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16. 21:35ㆍ姓氏
2015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 2015년 11월 1일 기준으로 실시한 2015 인구주택총조사의 전수집계 결과입니다.
○ 인구
- 2015년 11월 1일 기준 총조사 인구는 5,107만 명, 인구밀도는 ㎢당 509명
- 수도권 인구는 2,527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9.5% 차지
- 1985년에 비해 유소년인구는 518만 명 감소, 고령인구는 482만 명 증가[저출산ㆍ고령화 지속]
- 중위연령은 41.2세로 40대 진입, 전남 고령인구 비율 21.1%로 초고령사회 진입
- 성씨 순위는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순이며, 10대 성씨 순위는 2000년과 동일
- 외국인 136만 명(총인구의 2.7%)이고, 중국계 국적 외국인은 51.6% 차지
○ 가구
- 2015년 11월 1일 기준 우리나라의 총 가구는 1,956만 가구, 수도권에 48.7% 분포
- 다문화가구는 30만 가구이며, 가구원은 89만 명임
- 가구주의 중위연령은 50.8세이며, 여성 가구주 비율은 29.6%로 증가추세
- 일반가구 중 주택유형별 거주 가구 비율은 아파트 48.1%, 단독주택 35.3%로 나타남
○ 주택
- 2015년 11월 1일 기준 우리나라 주택는 1,637만 호, 인구 1천 명당 주택 수는 320.5호
- 전체 주택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59.9%, 공동주택 비중은 74.5%
- 총 주택 중 30년 이상 된 주택은 267만 호(16.3%), 20년 이상 된 주택은 716만 호(43.8%)
- 빈집비율은 세종(20.3%)이 높고, 빈집 중 30년이상된 주택비율은 전남(49.0%)이 높음
** 자세한 내용은 첨부파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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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姓氏) 이야기
전통적으로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나 그다음에 1970년대,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글로 된 성씨는 없었다.
그런데 다문화 사회가 되면서 이주민들이 굉장히 많아지고 귀화인들이 많아지고 필리핀계 아니면 태국, 이런 동남아 여성들의 국제결혼 이런 게 많아지면서 그 사람들이 자기의 성과 본관을 한글로 그대로 옮겨서 적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많아진 것이다.
문: 한자가 없는 성씨는 1507개다. 그러면 한자가 없는 성씨 4075개라고 하셨는데 이건 다 외국에서 귀화한 사람들 성씨인가?
답: 외국에서 귀화한 성씨고 1507개도 원래 본관 조사를 15년마다 한 번씩 한다. 2000년대에는 총 286개였다.
그것보다 15년 전인 85년도에는 이백칠십 몇 개였다. 그것이 정상적인, 우리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성씨의 총합계이다.
그러니까 280개 이상 되는, 그 나머지 것들은 전부 다 외국에서 귀화한 성씨다 이렇게 보면 되겠다.
우리나라가 성씨를 갖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을 하는 경우는 박혁거세, 김알지 이런 사람들 때부터 성씨를 가졌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대체로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6세기까지도 성씨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진흥왕 순수비라든지 이런 금석문에 나오는 자료를 보면 쭉 추출해서 확인해 보면 성씨를 사용한 게 아니라 이두식 이름을 사용했다. 그런 식으로 이두식 이름을 쓰다가 중국에서 한자식 성과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게 7세기 이후다.
문: 그러면 쉽게 얘기하면 이름만 있었던 것인가?
답: 그렇다. 이름만 있다가 나중에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한자식 이름으로 쓰면서 앞의 인물들을 소급해서 갖다 붙인 경우다.
고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각 지역에 토착하고 있는 호족세력들에게 성씨와 본관을 지정해줬다. 그것을 토성분정이라고 한다.
토성이라는 것은 지연적인 의미의 토자와 그다음에 혈연적인 의미의 성자 두 개가 합쳐진 의미이다. 지연과 혈연이 합쳐진 토성.
그러니까 태조 왕건이 토성을 전부 나눠줬다는 것은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서 각 지역에 있는 세력들을 자기의 품 안에 넣기 위해서 사회통합 차원에서 너는 어디에 무슨 성씨다, 너는 어디에 무슨 성씨다 이런 의미이다.
문: 그러면 쉽게 얘기하면 그 지역별로 지배세력들에게 성씨를 줬다고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답: 그렇다. 그러니까 처음부터는 지배세력들이 성씨를 갖게 되고 차츰차츰 확대가 돼서 일반 평민들에게까지 성씨가 확대되는데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나 이럴 때는 보통 백성이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백성이라는 것은 백 가지만이 아니라 다양하다는 뜻이다.
다양한 성씨. 그러니까 고려시대에 성씨를 백성들에게 부여를 해 줄 때 고려의 지배체제에 편입이 돼서 어떤 사회 통합 차원에서, 사회 시스템을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국가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 국가 동원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 성씨를 부여했고 그래서 백성이라는 것은 국가 체제에 이미 편입이 됐다. 그래서 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천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문: 그러니까 백성이라고 칭하지 않는 그런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나중에는 모든 사람이 갖게 됐는데.
답: 조선시대 17세기까지도 성씨를 가졌던 걸 호적조사를 통해서 보면 약 55%밖에 안된다. 그러면 조선후기까지도 45%는 성씨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후기에 가면 양반이 급증한다. 그때에 너도 나도 성씨를 갖기 시작하고 최종적으로 1909년에 민적법이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 나머지 성씨가 없던 사람들도 전부 다 성씨를 갖게 돼서 1909년 이후로는 대한민국, 그러니까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면 모든 사람이 성씨, 본관을 다 갖게 되었다.
우리 성씨의 경향을 보면 생물학적인 계보라기보다는 사회, 문화적인 계보다 이렇게 이해를 해야 된다.
다시 말해 족보가 없던 시절까지 쭉 이어지다가 족보를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하는가 하면 17세기, 18세기 가서 족보를 많이 만들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만들기 시작하니까 그 중간에 여러 가지 계보적인 자료들이 없다. 그래서 박씨들은 전부 다 혁거세로 가서 연결한다든지 이렇게 하다 보니까 전부 왕자의 자손, 왕손밖에 없는 그런 결과가 나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부 다 양반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는 양반사회이기 때문에 양반이든 비양반이든 무조건 양반이 되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그러니까 성씨가 없는 사람들도 성씨를 만들어 넣으면서 양반 족보에 편입이 되었다.
문: 그러니까 족보를 나중에 만들다 보니까.
답: 자연적으로 나도 양반이다 하는 그런 의식이 생기게 되고.
문: 그리고 족보를 나중에 만들다 보니까 비슷한 본관으로 또 많이 만드는 경우도 생기면서 일부 본관의 성씨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인가?
답: 그렇게 봐야 할 것이다. (출처: YTN 발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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