 만연하면서 ‘아는 사람’은 많아도 ‘진짜 친구’는 손에 꼽을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김○○ 고려대 사회학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는 순수한 ‘인정’ 대신 목적이 먼저인 ‘인맥’ 사회”라며 “여기에 부정적이거나 상처 받은 사람들이 관계 자체에 염증을 느끼는 ‘관태기(관계+권태기)’를 겪고 있는 셈”이라고 진단했다.

이러한 염증은 관계 줄이기나 관계 끊기로 이어져 ‘혼밥(혼자 밥 먹기)’, ‘혼술(혼자 술 마시기)’ 문화가 퍼지고 있다. 지난해 통계청 발표 자료에 따르면 여가 활동을 혼자 하는 사람은 2007년 44.1%에서 2014년 56.8%로 12.7%포인트 늘었다. 배○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는 “다음달 28일 시행되는 김영란법은 한국이 ‘관계 프리(free)’ 사회로 가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앙일보 종합 1면 http://news.joins.com/article/20472828?cloc=joongang|home|topnews1 ◆특별취재팀=박민제·홍상지·윤재영 기자 letmein@joongang.co.kr 입력 2016.08.19 01:40 수정 2016.08.19 05:02

“지극정성 인맥 관리했지만 결국 남남…남는 건 가족”

30년간 몸담았던 대기업에서 2년 전 퇴직한 윤○○(58)씨는 올해 목표를 ‘가족과 더 많은 시간 보내기’로 정했다. 이달 초에는 십 수 년 만에 처음으로 부인과 단둘이 10일간 전국일주 여행을 했다. 그는 “지극정성으로 인맥을 관리했지만 대부분 소주 한잔 기울이기 힘든 남남으로 변했다. 남는 건 가족”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조사연구팀, 한국 성인 남녀 1000명 전화 조사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례다. 한창 때 학연(學緣)·업연(業緣)을 가꾸느라 가족을 등한시하다가 은퇴 후에야 덧없다고 깨닫는다. 실제로 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신경 쓰는 인맥’을 묻자 20대는 ‘대학·동창·선후배’(53.3%)를 최우선으로 꼽았고, 30~50대는 ‘업무상 알게 된 인연’(38.4%)을 중시했다. 은퇴 후인 60세 이상 응답자가 ‘ 혈연’(39.5%)을 꼽은 것과 비교된다. 우리 사회가 유독 관계로 인한 피로증을 심하게 앓는 이유는 뭘까.

※중앙일보 조사연구팀, 한국 성인 남녀 1000명 전화 조사

◆유독 강한 집단주의

윤○○ 한신대 철학 교수는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개인의 정체성보다 집단의 성취가 우선시돼 집단주의의 경향이 다른 나라에 비해 강하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현대화를 상징하는 고층 아파트와 더불어 이웃 간의 정을 찾기 힘든 ‘분절 사회’로 바뀌었고 그 자리를 학연·업연 등이 대체했다. 이는 지표로도 확인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6 더 나은 삶의 지수’에서 한국인의 ‘커뮤니티’ 지수는 76%로 전체 38개국 중 멕시코에 이어 끝에서 두 번째였다. 이 지수는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에 대한 대답으로 측정했다.

※중앙일보 조사연구팀, 한국 성인 남녀 1000명 전화 조사

◆목적 중심의 관계

우리 사회에선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맥을 잘 관리하는 것 자체가 능력으로 간주돼 왔다. 하지만 목적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계는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게 마련이다.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의 저자인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 교수는 “그동안 ‘인맥이 경쟁력’이라는 믿음으로 목적 중심의 관계를 맺어 왔다. 목적이 사라지면 희미해진다는 걸 깨닫는 순간 허탈해진다.”고 말했다. 10여 년간 해온 사업을 최근 정리했다는 노영길(56)씨는 “치열하게 인맥을 관리해왔는데 정작 은퇴 후엔 마음 둘 곳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인맥 과잉시대 부작용 줄이려면 사라진 공동체, 학연 등이 대체

인간관계 맺기 자체를 능력 간주… SNS로 인맥 넓어졌다 착시 불러

가족의 날, 조기 퇴근의 날 등 개인 시간 보장할 제도 늘려야

◆SNS가 부채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주는 ‘인맥 착시효과’도 피로를 가중시킨다. 배○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는 “SNS 때문에 하루 종일 사람들과 연결돼 있는 것 같은 ‘SNS 인지 왜곡’이 생긴다.”고 말했다. IT 전문가인 박용후 PYH 대표는 지금을 ‘난중(亂衆)의 시대’라고 표현했다. 그는 “알 필요 없는 소식까지 듣게 되고, 내 소식은 불특정 다수의 검열을 받게 돼 피로감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관계 피로증’을 줄이려면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나치로 상징되는 집단주의 국가였던 독일은 제도적 장치를 두루 마련했다. 2013년부터는 퇴근 후 상사가 업무로 연락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국내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있다.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매주 수요일이나 금요일을 ‘가족의 날’로 정해 6시에 정시 퇴근토록 하는 게 대표적이다. 삼성이나 현대차그룹 등 일부 대기업도 일주일 또는 한 달의 하루를 ‘조기 퇴근의 날’로 정했다. 전○○ 서강대 사회학 교수는 “한국 사회는 공적 업무와 개인적인 시간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둘만 제대로 분리시켜줘도 피로감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종합 5면 http://news.joins.com/article/20472869 ◆특별취재팀=박민제·홍상지·윤재영 기자 letmein@joongang.co.kr 입력 2016.08.19 02:26 수정 2016.08.19 02:36

“축 생일” 문자 90통 왔지만, 함께 케이크 자를 친구 없어

○ 건설사 과장인 최모(35)씨는 직장생활 10년차다. 학창 시절 100여 명 안팎이었던 휴대전화 저장 번호는 어느덧 520여 개로 늘었다. 하지만 과거보다 더 외롭다는 게 솔직한 심경이다. 그는 “10년 전 연락 끊긴 선배의 경조사까지 쫓아다닐 정도로 열심히 인맥을 관리했지만 허무함을 느낀다.”며 “생일 때면 축하메시지는 90여 통 쇄도해도 막상 케이크를 같이 자를 친구는 없다.”고 말했다.

넓고 얕은 인맥, 커지는 허무함

경쟁서 살아남으려… 왕따 두려워… 무의미한 대화에도 일일이 응답

SNS 속 인간관계 관련어 톱10 중 ‘무섭다’ 등 부정적 단어가 7개

주말엔 휴대폰 끄고 나 홀로 등산… “관계 스트레스 극복할 에너지 얻어”

법조계 마당발로 손꼽히는 김○(60)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 휴대전화에는 4000여 개의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다. 1988년 변호사로 개업한 뒤 28여 년간 쌓아온 인맥이다. 착실한 인맥 관리로 성공가도를 달려온 김 대표지만 그에게도 고충은 있다. 그는 “인맥이 아무리 넓어져도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는 가족을 포함해 10명 내외”라고 털어놨다.

○ 금융권 대기업 부장인 한모(49)씨는 토요일 오전이면 전화기를 끄고 홀로 북한산에 오른다. 3~4시간 정도 땀을 흘린 뒤 내려와 혼자 밥을 먹고 집에 간다. 주중에 평균 하루 100통 이상의 전화 응대를 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그만의 방식이다. 한씨는 “일주일에 그 시간만이라도 타인과의 연결을 끊고 나를 응시해야 그 다음 일주일을 견디는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관계중심 한국사회에서 관계 맺기에 지친 이들이 늘고 있는 건 깊이보다 ‘넓고 얕음’의 인맥 쌓기에서 오는 피로감 때문이다. 최씨나 한씨 사례처럼 어쩔 수 없이 많은 인맥을 유지하다 보니 과부하가 걸리게 된다. 이는 연구 결과로도 입증된다.

이○○ 중앙대 교수가 2013년 발표한 ‘사회적 연결망의 크기와 우울’ 논문에 따르면 하루에 접촉하는 사람이 50명 이하일 때는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우울함의 수준이 낮아졌다. 하지만 50명 이상 접촉한 경우엔 많이 만날수록 우울함의 수준이 높아졌다. 김○○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맥을 쌓지만 관계 자체에 피로를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관계에서 탈피해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 느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관계 유지에서 오는 피로를 극대화한 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확산이다. 공무원 송모(36)씨는 열심히 참여하는 카카오톡 대화방만 10개가 넘는다. 현재 직장 부서에서부터 동아리, 초·중·고·대학 동기생까지 카톡방을 넘나들며 하루 수십 건에서 수백 건가량 글을 올리지만 늘 초조하다. 송씨는 “대화방에 들어가지 못하면 뒤처질까 하는 걱정 때문에 고민했다. 막상 들어가니 대답을 안 하면 왕따되지 않을까, 대답을 하면 여러 사람 앞에서 실수하지 않을까 부담돼 피곤하다.”고 말했다. 송씨가 가입한 한 단톡방에는 50여 명이 등록돼 있으나 활발히 글을 올리는 이는 서너 명뿐이다.

대학생 이○○(26)씨는 1년 전만 해도 잘 때도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메시지에 바로 응답하기 위해서였다. 이씨는 “대부분 무의미한 대화인데도 일일이 응하다 보니 지겨워지더라.”며 “이제는 단체 알림을 받는 용도로만 메신저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이런 피로감은 SNS 게시글에서도 확인된다. ‘인간관계’와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무섭다’로 조사됐다. 본지가 다음소프트의 SNS트랜드 분석 툴(소셜메트릭스)을 통해 지난 10일까지 한 달간 트위터 글(4만4533건), 블로그 글(7385건)을 조사한 결과다. 10위 안에 ‘힘들다’ ‘스트레스’ ‘심하다’ ‘외롭다’ 등 부정적 의미의 연관어가 7개였다. 긍정적 의미의 연관어는 ‘편하다’ 등 3개뿐이었다.


관계 맺기에 부담을 느낀 이들은 적극적인 ‘관계 끊기’로 나아간다. 프리랜서 번역가인 김모(32·여)씨는 6개월 전부터 카카오톡을 끊었다. 프로필에 “카톡 안 합니다. 전화주세요”라는 말을 적기도 했다. 대학 시절 학생회 임원으로 일하며 사람 만나길 즐겼지만 지금은 여가시간에도 ‘집순이’를 자처한다. 김씨는 “열심히 술 마시며 인맥관리를 했지만 남은 건 상한 몸과 카드빚뿐”이라며 “딱 필요한 사람과만 연락하고 나를 더 자주 마주하기 위해 카톡을 접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종합 4면 http://news.joins.com/article/20472874 ◆특별취재팀=박민제·홍상지·윤재영 기자 letmein@joongang.co.kr 입력 2016.08.19 02:29 수정 2016.08.19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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